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헌이 형에게 닿고 싶으니까 죽고 싶어
우성명헌
[일상꿀팁] 훈녀생정/솔탈스킬/일진되는법/인맥넓히는법/올리브영추천템/눈커지는법/눈물안나게하는법
안녕하세요~ 오늘은 장례식장에서 예의 없는 행동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해요
그건 바로
부활이에요
죽은 줄 알고 갔는데 갑자기 살아나면 서로가 당황스럽겠죠?
그럼 다음에 만나요~
그런 의미에서 명헌은 예의가 바르다. 부활하는 대신 귀신이 되었으니까. 초췌한 얼굴로 울고 있던 정우성은 대뜸 나타난 남자를 보고 눈물을 그쳤다. 반투명한 이명헌이 영정 사진을 등지고 쪼그려 앉아 자신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래 놓고 하는 말이 탈수 오겠다 뿅. 물 마시면서 울어라 뿅. 이 지랄. 우성의 동공이 가냘프게 흔들렸다. 눈을 비비고, 볼을 꼬집고, 벽에 머리를 박아도 명헌이 사라지지 않자, 우성은 신현철에게 다가갔다. 형 저 정신병 걸렸나 봐요 뺨 좀 때려주세요. 충격이 큰가 본데 너 그냥 집에 가라. 아니 저 지금 명헌이 형이 보여요 뺨 한 대만 때려달라니까요. 현철은 소원을 들어줬다. 대 자로 쓰러진 우성이 그대로 기절했다. 그 꼴을 전부 본 명헌이 중얼거렸다. 하여튼 보기와 다르게 잘 기절한다 뿅.
명헌이 형에게 닿고 싶으니까 죽고 싶어
정우성은 순진하다. 매사 진지한 탓에 잘 속는다. 산왕공고에서 에이스로 활약할 무렵, 우성은 농구부의 공공연한 놀림감이었다. 우성아 너 잘 때 꼭 발까지 이불 덮어라 귀신이 발 잘라간다. 아 뭐래요 안 믿어요. 덮었다. 이명헌 빠른 년생이라 너랑 동갑인 거 아냐? 그냥 말 까라. 아 뭐래요 안 믿어요. 말 까고 1시간 물구나무섰다. 도 감독님 다음 주 생신이시니까 선물 준비해와라. 아 진짜 이번엔 안 믿어요!! 준비해왔다. 심지어 김영란 법 때문에 거절당했다. 우성은 속고만 살았다. 인간 불신이 심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심도 하다 보면 는다고, 미국으로 유학 갈 즈음에는 선배들이 하는 모든 말을 의심한 덕분에 비행기에 탈 때 신발을 벗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눈앞에 나타난 이명헌의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믿어야 하나? 의심해야 하나? 의심한다면 무엇으로? 우성의 미약한 상상력으로는 유튜브 컨텐츠 따위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정우성 하나 속이자고 장례식장까지 섭외할 리도 없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조문 올 리도 없고, 무엇보다 인간의 기술로는 벽을 자유롭게 통과하는 무형의 존재를 만들 수 없었다. 우성은 간신히 납득했다. 명헌이 형은 죽었고 나는…정신병자야. 아님 이제 와서 귀신을 보게 됐든가.
신현철에게 사과한 정우성은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수면량이 부족해서 헛것이 보이는 게 틀림 없었다. 옛말에도 잠이 보약이랬어. 일단 푹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그럼 다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우성의 미래 계획은 금세 부서지고 말았는데, 이명헌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그의 뒤를 졸졸 쫓아왔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피해 봐도 그것은 놓치지 않고 우성을 따라왔다. 등골이 오싹해진 우성은 그가 보이지 않는 척 행동하기로 마음 먹었다. 살아있지 않은 것에게 반응해주면 안 된다는 말을 주워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로 아는 척하지 말자. 난 저게 보이지 않아. 나에겐 아무 일도 없어. 차에 타기 전 몇 번이고 다짐한 우성이 시동을 걸었다. 난 할 수 있어!
우성, 안전벨트 뿅.
아 맞다.
할 수 없었다.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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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따라오셨어요?
본가로 가려고 했는데, 생자의 주거지에 들어가려면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뿅. 그런데 가족들은 다 날 못 봐 뿅.
아아 네…. 저희 집 오시려구요?
안돼 뿅?
…혹시 들어와서 저 죽이실 거예요? 그럼 안 돼요.
안 죽일게 뿅.
알겠어요 들어오세요 그럼….
다짐이 무색하게도 우성은 속수무책으로 말려들었다. 사정 청취부터 집 초대까지 일사천리였다. 물론, 변명거리는 있었다. 귀신의 목소리가 너무 또렷했다. 말투나 어미도 우성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반투명한 얼굴만 아니었다면 명헌이 살아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이게 귀신에게 홀린다는 걸까?
그나마 혼자 쓰는 집이 있어 다행이었다. 우성이야 스불재니 그렇다 쳐도, 장례식 간 아들이 냅다 귀신을 끌고 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엄마 아빠를 생각하자 심경이 복잡해진 우성이 미간을 좁혔다. 이거 맞는 건가? 이래도 되는 거야? 끊임없이 상념을 이어가던 무렵, 명헌이 물었다. 우성, 집 자가야 뿅? 네? 아, 네. 왜요? 아까 집 들어갈 때 주인 허락 필요하댔잖아 뿅. 주인의 기준이 실거주자가 아니라 명의라 뿅. 그렇구나. 딱히 알고 싶진 않았는데. 사후세계까지 스며든 자본주의 사회 무섭다. 아까보다 머릿속이 두 배는 더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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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은 다섯 살 때부터 드리블을 했다. 영재였다. 아버지 정광철은 일찍이 재능을 알아봐 준 자신에게 고마워하라고 으스댔지만, 정우성은 입만 하하 웃을 뿐 고맙단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다.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제 손에 농구공이 있었으리라는 확신. 다리가 부러져도 코트 위에 섰으리라는 확신. 정광철의 아들이 아니어도 재능이 있었으리라는 확신. 태어난 순간부터 공을 던질 운명이었다. 하늘이 정했으니 그는 고마워 할 사람이 없었다. 아들 새끼 키워 봤자였다.
시골에서 영재영재 해 봐야 도시에선 일개 촌놈이라던데, 정우성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가로 15m, 세로 28m의 농구코트가 오로지 그의 영지였다. 상대가 누구든, 장소가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 키가 크고 실력이 늘수록 욕심도 함께 자랐다. 더, 더 배우고 싶었다. 최고가 되고 싶었다. 한계를 발견하고 부수고 싶었다.
우성은 탐욕스럽게 성장했다. 또래 아이들이 그를 당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중학교도 별거 아니네. 우성이 생각했다. 오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고작 '나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을 괴롭히는 곳에 의미가 있을 리 없으니까. 늦은 밤, 홀로 떠맡은 체육관 청소를 위해 찰박찰박 대걸레를 빨며 우성이 결심했다. 산왕공고에 가야겠어. 고교 최강이라는 그곳에 가면 더 성장할 수 있을 테니. 우성은 의미를 찾고 싶었다. 3년 뒤 바람대로 그는 산왕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명헌은 가장 먼저 얼굴을 외운 선배였다.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첫 만남이 강렬했다. 입학하자마자 농구부를 찾아간 우성은 체육관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 훈련 중인 농구부가 보였다. 다들 땀이 줄줄 흐르지만 즐거워 보였다. 중학교도 이랬었는데. 내가 들어가는 순간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그때를 떠올린 우성이 어금니를 물었다. 급히 휘갈겨 작성한 입부신청서가 조금 구겨졌다.
그가 막 체육관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신입생 뿅?
누군가 신청서를 채갔다. 뿅? 방금 뿅이라고 한 건가? 우성은 두 귀를 의심했다.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농구부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눈으로 신청서를 훑는다. 저건 2학년 명찰인가. 선배님이시구나. 얼타고 있던 우성이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굽혔다. 정우성입니다. 입부 신청서를 내려고 왔는데, 주장님이 어디 계신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남자가 우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까닭을 몰라 눈만 깜빡이자 남자가 말했다. 주장에겐 내가 전달 뿅. 가 봐 뿅. 아, 네.
우성이 뺨을 긁적였다. 이유 모를 불안감에 남자를 눈으로 좇았지만, 그는 이미 농구부 무리에 섞인 뒤였다. 우성은 명찰에 적힌 이름을 떠올렸다. 이명헌. 어쩐지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보다 주장에게 직접 전달하려고 했는데. 설마 빼돌리진 않겠지? 아냐, 전해주신다고 했잖아. 초면에 남을 골탕 먹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사람 함부로 의심하지 말자.
하지만 의심했어야 했다. 알고 보니 신청서를 빼앗아 간 그 남자가 주장이었으니까. 우성은 영문도 모르고 목적을 달성했다. 사실을 알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우성이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산왕은 과연 최고라는 위명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우성은 이곳에서도 역시 또래보다 월등한 실력을 보였지만, 아무도 그것을 핑계로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미워하지 않았다. 따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감탄하고, 의지하고, 보완점을 찾아 발전을 도왔다. 우성은 처음으로 농구가 팀 스포츠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최고의 자리에 서는 기쁨을 알게 됐다. 완전한 타인 4명과 동기화되는 감각. 동료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그건 아주 짜릿하고 잊을 수 없는 무엇이었다. 우성은 이 모든 영광 뒤에 명헌이 묵묵하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우성은 명헌을 가슴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주전으로서 참가한 고교 데뷔전. 볼을 가진 명헌이 우성의 위치를 보지도 않고 패스했다. 우성이 잡은 공을 곧장 림을 향해 던진다.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간 공이 림 위를 돌며 애태우다가, 끝내 골대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로써 상대와의 점수 차는 21점. 도 감독이 종종 이야기하는, '상대의 의지를 꺾는 점수 차'였다. 과연 기세가 꺾인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우성이 본능처럼 명헌의 얼굴을 확인했다. 명헌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경기장이 떠나가라 응원하는 관중의 함성도. 다시 위치를 잡으라는 신현철의 목소리도. 도 감독의 느린 박수 소리까지. 귀를 파고드는 것은 제 심장 소리뿐. 너무 커서 그대로 심장을 토할까 봐 무서웠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명헌만 보면 두근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기에 더더욱.
아. 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지. 부정맥인가? 우성이 심각한 얼굴로 병원에 달려갔다. 정밀 검사 결과 그는 정상이었다. 병이 아니면 대체 뭐야? 왜 선배만 보면 이러는 거야? 선배를 존경한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심장이 빨리 뛸 수 있나? 혼자 끙끙댔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우성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터넷에 질문글을 올렸다.
Q. 안녕하세요. 제가 좀 유명해서 누가 알아볼까 봐 자세히 적을 수는 없고 고등학생 운동선수인데요. 제가 존경하는 선배가 있는데, 그 선배랑 같이 자주 경기를 뛰어요. 제가 드리블도 잘하고 슛도 잘 넣다 보니 점수를 많이 따서 공을 받을 때가 많아요. 근데 패스 받을 때마다 선배가 저를 믿는 게 너무 잘 느껴져서 심장이 막 쿵쾅거려요. 처음엔 경기 뛸 때만 그랬는데 이젠 평소에도 그 선배만 보면 두근거려요... 부정맥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래요. 누가 절 믿는 게 좋아서 이런 건가요? 존경하면 이럴 수도 있는 건가요?? 내공냠냠 신고해요
A. 팀은 원래 동료를 믿어 X신아 자세히 못 적겠다더니 구구절절 다 적노
A. 얘들아 우리 반 게이가 할 말 있대 다들 집중해주자!
게이? 우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농구에 미쳐 살아온 정우성이라지만, 게이가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동성을 좋아하는 남자. 그게 나라고? 내가 게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명헌이 형을, 좋아한다고? 에이, 말도 안 돼. 우성이 코웃음 쳤다. 내가 어떻게 게이야. 난 명헌이 형이랑 손 잡고 싶은 적도 없고, 안고 싶은 적도 없고, 키스하고 싶은 적도 없는데. 좋아한다는 건 그런 거잖아. 역시 인터넷 세상은 믿을 게 못 됐다. 우성이 뒤로 가기를 눌러 네이버 어플을 나왔다.
그리고 3초 뒤 다시 들어갔다. 다시 생각해보니 손도 잡고 싶었고 안고 싶었고 키스도 하고 싶었다. 나 게이인가 봐. 엄마 어떡해. 정우성은 그렇게 첫사랑을 자각했다.
세상에는 숨길 수 없는 것이 있다. 예시를 들자면 사랑과 재채기, 개강을 앞둔 대학생 등이 있겠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 사랑. 우성은 처음 겪는 감정에 흠뻑 젖어 들었다. 한 번 깨닫고 나니 주체할 수가 없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설레고, 발을 디딜 때마다 벅찼다.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이명헌의 모사품이었고, 세상 모든 추한 것들이 이명헌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었다. 명헌과 관련된 것을 보면 어김없이 그가 떠올랐다. 명란젓을 봐도 명헌이 떠올랐고, 한교동 인형을 봐도 명헌이 떠올랐고, 급기야 빡빡머리만 봐도 명헌이 떠올랐다. 산왕공고 농구부는 빡빡이 투성이였으니 24/7 명헌을 생각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커지자, 우성은 고백을 결심했다.
형. 좋아해요.
체육관 뒤뜰로 명헌을 불러낸 우성이 쑥스러운 척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실은 내심 자신이 있었다. 우성은 키가 크고 몸이 좋은데다 얼굴도 눈에 띄게 잘생긴 편이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가끔 야시시한 눈빛을 보내곤 했으니 나름 근거 있는 자뻑이었다.
하지만 명헌의 대답은 칼 같았다.
미안 뿅.
그럼 난 이만. 우성이 거절과 동시에 돌아서는 명헌을 붙잡았다. 이렇게까지 단번에 차일 줄은 몰랐는데. 전개가 너무 빨라서 당황스러웠다. 왜요?! 이유라도 알려주세요! 이미 차였는데 알아서 뭐 하게 뿅. 왜, 왜 제가 싫은지 알면 제가 고쳐올 수도 있잖아요! 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어요! 명헌이 고개를 저었다.
난 연상이 좋아 뿅.
오…. 방금 우성이 마음 먹어도 못하는 것 리스트가 추가됐다. 참고로 기존 항목은 키즈 모델이다. 우성이 입을 떡 벌린 채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수도꼭지처럼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명헌이 "그쳐 뿅."하고 달랬다. 하지만 본디 우는 사람이란 누가 달래주면 더 서러워지는 법이었다.
결국 명헌은 우성의 실패한 첫사랑으로 남았다. 딱히 아름답진 않지만 나름 즐거운 추억이었다. 비록 때때로 그 시절이 몸서리치게 그립지만. 가끔 그때가 꿈에 나오지만. 아버지에게 좀 일찍 낳지 그랬냐고 투정도 부렸지만. 뭐 이젠 다 지난 과거였다. 우성은 이제 명헌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미국으로 떠난 뒤 명헌이 어느 대학에 갔는지, 그 좋다는 연상의 애인은 사귀었는지, 내 생각을 하진 않았는지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진짜. 정말로. 스틱스강에 맹세하고. 그치만 솔직히 한국에 돌아갔을 때, 자신을 마중 나온 명헌의 옆에 연상 여친이 있다면… 조금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명헌은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은 채로 죽었다. 명헌의 영정 사진 앞에서 애인을 소개받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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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헌은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 이른 새벽 러닝을 하던 도중, 음주운전으로 추정되는 차가 그를 밟고 지나갔다. 마침 출근 중이던 편의점 알바생이 빠르게 신고했고, 명헌은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지만 결국 세상을 떠났다. 에이전시와 재계약을 미루고 휴식을 위해 귀국한 우성은 한국 땅을 밟자마자 소식을 들었다. 그날 이후 장례식장에 도착하기까지 기억이 없다. 누가 우성에게 소식을 전했는지, 무슨 정신으로 내비게이션에 장례식장 주소를 검색했는지, 방명록에 어떻게 제 이름을 적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얼굴을 보지 않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정우성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명헌은 그런 사람이니까. 형은 내게 그런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 죽었다는 남자는 현재 투명도를 낮추고 우성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실에 우성이 자꾸만 옆을 힐끔거렸다. 무심코 라디오 버튼을 누르려던 손이 기체를 통과한 후, 명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벌써 밤 11시. 한국인에게 밤 11시는 오후 5시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느껴졌으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밴 착한 농구선수 정우성에겐 이부자리를 깔 시간이었다. 우성이 명헌에게 물었다.
그…이불 깔아드릴까요?
됐어 뿅….
명헌의 말에 따르면, 귀신은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한다. 하긴 뭐 죽었으니까. 수면으로 기운을 보충할 일이 없지. 하지만 우성은 꿋꿋하게 이불을 깔았다. 불을 끌 땐 "안녕히 주무세요."하고 인사했다.
그렇게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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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정신 병원에 가야겠다. 명헌을 집에 들이고 다음날 개운하게 일어나 든 생각이다. 그러나 며칠 뒤, 우성은 그 생각을 깔끔하게 지웠다. 그도 그럴 것이, 명헌은 귀신일 뿐 생전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괜히 그를 위협하지도 않았고, 범인을 찾아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하다못해 가족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다. 명헌은 그저 존재하였다. 우성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상황이 이래서 같이 있을 뿐, 우성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점까지 완벽한 이명헌 그 자체였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성은 머리에 꽃밭을 키웠다. 비록 귀신이긴 하지만 룸메이트가 생긴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왔냐(뿅)고 인사해주는 목소리가 있다. 영화에서 귀신이 나오면 고증 잘못됐다고 시비도 털어준다. 세수하다 고개를 들면 거울에서 튀어나오는 장난도 친다(우성은 거품 물고 기절했다). 미국에서도 계속 혼자 살았던 우성은 어쩐지 들떴다.
동거 생활이 길어지면서 발견한 점이 몇 개 있는데, 첫 번째는 명헌이 거주지를 나서면 다시 들어올 때마다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동 로그인이 보편화된 현대인에겐 굉장한 불편이었다. 덕분에 가끔 혼자 산책을 하러 나가던 명헌은 점점 집안에 고립되었고, 이를 안쓰럽게 여긴 정우성은 아이패드와 넷플릭스를 결제해주었다. 돈 낭비 뿅. 형 때문에 산 건데 사람이면 고맙다고 해야죠. 그렇긴 했다. 하지만 명헌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냥 듣고 씹었다.
두 번째는 명헌이 사소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존나 기를 쓰면 전자 기기에 터치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영화처럼 의자를 흔들거나, 그릇을 깨지는 못했지만 명헌은 불만이 없었다. 유튜브 광고 넘기기에 유용했기 때문이다. 이거마저 없었으면 뭔 10분짜리 정력제 광고 이딴 거 봐야 했을 텐데, 그거 피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명헌은 긍정적인 편이었다.
형, 궁금한 게 있는데요. 어떻게 귀신이 되신 거예요? 죽은 사람이 다 귀신이 되면 귀신이 세계를 제패했을 텐데, 그렇지도 않잖아요. 뭔가 기준이 있다는 건데.
몰라 뿅. 눈 떠보니 이 상태 뿅.
영화에선 미련 있는 애들이 귀신이 되던데. 형도 미련 있어요?
…농구? 빼곤 딱히 뿅.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근데 형은 왜 저한테만 보일까요?
글쎄. 모르겠다 뿅.
그으,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혹시요.
제가 전에 형한테 고백했던 게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이랑 차이점은 그거밖에 없잖아요. 우성이 민망해하며 말했다. 아무리 지난 일이라지만 조금 쑥스러웠다.
명헌이 시선을 위로 올렸다. 우성은 저 표정을 안다. 잘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끄집어내는 얼굴. 우성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됐어요. 아닌가 보네. 목소리에 섭섭함이 가득했다. 다시 시선을 내린 명헌이 무심하게 우성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가 고백하고 나서, 형이 나 계속 챙겨줬잖아요. 그래서 결국엔 나랑 사귀어줄 줄 알았는데.
연하의 존나 당돌한 발언. 명헌은 무표정으로 디펜스했다.
우니까 뿅.
저 그때보다 더 운 적 많은데요? 북산전에서 졌을 땐 안 챙겨줬으면서.
나 때문에 우니까 뿅.
형 때문에 울면 신경 써줘요?
우성이 틱틱댔다. 명헌이 차분하게 말했다. 우성. 사람은 보통 남이 우는 이유가 본인 때문이면 신경 쓰여 뿅. 뭐 그렇긴 하지만요…. 우성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들었다. 그래서였구나. 형은 진짜 나를 좋아하지 않았구나. 벌써 몇 년 전 일인데도 "미안 뿅."하는 목소리가 생생한 탓인지 심장이 조여왔다.
묘하게 불편해진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우성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근데 저 궁금한 거 있어요.
말해 뿅.
형도 공중에 뜰 수 있어요? 막, 영화 보면 귀신들이 거꾸로 뒤집혀 있기도 하고. 벽에 붙어 있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몰라 뿅. 안 해 봐서.
해보고 싶지 않아요?
ㅇㅇ…. 명헌이 눈빛으로 말했다. 우성이 급속도로 시무룩해졌다. 아, 공중 부양…. 공중 부양 안 하나? 공중 부양 진짜 재밌을 것 같은데…. 수동적으로 요구하고 있어…. 무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명헌이 결국 바닥에서 몸을 띄웠다.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아 양반다리 자세를 취했다. 중력의 영향을 거꾸로 받는 사람처럼 천장에 앉는다. 그러자 서 있는 정우성과 눈높이가 딱 맞았다. 와, 형 맨날 바닥에 붙어 있어서 몰랐는데 귀신 맞네요. 이딴 이야기나 할 줄 알았던 정우성은 의외로 조용했다. 명헌이 웬일이냐는 듯 눈썹을 올렸다.
한편, 우성은 완전히 다른 생각에 빠져 말을 꺼낼 정신이 없었다. 목울대가 상하로 왕복했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까 긴장됐다. 아, 이게 다 마블 탓이다. 이 무드 없는 상황에 스파이더맨의 명장면을 떠올리다니. 반응이 없자 명헌이 다시 백 팔십도 돌아 바닥에 안착했다. 피 쏠려서 어지럽다 뿅. 피 없잖아요. 느낌 뿅. 명헌의 얼굴을 쳐다보기 힘들었다. 우성이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명헌의 반투명한 발이 바닥을 디디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반쯤 잠겨있었다.
그날 밤 꿈을 꿨다. 명헌이 나왔다. 이 나이에 몽정을 했다.
목 뒤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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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빡센 하루 시작.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음에 우성이 눈을 떴다. 비몽사몽하게 눈을 깜빡이는데 명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각이다 뿅. 몇 신데요? 5시 43분. 헐. 우성이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약속 시간이 오전 7시인데 집에서 약속 장소까지 1시간 반 걸린다. 하지만 우성은 지금 일어났고 약속 상대는 신현철이다. 쉽게 말해 좆됐다는 뜻이다. 아 형 좀 깨워주시지!! 화장실에서 우성의 비명이 들려왔다. 명헌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손가락에 기를 모아 더 글로리를 재생했다.
형 저 다녀올게요!
우성이 황급히 집을 나섰다. 오늘은 신현철, 신현필, 최동오, 김낙수 등 산왕공고 시절 (세미) 주전 멤버가 다 모이는 날이었다. 산왕공고에는 여전히 도 감독이 근무 중이었는데, 이번 인터하이를 대비해 현 농구부 주전 멤버들과 연습 경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신현철은 흔쾌히 수락하고 동기와 후배들에게 문자를 돌렸다. 나잇값 하러 와라. 넵.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등 떠밀렸다는 듯이 가지만, 사실 후배들을 도울 생각에 하나같이 들뜬 상태였다. 우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산왕공고로 출발하는 분위기가 마냥 밝지만은 않았는데, 다들 아닌 척하며 우성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자리에 모인 모두가 명헌의 장례식장에 참석했었다. 그날의 정우성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귀국하자마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와서 내내 눈물만 흘리더니, 갑자기 신현철에게 뺨을 때려달라고 부탁했다. 심지어 이명헌이 보인다는 헛소리까지. 그럴 자리가 아닌데도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통에 신현철도 훼까닥 눈이 돌았고, 그 결과 우성은 기절했다. 아무리 자업자득이라지만 현철은 뒤늦게 후회했다. 명헌을 제일 따르던 놈인데, 얼마나 속이 말이 아니면 그랬겠나. 현철도 다른 멤버들처럼 내심 우성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우성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단순히 아무렇지도 않은 정도가 아니라, 과하게 괜찮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이명헌의 넷플릭스 내가 찜한 컨텐츠 란을 보고 시비를 걸고 온 참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본 명헌은 먹는 것이나 잠자리나 가리는 것이 없어 까다롭지 않은 성격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컨텐츠를 고르는 취향은 확실했다.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도 취향이 아니다 싶으면 가차 없이 뒤로 가기를 눌렀다. 그런 주제에 막상 시청 기록을 보면 대체 뭘 좋아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 <미드소마>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공통점이 뭔데. 심지어 둘 다 우성이 즐기는 종류가 아니었다. 덕분에 둘은 함께 영화나 드라마를 고를 때 자주 투닥투닥했다.
가끔은 함께 외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명헌이 러닝을 하러 가자고 제안하거나 우성이 장을 보러 나갈 때 나란히 집을 나섰다. 특히 장을 볼 때 명헌은 편식하지 말라고 잔소리했다. 우성, 넌 미국 농구계에서 작은 편 뿅. 편식을 안 해야 키 큰다 뿅. 저 성인이고 형보단 큰데…. 알겠어요…. 우성이 눈물을 머금고 레토르트 식품을 장바구니에서 빼냈다. 송태섭도 잘만 하던데…. 하고 투덜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계산을 마치고, 기왕 나온 김에 둘은 이용해 본 적 없는 더 먼 길로 집에 가보기로 했다. 에어팟을 귀에 끼우고 전화하는 척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던 도중, 아파트 단지 옆에 있는 농구 코트를 발견했다. 명헌이 멍하니 코트를 바라봤다. 생전 뛰었던 코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열악한 곳이었지만 코트는 코트였다. 언젠가 그가 점령했던 대지.
시선을 눈치챈 우성이 제안했다. 형, 농구 한 판 할래요? 명헌이 드물게 대답을 망설였다. 아니.
어차피 공 못 든다 뿅.
할 수 있는데요? 자유투 내기하면 되죠. 형이 자세를 잡으면, 제가 같은 폼으로 던질게요. 누구 자세가 더 좋은가 테스트해봐요.
명헌이 우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에 어떻게든,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러났다. 공도 없는데 뿅. 집에서 공 가져올게요! 하는 거죠? 하는 거 맞죠? 저 갔다 올게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결국 우성은 집까지 뛰어가 공을 가져왔다. 각자 3점 슛 거리에서 10번을 던졌는데, 명헌은 24점이고 우성은 30점이었다.
어때요? 저 잘하죠? 미국 가서 더 늘었어요! 우성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뭐가 우스웠는지 명헌이 고개를 늘어뜨리며 따라 웃었다. 명헌의 그런 웃음소리는 처음 들었다.
그날을 떠올리니 우성의 입가에 또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아. 명헌이 형 보고 싶다. 오늘 경기 끝나면 바로 집에 가야지.
신현철이 부정적인 감정이라곤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우성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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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OB의 승리였다. 아무리 최강 산왕의 현 주전이라고 해도, 한창 전성기인 데다 미국과 대학에서 활약 중인 그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일렬로 선 농구부원들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후배들 실력도 보고, 경기도 재밌었고. 보람찬 하루였다. 눈여겨본 선수에게 다가가 개인 피드백까지 남긴 최동오도 뽕이 찼는지, 내친 김에 단체 술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현철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우성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난 이 녀석이랑 할 말이 있어서.
네? 저요?
전 없는데요? 우성의 얼굴이 진실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 명헌이 형한테 5시까지 집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나도 빨리 가고 싶은데. 하지만 최동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순순히 물러났다. 얘기 잘 하고 가라며 어깨까지 두드려줬다. 이렇게 되면 우성이 거절하기 굉장히 힘들어진다. 그가 현철의 눈치를 샐금샐금 보았다.
결국 우성은 현철의 손에 이끌려 무한 리필 소고깃집에 오고야 말았다. 그가 처량한 얼굴로 집게를 들었다. 치익-하는 고기 불판 소리가 들리자 기다렸다는 듯 현철이 말문을 텄다.
너 요새 무슨 일 있지?
아뇨? 그런 거 없는데요.
우성이 무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런 얼굴이면 시체 앞에서 칼을 들고 있어도 무죄로 보겠다. 하지만 현철이 누구인가. 이명헌의 무표정에서 50가지 감정을 구별하는 남자였다. 그가 코웃음 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나한테 거짓말할 생각 마라. 내가 전에 말했었지? 넌 표정을 못 숨긴다고. 다 티가 나. 건방지게 선배에게 거짓말하지 말고, 말하랄 때 말해.
우성이 울상을 지었다. 이미 말했었는데. 믿어주지도 않았으면서. 그리고 믿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입이 댓 발 나왔다. 현철이 대체 왜 이런 걸 묻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오늘 경기를 못한 것도 아니고. 죽을상 쓰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 오늘 잘 웃고 얘기도 잘 하지 않았나? 의도가 뭐지? 마음 같아선 대충 둘러댄 뒤, 거짓말한다고 처맞고 그대로 기절해서 집에 가고 싶었다. 아니면 에이전시 재계약 얘기로 그럴듯하게 말을 돌리든가.
하지만 우성은 문득 명헌을 떠올렸다. 지금도 집에서 혼자 있을 텐데. 형이 우리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지? 한 달쯤 됐나? 우성이야 오늘처럼 간간이 약속을 잡고 놀러 다녔지만, 명헌은 그 긴 시간 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정우성밖에 없었다. 집 밖에 잘 나가지도 못하는 신세니 상당히 외로울 것이다. 명헌이 형은 실내보다 실외를 좋아하고, 농구부였던 만큼 단체 생활에 익숙한 사람인데. 대화 상대가 나밖에 없다니. 한 번 의식하고 나니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내가 현철이 형을 설득해서 명헌이 형의 존재를 믿어준다면, 기뻐하지 않을까? 직접 대화하진 못하지만 내가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해주면 되잖아. 즉흥적인 생각이었으나 나쁘지 않은 계획 같았다. 두 번 더 고민해도 같은 결론이 나오자 우성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사실은요, 그게….
장례식장에서부터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은 현철이 얼굴을 구겼다. 너…. 네. 미쳤나 봐요. 전 미쳤어요. 저 또라이예요. 우성이 미리 자학으로 방어했다. 알면 됐다고 할 줄 알았냐 미친놈아?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우성이 시무룩해졌다.
기가 막힌 듯 입을 열었다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닫았다가, 다시 여는 행위를 반복하던 현철이 한숨 쉬었다.
그때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 진심이었냐?
네. 진짜예요. 저도 못 믿었어요. 그래서 때려달라고 했던 거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들리는 거라곤 고기 굽는 소리뿐. 우성은 또 헛소리하지 말라고 뺨 맞고 기절하게 될까 봐 눈치를 봤다.
다행히 현철은 손을 들지 않았다. 대신 진지하게 질문했다. 그래서 그게 너희 집에 있다고? 명헌이 형이요. 그래, 이명헌 귀신이. 네. 그리고 또 정적. 우성이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자신이 대체 무슨 속 터지는 소리를 하는 건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런 거라도 해야 매를 덜 수 있다.
곧바로 제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섭섭하진 않았다. 자신도 신현필이 이런 말을 한다면 미쳤다고 할 테니까. 정말 소주가 땡긴다는 얼굴로 푹푹 한숨을 쉬던 현철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럼 이거 먹고 너희 집으로 가보자.
형! 믿어주시는 거예요?
아니. 없으면 너 내 손으로 정신병원에 넣어주려고. 너 같은 놈은 누가 잡아다 넣기도 힘들지 않겠냐. 나 아니면 현필이나 가능하지.
진짜라니깐요. 우와, 형. 복 받으실 거예요.
사이비 같은 소리 하지 마!
와, 진짜 믿어주실 줄은 몰랐는데! 기대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우성은 현철과 명헌이 만나는 그림을 상상해보았다. 둘만 알 법한, 1학년 때 얘기를 해보라고 하자. 우성이 그때 일을 알 리 없으니 현철은 납득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최동오나 김낙수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우성은 기분이 좋아졌다. 낙관적인 이야기지만,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이명헌은 덜 외로워질 것이다. 적어도 그때 코트를 보던 눈빛을 다시 보지 않게 되겠지. 그리고 자주 웃어줄지도 몰라. 우성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나도 있고, 현철이 형도 있고, 동오 형도 있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실상 부활과 다름 없지 않나? 인간의 생존을 증명하는 것은 결국 타인이니 말이다. 우성이 무심코 생각했다.
너그러워진 우성이 고기를 현철 쪽으로 밀어주었다. 형 이거 다 드세요. 전 형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를 것 같아요. 그럼 지금까지 구운 게 다 니 입으로 들어갔는데 배가 부르겠지. 욕을 먹어도 즐거웠다. 차에 현철을 태우고 돌아가는 길엔 콧노래까지 나왔다. 현철이 복잡한 얼굴로 우성을 노려보았다.
현철이 형을 데려온 걸 보면 어떤 반응을 할까? 일단 놀라겠지. 반가워 할 거야. 좋아할 거고. 얘기가 길어지겠지? 이따 술이라도 사 올까? 마치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 같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한 우성이 기세 좋게 문을 열었다.
명헌이 형! 형 어디 있어요?
요새 우성이 집에 들어오면 들리는 소리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왔냐 뿅. 하는 명헌의 목소리. 두 번째는 더 글로리 송혜교 목소리.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첫발을 디디는 순간, 오싹한 기운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불안을 감지한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들리지 않는다. 아무런 소리도.
형?
우성이 눈을 깜빡거렸다. 집안에 들어서는 발걸음이 느리다. 그가 명헌을 찾아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거실. 침실. 손님방. 부엌. 화장실. 베란다. 세탁실. 드레스 룸. 다용도 실. 문을 열 때마다 명헌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우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오늘 아침에도 인사하고 나갔는데.
형! 명헌이 형? 우성이 현철을 의식해 멀쩡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어디 계시냐? 이명헌 귀신은. 대답해야 한다는 걸 안다. 현철이 그를 미심쩍게 보고 있다는 것도. 태연한 척 변명을 뱉을 타이밍이란 것도. 안다. 아는데.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제발. 제발. 형, 이제 장난 그만치고 나와요. 형이 좋아할 것 같아서 현철이 형 데려왔다고요. 우성이 애매하게 걸쳤던 웃음기가 끝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명헌은 없었다.
이명헌이 없다.
심장이 뚝 떨어졌다. 우성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형. 명헌이 형. 목소리가 허공을 방황했다. 없다. 없다. 없다. 정말로. 사실을 인정하자 세상이 꺼멓게 죽었다. 우성이 비틀거리다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 사이 현철은 집안 곳곳에 쳐진 커튼을 보고 기가 찬 웃음을 뱉었다.
야. 다시 한번 우성을 부르려던 현철이 멈칫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우성이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금세 피가 맺혔다. 우성의 손가락이 소파 가죽을 긁는 소리가 요란했다.
…….
현철은 어느덧 몇 달이 지난 장례식장에서의 우성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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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철이 돌아가고 나서도 우성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생각할 공간이 생기면 여지없이 이명헌이 자리를 차지했다. 명헌이 형. 명헌이 형. 명헌이 형. 어디로 갔지? 우성이 손톱을 입에 물었다. 딱딱 소리가 났다. 사라졌나? 성불했나? 내가 없는 사이에? 거짓말. 그럼 왜 나한테만 보였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야.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는데. 즐겁게 시간을 보냈는데. 남에게 증명하려고 하니 갑자기 싹 사라져버리면, 그러면, 이렇게 되면,
이건,
정말,
내가,
정신병에 걸린 것 같잖아.
문득 벽과 바닥이 자신을 향해 좁혀지는 것 같아 우성은 이불 속에 숨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가 정신병에 걸린 건가? 정말로? 자신이 정신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보다, 이명헌이 가짜였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이대로 형을 다시 볼 수 없는 건가? 왜? 내가 정신병에 걸렸다면 계속 보여야 하는 거잖아. 현철이 형이 의사도 아닌데 집에 좀 들였다고 병이 나을 리가 없잖아. 속이 답답했다. 목이 메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 이상해. 나 이상해. 나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
혼자 있기 싫어….
그 순간 우성이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겉옷도 챙겨입지 않고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집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공포가 몰려왔다.
도망치듯 뛰쳐나가려는데, 우성은 문을 열자마자 멈춰서고 말았다. 이명헌이 거기에 있었다. 너무나 멀쩡한 목소리로, 우성을 향해 말한다.
집에 있었네 뿅.
우성은 현기증을 느꼈다.
왜 여기 있어요?! 이 추운데!
어차피 추위도 못 느낀다 뿅. 온다고 했던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오길래 잠깐 나갔다 왔다 뿅. 근데 오는 길에 신현철이 보여서 잠깐…. 뿅.
명헌이 말을 멈추었다. 우성의 눈에서 또 눈물이 뚝뚝 떨어진 탓이다. 어떻게 저렇게 잘 우는지 신기할 노릇이었다. 눈물 그쳐. 가오 없다 뿅. 전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손톱은 또 왜 이래 뿅? 아…. 물어뜯었던 손톱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날 우성은 꿈을 꿨다. 살아있는 이명헌이 제 위로 올라왔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우성의 목을 조른다. 우성은 반항하지 않았다. 숨이 막혀 기침이 터져 나와도. 침과 눈물이 질질 흘러도. 오히려 팔을 뻗어 명헌을 끌어안았다.
우성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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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은 외출을 줄였다. 아침마다 하던 러닝도 그만뒀다. 장을 봐야 할 때는 배민 어플을 켰다. 형 진짜 세상 좋아진 것 같아요. 집안에서 별 게 다 해결이 되네요. 새삼스럽게 인터넷 주문의 편리함을 깨달았는지,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던 우성은 어느 날 애플 워치를 샀다. 포장을 뜯고 기기를 작동시킨 뒤 명헌에게 내밀었다. 형, 이거 형 거예요. 필요 없다 뿅. 아니, 이거 보세요. 이걸로 문자도 보낼 수 있어요. 필요할 때 이걸로 나한테 문자 보내면 되잖아요. 명헌이 애플 워치를 응시했다.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우성.
네?
앞으로 나갈 때 얘기하고 갈 테니까 환불해라 뿅. 필요 없다 뿅.
아, 그날 일 때문에 그런 거 아닌데요? 그냥 있으면 편리할 것 같아서 산 거예요.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괜찮아요 저 돈 많아요. 연봉 많이 올랐거든요. 글구 전에 사드렸던 아이패드가 더 비싼 건데.
열심히 변명해보았지만 명헌은 여전히 뚱했다. 애플워치는 처음에만 조금 작동시켜 보는 것 같더니 이후에는 쳐다도 안 봤다. 그래도 우성은 틈틈이 배터리를 확인하고 늘 100%로 충전했다.
후배가 히키코모리화 되는 꼴은 못 보겠는지, 명헌은 나름 우성을 어르고 달래어 집에서 쫓아내려고 했다. 약속 없어 뿅? 네. 저 왕따 당해서 친구도 없고 약속도 없어요. 러닝 안 가 뿅? 안 그래도 스위치 시켰어요. 내일 배송 예정이래요. 좀 나가 뿅. 얼굴 계속 보니까 지겹다 뿅. 네에? 제 얼굴 자세히 보세요. 쉽게 질릴 수가 없는 얼굴인데. 그보다 형, 오늘 무도 연속 재방한다는데 볼래요? 우성은 완강했다. 그가 저렇게 나오면 방법이 없었다. 몸만 있어도 패서 내쫓았을 텐데. 아무리 발로 차려고 해도 그저 우성을 통과할 뿐이다. 명헌이 입술을 깨물었다.
우성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형, 저 형을 만져보고 싶어요. 현실성이 없고(-100) 변태 같고(-300) 기분 나쁜(-14994) 도합 -15394점의 발언. 명헌이 단칼에 잘라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뿅. 아니, 제가 다 생각이 있어요. 들어보세요. 우성은 베개를 명헌 삼아 만져보고 싶다고 했다. 아오노 군에게 닿고 싶으니까…. 뭐? 암튼 무슨 일본 만화에서 나온 내용이라고 했다. 우성은 명헌이 있는 자리에 베개를 세웠다. 베개를 통과한 명헌의 얼굴 일부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미친 이게 대체 뭐지…. 그 만화가 뭔지는 몰라도 존나 이상한 내용이라는 건 알겠다. 명헌은 당장이라도 "이거존나이상하고너도존나이상하다뿅" 하고 말하고 싶어졌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하지만 우성은 들어처먹지를 않았다.
우성이 손을 들어 명헌의 얼굴 부분에 갖다 댔다. 실제 인간의 피부와는 전혀 다른, 거칠고 온기 없는 베개의 감촉. 그런데도 보이는 게 명헌의 얼굴이니 착각하게 됐다. 정말 명헌을 만지는 것 같았다. 손가락을 명헌의 입술 부분으로 내리며 중얼거렸다. 진짜 같다…. 명헌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우성. 미국에 안 돌아가 뿅?
아…. 그거 좀 미루려고요.
왜?
그냥 한국에 있으니까 좋네요. 나 향수병이 있었나?
딱히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말로 내뱉고 보니 정말 향수병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이곳을 떠나면 괴로울 것 같았다. 그걸 감수하고 미국에 가야 할까? 또 돌아오고 싶어질 것 같은데? 당장 이 집에서조차 나가고 싶지 않은데? 세계로 뻗어나가던 그의 세상이 순식간에 방 한 칸으로 좁아졌다. 부피를 줄인 세상은 지루할지언정 평화로웠으므로,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여차하면 한국에서 활동해도 재밌을 것 같은데요.
미간을 팍 찌푸린 명헌이 무언가 얘기하려 했다. 하지만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멈췄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몇 마디로 우성을 꾸짖는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는 넘은 지 한참 됐다. 재난은 반드시 전조 증상을 앞세운다. 여기까지 오기 전, 알아차릴 수 있는 전조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알아채지 못했다. 혹은 알더라도 모른 척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명헌이 우성을 바라봤다. 눈에 생기가 없었다. 살아있지 않은 사람처럼. 정작 죽은 건 나인데.
어느 날 우성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영화에선 미련 있는 애들이 귀신이 되던데. 형도 미련 있어요?
명헌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투명한 손 아래 바닥이 훤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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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해라 오전 8시 14분
현철이 보낸 문자였다. 우성은 무시했다.
뭐하고 살아 오후 4시 28분
이번엔 최동오였다. 이 역시 씹었다.
안녕하세요, 우성이 형! 저번에 산왕공고 갔을 때 너무 즐거웠어요 혹시 시간 되시면 또... 오전 11시 43분
신현필.
야 오후 12시 2분
김낙수.
심지어는 도 감독까지. 우성은 조금 피곤해졌다.
벌써 여섯 번째 전화음이 울렸다. 한 번도 받지 않았는데 끈질기다. 정우성은 평온한 얼굴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세면대 구멍을 막고 물을 틀었다. 점점 차오르는 수면의 높이를 응시하다가, 아까부터 진동하는 핸드폰을 빠뜨렸다. 퐁당, 맑은 소리를 내며 가라앉는다. 요새는 깊은 바닷속에서도 30분은 버틴다던데. 세면대에선 얼마나 둬야 침수가 될까?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어쩐지 안정감을 준다. 우성이 멍하니 물에 잠긴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신현철의 이름이 보였다. 10분쯤 지나자 진동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사위가 고요했다. 마침내 그의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았다.
우성은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하지만 눈을 뜨고 감는 것을 의미 없이 반복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되어서도 늘어져라 누워있는 남자는 문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반응이 없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끊기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우성, 10초 준다. 그 안에 안 열면 문 부술 거니까 그렇게 알아. 10. 익숙한 목소린데. 누구더라. 9. 우성이 기억을 더듬었다. 이렇게 힘들게 떠올릴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 명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8. 그의 발걸음이 현관으로 향한다. 7. 우성이 번개처럼 일어나 명헌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6. 어디 가게요? 말하고 간다면서요. 5. 신현철 목소리라 구경 뿅. 문 열라는데 뿅. 4. 제가 먼저 보고 올게요. 그래도 되죠? 3. 나오지 말고 집에 있어 줘요. 제발요. 2. 그러든가 뿅. 1.
0.
우성이 문을 열었다. 현철이 손에 든 망치를 떨어뜨리고 멱살을 잡았다.
너 진짜 죽고 싶냐?!
잠깐만요, 나가서 얘기해요. 나가서….
미친 새끼. 그 난리를 피워놓고 연락도 끊어? 네가 제정신이야?
아, 좀 나가서 얘기하자고요!
명헌이 형이 현철이 형 보겠다고 나오면 어떡하지? 그랬다가 현철이 형 집에서 살겠다고 가버리면 어떡해. 그래서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해. 마음이 불안했다. 현철을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었다. 우성이 현철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현철이 제 손과 우성을 황당한 얼굴로 번갈아보았다.
결국 대화는 아파트를 벗어난 뒤에야 할 수 있었다. 빨리 해요. 저 추워서 덜덜 떨리거든요. 참나. 현철이 비웃었다. 한겨울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운동장 50바퀴를 돌아도 감기 한 번 안 걸렸던 녀석이 꼴값 떨고 있다. 대체 얼마나 정신이 나갔으면 이러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야. 난 긴 말 안 한다. 너 뭐, 그 귀신 집에 들인 거 그만둬라. 이제 나가라고 해.
그냥 귀신이 아니라 명헌이 형이에요.
그래. 이명헌 꺼지라고 하라고. 죽은 사람 집에 묶어둬서 뭐 할래?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명헌이 형이에요. 이명헌이요. 형 친구요! 산왕 주장!!
씨발. 그러니까 말하는 거 아니야!
현철이 소리 질렀다. 말투가 짓궂긴 해도 이런 식으로 욕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놀란 우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만 벙긋했다. 그 얼굴이 몇 년 전 고등학생 시절과 똑같았다. 현철이 한숨을 삼켰다. 귀신인지 정신병인지 상대 한 번 잘 골랐네. 말 몇 마디에 깜짝 놀라는 어린애를…. 이를 깍 깨물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현철은 인내에 성공했다.
너 그거 아냐? 귀신은 바닥에 발을 못 딛는다더라.
…….
왜 그런 줄 알아? 땅에 발 붙이고 있으면 살아있는 거거든. 걔가 잘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 그런 척하는 거야. 귀신은 운동장에 있나 건물 위에 있나 둘 다 허공이야. 형체도 없는 게 어떻게 땅을 밟아. 발로 지탱하는 것 같고 길도 걷고 있는 것 같고 해도 그냥 살아있을 때 그랬으니까 습관처럼 다리 움직이는 거야. 겉보기엔 서 있는 꼴 똑같다고 해도, 달라.
아니에요.
들어가서 확인해보든가.
무작정 부정했지만 우성도 어느 날을 떠올렸다. 명헌이 제 투정에 못 이겨 허공에 떴던 날. 우성이 명헌과의 입맞춤을 상상했던 날.
자세를 풀고 돌아왔을 때, 바닥에 잠겨 있던 발.
심장이 철렁했다. 우성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했다.
죽었으면 그게 어때서요? 땅을 못 밟으면 그게 뭐요? 그래도 명헌이 형은 명헌이 형이에요. 저는, 상관 없….
네가 바보긴 해도 멍청하진 않았는데. 내가 사람 잘못 본 거냐?
…….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아. 그 보인다는 게 진짜 이명헌인지는 몰라도, 네가 이 꼴이 된 걸 보면 뭐가 있긴 있나 보지. 보이니까 착각하고 있는 거야. 이명헌이 살아있다고.
현철의 목소리에선 절박함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우성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명헌이 죽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자신 아니던가? 반투명한 손을 볼 때마다 느끼는데. 형을 안고 싶을 때마다 느끼는데. 입 맞추고 싶을 때마다 느끼는데. 나는….
현철이 잠시 머뭇거렸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그가 결국 말을 뱉었다.
그리고… 그게 진짜 이명헌이 맞다면. 명헌이 잘 보내줘라.
현철은 우성이 최신 기종 핸드폰을 개통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돌아갔다.
-
형. 회귀가 뭔지 알아요? 어딘가로 되돌아간다는 건데요, 이게 요새는 드라마나 소설 소재로 많이 쓰인대요. 특정 시간대로 돌아가는 거죠. 저도 안 봐서 모르는데, 흠. 망한 주식에 투자하기 전이나, 말실수를 하기 전이나, 우리 같은 경우엔 패한 경기를 하기 전이나…. 그런 식으로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시간으로 돌아가는 개념인 것 같아요. 저는 돌아갈 수 있다면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딱히 되돌리고 싶은 선택 같은 건 없는데, 그냥 그때가 즐거웠던 것 같아서요. 형은 어때요?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역시 그날 새벽 전이려나. 근데 회귀가요, 아무 때나 되는 게 아니라 죽어야 된대요. 발동 조건이 극단적이죠. 원래 저는 그럼 안 하겠다고 했었거든요. 죽어서까지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없어서요. 근데 요즘은 좀 달라요.
…….
나는…. 지금이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
우성.
네.
그만 뿅.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
안녕히 주무세요. 우성이 순순히 불을 껐다. 그러나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신현철이 왔다 간 뒤로 우성은 불면에 시달렸다. 늘 속이 답답하고 울렁거렸다. 감각이 불쾌할 정도로 생생했다. 우성이 계속해서 자세를 바꾸자, 그를 눈여겨보던 명헌이 말했다.
아무래도 나갔다 와야겠다 뿅.
우성이 잠기운 없는 눈으로 벌떡 일어났다.
네?! 지금요? 어딜요?
전에 네가 말했었잖아 뿅. 귀신은 미련이 있다고. 내가 무슨 미련이 있었던 건지 알아야겠다 뿅.
아아…. 그럼 내일 같이 출발해요.
아니, 나 혼자 뿅.
……. 어딜 가려고요?
모르겠어. 아무 데나 뿅.
우성이 이불을 꽉 쥐고 명헌을 노려보았다. 명헌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 그 얼굴. 그 얼굴만 보면 무슨 말을 못하겠다. 내일… 내일 얘기해요. 저 지금 피곤해서 무슨 얘기하는지도 모르겠거든요. 알잖아 뿅. 몰라요. 어차피 못 자잖아 뿅. 아니거든요? 방금 막 잠드려는 거 형이 깨운 거거든요? 암튼 저 잘 거니까 이제 말 걸지 마세요. 우성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보였다.
몇 시간이 지나 우성이 잠들었다. 명헌이 가만히 어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잠든 얼굴이 평화롭다.
내가 너에게만 보이는 이유가 뭘까.
명헌이 잠든 우성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러나 닿지 못 했다.
-
우성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명헌은 없었다. 대신 애플워치에 보내지 않은 문자가 있었다.
ㅃ
통상 쓰는 '잘 가'라는 뜻인지, '뿅'이라는 뜻인지, 쓰다 만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성은 이 우스운 문자 하나에 무너졌다. 내가 가지 말라고 했는데. 내일 얘기하자고 했는데. 언제 돌아올지 말도 안 해줬으면서…. 날 떠났어. 우성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명헌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우성은 오매불망 그를 기다렸다. 살이 빠졌다. 도저히 식욕이 들지 않아 자주 식사를 잊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잠이 늘었다. 심할 때는 하루의 절반을 수면으로 보냈다. 그마저도 중간중간 자다깼다 하는 쪽잠이라 항상 피곤했다.
깨어나면 이명헌을 찾았다. 돌아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면 울었다. 지치면 다시 잠을 잤다. 갑자기 정신이 또렷한 날에는 현철에게 문자를 보냈다. 명헌이 형이 떠났어요. 미련을 찾겠다고 갔어요. 형은 이제 정말 사라지고 싶은가 봐요. 절 떠나고 싶은가 봐요. 정말 죽고 싶은 건가 봐요. 이상해요. 명헌이 형이 없는데 밤이 오고 낮이 가요. 해가 뜨고 달이 져요. 세상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만 무인도에 버려진 것 같아요. 원래 이런 거예요? 저만 이런 거예요? 그리고 답장이 왔다.
나도 그런 느낌이었어. 명헌이가 죽었다는 소식 처음 들었을 때. 오전 8시 55분
다들 비슷해. 그냥 태연한 척하고 사는 거야. 오전 8시 55분
우성은 한참이나 그 문자를 보았다. 이미 읽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읽고. 읽고. 읽고. 또 읽고.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운 뒤에도 계속.
오랫동안 걷지 않았던 커튼을 치웠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성에겐 그 한 명 한 명이 평생 말도 섞을 일 없을 막연한 타인이었으나, 전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다들 비슷하다고?
우성은 문득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명헌의 장례식장을 떠올렸다. 죽음을 애도하던 사람들. 신현철. 신현필. 김낙수. 최동오. 도 감독. 조문객을 맞이하던 명헌의 부모님. 명헌의 누나. 식장을 빠져나오며 마주쳤던, 다른 누군가의 죽음에 눈물 흘리던 사람들.
그렇구나. 정도가 다를 뿐이지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 기분을 느꼈겠구나. 정우성은 그제야 이것이 본래 겪어야 했던 우울임을 깨달았다. 그동안 명헌을 만지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 했을지언정,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도.
지금이라면 현철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명헌이 죽은 줄 모르고 있다고,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현철이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옳았다. 정말 우성이 명헌의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그를 욕망하지 않았을 테니까.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도, 안고 싶다는 생각도,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가 떠났다고 이렇게나 망가지지 않았을 테니까.
이명헌은 정우성을 떠나지 않는다. 이명헌은 정우성을 떠나지 못한다. 그야, 이명헌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명헌은 언제나 그의 곁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영정 사진 앞에서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제때 수용하지 못했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그를 덮쳤다. 우성은 오늘이 되어서야 명헌의 죽음을 이해했다.
우성은 하루종일 창문 앞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밤이 되어도 자세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눈물이 맺혀 뺨을 타고 흘렀다.
-
우성은 다시 런닝을 시작했다. 두 뺨에 닿는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집 밖으로 나가 장을 보았다. 그새 물가가 올라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카페에 나가 커피를 마셨다. 자신을 알아보는 팬이 있어 함께 사진을 찍었다.
농구공을 들고 나가 몇 번 슛을 던졌다. 동네 꼬마애들이 구경을 하기에 잠깐 놀아주었다.
선배들에게 먼저 연락해 산왕공고에 한 번 더 방문했다. 피드백을 줬던 녀석이 몰라볼 정도로 실력이 늘어 즐거웠다.
산책을 하다 고양이를 발견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녀석이라 실컷 쓰다듬었다.
신경 쓰지 않은 사이 손톱이 많이 자라서 깎았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했다.
외식을 했다.
영화를 봤다.
머리를 다듬었다.
제 때 삼시세끼를 챙겼다.
밤 10시에 잠들고 새벽 5시에 깨어나는 수면 패턴을 되찾았다.
미국 에이전시에서 이메일로 보내준 전자 계약서를 훑어봤다.
언제나 빠르게 성장하던 우성답게, 회복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불 꺼진 집에 혼자 돌아왔을 때의 적막은 아직도 소름 끼치게 쓸쓸했다. 이 역시 익숙해지겠지. 모든 일이 그러하듯 말이다. 방전된 아이패드와 애플워치를 바라보던 우성이 고개를 돌렸다.
이명헌은 사라진 지 한 달이 조금 넘어 다시 나타났다.
안녕 뿅.
우성이 들고 있던 장바구니를 떨어뜨렸다.
-
그래서, 나 두고 간 곳이 겨우 선배들 집이랑 산왕공고예요?
응. 다들 기억과 똑같다 뿅. 하긴 장례식장에서 본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니 형, 진짜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그때 얼마나 놀랐다고요. 제 체면이 어떻게 된 줄 아세요? 저 완전 선배 장례식장에서까지 깽판 치는 미친놈 됐다고요.
맞는 말 뿅. 민폐 뿅.
아씨. 진짜 너무해요. 그나저나 미련이 뭔지 알아보겠다고 간 거잖아요. 좀 알게 됐어요?
응. 난 농구를 더 하고 싶었나 봐 뿅. 애들 경기 뛰는 거 보니까 알았다 뿅.
그렇겠죠.
프로 경기도 뛰어보고 싶었고 뿅.
놀랍지도 않네요. 그게 다예요?
아니.
더 있어요? 신기하네. 난 형 완전 농구만 보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뭔데요? 궁금하다.
…….
…왜요. 보지만 말고 말을 좀….
왜 네가 울 때 신경 쓰였는지 알았다 뿅.
…….
널 좋아했나 봐. 거기 알지? 체육관 뒤에 뿅. 뒤뜰에서 계속 네 생각만 났다 뿅.
우와. 지금 그걸 이렇게 말한다고요? 하나도 안 설레는데요?
네가 또 울까 봐 신경 쓰여서. 울지 말라고 얘기하려고 남았나 봐. 그게 내 미련인가 봐 뿅.
형 진짜 무드 없어요. 하긴 형은 늘 그랬죠. 내 고백도 그렇게 쿨하게 차버리고…. 그나저나 지금 와서 마음이 이어져도 소용 없네요. 너무 늦었잖아요.
그러게 뿅.
…….
너랑 얘기하고 싶었다 뿅. 그래서 네가 내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고 뿅.
…….
네가 날 봐줬으면 좋겠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고 뿅.
…….
너에게 닿고 싶었는데. 거기까진 안 됐다 뿅.
죽을 때까지 원할 만큼 날 좋아했어요? 명헌이 형은 정말 바보야. 난 처음부터 알았는데.
잘났다 뿅.
정말 바보 같아.
그래 뿅.
제 말 좀 믿어주지 그랬어요, 진짜아….
믿었어 뿅. 널 믿어줘서 내가 좋았다며 뿅.
…….
…….
…….
에휴.
…….
울지 마. 신경 쓰여.
싫어요.
그만 울어도 돼.
싫어요.
잠이나 자라 뿅. 지금 밤 11시 뿅.
이 정도는 오후 5시랑 맞먹는 시간인데요 뭐. 안 잘래요.
군기 존나 빠졌다 뿅.
네 존나 빠졌어요. 저 안 잘 거예요. 안 졸려요. 눈 하나도 안 감기거든요?
감긴다 뿅.
아닌데요? 다시 보세요. 그냥 울어서 눈이 부은 거뿐이에요.
자랑이다 뿅.
…….
…….
…….
졸리지?
아, 씨. 근데 그래도 저 진짜 안 잘 거예요.
왜 뿅?
저 자면 갈 거잖아요.
…….
와, 아니라고도 안 하네.
맞으니까 뿅.
가지 마요.
안 돼 뿅.
좋아해요. 좋아하니까 가지 마요. 안 갔으면 좋겠어요.
…….
가지 마요. 가지 마세요. 가면 안 돼요. 정말로…. 저 좋아하죠? 좋아하는 사람 말은 다 들어주고 싶은 게 사랑 아니에요? 저는요, 깨어나면 형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알겠죠?
잠이나 자 뿅.
제 말 들어줄 거죠? 그쵸? 형. 명헌이 형. 저랑 약속한 거예요. 내일 일어나면 형이 뭐라도 말해줘야 돼요. 안 그럼 저 울 거예요. 엄청 신경 쓰이게 울 거거든요? 형. 저랑 약속한 거예요…….
우성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명헌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잘 자. 이제 울지 마.
-
우성이 깨어났다. 눈을 꾹 감은 채 잘 잤냐고 묻는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집안은 고요했다. 결국 몸을 일으킨 그가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집에서 사람이라곤 그 혼자뿐이었다. 어제도, 그제도, 일주일 전에도, 한 달 전에도. 한국에 들어온 뒤 언제나 그랬듯이.
한참이고 집안을 돌아다니던 우성이 멈췄다. 발 주변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가 메인 목으로 중얼거렸다.
저 울어요. 형, 저 지금 울어요.
저 형 때문에 우는데…….
…신경 쓴다면서요…….
정우성이 이명헌의 목소리를 듣는 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영원히.
-
우성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오랜 휴식으로 몸이 굳은 탓에 바로 복귀할 수는 없었다. 우성은 본래 기량을 찾기 위한 훈련에 집중했다. 이미 쌓아둔 것이 탄탄한 덕분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 재계약을 앞두고 있던 에이전시의 대형 비리가 언론에 실리는 바람에 새롭게 계약할 곳을 찾아야 했다. 계약 사항을 하나하나 따지고 비교하는 것은 많은 수고를 들이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도움이 된 것은 송태섭이었다. 뜻하지 않게 미국에서 재회한 그는 동향인이라는 이유로 금세 사이를 좁혔다. 게다가 둘은 묘하게 대화가 잘 통했다. 같은 포인트 가드라 그런가? 우성은 가끔 시간이 나면 태섭과 원온원으로 농구를 했고, 기운이 없으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째 미국놈들은 뭐 기름진 것만 먹냐. 여기 산 지 몇 년째인데 아직도 적응이 안 돼. 동감.
이듬해 송태섭은 이한나와 결혼했다. 태섭이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보여주며 으스댔다. 행복하다는 티가 잔뜩 나는 얼굴이 얄미워, 우성은 괜히 "둘이 존나 안 어울림"하고 까불었다가 청첩장을 받지 못 할 뻔했다. 그 업보로 우성은 결혼식장에서 축가를 불렀다. 사실 노래에 재능이 없어 입을 열자마자 하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졌지만, 결국 웃음소리에 전염되어 우성도 웃고 말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겨울이었다. 마침 우성의 자취방 근처에서 전 NBA 간판선수가 강연을 한다는 소식에, 우성은 송태섭을 불러 함께 들었다. 생각보다는 평범한 얘기였네. 안 들어도 될 뻔했다. 그러게. 농구나 한 판 하고 갈래? 점심값 내기. 너 후회하지 마라. 나 키 컸다. 알 빠? 둘은 나란히 주변 농구 코트로 향했다. 횡단보도에서 멈춰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태섭이 건너편 건물을 가리켰다. 낡은 영화관이었는데,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오, 이거 재개봉하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너 이거 알아?
…어.
봤어? 한나가 같이 보고 싶다고 해서 넷플로 보려고 했었는데, 극장에서 봐야겠다. 재밌냐?
아니. 별로.
너 취향 쓰레기구나. 한나 눈에 들었으면 존나 명작인 건데.
꺼져.
엿 먹어.
태섭과 헤어진 뒤, 우성은 영화관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마음 먹어도 움직인 것은 고작 한 발짝이다. 오후에서 저녁이 될 때까지 한참을 망설이던 남자는 결국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가까운 시간으로 영화표를 예매한 우성은 자꾸만 목덜미를 만졌다. 어쩐지 초조해서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드디어 입장 시간이 되자 우성은 가장 먼저 자리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우성은 빠른 전개의 영화를 좋아했다. 느리고 철저한 서사 쌓기에 치중한 영화를 좋아하는 명헌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예상대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우성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덕분에 스크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까 들은 강연 내용이라든가. 기어이 송태섭을 찍어눌렀던 거라든가. 얻어먹은 점심이 생각 외로 맛있었다든가.
이 영화를 보던 이명헌의 표정이라든가. 어떤 대사가 좋았다던 이명헌의 목소리라든가. 동네 농구 코트를 보던 이명헌의 눈빛이라든가. 자신을 따라 웃던 이명헌의 웃음소리라든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마주쳤던 이명헌의 눈동자라든가. 제 우스운 고백을 듣고 살짝 올라갔던 이명헌의 입꼬리라든가.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던, 우성이 사랑에 빠졌던 순간의 이명헌, 그 사람이라든가.
우성이 눈을 감았다. 형. 이상해요. 전엔 형과 관련된 것만 봐도 형이 떠올랐는데. 이젠 형과 관련이 없는 걸 봐도 형이 떠올라요. 하늘을 봐도. 횡단보도를 봐도. 이름 모를 배우를 봐도. 단풍나무를 봐도. 벚꽃을 봐도. 전부 형이 떠올라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형. 명헌이 형.
보고 싶어요.
-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관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하지만 우성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히 그러지 못했다.
남자가 천천히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숨을 쉰다. 호흡에 집중한다. 생각을 비운다. 그렇게 몇 분. 어느덧 상영관에 혼자 남은 우성이 계단을 내려왔다.
마침내 우성은 울지 않았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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