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눈

종상 합작 | 정통 판타지

주의!

제 별명은 무덤지기입니다.

후덥지근한 여름 태양이 이글거린다. 기상호는 숲과 언덕을 부지런히 지나 산등성이까지 올라온 태양을 본다.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의 정중앙에서 그가 소리쳤다.

“거지 같은 여름아!”

여름은 대체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계절이다. 겨울 내리 먹을 게 없어 굶다가 끝으로는 동사하는 것과 다르게 더운 까닭이었다. 기상호가 사는 흙으로 만든 집은 여름이면 진흙이 녹아 뚝뚝 떨어져 나무껍질로 수리해야 했고, 토양이 열기에 약한 지형인지라 환기도 어려웠다. 사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부유한 왕국에서 한때는 가장 귀한 핏줄, 왕세손이던 기상호는 그런 어려움에도 꾸역꾸역 살아나가야 했다.

그가 태어나고 첫 생일을 맞이한 날에 반역이 일어났다. 본래 불안한 왕권이었다. 불안이 거죽을 쓰고 그들 왕조에 찾아오듯 태어난 씨앗은 기어코 왕조를 바꾸었다. 요람에 누운 아이 위로 빙글빙글 돌던 황금 모빌은 도망자가 죽기를 기대하며 떠도는 파리로 변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왕은 애진작에 죽었고, 왕세자는 궁을 지키다 죽었다. 어떻게든 왕조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일념 하에 왕세자비와 왕세손은 기사 둘과 함께 도망쳤다.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세손이 살아있는 이상 우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기상호는 기억나지 않는 왕궁을 그리워하던 어미의 유언이었다. 도망치는 와중 죽어 이제 하나 남은 기사가 곁에서 그리하겠다는 충성 맹세나 하는 때에도 기상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왕세손인 기억이 없다. 어릴 때는 군중 속에서 숨어 사느라 왕세손 저하라 불리지 못했고 피난민 무리에 섞여들어 이런 외진데에 몸을 맡기고 나서는 왕세손 호칭이 어색했다.

나고 자라기를 귀애 받았으면 모를까. 기상호는 사람 부리기보다는 오늘 식사거리나 사냥하는 게 편했다. 그런데도 이제는 사냥꾼이 된 기사에게 저하 소리를 들었다. 언젠가 왕국을 되찾아야 한다며 늙어가는 남자의 압박은 죽은 어미의 것보다는 연약했으나 옭아매기엔 충분했다.

“저하, 언젠가는 저하께서도 훌륭한 마법을 꽃피우실 겁니다. 돌아가신 세자 전하께옵소서 그러셨고 초대부터 선조 모두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찢는 마법사의 피를 이었으나 기상호는 무능했다. 공활한 하늘을 날거나 강한 신체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거니와 하물며 무언가를 조종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더더욱 기상호는 왕세손이 아니다. 이렇게나 무능한 왕족이 어디있단 말인지.

자기비하는 오랜 습관이었다. 기사는 사냥감을 잡아 구운 식탁 위에서 아름답고 고고한 왕궁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기상호는 기사의 추억 속 왕궁과 저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다. 아마 황금의 모빌을 보며 귀족을 유모 삼아 자랐다 한들 그러할 테지.

어릴 때는 화려한 마법과 함께 왕위를 되찾는 상상을 했다. 영창 없이 하늘에서 비를 내리고 사람들을 조종해 군사로 만드는 꿈.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제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

자기 자리를 인정해도 압박은 여전했다. 열여섯이 되자 기사는 누군가의 딸들을 찾아다녔다. 기상호는 가망이 없으니 그의 씨를 빌려서라도 후계를 잇고자 했다. 기씨 핏줄을 이은 마법사만 있음 뭐든 좋다는 저 빌어먹을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 그가 입이 닳도록 찬송하는 왕세손을 기어코 종마로 써먹겠다는 불손함이란.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상호는 저를 보필하는 기사가 사라지기를 소망했다. 하찮은 생각이다. 나이가 들었다 한들 그는 서임 받은 기사이며 기상호는 꿩이나 닭도 겨우 잡는 평범한 소년일 뿐이었다. 한때 왕족이었다는 것만 빼면 길거리 소년보다 비루한 처지였다.

“저하, 이제 그만 들어가셔야 합니다.”

어느새 토끼를 잡아 온 기사가 재촉했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쾌활하며 십오년동안 전 왕조의 핏줄을 쫓는 이는 없었다. 기상호는 왜 그러냐 물었고 기사는 하늘을 보며 답했다.

“태풍이 옵니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하늘 끄트머리에서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이렇게 대뜸 찾아오는 구름이 기이하여 기사에게 물었다. 그는 박식한 명문가 출신으로 기상호의 스승이기도 했는데 곧장 답해주던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오래 말을 않았다.

“저건 태풍입니다. 태풍 때 저하께선 집에만 계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별수 있나. 고개나 끄덕이는 수밖에.

기사의 말대로 태풍이 착륙했다. 처음엔 거센 바람만 불다 이내 폭우가 쏟아졌다. 쏟아지는 비가 흙집을 때려 부술 지경인지라 둘은 신경을 곧추세웠다. 심지어 기사는 검을 들고 경계태세를 갖췄다. 자연재해에 검이 무슨 소용이냐 물어도 검을 놓지 않은 기사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태풍은 전하의 원수입니다.”

기사는 그날 아침 여전히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는 저지해보겠답시고 집을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태풍은 일주일 내도록 끝나지 않았다. 잠시 주춤대는 때도 없이 세차기만 했다. 이대로 집이 무너진다는 공포에 잠식되던 찰나 비가 뚝 그쳤다. 집 밖을 나가니 집 근처로만 뻥 뚫린 듯 구름이 개었다. 그리고 저 숲에서부터 망토를 두른 이방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불현듯 깨닫고야 만다. 태풍은 진정 자연재해가 아니라 저 이방인의 ‘마법’이라고. 

이방인은 후드까지 뒤집어써 체형이나 겨우 보였다. 키는 크고 신체는 단단해서 마법사 같지 않았다. 대단한 태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고. 이방인은 기상호가 뻣뻣하게 굳어있어도 다가왔다. 그의 목표는 확실해 보였다.

‘내 죽는 거 아이가?’

고요한 땅 주의를 감싸는 태풍이 이방인이 가진 무력의 증거였다. 이렇게나 오래 자연재해를 만드는 일은 그가 어린 날 해대던 천재 마법사 망상에서도 이런 건 없었다. 말씨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다가온 이방인이 후드를 벗었다. 세상에! 기상호는 그런 미남을 본 적 없다. 화려한 속눈썹이 얕게 부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곱슬기 있는 머리카락은 이마를 때렸다. 미의 화신 같은 외모에 이런 마법이라니. 세상은 불공평했다. 다만, 남자는 미간을 콱 찌푸리고 있었다.

“네가 기상호지?”

그 말에 숨이 조여들었다. 기상호의 이름은 함께 도망친 무리만 간직하고 있었다. 무너진 왕조의 왕세손 이름 따위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눈 앞의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기상호라 확신했다.

“내가 때리기라도 했어? 표정이 왜 그래”

하고는 태풍을 바라본다.

“아, 이거 때문에?”

피식 웃는 얼굴이 비웃는 태였다. 그러다 궁금해진다. 기사가 태풍이 원수랬지. 기상호는 살아생전 저런 미남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원수라기엔 어폐가 있었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질 좋고 화려한 옷감과 끼리끼리의 혼인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마법을 연관 지어본다. 그러면 기사가 말한 원수가 무엇인지 절로 알게 된다.

“설마 최씨 왕가…?”

최씨 왕가 말고 찬탈자, 더 나쁘게는 반역자, 살인자가 있었지만 잘생긴 대마법사 앞에서는 절로 고상한 말이 나왔다. 다만 마법사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지 이제는 코앞까지 다가와서 윽박지른다.

“알면 풀어 새끼야.”

“뭐, 뭐를요?”

“몰라서 묻는 거야? 이 빌어먹을 저주나 풀라고!”

-

최종수는 태어나기를 공작가 직계 후손으로 났다. 연로하되 성질 더러운 조부는 그때까진 공작이고, 아버지는 후계자였으며 최종수도 언젠가 그들을 따라 작위를 물려 받을 예정이었다. 때문에 피를 이어 태어난다는 건 가족들과 영원히 한배를 탄다는 말이었다. 공작이 누구를 공격하면 최종수가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였고, 최종수가 욱한 마음에 또래 친구를 밀면 공작이 그 집 가주를 민 것과 같았다.

그리고 공작 자리에 만족하지 못한 조부가 반역을 일으켰다. 고작 네 살 짜리 어린애가 칼을 든게 아니지만 반역으로 쌓은 업보 역시 최종수의 몫이기도 했다.

열아홉 소년은 상상한다. 왕세손이 아닌 소공자의 아들인 삶을 상상해본다. 왕세손이라 한들 좋은 점은 하나 없었기에 도리어 대귀족의 아들이 좋아보였다.

순탄한 왕세손의 삶을 살았으면 그저 지루한 일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일에 불과했겠지. 최종수가 여덟 살인 때였다. 찬탈자의 피 묻은 이명을 지우는 데는 적을 만드는 게 제일 쉬웠다. 할아버지는 전 왕조가 얼마나 부정부패하였는지 떠들었고, 최종수의 탄신 파티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벌써 몇 년째 제 할아비가 저러는 꼴을 보던 최종수는 지겨운 낯을 숨기지 않았다. 저러다 말겠거니, 지겨운 일상이 곧 끝나리라 믿었다. 연회장을 들이닥친 ‘이방인’만 아니었다면. 이방인은 연회장 가운데를 고고하게 걸어왔다. 가면으로 숨긴 얼굴이었으나 참석자 모두가 그를 알았다. 전 왕조의 왕세자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몰랐다. 방금 전까지 왕은 특히 왕세자비가 마녀나 다름없다며 선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꽁꽁 얼어붙어 부들부들 떠는 게 고작이었다.

전 왕조의 왕세자비는 침입자답지 않게 화려한 드레스와 힐을 신고 또각또각 걸어왔다. 그리고 왕께 아부하는 간신처럼 느리게 허리 숙였다.

“귀하신 분들을 뵙습니다.”

그러면서 왕족에게 하는 인사가 아닌 격 없이 인사였다. 최종수는 침을 꼴딱 삼키며 긴장했다. 왕세자비는 역대 세자비가 그랬듯 뛰어난 마법사였다. 어떤 마법으로 소란을 피울까? 그러나 그녀는 씨익 웃기만 했지 스틱을 꺼내거나 마법진을 그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하다 못해 주문도 외우지 않았다. 

“왕세손 저하. 탄신일을 축하드리옵니다. 제게는 저하 또래의 아들이 있지요. 그 애가 태어나던 밤, 별이 녹았음을 아십니까?”

그녀의 말에 최종수는 옆에 있던 부모님을 쳐다봤다. 그리고 군중을 내려다 봤다. 아마 그녀 말이 사실이리라. 모두 긴장한 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경비병도 저지할 생각을 못 했다.

“내 아들은 저주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 아들이 그런 천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까닭은 여기 계신 분들 덕이겠지요.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사백 전 신이 내린 힘 중에 가장 천박하다 알려진 힘으로 저하께 저주하더군요.”

그녀는 가면을 벗어 최종수와 눈을 마주쳤다. 흥분에 찬 얼굴. 저주 능력을 고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최종수는 벌벌 떨며 옆에 있던 어머니의 드레스자락을 꽉 쥐었다.

“당신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일 겁니다. 다가가지 못하고 평생 음지에 숨어 사셔야겠지요. 내 아들이 가져야 할 모든 자리를 앗아갈 당신이니 내 아들이 도로 빼앗아도 불만 없으시지요?”

하며 허공에 손을 뻗자 새까만 빛이 반짝이다 사라졌다. 눈속임이 전부였을까. 최종수는 제게로 향한 저주가 두려워 덜덜 떨면서 조금은 안심했다. 그때였다. 속에서부터 울컥 뜨거운 액체가 터져나왔다. 귀한 왕세손이 피를 토하자 주변에서 저하!하고 부르고, 부모님은 종수야 종수야 애타게 흔들었다. 흐려지는 시야에 사이로 그녀는 웃고 있었다.

기절하고 한 달 내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그동안 수도는 태풍으로 초토화 되었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회오리였다. 왕세손의 힘이 바람이었으니 혼수상태라 능력 조절이 안 되는 거라 여겼다. 그저 안타까운 저하, 어찌하면 깨어나실까. 폐하의 말씀처럼 악독한 마녀가 그리고 그의 아들이 저주를 내렸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한마음 한 뜻으로 걱정했다. 그러나 커져버린 태풍의 그들의 터를 박살내는 이후로는 불안에 떨었다.

최종수는 깨어나고도 조절되지 않는 힘에 짓눌리며 살았다. 귀하디 귀한 왕세손을 유배 보내야 한다는 말이 많았고, 그가 열아홉일 때에는 처형도 거론됐다. 가장 분통한 점은 최종수는 반역을 원한 적 없다. 고작 네 살배기 어린애가 무엇을 분간할 수 있겠는가. 그의 아비와 조부의 죄가 그의 죄와 같다한들 오롯 그만 고통받는 건 불공평했다.

갓 저주 받았을 때엔 누구를 원망해야 좋을지 조차 몰랐다. 언제나 태풍의 눈에 서서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소리를 듣노라면 머리에서 생각이 이리튀고 저리튀었다.

그들에겐 최종수란 태어나선 안 되는 인간이었다. 궁에는 차라리 왕세손을 죽이고 새 세손을 보는 게 어떠하냐 간청하는 신하로 가득찼다. 내가 뭐, 내 잘못도 아니잖아!

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기상호를 찾아다녔다. 정작 저주를 전한 여자는 죽었단 소식을 전해들었으니, 남은 건 저주의 힘을 가진 기상호 뿐이었다. 제어되지 않은 강한 저주를 안고 산과 들을 넘고, 때로는 고요한 언덕을 지나서야 겨우 만났다.

기상호.

기씨 왕조의 마지막 희망이자 내게 저주를 건 악랄한 폐왕세손.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는 아무런 힘이 없는대요?”

차라리 너를 죽이면 해결될까.

최종수의 이야기를 떨면서도 다소곳하게 앉아 듣던 기상호는 제 죽은 어미가 언제 왕궁까지 가서 그런 짓을 했는지 놀라워했다. 기억하기에 도망치느라 탈력하여 늘 침대 신세인 여자였다. 생각해보니 그가 말했던 즈음 더더욱 노쇠해서는 머리가 새하얗게 세었다. 일평생 제 아들이 왕위를 복권하리라 헛되게 믿었던만큼 일찍이 늙어가구나 생각했었다. 저주 마법의 폐해일 줄이야.

“아니, 무조건 너야. 폐왕세자비는 죽었다며. 그럼 이 저주도 사라져야지! 애초에 그 사람은 저주 능력자도 아니었어.”

“예예- 알아요.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흥분한 최종수를 진정 시키려고 애쓰던 기상호가 문득 사라진 기사가 생각나 물었다.

“그나저나 기사 하나 못 봤어요? 칼을 들고 있긴 했어도 차림새가 사냥꾼이었어가… 살펴보고 온다더니 아직 안 왔어요.”

그러면서 시선은 그의 옷차림에 향했다. 최종수의 망토 끝에 거뭇거뭇 피가 묻어있었다. 오래되지 않아 아직 색이 선연했다. 눈 앞의 상대가 죽였다. 하다못해 거동이 불편하도록 만들었음이 확실했다. 기사는 기상호를 우습게 알면서도 기씨 왕족의 핏줄만은 귀하게 여겼으니 자연재해가 아니라 최종수라 알고 있던 그가 저를 두고 돌아오지 않을리 없었다.

최종수는 물어 무엇하느냐며 매섭게 비웃었다.

“너 멍청해? 내가 죽였어. 왜, 억울해?”

그러고도 그는 아주 오래 떠들었다. 네가 저주를 모르쇠하니 나도 네 기사의 죽음을 모른 척 하려다 말해준 거니 감사하라 떠들었는데, 사람들에게 오래 미움 받은 성미에 원한까지 더해지니 도저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기상호가 상처 받기를 원했다. 도피생활을 함께한 기사란 친밀하단 말로는 부족하겠지. 때로는 스승이고 때로는 신하되 어미가 죽고 난 뒤로는 고귀한 핏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겠지. 하나 뿐인 사람을 죽였으니 저 멍청한 낯이 구겨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최종수는 몰랐다. 기상호가 그다지 왕족이고 싶지 않단 사실과 감히 종이 주제를 모르고 제 주인을 종마 취급했음을. 기상호는 아주 오래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망칠 수 없어 함께 살며 순응했지 언제나 저하가 아니라 그냥 ‘기상호’가 되기를 소망했다.

마지막 족쇄인 기사가 죽었고, 이제 그 누구도 기상호에게 기씨 왕조의 후손이기를 종용하지 않는다는 상상만으로도….

“너 뭐야?”

미친 듯 웃을 수 있었다.

기상호는 미치광이가 되어 웃었다. 찔끔찔끔 울기도 했다. 저를 제가 아니라 씨를 잇는 존재로만 보며 압박하던 사람의 죽음에 해방감이 밀려왔다. 오래 함께한 사람이 죽었으니 슬프기도 했다. 어떤 고난과 역경을 함께 넘었던가? 진실을 모르는 최종수는 불쾌한 얼굴이었다. 아무렴, 도피 생활을 함께 한 기사를 죽였다는데 웃는 놈이 제정신일 리가. 그걸 보는 상황이 유쾌할 리가!

최종수는 한바탕 웃는 꼴을 끔찍하게 보았다. 돌아버린 놈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런지. 아무 힘이 없다는 건 모조리 거짓 같았고, 그냥 미치광이라 하루에도 수십 개의 인격이 나올 수도 있지 않는가? 어떤 때는 최씨 왕조를 저주하는 마법사가 튀어날 수도 있었다.

최종수는 미쳐버린 기상호에게 손 내밀었다. 한동안 지켜보리라. 뻔뻔하게 저주의 능력은 없다며 떠드는 사기꾼 옆에 있으면 저주의 실마리라도 나오겠지.

“야 나와.”

마침 태풍이 사그라들었다. 근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태풍의 눈이 아니라도 맑게 개인 하늘은 간만의 평화에 만족해하며 자연의 축복을 만끽하도록 허락했다.

“지금 저보고 살인자랑 같이 외출하라고요?”

“너도 살인자야. 네가 내린 저주로 몇 명이 죽었는 지는 알아?”

“진짜 제가 아니라고요.”

낑낑. 이거 왕세손 맞나 싶게 찡찡댄다. 아까까지 그를 날카롭게 쳐다보던 싸한 시선은 거짓인양 어리광이나 피우다니. 역시 인격이 여러 개임이 확실하다.

“닥치고 나와. 분명 저주 시전자는 너야. 어떻게 왕족이 마법 하나를 못 써? 멍청아.”

제딴에 고르고 고른 좋은 말이었다. 멍청아로 끝났으니 망정이지. 혀 아래로는 머리통을 장식으로 들고 다니냐로 부터 시작하는 온갖 비하가 멤돌았다.

“싫은데, 싫은데에…….”

하면서 옷을 챙긴다. 쟤는 진짜 멍청하다.

-

최종수는 기상호를 끌고 산을 건넜다. 푸른 이파리 사이사이로 떨어지는 여름 햇살에 기상호는 나무 기둥을 붙들고 구역질을 해댔다. 더위에 약하다나 뭐라나. 나약해 빠진 놈. 실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저주 받은 왕세손이라 한들 귀한 왕족일진대 기상호를 찾겠답시고 여행길에 오른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그가 여태 꼴사나운 짓을 하지 않은 건 옆에서 저러고 있으니 절로 참아지는 까닭이 다였다. 그렇다고 해서 속이 멀쩡한 건 아니었다. 울렁이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이상하게 기상호가 토하고 있으면 나오지 않았다.

산에는 마력의 찌꺼기를 먹고 사는 마수도 득실득실 했다. 끈적한 물질로 이뤄진 눈이 세 개 달린 괴물과 커다란 뱀과 같은 마수가 가장 먼저 찾아왔다. 기상호는 어디선가 죽은 기사의 검을 찾아와선 날렵하게 휘둘렀다. 최종수는 저거 진짜 또라이 아니냐며 욕하다 뒤에서 기습하는 뱀의 머리통을 날카로운 바람으로 날려버렸다.

“태풍 말고도 마법을 쓸 수 있네요?”

“내가 너 같은 허접인 줄 알아?”

“햄은 칭찬의 기술 같은 건 모르죠?”

“닥쳐 허접아.”

최종수의 마법은 원래 바람이었다. 바람의 최종형이 자연재해인 태풍일 뿐이다. 저 멍청한 놈은 마법 상식도 없는 모양이지.

죽은 마수는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파스스 사라진다. 마수를 여러 번 죽여봐도 가루가 되는 건 적응이 안 된다는 기상호는 칼에 묻은 피를 털어 칼집에 넣었다.

“죽어서 시체로 남는 것보단 낫잖아.”

최종수는 후드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마수의 시체는 사라져도 묻은 피는 사라지지 않아 후드 아래가 얼룩덜룩했다.

“그래도요. 제가 생각해봤거든요?”

“너도 그딴 걸 하냐?”

‘멍청한 주제에’가 생략된 문장에 기상호가 언성 높였다.

“아 햄요! 어쨌든 들어보세요. 죽었는데 세상에 남길 거 하나 없으면 얼마나 서러워요.”

칼집에 든 칼을 어깨에 턱 멘 기상호에게 신발끈이 풀렸다며 턱짓을 해주자 앗차하며 몸을 숙여 끈을 맨다. 최종수는 엇비슷한 덩치의 등을 보며 말했다.

“그런 건 미련있는 놈들이나 하는 거야.”

“예?”

“가자.”

“햄 저 아직 다 못 묶었는데, 햄! 햄! 내만 두고 가지마요!”

마수가 득실대는 산을 넘은 뒤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촌락과 촌락 몇 개가 산에 길을 내어 만들어진 곳은 저들끼리 소박한 교류를 하고, 때로는 시덥지않은 이유를 붙여 축제를 열었다. 마침 초대 마법사이자 신께 마력을 선물 받은 초대 왕을 기리는 축제가 열렸다. 둘은 용병으로 둘러대고 마을을 빠져나오려했다. 초대의 조각상이 자그맣게 놓인 광장을 지나는 때였다. 최종수는 잠시 멈춰서 제 키만한 조각상을 눈에 담았다.

“햄요?”

“이거 네 선조잖아.”

“아….”

사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왕국의 첫 주인. 최초의 기씨. 신이 그를 예뻐해서 마법을 내어주고도 모자라 일국의 주인이 될 현명함을 선물했다는 건국신화가 있다. 새 왕조가 열리며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이제는 배울 길이 없겠지. 이 마을의 축제도 곧 사라질 바를 알았다.

“잠깐 있다가 갈래?”

“햄은 이거 계속 보시게요?”

“너는?”

“어… 그럼 저희 이따가 저기 가판대 앞에서 만나요.”

하며 걸음을 옮긴다. 최종수는 제 감시를 벗어나려는 꼴을 참지 못하고 기상호가 어깨에 맨 검집을 와락 쥐었다. 갑자기 끌어당기는 힘에 몸의 중심이 무너진 기상호가 갸우뚱하다 중심을 잡았다.

“햄!”

“그냥 같이 가.”

“왜 이렇게 집착해요? 햄은 이거 마저 보세요.”

기상호의 질색에 최종수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야, 네가 내 저주에 뭘 할줄 알고 한눈을 팔아?”

“저는 햄의 저주와 아~무련 관련이 없다니까요?”

“그럼 폐,”

“쉿!”

기상호는 폐왕세자비라는 단어가 나올 기색에 기겁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이 햄은 정신머리가 없네. 하는 한탄도 하면서.

“따라와요. 여 보니까 숙소 겸용의 작은 집이 있던데 거기서 여독 좀 풀어요.”

산을 넘는데 일주일이나 소비했다. 들어갈 때만 해도 최종수의 태풍으로 마수고 뭐고 모조리 날아갔는데, 태풍이 멎고 나니 오히려 숨어있던 놈들이 기어나와 험난했다. 노숙하면서 경계도 서느라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제대로된 곳에 누워 자는 게 현명하긴 했다.

기상호는 제 집에서 가져온 약간의 돈을 이장에게 건넸다. 이장은 태풍이 멎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왔느냐 물었다. 그러고보니 일주일 내도록 초토화가 될 태풍이 불었는데 여긴 멀쩡했다.

“저희는 저 아래짝에서 왔으요. 의뢰가 너무 늦게 끝나가꼬, 그게 천운이었죠.”

아랫지방 사투리에 약간 섞인 수도 말씨는 더더욱 용병 같아 보였는지 이장은 여기는 운이 좋아 그다지 해를 입지 않았다며 웃기만 하고 별말을 않았다.

“햄요. 이제 말해봐요. 저는 진~짜 저주 같은 거 할 줄 모르거든요. 내가 할 줄 알았으면 뭐부터 했게요? 햄 나가라고 저주했어요.”

먼지 쌓인 침대를 털지도 않고 털썩 앉은 기상호가 정말 억울하다며 ‘진짜’에 강한 억양을 넣었다. 최종수는 변명으로 치부하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저 더러운 침대에 앉은 기상호의 위생관념을 의심하며 슬금슬금 피했다.

“그러면 이 저주는 뭔데.”

“햄의 능력 폭주…?”

“난 폐왕세자비가 말을 전하자마자 각혈했어. 그렇게 한달 내도록 누워있었고 태풍은 내 손을 벗어나 수도를 뒤집었지. 넌 왕세손이 저주 받았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

“네.”

“뭘 ‘네’야. 거짓말도 정도가 있지. 그게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고 수도가 뒤집어진 걸로 온 나라의 물류가 멈췄어. 지휘부가 다 수도에 있었으니까. 2년 간 기근이 왔다고. 그래도 몰라?”

“진짜라니까요!”

“등신. 네가 그러고도 왕세손이야?”

기상호가 황당하다며 입을 크게 벌리고 어버버했다.

“왕세손은 내가 아니고 햄이니까요.”

“너도 왕세손이야.”

“햄 내는요 왕세손이 아니에요. 왕세손으로 태어났어도 왕관을 빼앗긴 이상 그냥 패망한 일족이라고요. 내는 단 한 번도 왕세손이었던 기억이 없어요.”

기상호는 질린듯 눈을 꼭 감았다. 어느 나라의 왕세손이 두 명이던가? 먼지 쌓인 침대에 힘 없이 누워 마른세수나 하며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았다.

“그러니까요… 우리 주제에서 벗어나지 좀 맙시다.”

“미안.”

기상호는 왕세손이라는 말만 나오면 분노했다. 짧게 분노하고 이내 지쳐했다. 최종수가 십 년 넘게 저주에 시달린 것처럼 그도 무언가에 시달렸으리라. 아마 기사의 죽음에 웃었던 일과 같은 이유겠지.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사과했다. 태풍으로 죽은 사람들은 어쩔 거냐는 말에 그게 내 잘못이냐 소리쳤던 것과는 달랐다. 어쩐지 기상호는 왕세손이되, 진정한 왕세손은 아니란 점에서 저와 동지 같아서일까.

“지금 저한테 사과하신 거에요?”

먼지 쌓인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기상호가 뜨악했다.

“해도 난리야.”

“햄 누구한테 사과할 성격 아니잖아요.”

“너 나 알아? 야 근데 네가 왕족 핏줄이 아니면 나한테 존대해. 하라고!”

“알죠? 일주일이면 웬만한 건 다 알지 않아요? 그리고 위장 신분으로 무슨 존대에요!”

투닥대는 과정에서 서로가 무엇에 고통 받고 살았는지는 점점 잊혀졌다. 기상호는 진짜 왕세손 앞에서는 가짜에 불과했고, 최종수는 이상하게 이 저주가 끝나리란 생각을 했다. 그 어떤 불안도 상대에게 내던지는 일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짧은 일생에 최초로 찾아온 안온이었다.

“기상호 너는 나를 원망하지 않아?”

“뭘요.”

“나는 찬탈자야.”

피를 나눈 가족이란, 특히 직계끼리는 평생 한배를 탄 운명이니까. 조부의 죄는 손자의 것이고, 손자의 죄는 조부의 것이니까. 찬탈자는 조부였고 그가 아무리 네 살배기 아이였어도 왕세손이 되었으니까. 최종수는 오래오래 업보를 두려워하며 살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제어되지 않은 태풍으로 집계되 안 되는 살인이나 하는 게 아니라, 저보다 어린 애의 영광을 원치않은 주제에 빼앗는 게 아니라.

“안 해요. 뭐 우리 엄마는 조금 했겠지만. 근데 진짜 이해 안 가요.”

“뭘.”

속으로는 거짓말 한다 중얼대면서 입밖으로는 얌전히 되물었다. 어쨌든 기상호는 피해자였다.

“내는 마력도 못 느껴요.”

“돌았냐?”

별안간 폭탄 선언에 최종수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잽싸게 귀를 막아도 얼얼한 수준이었다.

“이제 믿겨져요?”

“이거 돌은 거 아니야?”

“무슨 왕세손이 말을 이렇게 험하게 해요? 내 그냥 사기 당한 거죠?”

“마력이 안 느껴질 수 있다고?”

왕족을 필두로 고위 귀족들은 대부분 마법사였다. 제아무리 미약하다한들 마력은 느꼈다. 하물며 기상호는 직계다. 역사상 최종수의 조부 같은 찬탈자는 하나 없었기에 그들 피는 온전히 대마법사의 것이었다. 비 또한 뛰어난 마법사로 고르는데, 본인 뿐만 아니라 선선대의 핏줄까지 따지는 아주 엄격한 심사가 이뤄진다. 최종수가 여태 기상호 말을 흘려들은 이유는 그래서였다. 기상호를 찾느라 떠난 여행길에서 배운 욕으로 지랄, 지랄이나 했지 진짜 무능력자일 줄은 몰랐다.

“그럼 내 저주는!”

“모른다고요! 지금 우리 엄마가 그랬다니까 책임감에 같이 다니고 있잖아요!”

“폐왕세자비는 죽었다며. 죽은 사람의 마법이 어떻게 지금까지 유지되는데?”

“애초에 저주를 전한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몰라!”

“그럼 나도 몰라요. 내가 뭐 대마법사로 보여요? 내는 도끼로 나무나 겨우 하는데.”

패닉 상태에 빠진 최종수가 안광 사라진 눈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기상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의 어미는 동물을 다스리는 힘을 가졌다. 운이 좋으면 마수에게도 들지 모른다는 말에 어린 기상호가 의아해하던 기억이 있다.

“햄.”

“저게 내 저주를 못 풀면 어떡하지 이제 슬슬 태풍이 불 때 아닌가. 여름이면 태풍이 가장 많이 불 때고,”

“햄?”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해? 평생 남들 손가락이나 받으면서? 내가 뭘 잘못했는데.”

“햄!”

턱이 붙들린 최종수가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기상호를 본다. 기상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 엄마가 언령사인 거 같은데 햄이 출입 가능한 도서관 없어요? 능력에 대한 책이 많은 곳이요.”

말에 힘을 담는 마법사를 우리는 언령사라 부른다. 대체로 미약한 힘인지라 언령사에 도달하기 보다는 그녀의 어미처럼 동물을 조종하면 테이머라 부르는데, 보통 길들이는 쪽에 가까웠다. 그녀 역시 그러했다. 조건도 까다롭고 한 번에 많은 동물을 길들일 수 없었다. 가끔이라도 마수를 조종하던 어미가 역사상 전례 없는 테이머였다.

“테이머였잖아.”

“그러니까요. 근데 언령사와 비슷한 계열이잖아요.”

“언령사라는 게 존재하긴 했어?”

건국신화는 그나마 현실성이라도 있지, 언령사는 흡사 신의 영역이었다. 신의 권능을 한 줌 뗀 정도가 아니라 오로지 신의 능력으로 생각했다. 기록된 언령사가 존재하긴 했는가? 가장 가까운 존재로는 정신조종이 있으나 그것마저 강한 힘을 발휘하진 못했다.

왕궁 연구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언령사라는 상상의 존재보다 자주 등장한 저주 능력에 집중했다. 예측하기로는 폐왕세손은 저주 능력자이며 그가 건 저주는 마력을 오염시켜 능력 제어권을 잃게 만든 쪽이었다. 처음 마법을 쓴 어린애가 그러하듯 그저 주도권을 잃은 것이니 정순한 마력만 주입하면 되는 일이라 희망했었다. 다만 정순한 마력에도 태풍이 불고, 왕국을 뒤져 해주 능력자를 대령해도 해결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정말 저주에 걸린게 맞느냐 물었고.

모두 기상호가 아주 대단한 저주 능력자라 생각했다. 폐왕세자비가 언령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그럼 왕궁으로 가세요.”

“아니. 왕궁 말고 북부 겨울산에 도서관이 있어.”

겨울산에는 기씨 초대의 옛 터였다. 눈이 일년에 절반이나 내리는 땅에 수도라 천명할 수 없으니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그 땅에는 초대의 동생이 남았다. 대공 작위를 받아 더는 기씨가 아닌 핏줄은 오래오래 겨울산을 지켰다. 그리고 겨울산에는 초대의 흔적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겨울산 도서관이었다. 왕족이나 배우는 역사학을 정작 직계 핏줄인 기상호는 몰랐고 최종수는 훔쳐서 배웠다.

“그런 게 있다고 들은 거 같기도?”

우물쭈물. 입술을 비죽 내밀고 손장난을 치며 말하는 기상호는 누가봐도 거짓말쟁이었다.

“너 거짓말할 때 티 나.”

“진짜요?”

“어.”

“근데 저 이번이 처음이에요!”

“알아.”

기상호는 그의 앞에서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거짓말이 저렇게 티가 나서 최초의 거짓말이었음에도 단박에 알아챘으니 여태 했던 말은 모두 진짜란 뜻이겠지. 그러면서 지능 높은 사기꾼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순식간에 멍청하고 해이해진 면상을 보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북쪽으로 가자. 대공령에 도달하면 뭐든 되겠지.”

추위로 무장한 땅으로, 마수를 처치하느라 용병이 귀한 땅으로 걸음했다.

-

“추워!”

한창 여름이던 땅과 다르게 북부는 초겨울이었다. 바람은 태풍처럼 쌩쌩 불고, 얕은 호수에는 살얼음이 졌다. 이 땅에서 생화는 사치품이라 거짓말이나 어리석음의 속담에 ‘생화’가 들어갔다. 북부에서 여관방 하나를 빌릴 때 주인이 친우냐 묻길래 아니라 답했더니 ‘차라리 생화를 미워한다 하라.’며 웃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주인은 북부가 처음이냐 묻고는 유쾌하게 알려주었다.

그만큼 산 것이 귀한 땅이었다. 대륙에 끝에 있는지라 위로 타국이 없다는 건 장점이지만, 타국 군인보다 무시무시한 마수가 가득한 추위의 땅은 상상과 다르게 다들 유쾌했다. 술과 고기를 좋아하되 마수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아이러니한 자들 틈바구니에 섞이자 둘도 조금 유쾌해졌다.

무려 두 달이나 함께 여행한 동지였다. 최종수는 아직 기상호의 이상한 개그코드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가끔 짓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키득키득 웃을 정도는 되었다. 마수 처치에도 호흡이 맞아 재빨라졌다. 가장 기쁜 점은 여태 최종수가 폭풍을 일으키지 않았단 점이다. 여행 중간중간 혹시나 태풍을 일으킬까 인적이 드문 곳에 숨었으나 자그마한 바람도 헛되게 불지 않았다.

그 덕인지 최종수는 기상호에게 더 자주 웃어줬다. 최종수는 여전히 기상호에게 ‘왕세자’라고 부르지 않는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이마저도 장족의 발전이다.

“여긴 진짜 억수로 춥네요.”

기상호는 여관집 1층 식당에서 서빙을 하던 중년의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아래쪽 사람이네?”

그녀는 북부 사람 특유의 말씨를 쓰며 친근한 여행자에게 더 친근하게 보답했따.

“네네. 고향이 아래인데 여 햄은 수도요.”

“딱 봐도 곱상한 게 도련님이야. 마법사 나으리들은 어째 다 수도 출신이더라?”

왕립마법학교가 수도에 있는 덕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기를 여긴 용병이 많은 북부다. 용병의 2할은 마법사고, 수도 출신의 마법사라면 최종수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햄.”

“알아.”

하며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중년의 여자는 저가 놀려서 그러느냐 미안해했지만 기상호는 그런게 아니라 원래 이 햄이 그렇다며 능글맞게 굴었다.

“내가 미안하니까 좋은 정보를 줄게. 저어기 끝 테이블에 앉은 사람 보여? 저 사람이 일대 용병 대장이래. 원한다면 내가 다리를 놔줄게. 우리 여관방을 싸게 빌려줬는데 나한테 어찌나 고맙다며 인사하던지.”

“감사해요! 덕분에 인맥이 생겼네요.”

“아니야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저 사람이 말하기를 수도에서부터 아랫지방까지 큰 태풍이 불어서 마수의 씨가 말랐대. 아랫지방 용병들 싹 다 북부로 올라온 참이니 줄을 잘 서야 할 거야. 용병들끼리도 자리싸움이 있다지?”

“저희는 고작 둘이라 그런 건 잘 몰라서요. 일단 부탁할게요.”

“기상호.”

“네?”

“진짜 용병 일이라도 하게?”

“햄도 아시잖아요. 겨울산은 그냥 들어갈 수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용병이라 해도 용병단 무리에 섞여 들어가는 거랑 차이가 난다고요.”

“알아. 근데 우리를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죠. 햄은 나서지 마세요. 제가 뭐든 둘러댈 테니까.”

최종수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 기상호를 찾느라 넉 달, 여기까지 오는데도 두 달이나 썼으니 벌써 여섯 달째 여행이다. 일평생 궁에서만 산 도련님에게 여섯 달짜리 여행은 지나치게 피로했다. 기상호와 있으니 평온해지는 건 뒤로하고 이제는 집이 그리웠다. 그렇다고 해서 궁이 그립다는 건 아니다. 그가 그리워하는 집은 언제나 가상의 공간이다. 누구도 그를 손가락질 하지 않고, 제 아비에게 자식 하나 더 낳아달라 간청하지 않는 곳. 태풍의 두려움도 없고,

“햄!”

저렇게 햄이라 부르는 놈도 있는.

“어…?”

“어서 가요. 용병단 대장이랑 말해봤는데 우리 소문이 쬐까 났나 봐요. 넣어준다길래… 햄?”

최종수의 이상향에 언제부터 기상호가 있었던가.

“얼굴이 빨간데 햄 혹시 아파요?”

기상호는 눈앞에서 손을 휘저으며 정신 차리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종수는 잠시간의 시간을 더듬기 바빴다. 도저히 그럴 틈이 없었다. 하지만 최종수는 아주 오래 기상호를 상상했다. 제게 저주를 건 왕세손의 생김새부터 성격, 말씨나 자잘한 습관까지 수억 번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애는 벼랑 끝에 몰려있던 최종수의 상상 친구 같은 존재기도 했다. 제아무리 밉고 원망해도 위기의 순간마다 함께하던 망상 속 기상호에게 정을 떼긴 어려웠다. 그리고 그건 현실의 기상호에게 그대로 달라붙었다.

“햄!”

“닥쳐!”

최종수는 앞이 보이지 않도록 후드를 과하게 눌러쓰고 여관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저래봤자 같은 방인데, 드디어 돌았나…?”

“너네 일행 왜 저러냐?”

“몰라요. 성격이 저래가 누가 데려갈런지.”

기상호는 그에게 잠시간의 시간을 줬다. 식당에서 느긋하게 밥도 먹고 용병단 대장에게 가서 아부도 떨고 그들 사이에 섞여 에일도 마셨다. 식당에는 흥겨운 북부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겨울산에 사는 매서운 마수를 깨우지 말어라- 내가 너희를 지킬 테니 너희는 내 지식을 지켜라- 겨울산에 사는 매서운 마수를 깨우지 말어라- 내가 너희에게 맡기는 마지막 보물이다.”

가사도 모르면서 흥에 겨워 따라 불렀다. 으레 옛 노래가 그러하듯 같은 가사의 무한 반복이었다. 음유시인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무리도 생기자 기상호는 낄낄 웃으며 즐겼다. 그러다가 그 ‘잠시’가 지나자 여운을 느끼며 더 놀자 조르는 이들을 두고 방으로 올라갔다.

“햄 자요?”

꺼진 양초에 불을 붙였다. 북부의 해는 금방 졌고 쉽게 추워졌다. 그런데도 불을 켜지 않는 건 조금 바보 같아서 한 마디 하려는 찰나였다.

“기상호.”

“안 잤어요?”

“안 잔 거 알면서 그러지 좀 마. 너 거짓말 하는 거 티 난다고 했잖아.”

“아까 그렇게 성질을 부리길래… 왜요.”

“너는 왕세손이라는 말이 싫어?”

“햄이 싫냐고요?”

“아니, 너한테 하는 게 싫냐고. 솔직히 너는 폐왕세손이라도 왕세손이야. 멸족하지 않고 어디든 터를 잡고 명맥을 이어가면 너는 왕이 되는 거라고.”

“그만 하세요.”

“대화할 필요가 있잖아. 나는 온갖 걸 다 말해줬어. 근데 너는 그거 하나 이야기 못 해?”

“겨울산 가는데 그게 왜 필요한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최종수는 기상호의 많은 걸 알고 싶었다. 기상호가 아래에서 흥에 겨웠을 때 이불 안에 들어가서 생각의 나래를 펼쳤다. 일생을 친구 없고 애인은 더더욱 없는 뻣뻣한 뇌의 한계가 앞으로 기상호의 많은 것을 알아나가고, 함께하자! 는 유치하고 망측한 결론에 도달했으나. 그는 모를 일이다.

기상호도 마찬가지다. 그도 숨어 사느라 일평생 친구가 없었다. 능글대는 성미 또한 소심함을 숨기기 위해 튀어나온 종류로 저보다 더 소심하고 사회성 없는 최종수 때문에 갓 만들어진 사회성이었다. 기상호도 누군가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쪽보다는 입 다물고 참아주는 쪽이 편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왕세손 같은 왕족은 해소되지 않은 불쾌함이었다.

“왜 필요하냐고요.”

멍청하게 웃던 얼굴이 굳었다. 아, 기상호는 냉정할 때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얼떨결에 귀한 표정을 보았으나 그다지 기쁘진 않았다.

“너랑 나는 겨울산에 목숨 걸고 가는 거야. 내가 네 원수인데 뭘 믿고 등을 맡겨?”

“그럼 두 달동안 등짝 말고 얼굴 맡기셨어요? 여태 잘 맡겨놓고 왜 이제 와서 그러냐고요. 계속 나 의심하면서 다녔어요?”

거칠게 머리를 헤집은 기상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솔직히 햄요, 내가 말했죠. 나는 저주 같은 거 모른다고. 근데 이 고생을 왜 하는 줄 알아요? 그냥 우리 엄마가 한 거 같아서, 그거 미안해서요. 잘못 걸리면 내 목이 잘리는데 돌았다고 하하호호 싸돌아 다녀요? 내 기사도 햄이 죽인 건 알고 있죠? 아무리 싫어도 같이 살았어요. 아시겠지만 그 사람이 제 스승이고 삼촌이고 친구였어요.”

기상호는 답지않게 속사포로 쏘아댔다. 최종수는 입술이나 움찔대고는 다른 건 못 했다. 침대에 누워 생각한 엔딩은 이게 아니었는데…….

“그리고 자기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 결론짓는 거 짜증 나거든요? 옆에서 버티는 사람 생각 좀 하시죠? 솔직히 햄 이럴 때마다 그냥 버리고 가고 싶어요. 죽든지 말든지.”

“사과해.”

한참 혼자 말하던 기상호의 말꼬리를 울음 섞인 명령조가 끊어냈다.

“왜요.”

그럼에도 기상호는 덤덤하다. 울어보라지.

“말이 심하잖아!”

최종수가 달려들었다. 마법사 답지않게 큰 덩치가 달려들자 기상호는 맥 없이 벽에 부딪혔다. 쿵도 아니고 쾅하는 소리가 여관방을 울렸다.

“돌았어요?”

꽉 움켜쥐는 손아귀가 장난 아니다. 얼마나 거센지 쥐고 있는 최종수 손이 다 빨갰다. 기상호는 저릿해지는 감각에 발버둥쳐도 울면서 달려드는 최종수를 이기지 못했다.

‘이러다 뒈져버리라지.’

슬슬 한계다.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놈이랑은,

“으…… 켁!”

“햄…?”

아까까지만 해도 건강하게 달려들던 최종수가 별안간 무너졌다. 버둥거리다 각혈했다. 기상호는 여행 중 최종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태풍은 갑자기 불었어. 조건은 모르겠고 전조 증상만 있어. 발작과 각혈.’

“태풍…….”

북부의 민간구역에는 추위로 인해 창문이 보기 드물었다. 대신 망루가 잘 형성되어 있는데, 다만 지금은 창문이 없어도 바깥 상황이 잘 보였다.

“태풍이다!”

사람들의 비명과 태풍의 눈 특유의 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기상호는 익숙한 공기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쓰러져 발작하는 최종수를 붙들고 제발 제어 좀 해보라 흔들어도 그는 답하는 대신 거품을 물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기상호는 턱 끝까지 공포가 차올랐다.

이대로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속으로 죽으라고 했는데 설마 그거 때문일까.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두려웠다. 아무리 싸웠다한들 그간의 정이 있는데 이대로 죽는 건 그도 바라지 않는다.

“햄 제발요. 정신 좀 차려봐요! 아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요. 진짜요 제발요!”

두서없는 애달픈 문장이었다. 기상호는 이제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진짜 죽으면 어쩌란 말인가.

“기, 기사, 상……”

야트막한 부름에 기상호는 볼의 눈물을 벅벅 닦으며 정신이 차려지느냐 물었다. 하여간 제정신이라도 능력을 제어하기 어려워 보였으나 그건 둘째치고 그가 살기만 하면 뭐든 좋았다. 이대로 왕세손과 무너진 왕조의 폐왕세손임을 들통나도 좋다 생각할만큼.

“이, 이상해. 느려, 력이 잦아드, 들어.”

“말하지 마세요! 햄 아직도 피 흘려요!”

그의 말마따나 태풍은 잦아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기적인지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최종수는 기절했다.

-

수마에 빠진 최종수는 뜨문뜨문 현실의 소리를 들었다. 기상호가 저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 누군가 왕세손을 잡으라 지르고, 자결 어쩌고하며 짐짓 근엄하게 구는 소리. 기상호가 분노에 잠겨 소리치고 조금만 참으라며 저를 달래면서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리고 피부를 아리는 추위에 눈을 떴다.

“햄!”

마수의 집결지이자, 초대의 도서관이 있는 겨울산이었다.

“드디어 눈 떴어요? 진짜 나는 햄이 죽는 줄 알았어요.”

기상호는 옆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떨어지는 눈물이 곧장 어는 걸 보아하니 꿈은 아닌 듯싶었다. 눈이 시리게 새하얀 눈밭에 한파 방비 없이 들어온 까닭은 잠시나마 일었던 태풍에 사람들이 왕세손이 여기 있는 게 아니냐 의심했다고 한다. 기상호가 인사했던 용병단의 마법사가 운 나쁘게 왕실 파티에 참석할 만큼 고위 귀족의 자녀였고, 때문의 그의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며 쫓기 시작했단다. 기상호는 기절한 그를 안고 칼이나 겨우 챙겨 도망쳤으나, 왕실에서 고결하게 자결하란 명이 떨어졌으니 피해 끼치지 말고 얼른 죽으란 고함에 기상호도 욱해서 칼부림이 있었다고.

“미쳤냐?”

땅에 손을 짚고 겨우 일어선 최종수가 처음으로 한 말이 그거였다. 기상호는 기죽지 않고 엥엥 울다가 곧 당돌하게 말했다.

“미친 김에 더 미쳐볼게요. 우리 지금 겨울산 도서관 앞에 있는 거 같지 않아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폭설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커다란 문이 있다. 기상호가 말한대로 정말 그 문은 초대의 도서관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들어가.”

“햄은요?”

“넌 식당에서 그렇게 부르던 노래도 기억 안 나?”

‘겨울산에 사는 매서운 마수를 깨우지 말어라- 내가 너희를 지킬 테니 너희는 내 지식을 지켜라- 겨울산에 사는 매서운 마수를 깨우지 말어라- 내가 너희에게 맡기는 마지막 보물이다.’

“거기서 말하는 너희는 기씨 일족을 말하는 거야. 너 이외에 이제 누구도 못 들어가.”

“햄을 두고 어떻게 가요! 일단 안정부터 취하고 나중에,”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내가 멍청한 줄 알아? 왕이, 내 조부가 자결 명을 내렸다며. 이제 나는 왕세손이 아니라 도망자야. 알겠어? 이 빌어먹을 저주가 끝나기 전까진 너도 나도 자유 같은 건 없어!”

“해, 햄……. 근데 이렇게 몸이 안 좋잖아요.”

“여긴 오랫동안 발견 안 된 곳이야. 몰라, 너네만 찾아오도록 하는 뭐라도 있나보지. 눈 굴에 넣어주고 가. 거기 가면 안 들킬 거야. 적당히 따뜻하겠지….”

최종수는 고지를 코앞에 두고 말이 많아졌다. 이제 기상호도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태풍을 일으킬 때마다 그런 고통이라면 당장에라도 저주를 떨쳐버리고 싶겠지.

“알겠죠. 조금만 기다려요! 내 금방 다녀올게요.”

-

겨울산 도서관 내부는 전혀 춥지 않았다. 마치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박제한 듯 선선했다. 기상호는 복도를 달리며 최종수가 여기 들어오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몸도 성치 않은데 냉골에 버려뒀단 불안감에 심하게 긴장됐다. 잠깐을 달리자 복도 끝에는 책 애호가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큰 사이즈의 책장 하나가 덜렁 있었다. 심지어 거기에는 딱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대단히 두껍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아주 얇지도 않은 검은색과 파란색이 섞인 표지에는 ‘최종수와 기상호의 이야기’ 라고 적혀있었다.

“이, 이게 뭐꼬.”

겨울산의 도서관. 왕실 교육으로 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방대한 양의 책을 상상할 거다. 웅장한 공간에 평생을 읽어도 남을 책이 한가득 있을 거라고. 최종수도 그랬고 기상호도 그러했다. 최종수는 몇 주를 굶으며 지낼 각오를, 기상호는 어떻게 하면 원하는 책을 빠르게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속이 쓰릴 지경이었는데 이렇게 떡하니 한 권의 책만 있을 줄이야.

책을 펼치자 거기에는…….

“제기랄!”

기상호는 허공에 대고 구역질했다. 속이 메슥거리다 못해 장기가 뒤집어졌다. 거기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최종수의 생일보다 더 이전. 기상호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이 있다. 고작 네 살. 나라를 빼앗기고 도망친 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넷이었다. 머리가 더 큰 기상호는 도망 중 죽었다고 기억하고 있던 기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멀쩡히 살아있었다. 어미는 기억보다 더 최씨 일가를 저주했고, 기상호는 그녀 곁에 아주 오래 머물며 세뇌당하듯 최씨 일가를 미워했다.

내 아들, 너의 자리를 앗아가고 네 아비와 조부를 죽인 최씨를 원망하렴.

그렇게 말하노라면 어린 기상호 심장에 정말 그네들에 대한 미움이 싹텄다. 이제 겨우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바빴던 네 살. 그는 옳고 그름보다 최씨 일가에 대해 더 많이 알았다. 그러고는 제 어미의 삶이 오로지 최씨로 인해 망가졌으며 기상호는 왕궁을 지키다 비참하게 효수당한 아비와 조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던 때였다. 도피 생활에 지친 기사는 그들 몰래 도망자들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겨 공로를 인정받고자 했고 어린 기상호는 그걸 알아차리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장성한 기사 앞을 막아서는 네 살배기 아이라니. 기사는 기상호의 가치를 따지고는 죽이진 않겠노라 말하며 기절시키고자 다가갔다. 그때였다.

“사라져.”

기상호의 능력이 별안간 개화하고야 말았다. 신이 내린 힘 중 가장 천박하다는 저주는 역사상 가장 많은 마력을 가진 아비와 언령과 비슷한 계열의 테이머인 어미 사이에 태어나 미움을 안고 살던 소년에게서 태어났다.

갓 발휘한 능력은 정도도 모르고 기사의 몸을 갉아 먹었다. 그리고 마침 제 아들을 찾던 어미의 눈에 띄었다.

“아들!”

폐왕세자비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울었다. 슬퍼하고 싶은데, 빌어먹을 최씨에게 반격할 생각만으로도 기뻤다. 그래서 울었다. 그렇게 죽은 기사는 저 멀리 치우고 충성심 깊은 기사마저 그들을 배신할까 염려하여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손, 내 아들. 아무에게도 말하지마.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응 엄마.”

세뇌는 한 번이 쉽지, 두 번은 어렵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가 정말 언령사에 가까운 존재였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일 년간 아들에게 깊은 원념을 심은 뒤 이렇게 말했다.

“네 자리를 뺏은 최씨가 밉지 않니?”

“미워.”

“네 또래가 있어. 네 자리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앞으로 마땅히 누려야 할 네 것마저도 훔쳤어.”

“미워.”

“어떻게 하고 싶어?”

“모르겠어…….”

“이 어미가 도와줄게. 앞으로 그 애는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할 거야.”

“응.”

“어때?”

“그래도 모르겠어….”

어린 기상호가 고개를 도리 젓고는 어미 품에 폭삭 안겼다. 모자의 비밀이야기에 눈치껏 빠져준 기사는 밤새 사냥이나 하라지. 폐왕세자비는 기사를 떼어나고는 마음껏 속삭였다.

“그러면 그 저주를 내게 맡겨. 네가 미워할 상대에게 주고 올게.”

“진짜?”

품에 안겼던 기상호가 묻자 폐왕세자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상호는 마치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불운하게도 자라면서 기상호는 능력을 잊었다. 제 어미가 야밤에 사라지고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나타난 일까지 모조리 다. 기억은 미화되었다. 최종수가 어린 날 인내하던 끔찍한 고통을 기어코 미화시킨 것처럼 기상호도 흉측한 과거를 미화시켰다. 세월이 흘러도 도통 떠오르지 않고 멀쩡한 척 기억 구석에 박혔고 이내 먼지가 쌓여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기상호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낯짝으로 그를 저주하고 있었다. 제 온 마력을 다 주느라 마력을 느끼지도 못할만큼 진심으로, 전력으로. 겨울산 도서관이 보여주는 진실은 지나치게 끔찍하고 역겨워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공포가 밀려온다.

책은 과거를 보여주고는 끝이 났다. 해주 방법은커녕 고통을 덜어주는 법도 적혀있지 않았다. 껄떡이며 눈물을 참아봐도 멈추지 않는다.

“햄한테 미안해서 우짜노. 내 때문이다. 다 내 때문이었다!”

아까 갑자기 태풍이 불었던 것도 저주 위로 새 저주까지 얹은 탓임이 분명하다. 그러면서 여태 저주와 저는 상관없다 일갈했다고? 끔찍하다. 저주스럽다. 마수보다 더 마수 같다. 

“햄한테 사과해야 한다…….”

그러면 이제는 어쩌지? 그는 해주법도 모르고 고통을 덜어주는 법도 모른다. 그저 저주만 해댈 뿐.

“죽으면… 죽으면 되려나.”

안광이 사라진다. 기상호가 밖으로 향했다.

-

문밖 굴에 틀어박힌 최종수는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기상호 없이 한참을 버텨야 하는데 이러다가 저주보다 동사로 죽는 거 아닌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기상호가 나왔다. 지나치게 빨랐다.

“야, 너 허탕친, 야!”

눈물바람의 기상호가 품에 안겼다. 도서관 문을 활짝 열어놓고서는.

“야! 문 닫아! 기씨 일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데 이렇게 열어뒀다가 동물이라도 들어가면 야!”

“햄……. 나 때문이었어요.”

안색이 싸해진다. 뇌가 굳는다. 귀로 듣고도 이해 가지 않았다.

“뭐라고?”

“우리 엄마가 아니라 내가 진짜로 햄을 저주했다고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너 무능력자라며.”

“햄이 그랬죠? 그럴 리 없다고. 그래요. 제가 저주했어요. 저기 안에 책이 있어요. 햄이랑 내 이야기가 담긴 책이요.”

“닥치고 해주법이나 말해.”

“몰라요.”

“네가 했다며!”

“나도 몰라요!”

기상호는 꺽꺽 숨넘어가게 울며 말했다.

“미안해요 햄…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내가 저주했다는 기억도 없고 책에도 그런 건 안 나와있었어요. 미안해요, 내가 진짜 미안해요.”

“개 같은 새끼야!”

어느덧 최종수도 울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꾸역꾸역 여기까지 버텨왔는데! 나도 이제 한계야. 이렇게 끔찍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자결 명도 따르고 싶지 않아….”

“미안해요.”

“너 때문이었어. 진짜 너 때문이었어! 나는 널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미안해요 진짜 미안해요.”

“죽어 죽어!”

“죽어라도 보고 싶은데 그러다가 영영 해주 안 되면 어떡해요……. 나는요 죽는 것보다 그게 더 무서워요.”

“죽어 그냥 죽으라고!”

그르르릉.

사방에서 들려오는 긁는 소리에 눈물범벅인 얼굴로 고개 들었다. 그리고 마주 보고 있던 서로의 시야에 마수들이 한가득이었다.

“이게 무슨…!”

열려있는 도서관 문으로 겨울 토끼 한 마리가 껑충껑충 들어가고 있었다.

“일단 튀어요!”

무릎까지 쌓인 눈밭에 발이 푹푹 잠겼다. 최종수가 앞장서서 찬바람으로 놈들을 얼리고 날렸다. 기상호는 뒤에서 남은 마수를 처리했다.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있다고 죽이 잘 맞았지만, 최종수는 기상호가 미워지는 때였고, 기상호는 최종수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때였다. 잠깐의 틈이 없을 리가. 최종수는 뒤에서 달리는 기상호를 신경 쓰느라 마수 하나를 놓쳤고, 기상호도 이를 보지 못했다.

“기상호!”

그렇게 애타게 불러보라지. 이미 기상호는 마수에게 팔을 물렸다.

“마수 주제에 꺼지라고!”

기상호가 칼로 마수의 얼굴을 후렸다. 그리고 칼날로 갈랐다. 놈은 칼에 익숙한 종인지 가르던 칼을 쥐고 허공으로 날렸다.

“젠장 마력이!”

최종수는 아까 태풍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마수에게 한참이나 바람을 쏘아댔다. 애초에 도망칠 기력도 없는 몸에 남은 마력은 없다.

기상호는 인정했다. 이제 죽는다.

이렇게 죽으면 해주는 되는 걸까. 그러면 이 마수 무리에서 햄 혼자 빠져나갈 수 있나? 죽음을 인지하면서도 최종수에게 미안했다. 이러다가 해주가 안 되면 어쩔까 염려하면서.

“정신 차려!”

저 뒤에서 최종수가 날아왔다. 그가 손에 놓은 칼을 들고서. 여행 내내 마법만 쓰던 그였다. 생각해보니 명문가 도련님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검을 잡았지. 최종수는 이제 왕세손이었으니 얼마나 잘난 스승을 두었던가.

“이렇게 뒤진다고? 나는 용납 못 해. 끝까지 날 책임지란 말이야, 내가 이렇게 널 살려주잖아!”

기상호가 휘두르던 검과는 완전히 달랐다. 더 묵직한데 마치 그의 마법처럼 더 잽쌌다. 마수도 그의 검에는 이기지 못하고 반으로 갈라졌다. 최종수는 마력이 다 됐다며 기상호 검으로 마수들을 베었다. 혼자 길을 트니 제대로 나아가질 못했다. 기상호는 안절부절 못했다.

“어떻게든 해봐 좀!”

그가 재촉했다. 그도 뭐라도 하고 싶었으나 속에서 마력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압박감에 심장이 조이고 정신이 날아가려는 때였다. 최종수가 유일한 공격자란 걸 마수들도 아는지 떼거리로 몰려와 그를 방해했다. 저러다 죽는다, 진짜 죽는단 말이다.

“다들 꺼져!”

우엑.

기상호가 아까의 최종수처럼 각혈했다. 울컥 토한 피가 하얀 눈밭에 그림처럼 뚝뚝 떨어진다. 신경줄 긁는 마수 소리가 멎었길래 고개 들어보니 최종수을 에워싸던 마수들 모두 죽어 가루가 되고 있었다.

“기상호. 이거 네가 한 거야?”

뚝뚝. 떨어지는 핏방물은 무언의 대답이었다. 최종수는 마법사의 각혈을 잘 안다. 몸에서 순환하는 마력보다 소모하는 마력의 양이 더 많고, 그 마력을 쓰는 마법이 주제 이상의 것이어야 했다. 결국 몸의 마력을 잃고도 마법을 뽑아낼 때 정순한 인간의 생명이 소모된다.

“햄……. 내 몸이 이상해요.”

겨울산 도서관의 규칙을 어겼다. 기씨 이외의 어떤 생명도 허용하지 않는 문에 다른 생명체가 들어갔다. 주변에 있던 마수란 마수는 모조리 그들 앞에 나타났고, 그걸 기상호가 없앴다. 최종수를 겨냥하느라 몸에 하나 남지 않은 마력을 알면서도 저주의 힘을 썼다.

갸우뚱 흔들리던 몸이 기둥 잘린 나무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기상호는 한기에 잠식되다 못해 눈이 뜨겁게 느껴졌다. 동사하는 시체의 절반은 뇌가 미쳐 더위로 인식하여 알몸 상태라더니 기상호도 그 꼴이었다.

“뜨거워요, 뜨거워요….”

하얀 눈밭에 핏물이 빨갛게 피었다. 돌아버린 기상호는 키득키득 웃으며 ‘꽃이 폈네요’ 중얼거렸다. 최종수는 그를 안았다. 눈보다 기상호 몸이 더 차가웠다. 이대로 두면 죽는다. 기상호는 실시간으로 저주를 유지하느라 마력이 생성되는 족족 소모하고 있었다. 마력이 고갈되고 생명을 사용한 육신은 일정 마력이 몸에 있어야 한다.

“내가 죽어도 네가 살아. 그래야만 해.”

최종수는 저도 흐르는 눈물을 꽁꽁 얼도록 두었다. 지금은 눈물 닦을 때가 아니다. 기상호를 업고 숲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눈밭에 발이 푹푹 잠기고 기절한 사람은 곱절 무거웠다. 최종수 본인도 마력을 소진하고도 검을 썼으니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움직인다. 최종수는 진실로 저가 죽더라도 기상호는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씨의 업보는 최종수의 것이다. 그러니 귀한 왕세손으로 살지 못하고 도망자 신세나 지던 일 역시 제 탓이다. 잠깐이나마 상상해보기를, 반역이 없는 세상에서의 왕세손 기상호와 공작가의 손자 최종수는 놀이 친구는 되었을까. 멍청한 얼굴의 기상호가 저를 아랫사람이라며 명령할 때의 표정을 상상하니 조금 웃겼다. 자기가 무서워봤자 얼마나 무섭다고. 흐름의 끝에는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제가 왜 그래야 하냐 묻는 기상호가 있다. 어두운 여관방에서 그 애는 정말 무서웠지. 그러니 그 세계의 기상호도 제게 돌아서면 아주 무서울 거다. 최종수는 그걸 알고 짜증이나 낼지언정 반항하진 못하겠지.

“하. 재밌네.”

눈이 내린다. 도서관의 규칙을 어겼어도 겨울산은 여전했다. 

-

“왕세손 저하 드십니다!”

최종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고개 숙였다. 벌써 반 시진이나 기다려 신경질이났다. 그래도 내려다보는 눈이 많다고 예를 갖췄다.

“고개를 들라.”

답지 않게 엄한 투였다. 최종수는 설마 왕세손비 후보 목록을 훔친 걸 들켰나 걱정하며 고개 들었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건 아랫사람을 죄다 물려놓고 혼자 웃음을 참고 있는 기상호 낯짝이었다.

“야!”

“아 햄! 내 진짜 웃겨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 오늘따라 와 그러는가 했는데 폐하의 시종이 여 있었네요?”

긴장이 풀린 최종수가 소파에 털썩 앉고 한숨 쉬었다. 한바탕 지랄하려던 힘이 가셨다. 꽉 조인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그래도 머리나 옷이 단정해서 귀한 자리 가는 티가 났다.

“오늘 힘 좀 줬네요?”

“너도.”

기상호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향이 강한 꽃차는 아직 식지 않아 따뜻했다. 예법상 호로록 마시고 있으니 기상호가 미친 소리를 투척했다.

“오늘 선 봤거든요. 갈아입어야 하는데 까먹었네요.”

푸웁!

최종수는 마시던 차를 뿜었다. 앞에서 이 햄 돌았냐며 지르는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선?”

“이거 딴 사람한텐 말하지 말고요. 왕족은 선이라 안 하잖아요. 그게 모욕이라나 뭐라나.”

불량하게 턱을 괴고 일그러진 발음으로 푸념하던 기상호가 축 늘어진 입술로 말한다.

“나는 햄이 부러워요.”

“선을 봤다고?”

“나는요 왕세손인데도 능력 하나 없잖아요.”

“누구랑? 그 백작가 고명딸?”

"근데도 햄은 천재라카고."

"아니면 전에 너한테 말 건 외국 왕녀?"

“우리 지금 대화하고 있는 거 맞아요?”

지금 친우의 고민보다 누구랑 선을 봤는지가 더 중요한 건가? 기상호는 어이가 없었다. 양주먹 꽉 쥐고 티테이블을 쾅 소리나게 내려친 기상호가 지금 좋아하는 여자를 자기한테 뺏길까 겁이 나냐 도발 같은 말이나 했다.

‘멍청아! 반대라고!’

이러는 최종수가 곱절 멍청해 보였으나 어쨌든.

그들은 엇비슷한 나이와 권력있는 집안의 직계 자손이라는 이유로 놀이 친구로 지냈다. 나이가 들어 더는 놀이 친구가 아니라도 둘은 늘 함께였다. 감히 왕세손께 빠져먹은 말이나 해대는 최종수도 미쳤지만, 제 권위가 깎여도 직위 없는 공작의 손자에게 한 마디하지 못하는 기상호의 나약한 기세도 제정신 아니긴 마찬가지라 끼리끼리였다.

기상호는 아직 능력을 개화하지 못해 왕실 종마 소리나 듣고 앉았고, 최종수는 기상호에게 진상되는 후보 목록을 훔치고 방해하기 바빴다. 둘은 그렇게 일생을 허비하며 지냈다. 기상호는 긴 세월 능력을 개화하지 못하되 이론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세월이 흘러 그가 왕세자가 되었을 때 이제 왕실 종마보다는 영리하신 왕세자 저하 소리를 들었다. 최종수는 여전히 기상호에게 왕세자비 후보 목록을 훔쳤다. 소공자가 되었을 때는 대놓고 후보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기도 했다.

영리하신 왕세자 저하는 이를 모르지 않았다. 왕세손 때야 모르고 살았다지만, 글쎄. 지금은 알면서도 방치했다. 최종수는 앞에서는 별 말 못하는 편이었고 기상호는 아량 넓은 주인이었다.

시간은 더 지나 그가 왕이 되었을 때 이제는 대놓고 저가 비인 척 궁 안을 쏘다녔다. 실상은 공작일 뿐이면서 감히 왕께 들어오는 혼담을 처치했다. 왕위를 우습게 아는 짝인데도 최종수는 왕의 기사였다. 왕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은 솔선수범하여 처치했고.

아무튼.

늙은 기상호가 늙어도 아리따운 최종수에게 묻는다.

“짐과 꾸는 꿈은 즐거웠나?”

최종수는 길어도 짧게만 느껴지던 세월을 꿈이라 칭하는 왕이 미웠다.

“예, 그리하였나이다.”

“그대도 나도 현실에선 이렇게 나이 들지 못하였지.”

“끝까지 지키지 못함이 천추의 한입니다.”

왕인 기상호는 손을 휘저으며 부정했다.

“되었다. 되었어.”

늙은 기상호는 다시 소년이 된다.

“햄 마지막 부탁이 있어요.”

늙은 최종수는 다시 소년이 된다.

“뭔데.”

“키스해줄 수 있어요?”

순박한 얼굴로 던지는 폭탄 선언에 최종수가 펄쩍 뛰었다.

“너는 애가 발랑 까지고는!”

“싫어요?”

“별로…….”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이상하게 더웠다.

“아아앙~”

같잖지도 않은 재촉이 귀여워 보여서 최종수는 씨익 웃으며 얼굴을 움직였다. 부드러울 줄 알았던 입술은 각박한 삶의 증거처럼 거칠었다. 뺨을 마주 잡는다.

“햄을 만나서 좋았어요.”

“나도.”

둘은 돌아가야 할 현실이 두려우면서도 지금만큼은 씨익 웃었다. 제아무리 혼란한 세상이라 한들 서로만 있으면 태풍의 눈이나 마찬가지였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