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전력 2천 자

[준쫑] 단문

아픈 준수 간호하는 종수

“야. 나 너 아픈 거 처음 봐.”

최종수가 밖에서 사 온 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성준수는 나도 오랜만이라는 대답을 하고 싶었으나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사람이 아픈데 직업이 운동 선수라 죽을 얼마나 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직원이 두 개나 추천해 줘서 둘 다 사 왔다고 조잘조잘 말하는 최종수의 등은 여전히 건장하다. 이제 막 귀국했으니 피곤할 법도 한데 오자마자 한다는 게 아픈 애인 때문에 죽 사 오기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성준수는 바로 윗 단락에서 설명했듯 아주 오랜만에 아팠다. 애초에 보유 질환도, 알러지도 없었어서 아픈 일 자체가 별로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경기 중에 입는 부상이 전부일 정도다. 어쩌다 감기에 걸렸지? 생각해도 그럴싸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일정대로 움직이고 잘 먹고 잘 씻고 잘 잤으며 눈 뜨면 최종수를 데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디 있냐고 물어보는 메시지가 여섯 개, 부재중 전화가 다섯 개였다. 이사를 안 가서 망정이지 가기라도 했다면 최종수는 헛발질을 했으리라.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눈을 뜨는 게 고작이었다. 사지 멀쩡한데 이렇게까지 움직이기 힘들었던 마지막 기억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머리에 열이 올라서 그런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가에 열이 찬다. 울 만큼 아프지도 않건만 남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흐린 시야로 허공만 보고 있자니 굳은살 박힌 길다란 손가락이 눈가를 훑고 지나갔다. 최종수가 심각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울 만큼 아파?”

아니라는 말 대신 눈만 두 번 깜빡이자 알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눈썹이 팔자로 기울어졌다. 아, 이게 아닌데. 방금 귀국해서 쉬지도 않은 놈한테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들 생각이 아니었다. 냉장고에는 최종수가 좋아하는 공태성 레시피의 김치찌개 4인분이 들어있었고, 기름진 입맛을 씻어주겠다고 장담하며 끓이기만 해서 대접할 생각이었다. 밥 두 그릇은 거뜬하게 비울 놈을 생각해서 인스턴트 밥도 박스로 시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아, 왜 안 되지.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유난히 짜증이 나는 건 지금 당장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다.

최종수는 일단 물을 가져왔다. 귀찮아서 비닐도 뜯지 않은 생수가 차갑지 않아서 적격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일어날 수 있어? 최종수가 협탁 위에 컵을 내려 놓고 제 등 뒤에 팔을 끼웠다. 거의 힘으로 상체를 들어 올린 수준이었다. 컵을 들 힘은 있는지를 생각하는데 그냥 입 앞에 나타났다. 받아 마시고 있자니 아무리 생각해도 역할이 반대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 생각을 읽었는지 최종수가 피식 웃었다.

“아픈 사람한테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을 한 귀로 흘려 듣고 있자니 아까는 눈가를 닦던 손가락이 이제 젖은 입가를 닦아냈다. 얼굴이 가까이 오길래 잠깐 있다 갈 놈에게 감기를 옮길 생각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거의 동시에 그러지 말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최종수가 이제 대놓고 웃는 중이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든 최종수는 사과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애초에 미안하다는 생각조차 안 할 거다.

“너 지금 좀 귀엽다.”

이것 좀 보라지. 저를 다시 눕혀 놓은 뒤 빈컵을 들고 나가는 최종수의 뒷모습을 그냥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물을 마셨으니 다음은 죽일 거고(죽인다는 게 아니다.) 배불러서 잠이 들면 일어나서 병원에 가는 순서일 테다. 최종수가 돌아올 동안 말이라도 해 보려고 소리를 내 봤는데 다 죽어가는 사람이 내는 듣기 싫은 소리만 나올뿐이다. 대체 어디서 찾은 건지 쟁반에 덜어낸 죽과 물과 죽집에서 주는 각종 반찬을 가져온 최종수가 옆자리에 앉았다.

“너네 집에 베드 테이블 없어? 침대 위에 올려 놓고 쓰는 거. ……아니야. 네 표정 보니까 없어 보여. 그냥 좀 기대서 앉아 봐. 내가 먹여 줄게.”

쟁반을 협탁에 내려 놓은 최종수가 다시 저를 일으켜 앉혔다. 뭐라고 하고는 싶은데 피곤할 게 뻔한 놈의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그냥 시키는 대로 해야 할 듯싶었다.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다시 이런 식으로 아플 날이 오지도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최종수한테 또 수발 들라고 시키지도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이것도 제가 시킨 게 아니지만.

뭐가 됐든 성준수는 입이나 벌리기로 했다. 플라스틱 숟가락 위에 대충 올라와 있는 죽보단 재수없게 쪼개는 입술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이걸 받아 먹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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