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빵준 / 마지막 기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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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칵, 딸칵. 동네 후줄근한 피씨방 안에 여느 때처럼 마우스 클릭 소리가 울렸다. 현란한 키보드 소리까지 곁들인 롤의 클릭소리와는 다른 이 느릿한 소음은, 남고생 여럿이 컴퓨터를 둘러싼 상태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리는 침묵은 기묘하기 짝이 없다. 햄, 아직이에요? 어, 일 분 후··· 1분, 이라는 답이 돌아오자마자 제각각 숨을 토해내는 이 상황. 하얀 화면에 들이밀어 네모낳게 빛나던 얼굴들은 누군가 10초 전이라 외치자 떨린다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으아, 못 보겠다··· 급기야 제 눈을 가려버리며 소리만으로 결과를 판단한다! 라고 허리를 곧추세우는 이도 있었다. 자기들이 더 난리인 무리 중 자세 고정하고 있는 건 가운데에 앉은 두 명. 화면에 띄워진 시계가 정시를 알리자, 둘의 손이 동시에 움직였다.

잠시간의 정적 후, 몇몇이 실눈을 뜬다. 햄...? 떨리는 목소리 너머 보이는 건 환히 비치는 재유의 미소다. 그 얼굴에 합격을 눈치챈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재유햄! 믿고 있었다고요! 고생하셨습니다! 신이 난 목소리들이 떠들썩한데, 옆에서 갑자기 푸우우··· 깊은 한숨 소리가 들으란 듯 흘러나왔다. 일순 헉 소리 하나 없이 소란이 멈춘다. 신경질적으로 인터넷 창 최소화버튼을 클릭한 준수가 의자 드르륵 밀고 일어난다. 그러고선 몇 걸음 걸어나가는 모습에 먼젓번보다 더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든 거다. 설마··· 어느 새 차렷 자세로 기립한 1학년들이 눈동자만 굴려가며 힐끔대는 사이 재유가 천천히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두 손으로 얼굴만 감싸고 있는 준수에게 꽂힌다.

"준수··· 괘안나? 니 와 그러는데?"

조심스레 재유가 준수의 등에 손을 올려놓았다. 요동도 않는 그의 모습에 슬슬 술렁임이 일어나는 건 조금 다른 불안감에서다. 그야, 설마 입시악귀를 한 번 더 보게 될 줄 누가 꿈이나 꿨겠나. 입시를 두 번, 그러니까 재수악귀···? 모두의 머릿속에 스친 그 단어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서리 치는데, 준수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재유가 픽 웃었다.

"야. 니 안 울제."

아니, 울겠냐고? 아무리 두 손으로 얼굴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든 간에, 성준수가 울 수도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재유햄 혹시 미친 거가? 준수햄 개빡친 거 아니면 뭐냐고? 웅성이는 소리 커지는 와중에 준수가 스륵 두 손을 내렸다. 단숨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그 얼굴에는, 분명히 미소가 서려있다.

"아!! 진짜 심장 떨려가 뒤질 뻔했네! 무슨 장난을 그렇게 친대요?"

"방금 지렸음, 뻥 아니고 몇 방울 흘렀음···"

"새끼들이, 오바는···"

전원 벙찐 표정이다가, 그 중 누군가가 황급히 준수 자리에서 인터넷 창을 도로 띄워 큼지막한 합격 글자를 보고난 후에야 분위기가 도로 풀렸다. 죽어도 장난 안 칠 것 같던 그 악귀, 아니 선배가 후배들 마음을 갖고 노네··· 안도의 한숨 들이쉴 시간도 없이 불만 성토와 축하의 말이 마구 번진다.

들어갈 때와는 달리 떠들썩한 수다에 맞춰 피씨방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도 경쾌하다. 기왕 온 김에 게임 한 판 하고 가자는 밉지 않은 볼멘소리에 장난스러운 딱밤 돌아오고, 게임 못하는 사람은 뭐하고 노는데, 나중에 니 혼자 놀러와라···

지상으로 올라오자 겨울답지 않은 쨍한 햇살이 비췄다. 바람이 종종 일었지만 그다지 춥지는 않은, 기분 좋은 날씨. 쌓인 눈 대신 티 없이 맑은 대기에 피어오르는 숨이 새하얗다. 이 날씨에 어디 놀러가야 하는데! 누군가 또 다른 불평을 꺼낸 그 때였다. 맨 뒤의 멤버가 계단을 다 올랐을 무렵. 뒤에서 기다렸단 듯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가는 길 붙잡는다.

"오, 우연이네?"

검은 패딩에 추리닝 바지를 입고선 가게 벽에 살짝 기대 선 전영중은 딱히 놀란 기색 없는 밝은 얼굴이다. 준비한 대사를 뱉어내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는 태연한 작태는 여기가 서울 어드메 경기장이었나, 싶어지기도 하고. 뭐야, 왜 여깄어? 술렁이는 사이에 여태 기분 좋던 준수 반사적으로 쯧 혀를 찼다.

"다들 반응이 왜 이러지? 대학 가기 전에 부산 와서 좀 놀겠다는데. 나는 놀러와도 안 되냐?"

"니도 대학 붙었나?"

"당연히 붙었지. 너도 붙었겠지?"

"어···"

재유가 고개 끄덕이며 머쓱하게 뒷머리 매만진다. 가볍게 눈썹 치켜올리는 영중은 마뜩한 감정 이외에 볼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하더라.

"준수는?"

"당연하지. 병찬햄이랑 같은 대학."

이쪽은 기다렸다는 느낌을 구태여 숨기지도 않는다. 질문과 함께 시선 오자마자 발음 구절마다 씹어서 내놓는 준수는 미묘한 표정이다. 영중은 동요 않고 가볍게 웃으며 넘긴다, 다들 잘됐네. 그러고는 말끝 잇지 않고 별일 없다는 듯 계속 쳐다보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수상한 쪽인 거 같다. 

얼마동안 어색한 정적이 흘렀을까, 다들 이젠 뒤 돌아 갈 길 가는 게 자연스러울지 고민하는 사이 준수가 한 발짝 내딛었다. 무리 헤치고 나와 영중 앞에 서는 모습은 매우 거리낌 없고, 그대로 얼굴에 주먹을 꽂는 흐름까지 물 흐르듯 이어진다. 퍼억, 작정한 듯 울려퍼지는 소리에 영중 고개가 꺾여 올라가는 것까지 마치 연출된 것처럼 자연스럽다. 헉··· 관중들 경악하는 사이 준수가 정확히 영중의 얼굴만을 겨누고 몇 번 더 주먹질을 해댄다. 비틀대던 영중이 중심을 잡으면 패딩으로 둘러싸인 복부에는 살의를 담은 정도의 세기로 무릎을 박아넣고, 반사적으로 허리 굽혀 내려온 얼굴에 또 다시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게 슬로우 모션처럼 관중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야··· 야! 말려! 왜 안 말려!

"준수 쫌만 약하게 해라-."

다들 말리려 반쯤 팔을 뻗었을 때쯤, 또 나선 건 재유였다. 그러니까, 나섰다고 해야 하나···. 못 말린다는 듯 멋쩍은 미소 짓고있는 모습은 오히려 방관자에 가깝다 싶지. 그에 화답하듯 처맞고 계시는 영중도 저항 없이 한 마디 얹는다. 준수야, 어깨랑 다리만 좀 피해주라. 구경꾼들 앞에서 멀대같이 큰 녀석만 일대일로 좆되게 얻어맞는 정의로운 반(反)다구리 현장은 그냥 진짜 우습다. 말로만 패는 줄 알았더니 주먹을 폭격하는 게 요행히 남의 편 아닌 우리 팀 성준수라서 우스운 게 아니라, 만나서 니 밥 먹었냐 묻는 대신 냅다 죽빵을 먹여주는데 그걸 훈훈하게 받아처먹는 전영중 면상까지 봐야 희극이 따로 없다. 

"아~ 얼굴만 골라 갈기는 양아치 새끼다 싶으니까 쓰레기가 따로 없네."

삼쩜슛 적중률 100%로 얼굴 쥐어터져서는 영중이 얼얼한 코를 슥 문지른다. 몇 방울 묻어나온 코피가 번진 형편없는 꼴이 준수에게는 숨 고르느라 안 들어오는 모양인데. 일단은 여기까지라며 뒷말까지 덧붙이는 성준수 뒷모습은 이상하게 개운하다. 쌓인 게 많았겠지만 뒤늦게 웬 소년만화도 아니고, 주먹다짐 후 어깨동무 전개? 한 쪽만 일방적으로 쥐어터진다는 설정은 금시초문이다. 거기다 얼굴만 노린다니 꼴보기 싫은 것도 정도가 있다, 이런 건가. 이번에야말로 죽여드리겠사와요, 이 지랄··· 아, 준수햄한테 얻어터지고 싶나? 눈치 쫌! 뒤에서 시끌한데 당사자들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모양새다.

"우리 싸가지 없는 준수랑 둘이서 얘기 좀 해도 될까? 존나 밟혔는데 그 정도 값은 치렀지?"

처 패기 운동을 했더니 독기가 싹 빠진 건지 준수가 선선히 고개를 주억였다. 아 햄, 살인은 안 됩니다···! 대학 취소될 수도 있다고요! 이럴 때만 식겁해서 팔 잡아끌며 우리 햄 범죄자 못 만든다는 후배 새끼들은 뿌리치고 자연스레 샛길 쪽으로 방향 트는 준수.

"아 안 죽여. ···오래 걸리면 112 신고해라."

농담까지 곁들이는 걸 보면 진짜 오늘이 무슨 날이라도 되는가 보다.

상가 건물 빠져나오니 훨씬 한가한 골목이 펼쳐졌다. 늘어선 아파트 단지 쪽을 따라 침엽수 가로수 줄지어 조성된 거리에는 날씨가 추워서인지 근처에 살 동네 꼬마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 넣고는 말없이 나란히 걷는 둘이 보도블럭 밟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렸다. 인중 건드리려다 코피 더 흐를까 의식적으로 손 거둔 영중이 킁 훌쩍이는 소리가 먼저 침묵을 깬다.

"준수 못 알아볼 뻔했네. 언제 능청이 늘었대, 쿨뷰티 씨?"

"쥐어터져서도 잘만 나불거리네. 혀도 잘라버릴 걸 그랬나?"

"야, 기내초 일진짱 형님 주먹 존나 아파서 옛날 생각 주마등 스쳤다."

이딴 소리 하려고 불러냈냐? 집이나 가라. 초반엔 들어주는 시늉 하려던 준수 헛웃음 뱉고는 걸음 속도 높였다. 발걸음도 느린 게 왜 타지에서 나 미아 만드려고 그래, 꾸며낸 것처럼 사근하게 구는 전영중이 금세 따라붙었다.

"전학 가니까 연락 뚝 끊어놓고. 사적으로는 오랜만 아닌가? 옛날 얘기 좀 할 때 됐지."

그러고는 그 얘기 쭉 이어나갈 것처럼 굴다가, 할듯 말듯 끊어버리는 거였다. 뒤에 더 할 말 없었던 건가? 때려놓고 보니 속 시원하긴 해서 매값으로 따라나와주긴 했는데, 부산까지 내려와서 이러는 이 새끼 속을 영 모르겠다.

"근데 너, 너네 4번 걔랑 편해보이더라?"

"왜 또 시비야." 

"아, 왜 나한테는 틱틱대?"

틱틱같은 소리 지껄이고 있다.

"너 외롭냐? 개소리 계속 씹어댈 거면 니 베개나 끌어안고 하라고."

"준수 손에 공 없다? 공 없으면 말뽄새라도 들어야지, 둘 다 놓으면 너 얼굴 말고 봐줄 게 뭐가 있나?"

아 씨발 진짜. 

근 몇 년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걸 보니 저 새끼가 문제거나 아님 자기가 문제였다. 아니지, 이쪽에선 무시로 일관 중인데 한결같이 아득바득 시비 털려는 저 개자식이 분명 결함이 있는 거다. 중학생 때까지는 멀쩡했던 거 같은데, 떨어지니까 어딘가 돌아버린 싸이코 새끼. 슬슬 뺨에 스치는 찬바람 느껴지고 괜히 왔나 싶은 맘 고개를 든다. 그 고개 돌려 옆의 놈 쳐다보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라 반사적으로 열 뻗치지.

"···야. 부산까지 허겁지겁 내려온 개-새꺄. 니 학교 근처 피방 돌아다니면서 뒤졌지? 우리 나오니까 득달같이 달려오는 거 보면 맞다 아니야? 처맞으면서 빙긋거린 변태 새끼가, 구걸해서 나와주니까 두서 없이 주절대면서 어떻게든 발 묶어두려고 패악질 부리는 거, 불쌍하게 봐달라 이거야? 너 뭐하냐? 너야말로 여기 코트 아니다?"

"어우··· 왜 이렇게 화났어? 그냥 얘기 좀 하려고 쫓아왔는데."

"진짜 쫓아왔냐? 찍은 건데··· 스토커 새끼."

"아하하··· 찍어놓고 그렇게 당당하게 매도하는 거야? 너답다, 야."

누가 들어도 꽤 열받을 도발이었는데, 싱겁게 웃으며 말 빙빙 돌리는 꼬라지 하고는. 준수 실은 먼지만큼이라도 기대가 있었다. 기대라고 한다면 어이 없어도 어쨌든 원래 마주쳤을 때처럼 이죽거리기만 하진 않을 줄 알았단 거다. 생각 없이 구는 놈은 아니니까. 속내는 몰라도 여기까지 왔으니 잠깐 들어주는 척이라도 할까, 싶어 따라나왔을 터다. 그런데 이 새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논점이 그 쪽으로 옮겨가니 오히려 머리가 냉해졌다. 화내는 것도 지친다. 너는 안 지치냐? 그런 속마음이 은연 중에 눈빛에 담겼을지도 모르겠다. 준수가 영중 흘끗 바라봤다.

성격 봐서는 진짜 찍은 게 맞겠지. 아하하··· 영중이 하얗게 피어올라 증발하는 맥 없는 웃음기 바라봤다. 어떻게 알아냈을지 궁리해보는 건 소용이 없다는 것 안다. 얼굴에 태가 났나. 그랬다면 또 어쩔 것이고.

서울에서 합격을 확인했을 때 큰 동요는 없었다. 무작정 되겠거니, 싶었고 실제로 그래서 따라오는 감정도 그다지. 못다한 일이 있는 것처럼 사고가 자꾸 어딘가에 걸리기만 했고, 헛도는 감각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제 졸업하고, 대학을 가는구나. 그런다고 끝은 아니겠지만. 가서도 농구를 할 테고, 어쨌든 성준수와 같은 팀에서 뛰는 것도 아니다. 달라질 것도 없어. 의미 없이 띄워둔 새 인터넷 창에 시선이 가닿았다.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면, 성년이 되면 마법처럼 뭐가 변하기라도 할까? 그렇게 해결이 될까? 하얀 빛에 눈이 시리다. 손으로 빛을 가리자면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는 제 두 손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사람들은 입시가 끝나고 나면 그렇게 속이 시원하다는데.

기차역에서 나와 첫 발을 내딛은 부산은 서울보다 따듯했다. 쌓인 눈 없이 바람만 좀 불길래 껴입은 자신이 좀 민망하기도 했다. 바글바글한 사람들 중에서는 수능이 끝난 고3들도 제법 있는 것 같았다. 친구 여럿에 둘러싸여서, 상기된 얼굴로 뭐하고 놀지 떠드는 말간 얼굴들. 유난히 날씨가 맑던 그 날 햇빛을 받아 산란하는 그 홀가분함에서 영중 조용히 고개 돌렸다.

전날 밤 아무 대책도 없이 잠든 건 아니었다. 분명 흘러넘치는 생각에 몸은 가라앉히고 정신이 하염없이 부유했던 기억이 난다. 톺아보다 보니 장황하고 지난한 어절들이 어지럽도록 펼쳐지길래 그저 내버려두었더니 언어화할 방도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깊게 되짚어본 것은 거진 그의 삶에 처음이었는데, 무슨 고삐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풀어두었더니 침대를 축축히 적셔서 그 무게에 움직일 수가 없더라. 그 뭉근한 형태의 테두리만 매끈매끈 만져본다. 양손에 묻어나온 그걸 봤더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안까지 파헤치고 들어갈 자신은 없지만, 그 정도로 염치가, 배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되지 않나 싶었다.

그래도 역시 나는 난놈은 못 되나 보다. 으 추워, 하면서 별로 안 추운 거 같은데 붉어진 뺨으로 앞만 보고 걷는 성준수 옆얼굴을 보고도 선뜻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따라서 앞을 바라보자니 오십 미터쯤 떨어져 있을까, 담장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길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참아준 준수는 나랑 어울려주는 시간을 저 담까지만 찍고 돌아오는 정도로 정한 모양이지. 그러니까 저기까지가 반절이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는데 반절.

하나만, 혼잣말뿐이더라도 솔직히 말해볼까. 네가 여기 와서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 중 하나인, 다른 팀원과 농담까지 할 정도로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보기 힘들었다. 왜일까. 형편없이 삐걱대던 팀원들인데. 원체 얌전치 못한 성질 조절 못해 화면 너머로 봐도 티나도록 표정을 구기던 너인데. 밝은 네 얼굴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속이 더 뒤틀렸던 이유였나. 왼발을 내딛어서, 그래서 내딛던 오른발을 멈췄다. 그랬더니 왼발도 멈춰. 앞을 바라본다. 눈치채지 못한 네가 벽으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멈추고 났더니 다시 시작하는 법을 몰라서 성준수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본다. 부산까지 널 쫓아왔는데 너는 더 앞서나간 거 같아. 두려운 나는 이제 걷지도 못하네. 부재한 기척을 알아채고 준수가 뒤를 돌아본다.

"뭐해?"

"그냥··· 발이 안 떨어지길래."

"···뛰어와, 너 그거 잘하잖아. 몸 쓰기. 멍청하게 자란 몸밖에 없으면서."

다리로 달리면··· 그런데 달려서 되는 게 아니라고. 달리면 닿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그런데.

"···야. 야. 뭔 생각하냐? 조용하니까 또 거슬리네."

"··· ···뭐?"

확, 옆구리에 준수의 팔꿈치가 들어왔다. 옆에서 이상하단 눈으로 쳐다보는 준수가 돌아온 얼 빠진 대답에 한숨 한 번 내쉬었다.

"아까부터 말없이 걷기만 하고 뭔데. 하도 빨리 걸어서 딴 생각 하는 줄은 알았는데 옆에 사람 세워놓고 좆같게··· 쯧."

준수는 그러고 보란 듯 담벼락에 한 손 뻗어 짚었다. 여기까지 반. 이제 돌아갈 거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 해라. 영중이 멍하니 자기 얼굴을 어루만졌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만져지니까 조금 현실감이 돌아오는 것 같기도 했다. 맞다, 말을 해야지. 분기점도 넘었으니까.

준수야, 나는 네가 아름답게 추락했으면 좋겠고 추하게 일어섰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우는 척 웃는 건 너무 분해서 때리고 싶고 웃는 척 우는 건 버텨낼 자신이 없어. 왜 그럴지 생각을 해봤거든. 맞아··· 이제야 기억이 나. 네 앞에 서니까 기억이 나. 나는 너여서, 너는 나여서 그렇게 화가 났던 거야. 네가 날 넘어서는 게 두려웠고 내가 널 넘어서는 것도 두려웠는데, 고작 나라는 이 한 몸뚱이를 둘로 찢어놓으려 하니 가운데에서 나는 길을 잃었지.

이상하지. 그래, 그니까 이상하잖아. 자진해서 한치 앞 모르는 길을, 그런 험한 길을 가면서 부득부득 무너지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

이 말로 참 오래도록 내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꾹꾹 뭉쳐서 밀어넣은 게 삼켜서 소화될 리도 없고, 진짜로 거기 막혀있도록 품고 있었어. 무색하도록 단단한 네가 한결같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헛구역질이 났지만 필사적으로 도로 쑤셔넣고 있었나 보다, 나는.

이를테면 너를 나에게서 떼어내려 했던 그 모든 노력 전부가 내가 원중에서 살아남으려는 노력이었네.

너 때문에 시작할 수 없고 너 때문에 멈출 수 없다는 이 기이한 오해, 벗길 수 있는 건 결국 나더라. 

"준수야."

"어."

"나 농구가 하고 싶어."

마지막이란 건 없겠지만, 이 흐름이 일단락된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싶다. 다소 유치하게 구순 놀려본다. 아, 농구하고 싶다···. 이런 말 마지막으로 해본 게 언제인지.

"뭔··· 하든가."

"부탁인데··· 친구 하자, 우리. 이게 내가 멍청하게 고민해낸 제일 덜 비겁한 슈팅이야···"

풋, 낯선 소리가 준수에게서 튀어나온다. ···장난 아니고 진짜 큰 맘 먹고 친 대사인데.

"니 그거 멋있다고 생각해낸 거냐?"

"···네가 먼저 한 말이거든? 지가 지를 비웃고 앉아있네."

"내가?"

"···아 제발 좀, 또 지는 거 같은 기분 들게 하지 말라고··· 기껏 친구하자고 했는데."

"뭐래 씨바··· 이미 친구인데."

"뭐?"

"왜. 맨날 시비만 터느라 잊고 다녔냐?"

준수가 영중의 등을 팡 두드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살짝 중심 잃은 영중이 비틀대다 서너 발짝 앞으로 빠르게 발 딛는다. 야, 구르겠다? 한 쪽 입꼬리 슬쩍 올린 준수의 표정은 진짜 밉도록 질투난다.

"미친 새끼, 멋있는 척은···"

"이 새끼가 장단 맞춰줘도 뭐라··· 또 처맞을래?"

"설마 그거로 넌 응어리 다 푼 거냐? 나 존나 팬 거로?"

존나 팼다니, 지 맞을 짓 한 건 기억 못하고. 노려보는 준수 눈이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다. 익숙한 표정 나오니 한 순간 하고 있는 줄도 모르던 긴장이 탁 풀린다. 아주 뒤늦게 말라붙은 비릿한 코피 냄새가 진동한다. 오른쪽 뺨이 욱신거리는 것도 같다.

"어."

"와하··· 절교해버리고 싶네···"

"니 씨바거 진짜 처맞아야겠다. 난 또 개 진지 빨길래 무슨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았드니."

"넌 대체 무슨 생각 하고 사냐? 고백 이러네."

"에휴 걍···"

영중이 웃음 터뜨리자 구름처럼 새하얀 입김 올라온다. 고작 사랑고백이 너에게 친구가 돼달란 말보다 무거울 리가 없잖아. 실은 널 좋아해왔다느니 밝은 척 꾸며 떠들고 남들 다 하는 연애라는 핑계로 흔한 입맞춤을 하는 게 이것보다 어려울 리가 없다고, 너는 몰라도 나만은 절절히 알잖아. 

아, 진짜 어려웠다. 그것도 저 성준수 상대로 말하기 너무 어려웠다. 네가 빛나도록 멋있다고, 그리고 지금까지 뛰어온 나도 너 못지않게 수고했으니 우리 둘 다 옳았다고. 다듬어 두면 두세 줄 될까말까 한 이 유치한 감정 멋부려 말하니까 꽤 그럴듯하지.

저 멀리에서 지상고 애들이 우루루 몰려오는 게 보였다. 시간이 그리 길어진 것도 아닌데, 진담인지 농담인지 토론하다가 '준수햄이면 진짜 저지를 수도···'라는 의견으로 합치되어 기우에 염탐하러 온 모양이었다. 야, 저기 너네 학교 애들이 나 안 죽었나 보러왔다. 염병, 신 났네, 신 났어··· 너도 신 난 거 같은데. 닥쳐라. 빼기는···. 그래도 너 살아있네. 

맞아, 살아서 숨 쉬고 살아가고 있네. 앞으로도 살아가야지.

멋있는 척 작작 하라고, 한 대 쳤을 뿐인데 또 다시 가격을 시작하려는 줄 안 아이들이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던 거리가 시끄러워지도록, 침묵이 깨지도록 활기찬 발자국 소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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