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가비지타임/규쫑] 그래도 나랑만 해 - 7

규쫑 by 썬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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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고 : 지나친 음주는 뇌졸중, 기억력 손상이나 치매를 유발합니다. 임신 중 음주는 기형아 출생 위험을 높입니다.

* 절대로 종수처럼 술을 들이 부으면 안 됩니다… 이녀석은 술로 자학을 하고 있는거에요ㅠ(아주 안 좋은 버릇입니다!!!!!!!!) 전연령가 글이라 앞부분에 경고문을 달아둡니다! 🙇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온 종수는 정말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발 닿는 대로 달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속에서 나는 천불이 온몸을 태워버릴 것만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목은 또 말라서, 종수가 욕을 중얼거리며 가방 안에서 지갑을 찾아들고 마트에 들어섰다. 진짜 어이가 없었다. 프러포즈해야 하는 대상인 애인은 햄버거집에 버려두고 뛰쳐나온 주제에 목 같은 게 말라서 물을 사러 들어가는 제 꼴에 웃음이 나왔다.

대충 스포츠 드링크를 사고 나와 둘러본 거리는 익숙했다. 꽤 오랜 시간을 살아서 그런지, 생각 없이 달린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종수는 이곳에 살 때 틈틈이 들리곤 했던 공원으로 자연스레 향했다. 마침 자주 앉던 벤치도 비어있어, 종수는 그곳에 털썩 앉았다. 사 온 음료의 병뚜껑을 따고 단숨에 반을 해치웠다.

“하아…….”

긴 한숨이 절로 흘렀다. 종수가 반쯤 남은 음료병을 든 채 남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땀에 젖어 축축한 머리가 기분이 나빴다.

사고를 아주 거하게 쳤다. 드디어 현실 자각이 좀 됐다.

가방에 대충 처박아 둔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규에게서는 끊임없이 전화가 오고 있었다. 종수는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이내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꾼 뒤 다시 가방에 쑤셔 넣었다. 지금은 이규의 목소리를 들을 자신도 없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마음에도 없는 막말을 쏟아내거나, 서운함을 토로하며 그간의 삽질을 다 말해버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종수는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여전히 프러포즈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뛰쳐나온 상태로 프러포즈를 제대로 할 자신도 없었다. 새벽에 충동적으로 예약을 한 탓에 이규는 모를 레스토랑에 가 그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종수가 남은 음료를 또 벌컥벌컥 들이켰다. 속이 답답해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 뛰쳐나와 달리긴 했는데 이제야 슬그머니 걱정이 됐다. 이규는 영어도 잘 못하는데 어떡하나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지난 여행 내내 구글 맵을 저보다 잘 보던 이규를 생각하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다행히 이 뒤에 중요한 일정은……. 문제의 레스토랑이 있었지만, 이규에게 장소가 어딘지 링크를 보내준 적은 없으니, 한국에서처럼 숙소에 잘 들어갔겠거니 싶었다.

이규가 이렇게 뛰쳐나온 저를 찾아 헤맨 적이 있긴 했었다. 그때는 제가 처음으로 이런 식으로 이규를 벗어난 때였고, 한국이었으며, 그렇기에 이규가 짐작해서 뒤질만한 장소가 있었다. 그러니 그런 곳을 찾아다닌 거였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규는 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게 당연했다. 종수는 이규가 올 때마다 제 자취방에서 그와 내내 붙어있던 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무살의 제가 이규는 절대 모를 아무곳에 처박혀서 생각했듯, 그가 자신을 찾아줬으면 하기도 했고, 이대로 혼자 마음을 다잡고 싶기도 했다.

아무튼 자랑은 아니었지만, 그게 몇번 반복되니 이규는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집에서 자신이 오기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저 같은 걸 찾으려 타지를 헤매지는 않을 거였다.

종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서 달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규는 숙소에 얌전히 들어가 있을 거였다. 그래야만 했다.

속이 시끄러웠다. 역시 이 답답함이 해소가 안 됐다. 게다가 혼자 떨어져 있으니 애써 외면하고 있던 감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까지 했다.

자신이 없었다.

종수로서는 정말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자신이 없던 적이 없었다. 미국행을 고민할 때는 막막하고 불안했다. 하지만 자신은 있었다. 이때까지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던 이유는 제가 갈 길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 길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고, 부족하면 어떻게든 더 해낼 수 있다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해내보이리라는 자신. 그게 있었다.

반면에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막막한 데다 답답했고, 심지어 제 존재가 하염없이 쪼그라든 것만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있던 종수가 땅에서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제가 하는 일이 둘의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마음만이 확실했고, 나머지는 모두 불확실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확실하다고 여기는 제 마음조차 욕심에 가까운 것만 같았다.

종수는 한평생을 욕심껏 살아왔다. 하고 싶은 건 다 했다. 농구도, 연애도, 미국 진출도, 귀국도, 모두 원하는 만큼 달려가 모조리 손에 쥐었다. 그런데 왜 결혼만큼은 이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지 속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전의 것 중 수월하게 손에 넣은 건 단 하나도 없는데도 그랬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8년과 며칠을 비할 수 없기도 했다. 농구 전체를 보자면 15년도 훌쩍 넘는 시간이었다. 그에 비해 삼사일 정도는 새발의 피에도 못미치는데도 불구하고, 종수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어려운 시련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다. 다음 전략을 생각해 낼 수도 없었다. 망망대해에 버려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차이는 단 하나였다. 그 전의 모든 시련에는 이규가 어떻게든 함께 있었고, 지금은 이규가 없었다. 이규에게 기댈 수 없었다.

또 속에서 뭔가가 왈칵 치밀어 올랐다. 이규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됐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골이 났고, 그 상황을 만든 게 자신이라 더 열불이 났다. 종수가 다시 후끈하게 타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려 숨을 골랐다.

이쯤 되니 열을 지어 기어가는 개미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그들이 가는 길이 그렇게 명확해 보일 수가 없었다. 종수는 다시 한번 한없이 작아진 자신을 느꼈다. 지금 자신은 개미보다 작을 게 분명했다.

종수는 다시 또 개미들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더 숙였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대로 딱 한 시간만 사라졌다 다시 생겨나고 싶었다.

[야.]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종수의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종수가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황당한 얼굴을 한 남자 둘이 서 있었다.

[너 뭐야?]

종수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만날 줄 몰랐던 사람들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여행 같이 온 거 아니었어?]

종수가 다시 둘을 바라봤다. 팀 내에서 지겹게 봤던 스테판과, 어쩌다 키스하는 걸 목격해서 소개받게 된 그의 애인 로시였다. 여전히 대꾸가 없는 종수가 답답했는지, 둘이 또 거듭 질문을 던져댔다.

[저기요. 안 들리세요?]

[어디 안 좋아?]

종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둘을 보니 간신히 저편으로 보냈던 결혼식 생각이 또 나서였다. 당연했다. 이 둘은 종수의 결혼식의 증인이 되어줄 사람들이었고, 그중 한 명은 웨딩 스냅을 찍어줄 작가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이 모든 서프라이즈의 시작을 함께한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너 진짜 무슨 일 있어?]

시종일관 가볍게 얘기하던 스테판마저 걱정을 내비치자, 종수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너네는 왜 여기 있는데.]

그 말에 로시가 여상하게 답했다.

[우리 이제 이 주변 살잖아.]

아. 종수가 작게 탄성을 내뱉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토랑 조사 때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아서였다. 맥스―스테판이 키우던 래브라도레트리버였다―를 산책시키기에는 이 근방이 더 좋아, 이쪽으로 이사를 올 거라더니 그게 이미 끝난 일이었구나 싶었다.

[기억났냐?]

[어. 이사는 잘했고?]

[응. 다음에 올 때는 우리 집에도 놀러 와.]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아무튼. 너 왜 여기 혼자 있냐고.]

스테판이 이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애인을 두고 여기에서 혼자 우울함을 내뿜고 있는 종수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어제가 디데이 아니었어?]

로시도 스테판과 같은 생각이었다. 애인 얘기만 하면 분위기가 풀어질 정도로 상대를 좋아하는 종수가, 그렇게 기대하며 열심히 준비한 프러포즈 다음 날 혼자 있는 게 말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종수도 그들의 의문을 알아챘다. 하지만 이건 정말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겹친 결과였다. 로시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종수는 그 억울함에 관해 사흘 밤낮을 얘기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씨발.”

그간 벌어진 일을 떠올리자니 역시 열불이 났다. 종수가 욕을 짓씹고는 가지고 있던 빈 병을 대충 쓰레기통에 대충 던졌다. 물론 시끄러운 머릿속 탓에 음료수통은 아주 깔끔하게 빗나가 버렸다. 그걸 본 스테판이 휘파람을 불더니 종수를 향해 이죽거렸다.

[한국 가더니 감 다 죽었다?]

[시끄러워.]

오랜만에 봐 놓고서는 또 평소처럼 투닥이는 둘을 보고 로시가 한숨을 쉬더니, 병을 주우러 가려 몸을 돌렸다. 스테판이 그를 제지하고는 쓰레기통 앞을 향했다. 그가 없어진 틈을 타 로시가 종수의 옆에 앉아 조곤조곤 말을 건넸다.

[나랑 스테판이 갔다 와서 추천해 준 데 간 거 아니었어?]

[갔어.]

[근데 왜 여기에 혼자 있어.]

종수가 답을 하려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던 상황에 코웃음을 쳤다. 간단하게 답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쓰레기통에다 음료를 버리고 돌아온 스테판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예쁜이는 어딨어?]

[너 자꾸 예쁜이라고 할래?]

종수가 단숨에 발끈했지만, 스테판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니가 이름을 안 알려주잖아.]

[스테판 로저스.]

로시가 스테판을 제지했다. 스테판은 억울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으나, 벤치에 앉은 둘의 매서운 시선만이 날아들 뿐이었다. 로시는 앞에 서 있는 스테판의 존재 아랑곳하지 않고 종수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그래서. 남자친구는?]

종수는 질문의 답을 생각하다가, 이내 우물쭈물 답했다.

[……몰라.]

[왜 몰라?]

스테판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옆에서 로시가 정강이를 발로 차도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게. 왜 모르는 걸까. 이규에 대해서 제가 모르는 게 있으면 안 됐는데. 종수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실 이유야 당연했다. 제 감정이 감당이 안 돼 뛰쳐나왔고, 그것 때문에 연락도 모조리 무시하는 중이니 그 원인은 자신이었다. 그래 놓고 이규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초조해지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양심이 없었다.

역시 스스로가 너무 못난 것 같았다. 이런 애랑 누가 결혼하고 싶어해……. 종수의 생각이 다시 땅속을 파고들 듯 떨어졌다. 금세 불안한 기운을 뿜어내는 종수를 보고 로시가 다시 차근차근 질문했다.

[어제 프러포즈하지 않았어? 싸웠어?]

[……선수 뺏겼어.]

[뭐?]

앞에 서 있던 스테판이 펄쩍 뛰며 반문했다. 종수가 옆에 앉아있는 로시도, 고개를 들어 봐야 하는 스테판도 아닌 빈 곳으로 시선을 피하며 조그맣게 답했다.

[딴 새끼가 먼저 프러포즈했다고.]

[뭐?]

이번엔 로시가 또다시 되물었다. 후우. 종수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서 더 그랬다.

[네 예쁜이한테 누가 프러포즈를 했다고?]

하지만 스테판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댔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종수가 순식간에 얼굴을 구겼다. 반사적으로 험한 말이 튀어 나가는 것도 당연했다.

[미쳤어?]

다른 누군가의 프러포즈를 받는 이규라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엔 그 자식은 죽고, 이규도……. 이규는……. 이규의 말은 한번 들어봐야 했다. 이규가 자신을 두고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도 불쾌한 일이라 종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죽고 싶어?]

[니가 한 말이 그거잖아.]

연이은 말에 스테판이 황당하고 억울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종수도 스테판의 말을 듣고는 그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는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 정도로 짜증이 사라지지는 않아서, 종수가 여전히 와그작 구겨진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하기 전에 다른 커플이 먼저 했다고.]

[……진짜?]

옆에서 멍하니 추임새를 넣는 로시의 말에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같은 타임에?]

[왜. 안 믿겨?]

이죽거리며 이야기하던 종수가 다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열받은 탓에 쏘아붙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얘기를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으니 좀 살 것 같기 때문이었다. 둘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는 듯했지만, 로시가 먼저 고개를 젓더니 말을 붙였다.

[아니. 그럼 어떻게 돼. 결혼식은? 모레잖아?]

[몰라.]

스테판도 재빠르게 가세했다.

[모르긴 뭘 몰라.]

[모른다고.]

[모른다고 하면 되는 일이야?]

[그래도 몰라.]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같은 말만 반복하는 종수에 인상을 찌푸린 스테판을 다시 로시가 막아섰다.

[남자친구 영어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

[……지도는 나보다 잘 봐.]

[숙소 가 있으라고 했어?]

[……가 있을걸.]

종수가 다시 저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웅얼댔다. 로시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크게 싸우면 몇 번 뛰쳐나가곤 했다더니,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만 장소가 좋지 못했다. 거기는 한국이고, 여기는 샌프란시스코였다. 이곳은 종수의 애인에게는 낯선 도시일 게 뻔했다.

종수에게서 그간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의 성정을 생각해 보자면, 지금 연락을 못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나쁜 말을 퍼붓고 싶은 사람은 없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종수의 그 애인이라면, 지금 종수를 찾으려 이 샌프란시스코를 뛰어다닌대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스테판은 옆에서 고민에 빠진 로시와 평소와 달리 축 처진 종수를 보고, 그의 신발 앞코를 툭, 발로 쳤다.

[야.]

종수가 그 와중에도 또 미간을 좁히고는 스테판을 노려봤다.

[뭐.]

그래도 침울한 것보다는 앙칼진 게 나아서, 스테판이 입꼬리를 올렸다. 스테판이 아는 최종수라는 인간은 침울할 틈 같은 건 없이 끊임없이 전력으로 달려 나가는 게 멋진 놈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 먼 곳까지 날아와 죽기 살기로 농구를 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졌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농구를 좋아하고, 또 농구에 간절하지만, 종수는 뭔가 더 특별한 게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치열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내 온몸을 불태우듯 살던 녀석이 풀이 죽어 있는 건 아무래도 보기가 그랬다. 마음이 쓰이고 불편했다. 그래서 종수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내내 그를 귀찮게 한 거고, 오지랖도 부려 결혼도 도와주게 된 거였다. 

다행히 그간의 경험으로, 스테판은 이런 종수에게는 뭐가 특효약인지도 잘 알았다.

[술 사줄게.]

바로 술이었다. 종수는 평소에는 입을 꾹 다물고 해야 할 말만을 하는 타입이었다. 그래도 술에 취하면 제법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대부분이 애인 이야기였지만, 그 말을 하는 종수는 농구공을 손에 들었을 때와는 정말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에, 스테판은 종종 그를 불러 같이 술을 마셨─사실은 종수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게 타지에서 고생하는 친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제가 해야 하는 일은 별다르지 않을 터였다. 스테판이 여전히 날카로운 얼굴의 종수를 보고도 그저 웃기만 했다.

하지만 로시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로시는 그 말을 듣자마자 스테판을 노려봤다.

[남자친구가 혼자 있다는데 뭔 술이야.]

[얘 술이라도 안 먹이면 여기서 계속 이럴걸.]

그건 로시도 동감하는 말이긴 해서, 별다른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반응을 기민하게 알아챈 스테판이 종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존나 헤어진 것처럼 청승은.]

[미쳤냐?]

말은 그렇게 해도, 종수는 스테판이 일부러 내밀어 준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종수를 당겨 어깨를 맞부딪힌 스테판이 금세 유들유들한 얼굴을 하고는 덧붙였다.

[헤어지면 또 사줄게.]

[죽을래?]

종수가 단숨에 손을 들어 스테판을 쳤다. 주먹으로 어깨를 꽤 강하게 맞아놓고도, 스테판은 여전히 낄낄대기만 했다. 종수가 씨근대는 숨을 내쉬며 그를 노려봤다.

[그래서 뭐. 안 가?]

스테판은 눈썹을 까닥이면서 여전히 몸을 들썩였다. 종수가 그 모습에 입술을 짓씹고는 답했다.

[……가자.]

끌리는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들이부은 와인 한 병으로는 진정이 안 됐다. 직전에 마신 스포츠 드링크 따위로는 당연하게도 턱없이 부족했다.

[비싸고 독한 거로.]

이 복잡한 머릿속을 알코올로 둔하게 만들어야 했다. 순간 ‘그거 너무 안 좋은 버릇 같은데, 종수…….’ 하는 이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종수는 그걸 애써 떨쳐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까 맥주로 간단하게 마시고, 자리 옮기자.]

이어지는 스테판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시가 종수를 따라 일어서서 스테판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셋은 이내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종수는 괜히 가방끈을 고쳐 맸다. 안에 든 건 반지 세 개와 지갑, 그리고 핸드폰 정도가 전부인데도, 이게 왜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난리를 치고 나온 주제에 새삼스레 이규가 또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를 만나서 못된 말을 안 할 자신이 없었다. 역시 자신이 문제였다. 어깨가 절로 처졌다. 발걸음도 절로 느려졌다. 아닌 척하면서도 종수를 지켜보던 스테판과 로시가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스테판의 손이 종수의 등에 가 부딪쳤다. 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타격에 종수가 몸을 움찔 떨고는 스테판을 쳐다봤다. 스테판이 종수에게 어깨동무하듯 목에 팔을 감아 당겼다. 종수가 그런 스테판을 힘껏 밀쳤다.

[뜨거워. 떨어져.]

스테판이 두어 걸음쯤 밀려나더니 이번에는 로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들으라는 듯이 로시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우리는 왜 데이트 나와서 너를 만나가지고…….]

그치. 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도 덤이었다. 로시가 그런 스테판을 툭 쳤다. 스테판은 그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시에게 제 큰 몸을 더 치대기에 바빴다. 그게 눈꼴셔서 종수가 괜히 한소리를 얹었다.

“데이트는 무슨”

[너 뭐라고 했어?]

갑자기 들리는 한국어에 스테판이 따져 물었다. 종수는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을 퍽 밀치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뭐라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렸으나 제가 알 바는 아니었다.

[야! 너 어디 가는지 알고는 가?]

[너 가는 데가 거기서 거기지.]

[흠. 그렇긴 한데.]

그 말에는 스테판도 동의하는 바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로시도 들뜬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직도 기억하네?]

[뭐…….]

종수가 괜히 고개를 돌렸다. 로시가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종수는 제법 귀여운 데가 있었다. 그의 애인이 그를 왜 그렇게 싸고도는지 알만했다. 스테판은 웃음이 가득한 로시 옆에 찰싹 붙어서, 잠시 멈췄던 추궁을 이어갔다.

[방금 그 말은 뭐야. 욕했어?]

[아니.]

[그럼 뭔데.]

종수가 여전히 뚱한 얼굴로 둘을 쳐다봤다. 자기는 예뻐 죽는 애인을 두고 이렇게 도망쳐 왔는데, 이 녀석들이 이러는 걸 보니 염장질을 당하는 기분이어서 더 그랬다.

[응? 뭔데?]

스테판은 어쩔 수 없었지만, 로시한테도 그렇게 굴 수는 없었다. 종수도 은혜 정도는 알았다. 스테판처럼 섬세함이라고는 없는 놈과 어째서 사귀어 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로시는 좋은 녀석이었다. 이규의 마음을 모르겠을 때 언제나 자문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규와 성정이 비슷했다. 이규와 닮은 녀석이 나쁠 리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 예민하게 굴 필요도 없었다. 종수가 결국 입을 열어 원하는 답을 들려줬다.

[데이트 아닌 거 안다는 말이었어.]

[진짜?]

[내가 거짓말을 왜 하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이 자식은 날 선 말은 잘도하는 주제에 어떻게 되먹은 놈인지 마음에도 없는 말은 죽어도 못했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스테판이 다시 따져 물었다.

[야. 아무튼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산책 나온 거잖아.]

부루퉁한 종수의 말에 스테판이 기분 나쁠 정도로 환하게 웃더니 대꾸했다.

[매 순간이 데이트지.]

[하…….]

종수가 긴 한숨을 내뱉는 것도 당연했다. 이 자식은 이런 답도 없는 멘트를 시도 때도 없이 던져댔다. 그 말이 향하는 당사자인 로시도 스테판을 떨쳐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종수의 등을 밀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종수. 진정해. 술이나 마시러 가자.]

종수가 로시가 미는 대로 밀려주며 앞을 향해 걷다가, 슬쩍 뒤를 본 뒤 덧붙였다.

[이 자식 더 심해졌다?]

로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종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 반가워서 그런 거지, 뭐.]

[쳇.]

[나도 너 오랜만에 봐서 반갑고 좋아.]

이어진 로시의 말에 종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런 면이 이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오십 번쯤 시도해도 단번에 전할 수 없는 마음을 올곧게 전한다는 점. 그 한마디로 날 서 있던 사람을 물렁물렁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

그 생각을 하니 또 이규가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는 그 애의 말이 듣고 싶었다. 거기에 ‘나도.’라고 답해주고 싶었다. 로시의 말에는 바라는 바를 담아 둘러대긴 했지만, 숙소에는 잘 돌아갔을지 걱정도 됐다. 그런데 역시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용기가 안 났다. 종수가 순식간에 다시 침울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걸 기민하게 알아챈 로시가 종수의 등을 다시 느리게 두드렸다.

[가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줘. 너 진짜 기대했었잖아.]

[……응.]

[너 안 그래도 말 안 하는데, 걔한테도 말 못 해서 진짜 답답했겠다.]

[……응.]

[가기 전에 애인한테 연락 좀 해주고.]

종수가 슬그머니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다행히 연신 울리던 전화는 멈춘 듯, 화면이 새까맸다.

[어. 좀 이따 할게.]

 

* * *

맥주를 마시면서 프러포즈 날의 이야기를 나눈 셋은, 자리를 옮겨 위스키로 주종을 바꿨다.

그 후에는 그래도 그전에는 재밌게 여행했을 거 아냐? 라는 한마디에, 종수가 위스키를 샷으로 세잔을 연거푸 들이키는 걸 본 후에야, 취기가 오른 종수에게서 다른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이틀 차 마음 떠보기에서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후, 악몽을 다시 꿨다는 얘기에는 둘 다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게 이 둘은 그 악몽의 내용을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악몽은 이규에게 스캔들이 터졌던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해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를 믿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그가 너무 좋은 사람인 걸 알아 사서 하는 걱정에 더 가까웠다― 이규가 이곳까지 날아오는 그사이의 몇 달을 악몽에 시달리며 살았더랬다. 덕분에 초췌함과 예민함을 감출 길이 없어 겉으로 티를 잔뜩 내고 다녔으니, 둘에게 이유를 추궁당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에도 이렇게 술을 마신 뒤 주절주절 떠든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지금도 이규가 없어서 이렇게 술을 들이켜고 있는 거였다. 애초에 이규가 아니면 술을 마실만큼 속상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다음에는 자연스레 오늘은 그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여기에서 혼자 헤매고 있었냐는 질문이 뒤따랐다. 종수는 그 질문에 또 술을 따르려다가, 결국 샷 잔을 빼앗기고 얼음이 담긴 온더락 잔이 쥐어진 후에야 입을 열었다. 자질구레한 불행이 겹쳤다고 말했을 때는 둘 다 얼이 빠진 듯 굴더니, 아이패드에 싸인을 해줬다는 말에는 조금 분위기가 풀어졌지만, 거기서 친구라는 말을 듣고 그냥 뛰쳐나왔다는 소리에는 둘 다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오, 와우. 오……. 와…….]

[상황이 좀 너무하긴 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스테판을 두고, 로시가 말을 덧붙였다. 한참을 턱을 쓸던 스테판도 느리게 동의를 표했다.

[그렇네…….]

[그래도, 음. 종수 너의 마음은 알겠지만, 네 남친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닐 거라는 거, 알지?]

로시가 얼음이 빨리 녹도록 빙글빙글 잔을 돌리고 있는 종수에게 조곤조곤 말을 건넸다. 종수의 성격을 알고 있으니 그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자신과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던 그의 애인이 걱정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스테판은 모르게 종수에게 연애 상담을 몇 번 해줘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다행히 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순순한 답도 함께였다. 물론 그 후에 또 손아귀에 있는 잔을 입에 가져다 대기도 했다. 금세 비워진 잔에 스테판이 술을 더 채웠다. 꼴꼴, 술을 따르는 소리가 또 속도 없이 청량했다.

[연락은 진짜 안 해?]

로시가 다시 한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맥주를 마시러 이동할 때 한 번, 이곳에 올 때 또 한 번 연락을 해주라는 소리를 했는데, 했다는 이야기는 없어서였다. 물론 종수가 그런 결과를 하나하나 공유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연락이 닿았다면 자신들과 지금까지 술을 마시고 있지 않을 거라는 게 로시의 생각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또 잔을 만지작 대기만 하던 종수가 작게 답했다.

[……못 해.]

사실 종수도 이곳으로 이동하기 전 화장실에 들렀다, 핸드폰을 꺼내 이규에게 오늘 안에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카톡이라도 남겨두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핸드폰은 아무리 만져대도 까만 화면에서 반응이 없었다. 아마 그사이에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었다.

종수는 거기에 또 한 번 좌절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로시의 말대로 맥주를 마시러 이동할 때 한마디라도 해둘걸, 하는 후회도 됐다.

반면 맥이 풀리는 기분을 또 느끼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을 더 놓게 되기도 했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었지만 취기가 오르고 있는 종수의 머리는 이성적인 사고 대신 부정적인 충동만이 가득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내일 숙취가 대단할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손. 이규가 괜찮을 거라고 애써 믿는 무책임한 마음. 하지만 그것들이 불안하고 용기 없는 마음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라서, 종수는 아직 차가워지지도 않은 위스키를 또 반쯤 들이켰다.

[왜?]

[배터리 없어.]

[……왜?]

로시로서는 당연한 물음이었다. 종수는 언제 애인에게 연락이 올지 모른다며 매번 핸드폰 배터리를 꽉꽉 채워 충전해 다녔었기 때문이었다.

[……어젯밤에 오늘 갈 식당 간다고 알아보다가 충전기 안 꽂았어.]

[식당? 식당 예약을 해뒀어?]

로시가 종수를 살살 구슬려 답변을 듣는 내내 나초를 와그작와그작 씹어대던 스테판이 예상치 못한 내용에 질문을 던졌다. 황급히 시계를 봤더니 어느새 시간이 한참이 지나 있었다. 7시 10분을 막 넘어가는 참이었다.

[…….]

종수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로시가 다시 종수에게 물었다.

[오늘?]

종수는 아무런 말 없이 또 술을 홀짝였다. 답이 없는 걸 보니 오늘이었다. 스테판이 다시 종수를 닦달했다.

[뭐야. 어디에서 몇 시에.]

[몰라.]

[모르긴 뭘 몰라.]

순식간에 종수보다 심각해진 스테판을 만류한 로시가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지금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냐?]

[어디를?]

[새로 찾은 식당.]

종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스테판 옆에 있던 위스키병을 들고 와 또 술을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한국인은 다 그러는 건지 종수만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항상 술을 너무 빨리 마셨다. 로시의 미간에 스테판과는 다른 이유로 힘이 들어갔다.

[종수. 천천히 좀 마셔.]

로시의 만류에도 끝까지 잔을 비워 낸 종수가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고는 작게 답했다.

[……이미 늦었어.]

그런 종수의 태도에 스테판이 다시 그를 재촉했다. 원래도 해야 하는 말을 안 하는 탓에 답답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예약은 몇 신데? 우버 불러줄게.]

[시간 지났다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날 선 대화를 주고받는 스테판과 종수의 사이로 로시가 끼어들었다.

[종수. 너 남친은 거기 가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 지금이라도 가보는 게 좋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종수의 대답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걔 거기 어딘지 몰라.]

종수는 그렇게 답했지만, 로시의 생각은 달랐다. 그간 종수의 술주정으로 전해 들은 그의 애인은 정말이지 섬세하고 다정했으며, 종수가 한 말이라면 모조리 기억하는 타입 같았다. 그런 그가 종수가 예약한 레스토랑이 어디인지 물어보지 않았을 리가 없고, 그걸 알아보지 않았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이걸 설명했다가는 종수가 또 위스키를 한 석 잔쯤 들이켤 것 같았고, 그렇게 되면 뒷감당이 안될 게 뻔해 로시는 애써 돌려 그 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내 폰 빌려줘? 너라면 애인 폰 번호 같은 건 외우고 있을 거 아냐.]

[안돼.]

하지만 이렇게 단호한 대답이 돌아오리라고는 로시도 상상하지 못했다.

종수는 진짜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상태로 이규를 본다면 또 꼴사납게 엉엉 울어버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또 이규를 잔뜩 걱정시켜 버릴 거였다.

[안되는 게 뭐야. 국제 전화 써도 돼.]

당황해서 말을 잃은 채 눈만 깜빡대고 있는 로시 옆에서, 스테판이 또 덧붙였다. 하지만 종수에게서 흘러나오는 답은 동일했다.

[안돼.]

[뭐가 안 되는데.]

이규는 제가 화를 내면 비 맞은 개새끼 같은 표정을 보여줬지만, 제가 울면 진짜 안절부절못하는 게 티가 났다. 화가 나서 눈물이 나는 거라 말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더니, 제가 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속상한 소리 좀 그만하라고 했다.

이규가 또 그런 소리를 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종수는 이규의 입에서 속상하다는 마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덜컹댔다. 이미 그럴만한 짓을 잔뜩 저질러 버렸지만, 더는 안됐다. 이규가 자신이 훌쩍이는 걸 아는 것보다 화가 났다고 멋대로 생각해 버리는 편이 더 나았다.

[……아무튼 안돼.]

[너 계속 한심하게 굴래?]

[몰라.]

그러니 한심하다는 걸 알아도 그만둘 수 없었다.

[뭘 몰라.]

[모른다고.]

스테판의 거듭된 추궁에도 종수가 내뱉는 말은 똑같았지만, 절대 거짓은 아니었다. 정말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둘의 말대로 연락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하지 않고 숙소든 어디든 가보는 게 나을지, 레스토랑까지 갔는데 이규가 있는 게 나을지, 혹은 없는 게 나을지, 만에 하나 걔가 이런 나한테 드디어 질려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알아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그를 붙잡아야 하는지, 그러니 지금 제가 해야 하는 최고의 선택은 무엇인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질문지와 아귀가 맞지 않는 선택지만이 종수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 혼란함 속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도 다 최악의 결과만을 가져다줄 것 같았다.

[종수.]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는 종수 탓에 옆에서 같이 씩씩대기 시작한 스테판을 만류한 뒤, 로시가 종수를 불렀다.

종수는 문득 또 서러워졌다. 제 이름을 불러주는 게 눈앞의 사람이 아니라 이규였으면 했다. 자신을 부르며 당연하게 내어주는 품에 몸을 묻고, 그의 냄새를 가득 들이키고 싶었다. 하지만 이규는 지금 없었다. 제가 그에게서 도망쳐 왔다. 몇 번이고 했던 자책이 또 이어졌다. 종수가 애꿎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하게 머리가 아픈 것도, 혼란하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탁해진 것도 같았다.

[종수. 여기 봐.]

[응.]

거듭된 로시의 부름에 종수가 느리게 답했다.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급격한 스트레스에 뇌가 전원을 차단하는 것만 같았다.

[취했어?]

하지만 취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종수가 다시 한번 부정했다.

[아니?]

종수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로시의 옆에서 종수를 보던 스테판은 확신했다. 이건 종수와 함께 술을 먹을 때마다 지겹게 본 반응이었다.

[……얘 취했다.]

[……망했다.]

로시가 옆에서 나지막이 동의했다.

[술을……. 괜히 먹으러 오자고 했네.]

이제는 술을 마시지도 않고 몸을 움츠린 채 컵만 만지작대는 종수를 보고, 스테판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아니, 누가 하루 만에 프러포즈할 식당을 또 찾았을 거라는 생각이나 했겠어?]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걸 기어코 예약까지 해낸 이놈도 대단하다.]

[종수잖아.]

휴우. 그 집념을 모르는 게 아니라 스테판이 또 한숨을 크게 내쉰 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종수는 아득하게 들리는 것만 같은 대화를 들으며, 문득 이규가 밥을 잘 먹었을지 따위를 걱정했다. 이규는 제가 없으면 밥을 대충 먹었다. 안 먹는 건 아닌데, 저한테 해주는 것만큼 정성스레 뭔가를 요리하거나 상을 차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밖에서 뭐라도 사 먹었으면 했다. 하지만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배달도 못 할 게 뻔했다.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니 애써 눌러두던 걱정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걔 영어도 못 하는데…….”

[뭐라고?]

[걔 영어 못한다고.]

종수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제는 이런 데서까지 이규의 생각이 났다. 제가 만지면 별 느낌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이규가 만져주는 건 따끈하고 시원했다. 그 감촉이 너무 좋아서 종수는 그럴 때마다 언제까지고 그의 손에 얼굴을 내주고 싶었다.

인상을 왕창 찌푸리며 제 머리를 괴롭히는 종수를 보고,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스테판이 결국 참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프러포즈한다더니 애인을 내버려 두고 여기서 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 종수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종수.]

[왜.]

[너 진짜 쓰레기다.]

종수가 스테판을 노려봤다. 하지만 분하게도 반박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요만큼도 없었다. 자책하던 내용에 타인의 감상이 더해지니 마음이 팍삭 꺾여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에 맞춰 머리도 절로 풀썩 꺾여서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종수는 거친 나무 상판에 이마를 맞댄 채로 웅얼댔다.

“맞아. 나는 쓰레기야…….”

한국어인데도 뉘앙스는 대충 통했기에 스테판이 얼떨떨하게 대꾸하며 로시를 쳐다봤다.

[오. 얘 지금 인정한 거?]

로시가 눈치 없이 구는 스테판을 찰싹 내리쳤다. 종수는 이제 테이블에 한쪽 볼을 댄 채로 엎드려 중얼거렸다.

“이규는 나한테 진짜 잘해주는데, 나는 프러포즈 하나도 제대로 못 하고…….”

훌쩍.

눈물도 나고 콧물도 났다. 이규의 품이 그리웠다. 역시 전화를 할 걸 그랬나 싶었다. 프러포즈고 뭐고, 그냥 이규를 보고 싶었다. 마음이 자꾸 약해졌다.

콧물이 흐르는지 코끝이 간지러웠다. 지금이라면 이규가 코를 풀어준대도 얌전히 굴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그가 안아주기만 한다면 서프라이즈고 나발이고 그냥 제발 결혼해 주면 안 되냐고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수. 너 울어?]

“걱정만 시키고.”

자신은 이미 최악의 남편감이 된 것 같은데도, 양심도 없게 여전히 걔랑 결혼이 하고 싶었다.

[야. 왜 이래.]

[종수. 정신 차려 봐. 너 자면 안 돼!]

종수는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도 여전히 웅얼대기만 했다.

“나는 남편 자격 없어…….”

[야. 야, 얘 눈 감긴다.]

[종수. 너 이러면 안 돼.]

‘안 된다.’ 그 말만이 종수의 귀에 날아와 박혔다. 안돼? 뭐가? 안 되면 안 됐다. 이규랑 결혼을 꼭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 먼 거리를 날아 다시 미국을 온 거였다.

“뭐가 안돼, 씨발…….”

[얘 지금 욕했지.]

[욕이네.]

훌쩍이다 욕을 하다 종잡을 수 없는 종수를 보고 스테판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야. 너 니 예쁜이한테도 이러냐?]

“프리티?”

예쁜 건 이규였다.

[어. 니 남친.]

“내 남자친구?”

남자친구도 이규였다. 그런데 이규는 여기에 없었다. 왜 없지. 종수는 몽롱한 정신으로 또 생각했다. 이규가 제 옆에 없는 건 자신 때문이었다. 종수가 오늘만 해도 수십 번은 더 했던 질문과 답을 또다시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이규를 피해서 온 거였다. 금세 걔가 보고 싶어질 거면서. 그가 없는 샌프란시스코는 얼마나 쓸쓸한지 제일 잘 알고 있으면서. 특히 농구처럼 집중할 데도 없다면 그게 더 최악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뭐라고? 영어로 좀 해라.]

“다 망했어.”

앞에 나란히 앉은 둘이 뭐라고 하는 게 계속 들렸지만, 그 말은 종수에게 가 닿지는 못했다.

괜히 결혼을 하겠다고 설쳐서 이 모든 걸 망쳐버린 것만 같았다. 과욕을 부리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몽땅 다 잃어버린 꼴이 바로 지금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역시 결혼이 하고 싶었다. 이규를 좀 더 확실한 저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누가 봐도 탐내는 그에게 제 것이라는 도장을 쾅쾅 찍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탐나는 걸 제 실수 때문에 놓쳐버린 것만 같아서, 종수는 연신 코를 훌쩍였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 그가 고픈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종수는 무거운 눈꺼풀을 견디는 걸 포기하며 그를 볼 수 있길 간절히 소망했다. 지금이라면 악몽에서 만나는 이규라도 반가울 것만 같았다.

“그래도,”

[영어로 말하라고!]

“보고 싶어…….”

크흥. 종수가 코를 먹는 소리만이 테이블 위를 울렸다. 종수는 훌쩍대는 걸로 나란히 앉은 스테판과 로시를 잔뜩 당황하게 하더니, 이내 곯아떨어져 색색 숨소리만을 냈다. 바짝 얼어있던 둘은 종수가 잠에 든 것 같아 보이자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둘은 그런 종수를 제법 오랜 시간 바라보다 입을 뗐다.

[……얘 이러는 거 처음 보는데.]

로시가 걱정스레 말했다.

[어어…….]

스테판이 얼떨떨하게 답했다. 로시보다 종수를 오래 안 자신도 처음 보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로시가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집으로 데려가야겠지?]

[아무래도…….]

[숙소에 데려다주는 건?]

그러려면 종수의 핸드폰을 충전시킨 다음, 어떻게든 그의 남친과 이야기를 나눠서 숙소가 어딘지 알아내고, 거기까지 가서 소문의 남친을 직접 마주해야 했다. 이름도 성도 모르고, 단지 한국에서 농구 선수를 하고 있다는 소식만 아는 종수의 예쁜이를. 종수 없이.

스테판이 거기까지 상상한 다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 얘 없이 예쁜이 만났다가 무슨 일이 날지 모르겠는데.]

오……. 나지막이 감탄한 로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다.]

[진짜 죽을지도 몰라.]

[종수라면 가능하지.]

* * *

[헤이. 맥스.]

로시가 문 앞까지 마중 나온 맥스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종수를 둘러메다시피 끌고 온 스테판이 뒤따랐다. 스테판은 끙끙대며 걸어 와 소파에 대충 종수를 던져뒀다. 로시를 따라가던 맥스가 금세 소파 위에 뻗은 종수에게 향했다.

[드럽게 무겁네.]

스테판이 종수의 옆을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는 맥스를 마구 쓰다듬었다.

[이 녀석 기억해?]

컹컹! 맥스가 꼬리를 마구 흔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소파 위에 뻗어있는 종수의 여기저기에 코를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래도 제법 봤다고 기억이 나는 모양이었다. 스테판이 그런 맥스를 북북 쓰다듬었다가, 종수가 매고 있는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종수가 잠결에도 가방을 껴안고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자는 녀석 정도를 제압하는 건 문제가 아니라, 스테판은 요령 있게 가방을 열었다. 그러고는 내용물에 당황했다.

가방에는 누가 봐도 반지 케이스로 보이는 것 세 개와, 지갑, 핸드폰만이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스테판의 눈에도 익숙한 것이었다. 바로 재작년에 우승한 후 단체로 받은 반지가 그랬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유럽보다는 소매치기가 덜 한 동네라고 해도, 이런 고가의 물품을 그냥 가방에 덜렁덜렁 넣고 다니는 게 진짜 더럽게 예민한데 더럽게 무심한 종수다웠다. 얘를 어떡하면 좋냐. 남친이 걱정을 한 트럭으로 해도 이해하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스테판은 제 뒤에 와서 손을 내미는 로시로 인해 그 생각을 중간에 접을 수 있었다.

[핸드폰은?]

[어. 여기.]

스테판이 로시에게 종수의 핸드폰을 건넸다. 그 후에는 가방에 지퍼를 닫고, 그걸 다시 종수의 품에 안겨주기까지 했다. 종수가 잠결에도 그걸 소중하다는 듯 품에 안았다. 스테판이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좋아하는 애인 옆에 딱 달라붙어 있지는 못할망정, 이런 데서 청승을 떨고 있는 게 이해가 안 가서였다.

로시는 방 안으로 들어가 충전 케이블을 핸드폰에 꽂아둔 뒤, 담요를 들고 와 종수 위에 덮어줬다. 그 사이 부엌에서 물을 들이킨 스테판이 로시에게 다시 다가왔다.

[전화 해줘야겠지?]

[어. 해줘야지.]

종수를 내려다보는 로시의 얼굴이 너무 심란해 보여서, 스테판이 냉큼 덧붙였다.

[폰 켜지기만 하면 내가 할게.]

[응. 그게 낫겠다.]

[우리한테 애인 이름은 안 알려줬어도, 그쪽에 내 이름은 알려줬겠지.]

휴우. 고개를 끄덕인 로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스테판이 로시를 뒤에서 껴안은 채, 어깨에 턱을 기댔다. 배에 팔을 감았다.

[미친놈. 여기까지 와서 애인 걱정을 시키네.]

[그러게.]

[나는 안 그러는데.]

낮게 웃은 로시가 뒤에서 치근대는 스테판을 밀쳤다.

[너도 참, 양심 없다.]

[나는 잠수는 안 타잖아!]

로시가 스테판을 흘겨보고는 욕실로 향했다. 스테판이 그 뒤에 또다시 매달렸다. 로시가 그 무게에 휘청하더니 뒤에 매달린 로시를 노려보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너는……. 됐다.]

[뭐가?]

[씻고 잠이나 자자.]

[뭐가?]

[자러 가자고.]

스테판이 앞을 향해 걸어가는 로시를 휙 돌려세웠다. 제 품에 딱 맞게 차는 몸이 와 부딪혔다. 스테판이 그 몸을 꽈악 껴안았다. 로시가 그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댔지만, 사진작가의 평균적인 체력과 근력으로는 현역 운동선수를 이길 수 없었다.

[가긴 어딜 가. 폰 켜지는 거 보고 전화해 줘야지.]

[충전 방안에서 하고 있잖아.]

[응? 말 돌리지 말고. 내가 자기 마음고생을 뭘 시켰는데?]

스테판이 단숨에 힘을 풀고는 로시의 얼굴을 낚아채 입술을 마구 부볐다.

[악!]

그런 스테판을 로시가 양손으로 막아냈다. 맥스가 두 사람의 주변을 마구 빙빙 돌았다. 저를 놔두고 재미있는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는 게 뻔했다. 자기도 끼워달라는 듯 다시 컹컹대기도 했다. 그 소리에 놀란 로시가 종수를 휙 돌아보고는 스테판을 퍽퍽 때렸다. 하지만 스테판은 그 정도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입술을 들이댈 뿐이었다.

[종수 깨잖아!]

[쟤 술 들이부으면 못 깨.]

[그래도!]

스테판과 로시가 투닥이며 방으로 들어가든 말든, 종수는 가방을 꼭 껴안은 채 소파에서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 * *

“종수?”

[헤이, 예쁜이.]

뭐? 프리티? 이규는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영어에 한번 놀라고, 거기서 들리는 단어에 두 번 놀랐다. 자신은 분명 종수의 전화를 받은 게 아니었던가……? 이규가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화면에 떠 있는 텍스트는 여전히 ‘자기♥’가 맞았다.

핸드폰 너머로는 투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규가 수화기에 대고 다시 한번 말했다.

[여보세요?]

[오, 미안. 종수 남자친구지?]

이규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다짜고짜 남의 핸드폰으로 전화해서 핸드폰 주인의 남자친구가 맞냐고 묻는다니, 괜한 경계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맞는데.]

[나 종수 친구 스테판인데.]

다행히 이규는 어렵지 않게 그 이름을 기억해 냈다. 팀 내에 남자친구가 있는 동료가 있다고 했었다. 아는 사람이랑 마주쳤던 거였구나. 이규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역시 대사관에 전화하지 않길 잘했다 싶었다.

[아, 어.]

[미안. 종수가 남자친구 이름을 안 알려주고 맨날 예쁘다고만 해서……. 이름이 뭐야?]

[얘 남친 영어 못한댔잖아.]

잠시 투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있던 친구가 더 있는 듯했다.

[아. 오. 종수가 네 이름을 안 알려주고, 예쁘다고만 해서, 예쁜이라고 불렀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 이름이 뭐야?]

조금 더 느린 영어가 들렸다. 이규는 거기서 대충 쏘리라는 말과 네임이라는 단어를 알아들었다. 대충 종수가 이름을 안 알려줘서 그런데 이름이 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게 정말이지 종수다운 일 같아서, 이규는 마음이 조금 더 놓였다. 진짜 종수가 알고, 그만큼 마음을 연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규. 규가 이름이야.]

[오케이. 규. 종수는 지금 우리 집에 있어.]

[아.]

[걱정했지? 얘 취해서 자고 있으니까, 내일 데려다줄게.]

자고 있다는 말도, 취했다는 말도, 마이 하우스라는 단어도 들었다. 이규는 그제야 안심한 목소리로 짧게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걱정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응. 고마워.]

[내일 아침에 너한테 데려다줄게.]

[음, 오케.]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간단한 단어나 유추가 가능한 말들이라 다행이었다. 이규가 대답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들렸는지 핸드폰 너머로는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고마워.]

[별말씀을. 잘 자.]

[너도.]

짧은 영어로 어찌저찌 통화를 마무리한 이규는 그제야 소파에 무너지듯 앉았다.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누웠다가, 다시 폰을 들고 카톡을 열어 내일 일어난 종수가 찾아보기 쉽도록 숙소 주소를 보내뒀다. 그 후에는 핸드폰을 대충 던져두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속상했다.

속이 상해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이규가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안절부절못하며 종수를 걱정했던 시간이 한 번 더 이규의 위로 휘몰아치다 사라졌다. 걱정이 가시니 그 빈 곳을 모조리 메우는 건 속상함이었다. 저에게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고, 여기서 사귄 저는 모를 친구들을 만나 술을 진탕 퍼마신 종수에게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애인에게는 못하고 친구에게는 할 수 있는 말도 있다는 걸 이규도 알긴 했다. 하지만 종수는 종수였다. 그렇기에 종수는 다를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가장 내밀한 바운더리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자신뿐일 거라고 자만하고 있었다는 걸, 이규는 이번 기회에 단단히 깨달아야만 했다.

물론 과거로 돌아가도 저는 여전히 종수에게 미국행을 권할 테고, 그를 따라가 자신에게는 버거운 일에 도전하느니 한국에서 그를 믿고 기다리며 수련에 정진하겠다는 선택을 할 터였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아는데도, 그와 떨어진 8년간 제 옆에 또 누군가가 생긴 것 같아 뿌듯한 한편 씁쓸하기도 했다. 종수에게 기댈 곳이 많아지는 건 좋았지만, 그래도 이규는, 그가 자신에게 가장 많이 기대주었으면 했다.

종수는 분명 자신이 있는 샌프란시스코가 행복하다고 했다. 제가 없는 곳에서 힘들어하던 종수를 이규도 익히 알았다. 그래서 숙소도 호텔이 아닌 에어비앤비로 잡은 거였다. 그간의 기억을 몽땅 좋은 걸로 덮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닭가슴살이나 셰이크나 샐러드나 햇반만 퍼먹던 일 대신, 제 손으로 종수가 좋아하는 걸 잔뜩 만들어 먹이고, 내내 혼자였다던 그의 미국 자취방 대신 둘이 사는 느낌을 여기서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종수는 이곳에 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혼자 힘들어했다. 심지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없는 곳으로 달려가 울분을 털어놓기까지 했다. 이규의 목울대에서 괴로운 신음이 잔뜩 새어 나왔다.

역시 첫날 불안해 보이던 종수에게 그 이상의 이유가 있던 게 아니었을까. 제가 있어서 좋아서 그랬다던 걸 그대로 믿으면 안 됐을까. 혼자 살던 도시에 함께 있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이라 생각하고 넘겼는데,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 되는 일이었을까. 최근 일이 년 정도 안정되었다고 섬세하고 예민한 성정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걸까. 그날이 아니었다면 그다음 날, 그 다음다음 날에도 상태를 지켜볼 게 아니라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그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했을까. 후회하자니 끝도 없었다. 이규가 밤새 거칠어진 얼굴을 벅벅 쓸어내렸다.

심지어 그렇게 소리를 치고 뛰쳐나간 걸 보면 분명 제게 화가 난 게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이규는 오늘 몇 시간째, 또 몇백 번째 그 순간을 복기했는데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싸웠다고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일은 오랜만이라 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종수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은 아닌 걸까.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모두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큰 욕심이었던 걸까. 잠이 부족한 머리는 쉴 새 없이 부정적인 생각만을 해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움만이 가득했다.

침대까지 갈 기력이 없어, 이규가 소파에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마음이 죄다 소진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하지만 제가 땅굴을 파고 있든 말든, 이건 다 제 생각일 뿐이었다. 내일 종수를 만나 제대로 이야기하는 편이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삽질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게다가 억지로 두세 시간이라도 눈을 붙여야 돌아온 종수와 좀 더 멀쩡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종수가 없는 이곳은 너무 서늘했고, 황량했으며, 쓸데없이 제 숨소리만이 크게 울리는 공간이었다. 밖에선 또 경찰인지 구급차인지 모를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저게 혹시 종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품에 사랑하는 이는 여전히 없었기에 마음이 허한 건 매한가지였다.

이규는 눈을 감고 느리게 숨을 고르면서도 잠에 들지 못할 미래를 직감했다.

 

[후기]

안녕하세요, 썬칩입니다!

쫑수가 술을 너무 막무가내로 마셔서... (저정도 먹었으면 한시간도 안되는 시간안에 위스키를 반병은 조졌겠죠? 그렇게 마시면 안됩니다...) 제일 첫줄에 음주 관련 경고 문구도 달아뒀어요(ㅎ)

햄버거 집을 박차고 뛰어나간 쫑수의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아서 ^^; 그 뒤에도 진상이란 진상은 다 부리고... 결국 구 동료이자 친구의 집에 실려가기까지 했는데(ㅋㅋ) 쓰다보니 진짜... 쫑수가 손 많이 가는 애인게 여실히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친구 하나쯤 만나게 되지 않던가요. 드럽게 손 많이가고 지멋대로인데 왠지 챙겨주게 되는(.......) 아마 스테판과 로시에게는 쫑수가 그런 친구이겠지요!!ㅋㅋㅋ

10년을 넘게 사귀어도 쌍방삽질을 하는 규쫑은 단발적인 별거(?)를 끝내고 다음 편에! 재회합니다 !!! 하지만 원래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너무 크면 꼭 그렇게 되는 것 같더라구요ㅋㅋㅋㅋㅋㅋ

그리고 기쁜 소식! 이번편 후에 두세편 정도 쓰면 완결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9 !!!!! 드디어 3/4을 다 썼다 !!!!  ! !!!! (외전은. ... .. ..또 한참...남앗지만... ...ㅎ...)

추가로! 종수의 미국 친구들과ㅋㅋ 이규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디푸님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탐라에서 매번 머리 깨고 있으면 함께 썰 풀어주시는 디푸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얘기 나눈 것들 중에서 절찬리에 뽑아 쓸 예정입니다요🙇🙏)

또한 언제나 읽어주시고, 감상 남겨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드려요😭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정말 오지 못했을 연재입니다... 완결까지 함께해주신다면 더더 기쁠거에요🥰🙏

오늘도 즐거운 감상 되셨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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