[준쫑] 너 원래 잘생겼어 231003
하 참 나 씨발
약국에서 베노플러스를 샀다.
늙은 약사가 운동을 하느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다. 운동 선수들이 멍을 빨리 없앨 때 많이 찾는 연고라 그럴 것 같았다며 몸 조심하라는 이야기로 말을 맺는다. 계산할 때 말고는 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뭐라도 말을 건네려면 이 때밖에 없기는 했다. 성준수는 영수증과 카드를 돌려 받은 뒤 “감사합니다. 고생하세요.” 하고 출입문을 열었다. 행선지를 고르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마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를 때쯤이면 전화가 올 것이다. 보이스 톡일지 페이스 톡일지는 받아 봐야 알 거고.
개총에서 박병찬이 어느 정도 막아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눈에 띄게 나아지진 않았다. 중학생 때부터 눈깔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저를 갈구는 선배 같은 놈들이 어딜 가나 있었는데 중학교가 대학교로 바뀌었다고 그들이 마법처럼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다. 인사를 하면 인사를 작게 한다고 지랄, 인사를 크게 한다면 시끄럽다고 지랄, 안 하면 안 했다고 지랄, 쳐다보면 뭘 보냐고 지랄, 안 보면 무시하냐고 지랄, 아오 씨발 일 년이나 지났는데 선배는 무슨 씨발 작작 좀 해라 개새끼들아……. 하여간 그 지랄의 대명사들이 기어코 육안으로 보이는 곳에 일을 냈다. 말이 실수지 초등학교 배구 시간에도 안 할 짓이었으나 그 자리에 제 편을 들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성준수는 그냥 묵묵히 제 얼굴을 때리고 밖으로 튄 공을 주워들기만 했다. 그들은 지들이 만든 사태를 혹여나 누군가에게 들킬까 무서워 연기하듯 저를 걱정했지만, 그마저도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싸가지없게 대꾸했으므로 결국 봐 주려야 봐 줄 수가 없다는 혀 차는 소리나 좀 듣고 말았다. 어디 가서 입 털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도 같이 들었던가. 성준수는 알겠다고 대답했으나 그게 지켜질 리는 만무했다. 제가 조용히 있어도 에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물어볼 게 뻔해서다. 캠퍼스를 나오는 동안 무수히 많은 시선들을 마주했으니 이미 올라갔을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혼자 살 목적으로 계약한 오피스텔에 혼자 들어오는 게 익숙해야 할 텐데 아직은 그렇지 않다. 고작 반 년 조금 덜 되었을 텐데도 누군가의 존재가 금방 익숙해졌다는 게 신기했다. 생판 처음 보는 놈이나 이 판에서 이름 좀 들어 본 놈과 오늘 당장 부대껴 살아야 하는 생활에 적응을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경우가 조금 달랐다. 다른가? 솔직히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최종수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속하는 놈이었다. 이 판에서 이름 좀 들어 본 놈. 근데 ‘이름 좀 들어 봤다’는 표현은 조금 문제가 있다. 고등학교 농구 판에서 최종수 이름을 안 들어 본 놈은 공태성 정도밖에 없었을 테니까.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마자 전화가 왔다. 받아 보니 페이스 톡이었다.
「성준수 안녕.」
“어.”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거치대 위에 스마트폰을 올려 놓았다. 제가 산 물건이 아니었으니 최종수가 두고 간 거겠지만, 버리기엔 너무 멀쩡해서 지금처럼 통화할 때나 잠깐 쓰려고 그냥 뒀다. 가방을 대충 던져두고 소파에 반쯤 드러눕자 최종수가 한 템포 느리게 불평했다. 야. 얼굴 안 보여. 대충 안부나 묻자고 전화한 거면서 얼굴 보이는 게 뭔 상관이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성준수는 짧게 혀를 찬 뒤 상체를 일으켰다. 거치대를 이쪽으로 끌고 오면 더 잘 보이겠지만 굳이 하지 않는 이유는 멍 때문이다. 최종수와는 오늘 처음 연락했으니 초장부터 멍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밥 먹기 싫을 때마다 식단 얘기 하는 거 지겨워.」
최종수가 짐을 빼고 미국으로 나른 뒤부터 가장 많이 가져오는 화제는 단연코 음식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이것저것 가려 먹는 것 같더니 미국에선 온통 자극적인 것밖에 없다며 화를 내는 게 신선했었는데 이제는 그 신선함도 다 빠진 상태다. 오늘은 뭘 권유 받았길래 저렇게 질색을 하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같은 학급의 누군가에게 홈 파티를 권유 받았다고 한다. 그 나라에선 흔한 일이지 않나, 까지 생각하다 말고 납득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최종수 취향을 크게 벗어난 음식들만 널려있었을 것이다. 가면 예의상이라도 뭔가를 먹어야 할 테고 최종수라면 최후의 선택지로 술을 고를 게 뻔했다. 타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는데 알코올을 입에 대는 일은 삼가고자 한댔나. 그렇다고 한국에서 술을 마셨던 것도 아닌데 개소리 한 번 재수없게 한다고 생각했었다만, 따지고 보면 음식을 가려 먹는 운동 선수가 되려면 최종수처럼 하는 게 맞다. 그렇게까지 극단적일 필요는 없지만 극단적이어서 나쁠 것도 없어서다. 성준수는 가끔 최종수의 그런 면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대왕 센터 최세종의 아들이라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최종수 본인이 선택한 일이지 않은가.
“뭐 먹고 싶은데.”
「걔 레시피 김치찌개.」
방금 전까지 자극적인 음식은 입에 안 댄다고 설명한 것과 달리 공태성 레시피로 끓인 김치찌개는 최종수에게 아주 호평이었다. 안타깝게도 대용량 음식에 특화된 놈이 써 준 거라 김치찌개를 사흘 내내 먹어야 했지만 똑같은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는 잘 먹었다. 너 원래 한식 좋아했냐? 아니. 그냥 그래. 근데 이건 왜 잘 먹는데? 맛있어. 엄마가 보내 준 김치가 그냥 먹기엔 너무 익었고 버리기엔 양이 많아서 해결책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됐던 건데 그 맛을 아직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다. 보통 남의 나라 가면 그 나라 음식 먹기 바쁘지 않나. 그걸 좀 먹어야 한식 생각이 난다던데 최종수는 그게 아닌가 보다. 뭐 하나 예상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는 놈이다.
“너 한국 들어오면 또 해 줄게.”
「내일 갈까…….」
목소리에 기운이 없는 걸 보니 피곤한 것 같은데 전화는 용케 걸었다. 피곤하면 그냥 자라는 말은 초반에 몇 번 했다가 싸늘한 반응을 얻고 조용히 중단되었다. 피곤해도 어쨌든 전화는 하고 자고 싶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어로 대화하고 싶어서’ 란다. 미국 간 놈이 한국어는 왜 찾는지 원. 그래도 성준수는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좋아하는데 어쩔 수 없지 않나.
최종수가 이 집에 살던 반 년이 너무 빨리 지난 것 같으면서도, 최종수와 반 년은 같이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또 언제는 최종수가 이 집에서 나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튼 존재 자체가 좀 실감이 안 나는 놈이었다. 제일 큰 문제는 그 실감이 안 나는 놈을 좋아한 저에게 있다. 당장 에타에 ‘짝남이랑 반 년 같이 살았는데요 걔 미국 간대서 그냥 보냈어요’ 따위의 글을 써서 올리면 반응이 뜨거울 거라는 자각도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냥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 다음 문제는 그냥 보내 놓고 뭔 사이도 아닌데 영상 통화나 하고 앉아있는 저에게 있다. 아니, 이건 최종수한테도 문제가 있지 않나? 누가 미국까지 가서 한국 대학 다니는 놈한테 시간 맞춰 전화를 한단 말인가? 그걸 굳이 또 받고 있는 나는 뭐냐고?
하…….
「야. 너 얼굴 뭐야?」
속사포 한숨은 질문과 함께 사라졌다. 성준수는 대답 대신 얼굴을 더듬었다. 이게 보인다고?
「야. 얼굴 뭐냐고.」
“뭐긴 뭐야. 멍든 거지.”
「얼굴에 멍이 왜 들어?」
“얼굴에 농구공 맞아 본 적 없냐?”
「없는데?」
말을 말자.
설명하기 귀찮아서 입을 다물었더니 최종수가 말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솔직히 저 얼굴을 화면 가득 보고 있는 건 여러 의미로 마음에 해로워서, 성준수는 괜히 애꿎은 베노플러스를 뜯었다. 통화가 끝나면 바로 바를 생각으로 설명서나 읽고 있는데 최종수가 대뜸 말했다.
「야.」
“어.”
「다친 사람한테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알면 하지 말지?”
「너는 얼굴에 멍들어도 잘생겼다.」
……말을 말자.
통화는 그로부터 5분 뒤에 끝났다. 자기가 생각해도 할 말이 아니었는지 순식간에 사과한 최종수한테 알면 됐다고 답하기는커녕 ‘니가 봐도 잘생겼냐?’ 따위의 말이나 내뱉어서 분위기를 망쳤다. 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이따위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놈이 자려고 누운 침대에서 영문 모를 과정을 거쳐 이상한 결론을 낸 뒤 내일 또 사과할 게 뻔해서다. 그렇게까지 사과를 잘할 것 같지 않았건만 의외로 예의 바르다고 생각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사과를 듣지 않으려고 쇼를 하는 게, 암만 봐도 저를 아는 놈들에게는 들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전영중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박병찬만 알아도 10년은 놀림 받을 것이다. 공태성은 술자리에서 토하고 싶을 때마다 꺼낼 것 같았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서 연고를 바르는 동안 제가 했던 헛소리가 떠올랐다. ‘니가 봐도 잘생겼냐?’라니. 대가리를 깨고 싶었는데 돌아온 답이 더 어이없었다. ‘너 원래 잘생겼어.’ 제 성격상 며칠 뒤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까먹겠지만, 당분간 연고를 바를 때마다 생각나긴 할 것이다.
아무튼 당분간 박병찬과는 거리를 둬야겠다. 헛소리 하는 작태가, 아무리 봐도 그에게서 옮은 것 같았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