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 8
종수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몸을 뒤척였다. 목이 칼칼하고 몸이 서늘했다. 손을 뻗어 주변을 더듬었는데 만져져야 할 묵직하고 따뜻한 게 없었다. 아침 준비라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 밀려오는 어제의 기억에 종수가 눈을 번쩍 떴다.
[종수. 정신이 들어?]
귓속으로 들리면 안 될 영어가 날아들었다. 컹컹! 개 짖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종수가 주변을 둘러봤다. 제가 여기 왜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핸드폰. 핸드폰이 어딨지?! 종수가 정신없이 허둥대자, 눈앞에 불쑥 핸드폰이 내밀어졌다. 종수가 허겁지겁 핸드폰을 확인했다.
[너 어제 어디까지 기억나?]
“몰라.”
종수가 머리를 쿵쿵 때리고는 다시 말했다. 얘 미국인이었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억 안 나.]
[애인한테서 온 전화 내가 대신 받았어.]
[어어.]
종수가 부재중 17통. 카톡 알림 33개를 보고는 빠르게 카톡 앱을 열었다. 마지막에 온 말은 들어오면 얘기 좀 해. 였고, 그 위에는 숙소 주소가 한 번 더 보내져 있었다. 그 위에는 그래도 친구랑 있다니 다행이네. 라는 한마디가 더 있었다. 그 옆에 떠 있는 숫자는 3:37……. 지금은 8시가 다 된 시각. 그걸 확인한 종수가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찌르는 듯한 머리 통증에 눈을 질끈 감고 가만히 서 있어야만 했다. 다리쯤에는 맥스일 게 분명한 뜨끈한 털 뭉치가 몸을 부벼왔지만, 지금은 그를 반겨줄 정신이 없었다.
[네 예쁜이 이름도 알았다?]
하지만 뒤이어서 들리는 말에는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뭐?]
[물어봤어. 이름 뭐냐고.]
종수가 씨발. 낮게 욕을 읊조리고는 스테판을 노려봤다. 스테판이 낄낄댔다. 로시도 마찬가지로 키들거렸다. 둘은 와. 욕한다. 욕해. 한국 욕. 하고 종수를 놀리더니 생수병의 뚜껑을 따 내밀었다. 종수가 둘을 노려보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작은 생수병 하나를 한 번에 비우는 종수를 보고, 스테판이 덧붙였다.
[야. 어차피 내일이면 알 건데.]
[니가 내 남친한테 이름을 왜 묻냐고.]
[예쁜이라고 부르니까 나 변태로 신고할 것 같아서 물었지.]
그 말을 들은 종수가 얼굴을 인정사정없이 구겼다. 스테판에게 단번에 따져 묻는 것도 덤이었다.
[너, 걔한테 예쁜이라고 했어?]
[그랬지?]
“씨발, 진짜…….”
[또 욕하네.]
“나도 안 불러본 걸…….”
종수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 문득 든 생각에 골이 울리든 말든 주변을 휙휙 돌아보며 몸을 더듬었다. 다행히 가방은 제가 메고 있는 듯했다. 종수는 가방을 열어 안전한 반지를 확인했다. 스테판이 그걸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반지 너무 대충 넣어 다니는 거 아냐?]
[뭐?]
[아니. 어제 핸드폰 충전해서 네 예쁜이한테 연락해 주려고 가방 열었더니, 너무 그냥 들어있어서.]
[……열어서 봤어?]
종수의 눈매에 또 힘이 들어갔다. 스테판이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실실 웃으며 답했다.
[아니? 그랬다가 너한테 진짜 죽을 일 있어?]
[……잘 아네.]
종수는 습관적으로 스테판과의 대화를 이어 나가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나 갈게.]
[데려다줄게.]
[아냐. 괜찮아.]
[차가 더 빠르니까 타고 가.]
망설이는 종수의 모습을 보고 로시가 재빨리 덧붙였다.
[너 남친이 주소 보냈다더라.]
아. 그래서 이규가 주소를 한 번 더 보낸 거구나. 종수가 크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버를 잡고 기다리느니 스테판의 차를 타고 가는 게 더 빠르다는 게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걱정 많이 한 것 같던데 연락해 주고.]
종수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카톡을 열었다. 나 지금 갈게. 빠르게 카톡을 보냈다. 텍스트 옆의 숫자 1은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종수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종수.]
그런 종수를 로시가 불렀다. 종수가 별다른 답 없이 로시를 마주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치약이 묻은 칫솔을 들고 있었다. 그걸 왜? 라고 쓰인 종수의 얼굴을 본 뒤, 스테판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현관을 향했다.
[나는 먼저 나가 있는다.]
종수가 결국 떨떠름한 목소리를 내며 물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자신이 쓰라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뭔데.]
그 말에 로시가 씨익 웃으면서 칫솔을 내밀었다. 스테판과 꼭 닮은 짓궂은 웃음이었다.
[너가 키스하면 네 남친은 그냥 봐준다며.]
[미친…….]
종수가 얼굴을 벅벅 쓸었다. 그 얘기는 또 언제 한 건지 기억도 안 났다.
[스테판이 차고 문 여는 동안 양치나 하고 와.]
하지만 실제로 이규에게 사과를 하고 입을 맞추고 본다는 대책밖에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규처럼 과일을 머금고 와 앙큼하게 굴지는 못하더라도, 깔끔하게 양치 정도는 하는 게 맞았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종수가 단박에 칫솔을 낚아챘다. 그리고 화장실로 향하려는 순간, 발치에서 끼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종수가 그제야 아차 하는 마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 맥스.]
[맥스한테 인사도 좀 해줘. 어제 알아보던데.]
종수가 말없이 허리를 숙여 울상이던 맥스의 머리며 목덜미를 마구 쓰다듬었다. 마음에 드는 손길이었는지 맥스가 금방 헥헥대며 몸을 마구 부벼왔다. 이걸 보니 이규가 더 보고 싶어졌다. 스테판과 로시에게는 맥스가 있었지만, 자신에게는 이규가 있었다. 자신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규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종수가 맥스에게 짧은 사과를 건넨 뒤 금세 몸을 일으켰다. 더 만져달라는 듯 몸을 붙이는 맥스는 로시가 데려갔다.
[맥스. 지금 종수 바빠.]
아빠랑 놀자. 응? 그 말과 함께 맥스를 격하게 만져주는 로시를 뒤로 한 채 종수는 칫솔을 입에 넣으며 욕실로 향했다. 카톡은 여전히 켜둔 채였다. 하지만 종수가 양치를 빠르게 마친 후, 개판이던 머리도 다급하게 누르고―물론 수습이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현관을 나오는 동안에도 이규에게선 답이 없었다.
결국 종수가 미안. 한마디를 덧붙여 보냈다. 이번에도 이규는 바로 카톡을 읽었다. 종수가 엄한 핸드폰 화면을 노려봤다. 스테판이 차 안에서 종수를 한 번 더 불렀다.
그제야 이규에게서 답장이 왔다. 조심히 와. 그 네 글자를 보고 나서야 종수는 겨우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규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미치도록 걱정이 됐다.
* * *
종수는 숙소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스테판은 이미 돌아간 지 오래였다. 무릎이라도 꿇고 싹싹 빌라는 조언을 남겨둔 채였다. 숙소의 비밀번호는 매번 이규가 치고 들어갔기에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핸드폰에 주소와 함께 보내져 있었다. 벨을 눌러도 됐다. 하지만 좀처럼 집 안으로 들어가 그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문 하나를 둔 상태에서 먼저 움직인 건 이규였다. 도착 예정 시간도 공유받았고, 차가 오는 소리도 들었다. 심지어 현관문 앞까지 오는 발소리도 들렸건만 문 앞에서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지를 건 다 저질러 놓고 대체 뭘 망설이는 건지, 이규가 한숨을 푹 내쉬고 문을 연 것도 당연했다.
종수는 열리는 문에 움찔 떨고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문 너머에는 퀭하고 푸석한 얼굴의 이규가 있었다. 장담컨대 종수가 본 이규 중에 가장 멀끔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종수가 그 몰골에 바짝 굳어 우물쭈물하는 사이 이규가 입을 열었다.
“들어와.”
종수가 쭈뼛쭈뼛 현관에 발을 디디고는 문을 닫았다. 이규는 하루 만에 부쩍 상한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도 거칠었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개는 바닥에 고정하다시피 한 채 눈치를 보며 서 있는 종수에게, 이규가 한숨을 내쉬더니 소파를 가리켜 턱짓했다. 종수가 소파로 걸어가 조용히 앉았다. 그러고는 바로 따라오지 않는 이규를 흘끔거리며 쳐다봤다.
이규는 소파로 향하는 종수를 두고, 그대로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는가 싶더니 레몬을 하나 꺼내 반을 갈랐다. 반은 컵에다 짜고 남은 반은 통통 썰었다. 꿀을 컵에 담았다. 물이 끓은 후에는 뜨거운 물을 부어 잘 섞었다. 새콤하고 달큰한 냄새가 났다. 이규는 맛을 보려 입을 댔다가 혀를 데이고는 짧게 인상을 썼다. 옆에 생수를 가져다 놓고도 까먹은 게 어이가 없었다. 잠을 못 잤더니 이런 데서도 티가 난다 싶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작은 한숨 소리에 종수는 괜히 몸을 움찔 떨었다. 그 일을 알 리 없는 이규는 꿀을 조금 더 타고 옆에 있는 생수를 살짝 부어 온도를 맞춘 뒤, 한 손에는 꿀 레몬차를, 한 손에는 방금 딴 생수병을 들고 소파로 향했다.
“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꿀 레몬차가 종수 앞에 놓였다. 종수가 이규를 흘끔 보더니 컵을 끌어 제 앞으로 가져왔다. 이규가 제 옆이 아닌 따로 마련된 일인용 소파에 앉는 게 불만이었지만, 여기서 그런 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종수가 볼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찬물 좀 탔는데, 그래도 좀 있다가 마셔.”
“……응.”
제 앞에 놓인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킨 이규가 연거푸 얼굴을 쓸어내렸다. 종수는 컵을 쥐었다가 생각보다 뜨거운 온도에 손을 떼고 이규를 살폈다. 역시 몰라보게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기도 했다. 꼭 잠을 못 잔 사람 같았다. 종수가 입술을 달싹대다 이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안 잤어?”
이규가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로 답했다.
“내가 너 언제 올 줄 알고 자.”
“그래도, 스테판이 전화했다고…….”
“덕분에 마음을 좀 놓긴 했지.”
“그 뒤로도 못 잤어?”
하아……. 이규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걱정이 되는 애가 연락도 하나 없이 내내 잠수를 타다가, 술에 취해 외박하고 들어온 게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종수.”
“……응.”
“샌프란시스코 밤에 위험하다고 한 거 누구야.”
자신이었다. 종수는 괜히 손을 꼼지락댔다. 이규는 종수의 대답이 없자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뛰쳐나가서 내내 연락 안 받은 거 누구야.”
종수가 이규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단호한 어조에 눈치를 보며 답했다.
“……미안.”
이규가 벅벅 쓸어내려 빨개지고 거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연락은 받아야지. 응? 여기가 한국도 아니고. 차도 내가 가지고 있고. 물론 여기가 너 살던 데라는 건 나도 아는데, 밤에는 내내 사이렌 소리 들리지. 너는 어디 갔는지도 모르지. 그러면 내가 걱정이 돼, 안 돼. 어?”
진짜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종수는 다시 순순히 사과했다. 이규가 저와 같은 짓을 했다면 자신은 이미 반쯤 미쳐있을 거였다.
“……핸드폰이 방전돼서, 못 봤어. 미안.”
이규가 또다시 새어 나오는 한숨을 애써 삼켰다.
이게 문제였다. 종수의 잘못으로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그가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면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어제 술을 진탕 마셔서 속이 말이 아닐 텐데도 타 준 꿀 레몬차 같은 건 손에 대지도 않는 걸 보니 더 그랬다.
이규는 목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말을 애써 삼켰다. 더 말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사과를 들은 마당에 뭔가를 더 따지고 드는 것도 이상했다. 무엇보다 몇 마디를 더 해서 종수를 괜히 위축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끝내기에는 제 서운함이 한순간에 풀리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풀이 죽어 있는 종수를 안아 달래주고 싶기도 했고, 자신도 못지않게 속상하고 서운했다고 투정을 부리고 싶기도 했다. 다음부터는 제발 그러지 좀 말아달라 매달리고 싶다는 충동도 치밀었다.
정말이지 세상에 종수만큼 어려운 게 없는 것 같았다. 아는 것 같으면 모르는 게 한가득했고, 모른다 싶으면 투명하리만큼 처음에 생각한 게 맞았다. 이규는 그게 가끔 답답했다.
그런데도 그가 밉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역시 이런 게 사랑인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이규는 종수를 빤히 바라봤다.
종수는 이규의 눈빛이 눈앞의 컵에 닿았다가 저에게 머무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다시 컵을 쥐었다가, 뜨거움에 다시 컵을 놓았다.
그 모습에 이규가 컵을 들고 말없이 일어났다. 만져보니 확실히 뜨겁긴 했다. 종수는 뜨거운 걸 못 견디는 편이라 더 그렇게 느낄 터였다. 컵이 얇아 그런 것 같아 이규가 다시 주방으로 향해 조금 더 두꺼운 컵을 찾고, 가볍게 씻은 다음 내용물을 죄 쏟아부었다. 다시 컵을 쥐어봤더니 그리 뜨겁지 않았다. 내용물도 따뜻했다. 이 정도면 종수도 쥐고 마실만하겠다 싶어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종수는 잔뜩 피곤해 보이는 뒷모습으로 꿀 레몬차의 온도를 조절해 주는 이규를 훔쳐보기만 했다.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평소라면 좋기만 했을 이규의 다정함이 지은 죄가 있는 탓에 불편하기만 했다. 종수는 서서히 매워지는 것만 같은 코끝에 이규가 등을 돌려 이쪽을 향하자마자 또 고개를 푹 숙였다. 테이블만이 들어오는 시야에 다시 연노란 빛깔의 액체가 담긴 컵이 들어섰다. 이규는 컵만 내려준 뒤, 또 제 옆이 아닌 앉던 소파에 가서 다시 앉았다. 종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속이 아주아주 상했다. 평소처럼 왜 거기에 앉냐고 그를 추궁할 수 없어 더 그랬다.
그 뒤를 짧지 않은 정적이 채웠다. 종수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컵을 쥐었다. 컵은 딱 기분 좋게 미지근했다. 종수가 이규의 눈치를 또 슬쩍 보고는 그가 타 준 꿀 레몬차에 입을 댔다. 조금 맛만 봤는데도 상큼하고 달콤했다. 혀가 델 것처럼 뜨겁지도 않았다. 종수가 두세 모금 더 따끈한 액체를 머금었다. 숙취로 울렁대던 속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몸의 긴장도 조금 덜 해졌다.
이규가 종수의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스르륵 풀리는 걸 보고는, 마찬가지로 소파에 몸을 더 파묻었다. 이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숙취는 괜찮아?”
“……응.”
“어제 많이 마셨다던데.”
종수가 또 입술을 또 깨물다가 작게 답했다.
“너가……. 레몬차 타 줘서 괜찮아.”
그 말에 이규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정말 깜찍한 답변이라 어쩔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한마디에, 가슴 언저리에서 밤새 단단하게 뭉쳐져 있던 답답함이나 속상함이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저 말 한마디에 이렇게 마음이 풀어질 일인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저 자신이 너무 쉽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좋아하는 애 앞에서 부러 밀고 당기기 같은 걸 할 수 없는 제 성정을 알아 그런가보다 싶기도 했다.
그래도 어이는 좀 없었다. 이규는 어제의 마음고생을 생생히 기억했다. 불안이나 초조, 걱정,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 약간의 원망. 그 뒤를 잇는 서운함과 속상함. 그 모든 건 진짜였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종수의 말은 사랑스러운 게 맞았다. 제가 해준 것으로 괜찮아졌다는 말은, 이규의 마음을 가득 채우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금세 사라지게 했다.
문득 그럴 거면 어제 왜 그 삽질을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다시 돌아가도 걱정 때문에 밤을 지새우긴 할 것 같기도 했다. 이규는 좋아하는 애를 덜 걱정하는 법 같은 건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기도 해서, 이규는 금세 전날의 일을 흘려보내기로 결심을 마쳤다.
다만 이규가 확실히 아는 건 있었다. 자신은 종수를 걱정할 수는 있어도 이길 수는 없다는 거였다. 이건 이규가 종수와의 사이에 뭔가의 논쟁이라든가, 트러블이라든가, 서로의 규격이 맞지 않아 어긋나는 느낌이 들 때마다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니 종수를 상대로 화 같은 걸 내기 힘든 것도 당연했다. 이규는 오늘도 제 앞에 펼쳐진 여러 선택지 중 투정이나 토로 대신, 그를 안아주고픈 마음을 골랐다.
역시 종수와 함께 있으면 사랑의 유효기간 같은 건 다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무리 과학적인 근거가 있대도, 자신은 그 결과의 반례로서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는 매번 이렇게 그를 더 좋아할 수는 없는 거였다.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리고 생각이 정리가 되자, 자연스레 누그러진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잘 자고 왔어?”
하지만 긴장한 상태의 종수는 미묘하게 풀어진 이규의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속이 뜨끔한 질문이라 불안한 티를 감추려 볼 안쪽을 또 잘근잘근 씹었다. 대답을 고민하기도 했다. 사실 너가 없어서 잘 못 잤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또 투정을 부릴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수가 우물쭈물 답했다.
“……응.”
“그래. 잘했어.”
이규는 비꼬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종수는 그 말이 꼭 자신을 탓하는 것만 같아서 또 마음이 저릿했다.
이규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종수를 바라봤다. 저 버릇은 나이가 들어도 똑같은 것만 같았다.
감독님한테 혼날 때도, 괜한 꾸지람을 들을 때도, 머쓱한 기분이 들 때도, 혹은 불안한 기분이 들 때도, 종수는 참아내야 할 감정이 있을 때마다 저렇게 꼭 모은 손을 조금씩 움직였다. 이규는 그 간지러운 움직임을 볼 때마다 종수의 단단한 손을 매번 잡아주고 싶었다. 그게 불안함 때문이라면 더 그랬고, 그 이유가 제 눈치를 보고 있어서라면 더욱더 그랬다.
“그럼 이제 나 좀 재워줘.”
이규가 손을 뻗어 내내 컵을 쥐고만 있던 종수의 손에서 부드럽게 컵을 빼냈다. 달칵. 하고 내용물이 거의 사라진 컵이 테이블에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 너 없어서 진짜 한숨도 못 잤어.”
그 후엔 종수의 손을 천천히 만지작댔다. 종수는 익숙한 체온이 닿자 비로소 마음이 좀 놓였다. 내내 피하던 이규의 시선을 다시 마주할 용기나 여유도 조금쯤 생겼다. 굳어있던 종수가 다시 이규의 눈치를 봤다. 무엇보다 긴장이 좀 더 풀리니 이규의 목소리가 처음 숙소에 들어섰을 때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어서였다. 심지어 애교도 조금쯤 섞여 있는 것처럼 들렸다.
이제 화가 풀린 건가? 그건 다행이었지만, 이렇게 쉽게……? 제 기준으로는 믿을 수가 없는 속도였다.
“옆에서 좀만 같이 자주라. 딱 두 시간만. 응?”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이규의 눈매가 평소처럼 말랑하게 휘어있는 걸 마주한 종수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르듯이 말하는 걸 보면 이규는 화 같은 건 나지 않았던 사람 같이도 보였다. 종수는 그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어제 같은 나를 봐주지? 종수는 다시 생각해도 정말이지 의아했다. 이규는 ‘종수 너가 나를 봐주는 거지.’하고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를 끝도 없이 봐주고 받아주는 건 이규인 것만 같았다. 그만큼 자신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뿌듯하고 마음이 찼지만, 또 한편으로는 속이 상하기도 했다. 지은 죄가 그런 이규를 다시금 깨달을수록, 또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규는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그런 좋은 애 마음고생을 이렇게까지 시키는 자신은 정말이지 쓰레기였다. 이런 자신과 결혼을 하는 건, 이규에게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종수는 또 이상하게 쪼글쪼글해진 제 존재감을 느꼈다. 자신이 없었다. 또 가방이 순식간에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종수의 시선이 가방으로 향했다. 입술이 앙 다물렸다.
종수의 시선을 따라간 이규가 내내 매고 있던 종수의 메신저백에 손을 내밀었다.
“가방 줘. 갖다 놓고 가자.”
그 가방은 종수가 이번 여행 내내 이상하게 몸에서 떼놓지 않던 것이었다. 물건에 집착이 덜한 종수치고는 꽤 드문 행보였다. 그간 해외에는 소매치기가 제법 있다더니 그 때문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밤새 다른 데 있다 왔는데도 여전히 가방을 벗지 않는 건 좀 이상했다. 이규가 종수를 한 번 더 불렀다.
“종수?”
종수는 가방을 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애꿎은 가방끈만 구겨질 듯 쥐고 있었다.
종수는 정말이지 속상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심지어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건 명백하게 자신이라 더 그랬다.
어제 전화는 안 받아도 카톡이라도 좀 볼 걸. 가방에 반지랑 지갑만 달랑 넣고 다니지 말고, 보조배터리라도 좀 넣고 다닐걸. 그저께 레스토랑에서 프러포즈를 망했대도, 숙소에 돌아와서라도 할걸. 어제 그렇게 뛰쳐나가지 말걸. 괜한 충동에 술도 마시러 가지 말걸. 로시 말대로 맥주를 먹으러 가는 길에 연락할걸. 핸드폰을 빌려서 국제전화라도 할걸.
모든 게 후회가 됐다.
심지어 일정상 오늘 프러포즈를 하지 않으면 결혼 서약서 받기는 물 건너갈 상황이었다. 한심했다. 최종수라는 인간은 정말이지 농구 말고는 잘하는 게 없었다. 이규는 커플링도, 신혼집도, 살림도 모두 척척 해내는데 자신은 뭐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건 진짜, 진짜 열심히 준비했던 건데 제 손으로 다 망쳐버렸다. 이규의 잘못은 정말 있지도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의 하늘 아래에서 이규는 늘 예뻤다. 그래서 더 안달이 났다. 조바심이 생겼다. 쓸데없는 걱정이 됐다. 까딱 잘못하면 이렇게 예쁘고 좋은 애를 누가 채 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으면 내내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했는데, 싸인 받는 애 앞에서 친구라고 말한 게 고작 뭐라고 이규를 버려두고 뛰쳐나가 술이나 마셨다. 정작 이규는 변함없이 저를 이렇게나 좋아해 주고 아껴주고 있는데도 바보처럼 굴었다.
이규가 견고한 애정을 보여주는 내내 자신은 어땠나. 이규에게 자신과 함께하면 너는 앞으로 더 행복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말하고 보여줘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심지어 사귄 이래 최고로 걱정을 시켰다. 자신의 멍청함에 치가 떨렸다. 계획을 아무리 열심히 세워봤자 소용이 없었다. 실행하는 사람이 부족하니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대처도 엉망이었다. 종수의 얼굴에 서서히 열이 올랐다.
이규는 종수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얼굴이 빨갰다. 입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건 꼭……. 10년도 더 전에, 쌍 용기에서 우승하지 못해 울분에 찼던 그 모습과 비슷했다. 이규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너무 뭐라고 했나? 종수도 이제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내가 너무 혼내는 것 같아서 속상했나? 왜 그렇게 나갔는지를 먼저 물었어야 했나?
이규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단숨에 종수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여다봤다. 종수가 고개를 홱 돌렸다. 이규가 제 옆에 와준 것만으로도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규는 항상 제가 우는 것에 안절부절못했으니까, 그걸 보여주기 싫었다. 여기서 더 이상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규가 이번에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종수는 그 손길에는 응해주면서도 눈을 마주해 주지는 않았다. 이규가 조곤조곤 말을 건넸다.
“내가 너무 뭐라고 했어?”
종수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럼. 미안해서?”
거기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가 종수의 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사과했잖아. 다음부터는 안 그러면 되지.”
이규가 움찔대는 종수의 입술을 보고 또 입술을 맞댔다.
“응?”
종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이규가 제 등을 타고 오르는 종수의 팔을 느끼고, 그를 마주 안았다. 종수가 기다렸다는 듯 품에 안겼다. 하아. 이규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종수는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애인이었다. 이규로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기분이 변화무쌍했다.
하지만 그게 종수의 사랑스러운 점이기도 했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 이규는 그럴 때마다 가끔은 그의 옆에서 같이 허둥지둥해 주고, 가끔은 어디로 날아가더라도 그걸 다 받아주고, 또 가끔은 그의 옆에서 가만히 기다려 주고 싶었다. 오늘은 선택지는 명백했다. 종수에게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것 같아 보였다.
이규는 조금 서늘한 종수의 몸이 미지근하게 될 때까지 그를 하염없이 껴안고 있었다. 귓가에다 입을 맞추고, 등을 쓰다듬고, 저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더 힘을 줘 종수를 끌어안았다.
품에 가득 차는 종수를 안고 있으니, 이규의 마음도 말랑말랑하게 풀어졌다. 문득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이규의 취향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말보다는, 그런 날 선 건 애초에 꺼내지도 않는 게 좋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대부분의 일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며 살아가니 어쩔 수 없었다.
종수가 그렇게 뛰쳐나간 이유는 여전히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물을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고, ─괜히 얘기를 꺼냈다 진정 중인 종수의 상태에 다시 불을 지르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그래도 종수가 안전하게 제 품으로 돌아와 줬으니 그걸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는 또 계획해 둔 일정이 있었지만, 이렇게 된 거 종수에게 맛있는 거나 잔뜩 먹이며 사랑이나 퍼붓고 싶었다. 지금 제게 중요한 건 하루 만에 꼬질꼬질해진 종수를 또 제 손을 가득 탄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순간 너무 다 받아주고 다 해주는 거 아니냐는 종수 어머님의 말씀과, 승대의 질린 목소리가 떠올랐으나, 이규는 그 상념을 재빠르게 떨쳐냈다. 제가 좋고 종수도 좋으면 되는 일이었다. 거기다 평생 종수랑 같이 살 거니 별문제도 없었다. 이규는 종수가 남의 손을 타게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평생. 그 말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언제나 달콤한 것이었다. 나른한 숨이 절로 나왔다. 부드러운 목소리도 함께였다.
“이렇게 어리광쟁이여서 어떡해.”
종수가 이규의 목덜미에다 얼굴을 부볐다. 그 간지러운 움직임에 이규의 마음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종수가 어제 술에 취해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하소연했더라도, 이렇게 구는 건 자신뿐이라는 만족감이 이규의 속에서 넘실댔다. 이규가 낮게 웃으며 잔뜩 뒤집힌 종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얽었다.
“응?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해애~”
종수가 말없이 이규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이규는 그 무게감과 온도에 비로소 완전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다시 가방의 존재를 느꼈다. 내내 품고 있던 가방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게 또 귀여워서, 이규가 다시 물었다.
“가방은 이번 여행 내내 그러고 안고 다닐 거야?”
종수의 몸이 덜컹 굳었다.
“나 모르는 보물이라도 숨겨뒀어?”
이규는 모르고 묻는 게 분명하다는 걸 아는데도, 종수는 심장이 철렁였다.
따지고 보면 보물이긴 했다. 저의 20대를 몽땅 바친 결과물이 거기에 있었다. 다시 만나 함께 한 2년이 담긴 결과물도 있었다.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하기 위해 준비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어떻게 이걸 건네줘야 할지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타이밍조차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말이 없는 종수에 이규가 몸을 살짝 떨어뜨려 다시 그를 마주했다.
“비밀이야?”
종수는 거기에도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비밀은 아니었고, 그냥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비밀이면 안 됐다. 이건 이규가 알아야 하는 거였다. 다시 가방만 꾹 끌어안는 종수를 보고, 이규가 부러 장난스레 덧붙였다.
“숨기는 거 없다고 했으면서.”
종수는 뜨끔했다. 숨기는 게 있는 거 아니냐며 이규를 종종 닦달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애가 자기한테 뭔가를 숨기는 건 정말이지 싫었다. 그게 이규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 상황만으로도 잔뜩 속이 상하고 열을 받았다. 그런데 이규의 입장에선 제가 그런 걸 하는 거였다. 저로서는 서프라이즈였대도 그는 충분히 자신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종수는 맹세하건대 이규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거 아냐.”
“아니야?”
다급하게 답했지만, 이규는 그 말을 썩 믿어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종수는 순식간에 억울해졌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또다시 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에 다시 열이 올랐다. 눈이 따끔거렸다. 코끝이 찡했다. 이규는 순식간에 바뀌는 종수의 표정에 다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종수. 괜찮아? 응?”
이규는 이 상황에도 정말 빌어먹게 다정했다. 종수가 코를 킁 하고 들이마셨다. 어제 구겨져서 자야 했던 스테판과 로시네 집 소파 위는 추웠다. 담요를 덮었는데도 그랬다. 일어난 후로 몸이 내내 찌뿌둥했다. 목이 칼칼했다. 코가 막혀 숨쉬기도 힘들었다. 이게 다 따끈따끈한 이규가 없어서 그런 게 분명했다.
역시 자신은 이규가 좋았다. 이규 옆에 있고 싶었다. 이규와 평생을 함께했으면 했다.
“왜 그래. 안 좋은 일 있었어? 어제도 안 좋은 꿈 꿨어?”
그가 너무 따뜻하고 다정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이규가 허둥지둥하는 게 느껴졌다. 종수가 금세 먹먹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가,”
“응. 내가아.”
이규가 종수의 눈가를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엄지 끝에 눈물이 조금 배어들었다. 그 손길에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종수가 말을 이었다.
“……먼저 색시 해주겠다고 했잖아.”
“뭐?”
이건 햄버거집에서 뛰쳐나간 종수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규는 이게 어제오늘 일어났던 모든 일의 원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으나, 여전히 색시 타령과 종수의 행동 사이에서 어떠한 연관성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이규의 어수룩한 얼굴을 보니 종수는 더 서러워졌다.
“……넌 진짜. 바보야.”
“어?”
이규가 제 맘을 몰라줘서 그랬다.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이걸 이규가 알아채면 실패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규가 알아줬으면 했다.
“내가, 여기에 왜 오자고 했는지도 모르고.”
“어, 종수……?”
코가 매웠다. 시야가 흐려졌다.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나쁜 놈아.”
“나?”
종수는 이제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다. 심장쯤에서 마구 엉켜있던 감정이 생각이라는 걸 할 틈도 없이 마구잡이로 쏟아져나왔다.
“색시, 큼, 해준댔잖아.”
그 말이 없었다면 이런 걸 준비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종수가 금세 울음 섞인 숨을 헐떡대며 이규를 바라봤다.
“맘이 바뀐 거야?”
눈물이 닦아낼 틈도 없이 차올랐다. 종수가 눈을 깜빡이는 걸로 그 액체를 모조리 떨궜다. 눈물이 둘 사이로 후두둑 떨어졌다. 흐릿한 시야로 당황한 이규의 얼굴이 보였다.
“내 색시 해주기 싫어?”
이규는 저에게 평생을 함께하자고 했다. 그렇다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겠다고 해야 했다. 그런데 친구라고나 얘기했다. 그가 말하는 친구는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극히 일부인 것을 알고 있는데도, 자신은 이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규는 14살, 처음 체육관에서 만난 그때부터 자신만의 것이었으니까.
“아니, 종수. 잠시만…….”
그러니까 이건 이규가 나쁜 게 맞았다. 줬다 뺐다니 치사했다. 이규가 자신에게 이럴 순 없었다.
친구 사이엔 독점 같은 게 불가능했다. 나만의 이규로 만들고 싶으면, 최소한 애인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진짜 평생 내 걸로 삼고 싶으면, 그걸로도 부족했다.
그랬다. 부족하다고 느꼈다. 종수는 제 것이 아닌 이규의 상태가 싫었다. 단 1초라도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심지어는 온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더러운 게이 새끼라느니, 그러니 농구를 그따위로밖에 못 하지, 하고 말도 안 되는 욕을 하는 것보다도 더 싫었다.
그래서 선택했다. 이규를 내 거라고 하기로. 굳이 결혼 발표니 뭐니 해서 긁어 부스럼은 만들지 않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어떻게든 내 거라고 해두기로. 받을 수 있는 증명이 있다면 받기로. 그러기 위해 결혼을 하고 싶었던 거였다. 억울하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도 여전히 그 한 가지만이 명확했다.
최종수는 이규와 결혼이 하고 싶다.
최종수는 이규와 결혼을 해야 한다.
그러니 질질 짜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라면, 단 한 가지의 확실한 것만을 쫓으면 됐다.
샌프란시스코에 또 올 수는 없었다. 내년엔 결혼 1주년 기념으로 하와이나, 세부나, 몰디브 같은 데를 가고 싶었다. 맑고 투명한 물 아래 예쁜 이규를 두고 내내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건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종수가 팔을 들어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씨……. 쪽팔려.”
그 거친 손길을 이규가 제지할 틈도 없었다. 종수가 드디어 가방 지퍼를 거칠게 열었다. 안을 뒤적거린 종수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세 개나 들려있었다. 하나는 이규도 아는 거였다. 지난 시즌 함께 우승해서 받은 반지가 분명 저런 케이스에 들어가 있었다. 종수가 그걸 몽땅 이규의 손에 올려두고 가방을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이규의 위에 올라타 앉았다. 이규는 얼떨떨한 채로 종수가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종수가 이규의 손에서 상자를 가져와 둘의 사이에 대충 던져뒀다. 그러고는 이규의 눈에 익은 상자를 가장 먼저 열었다. 안에는 역시나 이규도 가지고 있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시뻘겋고 축축한 얼굴로, 종수가 말했다.
“손.”
“응?”
“손 달라고.”
이규가 얼떨떨하게 손을 내밀었다. 종수가 한국 시리즈 우승 반지를 이규의 왼손 검지에 끼웠다. 이규는 여전히 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다음은 빨간 상자였다. 거기에는 또 다른 우승 반지가 들어있었다. 그건 미국에서 받은 게 분명했다. 종수는 그것도 이규의 손에 끼웠다. 중지와 검지가 순식간에 번쩍번쩍 빛났다.
그리고 마지막 케이스를 손에 쥐고, 종수는 숨을 한번 골랐다. 이규도 괜히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눈치를 못 채는 게 바보였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 이규는 아직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종수와 그저……. 이렇게 지내는 걸로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으로 욕심을 낼 생각은 없었다. 종수는 흔들리는 이규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그를 불렀다.
“이규.”
“……응.”
이규가 느리게 답했다. 종수가 반질반질하고 까만 케이스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최악의 프러포즈였다. 하지만 이제 진짜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종수는 준비해서 외웠던 프러포즈 멘트를 머릿속으로 재빨리 복기했다. 얼마나 열심히 외웠던지,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 말들만은 선명하게 종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왜인지 외운 걸 그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종수를 덮쳤다. 이미 다 망한 와중에 그 멘트들을 했다가는 말도 안 되게 붕 뜨는 분위기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기세 좋게 반지 두 개를 먼저 끼워주기는 했는데, 여전히 다음 대처가 어려웠다. 또다시 혼란스러워진 속에 반지 케이스만을 뚫어져라 보던 종수가 이규를 다시 마주했다.
이규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저를 보는 그의 시선은 참 올곧고, 또 따스해서, 종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이규는 저를 좋아한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한 자신을 용서해 줄 정도로. 그렇다면 그 애정을 믿어야 했다.
종수가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침도 한번 꿀꺽 삼켜낸 뒤, 케이스가 열리는 방향을 이규 쪽으로 돌렸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입은 저절로 열렸다.
“내가, 가져다줄 수 있는 승리는 모두 너에게 가져다줄게.”
까만 상자가 서서히 열렸다. 그 안에는 크기가 거의 똑같은 반지 한 쌍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천하제일이라는 게 뭔지, 내가 계속 보여줄게.”
이규는 꼭 거기에 홀린 것만 같았다. 햇살이 들이치는 타국의 거실에서, 반지에 박힌 보석이 유독 빛났다. 다이아몬드겠지……. 이규가 멍한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흘려보냈다. 이 순간에, 이 멘트에, 다이아몬드라니. 이건 누가 봐도 결혼반지였다. 커플링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왜? 이규는 머리가 굳은 것만 같았다. 당연한 결론이 있는데도 머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이규가 멍청해 보일 게 분명한 얼굴로 종수를 올려다봤다. 종수가 그런 이규를 마주하고,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보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역시 이런 귀여운 모습의 이규는 저만 알아야 했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다.
“나랑 결혼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해야 할 말은 자연스레 나왔다.
“……내가 잘해줄게.”
샌프란시스코에 온 내내 잘못한 것 같았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잘해주고 싶었다. 이규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으면 했다. 다른 데서 말고, 제 옆에서.
“연락도 잘 받을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이규를 걱정시키지 않아야 했고,
“말없이 안 사라질게.”
그를 걱정시키지 않으려면 열 받을 때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도 좀 어떻게든 고쳐야 했다. 기억상 자주 한 행동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런지 그때마다 이규는 매번 퀭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했다. 그런 얼굴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 안 시키게 노력할게.“
이규가 해주는 걱정은 언제나 기쁜 것이었지만, 거기에 제 잘못이 들어가 있다면 얘기는 또 달라졌다. 이규가 해주는 걱정이라면 시답잖은 쪽이 더 좋았다. 머리칼 끝에 붙은 민들레 홀씨도 무거울까 싶어 날려 보내주고 싶은 그런 마음. 쓸데없는 걱정 좀 그만해. 라고, 말하면서도 그의 따뜻하고 보드라운 애정을 모두 누릴 수 있는 그런 정도. 종수는 그걸 내내 손에 쥐고 품에 안고 싶었다.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자.”
그런 이규랑 평생 함께하고 싶었다. 아마 이규는 이런 법적 규제나 제도가 없이도 저와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에 대한 신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규와 자신은 조금 다를 뿐이었다. 자신은 이규와 달리 뭐든 증명해야 했다. 평생을 함께하고자 마음먹었다면, 그럴 것이라 공식적으로 선언해야 했다. 남들에게 보란 듯이 내보여야 했다. 종수가 알기로 그럴 방법은 하나였다.
“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이규는…….
솔직히 말해 혼이 빠진 것만 같았다. 종수가 왜 내내 색시 타령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시청에 갔을 때 왜 결혼 얘기를 물었는지도 이해했다. 예약했다던 레스토랑이 왜 그렇게 프러포즈할 법한 분위기였던 건지도 이해가 갔고, 종수가 왜 친구라는 말을 듣고 뛰쳐나갔는지도 이해했다.
무엇보다, 종수가 내내 들고 다니던 가방에 이런 어마어마한 게 숨겨져 있었단 사실이 얼떨떨했다.
이규가 멍한 머리로 종수를 바라봤다. 종수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귀는 이미 새빨갰다. 거칠게 문지른 눈가가 붉었다. 눈엔 초조함이 가득했다. 코끝엔 콧물이 한 방울 매달려 있었다. 머리칼은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제 위에 앉아 저를 내려다보는 종수가 참 예뻐 보였다. 종수는 언제나 잘생겼지만, 오늘도 그 미모는 여전히 빛났지만, 꼬질꼬질한 게 분명한 모습임에도 귀엽기만 했다.
결혼반지 하나만으로 충분한데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좋은 반지란 반지는 다 가져와 품에 안겨주는 그의 마음이 벅찼다. 종수가 이걸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알아서 더 그랬다. 종수의 청춘을 가까이서든 멀리서든, 어떤 형태로든 함께 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 애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몽땅 건네받은 것만 같았다.
제 모든 걸 내어주며 결혼을 하고 싶다는 종수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이규는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다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무슨 말이든지 해주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이든 말든 이제는 아무것도 상관이 없었다. 한국이 동성혼이 불가능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종수가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고만 싶었다. 이규가 겨우 입술을 뗐다.
“……종수.”
“……응, 크흠. 응.”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답을 하는 종수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올라갔다. 이규가 그 모습에 낮게 웃음을 흘렸다. 반지가 없는 손으로 종수의 허리를 끌어안아 당겼다.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종수.”
“……응.”
종수는 심장이 쿵쿵 울리는 심장을 느끼며 다시 짧게 대답했다. 더 긴 말을 했다가는 심장이 튀어 나갈 것만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규의 얼굴에 부정적인 반응을 돌려줄 기색이 없는데도, 괜히 마음이 불안했다.
“프러포즈에서,”
종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규의 손이 얹어진 허리도 움찔댔다.
“반지 세 개 받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다.”
이규가 웃었다. 종수가 그제야 긴장을 조금 풀었다. 예쁘게 휜 눈매를 보고 종수가 빠르게 덧붙였다.
“다 너 거 해.”
“진짜 다 나 줄 거야?”
“응.”
종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규가 다시 또 해사하게 웃었다. 이규의 검지가 까닥였다.
“이건 나도 있는 건데도?”
그건, 종수가 생각하지 못한 거였다. 그러고 보니 그 시즌은 이규와 함께 거머쥔 우승이었다.
“……두 개 가져.”
아하하. 이규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종수를 꽉 끌어안았다. 종수의 가슴팍에 코를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품에선 미미하게 술 냄새가 났다. 그제야 제가 말없이 외박한 종수를 밤새워 기다렸다는 게 기억 났다. 따지고 보면 정말 로맨틱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규는 종수만 있다면 매시간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프러포즈하면 딱 떠오르는 그런 이벤트도 좋았겠지만, 이규는 종수라면 이쪽이 더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이건 이규가 내내 바라고 소망하던 것이었다. 이규가 종수에게 내내 전하고 싶던 것이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고, 이리저리 헤맨대도, 그의 곁에는 언제나 제가 있을 것이며, 그러다 잠시 혼자가 된대도 결국 돌아올 곳에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사실.
이규는 종수와 사귀기 전에도, 사귀는 내내도 종수가 이걸 알아주었으면 했고,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길 원했다. 그리고 종수가 며칠간 나름의 고난을 끝내고 반지를 내민 이 순간, 비로소, 이규는 자신이 그만의 완전한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겠다는 걸 직감했다.
심장께가 빠듯하게 차올랐다. 종수는 언제나 제가 상상도 하지 못할 감동을 안겨다 줬다. 그 감동이 너무 커서, 이규는 꼭 사랑에 푹 잠겨있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진득하고 달콤한 액체에 발끝부터 잠식당해 머리끝까지 담겨서,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모든 걸 지배당해 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게 종수가 주는 애정이라면, 이규는 거기에 잠겨 죽는대도 좋았다.
이규가 종수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고, 숨을 크게 골랐다가, 종수의 품에 묻은 얼굴을 느리게 뗐다. 종수에게 다시 손을 건넸다. 종수는 여전히 긴장 태세인 것 같아 보였다. 이규가 바짝 굳어있는 종수의 모습에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이건 안 끼워줘?”
“아.”
작은 탄성을 내뱉은 종수가 허둥지둥 반지를 빼 내 이규의 약지에 끼우려다가, 다시 반지를 케이스에 꽂았다. 이미 커플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수는 커플링을 조심스레 빼내 이규의 오른손에 옮겨 끼우고는, 다시 느리게 결혼반지를 밀어넣었다. 다행히 반지는 꼭 맞았다. 잘 어울리기도 했다. 옆에 번쩍거리는 커다란 반지가 두 개나 있는데도 종수의 눈에는 제가 고른 결혼반지가 제일 빛나는 것 같았다.
예뻤다. 심장이 벅차올랐다. 당장 이규의 얼굴을 부여잡고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이규가 거친 숨을 내쉬는 종수를 다시 불렀다.
“종수.”
“응.”
“그래도 이번엔 멱살은 안 잡았다, 그치.”
“어?”
장난기가 가득한 말에 종수가 얼떨떨한 소리를 냈다. 멱살이라니, 프러포즈와는 정말이지 요만큼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너 나랑 사귀자고 할 때는 기숙사로 쳐들어와서 멱살 잡았었잖아.”
“……언제 적 얘기야.”
10년도 더 된 얘기였다. 종수는 거기에 관해서라면 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규를 좋아하고 있었으면서, 그걸 스스로 깨닫지 못해 다른 애랑 사귀기나 한 과거는 종수에게 참 잊고 싶은 흑역사였다. 그때도 이규는 자기랑 썸타다 다른 여자애를 사귀고 온 자신을 받아줬었다. 지금도 프러포즈 전날에 외박이나 하고 온 자신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언제나 최악의 고백만을 하는 듯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물론 종수는 이규를 제외하고는 이런 관계가 되고 싶은 사람이 없었지만─ 이렇게 사귀지도 못했을 거고, 아무리 탈취제를 뿌렸대도 술 냄새를 풍기며 건네는 반지를 받아주지도 않았을 거였다. 종수는 진심으로 이규가 무르고 착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때 생각한 게 있거든.”
“……뭔데?”
종수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반문했다. 이규가 부정적인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또 지레 찔리는 바람에 초조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널 너무 좋아해서, 너한테는 화를 내 봤자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이규의 말을 듣고, 종수도 그간의 연애를 빠르게 복기했다. 그러고 보면 자신과 이규도 연애 초기에는 꽤 다퉜던 기억이 났다. 되돌아보면 그 모든 싸움에서 맞춰주는 쪽은 대체로 이규였다는 것도, 종수는 새삼스레 인식했다.
역시 이규는 자신을 너무 좋아했다. 그게 아닐 리가 없었다.
그러니 손에 넣어야 했다. 좋아하면 가져야 한다는 마음은 여전했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그렇게 이규를 욕심냈다. 그런데도 마음에 차지 않아 결혼을 꿈꿨다. 그런 마음으로 엉망인 프러포즈를 했다. 이규는 이걸 또 받아줬다. 심지어 반지를 끼워달라고 한 것도 이규였다. 이건 절대 무를 수 없는 수락이었다. 눈앞의 이규가 이제는 진짜로 저만의 이규였다. 드디어 그를 완전히 제 옆에 묶어놓을 수 있다는 만족감이 종수를 휩쓸었다.
키스, 하면 안 되나. 종수는 당장이라도 입술을 갖다 박고 싶었지만, 이규의 말이 끝나지 않은 것 같아 그 충동을 참아야만 했다. 하지만 들썩거리는 몸을 어쩔 수는 없어서, 이규가 종수의 등을 느리게 어루만지며 이유도 모른 채 그를 달랬다.
“그냥 얼굴 보고 풀릴 거면 화는 왜 내나 싶고?”
“……응.”
하지만 뒤이은 말에 빠르게 부풀던 생각이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종수가 괜히 손을 꼼지락댔다. 금세 풀어졌어도 역시 화가 단단히 난 게 맞았다. 오늘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이규의 목소리는 종수에게 향한 적이 없는 단호함과 엄격함이 서려 있었다. 종수도 그걸 충분히 느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해외여행에서 애인을 내버려 두고 뛰쳐나가는 건 최악의 행동이 맞긴 했다. 종수는 이번에도 역시 할 말이 없었다…….
“근데 10년이 지나도 똑같더라고.”
그래도 그 얘기를 하는 이규의 목소리가 숙소에 처음 들어섰을 때만큼 딱딱하지는 않아서,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보드랍기만 해서, 종수가 또 슬쩍 이규의 눈치를 봤다. 이규가 종수의 코에 제 코를 맞대며 속삭였다.
“10년 동안 너가 더 좋아졌다는 소리야.”
하지만 그 말을 들어도 종수는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화 많이 났어?”
“걱정을 많이 했지.”
이규는 속도 없이 화보다는 걱정이 더 컸다는 소리를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불편하게 일렁이는 마음속에서 묘한 기쁨이 피어오르는 걸 부정할 수 없기도 했다. ‘이규는 나를 좋아해.’ 몇 번이고 되새긴 사실이 다시 크기를 키워 종수의 머릿속을 휩쓸었다. 그것만으로도 남아있는 불안함이 모조리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저열한 기쁨이래도 어쩔 수 없었다. 거부하기에는 너무 달콤했다.
세상에 이규만큼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그 이규가 이제는 제 것이었다. 그것도 남들에게 내보일 수 있는 저만의 것. 저만의 이규. 종수는 빠듯하게 차오르는 희열 사이로 다시 다짐했다. 이규한테 잘해야겠다고. 그리고 사과도 또 해야겠다고.
“미안.”
“미안하다는 말을 또 듣자는 건 아니었는데…….”
이규가 곤란하게 웃었다. 물론 종수는 이규가 그런 웃음을 짓게 하고 싶어 사과를 한 게 아니었다. 덕분에 종수는 이규의 위에 올라타 앉은 채로 잠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그냥 냅다 이규의 얼굴에 뽀뽀를 쪽 했다. 이건 종수가 이규를 웃게 하고 싶을 때마다 할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방법이었고, 그만큼 잘 먹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물론 조금 전 키스를 하고 싶었던 마음도 조금쯤 담았다.
다행히 이규는 종수의 기대대로 반응해 줬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사르르 녹듯이 웃었다. 예뻤다. 접힌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 사랑이 가득했다. 그걸 마주한 종수는 두근대는 심장을 참을 길이 없어 이규의 얼굴 여기저기에 다시 입술을 꾹꾹 눌러댔다. 이규가 키득거리며 종수의 입술에 마주 입 맞췄다. 종수가 했듯이 커플링을 살살 빼내 오른쪽에 옮겨 끼웠다. 그러고는 종수가 계속 들고 있던 케이스를 가져와, 남아있는 반지를 빼냈다.
“종수.”
종수가 이규의 손 위로 홀린 듯이 제 손을 얹었다. 이규가 긴장으로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온 손을 만지작댔다.
“우리 그때는 친구 말고 애인하자고 그랬는데,”
그러고는 종수의 약지에 천천히 반지를 끼웠다.
“이제는 애인 말고 남편 할까?”
이규가 종수의 손가락에 자리 잡은 반지를 쓰다듬으며, 종수를 올려다봤다. 종수는 발갛게 상기된 이규의 얼굴을 보며 느리게 답했다.
“……응.”
고개도 끄덕였다. 반지가 주렁주렁 달린 이규의 손을 맞잡았다. 몇 번이고 뒤집어 서로의 손에 반지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규가 웃으며 덧붙였다.
“너가 색시가 더 좋으면 그걸로 할게.”
“뭐든 좋아.”
“그럼 나는 욕심내서 색시도 하고 남편도 해야지.”
“……그게 뭐야.”
“너가 색시라는 말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런가. 종수는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가 최고의 남편감이고 사윗감인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도, 그가 최고의 색싯감이기도 하다는 건 자기만 아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 뭔가 혼자서 납득을 마친 것만 같은 종수를 껴안은 채, 이규가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응? 서방.”
일부러 조르는 목소리를 내는 건 덤이었다.
“……뭐래.”
“내가 색시면 넌 서방님 해야지?”
“흥.”
종수는 또 괜히 좋아 툴툴대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규가 휙 돌아간 고개 덕에 보이는 종수의 볼에 또 연신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종수의 얼굴 바로 앞에서 속삭였다.
“서바앙.”
“……왜.”
“나 키스하고 싶어.”
종수가 흘끗 이규를 내려다봤다. 이규가 씨익 웃어 보였다.
“해도 돼?”
그렇게 말하며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그 옛날 뽀뽀를 하고 싶다던 어린 날 이규의 얼굴과 똑 닮아서, 종수는 말없이 입술을 포갰다.
자연스레 벌린 이규의 입안으로 종수의 혀가 파고들었다. 조금 전 마신 꿀 레몬차의 맛이 타액에 섞여 들었다. 이규와는 셀 수도 없을 만큼 입술을 부볐는데도, 이게 꼭 첫 키스인 것만 같아서, 종수는 벅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고개를 비틀어 이규의 입안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 낮게 웃으며 자신을 꽉 껴안아 주는 이규가 견딜 수 없이 좋았다.
고작 반지를 주고받았을 뿐인데, 종수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후기]
안녕하세요! 썬칩입니다!
드디어!!!!!!!!!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
이 순간 가장 기쁜 건 저입니다...(ㅋㅋㅋㅠㅠ) 작년에 이랑해 낸 직후부터 이 장면을 써뒀는데... 중간에 앤솔 한다고 한번 미뤄지고, 또 돌발본 낸다고 한번 미뤄져서... 근 반년을 묵혀뒀던 부분까지 드디어 도달할 수 있게 되어 정말이지 감개가 무량해요ㅠ
아무튼 안달복달하던 프러포즈가 드디어 성사가 됐습니다. 눈물뚝뚝 꼬질꼬질 엉망인 프러포즈를 하는 건 언제나 사랑스러우니까요ㅠ_ㅠ!! 번지르르하고 무탈한 프러포즈가 아닌 우당탕탕인, 하지만 그래도 서로가 있어서 행복한! 프러포즈를 보고 싶어서 앞의 그 수많은 개연성을 세우고(퀭) 맘고생 해가며(이건 규쫑만이)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대도 과언이 아닌데, 어떻게... 즐겁게 보셨을까요?!?! (너무 기대되니까 꼬옥 댓글로 얘기해주시면좋겠다................!!!!!!!!! 제가 진짜 너무. 신나서. 그렇습니다.) 아무튼 읽는 분들께도 만족하실만한 하이라이트를 제가 선보였다면 좋겠다!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다음편은 성인본이고요. (프러포즈 햇는데 어케 안 뒹굴지?!) 그게 한편이 될지, 두 편이 될 지는 모르겟습니다만... 아무튼... 그걸로 본편은 깔끔하게 마무리 한 뒤에~!
외전. 결혼식. 및. 허니문 노딱을 가지고 또 찾아뵙겠습니다. 아주 완벽하죠?!?!?!??!?! 외전은 원래 소장본에만 싣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표지가 너무 결혼식이라서 어떻게 해야 고민중에 있다는 주저리를...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후기에 써두고 갑니다(ㅋㅋ
+) 추가로! 중간에 잠시 나온 처음 사귀게 된 부분은 규쫑 게북에 실었던 내용으로, 유료발행 되어있으니 참고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안 보셔도 무관합니다!! (하지만 짱 귀엽긴 합니다요.)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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