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규쫑] 친구 말고 애인
2023년 종수 생일 기념 게스트북 위탁 원고
* 종수와 연애 같지 않은 연애를 하는 모브여캐가 나옵니다. 일주일도 사귀지 않고 헤어지는... 쫑수의 마음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줄 뿐인 소녀이지만! 혹시 불편하신 분들도 계실테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게북 샘플 공개보다 더 많은 양 샘플로 올려뒀습니다 ^^)9!!
* 『이런 건 나랑만해』와 세계관을 공유합니다~! 10년 째 잘 사귀고 있는 규쫑의 풋풋한 과거 쯤으로 봐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
종수가 소란스러운 체육관 문 쪽을 바라봤다. 이규가 승대와 함께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늘은 먼저 가라더니 승대와 할 얘기가 있었나보다, 종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승대가 친한 척 이규의 목에 팔을 감고 있는 건 좀 거슬렸다. 종수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승대는 그런 종수의 시선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이규에게 시비 아닌 시비를 걸고 있었다.
“너 이 자식. 빡빡이 주제에 인기가 많다?”
“빡빡이라니. 말이 심하네.”
이규가 제 목에 감겨있던 승대의 팔을 내팽개쳤다. 승대가 투덜거리면서 이규를 밀쳤다. 종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표정을 풀고 다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사실 아님?”
승대의 말에 이규가 눈썹을 까닥이며 그를 보다가, 생긋 웃었다.
“왜 이래. 고백 한 번도 안 받아 본 사람처럼.”
승대를 밀어버리는 건 덤이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두 걸음쯤 떨어진 승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종수는 거슬리는 단어를 하나 낚아챘다. 고백이라는 단어였다.
“……이 새끼도 진짜 성격 안 좋아.”
“내가?”
“니가 왜 최종수 친군지 알겠다.”
승대가 그 말을 하며 종수를 흘긋 바라봤다. 종수는 승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팩 돌렸다.
저게 진짜. 승대가 작게 중얼거렸다. 최종수라는 놈은 진짜 싸가지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알면 알수록 더 그랬다. 최대한 마주칠 거리를 만들지 않는 게 답이었다. 혹시나 마주쳐야 하는 일이 있다면 이규라도 끼고 만나야 했다. 승대의 시선이 자연스레 이규를 향했다. 이규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아니었다. 둘 다 똑같은 놈이었다. 한 놈은 내내 얼굴을 굳힌 채 가오를 잡고 있어 재수가 없었고, 한 놈은 내내 유들유들한 척 굴어 재수가 없었다. 이런 놈들이 중심이라니 망했네, 장도고. 승대가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규도 어이가 없었다. 고백받기 같은 사적인 순간을 훔쳐본 것도 모자라 ─승대는 우연히 마주쳤다고 주장했지만, 정말 우연이었다면 가던 길을 갔으면 될 일이었다. 거기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건 승대였다─ 체육관으로 오는 내내 그걸로 시비를 걸더니, 이제는 저보고 성격이 안 좋다는 말이나 해댔다. 하여간 이 녀석도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갔다.
하아. 한숨을 쉰 이규가 승대의 어깨를 잡았다. 뜨끈한 손에 승대가 몸을 움찔 떠는 것도 잠시, 이규가 그를 불렀다.
“승대야.”
승대가 몸서리를 쳤다. 어깨를 틀어 이규의 손을 떨쳐냈다. 와그작 구겨진 얼굴로 이규를 바라봤다. 서울 놈들의 저 간질간질한 말투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왜. 뭐. 왜 인마.”
“너가 모쏠이라는 건 잘 알겠어.”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승대가 이규를 꼬나봤다. 이규는 그새 불쌍하다는 표정을 하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대는 기가 찼다.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 이 새끼 봐라.”
“너도 곧 사귈 수 있을 거야.”
“아. 뭔 소리야, 진짜.”
구겨지는 승대의 얼굴에도 이규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힘내.”
거기까지 말한 이규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종수를 향해서였다.
“야.”
승대가 이규를 다시 불렀지만, 이규는 뒤돌아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 종수를 불렀다.
“종수. 먼저 와서 몸 풀고 있었어?”
종수도 승대를 바라보던 눈빛과는 확연히 다른 얼굴로 이규를 돌아봤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야. 이규. 너 내 말 안 들리냐?”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승대가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저 새끼는 최종수한테 다정한 거 반이라도 좀 남들한테 해봐라. 라고 생각했다가……. 소름이 돋아 곧바로 그만뒀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수업 시간에 좀 잤어?”
“영어라 그냥 들었어.”
“피곤하겠네.”
종수는 이규에게 아까 승대와 나눈 이야기가 뭔지 상세하게 물으려 입을 열었지만, 이곳을 노려보는 승대를 보고는 마음을 접었다. 이건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신 이규의 말에 대충 답했다.
“뭐. 어쩔 수 없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둘을 보며 승대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오. 이 새끼들 또 지들끼리만 대화한다.”
사내놈들이 징그럽게 딱 달라붙어 속닥대는 게 짜증 나서 승대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마침 체육관 문이 열리고 수민이 들어섰다.
“다들 일찍 왔네. ⸜(*ˊᗜˋ*)⸝”
여느 때와 같이 묘한 말투였다. 하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승대가 괜히 버럭 성을 냈다.
“야. 노수민. 너 왜 이제 와!”
“응? 나 안 늦었는데?”
저벅저벅 걸어온 수민이 씩씩대는 승대와 몸을 풀고 있는 이규나 종수를 번갈아 보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이규. 승대 왜 이래?”
“모쏠이라서.”
“아.(o。o;)”
수민이 승대를 흘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승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는 무슨 아. 야? 너 미쳤냐?!”
“그럴 수 있지.”
씩씩대는 승대에게 수민이 재차 수긍했다.
“그래. 그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야.”
이규도 태연하게 위로하는 척을 했다. 오직 종수만이 아무런 반응 없이 계속 몸풀기를 이어갔는데, 승대는 이것조차 저를 무시하는 것만 같아 열이 받았다.
“아니. 누가 모쏠이랬어?!?!”
모쏠도 아닌데 왜 그렇게 반응해. 그러게. 수상하네. 참고로 유치원 때 사귄 건 안 쳐줌. 응. 아무래도 그렇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쳐준다. 그래. 그러자. 기간은 일주일 이상으로? 에이, 그래도 이주쯤은 돼야지. 좋아. 장난스레 쑥덕이는 이규와 수민에게 왁왁 소리를 지르던 승대가, 결국 체육관 안을 뛰기 시작했다. 으아악!! 하는 소리는 덤이었다. 그런 승대를 쳐다보며 이규와 수민이 웃었다. 그러고는 종수의 옆에서 나란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종수.”
“어?”
“등 눌러줄까?”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쏠은 싫나. 종수는 이규가 눌러주는 대로 허리를 숙이며 생각했다. 이규와 수민이 놀리고 있는 승대처럼, 종수도 누군가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너 또 머리 안 말릴 거지.”
“응.”
“이리 와.”
종수가 제 침대에 걸터앉은 이규를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그러고는 이규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등을 돌리고 앉았다. 머리 위로 바싹 마른 수건이 얹어졌다. 수건 너머로 부드러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종수가 몸을 기대 이규의 허벅지에 팔을 걸치고, 나른하게 그 손길을 즐겼다. 눈을 감은 종수가 이규를 불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기숙사 방 안에 퍼졌다.
“이규.”
“응. 종수.”
종수는 이규를 불러놓고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귀까지 꼼꼼하게 닦아준 이규가 한 번 더 종수에게 물었다.
“왜?”
“아니야.”
“실없긴.”
종수는 이규에게 오늘 고백한 애랑 사귈 건지, 아니면 거절하고 온 건지를 묻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 *
종수는 결국 이규가 받은 고백에 대해 생각하느라 늦게 잠이 들었다.
이규라면 거절했을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규가 여자친구랍시고 이름도 얼굴도 모를 여자를 자신에게 알려줄 생각을 하니 괜히 마음이 일렁였다.
심지어 이규는 전적도 있었다. 종수는 이규가 중학교 때쯤 짧게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소개받은 적이 있었다. 일부러 자리를 만들거나 한 건 아니었고, 이규와 함께 나오는 체육관 앞에 그 여자애가 있을 뿐이었지만, 아무튼 종수가 걔를 알게 된 건 맞았다.
그리고 그날 이규는 여친을 데려다준다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었다. 종수는 가만히 서서 이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는 결국 오랜만에 혼자 하교를 해야만 했다. 이규가 없는 귀갓길은 참 별로인 데다 길었던 기억이 났다.
아무튼 이규는 모쏠은 아니었다. 그러니 수민과 함께 승대에게 고백을 받아봤냐느니, 여친을 사귀어 본 적은 있냐느니 같은 말을 하며 놀릴 수 있는 거였다. 역시 이규는 모쏠이 별로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농구도 생초짜보다는 볼이라도 튕겨본 애들이 나은 법이었으니 당연한 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종수는 정말이지 연애에 관심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농구 외의 모든 것에 관심이나 애정이 생기지 않았다. 남들 다 하던 컴퓨터 게임도, 무슨 만화에서 나온다던 카드를 가지고 하는 놀이도, 다른 공놀이도 모두 다 심드렁했다. 그러니 좋아하지도 않는 애를 만나는데 농구할 시간을 뺄 수는 없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연애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걸 할 바에야 농구를 더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종수에게는 묘하게 믿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듣기로는 아빠도 엄마를 진짜 운명처럼 만났다고 했다. 농구하기에 바빠서 연애 같은 걸 하려 기웃거린 적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종수는 어릴 때부터 자신도 좋아하는 걸 하다 보면, 운명의 상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심지어 그런 상대가 나타나지 않는대도 괜찮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이규랑 계속 이렇게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을 얼마나 하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규의 조용한 숨소리가 꽤 오래 방 안을 채웠던 것으로 보아,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는 걸 짐작할 뿐이었다.
종수가 부족한 수면 탓에 뻑뻑한 눈을 연신 깜빡였다. 역시 지난밤에 생각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았다.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던 것 같던 종수가 눈을 비비자, 이규가 인공눈물을 건넸다. 종수가 말없이 그걸 받곤 캡을 땄다. 대충 바닥에 한두 방울을 버렸다.
“어제 잠 못 잤어?”
“응.”
종수의 눈 위로 투명한 액체가 똑, 똑, 번갈아 가며 떨어졌다. 한 통을 다 털어 넣은 종수가 빈 곽을 이규에게 건넸다. 이규는 이제는 쓰레기가 된 플라스틱 쪼가리를 대충 저지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유튜브는 안 보는 것 같았는데.”
“그냥. 잠이 안 와서.”
“왜.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인공눈물을 넣은 후 잠시 눈을 감고 있는 종수에게 이규가 물었다. 종수가 다시 어젯밤을 되짚었다. 어제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이규가 고백 같은 걸 받고는 저에게 아무런 말도 안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거기서 대체 뭐가 걱정됐던 걸까. 이규가 여자친구를 만들게 된다면 이전처럼 혼자 돌아가게 될까 봐? 그 연애가 너무 달콤해 더 이상 자신과 농구를 해주지 않을까 봐? 하더라도 농구에 소홀해질까 봐?
종수는 좀처럼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괜히 이규를 불렀다.
“이규.”
“응?”
이규가 순순히 답했다. 종수가 눈을 몇 번 더 깜빡였다. 확실히 인공눈물을 넣으니 눈알이 매끄럽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다시 마주한 이규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과 염려, 신뢰와 애정 같은 게 가득 이라 종수는 저도 모르게 본심을 툭 내뱉었다.
“요즘 왜 이렇게 따로 다녀?”
물론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왜 이렇게, 라고 할 것도 없었다. 문제의 사건은 어제 하루 한정이었다. 평소에는 담임에게 불려 가서 농구부 얘기를 좀 하고, 코치에게 불려 가서 전달 사항을 좀 듣고 하는 게 다였다.
“아……. 그럴 일이 좀 있네.”
하지만 이규가 이렇게 답을 얼버무리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랬다. 이규에 대해서 남은 알고, 자신은 모르는 게 있으면 안 됐다. 말이 날카롭게 나가는 것도 당연했다.
“나한테 말 못 할 일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
이규가 곤란하게 웃었다. 이규도 종수의 질문이 어제의 일 때문인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승대에게야 들켰으니 숨길 수 없었던 것이지만, 어디 가서 떠들어대고 싶지는 않은 내용이었다. 그런 건 고백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거기다 종수에게라면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애의 속을 이런 걸로 시끄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머쓱해서?”
“너가 나한테 머쓱할 게 뭐 있어?”
종수가 뚱하게 답했다. 이규가 말을 빙빙 돌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가?”
이규가 머리를 긁적이고는 아주 느리게 입을 뗐다. 종수가 저렇게까지 묻는다면 이규로서는 대답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어, 음. 모르는 여자애한테 고백……. 을 받았는데.”
거기까지 말한 이규가 종수의 눈치를 슬쩍 봤다. 종수가 눈썹을 까닥였다. 그 미묘한 움직임을 본 이규가 재빨리 덧붙였다.
“거절했어.”
그 말을 들은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눈가를 부비고,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부러 이규의 팔을 퍽 쳤다. 드디어 몸에 긴장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연애한다고 농구 소홀히 했다간, 아무리 너라도 안 봐줘.”
뜬금없는 종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이규가 이내 아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종수가 했듯 그의 팔을 톡 가볍게 쳤다.
“응. 당연하지, 종수.”
“그럼 됐어.”
종수는 그제야 편안한 마음으로 이규를 바라봤다. 이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우승해야지.”
“응. 해야지.”
종수가 몸을 일으켰다. 이규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탕, 탕. 농구공이 코트를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 * *
그 뒤로 종수는 참 잘 잤다. 실로 오랜만에 유지되는 숙면의 밤들이었다. 덕분에 요 며칠은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이대로라면 대통령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우승을 거머쥐어야 했다. 이규와 함께 기쁨을 만끽해야 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고양감이 몸을 휩쓸었다. 느낌이 좋았다.
이규는 오늘도 교무실에 잠시 들렀다 온다고 말했다. 확실한 목적지에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가 종수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떠났다. 종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최종수 맞지?”
휘적휘적 체육관으로 향하던 종수는 제 앞을 가로막은 여자애를 흘긋 내려다봤다. 여자애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종수에게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할래?”
종수는 그 애를 한번, 가야 할 길을 한번, 이규가 사라진 곳을 한번. 차례로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얘 눈이 제법 이규랑 닮은 것도 같았고…….
“안 돼?”
이규가 생각나는 눈으로 그렇게 말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엄마도 언제나 여자애들한테는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종수는 한 번쯤 이름 모를 여자애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 * *
여자애는 종수를 데리고 인적이 드문 학교 뒤뜰로 향했다. 그러고는 꽤 긴 시간 말이 없었다. 종수는 한참을 내려다봐야 하는 여자애를 뚱하게 응시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종수였다. 이 시간이라면 슛을 던져도 열 번이 뭐야, 스무 번은 더 던졌겠다 싶었다. 역시 괜한 변덕은 부리는 게 아니었다.
“나 간다.”
“자, 잠시만!”
“왜.”
여자애는 또 꽤 긴 시간 동안 우물쭈물하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말했다.
“그, 조, 좋아해.”
“뭐?”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종수가 되물었다. 여자애는 교복 셔츠 끝을 계속 만지작대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좋아해……. 나 고1 때부터 너 알았어.”
역시, 눈이 닮았다. 이규만큼 선명한 쌍꺼풀과 속눈썹이었다.
“나랑 사귀면 안 돼? 너 여친 없잖아.”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있던 종수는 다시 이규를 생각했다. 이규도 이 자리에서 고백받았던 걸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참 삭막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자신이라면 이런 데서 고백하지는 않을 거였다. 여자애는 답이 없는 종수의 모습에 초조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한번 만나보기나 하자는 말이야. 언제든 헤어져도 돼.”
그리고 또, 며칠 전 체육관에서의 일을 생각했다. 모쏠은 싫다던 이규와 모쏠인 자신. 애인을 만들 생각도 없었고, 또 연애에 썩 관심도 없었지만, 기회가 생긴 이상 한 번쯤 사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연애 같은 걸 한다고 농구에 지장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가.”
“진짜?”
“싫음 말고.”
“아니, 좋아!”
종수는 그제야 걔의 이름을 눈에 담았다. 연애를 하는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가슴팍에 붙은 명찰에는 이나윤이라는 세 글자가 자수로 수놓아져 있었다. 용건은 끝났으니 더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종수가 미련 없이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난 간다.”
“어디?”
“체육관.”
“아, 응!”
농구 힘내! 덧붙이는 말이 들렸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지금쯤이면 이규가 체육관에 도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종수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학교 뒤뜰에서 걸어 나오는 종수의 옆에는 어느샌가 승대가 따라붙어 함께 걷고 있었다.
“와, 최종수. 그렇게 안 봤는데.”
종수는 승대를 무시하고 걸었다.
“이규는 칼같이 거절하던데. 닌 받아주네?”
그러게. 거기서 왜 고개를 끄덕였을까. 종수도 돌아서면서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걔 눈이 이규를 닮아서였나? 그러고 보니 걔는 이규랑 성도 같았고 이름 끝 자의 모음도 같았다. 승대는 옆에서 계속 투덜댔다.
“이쁘긴 하대. 눈만 더럽게 높아가지곤.”
하지만 그걸 승대한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대신 종수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승대를 향해 이죽거리는 걸 택했다.
“모쏠 변태 새끼.”
“뭐?”
“그걸 왜 훔쳐봐?”
“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여기서 쉬고 있는데 니네가 온 거다.”
“그럼 자리를 피하든가.”
“……야!”
승대는 열이 받으면 금세 언성이 높아졌다. 귀가 따가운 느낌에 종수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덧붙였다.
“너는 여기서 쉴 시간에 자유투 연습이나 좀 더 해.”
“이게 진짜.”
아오! 소리를 지른 승대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종수가 턱을 까닥였다.
“다음 경기에서까지 하나도 못 넣으면, 넌 진짜 내 손에 뒤지는 거야.”
“하. 이 새끼 봐라.”
그 말에는 승대도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귓가에 백보드를 보라던 이규의 말도 둥둥 울렸다. 그놈의 백보드. 하여간 이것들은 쌍으로 인간을 못살게 굴었다.
“꼬우면 니가 나 꺾고 주장 하든가.”
하지만 승대는 싸가지가 증발한 종수를 상대하면서도, 문득 떠오른 이규에 관한 생각을 그냥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유들유들한 게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규는 제가 처음 장도고에 왔을 때 제법 살갑게 대해준 놈이었다. 괜찮은 자식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규가 고백을 거절하며 뱉은 ‘좋아하는 애가 있어서.’라는 말이 눈앞의 이 싸가지라는 사실을 지울 수 없었다. 연애 같은 것 때문에─그것도 팀 내 연애였다!─ 불화가 생기는걸, 그래서 팀 성적에 지장이 가는 걸 승대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 꼴을 보려 서울까지 온 건 아니었다. 승대가 쌩하니 앞서나가는 종수를 소리쳐 불렀다.
“야. 최종수!”
종수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보폭이 커서 금방 모퉁이 앞까지 도착해 사라지기 직전이기도 했다. 승대가 결국 뛰듯이 걸어 종수를 붙잡았다. 종수가 멈춰 서더니 승대를 다시 노려봤다.
“니 쟤랑 사귀는 거 진짜 잘 생각해라.”
종수는 그 말이 뭐라고 승대가 목소리를 낮추는 게 웃기기만 했다. 종수가 제 어깨에 놓인 승대의 팔을 털어내고 답했다.
“나는 너랑 달라서 연애 같은 거에 영향 안 받아.”
“하. 나도 니 새끼가 그럴 거라고 생각은 안 하는데.”
승대가 머뭇거리더니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렸다.
“이규 때문에 그런다.”
“이규가 왜.”
종수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승대는 진짜 어이가 증발하는 느낌이었다. 이규라는 이름 하나에 이렇게 날을 세울 거면서 그 고백을 받아준 종수의 정신머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아. 멍청한 새끼. 여기까지 말해줘도 못 알아 처먹네.”
종수가 대꾸 없이 승대를 조용히 노려보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승대 입에서 이규의 이름이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게 기분이 나빴다.
“질질 짜면서 이규한테 찾아가지나 마라, 새끼야.”
뒤따르는 승대의 말에도 종수의 발걸음은 더 빨라지기만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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