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믿음직스러운 친구인 내가 이세계에서 눈 떠보니 주인공의 남자친구인 동시에 순정에 미친 게이라는데요?!
호열백호
좆됐다.
그것이 호열이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좆됐다.
그래봐야 16살, 좆 되기는 이른 소년 양호열이 죽는 소리를 뱉으며 기상했다. 부슬부슬 엉킨 머리를 헤집으며 생각한다. 대체 뭔 좆같은 하루가 기다리고 있길래 목덜미가 서늘한 걸까? 단순한 불안을 넘어 오싹하기까지 하다. 호열은 애써 목덜미를 문지르며 기분을 떨쳐내려 했지만, 조금도 희석되지 않았고 애먼 목만 아팠다. 완전히 낭패였다.
이마를 긁적거린 호열이 이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가슴이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뒤에야 내쉰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 차분한 숨소리가 고요한 방을 채웠다. 마지막으로 숨을 들이마신 호열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좋아. 학교 가자.
하루를 버틸 의지를 다진 남자가 이불에서 벗어났다.
양호열은 감이 좋다. 그가 뒤에 선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찍은 문제의 절반을 맞춰 낙제를 면했다. 싸우고 싶지 않다 싶으면 상대가 미친 새끼였다. 그 외에도 예시는 많다. 지도 없이 걸었는데 맞는 길이라든가, 왠지 자판기에 손을 넣어 보고 싶으면 반환구에 동전이 있었다든가.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딱히 놀랍지 않은 이벤트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호열은 자연히 직감을 신뢰했다. 즉, 기상과 동시에 빽빽 울려대는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묘하게 몸이 개운하고, 짹짹 새소리가 들리고, 등이 싸늘하기에 지각인 줄 알았건만. 시계를 확인해보니, 기상 시각은 평소보다 5분 일렀다. 그렇다면 이 불길함은 어디서 기원하는 걸까? 호열이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차라리 지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분명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데,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더 불안했다. 괜히 주변을 살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이상한 점이 없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도, 피부에 스치는 교복의 감촉도, 내용물 없이 가벼운 책가방도.
뭐가 불안한 건지 몰라 더 불안하다. 이상한 점이 하나도 없어 더 이상하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었고, 동시에 지루할 만큼 익숙했다. 호열은 찝찝한 기분을 온몸으로 느끼며 집을 나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저절로 사라지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어깨에 단단히 붙어 크기를 키웠다. 마침내 등교 중이던 강백호를 마주쳤을 때는 절정에 달했다.
어! 호열아!
백호야.
언제나 그랬듯, 강백호가 밝은 얼굴로 달려 와 호열의 옆에 섰다. 평범한 잡담은 금세 집어치우더니, 아니나 다를까 농구 얘기를 꺼낸다. 어제 서태웅과의 원온원에서 처음으로 동점을 획득해 매우 신난 모양이었다. 그동안은 몸이 안 풀렸던 것뿐이야. 여우 자식, 운 좋은 시간은 이제 끝났다! 다음에야말로 이 천재가 그 재수 없는 얼굴을 짓밟아주겠어! 잔뜩 들뜬 발걸음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했다. 하하, 서태웅 긴장 좀 해야겠는데. 백호 넌 분명 해낼 테니까. 당연하지! 꼭 구경하러 오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자식을 확 그냥...!
아침의 불안감은 기우였던 걸까? 앞서 말했듯 호열은 감이 매우 좋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 농구 천재 강백호도 자유투에 실패하는 법이었다. 지금, 이때, 이 순간쯤이면 위화감의 정체가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상한 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다. 구름이 조금 낀 맑은 하늘도, 미세 먼지 없는 깨끗한 공기도, 꼭 넘어지라고 둔 듯한 길거리의 돌부리도.
봐, 백호도 똑같잖아. 바보 같이 환하게 웃는 얼굴도, 틈만 나면 농구 얘기로 열 올리는 것도. 서태웅을 이기겠다며 불타오르는 것도, 등굣길부터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것도. 그리고 내 손을 은근슬쩍 잡으며 수줍어 하는 것도... 어?
손? 을... 왜? 잡았지?
손등이 몇 번 스치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잡힌다. 호열이 휘둥그레 뜬 눈을 깜빡였다. 반대쪽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호열이 손과 백호를 번갈아 보았다. 손을 한 번 보고, 헛기침하며 손을 고쳐잡는 백호를 한 번 보고. 다시 손을 보고, 귀가 빨개진 백호를 보고. 손을 보고, 괜히 딴청 피우는 백호를 보고.
뭐야? 이 간질간질한 분위기?
온 몸에 소름이 돋은 호열이 백호의 손을 내쳤다.
배, 백호야, 뭐 하는 거야?!
어엉...?
갑자기 손은 왜 잡아? 더럽게!
호열은 자신이 당연한 반응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야 강백호와 양호열은 남자니까.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고 한들, 그게 손을 잡고 짝짜꿍하는 유난스러운 방향은 아니었다. 차라리 쟤가 맞을 거 내가 때우는 폭력적인 쪽이지. 양아치들과 싸울 때 서로의 등을 맞댔던 적이 몇 번이던가? 그에 비해 손을 잡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때까지도 호열은 백호가 어제 소연이가 나오는 꿈을 꿨든가 해서, 거기서 손을 한 번 잡아서, 잊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게 재현하려 든 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사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열에게 동성의 손이란, 잡은 적도 없고, 잡을 생각도 없으며, 앞으로도 잡을 일이 없는 전깃줄과 같은 존재였다. 아니, 사실 손도 손이지만. 묘하게 부끄러워하는 백호의 반응이 더 충격이었다.
말이 조금 격하게 나왔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호열은 손을 잡은 이유를 먼저 묻기로 했다. 현 상황에 대한 납득이 우선이다. 더럽다는 말 정도야 유난스럽게 심한 말도 아니고. 그가 해명을 요구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러나 막상 강백호의 얼굴을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었다. 호열과 마찬가지로 입을 벌린 강백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쳐진 제 손을 보고, 기겁하는 호열의 얼굴을 보고. 다시 손을 보고, 더럽다던 호열의 말을 떠올리고. 다시 손을 보고, 떡 벌어진 호열의 입을 보다가.
이내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터뜨렸다. 그간 50명의 여자들에게 차였을 때처럼, 서럽게.
당황한 호열이 그를 달래고자 이름을 불렀지만, 189cm 농구선수는 이미 무지막지한 속도로 학교에 들어가 버린 뒤였다. 그가 흘린 눈물이 뒤늦게 떨어져 햇빛에 반짝였다. 이게 그렇게 충격받을 만한 일인가? 그렇게 눈물 흘릴 만한 일이야?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호열이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뭐지? 무슨 상황이지? 친절하게 답을 알려주는 상태창 따위는 없었으므로, 호열은 자신에게 주어진 혼란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1990년 출간된 소년만화 조연에게, 2023년 슬램덩크 2차 창작 빙의란 이다지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주인공의 믿음직스러운 친구인 내가
이세계에서 눈 떠보니
순정에 미친 게이인 동시에
주인공의 남자친구라는데요?!
생각해보자. 당신은 불길한 기분 속에서 눈을 떴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고 섬뜩하다. 절친한 친구는 안 하던 행동을 하더니, 제 반응을 보고 충격 받으며 울어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나 아니면 쟤가 미쳤구나(일반인용 답변)
내가 차원 이동 혹은 빙의를 했구나(씹덕용 답변)
몰라미친백호야기다려봐!!!!!!(양호열용 답변)
당연하게도, 호열은 3번을 선택했다. 수년간 강백호의 가장 친한 친구 자리를 지킨 전문가로서 확신하건대, 저 상태의 백호를 오래 두면 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몰라도 수습부터 해야 했다. 호열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교실로 달려갔다. 가파른 계단을 단숨에 올라 뒷문을 열어젖혔다. 강백호는 책상에 엎드린 채 울고 있었다. 눈물이 고이다 못해 책상 테두리에 맺혀 뚝뚝 떨어졌다. 큰일이다. 오싹해진 호열이 온갖 변명을 늘어놓았다.
백호야, 내 얘기를 들어 봐. 네가 더럽다는 말이 아니었어. 그냥 네가 손을 잡을 줄 몰라서, 내 손에 땀이 차서, 아, 그래. 내가 더럽다고 한 거야! 너 말고 내가! 내가 백호 너에게 왜 그런 말을 하겠어! 평소답지 않은 다급한 말투와, 횡설수설한 문장의 조합. 심지어 신빙성이 전혀 없었다. 이런 변명에 대체 누가 속는단 말인가? 역시나 고개를 든 강백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호열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앗, 안 돼. 정말, 진심이야! 내가 너에게 거짓말을 왜 해? 난 네게 거짓말 한 적 없어!
물론 구라였다. 그러나 호열은 절박했다. 그는 스스로를 세뇌할 기세로 싹싹 빌었다. 딱히 신뢰가 가진 않지만, 진심으로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으며 내가 다 잘못했고 내가 죄인이다-라는 마음이 느껴졌는지 강백호가 호열의 입을 막았다. 그만해. 알겠으니까. ... 진심이지? 호열이 헤드뱅잉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까만 눈동자에 각각 '진', '심' 두 글자가 박혔다.
환장의 쌩쇼 끝에 강백호가 마음을 풀었다. 눈물을 그치고 조금 뚱한 얼굴로 가보라며 손을 휘휘 흔든다. 하루를 시작한 지 아직 1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1년은 늙어버린 호열이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서, 결국 손은 왜 잡은 거람.
백호의 기분이 풀렸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정작 호열의 의문은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늘어놓은 말이 있으니 이제 와서 백호에게 직접 묻기도 글렀다. 호열이 입술을 내밀어 푸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왁스로 매끈하게 넘긴 머리에서 삐져나온 몇 가닥이 파들파들 흔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평소처럼 농구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가 손을 잡을 타이밍인가? 심지어 부끄러워 할지언정 꽤 자연스럽게 잡았는데. 마치 자주 있었던 일처럼. 몸을 일으킨 호열이 책상 위에 팔을 올려놓고 턱을 괴었다. 끙 앓는 소리하며 고심했지만 답이 나오진 않았다.
조례 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다. 곧 담임 교사가 종이 뭉치를 쥐고 교실에 들어섰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아, 어떡해. 성적표 나왔나 봐. 의도치 않게 대화를 엿들은 호열이 의미 없이 반복했다. 성적표 나왔나 보다.
그러고 보니, 저번 주에 단축 수업을 했던 게 기억난다. 끝나자마자 파칭코로 달려갔었지. 웬일로 노구식이 돈을 제법 땄다. 그 돈으로 먹었던 나베 요리 맛있었는데. 그 메뉴 이름이 뭐더라. 호열이 이마를 긁적였다. 성적표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나마 관심을 둔 적이 있다면, 강백호가 몇 개나 낙제했을지 내기를 할 때뿐인데. 이번엔 돈도 걸지 않았으니 완전히 안중 밖이었다.
담임은 성적 순으로 이름을 부를 것이다. 아무리 감이 좋대도 열심히 공부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었다. 중후반쯤에야 이름이 불리겠지. 지루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호열이 입을 가렸다.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다.
그때 담임이 입을 열었다.
전교 1등, 양호열! 축하한다.
헙.
재채기... 삼켰다.
하지만 짜증이 날 새가 없었다. 귀를 의심하기 바빴다. 양호열? 나? 내가? 방금 전교 1등이라고 하지 않았어?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담임이 성적표를 받아 가라며 호열을 재촉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다 틀렸나? 뒤에서 전교 1등인 걸 꼽 주는 건가? 평소라면 당당하게 성적표를 받아 갔겠지만, 워낙 황당하다 보니 자세가 엉거주춤했다. 담임의 손에서 빼앗듯 넘겨받은 그의 성적표에는 의심할 수 없는 1이 적혀 있었다. 호열이 성적표 윗단에 기재된 제 이름을 다시 살폈다. 양 호 열. 그의 이름이었다. 내가 일등이라고?
분명 놀랄 만한 일이었으나, 그가 경악하기엔 아직 일렀다. 담임이 뒤이어 2등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전교 2등, 강백호!
뭐?
호열이 물음을 뱉었다. 사실 물음이라기보단, 당황스러워 나온 감탄사에 가까웠다. 소리를 들은 강백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호열이 너, 1등이라고 사람 무시하지 마. 기다려, 이 천재가 꼭 따라잡을 거니까! 존나 예상치 못한 선언. 깜짝 손잡기 이벤트에 이어, 2분 만에 다 찍고 잔 그가 전교 1등이 된 걸로도 모자라, 전교 2등 성적을 당연하게 받는 강백호라니. 거기에 뜬금없는 혐관 클리셰 발언은 덤이었다. 피할 길 없는 연속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백호는... 저런 말투가 아닌데. 저건 백호가 아니야. 아무리 생김새가 똑같아도, 백호는 저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단어 사이사이에서 묘한 지성이 느껴지는 애가 아니라고! 나 지금 지구에 있는 거 맞아?
그때, 호열의 머릿속에 어젯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괴담 특집 공영 방송이 번뜩 스쳤다. 눈에 검은 모자이크를 안경처럼 두른 남자가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말했다. 갑작스럽지만, 여러분은 평행 우주가 뭔지 아십니까? 매우 흡사하지만 서로 다른 세계를 말하는데요. 저는 평행우주를 죽을 듯이 좋아해서, 실제로 죽은 적도 있습니다. 평행 우주. 그 말을 떠올리자 뭔가 감이 잡혔다.
여기는...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니다. 여기는 평행 우주야. 나는 어쩌다 다른 세계에 온 거야. 여기에 살던 또 다른 나와 바꿔치기 된 거라고.
물론 호열은 다른 세계로 차원 이동한 것이 아니고, 이 세계가 평행 우주인 것도 아니며, 그저 대한민국 창작 플랫폼 포스타입에 존재하는 호열백호 연성에 빙의한 것뿐이지만, 33년 전 만화 인물치고 정답에 근접한 결론이었다.
-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릴 적 호열은 소방차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했고. 조금 커서는 체계를 납득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고. 이제 와서는 다 필요 없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만 이세계에 빙의했다. 마지막이 살짝 극단적이긴 하지만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온몸을 뒤덮은 불길함. 겉모습은 똑같지만, 말투나 행동이 미묘하게 다른 친구. 무엇보다도 납득할 수 없는 북산고의... 성적 기준.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뿐인 외로운 세계. 원한 적도 없는 곳에 뚝 떨어진 이방인은 상황을 거부하기 마련이다. 반항하고, 회피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그러나 호열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호열은 어디까지나 남고생이었다. 깊은 생각을 싫어하고, 공부를 기피하며, 납득하지 못한 것은 무시해버리는 남고생. 더하여 아직 모험심이 살아있는 16살의 어린애. 호열은 이 상황에 흥미를 느꼈다. 평화롭던 일상을 제멋대로 침범한 이 세계가 황당하고 재미있었다.
마침 원래 세계에서 백호의 재활이 막 끝났고, 훈련을 돕던 시간이 텅 비어 허전하던 참이었다. 좀비라든가, 괴물이 나오는 위험한 세계에 온 것도 아니고. 그냥 인간관계에 조금 변화가 생긴 정도면 즐겨볼 만 하지 않나? 어차피 할 것도 없었으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같고, 어디부터 어디까지 다른지 천천히 확인해보지 뭐.
원래 세계로 당장 돌아가야겠다거나,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어느 날 노력 없으니 왔으니, 어느 날 노력 없이 돌아가겠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단순하게 생각하는 쪽이 편했다. 호열은 평소처럼 살아가 보기로 했다. 학교에 가고. 백호 군단과 함께 점심을 먹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백호의 농구 연습을 구경하면서.
그러나 세상의 진리를 통달한 듯한 호열이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면, 인생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세상은, 어린 이방인의 일상을 차근차근 부수어놓았다.
예를 들어보자면.
구식아, 점심 안 먹냐?
... 아. 아. 음. 오늘은 배가 안 고파서. 미안하다. 백호랑 먼저 먹어.
대남아, 넌?
어~오늘은 졸려서 나도 패스.
... 용팔이, 넌?
이미 먹었는데.
언제...?
수업시간에. 백호랑 먹어.
... 너희들, 어제도 이러지 않았냐?
백호군단이 묘하게 자신을 피하며, 백호와 둘만 남게 유도한다든가.
백호야. 지금 나 따라오는 거냐?
어어. 너 데려다주려고.
나를? 어디에?
호열이 너, 지금 아르바이트 가려는 거 아니야?
맞아. 맞는데...
가자. 부 활동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어. 늦으면 고릴라가 엄청 뭐라고 할 거라고!
백호가 없는 시간을 쪼개어 자신을 데려다주려고 한다든가.
야야. 저기 봐, 저기.
대만군, 건드리지 마. 이 천재는 자유투 연습 중이라고.
후회할 텐데. 저기 니 남친 왔는데?
뭐?!
농구부에 연습을 구경하러 갔는데, 정대만이 자신을 보고 히죽 웃으며 저딴 말이나 한다든가... 심지어 말하는 투가 '야, 저기 니 남친 지나간다'가 아니었다. 조카의 연애를 놀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삼촌의 그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백호가 호열을 발견하고 팔을 흔들었다. 호열은 미소를 입에 걸고 손을 흔들었다. 겉모습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두꺼운 교복 속에선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첫날부터 설마설마 했는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서 굳이 그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는데! 정대만이 굳이 언급한 이상, 모른 척하기는 틀렸다. 하하버스에서 강제 하차당한 양호열이 백호가 고개를 돌린 사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 이 세계의 양호열이 강백호의 남자친구인 거지. 친구근데이제남자인... 이 아니라 내남친❤️(D+76) 쪽.
아, 이건 좆됐다.
호열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무리 인생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지만, 이렇게까지 비틀어갈 수 있나?
난 좆됐다... 그것이 호열이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론이었다.
-
귀가와 동시에 이불 위에 쓰러진 호열이 바들바들 떨었다. 내가 백호의 남자친구라니. 내가 백호를 좋아하고 백호가 나를 좋아한다니. 내가 백호와 연애 중이라니!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상황인데, 당장 눈앞에 닥쳤다는 점이 존나 어이없었다. 아니, 아니, 그러니까, 알아.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알아. 그걸 호모라고 부른다는 것도 아는데.
보통 그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나?
보통 숨기지 않나?
보통 주변에서 반대하지 않아?
왜 다들 나와 백호가 사귀는 걸 알고 있는 건데? 왜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건데? 왜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환영하고 챙겨주지 못해 안달인 건데!
이래서 알람 마냥 눈 뜨자마자 존나 쎄했구나. 얼떨결에 모두가 환대하는 게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호열이 끙끙 앓았다. 50억 인구 중 왜 하필 호열이 이 세계에 왔는지는 몰라도, 이곳이 그에게 다정하지 않다는 것만큼은 잘 알겠다. 여기서 나와 백호가 어떤 사이였든, 난 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라고! 갑자기 적응할 수가 없단 말이야!
난리법석을 중단한 호열이 아침의 일을 상기했다. 그래서 백호가 당황하고 상처 받았구나. 순식간에 눈물이 고이던 백호의 얼굴이 생생하다. 사귀는 사이라면 손을 잡는 게 당연한데, 거부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더럽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울 만도 하다. 백호는 한 번 좋아하면 전력을 다하는 녀석인데. 상처 받았겠지. 호열이 미간을 찌푸리고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니 보통은 모르지만.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 그래도 더럽다고 말할 건 없었는데. 자꾸 아침이 떠올라 마음이 철렁했다. 아무래도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상황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 호열이 종이와 펜을 꺼냈다.
호열은 자신이 차원 이동자라든가, 빙의자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떠벌릴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세계에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신병원에 갇히는 건 사양이니까. 누군가의 연구 대상이 될 마음도 딱히. 말한다손 쳐도, 구구절절 사연 풀이도 번거롭다. 그렇다면 호열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 이쪽의 '양호열'을 흉내내기. 즉... 백호의 남자친구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거. 호열이 손가락을 입가에 문질렀다. 펴본 적도 없는 담배가 존나 말렸다.
잠시 머리를 쥐어뜯고 멘붕하는 시간을 가진 호열이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굳이 반항해서 힘 빼고 싶지 않았다. 뭐, 말실수 좀 조심하고. 백호와 둘이 남는 것만 피하면 되겠지. 자잘한 정보는 백호 군단에게 물어보고 말이야. 그런데 만약 헤어지게 되면 어쩌지? 갑작스럽게 고개를 든 의문에 호열이 입맛을 쩝 다셨다.
그럼 뭐. 친구로 돌아가는 거지.
어차피 남자끼리의 연애는 한 때뿐일 테고, 아니래도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이 세계가 호열에게 다정하지 않다면, 호열 또한 이 세계에 다정하게 굴 이유가 없으니까.
파악해야 할 정보를 정리했다. 연인 사이에 몰라서는 안 되는 것. 뭐가 있지? 언제 고백을 했다든가, 어떻게 했다든가. 얼마나 간지러운 사이라든가... 그리고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같은 것(근데 남자끼리 진도를 나갈 수 있나?). 아, 소연이랑은 어떻게 됐는지도. 펜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여기에 몇 항목을 더 쓰자 반듯한 글씨가 용지의 절반을 채웠다. 이 정도면 충분해 보였다.
펜을 놓은 호열이 발랑 누웠다. 손을 베개 삼아 낮잠을 청했다. 하루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 피곤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자자. 눈이 가물가물 감긴다. 슬슬 잠이 왔다... 가 갔다. 번쩍 일어난 호열이 펜을 들었다. 딱히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상황을 타자화했을 때, 가장 먼저 묻게 되는 것. 인간이라면 마땅히 궁금해지는 것을 빼먹었다.
그래서... 나랑 백호 중에 누가 먼저 고백했는데?
-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며칠 뒤 점심시간, 호열이 옥상을 권하자 백호군단이 차례로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할 궁리를 했다. 이젠 댈 핑계도 없는지 헛소리를 지껄인다. 오늘 날씨가 좋아서. 목 디스크 걸려서. 어제 미리 먹어서. 이 지랄. 호열이 그대로 도망치려는 셋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냥 같이 먹어. 오늘 백호도 없다고. 왜? 윈터컵 준비로 치수 선배가 불렀대. 아항. 백호군단은 쉽게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주변을 샅샅이 살피며 백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란히 옥상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냥 계속 점심 같이 먹지 그래? 난 너희가 있어도 상관 없는데, 너무 유난이잖아.
호열이 은근슬쩍 말했다. 가끔 분위기 보고 빠지면 몰라, 커플 사이에 끼기 싫어서 빠져준다는 티를 팍팍 내며 눈을 피하는 것이 거북하던 참이었다. 겸사겸사 백호와 둘만 남는 상황도 줄이고.
그러나 백호군단의 반응은 의외로 격했다. 이용팔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빵 봉지를 팡! 터뜨리며 말했다. 뭐라는 거야? 호열이 네가 맨날 눈치 줘서 빠져주는 거잖아! 우리도 마음 편하게 옥상에서 밥 먹고 싶다고! 호열이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 나? 내가 문제야?
그래! 우리라고 빠져주고 싶겠냐? 나도 제때 점심 좀 먹어보자.
맞아, 맞아!
오랫동안 불만이 쌓인 모양인지 다들 성낸다. 내가 눈치를 줬다고? 내가 언제? 난 그런 적 없어! 전엔 어쨌는지 몰라도, 요샌 정말 같이 먹자고 권한 거라고! 기가 막혀서 표정이 무너질 뻔했지만, 호열은 간신히 참아냈다. 하나도 아니고 셋이 전부 저렇게 나오면, 이쪽의 '양호열'이 유난을 떤 게 분명했다. 침착하자. '양호열'을 따라 하기로 다짐했잖아. 난 백호와 사귀는 양호열이야. 난 백호를 좋아하는(미친) 양호열이야. 난 개유난 떠는 양호열이야... 지금 반박해봤자 하등 소용이 없다. 그보단 제가 원하는 대답을 유도하는 게 더 중요했다.
아아, 됐고. 너희, 나랑 백호에게 관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좀 부담스럽다고. 이러다 기념일도 너희가 먼저 챙기겠어.
투투 챙길 생각하지 마. 난 22엔도 없어.
너희에게 66엔 모아서 내가 뭘 하겠어? 나도 됐다. 그냥 알바를 하고 말지.
사귄 지 한 달도 안 됐구나. 아까 녀석들의 말을 떠올려 보면 나와 백호가 사귄 뒤로 계속 자리를 피해준 모양이고, 이용팔의 성격상 제때 끼니를 못 챙기는 것이 3주만 넘어가도 폭발했을 테니 대강 2주쯤 되었을까? 호열이 이어지는 대화에 대충 맞장구치며 고민했다. 다음은 뭘 물어봐야 하나.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질문을 하나하나 떠먹여 가며 답변을 구걸할 필요는 없었다. 용팔이 그가 가장 궁금했던 주제로 대화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구식이는 솔직히 22엔 줄 수 있지. 너 호열이가 먼저 고백한 덕분에 천 엔 벌었잖아?
이용팔, 이 자식. 내기는 비밀로 하자더니.
우릴 두고 내기를 했단 말이야? 너희 친구 맞냐? 불과 몇 달 전, 강백호의 실연을 두고 내기를 했던 호열이 시비 걸었다. 그러나 내심 놀란 마음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먼저 고백한 사람이, 나였다고?
백호가 먼저 고백했대도 놀랐겠지만. 호열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이세계에 온 뒤 처음으로 백호와 라멘을 먹으러 갔었다. 언제나 그랬듯 계산할 돈을 지갑에서 꺼내는 도중, 백호가 번개처럼 계산대로 달려갔다. 호열이 돈을 내밀었을 때는 이미 계산 완료. 원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일도 아니었는데. 고마워, 백호야. 잘 먹었다. 그런데 웬일이야? 호열이 웃으며 묻자 백호가 대답했다.
... 잘 보이고 싶으니까!
뭐어?
잘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 사귀는 사이에...
호열이 눈을 깜빡거렸다. 백호의 귀가 붉었다.
아, 어, 음. 그래. 고마워. 태연하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삐걱거렸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손바닥에서 무언가 찌릿찌릿한 것이 손끝으로 퍼져 나가는 느낌. 기분이 이상해서 자꾸만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하지만 찌릿한 감각은 손에서 멈추지 않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때를 회상하니 또다시 어쩔 줄 모르겠어서, 호열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쨌든, 자신을 그렇게 대했으니 당연히 백호일 줄 알았는데. 의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누가 먼저 고백을 할지 내기할 정도로 백호군단이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것.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나 성격 차이가 큰 것 같진 않았는데. 이쪽의 내가 그렇게나 마음을 티 냈다고?
믿기지 않았다. 호열이 당장 대답하라고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참고 물었다. 그, 언제... 내가 백호를 좋아하는 걸 눈치챈 거야? 백호군단이 뭐 그런 걸 묻냐는 듯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청산유수로 흘러나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황당했다.
우리가 그렇게 바보는 아니야. 호열이 너, 틈만 나면 백호 얘기만 하잖아?
그거야 백호가 가장 재밌으니까.
백호가 일주일 동안 특훈할 때 이만 번이나 공을 던져줬고.
아니, 누군가는 공을 던져야 했으니까. 너희가 하기 싫다고 다른 임무를 선수 쳤잖아?
농구부 최후의 날에 대만군 죄도 덮어쓰고. 그거 백호가 농구부에 있어서 그런 거 맞지? 덕분에 우리도 같이 근신했잖아. 뭐, 학교 안 가서 좋았지만.
그건 친구를 위하는 마음에 그런 거였고. 그것보다 농구부 최후의 날은 뭐야? 누가 그날에 그런 이름을 붙인 거야?
원정 경기 응원하겠다고 아르바이트까지 하다니... 이건 눈치챌 수밖에 없지.
그건 너희도 같이 했잖아!
고작 그런 걸로 내가 백호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고? 얼이 빠진 호열을 두고 백호 군단이 응, 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조금씩 다르면서, 이런 데선 똑같은 과거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황당했다. 이 정도야 우정의 표시로 할 수 있는 행동 아닌가? 진정 친구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것 같지 않아? 그렇게 따지면 사랑이 아닌 행동은 대체 뭐야? 그럼 뭐, 나는 원래 세계에서 백호를 좋아했던 거야?
이마가 지끈거렸다. 호의로 했던 행동이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탓에 오늘은 이쯤에서 관두고 싶었지만, 동시에 기왕 이렇게 된 거 체크 리스트를 전부 완료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든 말을 돌려서 소연이 얘기를 꺼내느냐, 마느냐. 호열이 고민하는 사이, 김대남이 뜬금없는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호열이 너, 이제 싸움 그만해.
갑자기?
호열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말을 돌리는 것이 과하게 어색했을 뿐더러, 너무나도 새삼스러웠기 때문이다. 백호'군단'이 왜 군단인가? 허구한 날 시비 거는 놈들을 패고 다니니 생긴 별명 아니었나. 주먹다짐하며 돌아다닌 시간이 얼만데. 게다가 여자에게 차인 송태섭을 놀리다 이빨 요정 만날 뻔한 김대남이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진지했다.
몰라서 묻냐? 너, 전에 백호를 찾아온 타학교 일진 72명과 싸워놓고 피 흘리는 와중에 공중전화 박스까지 가서 백호에게 전화 걸고 기절했잖아. 네가 백호에게 말하지 말래서 안 하긴 했는데, 이건 정도가 심하다고.
호열이 멍하게 김대남을 바라봤다. 이젠 충격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물어보기만을 기다린 사람마냥 부자연스럽고 자세한 설명에 현기증이 났다. 백호가 싸움을 그만둔 지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백호를 쓰러뜨리려는 놈의 숫자는 왜 이리 많은 것이며, 이쪽의 양호열은 왜 그 와중에 공중전화 박스까지 간단 말인가? 그냥 병원에 가면 안 되는 건가? 그 녀석 누구야... 무서워...
여기에 노구식까지 끼어들었다.
맞아. 이레즈미도 그만하고. 그러다 등을 다 갈아엎겠어.
내가 이레즈미를 했다고? 왜?
나야 모르지? 우린 네가 조폭이라도 되려고 하나 싶었다니까. 맨날 '졸업하면 백호와는 어울릴 수 없겠지. 그 애는 밝게 살아가는 게 보기 좋으니까' 같은 소리나 하고. 백호 앞에서 그 얘기 하면 이마 박살 날걸.
이젠 굳이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씻으면서 대체 왜 몰랐는지는 몰라도,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있나 보지. 뭐 용이랑 호랑이랑 붕어랑 다 박아놨겠지. 산과 바다가 뒤섞인 놀라운 자연현상이 등짝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이쪽의 나는... 대체 뭘 하는 사람인 걸까? 호열은 좀 기절하고 싶어졌다. 아직도 체크리스트가 많이 남았는데. 이걸 다 채우려면 나는 또 얼마나 기절하고 싶어져야 하는 거지?
이렇게 된 거, 그냥 끝장을 본다. 자연스럽게 답을 유도하려 했건만 다 망했다. 수상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다 듣고 한 번에 깔끔하게 기절하는 걸로 하자. 호열이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물었다.
그것보다, 너희, 소연이랑 백호 어떻게 됐는지는 알아?
소연이가 왜?
음. 정말 끝장을 보게 생겼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호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우와. 어떻게 타이밍이 이렇지. 진짜. 정말. 진심으로 기절해버리고 싶네.
심호흡을 끝낸 호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예상한 대로, 강백호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백호 군단이 슬금슬금 출입구로 향했다. 아, 양치하러 가야지. 난 낮잠 자러 가야지. 저녁 먹으러 가야겠다. 방금 점심 먹어놓고 뭐라는 거야? 하지만 억지 변명을 꼬집을 시간도 없었다. 강백호가 성큼성큼 호열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연이가 왜? 나한테 직접 물어.
백호야, 그게 아니라... 그런데 어디부터 들었어?
소연이 얘기할 때.
그래도 '양호열'이 패싸움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구나. 다행이다. 내가 한 것도 아닌데 혼날 뻔했다. 호열이 내심 안도하는 사이, 백호가 인상을 찌푸리고 소리쳤다. 내 말에 대답이나 해!
호열은 묵묵부답이었다. 아, 타이밍 진짜 나쁘네. 나름 이쪽 나의 체면을 살려주려고 일부러 백호에게 묻지 않은 건데. 전에 좋아했던 사람이랑은 어떻게 됐냐고 꼬치꼬치 묻는 애인이 최악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빠져나간담. 호열이 고민하는 사이, 얼굴이 더 무시무시해진 백호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뿐인데 호열은 미래를 알 것 같았다. 이대로 박치기 당하겠군. 그거 개아픈데. 호열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은 오지 않았다. 시간차 공격인가? 호열이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단번에 머리를 깨버릴 줄 알았던 백호는 제 어깨를 단단히 잡고 한껏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열아. 너... 나한테 섭섭한 거 있냐...
응?
너 요새 나랑 같이 있는 걸 피하는 것 같고... 어색해하고... 나한테 물어도 될 걸 저 녀석들에게 묻고.
섭섭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 호열이 한숨을 삼켰다. 티 안 내려고 했는데, 이미 들켰구나. 아무래도 백호와 연인 사이라는 걸 너무 의식해버린 모양이었다. 제 딴엔 정말 차근차근 거리를 넓히려 한 것인데, 백호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애를 예리하게 살핀다는 걸 깜빡했다.
호열이 머리를 굴리며 변명을 짜내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할 틈도 없이 백호가 말을 이었다.
너 혹시. 너... 내가, 내, 내가. 내가... 싫어진 거냐...
입을 벌린 호열이 무엇이라고 말을 뱉으려다 다시 다물었다. 그가 드물게 진심으로 동요했다. 그가 백호를 응시한다. 제 어깨를 잡은, 떨리는 손.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 턱 막힌 듯 두꺼워진 목소리. 침울하게 축 처진 눈썹. 그걸 눈에 담자 맥이 탁 풀렸다. 아. 막연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너.
백호야. 너.
너, 정말.
정말로, 양호열을 좋아하는구나.
내보이는 애정이 너무 노골적이다.
몇 번이고 말을 꺼내려고 해보았지만, 입만 뻐끔거릴 뿐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양호열은 강백호를 달래는 방법을 잘 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지만, 어떻게 관계가 매번 좋을 수 있을까? 둘은 다투기도 많이 다퉜고, 서로를 구슬리는 법도 잘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백호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 감이 왔다. 이런 말을 해주면. 저런 행동을 하면.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강백호가 그의 친구일 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지금, 강백호는 애인으로서 서운해하고 있었다. 호열은 진심으로 이렇게까지 당황스러웠던 적이 생에 있었나 싶었다. 무엇을 어떻게, 어떤 말투로 말해야 할지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말을 잃은 호열이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꼭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호열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백호의 입꼬리가 점점 처졌다. 머뭇거리며 싫어졌냐고 묻던 얼굴은 완전히 울상으로 변했다. 호열은 이 얼굴이 익숙했다. 채소연에게 서태웅과 사귀냐고 물었을 때. 답을 기다리며 겁 먹던 얼굴.
그러자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다급해졌다. 호열이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뱉었다.
그런 거 아니야, 백호야.
......
그냥 네가 소연이가 좋아했을 때가 생각이 나서 그랬어. 넌 지금 나랑 사귀고 있긴 하지만, 네가 소연이를 좋아했을 때가 생각났는데 이제 와서 네게 묻긴 좀 그래서...
후눗...!! 혹시 질투야?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백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얼굴에서 들뜸과 설렘이 엿보였다. 그간 호열이 옆모습으로만 보았던 표정이 정확히 그를 향한다. 바뀐 것이라곤 방향뿐인데 완전히 낯선 얼굴이었다.
그동안 이런 얼굴을... 했구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 응. 맞아. 그거야. 내가 잠깐 질투를 해서 그래.
나 차인 뒤로 너 뿐이야! 정말이야!
차였구나.
백호는 좋아하게 된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한 번 차이면 엉엉 울고 깨끗이 잊는다. 이쪽의 백호는 이미 소연이에게 고백하고 차인 모양이었다.
사실 지금의 호열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그냥, 이쪽의 양호열을 흉내 내보려고 알아낸 정보일 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벅찼다. 아까 백호가 공포 영화 속 귀신처럼 등장해서 체했나? 호열이 제 가슴을 퍽퍽 쳤다.
-
그날의 점심시간 이후, 호열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그 섭섭해하던 얼굴을 보고 나니, 도저히 백호를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원래 있던 세계와 비견될 정도로 붙어 다니는 시간이 늘었다. 그 와중에 나름 체면을 지킨답시고 백호 군단에 연락을 돌려봤지만, 놈들이 속셈을 눈치채고 다 튀어버리는 바람에 결국엔 또 둘이었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호열은 전만큼 자리를 어색해하지 않았다. 막상 백호와 둘만 남아도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던 탓이다. 가끔 간지러운 눈빛을 보내거나, 손을 잡고 싶다는 티를 내거나, 자신을 여자애 대하듯 배려할 뿐, 그 이외에는 호열이 익숙한 세계와 다름이 없었다.
호열은 백호가 농구공을 던져달라면 새벽에 일어나 등교했고, 파칭코에 가자면 모아둔 알바비를 가져왔다. 영화를 보러 가자면 영화표를 끊었고, 점심이 부족하다면 함께 담을 넘었다. 연습 동작을 녹화해달라면 군말 없이 카메라를 들었고, 슛이 들어가면 함께 기뻐했다.
호열아, 던져 줘!
둘은 오늘도 체육관에서 땀내 나는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역시 사귀는 사이라도 특별한 걸 하진 않는구나. 하긴, 남자끼리니까. 여자와 사귈 때처럼 행동하긴 힘들겠지. 호열이 백호를 향해 공을 던졌다. 백호의 손을 떠난 공이 백보드를 맞고 림을 통과했다. 오, 대단한데? 호열이 순수하게 감탄하자 백호가 활짝 웃었다. 뭐 이런 걸 갖고. 당연한 일이지. 난 천재니까!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우스울 정도로 들떠 보인다. 호열의 입에도 스멀스멀 웃음이 퍼졌다.
호열아, 오늘 우리 집 올래?
연습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백호가 물었다. 집에? 응. 점프 잡지랑, DVD 빌려서 보자. 내일 주말이니까 늦게까지 놀자! 호열이 백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신나게 놀 생각에 들떴을 뿐, 딱히 엉큼한 생각은 없어 보였다. ... 내가 뭐라는 거야. 당연히 없겠지. 호열이 속으로 한숨 쉬었다. 데이트도 오락실이나 체육관, 파칭코가 전부인 애인데.
상념을 털어낸 호열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체육관을 정리하고 백호의 집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평화에 속아 방심한 남자는 반드시 뒤통수를 맞는 법이다.
-
편의점에 들러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한 둘은, 막 문을 닫으려는 DVD 대여점에 들어가 영화 몇 개를 골랐다. 유쾌하고 속도감 있는 홍콩 액션 영화였다. 백호는 매트리스 위에서, 호열은 바닥에 대충 앉아 DVD를 재생했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포인트에서 웃음이 터졌지만, 눈치가 보이진 않았다. 동시에 같이 웃을 걸 알고 있었으니까.
영화가 끝나고, 호열과 백호는 각각 편의점에서 고른 점프 잡지를 펼쳤다. 호열이 제법 좋아했던 만화가 연재를 중지하고, 신인 작가의 만화가 그 자리를 채웠다. 아쉬운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어찌하겠는가. 당장 연재 재개하라고 따질 수도 없고. 게다가 새로운 만화도 나름 취향에 맞았다. 가볍게 페이지를 넘기던 호열은 어느새 완전히 몰입해 잡지에 코를 박았다. 아, 이건 백호도 좋아하겠다. 보여줘야겠는데. 호열이 백호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미 자신을 보고 있던 백호와 눈이 마주쳤다. 심지어 거리가 퍽 가까웠다. 사이에 농구공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분명 백호는 침대 저 끝에 있었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호열이 눈을 깜빡였다. 백, 백호야? 왜...? 좁은 거리감이 당황스러운 탓에, 호열은 자신이 백호를 불렀다는 사실조차 잊고 물었다.
하지만 강백호는 답을 주지 않고, 서서히 거리를 좁힐 뿐이었다. 심지어 백호의 사납고 남자다운 눈이 점점 감기고 있었다...
텁.
호열이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덕분에 백호의 입술이 닿은 곳은 호열의 것이 아닌 손등이었다. 눈을 깜빡깜빡.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멈춰 있던 백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만스러운 눈초리가 호열을 향했다. 그의 168cm (키만)아기 남친은 새빨개진 얼굴로 아직도 입을 막고 있었다.
백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댔다.
호열이 너어... 평소엔 못 해서 안달이면서, 왜 내가 하니까...
백호가 또 삐질 낌새를 보였다. 호열은 입에서 손도 못 떼는 주제에 달랠 생각부터 했다. 이런 변명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잠시라도 공백이 생기면 분위기가 싸해진다. 슬며시 손을 내린 호열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고개를 들 수 없어 바닥을 향해 처박은 채로. 그게 아니라, 사실, 저기,
아, 아까 양치를 안 해서...
......
나도 너에게 잘 보이고 싶은 부분이 있단 말이야...
호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말이야...' 부분은 거의 숨소리처럼 들렸다. 다급하게 내뱉은 것치곤 제법 남친스러운 발언. 어느새 공손하게 무릎 꿇은 호열이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쪽팔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한 말이 맞나? 내가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백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최대한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한편, 그 말을 들은 강백호의 얼굴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어버버 입을 열었다.
그, 그, 어, 그, 그게, 그런. 아. 어. 그래애...
......
... 근데 난 네가 어째도 좋은데...
호열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이지, 강백호의 연인 역할은 그에게 버거웠다. 이런 징그러운 분위기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아, 진짜 나랑 안 맞는다.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진짜 안 맞아서 잠들기 직전까지 심장이 벌렁거렸다. 너무 안 맞아서, 손으로 막지 않았다면 벌어졌을 다음 일까지 생각했다. 입술이 말랑했을까? 입을 벌렸을까? 혀를 섞었을까? 뺨을 감쌌을까? 호열이 이불을 걷어찼다. 초겨울이 시작된 지 언제인데 방이 후끈후끈했다.
호열이 다짐했다. 절대로. 절대로 비슷한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지. 백호 집 근처에도 안 가야지. 백호와 아름다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해야지.
그러나, 앞서 몇 번이나 언급했다시피. 이곳은 호열에게 다정하지 않은 세계였다. '비슷한 상황'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키 차이로 스칠 리 없는 손등이 자꾸만 스친다든가. 강백호의 눈에 들어간 먼지를 떼기 위해 허리를 숙여 키를 맞추면 누군가 뒤에서 밀어 입술이 닿을 뻔한다든가. 함께 지하철을 타면 반드시 만원 전철이 되어 둘 사이가 빈틈없이 붙는다든가. 의자에서 일어나다 휘청거려서 아무거나 붙잡았는데 그게 강백호의 허벅지라든가(하필 강백호가 왜 거기에 서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 아프다....
.......
계단에서 내려오던 백호가 넘어지는데 휘말려서, 호열이 강백호의 위에 엎어졌다든가... 평생 무교이던 호열이 신을 찾았다. 하필 손이 정확하게 강백호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떠한 의지가 느껴지는 이 억지 전개 뭐지? 존나 어쩌라는 거지? 미치겠다 별들아... 호열이 속으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우선 가슴에서 손을 떼고 일어난 호열이 변명했다.
백호야. 그게 내가 막 일부러 막 만지려고 그런 게 아니라...
호열아!!! 너 괜찮아?
... 어? 어어?
나 때문에 넘어졌잖아!
강백호가 호들갑을 떨며 호열을 이리저리 살폈다. 고개를 돌려봤다가, 등을 돌려봤다가, 정신 없이 움직인다. 호열은 가만히 강백호를 관찰했다. 그의 얼굴에 부끄러움이나 성적 긴장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호열이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는 것조차 모르는 듯했다. 호열이 생각했다. 이쪽으로 진도를 나가진 않았구나. 다행이다...
왜 말이 없어!? 보건실로 갈까? 업어줘????????
아니, 아냐. 나 괜찮아, 백호야.
호열은 보건실에 가서 약을 받아오겠다는 백호를 겨우 진정시켰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번엔 넘어지지 않도록 손잡이를 꼭 붙잡게 했다.
이후, 호열은 아무도 넘어지지 않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기 위해 청소 당번을 자원했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첫날부터 신경 쓰였던 돌부리를 전부 옆으로 밀어냈다. 인생은 마음대로 안 되는 수준이 아니구나. 존나... 파란만장하고 스펙타클한 거구나. 교훈의 축복이 끝이 없었다.
-
저 이만 가볼게요. 호열이 앞치마를 벗어 정리했다. 사장이 가보라는 뜻으로 고개만 까딱였다. 아예 무시했어도 별 생각 없었겠지만, 가게가 바쁜 걸 알아 더욱 섭섭할 겨를이 없었다. 호열이 짐을 챙겨 가게를 나섰다.
평소대로라면 두 시간 전, 날이 어둑해질 때쯤 퇴근했어야 했다. 하지만 뒷타임 직원이 말도 없이 펑크를 냈다. 하필 맞은 편 이자카야의 정기 휴일이라 유난히 바쁜 날에. 그러거나 말거나 알 바 아니었던 호열은 정시가 되자마자 앞치마를 벗으려 했고, 다급해진 사장이 호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두 시간만 더 해주라. 시급 줄게. 제가 두 시간 더 하면 두 시간 어치 시급 주는 건 당연한 건데요? 수고하세요. 두 시간은 시급 두 배로 줄게. 진짜로. 정말요? 응. 그럼 뭐. 어쩔 수 없이.
호열이 굳은 목을 풀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거 조금 더 일했다고 이렇게 피곤한 걸 보면, 확실히 시급 두 배는 받아야겠네. 식당가를 벗어나려던 호열은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덩치 큰 남자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가로등의 간격이 멀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호열은 그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백호야?
호열아!
그를 등지고 돌멩이를 차고 있던 백호가 호열을 향해 단숨에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일 때 약간 험상궂은 백호의 표정이 사르르 풀어졌다. 호열이 피곤한 것도 잊고 백호를 따라 웃었다. 어쩐 일이야? 지금 시간에.
지금까지 연습하고 밥 먹으러 온 거야? 아깝네. 나 방금 퇴근했거든. 너 올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버티다가 차슈 몇 장 더 얹어줄 텐데. 아니다, 잠깐 기다려 볼래? 내가...
오늘 연습 없었는데.
응?
밥 먹으러 온 게 아니라, 호열이 너 기다린 거야. 너도... 자주 나 기다려줬잖아.
백호가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꽈악 조여들었다. 소란한 마음을 숨기려 호열이 말을 돌렸다. 설마 계속 기다린 거야? 나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더 일했는데. 알았으면 튈 걸. 벌써 두 시간이나 됐어?! 몰랐어! 하하, 무슨 생각을 하길래 시간 가는 것도 몰랐어. 나 기다렸대놓고 내가 나오는 줄도 모르고. 둘은 나란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진짜 백호, 그러니까 내 세계의 백호도 이런 식으로 연애를 할까? 호열은 채소연을 졸졸 쫓아다니던 강백호를 떠올렸다. 지금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땐 지켜줄 거고, 밝은 낮에 걸을 땐 웃게 해주겠지. 다정하게 대해줄 거다. 늘 손을 잡고 다닐 거고, 소연이가 지갑을 꺼낼 틈도 없게 챙겨줄 거다. 좋은 남자친구가 되겠어. 소연이도 좀, 백호를 봐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원래 세계에서도 자주 하던 생각이었다. 그때와 다를 것도 없는데, 왠지 마음이 철렁했다. 그가 밟은 땅 아래, 무언가가 발목을 잡고 끌어내리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강백호는 굳이굳이 호열을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럴 때면 백호가 원래 소연이를 좋아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꼭 여자애 대하듯 자신을 대하니까. 난 남잔데 말이지. 쩝 입맛을 다신 호열이 물었다.
그래, 그래서 어때? 기다려 본 소감이.
음...
백호가 골똘하게 고민했다. 답을 지어내려고 한다기보단, 여러 생각 중 어떤 것을 말할지 고민하는 느낌이었다.
시간을 들여 나온 대답은 호열의 예상 밖이었다.
네가, 날 자주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그래? 정말 생각지도 못한 답인데. 왜?
호열이 이유를 물으며 웃었다. 어쩐지 즐거웠다. 이 상황도, 이 분위기도, 곧 나올 백호의 대답도. 괜히 기분이 좋아 실실 웃게 됐다. 백호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널 기다리는 동안, 계속 네 생각을 했거든. 네가 언제 나올까. 날 보면 뭐라고 말할까. 어떤 표정을 할까.
......
호열이 너도... 날 기다리면서 내 생각을 했을 거 아니야?
......
그렇게 생각하면, 좋아. 그치만 계속 네 생각을 하는 것도 좋아. 이런 즐거움을 너만 느끼다니. 오늘부턴 내가 더 많이 기다릴 거야.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입이 말랐다. 떨리는 숨소리를 감추고 싶어 괜히 헛기침했다. 그래? 이젠 집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겠네. 고마워. 뭔가 그럴듯한 답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막상 입에서 나오는 것은 형편없는 대꾸였다.
호열은 백호를 보내고 잠들 준비를 끝낸 뒤에도 웃을 수 없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원래 이렇게나 강렬하게 뛰는 것이었던가? 호열이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세찬 박동이 느껴졌다. 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그런 이상한 일은 몇 번이나 벌어졌다. 백호가 연습이 끝나자마자 자신을 향해 달려올 때도. 점심을 먹으며 맛있다고 헤헤 웃을 때도. 새 바슈를 사야겠다며 신발 가게에서 삥 뜯을 때도. 심지어는 백호가 장난을 치는 평범한 순간조차.
내가 왜 이럴까. 백호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심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내가 왜 이럴까.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할까.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알고 싶지 않았다. 호열이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
호열이 점수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97 대 56. 분명한 북산의 승리였다.
백호가 재활을 끝내고 농구부에 복귀한 뒤, 타 학교와 하는 첫 연습 경기였다. 그간 열심히 재활한 보람을 느끼겠다며 잔뜩 들떠 있던 강백호는 무려 14개의 리바운드를 잡았고, 그 중 8개를 득점으로 연결하는 기염을 토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강백호가 림에서 시선을 돌려 관중석 속 양호열을 정확히 찾아냈다. 붕붕방방 팔을 흔든다. 호열이 지끈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손을 흔들었다. 아, 또 이러네.
강백호가 양호열이 있는 쪽으로 뛰어가려 했지만, 가는 길에 송태섭에게 붙잡혔다. 넌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강백호! 채치수를 이어 주장이 된 후 첫 경기인지라, 평소보다 긴장했던 송태섭이 그를 대놓고 칭찬했다.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쳐주고(패는 것에 가까웠다), 세리머니를 하고. 강백호는 그 말을 들은 뒤 내내 헤벌쭉 웃고 있었다.
호열이 백호 군단과 함께 관중석에서 내려와 북산의 승리를 축하했다. 다 같이 한 마음으로 기뻐하던 것도 잠시. 정대만이 호열을 보고 낄낄거리며 내뺀 것을 시작으로, 농구부원들이 은근슬쩍 백호를 두고 사라졌다. 백호 군단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백호와 둘만 남은 호열이 황당함을 느꼈다. 아니, 어차피 학교로 돌아갈 건데 거기까진 같이 가도 되잖아. 가서 헤어져도 되는 거잖아. 이쪽 세계의 사람들이 원래 유난 떨기의 달인인 건지, 이쪽의 '양호열'이 유난을 떨었던 과거가 있어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자라면 그나마 납득하겠지만, 후자라면 정말 의문스러웠다. 사귄 기간은 한 달도 안 되는데,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야? 하긴, 뭘 했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울 것 같진 않았다. 이쪽 세계의 양호열은, 애인을 위해 72명을 때려눕히는 순애에 미친 게이새끼니까...
백호군단이 호열의 오토바이 키를 훔쳐 달아났기 때문에, 둘은 걸어서 돌아가는 수밖엔 없었다. 나야 그렇다 쳐도, 백호는 시합 직후라 피곤할 텐데. 하지만 백호는 멀쩡한 얼굴이었다. 아까 송태섭에게 들은 칭찬이 아직도 귀에 맴도는 모양이었다. 힘들지도 않은지 발걸음이 씩씩하다. 그래도 배고플 텐데, 식당가가 보이면 뭐라도 먹일까. 호열이 싱글벙글 날아갈 것 같은 백호에게 물었다.
백호야, 승리 기념으로 뭐라도 먹을까? 이번엔 내가 사게 해줘. 애인의 멋진 모습을 봤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웃긴 일이잖아.
오오, 그래! 좋아!
호열은 어느새 자신을 애인으로 지칭하는 데도 제법 익숙해졌다. 괜찮아 보이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배를 채운 둘은, 느긋하게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경기도 이겼고, 활약도 제대로 했고, 배도 부르겠다. 기분이 좋았다. 자연히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호열이 먼저 두 나무를 연결해 건 현수막을 발견했다. 음? 환 어디무슨 현 겨울 축제 영. 아, 어쩐지 유카타를 입은 사람이 많이 보이더니. 백호도 현수막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호열아, 축제 하나 봐! 그러게. 잠깐 구경이라도 하고 갈까? 눈을 빛내던 백호가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나 오늘은 돈 안 가져왔는데...
아까 말했잖아. 승리 기념.
괜찮겠어...?
백호야. 설마 나를, 애인에게 이것조차 못 해주는 형편 없는 남자로 만들 건 아니지?
후, 후눗...!! 당연하지!!!!!!
둘은 샛길로 빠져 축제 거리에 들어섰다. 이른 저녁이니 사람이 많을 때도 아닌데, 벌써 부스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웅성웅성했다. 축제 특유의 활기찬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았다. 저거! 저거 하자, 호열아!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던 호열이 백호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10개의 다트를 던져 풍선을 터뜨리는 게임이었다. 호열이 벌써 저만치 앞서 있는 백호를 따라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호열이 돈을 지불하자, 주인이 백호에게 다트 10개를 건네주었다. 백호가 미간까지 찌푸리며 신중하게 초점을 맞춰 다트를 던졌다. 풍선이 펑, 시원한 소리를 내며 터진다. 결과는 총 8개. 나름 나쁘지 않은 숫자였다. 호열이 뒤이어 다트를 들었다. 속으로는 숫자를 되뇐다. 8개. 8개. 다트를 던진다. 펑!
호열이 터뜨린 풍선의 개수는 총 7개. 호열이 아쉬운 척 말했다.
아쉽네, 천재를 이길 절호의 기회였는데.
하하하! 천재를 이기기는 쉽지 않은 법이지!
그러게. 대단하다, 백호야.
둘은 각각 사과 사탕 하나씩을 받았다. 백호가 주먹만 한 사과 사탕을 한입에 넣었다. 와그작와그작. 사탕이 마지 고체인 적도 없었다는 듯 입안에서 사라졌다. 진기명기를 직관한 호열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곧 불꽃놀이도 한다는데, 그거까지 보고 가는 거 어때? 당연히 좋지!
화끈하게 축제를 즐긴 덕에, 어느새 둘의 손엔 금붕어가 담긴 비닐봉지가 하나씩, 달고짜고매운 소스를 잔뜩 뿌린 소시지 꼬치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뉘엿뉘엿하던 해가 모습을 감춘 뒤였다. 눈치껏 불꽃놀이 시간이 다가온다는 걸 알아챈 호열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리를 좀 잡아볼까. 하늘이 탁 트이게 보일 만한 곳을 찾아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막상 걸음을 멈춘 곳은 허접한 모양새의 부스였다. 조잡한 농구 골대와 농구공이 단출하게 놓여 있었다. 대충 세워진 간판에는 직접 휘갈겨 쓴 듯한 글씨로 10번을 던져 8번 이상을 넣으면 참가비의 두 배를 돌려준다고 적혀 있었다. 이런 시설이면 백호는 50개 던져 50개 다 넣겠는데. 눈을 마주친 호열과 백호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씨익 웃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호는 참가할 수 없었다. 그의 키와 덩치를 본 주인이 기겁을 했다.
백호는 못 한다구요?
딱 봐도 이쪽은 농구 선수 같은데, 안 되죠. 여기도 쓰여 있잖아요.
나이 지긋한 남자가 간판을 가리켰다. 다시 보니 왼쪽 하단에 아주 작은 글씨로, '*단, 전문 체육인 제외'라고 적혀 있었다. 왁왁거리는 백호를 호열이 겨우 말렸다.
그럼 제가 하는 건 괜찮죠? 저 할게요. 돈 여기요.
예 뭐... 던져요.
호열아, 할 수 있겠어? 넌 덩크슛도 못 넣잖아!
보통은 못 넣어... 그리고 넌 오늘 공 많이 던졌잖아. 쉬고 있어. 내가 한번 해볼게.
축제에서 일시적으로 쓰는 싸구려 기기다 보니, 림의 높이가 낮을 뿐더러 거리도 가까웠다. 호열이 공을 들었다. 백호에게 던져주던 것보다 훨씬 가볍고 작았다. 드리블을 흉내내보려고 했지만, 공은 아스팔트 도로를 튕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돌돌 굴러갔다. 결국 호열은 자리에 서서 바로 공을 던졌다. 지금껏 백호가 훈련해왔던 자세를 떠올리면서. 공이 가볍게 하늘을 날았다.
결과는 10개 중 6개. 호열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자신 있게 말했는데, 창피하네. 진짜 창피해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백호가 호들갑 떨며 그를 격려했다. 아냐! 호열이 넌 배우지도 않았잖아.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거라구!
호열이 너도 농구 배우면 좋을 텐데 말이야.
결국 돈을 날렸다. 잘 가라는 인사 한마디 없이 돈을 들고 사라진 주인을 한 번 째려본 강백호가 중얼거렸다. 말투에서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호열은 대꾸하지 않았다.
불꽃놀이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는지, 사람들이 한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호열이 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백호야, 이쪽으로. 호열은 사람들 틈을 익숙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조금만 공간이 비어도 쏙쏙 몸을 구겨 들어가니, 뒤늦게 왔는데도 꽤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호열이 들뜬 얼굴의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야. 너, 다른 것도 많이 해봤었잖아. 수영이라든가, 주짓수라든가. 하지만 다 일주일도 안 돼서 나왔고.
그랬지.
그런데 농구는 왜 좋아?
난 농구 천재니까, 어쩔 수 없이 끌렸지. 호열이 너도 알다시피 난 바스켓맨이잖아?
하하, 그렇지... 그치만 이유가 더 있을 수 있잖아? 없으면 됐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백호가 고개를 치켜올리며 답을 고민했다. 덩크슛을 할 때 짜릿해서 좋고, 내가 활약할 수 있어 좋고. 점프 슛도 재밌고, 페이크를 성공했을 때 다른 학교 놈들이 당황하는 모습도 재밌고. 송태섭이나 정대만이랑도 친하고, 채치수도 있고, 그... 기분 나쁘지만 여우 놈이랑 했던 하이파이브도 좋았어.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호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예상했던 대답인데도 백호의 목소리로 들으니 새로웠다.
그리고...
도, 동료들이 날... 믿어줘. 내가 쓸모 있다는 감각을 느껴.
......
공을 패스하면, 누군가 잡아. 내가 보낼 줄 알았다는 듯이. 그게... 좋아.
그렇구나. 호열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열은 공을 잡아줄 수 없다. 그는 코트 위에 서지 않으니까. 패스를 받아주긴 커녕, 드리블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까. 너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영원히 사랑하겠구나. 이 또한 예상했던 일인데도, 새삼스러웠다. 답을 얻은 호열이 이제 그만 고개를 돌리려는데, 백호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다는 아냐.
그럼?
너도. 너도 내가 농구 하는 걸 좋아하니까...
백호가 호열의 눈을 피했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당당했다. 떨리지 않는 목소리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 호열이 제가 농구 하는 모습을 좋아할 거라는 확신. 호열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신. 자신이 호열을 좋아한다는 확신. 호열이 살면서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확신.
내가 너에게 뭐라고 고백했었어?
튀어나온 말은 본능에 가까웠다. 호열은 제가 말을 꺼내놓고도 당황했다. 뒤늦게 입을 가려봤자 이미 뱉은 말이다. 백호가 낑낑거렸다. ... 호열이 너, 기억 안 나? 아니? 그냥 네 입으로 다시 듣고 싶어서. 호열이 대답했다. 이곳에 와서 뻔뻔함이 늘었다.
백호가 호열을 노려보았다. 귀가 붉어져서 딱히 무섭진 않았다.
... 내가 무섭다고.
......
나를 좋아해서, 무섭다고...
호열은 문득 자신이 물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속 어딘가. 제 무게를 지탱하는 단단한 땅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그는 분명 표류하고 있었다. 시야가 흐릿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고, 움직임마저 제한된 망망대해 속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지만, 호열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형형색색의 불꽃이 얼굴에 비쳐 백호의 얼굴이 여러 색으로 물들었다. 푸른 색, 붉은 색, 노란 색, 초록색. 그러나 그 어떤 색일지라도 그가 강백호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호열은 한동안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 세계에 있던 남자는, 내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은, 백호의 이런 얼굴을 늘 보았을까? 이 얼굴을 보기 위해 얼마나 달콤한 말을 전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뱃속이 뜨거웠다. 저번에 분명 백호가, 뽀뽀를 못해서 안달이더니 왜 그러냐고 했지. 그렇다면 꽤 익숙할 정도로 해댔다는 뜻이고, 손 잡는 거야 우스웠겠다. 피를 질질 흘리면서까지 전화를 걸 정도면 눈치 볼 성격도 아니니 어디서든 잡았겠지. 사람들이 많은 곳이든, 친구들이 보고 있는 곳이든, 농구부 부원들이 보고 있는 곳이든.
호열이 시선을 내려 백호의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크기가 비슷하고, 조금 더 굵고, 매끈한 손. 호열은 저 손이 어떤 온도를 가지고 있는지 기억한다.
아.
손을 잡고 싶다.
무심코 손을 잡으려고 내밀었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뺐다. 손을 잡고 싶다고? 자신이 한 생각이 믿기지 않았다. 방금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미쳤구나.
그때 백호가 호열을 보며 웃었다. 입 모양으로 말한다.
예쁘다.
마주 웃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커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을 테니. 호열은 발목을 적시는 파도의 흐름을 느꼈다. 그의 바다에 거센 폭풍이 인다.
어쩌겠는가? 이곳은 그에게 다정하지 않은 세계였다.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
해가 떴다. 일어날 시간이다. 알람 시계가 늦게 울린 탓에, 지금부터 바삐 움직여도 시간이 빠듯했다. 그러나 호열은 알람 시계를 끄고 다시 누웠다. 새벽 내내 잠들지 못했던 눈 아래가 거뭇했다. 어제 불꽃놀이가 잊히지 않아서. 보잘것없는 림이 잊히지 않아서. 겨울 축제가 잊히지 않아서. 강백호의 붉어진 뺨이 잊히지 않아서. 목소리가 잊히지 않아서. 눈빛이 잊히지 않아서. 강백호가, 잊히지 않아서. 그리고 그토록 잊히지 않은 강백호가, 다행스럽게도, 절망스럽게도, 하필이면, 이 세계가 아닌 원래 세계의 강백호라서.
호열은 자신을 따라 리젠트 머리를 했던 강백호를 떠올렸다. 여자에게 50번이나 차인 강백호를 떠올렸다. 채소연에게 반해 농구를 시작한 강백호를 떠올렸다. 점프슛을 성공하고 기뻐했던 강백호를 떠올렸다. 해남에게 패배해 울던 강백호를 떠올렸다. 이만 번의 공을 던졌던 강백호를 떠올렸다. 특훈에서 찍은 비디오를 밤새 돌려보던 강백호를 떠올렸다. 산왕공고와 경기 도중 등을 다쳤던 강백호를 떠올렸다.
채소연의 어깨를 잡고, 좋아한다고 말했던, 강백호를 떠올렸다.
그뿐인데 심장이 조여들었다. 숨이 막히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만큼 자신이 멍청하지 않다는 게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는 차라리 아둔해야 했다. 호열이 벅찬 숨을 뱉으며 마른세수했다.
내가 미쳐버린 거야. 이런 이상한 세계에 있으니까. 백호를 좋아하라고 강요하는 세계에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나간 거야.
이상하잖아. 내가 백호를.
백호를... 그런 마음으로 보면.
그런 건 이상하잖아. 그럼 안 되는 거잖아.
백호는 소연이를 좋아하는데.
채소연뿐이 아니다. 강백호가 좋아했던 50명의 여자들. 얼굴을 본 지 오래됐지만, 눈만 감으면 한 명도 빠짐없이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누구도 호열을 닮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당연했다. 진짜 백호는, 내가 살던 세계의 백호는, 그 애는, 여자를 좋아하고. 나는. 나는 남자니까.
호열이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잠을 청했지만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탓에 실패했다. 수면이 채우지 못한 공간에 바닷물이 차올랐다. 그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끝없이 가라앉았다.
한참을 괴로워하던 호열이 창에 커튼을 쳤다.
그러나 여전히 밝아 잠들기 어려웠다.
호열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어차피 본인의 세계가 아니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러자 시간이 남아돌았다. 호열은 한참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고, 깨어나면 곧장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오락실. 파칭코. 영화관. 아르바이트. 가라오케. 어디든 갔고, 무엇이든 했다. 정신 없고 자극적일수록 좋았다. 조금이라도 한가해지면, 조금이라도 생각을 비우면. 때를 틈 타 파도가 그를 쫓았으므로, 그는 쉼 없이 도망쳐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그리고 어쩌면, 한 달.
그나마 효과적이었던 쪽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시원하게 질주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바람이 온몸을 밀어냈다. 속도를 낼수록 더 세게 밀어낸다. 숨을 들이마시면 찬바람이 폐부를 가득 채운다. 분명하고 생생한 감각을 느낄 때. 호열은 오직 그 순간에만 바다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다. 복잡하게 꼬인 속을 풀기 위해 달린 것이건만, 오히려 더 답답하기만 했다.
문득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잠시 숨을 참았다. 대체 이 망할 세계는 나를 언제쯤 돌려보내려는 걸까?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세계가 절실했다. 옥상에서 백호 군단과 다 함께 점심을 먹었던 그의 세계. 홀로 아르바이트 가게에 가던 그의 세계. 농구부에 구경을 가도 정대만이 또 왔다며 지겨워하는 그의 세계.
베개에 머리만 두어도 잠들었던 그의 세계. 백호를 두고 긴장할 필요가 없었던 그의 세계. 채소연과의 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했던 그의 세계. 강백호를 생각해도 죄책감이 들지 않던 그의 세계.
강백호가 먼저 손을 잡아줄 리 없는, 그의 세계.
평화롭고 지루했던 그의 세계가 필요했다.
-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집에 돌아가니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있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불량하게 문에 기대있더니, 호열을 보자마자 뭐라고 소리 지르며 화를 낸다. 호열은 덩달아 화를 내지 않는다. 진심으로 반성하지도 않는다. 그를 달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저 멍하니 강백호를 바라봤다. 바보 아니야?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화를 내다니. 내가 전화선을 끊어뒀잖아. 전화하지 말라는 뜻이잖아.
이런 바보 같은 점까지 닮았다니. 하지만 아무리 닮았어도, 이 녀석은 그의 강백호가 아니다. 호열이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피곤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꺼지라고 하면 된다.
어차피 진짜 강백호도 아니니까, 상관 없고.
네 얼굴 보기 싫어서 그랬다고 하면 가겠지. 손만 내쳐도 상처 받고 도망쳤으니까. 이번에야말로 박치기를 당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더 세게 때릴지도 모르지만, 그거야 맞아주면 그만이다. 맷집이라면 자신 있었다. 그래, 그냥 쫓아내자. 남 챙겨줄 정신이 없다. 호열은 어떻게 그를 쫓아낼지 결심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막상 강백호의 얼굴을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었다. 호열과 마찬가지로 인상을 구긴 강백호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열은 강백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코도 뺨도 새빨개져서는. 정말 우스운 꼴이 되어서는. 초라해져서는.
그런 주제에 빨갛게 변한 내 손을 잡아주고 싶은 것처럼 쳐다봐서. 채소연을 볼 때처럼 바라봐서. 사랑하는 사람처럼 바라봐서. 정말로 할 말을 다 잊었다.
날 왜 그렇게 봐? 날 그렇게 보면 어떡해? 바보처럼. 넌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난, 나는, 난. 백호야.
난 네가 좋아하는 양호열이 아니란 말이야.
호열이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화를 내던 강백호가 멈칫 소리를 죽였다. 화를 내던 것도 잊고 호열을 바라봤다.
밤 9시의 주택가는 고요했다. 들리는 것은 오직 호열의 웃음소리뿐. 그가 눈치 보지 않고 웃었다. 소리가 멎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니까, 강백호가 호열에게 기다리는 심정이 어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답변을 고민하던 시간. 그 정도.
호열이 나지막이 물었다.
백호야. 넌 내가 왜 좋아?
뭐? 호열이 너, 내 말에 대답도 안 해놓고...!!
꼭 듣고 싶어서 그래... 말해줘. 부탁이야, 백호야.
백호가 호열을 노려보았다. 이번엔 귀뿐만 아니라 코, 뺨도 붉었다.
방금까지 화를 냈으면서 단순도 하지. 강백호는 결국 원하던 답을 말해준다. 다정하고. 친절하고. 내게 상냥하고. 늘 나를 도와주고. 나를 좋아하고... 마지막 대답은 조금 머뭇거렸다.
호열이 네가, 함성이 들리지 않았냐고 했을 때. 손끝에서 뭔가 찌릿한 게 퍼져나갔단 말이야. 네가 옆에 없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처음 생각했었, 했었다고...
호열은 상양과의 시합 다음날을 떠올렸다. 이 순간만큼은 이 세계가 자신의 것과 닮았다는 게 지독하게 싫었다. 같은 과거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징그러웠다. 끔찍해서, 화가 났다.
내가 하지 않은 말로 고백을 받았다면서. 내가 한 말로 사랑에 빠졌다는 네가. 그렇게 말해도 진짜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강백호도 아닌 네가. 그렇게나 양호열을 좋아한다면서, 사람이 바뀐 줄도 모르고 마냥 사랑을 쏟아부어 주는 네가.
오직 그 애의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스러워서. 그래서 화가 났다.
아. 역시 넌 내가 아는 강백호가 아니다. 그 녀석은 그 말을 듣고도 채소연을 좋아했거든.
그 애는 나를 전혀 좋아하지 않거든.
그 애는... 나를 좋아할 일이 없거든.
그리고 나는 그런 강백호를 좋아한다.
언제였더라. 호열이 기억을 되짚었다. 언젠가 백호 군단이 그에게 말했다. 늘 백호에 대한 얘기만 해서, 이만 번이나 공을 던져줘서, 정대만의 죄를 덮어써서, 강백호의 원정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늘려서. 그래서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고. 호열은 코웃음 쳤다. 그는 늘 감이 좋았으니까. 자신이 강백호를 좋아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렸을 테니까.
하지만 호열은 어렸다. 어린 만큼 몰랐다. 사랑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구슬리는 것이다. 저 애가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바라는 것을 들어주라고. 조금쯤 희생하고, 조금쯤 감당하면서, 대가 없이 베풀라고. 그리하여 저 애가 행복한 모습을 보라고.
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를 사랑한다는 걸 깨닫지 못하게 하면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호열이 소매로 눈가를 훔치다 문득 손을 멈추었다. 하늘에서 눈송이가 날렸다. 푸른 색, 붉은 색, 노란 색, 초록색. 각자의 색을 가진 것들이 모두 눈에 뒤덮인다. 그러나 색이 바뀌어도, 그것이 본래 무엇이었는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세계는 이방인에게 다정하지 않은 곳이었다. 가슴 깊이 원하는 것을 깨닫게 해놓고.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게 해놓고. 그렇게나 잔인하게 굴어놓고.
이렇게나 아름답다니.
호열이 입을 열었다.
나, 네가 아는 양호열이 아니야.
후눗?
나는... 다른 세계에서 왔어.
-
호열이 눈물을 보인 탓인지, 백호가 너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바람에 둘은 자리를 옮겼다. 가로등 아래 정자에 앉아 눈물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난리 피우는 백호의 얼굴이 웃겨서 금세 눈가가 말랐다. 눈치를 보는 백호를 보며 호열이 가볍게 웃었다.
호열은 어느덧 시간이 꽤 지나버린 첫 만남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손을 잡았을 때 그가 당황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강백호를 은근슬쩍 피하고, 어색해 했던 이유를. 백호군단에게 채소연과의 과거를 캐물은 이유를. 뽀뽀를 막은 이유를. 전화선을 끊어버린 이유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호열이 너, 날 바보로 아는 거냐? 당연히 알지! 이 몸은 천재거등. 네가 호열이랑 비슷한 외계인이라는 거 아니야?
아... 음.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맞아. 그보다 내 말, 바로 믿어주는구나.
호열이는 거짓말 안 하거든. 가끔 뭘 숨기기는 해도. 너도 양호열이라며? 비슷한 녀석일 것 같고.
호열이 괜히 뜨끔했다. 뭘 숨기는 건 알고 있구나... 내 세계의 백호도 눈치채고 있을까? 아니면 전교 2등 버프? 뭐, 지금 고민해봐야 소용 없는 일이다.
그럼, 내 호열이는 돌아오는 거야?
돌아올 거야. 분명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잠시 바뀌었을 뿐인 것 같거든.
감히 어떤 자식이 호열이를 데려간 거야? 호열이 녀석, 제 발로 따라간 건 아니겠지?! 내가 여기 있는데!
아마 아닐 거야. 그 녀석은 너를 위해 72명과도 맞짱 뜨는 미친 놈이거든. 등에는 이레즈미도 있고. 호열이 말을 삼켰다. 기왕 체면을 차려주기로 한 거, 비밀까지 덤으로 지켜주기로 했다.
그때 말없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백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빨리 보고 싶다.
......
언제 돌아오려는 거지.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도 보고 싶어? 말하기 전엔 몰랐으면서.
다르다는 걸 이제 알잖아. 한 번 알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만나면 뭘 하려고?
손 잡을 거야. 호열이 녀석, 손이 금세 차가워지거든. 날씨가 이래서 추울 텐데.
호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손이 빨리 차가워지는 편이었던가? 전혀 몰랐다.
손을 내밀자 백호가 째려보았다. 호열이 어깨를 으쓱했다.
잡고 싶으면, 잡을래? 네가 아는 양호열은 아니지만. 얼굴은 똑같아. 성격도 비슷하고.
아니. 난 진짜 호열이랑 잡을 거야. 그 녀석, 제법 질투가 많거든. 티는 안 내도 한참 꿍해 있을 거야.
단칼에 거절당한 호열이 시선을 내려 제 손을 쳐다봤다. 아쉽다. 네가 먼저 손을 뻗었을 때 많이 잡아둘걸. 진짜 세계의 백호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손을 잡아주지 않을 텐데. 어쩌면 널 처음 만났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을 텐데.
그러나 아쉬움이 오래가진 않았다. 어차피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앞의 강백호가 원하는 것이 제 손이 아니듯, 양호열이 원하는 것도 이 남자의 손이 아니니까.
어느새 눈이 그쳤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호가 몇 번이나 사양했는데도 불구하고, 호열은 백호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백호가 툴툴댔다. 내 덩치를 봐. 안 데려다줘도 이 천재는 멀쩡하거든. 호열이 웃으며 답했다. 나도 집 혼자 간다고 돌연사 하는 거 아닌데, 네가 데려다줬잖아.
그리고 이제 너도 내 정체를 알아버렸으니까, 내일부터는 사귀는 사람으로 취급해주지 않을 거 아냐. 이게 네 남자친구로서 하는 마지막 행동이야.
백호가 씨익 웃었다. 문을 닫을 때까지 팔을 붕붕 흔들어 인사했다. 호열은 손만 들어 인사했다. 문이 닫힌 뒤에도, 불이 꺼진 뒤에도, 호열은 그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문득 뺨에 손을 대어본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호열이 잠자리에 누웠다. 감이 왔다. 지금 잠들고, 깨어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 치고, 돌아가고 싶다고 애원할 때는 모른 척하고선. 마음을 인정하고 난 뒤에야 돌아가는구나. 대체 뭣 때문에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거지? 설마 마음 한 번 자각해보라고 그런 건 아닐 거 아니야. 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어처구니 없는 세계였다. 호열이 헛웃음을 뱉었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꿈이었을까?
오감이 생생한데도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 같았다. 제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고, 전부 기억하고 싶기도 했다. 호열이 주먹을 쥐었다.
그가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수마에 빠져들었다.
-
찝찝하다.
그것이 양호열이 눈을 뜨자마자 내린 결론이다.
존나 찝찝하다.
양호열이 죽는 소리를 뱉으며 기상했다. 부슬부슬 엉킨 머리를 헤집으며 생각한다. 뭔가 잊은 것처럼 불안한데. 뭐지. 오랜 꿈을 꾸고 일어난 사람처럼 정신이 멍했다. 단순한 불안을 넘어 오싹하기까지 했다. 호열이 애써 목덜미를 문지르며 기분을 떨쳐내려 했지만, 조금도 희석되지 않았고 목만 아팠다. 완전히 낭패였다.
이마를 긁적거린 호열이 이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가슴이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뒤에야 내쉰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 차분한 숨소리가 고요한 방을 채웠다. 마지막으로 숨을 들이마신 호열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좋아. 학교 가자.
하루를 버틸 의지를 다진 남자가 이불에서 벗어났다.
양호열은 감이 좋다. 수년 간 다져진 경험으로 그는 제 직감을 신뢰했다. 즉, 기상과 동시에 빽빽 울려대는 직감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묘하게 몸이 개운하고, 짹짹 새소리가 들리고, 목덜미가 싸늘하기에 지각인 줄 알았건만. 시계를 확인해보니 오히려 평소보다 5분 일찍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 불길함은 어디서 기원하는 걸까?
호열이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차라리 지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분명 중요한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호열은 괜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이상한 점이 없었다. 오토바이 키도 잘 챙겼고. 가방이야 원래 든 게 없고. 잊어버릴 게 없는데. 이상하다. 호열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집을 나섰다.
어! 호열아!
백호야.
언제나 그랬듯, 강백호가 밝은 얼굴로 달려 와 호열의 옆에 섰다. 평범한 잡담 주제는 금세 집어치우더니, 아니나 다를까 농구 얘기를 꺼낸다. 어제 서태웅과의 원온원에서 처음으로 동점을 획득해 매우 신난 모양이었다. 잔뜩 들뜬 발걸음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 호열이 맞장구치며 백호를 띄워주었다. 하하, 서태웅 긴장 좀 해야겠는데. 백호 넌 분명 해낼 테니까.
오늘 아침의 찝찝함은 기우였던 걸까? 앞서 말했듯 호열은 감이 매우 좋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 농구 천재 강백호도 자유투에 실패하는 법이었다. 지금, 이때, 이 순간쯤이면 위화감의 정체가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상한 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다. 구름이 조금 낀 맑은 하늘도, 미세 먼지 없는 깨끗한 공기도.
봐, 백호도 똑같잖아. 바보 같이 환하게 웃는 얼굴도, 틈만 나면 농구 얘기로 열 올리는 것도. 서태웅을 이기겠다며 불타오르는 것도, 등굣길부터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것도. 그리고 내 손을 은근슬쩍 잡으며 수줍어 하는 것도... 어?
손을, 잡았다.
손등이 몇 번 스치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잡힌다. 호열이 휘둥그레 뜬 눈을 깜빡였다.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일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손을 빼지 않았다. 어쩐지 계속 잡고 싶었다. 백호를 바라보자 그가 뺨을 긁으며 말을 꺼냈다.
나, 이상한 꿈을 꿨어.
뭔데?
... 말하기 전에, 이상하게 보지 않겠다고 약속해.
약속할게.
너랑.... 사귀는 꿈이었는데. 네가 날... 너무 좋아해서. 너랑 손을 많이 잡았었는데. 그냥 너를 보니까, 또 잡고 싶어져서. ... 잡아도 돼?
이미 잡았으면서. 뒤늦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정말 백호답다.
호열이 손과 강백호를 번갈아 응시했다. 잡힌 손이 따끈한 강백호의 온도로 뒤덮였다. 손바닥에서 무언가 찌릿찌릿한 것이 손가락 끝으로 퍼져 나갔다. 이 느낌. 느껴본 적 있는데. 호열이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찬 공기가 폐부에 가득 찼다.
아.
그제야 호열은 아침에 느꼈던 직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찝찝한 게 당연했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었으니까.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회피하고, 외면하고, 꽁꽁 숨겨두고,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싶었지만.
어떤 색으로 덮더라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럼. 잡아도 되지.
호열이 잡힌 손을 고쳐 맞잡았다. 백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손이었다.
完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