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문어
가비지타임 최종수X박병찬
※ 미국에서 돌아온 종 / 프로생활하는 뱅 = 동거
※ 하고 싶지 않은 종 / 하고 싶은 뱅<<<
※ 종수가 잠을 많이 잡니다
※ 쓰는 사람이 코스믹 호러 넘 좋아해요>< ㅋㅋ 별 거 안 나옵니다만 주의하세욤
※ 종뱅전력 49회 주제 : 첫사랑 <- 그런데 참여 못함..^^ㅋㅋㅋ
※ 공백포함 약 36,000자
01 횟집
비 맞고 바람 맞아 세월이 느껴지는 누런 간판 만큼 벽지도 낡은 횟집에는 이른 낮부터 소주를 걸치는 아저씨들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박병찬은 최종수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벽지의 마른 물자국을 보며 수저통 옆에 놓인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만나 근처 공원에서 일대일 하다가 배고파서 보이는 대로 들어왔는데 자리를 잘못 잡았나, 아무 거나 먹어도 된대서 무작정 자리 잡고 앉았는데 최종수는 이런 식당 괜찮나, 눈치 보며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박병찬의 옆으로 식당에서 일하시는 이모님이 작은 접시들이 담긴 넓은 쟁반을 들고 왔다. 이모님은 입에 발린 말을 하듯 최종수와 박병찬의 외모 칭찬부터 날려준다. 아이고 잘생긴 총각들이 왔네. 머 먹을지 골랐어? 우리 오늘 광어 괜찮고, 이것저것 다 좋아하면 모듬도 잘 나가고. 쏘주 한 잔씩 할 거야? 빠르게 묻는 말에 박병찬이 투머치인포메이션으로 얼른 부드럽게 받아 넘겼다. 저래 보여도 이 친구가 아직 고등학교 졸업을 안 해서 쏘주는 안 돼요. 젓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최종수는 자신을 팔아넘기는 박병찬을 보며 눈만 꿈벅였고 식당 이모님은 쾌활하게 추천 메뉴를 바꿔준다. 학생들끼리 가볍게 점심 먹으러 온 거면 회덮밥도 맛있어. 그걸로 해. 총각들 얼굴 봐서 회 좀 더 넣어줄게. 식당 이모님은 입을 쉬지 않으며 테이블에 보글보글 끓는 서비스 매운탕과 밑반찬을 내렸다. 비싼 문어숙회가 와사비 간장과 함께 몇 점 썰려나왔다. 아무래도 박병찬은 식당 이모님과의 눈치게임에서 졌다. 여기서 회덮밥을 먹어야겠다. 곁눈질로 바라본 최종수에게서 딱히 불편한 기색도 없어 보였으므로 추천받은 대로 회덮밥을 곱배기로 하나씩 시킨다. 박병찬은 연하의 고등학생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너도 여기서 식사하는 거 불만 없지? 그런 눈짓이었는데. 박병찬의 웃음을 본 최종수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모님이 주방 쪽에 메뉴를 불러주며 테이블에서 멀어지자 최종수가 박병찬을 부른다. 주변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목소리가 제법 또렷했다.
“박병찬.”
“엉? 왜.”
“……나, 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랑하는 것 같아.”
박병찬은 신 나서 젓가락을 쥐려다가 손을 멈췄다. 최종수의 고백은 인천 앞바다 앞의 은은하게 비린내와 짠내가 풍기는 횟집에서 이루어졌다.
박병찬은 테이블 맞은 편에 앉은 최종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박병찬은 자신이 최종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어제 아침에 이발을 했다던 최종수의 목덜미가 조금 추워 보였다. 최종수의 충격적인 러브유 선언에 박병찬은 아무 대답도 못했다. 쌀쌀한 외부와 식당 내부의 온도가 달라 먹먹해진 코를 훌쩍이며 티슈로 닦아내는 최종수를 눈으로 빤히 보았다. 최종수는 코 닦은 티슈를 뭉쳐 테이블 구석에 슬쩍 밀어두었다. 시끄럽던 식당 내부가 그렇게 박병찬의 주변으로 서서히 고요해진다. 사랑? 네가 나를? 단어와 단어가 맥락 없이 끊기고 재조합 되기 전에 아까 본 이모님이 척척 걸어오신다. 얼굴 박고 세수를 해도 될 만한 그릇 두개를 테이블로 내려놓았다. 아까 말한대로 회 쫌 더 넣었어. 맛있게 먹어요. 말투가 시원시원한 이모님은 박병찬이 손을 닦은 물티슈와 최종수가 밀어놓은 뭉친 티슈를 한 손으로 훔치듯 움켜쥐었다. 어 그거 저희가 나중에 치워도 되는데, 박병찬의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모님은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서 등을 돌렸다.
무심한 얼굴의 최종수는 막 나온 회덮밥 그릇 위로 숟가락을 올린다. 제 숟가락에 소량의 초고추장을 짜넣은 후 박병찬 쪽으로 빨갛고 말랑한 플라스틱 병을 넘겼다. 박병찬의 주의집중은 다시 최종수의 쥐똥만큼 짠 초고추장으로 옮겨졌다. 저걸로 양념이 돼? 무슨 맛으로 먹어? 박병찬 본인도 먹는 것에 큰 관심이 없으면서, 최종수를 보고 있으면 괜히 훈수 두고 싶고 그렇다. 타인의 입맛과 취향이라는 것을 박병찬은 존중하므로 열린 입을 닫았다.
박병찬이 눈만 굴리고 초고추장만 북북 짜고 있으니까 최종수가 아까 하던 말을 이었다. 자신이 생각했을 때는 제법 무게감 있는 고백이었고, 박병찬에게 부연이 더 필요한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금방 다시 평온한 얼굴이 되었다.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응?”
“쌍용기 경기 때 네가 그랬잖아.”
“어어, 그래.”
그렇긴 한데. 박병찬은 채소와 회가 얹힌 회덮밥과 최종수를 번갈아 보았다.
“그게 그렇게 된다고?”
“나도 너를 기다렸던 것 같아.”
최종수의 설명은 박병찬에게 도움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의 최종수가 느끼던 감정과 지금 최종수가 느끼는 감정의 연결고리가 헐겁다고 느껴진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열심히 생각해본 결과 같긴 한데. 오해와 착각을 거듭하여 완전 생판 모르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박병찬은 평소에도 없는 입맛이 다시금 싹 달아나는 걸 느끼지만 눈앞에 놓인 식사를 먹으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먹자, 종수야.
“그래그래, 형아도 우리 종수 좋아한다. 같이 농구하는 것도 재미있고.”
“야.”
“아 또 왜애.”
“좋아하는 건 사랑하는 거랑 다르잖아.”
나는 지금 너한테 사랑한다고 했어. 병찬은 머릿속이 확 좁아지는 감각을 경험한다. 21세 박병찬. 연하 최종수의 사랑고백에 아찔하다. 순간적으로 골 안쪽이 띵 울린다. 아하. 미치겠다는 게 이런 거구나. 박병찬은 숟가락을 들어서 얕은 매운탕을 뒤적거렸다. 빨간 고춧가루와 흰 생선살과 대파와 잘린 무가 낮게 깔려 있었다.
박병찬의 몸에 최종수의 첫사랑이 동그랗게 달라붙는다. 그것은 형태가 정확하지 않고 공기 속에서 힘없이 물렁거렸다. 박병찬은 묻고 싶었다. 이렇게 갑자기 나한테 냅다 고백부터 한다고. 순서가 틀렸지, 인마. 너 그럼 쌍용기 때 나한테 쿠크다스 어쩌고 한 건 사과 안 하냐? 박병찬은 목구멍 안쪽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것들을 어디에 뱉어내지도 못했다. 종이컵에 든 미지근한 생수로 입을 헹궈 삼키고는 다시 입술을 질근질근 씹는다. 뒤끝이 너무 길어서 스스로도 민망하다. 그때 초원이한테는 뭐라고 했더라. 잠깐 빡치긴 했는데 뭐 그냥 불쌍한 어린애가 한 말이라 생각해서 신경 안 쓴다고. 이후 최종수와 다시 만났을 때도 그냥 그 일은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있었으니까 쿠크다스 건으로 사과 받고 싶었으면 올해 여름, 늦어도 가을에는 받아야 마땅했다. 그런데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하면, 없었던 일이 되나. 그런 게 가능은 했던 걸까. 박병찬은 스스로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최종수는 또 성큼성큼 제 할말을 했다.
“우리가 서로의 2순위가 되면 좋겠어.”
“그…… 1순위는 농구냐?”
“응.”
뭘 그렇게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단호한 대답이었다. 박병찬은 뭐라고 더 할 말도 없어서 내려놓았던 숟가락을 들었다. 최종수도 박병찬도 말 없이 회덮밥을 슥슥 비볐다. 지금 박병찬은 스스로를 설득하는 중이었다. 같은 남자. 2년 유급해서 주변에 또래는 연하 밖에 없으니 연하인 건 어쩔 수 없고. 뜬금 없는 고백을 들어도 반사적으로 개소리하지 말라는 말은 안 나오는 것 보니 최종수와의 이런 관계가 박병찬도 영 싫은 건 아닌 듯 싶었고. 다만 마음에 쫌 걸리는 부분은 최종수가 선정한 단어, 사랑이었다. 박병찬은 숟가락을 입에 물어 이로 긁었다. 고백을 누가 이렇게 해. 최종수는 얼굴이랑 농구 말고는 정말 한결같이 센스가 없다. 그 정도는 못해도 문제 없이 살아왔다는 뜻일 테다. 박병찬은 눈대중으로 초고추장을 뿌렸는데 간이 딱 알맞았다. 비벼진 회덮밥 마저 맛있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최종수와 자주 만나게 된 건 가을부터. 특히 시간을 오래 보낸 건 요 두 달 사이. 아침 일찍 자신과 일대일 농구한다고 서울 용산에서 지하철을 타고 쪼르르 인천까지 내려왔다가 막차 끊길 시간에 아슬아슬 돌아가는 최종수의 마음을 박병찬은 별로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내가 농구를 쫌 잘해야 말이지. 그리고 가끔 내가 서울 가잖아? 박병찬은 그런 말로 대충 퉁쳤다. 최종수랑 같이 놀면 농구하느라 시간이 잘 갔다. 농구 끝나고 종수가 인천 돈까스 맛집이라던 가게 알아오면 같이 가고. 인천 무슨 축제 있어서 구경하고 싶다고 하면 심심하니까 가보기도 하고. 추운 날 어디 기계식 우동 먹으러 가고. 농구화 보러 쇼핑 센터 가고.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만난 날은 시간 애매하게 남으니까 영화 보고. 책 보러 교보문고 가고. 최종수의 친구유무는 더더욱 박병찬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일정 있고 바쁘면 알아서 약속을 거절하겠지. 그런 생각이었을 뿐.
회덮밥을 다 비비고 보니 박병찬 그릇 속이 최종수의 그릇보다 조금 더 빨그스름 했다. 그릇 속에서 풍기는 산뜻한 깻잎과 오이 특유의 향, 코를 찡긋하게 되는 초고추장 냄새, 가게에 밴 물비린 내음이 뒤섞인다. 박병찬은 회덮밥을 비비던 숟가락을 내려두고 젓가락을 들었다. 썰어져 나온 문어숙회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집어넣었다. 최종수는 아직도 한참 비볐다. 색깔이 흐릿해서 덜 비빈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박병찬은 문어를 씹어 삼킨 후 최종수를 보았다. 익힌 문어는 몇 번 씹자 혀에서 녹아내려 사라졌다. 맛있었다. 아빠가 척 보기에 오래 되어 보이고 간판 후진 식당은 간판 바꿀 돈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돈으로 식재료 좋은 거 쓴다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박병찬은 젓가락으로 속살 뽀얀 문어 네 점을 최종수 쪽으로 살짝 밀어두고 나머지 제 몫의 두 점 중 하나를 또 입에 집어넣었다.
“너 지금 고백한 거지, 나한테.”
“응.”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그건 아냐.”
익은 문어를 오물오물 씹던 박병찬은 하마터면 제 혀를 반 토막으로 작살낼 뻔했다.
“아 그건 아니구나…….”
“내가 다다음주면 미국 가잖아. 박병찬 김칫국 그만 마셔.”
미국의 학기는 9월부터 시작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 지역 고등학교에 잠깐 들어가느니 마느니 하던 얘기가 정리 된 듯, 최종수는 애매한 시기에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요 몇달 전부터 비자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듣기는 했다. 그런 최종수에게 사랑고백을 받았어도 박병찬은 김칫국을 마시는 사람이다.
“야 형아가 궁금한 거 쫌 물어볼 수도 있지. 네가 미국 가는데 그럼 나더러 뭐 어쩌라고. 미국 같이 가자고 돌려 말하는 거냐? 내 꿈같은 캠퍼스라이프는 어쩌고요.”
“그 농구 수준에 미국은 무슨. 네가 한국에서 날 기다려야지.”
젓가락으로 밑반찬을 집으려던 박병찬은 이번에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최종수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은 사람?
“최종수. 알아 듣게 더 설명 좀 해 봐.”
“뭘.”
“나랑 어쩌고 싶은 건지. 이런 얘기 하는 이유가 뭔데.”
마음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그냥 저질러 버린 걸까. 제 마음 알아달라고 선언한 것 치고는 너무 최종수의 표정이 너무 뻔뻔했다. 아니, 뻔뻔하다기 보다는 박병찬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듯이 보였다. 최종수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고, 박병찬은 오기가 생겨서 눈을 치뜨며 젓가락으로 밑반찬을 집어 부지런히 입에 넣었다.
3분 쯤 지났을까. 심사숙고하다가 입을 연 최종수의 결론은 정말 간단하고 황당했다.
최종수는 박병찬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랑한다는 것.
박병찬을 사랑하니까 최종수는 미국에 있는 동안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박병찬도 최종수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애인을 사귀지 말고 수절하며 기다려줘야 한다는 것.
듣고 있던 박병찬은 핸드폰 국어사전 어플리케이션을 열고 단어 ‘수절’을 찾아본다. [수절] - 1.여자가 정조를 지킴 2.절개와 의리를 지킴. 아마도 1번의 의미로 한 말이겠지. 딴 사람 만나지 말라고. 박병찬은 최종수를 아득하게 들여다본다. 즐겁게 농구 한 판 때리고 출출하니까 점심 먹으러 들어온 횟집에서 갑자기 최종수의 본모습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최종수를 잘 모르는 팬들이 부르는 대로 까만고양이인간태풍농구의신 이런 건 아니었고 현재 자기가 형한테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거대한 혼란 속의 열아홉 살 남자아이. 최종수에게 사랑은 감정 따위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상태의 변화와 유지에 가까웠다. 박병찬은 회덮밥을 한 술 크게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최종수도 박병찬을 따라 희멀건 회덮밥을 먹었다. 채소가 가득해서 아삭아삭 와작와작 씹는 소리가 좋았다. 박병찬은 밥알이 느껴지는 회덮밥을 다 씹지도 않고 삼켰다.
“최종수 너야말로 양심이란 게 없냐?”
“무슨 양심.”
“피 끓는 이십대 남성에게 섹스하지 말라는 게.”
“그럼 자위해. 아무나 만나서 섹스하지 말고.”
최종수의 말에 입이 떡 벌어진다. 박병찬은 이런 대화를 횟집에서 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최종수 이거 진짜 상또라이네……. 박병찬은 숟가락 뒤로 콧잔등과 인중을 긁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한국에 있는 동안 나랑 할 생각 없어? 너 나 사랑한다며. 사랑하면 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
“그럴 생각 없는데. 어차피 나는 미국 가잖아. 몇 번을 말해.”
최종수는 이 대화가 좀 갑갑한 듯, 말이 끝날 즈음엔 인상을 썼다. 박병찬의 눈이 가늘어진다. 입술이 한쪽으로 삐죽거렸다. 이야 형아 몸에서 사리 나오겠다. 박병찬은 최종수가 차라리 섹파로 지내자고 하는 게 현실성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머저리 같은 대화인지. 박병찬은 최종수와의 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여태껏 없었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의식되기 시작한다. 최종수를 비웃는 듯 아닌 듯, 스스로도 아니꼬운 말투로 물어볼 수 밖에.
“날 사랑한다면서 섹스는 하기 싫어?”
제 쪽으로 박병찬이 밀어뒀던 문어 네 점 중 하나를 집어먹던 최종수는 잠깐 상념에 잠긴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고 싶어서 급하게 꿀꺽 다 삼키고는 엄격한 목소리로 박병찬에게 대답했다.
“어. 그거랑 사랑은 달라.”
박병찬은 회덮밥 푸던 숟가락을 쾅 내려놓는다. 듣자듣자 하니까 이게 진짜. 회덮밥을 다 먹지도 않았는데 식당을 나가버리고 싶어진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숟가락 내려놓는 소리에 움찔한 최종수도 놀란 눈으로 박병찬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술잔 걸치고 있던 아저씨들이 한꺼번에 입을 싸물었고 가게는 찬물을 끼얹은 듯 삽시간에 조용해졌지만 눈치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저쪽 일행 중 한 사람이 거나하게 취한 목소리로 건배해 건배, 하는 말에 금방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박병찬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최종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데 하필이면 사람도 많은 횟집이다. 그거랑 사랑이 다르다니. 하고 싶은 말은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니 씨발 종수야 그게 대체 뭔 개소리야. 대한민국 이십대 남성 박병찬에게는 사랑이 섹스고 섹스가 사랑이다.
*
그날은 최종수도 박병찬도 뭘 어째야 할 지 몰라 횟집에서 회덮밥과 문어숙회와 매운탕을 끝까지 다 먹고 또 카페에서 서로의 연애관과 사랑관에 대해 실랑이를 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좁혀 지지 않은 대화에 지친 건 박병찬 쪽이었다. 최종수는 ‘오늘은 미국 가기 전 조부모님과 저녁 식사 하기로 했다’며 일찍 돌아갔다. 박병찬은 인천 길거리 한 가운데에서 최종수를 덥썩 끌어안고 민폐를 부려보고 싶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렸다. 해결되지 않은 마음은 접어두고 카스 한 캔 사들고 들어가는 것으로 스스로와 합의했다.
농구 몇 번 같이 한 뒤 친해져버린 두 남자 사이의 고백 후 썸도 뭣도 아닌 기묘한 기류가 흐른지 정확히 2주 후에 최종수는 박병찬을 떠난다. 2주 동안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몇 번을 더 만났는데 그때마다 박병찬이 최종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귀찮고 집요하게 “너 정말로 나를 사랑해?” 하고 물어봤다. 쪽팔리지도 않은 듯 스물한 살 박병찬은 열아홉 살 최종수에게 대놓고 질척거렸다. 농구로 만난 다른 동생들한테는 유쾌한 쾌남 형님처럼 굴면서 최종수한테만은 미숙한 찐따 형님처럼 굴었다.
며칠 만에 만난 박병찬이 입술을 반만 벌려 샐쭉한 목소리로 물어보면 마주 보고 있던 최종수는 차분하고 느릿하게 대답했다. “응. 사랑해.” 부끄러움을 삼켜낸 최종수의 진지한 대답을 들으면 무표정한 박병찬의 이마에 이유 모를 열감이 느껴졌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르지만, 최종수는 박병찬에게 저주를 내린다. “나 없이 하는 네 모든 연애는 망할 거니까 하지 마.” 최종수는 그렇게 재수 없는 말을 남기고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최종수를 위해 상냥한 얼굴을 유지하는 데에 슬슬 한계가 온 박병찬은 그날 하루종일 저주의 메시지가 뜬 핸드폰 액정과 인천 하늘에서 비행기가 보이는 족족 뻐큐를 날렸다. 네가 연애하지 말라면 내가 안 할 것 같냐? 지가 고백 한 번 시원하게 갈겼다고 사람을 아주 그냥 고자로 만들어 버리네.
최종수가 떠나고, 3월에 대학생이 된 박병찬은 보여줄 사람도 없으면서 보란 듯이 소개팅을 했다. 박병찬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툭 까놓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게 소개팅을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최종수의 저주는 대한항공 미국 어디행 비행기가 뜨자마자 발휘되어 박병찬이 누굴 만나도 한 달을 못 넘겼다. 침대까지는 가보지도 못했다. 박병찬이 차거나 차였다. 상대가 바람을 피우거나, 양다리였거나, 박병찬이라는 남자가 궁금해서 일단은 만나봤는데 생각보다 성격도 안 맞고 부담스러워서 더는 못 사귀겠다고 선을 그었고 가장 마지막으로 차인 이유는 그거였다. “병찬아. 너 자각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미국에 있다는 네 친구랑 연락 진짜 자주 하는 거 알지. 너 걔랑 사귀고 있는 것 같아. 시차 맞춰서 연락하는 거 보고 좀 정 떨어지더라.” 박병찬은 살면서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아니 그럼 미국에 있는 애한테 시차 맞춰서 연락하지, 뭘 어떻게 하라고. 박병찬도 상대도 서로를 붙잡지 않는다. 남들이 납득할 만한 망한 연애라고 말하긴 애매했지만 박병찬 입장에서는 줄줄이 깨지는 연애였으므로 안 망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최종수만큼 좋아하게 되는 사람도 없었다. 이 세상에 최종수는 최종수 뿐이다. 박병찬은 고백만을 남기고 미국에 가버린 최종수 때문에 한국에서 울적했다.
그게 5년 전이다.
02 문어
최종수는 미국의 대학리그까지 갔으나 NBA에 입성하지 못했다. 몇 년을 어찌저찌 버티는 것 같더니 해외리그로 가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경기는 뛰지도 못하고 벤치에만 앉아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최종수의 귀국은 언론과 사람들 입에서 쉽게 오르내렸고 최종수의 다음 행로에 모두가 입술을 들썩이고 귀를 쫑긋거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한국에 돌아온 최종수가 버거워했다. 태어난 이후부터 당연하게 달라붙던 시선이었을 텐데.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면서 최종수가 유난이라고…… 박병찬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미국에 있느라 박병찬테라피를 받지 못한 최종수가 많이 연약해진 탓이려니 했다. 연휴가 있어도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에는 거의 들어오지 못했고 들어오더라도 가족들끼리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농구를 제외한 서로의 1순위가 되자더니 가족들한테 밀렸네. 본인도 한참 바쁜 동안에는 최종수를 못 챙겼으면서 툴툴거렸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최종수에게만은 너무너무 유치해진다. 박병찬은 최종수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오래 곱씹어서 그날 대화했던 모든 문장들이 너덜너덜 해졌다.
최종수와 농구를 한겹으로 보는 사람들이 떠드는 말 중에 어차피 최종수를 위한 말은 없었다. 충분히 잘한거고…… 어차피 미국 쪽 대학리그를 못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도 최종수에게는 사람들이 기대인지 지랄인지……. 사람들이 참 못 됐지. 박병찬은 최종수랑 한국에서 같이 프로선수로 뛰는 게 좋은데 왜들 그러나 싶었다. 러브콜 보내려고 최종수 오기만을 기다리는 감독들도 많았으면서 괜히 애를 기죽였다. 박병찬은 그게 싫어서 한동안 디지털 디톡스를 했다. 평소처럼 책을 읽거나 요즘 유행하는 노래 정도만 들었다. 그럼에도 그때그때 한국에 돌아온 최종수가 아직 어느 구단 사람들과도 정식으로 미팅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가을에 열리는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한다는 이야기가 박병찬의 귀에 쏙쏙 들려온다. 직접 얼굴 보고 대화하지를 않았으니 최종수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서 박병찬은 잠자코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했다. 승리하는 일을 세 번째로 미뤄두고 제 몸 하나만 살핀 박병찬에게도 까놓고 보면 결과가 중요하다. 과정은 때때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들은 쌓이고 쌓여 박병찬이 된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을 경험하게 되니까 결국은 죽는 날까지 무엇이 삶의 승패를 가르는지, 박병찬 같은 인간은 모른다. 애초에 삶에 승패가 있나. 그런 거 없다고 말하면서 다들 은연 중에 그런 게 있길 바란다. 박병찬은 몰라서 모르는데 다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했다. 가만히 있어도 밀려오는 생각이 많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최종수 또한 결과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박병찬은 최종수에게 전화가 온다면 무슨 말을 할 지 헤아려 본다. 그래, 너도 농구하기가 쉽지 않지. 인생이 원래 그런 거야. 아니아니, 너보다 두 살 많다고 늙은 현자 빙의한 거 아니고. 너 그렇게 약한 소리하는 거 아니다. 물론 거기도 끝내줬겠지만 미국농구가 다가 아냐. 어디 뼈 한 곳 거하게 빠개져서 농구를 못하게 된 것도 아닌데, 짜식이 진짜. 너 어디 갈 지 아직 못 정했으면 우리팀 감독님이랑 미팅 한 번 잡을래? 아 너 몸 값 너무 뛰어서 연봉협상이 어려울려나. 뭐 그런 이야기들. 대한민국에서 농구 잘하는 선후배 많아졌지만 그래도 너는 나에게 그 누구보다 특별하다고. 박병찬은 한숨을 쉰다. 한국 들어온 최종수 기분 풀어줄 생각만 줄줄이 엮인다. 깜빡하는 사이에 형태도 없는 것들이 저 멀리 휘날려 날아간다. 몇 년이 지나도 최종수가 아직 애새끼라고 박병찬은 생각했다.
압박감에 시달리면 농구든 뭐든 오래 못한다. 인간의 몸은 긴장한 상태에서는 무엇도 길게 이어가기 어렵다. 적당한 불안이 자극이 되어 돌파하지 못했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고 열등감을 땔감 삼아 지금보다 더 나은 순간을 빚어낼 수도 있지만, 박병찬은 그 모든 게 사회에서 세뇌 당한 개념이라고 받아들였다. 박병찬도 그 세뇌에 자유롭지는 않았고.
박병찬은 최종수와 근육의 긴장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연스레 최종수의 몸 근육을 마사지 오일로 이래저래 풀어주는 생각으로 넘어가고 결국 또 미끌미끌하고 뜨근뜨끈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최종수가 사랑 어쩌고 고백을 해왔을 때 그렇게 싫지 않았던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박병찬도 잘 모른다. 그애의 존재를 알게 된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농도와 결만 조금씩 달라질 뿐 관심은 계속 되었다. 팬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박병찬은 최종수와 최종수의 농구에 열렬한 관심이 있었다. 하, 드디어 5년 만에 최종수가 한국에 왔으니까. 박병찬은 손바닥으로 열이 오르는 뺨을 눌렀다. 최종수 때문에 마음이 씁쓸한 건 씁쓸한 거고, 박병찬의 머릿속은 이미 장난이 아니다. 최종수의 굳은 몸을 꼼꼼히 풀어주고 스트레스를 완화 시키며 이리저리 끙끙대고 헐떡이다가 너 때문에 연애 못하게 된 이 저주를 풀어달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
최종수는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두 달 뒤에 박병찬에게 전화가 왔다. 고등학생 때 쓰던 번호를 살리고 미국 갔다더니 운전 중인 박병찬의 핸드폰 액정에 최종수, 이름 석자가 떡하니 떠올랐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박병찬은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어, 쫑수야. 오랜만이다. 형아 지금 운전 중. 용건만 간단히 말해보거라. 최종수는 어디 아픈 사람처럼 끝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박병찬 지금 어디야?]
“나 지금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서 수원 가고 있어.”
[으응…….]
“근데 종수야 너 어디 아프냐? 목소리가 왜 그래.”
최종수는 짧게 하품을 했다.
[나 방금 일어나서…… 약속 언제 끝나는데.]
“그건 모르지. 친구들 약속인데 뭐 몇시에 헤어지자고 정하고 만나나. 누가 야 이제 집에 가자, 하면 그때 빠빠이 하는 거지.”
[그럼 약속 끝나는 대로 우리 집에 와. 주소 남길 테니까.]
“나 바쁜데?”
[시즌 아니잖아. 경기도 없으면서.]
방금과 같은 대화 맥락에서 갑작스럽게 농구로 넘어가는 최종수의 이해 능력이 박병찬은 아직도 재미있었다.
“어어, 형아는 애인이 백 명이 넘어서 시즌 아니어도 좀 바빠. 쫑수한테 못 갈지도 몰라.”
최종수의 속을 긁는 구라였다. 박병찬도 최종수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 많은 사람 중 한명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본인 스스로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전화 너머 최종수도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애인 백 명은 커녕 따로 진득하게 연락하는 사람은 최종수 한 명 밖에 없는 주제에 박병찬은 킥킥 웃으며 이 다음에 올 짜증 섞인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최종수는.
[바쁘면 당장 안 와도 돼. 알아서 해.]
“와, 정말?”
그 사이에 눈에 띄게 성장해버렸다. 낮게 목을 큼큼대던 최종수가 물을 마시는 듯 꼴깍거리는 소리가 통화에 고스란히 들렸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최종수는 물을 마신다. 컵 안에 든 물을 한 꺼번에 다 안 마시고 조금씩 나눠서 입술을 댄다. 용건만 간단히 하자는 박병찬의 말을 잊은 듯 통화를 켜둔 채 제 할일을 하며 꼼지락거렸다. 최종수가 미국에 있을 때 박병찬과 메신저로 두세 시간씩 통화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의 습관처럼 남은 행동이었다. 최종수는 물잔에서 입술을 떼어내고 말을 덧붙였다. 부모님이랑 따로 지내고 있으니까 너 올 때 빈손으로 와도 돼. 필요한 건 같이 사고. 주소랑 현관 도어락 번호 메시지로 보내놨어. 올 사람 너 뿐이라서 괜찮아. 아 그리고 너 차 갖고 올 거면 여기 방문증 신청해야 해서 차 번호 보내 놔. 여기 지하주차장 있으니까 거기 주차해 놓고. 최종수 놀리는 게 제일 재미있는 박병찬은 시시해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활기차게 물었다.
“근데 있잖아 종수야. 내가 진-짜진짜 바빠서 너희 집 못 가면 어떻게 되냐?”
[…… 그런 이유로 네가 싫어지진 않아.]
참았던 숨처럼 내뱉는 최종수의 대답을 듣고 박병찬의 마음 어딘가 동그랗게 구멍이 나버린 것만 같았다. 최종수는 전화를 끊었고 박병찬은 약속 장소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길 중간에서 차를 돌렸다. 운동하는 시커먼 남자들끼리 모이는 모임에 박병찬 하나 없어도 큰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네가 싫어지진 않아, 라니. 기분이 좋아진다. 박병찬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음흉한 웃음이 걸렸다. 못 본 사이 쫌 정신머리도 생기고 쫌 많이 귀여워졌네. 빨간불에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멈춰 세우며 박병찬은 핸들에서 손가락을 까닥거린다. 오랜만에 전화 와서 앞뒤 사정 설명 없이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하는 것도 웃겨 죽겠는데 그렇게 어른처럼 말하는 건 또 어디서 배웠대. 가슴께가 간지러워져서 박병찬은 웃음을 터트렸다. 애새끼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어째 박병찬 쪽이다.
박병찬은 당장 집으로 돌아가 28인치 캐리어를 꺼내 장롱 속의 옷이랑 속옷을 마구잡이로 담았다. 여행용 칫솔과 갤럭시 패드와 충전기도 둘둘 말아 대충 가방 안에 던져두었다. 박병찬은 점심도 거르고 핸드폰 내비게이션에 최종수네 집 주소를 검색했다. 최근에 들었던 온갖 노래가 짬뽕이 되어 콧노래로 흘러나왔다.
*
최종수는 신축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지하주차장은 아래로 삼층이나 있어도 주차 자리를 찾지 못해 뱅뱅 돌았다. 박병찬은 막 나가는 사람들을 기다려 겨우 주차를 했다. 차 가지고 오지 말 걸.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다. 식당에 온 어린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지하공간을 울렸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인 만큼 확실히 창문에 껴둘 외부인 방문증서가 필요해 보였다. 급격하게 피곤해진 박병찬은 최종수에게 전화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오랜만에 얼굴 보는데 밥이나 먹고 너희 집에 들어가자고 말하려고 전화했지만 최종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상가 방문하러 온 외부인과 아파트 주민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가 달랐다. 박병찬은 표시된 길을 따라 캐리어를 끌고 터덜터덜 걸었다. 신축 건물이라 그런가, 주거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찾는 것도 더럽게 복잡했다.
먼저 한 차례 사람들에게 엘리베이터를 양보하고 혼자 탄 엘리베이터에서 박병찬은 최종수네 도어락 번호를 입으로 외웠다. 중얼중얼 하고 있으니 딩,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전화를 다시 걸어도 최종수와 통화가 연결이 안 된다. 박병찬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핸드폰을 어디 다른 방에서 충전시키나. 방병찬은 어깨를 으쓱했다. 번호를 꾹꾹 누른 도어락에서 띠리릭, 하고 알맞은 소리가 들렸다. 잠금장치가 풀리자 문을 거의 부수듯이 열어 젖히며 박병찬이 들어왔는데 아무도 현관으로 나와주지 않았다. 뭐야뭐야. 야 종수야. 최종수. 우리 5년 만에 만나는데 환영이 박하다, 야. 박병찬이 현관에 아무렇게나 제 운동화를 벗어두며 최종수의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내가 약속 끝나고 오는 줄 알아서 잠깐 외출했나? 박병찬이 캐리어를 번쩍 들고 거실 한쪽에 넌지시 밀어두며 문이 반쯤 닫힌 방을 기웃거렸다.
최종수는 침대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진짜 요란하게 현관문을 열고 박병찬이 들어왔는데도 깨어나지 못했다. 최종수는 방금 막 잠든 어린아이처럼 주먹을 쥔 채 곤히 잤다. 자는 척 하는 건가 했는데, 아니다. 누가 옆에 있어도 모를 정도로 최종수는 잠들었다. 박병찬은 잠깐이라도 최종수를 흔들어 깨워 눈도장이라도 찍어야 그가 나중에 제정신으로 일어났을 때 덜 놀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잠든 최종수’ 자체가 낯설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스러운 얼굴이었다.
최종수의 방안에는 낯선 냄새가 풍겼다. 짐정리를 제때 못해 미국에서 생활하던 숙소 냄새가 묵묵하게 밴 옷들이 방 구석에 이민용 캐리어 째 놓여 있었다. 아까 일어난 거 아니었나. 왜 또 자고 있지?
“최종수. 나 왔다.”
조용한 최종수.
“형아 종수 보려고 약속 취소하고 날아왔어.”
잠 든 최종수.
얘가 이렇게 잠귀가 어두웠던가. 사실 최종수를 닮은 조각상이 아닐까. 박병찬은 엎드려 자고 있는 최종수를 만져 보았다. 음 아니군. 그냥 진짜 형아가 이 시간에 올 줄 모르고 처자고 있는 애새끼로군. 박병찬은 그래도 끝까지 최종수를 흔들었다. 최종수가 흐릿하게 눈을 뜨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얼굴을 들이밀어 눈을 잠깐 맞췄다.
“종수야. 나 왔어.”
“응…….”
최종수는 다시 눈을 감는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온다. 박병찬은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제 캐리어에서 짐을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온 최종수를 보며 소파에 길게 다리를 뻗고 있던 박병찬이 반가워했다. 박병찬이 이 집에 들어온지 세 시간만에 최종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박병찬은 제 핸드폰으로 시끄러운 영화를 틀어놓고 있었다. 최종수는 멀건 표정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마침 딱 저녁 시간이었는데 방금 막 일어난 탓에 무언가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소파에 몸을 기댄 박병찬에게 다가갔다. 이어폰도 끼지 않고 영화를 보던 박병찬은 최종수가 다가오자 액정을 톡톡 쳐서 영상을 일시정지 시켰다. 5년만에 보는 최종수는 박병찬의 기억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벌크 업이라도 했나. 아니면 내가 지금 아래에서 쳐다보니까 더 커 보이는 걸까. 막 일어난 최종수는 박병찬과 비좁은 소파에 같이 누우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냥 내려가지? 물어보는데도 대답 없이 몸을 햄버거처럼 겹쳐서 올라온다. 박병찬은 아랫배에서부터 압박감이 들어 숨이 좀 막혔다. 한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의 액정을 눌러 영화를 보던 어플에서 빠져나온다. 안겨드는 최종수가 방해받지 않도록 핸드폰을 거실 바닥으로 재빨리 내려놓았다. 박병찬이 움직여도 최종수는 장아찌 누름돌처럼 꿈쩍도 안 한다.
최종수가 혼자 지내는 집에 얹혀서 지낼 셈으로 캐리어에 짐을 한가득 챙겨 와놓고는 짐짓 배려하는 목소리로 박병찬이 물어봤다.
“종수야 그럼 당분간 형이랑 같이 지낼까?”
박병찬에게 모든 무게를 다 싣고 있는 최종수는 고개만 무겁게 끄덕였다.
*
최종수는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것이 언어가 머릿속에 뒤섞여 대화할 때 말을 좀 이상하게 했다. 미국에 있을 때에도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실제로 보는 건 또 달라서 박병찬은 최종수의 열리고 닫히는 입술만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만만치 않게 가라앉은 분위기 좀 바꿔보려고 박병찬이 그 말투를 놀리자 부끄럽고 화가 난 최종수는 그날 하루종일 입을 다물었다. 박병찬이 그 집 거실바닥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해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
“또 자?”
밤 늦은 시간에 박병찬과 함께 저녁 식사를 허술하게 챙겨먹은 최종수는 양치질을 끝내자마자 침대에 기어들어갔다. 박병찬은 양치질을 끝내고 샤워까지 한다. 젖은 머리를 드라이어로 바싹 말리고 수건을 베란다에 놓아둔 빨래통에 던져놓고 침대방으로 걸어왔다. 얘는 자정도 안 된 시간에, 방금 막 식사를 끝냈으면서 잠이 오나. 박병찬도 최종수의 옆에 가서 자리를 잡고 누웠다. 소파에 가서 자라고 밀어내지 않는 것을 보면 같이 자도 되는 모양이었다. 박병찬은 천장을 향해 누웠다가 언제나처럼 잠이 잘 오는 자세를 찾으려 이리저리 몸을 뒹굴거리며 몸을 웅크리려고 하는데 최종수의 커다란 손이 박병찬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손은 어깨에서 팔뚝으로, 팔뚝에서 손목으로 내려와 한쪽 손등 위에 포개어졌다. 결국 한쪽으로 몸을 고정해서 자게 생겼다.
그날 이후로 최종수는 잘 때 박병찬과 손을 잡고 잠들었다. 침대에 누운 최종수가 왼쪽 벽에 붙어서 자서 박병찬의 자리는 자동적으로 오른쪽 바깥 자리로 고정 되었다. 박병찬이 자려고 옆에 누우면 최종수는 새로운 루틴으로 적용하여 제 손으로 박병찬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만졌다. 길고 투박한 손끝이 박병찬의 귓불에 스치고 뺨에 닿았다. 최종수의 왼손 중지 끝이 박병찬의 콧잔등에 내려앉았다. 박병찬은 눈앞에 펼쳐진 네 손가락 사이로 고집스레 자길 만지작거리는 최종수를 인내심 있게 지켜본다. 최종수는 할 일 끝낸 후 손을 내려 박병찬의 할 일 없이 멍청히 내려놓은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 이제 자려고 눈을 감는다. 마른 침만 삼키던 박병찬이 참고 참다가 종수야 뽀뽀할래? 물어보면 최종수는 입술 한쪽 끝을 끌어올려 비웃었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눈가에 호선을 그렸다. 싫어. 잘 거야. 굿 나잇.
굿나잇은 개뿔이 굿나잇. 박병찬만 또 어금니를 깨물었다. 두 사람은 사귀지 않고, 제대로 된 관계의 정의도 없고, 뽀뽀도 안 하지만 손은 잡고 잔다. 최종수의 손가락이 박병찬의 것과 겹쳐 서로의 손등에 머물렀다.
*
박병찬은 최종수와 침대에 늘어지게 누워 스마트TV로 우주영상을 보다가 심해 영상으로, 심해영상에서 해저 영상으로 넘어갔다. 바다 아래의 문어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이어졌다. *문어의 의미를 해석해보면 글월 문文자에 물고기 어魚를 붙여 글을 아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문어의 지능은 놀라울 정도이며 그들은 우리와 친숙한 강아지와 비슷한…… 다큐멘터리 화면에서는 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오고 박병찬은 조금 흥미 잃은 얼굴로 영상 속 문어가 움직이는 모습을 시선으로 응시했다. 같은 화면을 바라보던 최종수가 옆자리에 반쯤 눕듯이 앉은 박병찬의 허리를 톡 친다. 천천히 입술이 열렸다.
“박병찬.”
그 부름에 박병찬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최종수를 눈으로 살펴 보았다.
“응.”
“너 그때 왜 나한테 문어 일곱개 중에 네개나 줬어?”
“응? 문어? 내가 그랬던가.”
박병찬은 기억을 더듬는 일이라는 게 뭔지도 모른다는 듯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최종수는 익숙하다는 듯 조용히 혀를 찼다. 어쭈구리. 최종수 너 지금 형아 앞에서 혀 찼냐? 박병찬이 시덥잖게 물어보는데 최종수는 그에 대한 대답은 안 하고 제 할 말을 했다.
“나 미국 가기 전에 너 만나러 인천 갔던 날. 너 갑자기 귀찮아서 아침 조금 밖에 안 먹었다면서 편의점 컵라면에 삼김 먹자마자 아아 마시자고 카페 가고, 금방 소화 시키자며 바로 근처 공원 가고. 우리 세 시간 넘게 일대일 하다가 또 점심 먹으러 횟집 들어갔잖아.”
“응? 아, 어어.”
“뭐야. 너 기억 못하지.”
그렇다. 박병찬은 그날의 일을 최종수만큼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 내가 너한테 고백했는데.”
이건 기억한다. 그 고백이 있었던 덕분에 지금 두 사람이 이 침대 위에 함께 누워서 해저탐험 시리즈 다큐멘터리 문어편을 보고 있었으니까.
“아, 회덮밥 먹다가.”
“응.”
“근데 그때 문어가 나왔어?”
최종수는 베개를 베고 비스듬히 누워있던 박병찬의 정수리를 노려 보다가 한숨을 쉰다. 문어가 유유히 바닷속을 헤엄치다가 검은 바위에 스르륵 내려 앉는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됐어. 그만 말해.”
“문어가 들어 있었어? 회덮밥인데?”
“박병찬 짜증 나니까 그만 말하라고.”
또 한 번 박병찬은 최종수에게 의문 모를 패배감을 안겨주고 말았다. 쫑수야. 대체 어디서 기분이 상한 건지 형아한테 말 좀 해보라니까. 라고 말하자 최종수는 창백해진 얼굴이 되어 알아듣지도 못할 영어로 박병찬에게 쏘아붙이듯 말을 지껄였다. 분명히 그건 박병찬을 향한 욕이었다.
*
밤늦은 시간의 목욕이었다. 야 종수야. 반신욕도 너무 오래 하면 안 좋대니까 빨리 나와라. 뭐 하나에 꽂히면 적당히 할 줄을 몰라, 애가. 박병찬은 딱 한 번 묘한 말투로 최종수를 채근하고는 더는 욕실 바깥에서 서성이지 않았다. 최종수가 옆에 없어도 괜찮다는 듯이 먼저 자러 방에 들어갔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욕조 속의 최종수는 물 아래에서 가슴과 배가 오르내리는 감각을 느끼다가 눈을 감았다. 분명히 숨을 쉬고 있었는데 코 안으로 들어오는 호흡이 멀어져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귀도 먹먹하고 피부에 공기가 방울방울 스쳤다. 눈을 뜨면 최종수의 머릿속에 살고 있는 박병찬이 발 아래에서부터 몸을 밀착하여 타고 오른다. 종수야. 이름을 부르는 박병찬의 입술이 최종수의 피부 곳곳에 머무르고 떠난다. 흡입한 듯 동그랗고 빨갛게 자국이 남았다. 최종수는 울긋불긋해지는 몸을 보다가 코앞까지 다가온 박병찬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다. 너무 가까워서 눈코입이 중앙으로 몰린 박병찬. 아, 박병찬 못생겼어. 틈 없이 다가온 박병찬에게 입술을 빨아먹히면서도 최종수는 웃지 않았다.
박병찬이랑 손 잡고 자려면 얼른 나가야지, 하던 중에 또 잠들었던가. 욕조에 누웠던 젖은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최종수는 기력 없는 손길로 미지근하게 식은 물을 욕조에서 빼냈다. 수분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뒷목에 닿을 때마다 어깨 부근의 근육이 흠칫 오그라들었다. 타일바닥의 물기를 닦는 일이나 정리정돈은 피곤해서 못하겠다. 욕실에서 몸만 겨우 나온 최종수는 수건을 두르지 않은 채 욕실 매트 위에 섰다. 몸을 닦고 옷을 입어야 하는데 손가락 까딱할 기운이 없다. 이틀 전에도 이렇게 아무 것도 못하겠어서 박병찬이 잠든 침대에 기어들어갔는데. 이번에도 최종수는 속옷 한 장 걸치지 못하고 침대방으로 휘청휘청 걸어갔다. 최종수가 지나온 마룻바닥에는 투명한 물이 뚝뚝 떨어져 물이 고였다.
침대방으로 들어온 최종수는 웅크려 자는 박병찬의 등 뒤로 다가온다. 그렇게 불쌍한 모양새로 자는 것이 습관인 걸 알면서도 최종수는 오른쪽 바깥에 잠든 박병찬을 길게 본다. 몸의 물기가 이불에 다 닦여나간다. 이불은 금방 축축해진다. 최종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제 팔을 넓게 펼쳐 박병찬을 안았다. 그리고 손을 찾는다. 손. 박병찬 손 어디 있지. 조형고등학교 라고 적힌 낡고 늘어난 티셔츠를 실내복으로 입은 박병찬의 등에 최종수는 자신의 물기 마른 뺨을 댄다. 기꺼이 박병찬의 손을 찾아낸 최종수의 손가락들이 촘촘하게 겹쳐왔다. 최종수는 한 번도 박병찬에게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해?’라고 물어보지 않았다. 구차하고 비겁한 박병찬이 이도저도 아닌 헐랭한 답변을 내놓을 것 같았고 최종수는 그 답변에 못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만 같아서.
박병찬은 등을 누르는 묵직하고 차가운 느낌에 잠에서 깼다. 티셔츠 안쪽으로 최종수의 숨결이 서늘하게 들어왔다. 얘는 왜 자꾸 씻고 나서 몸을 안 닦고 나오지. 불편한 감각이 들었지만 뒤에서 바위처럼 버티고 있으니 뒤척이지도 못했다. 박병찬은 그냥 눈을 감고 다시 잤다. 예전처럼 형아가 네 버릇을 고쳐준다, 는 말을 함부로 하다가는 어떻게 될지 박병찬도 감이 안 왔다. 제 버릇 고치기 싫은 최종수가 박병찬의 심장을 세 갈래로 찢어서 최, 종, 수, 라고 이름을 붙일지도 모른다. 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심장을 왜 세 갈래로…….
박병찬은 최종수의 꿈을 꾼다. 그것을 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환각. 환청. 환촉. 현실감 있는 상상. 뭐 그런 것과 흡사했다. 하필 또 최종수와 해저 영상 따위를 봐서.
움직이지 못하는 박병찬의 등 뒤에 달라붙은 최종수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지만 온몸이 끈적끈적하고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렸다. 박병찬. 부르는 목소리는 꼭 최종수의 것이 맞다. 목소리만으로 희열을 느끼는 이십대 후반 남성 박병찬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최종수는 입이 여럿 달린 사람처럼 동시에 박병찬의 몸을 쫍쫍 빨았다. 내가 뽀뽀하자고 할 땐 안 해주더니. 몸 안쪽부터 차오르는 굿나잇 키스다. 형아를 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가 따로 없다. 박병찬은 가위라도 눌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최종수의 배꼽 안쪽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최종수의 몸. 박병찬을 덮을 수 있는 커다란 최종수의 뜨거운 몸. 정신이 훅 멀어진다. 박병찬……. 또 다시 머리 위에서 이름이 불린다. 이상하고 짜릿해서 박병찬은 흥분한다. 최종수의 몸은 크고 넓고 온몸에 동그란 입술이 달렸다. 박병찬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팔이 여덟개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최종수였다. 그물에 몸이 감기듯 최종수의 피부가 박병찬의 위로 펼쳐진다. 박병찬. 옴짝달싹 할 수가 없는데도 하나도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으응, 왜 자꾸 불러 종수야. 박병찬과 최종수는 한몸이 된다. 거의 하나였다. 등뒤로 안겨든 최종수는 박병찬의 몸에 시커먼 먹물을 쏟아냈다. 박병찬은 그 감각이 좋아서 발을 버둥거렸다.
박병찬은 눈을 뜬다. 날이 밝아오는 아침이었다. 서울 한복판 주상복합아파트라 새가 짹짹 지저귀는 소리도 없는 도시의 아침. 밤 늦게 침대에 기어들어온 최종수는 박병찬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팔이 저리다. 박병찬은 무거운 머리를 들어 아래를 보았다. 최종수와 나눠 덮은 이불은 발 아래에 꽈배기처럼 꼬여 늘어져 있었다. 박병찬은 흐음, 한숨을 쉰다. 한쪽 손으로 낑낑대며 이불을 끌어왔다. 뭉친 이불을 펼쳐 모로 누운 최종수의 등 위로 덮어주었다. 이불은 눅눅하고 최종수는 알몸이었다. 박병찬은 과속방지턱에 걸린 자동차처럼 몸을 덜컹거렸다.
“아, 욕 나오네.”
좁은 침대에서 나직하게 내뱉은 혼잣말은 최종수가 아니라 더럽혀진 드로즈를 향한 것이다. 아닌가, 어쩌면 형아의 팬티 속사정도 모른 채 쿨쿨 잘자는 최종수한테 욕하고 싶은 것일지도.
인정하고 자시고, 수치도 뭐도 없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십대 남성 박병찬. 이기적이고 악독한 최종수가 남긴 사랑의 저주에 걸려 어쩌다 보니 성경험이 전무한 박병찬. 5년 만에 한국에 들어온 최종수의 권유를 덥석 물고 이 집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박병찬은 뿌리깊은 신체적 욕망의 하인이었다.
최종수랑 자고 싶다.
손 잡고 자는 거 말고.
03 욕실
흠뻑 젖은 최종수의 머리카락이 베개를 적신다. 꿈과 현실 그 어디 쯤에 최종수는 헤매고 있고 근심 없어 보이는 이불 속 박병찬은 최종수의 유일한 지표가 되어주었다.
최종수는 그 좁아터진 욕조에서
오래
오래
오래
오래
씻는다.
*
늦은 시간에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더니 슬슬 오줌이 마려워진 박병찬이 욕실 앞에 서서 문을 노크했다. 다음에 최종수랑 집을 구하게 된다면 욕실 두개 있는 곳으로 구해야지. 인천 쪽에는 화장실 두 개인 쓰리룸 전세도 종종 괜찮은 금액으로 나오던데. 그런 생각을 빠르게 이어가며 입을 열었다. 욕실 안쪽에서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종수야. 다 씻었냐? 나 화장실 좀 쓰자.”
박병찬은 보채지 않고 몇 초 동안 기다렸으나 욕실 안의 최종수는 대답이 없었다. 박병찬은 입을 꼭 닫고 방광의 상태를 가늠했다. 음, 안 되겠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싱크대에서 소변을 본다면 최종수가 분명 지랄하겠지.
“다 씻었으면 나와 봐.”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시 한 번 똑똑 욕실문을 두드린다. 종수야. 박병찬이 집주인의 이름을 부르며 욕실 문고리를 돌렸다. 잠겨있지 않은 문이 열리며 습기 찬 공기가 바깥으로 뿜어져 나왔다. 박병찬은 살짝 욕실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최종수는 물이 식은 욕조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욕실 거울에 물방울이 맺혀 주르륵 떨어진다. 박병찬은 젖은 욕실 슬리퍼에 맨발을 꿰어 신고 수증기 속을 걸어들어가 최종수가 잠든 욕조에 걸터 앉았다. 찰랑거리는 물이 찬 욕조 속에 볼품 없이 구겨져 있는 최종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최종수는 얼굴이 발그레 익었다. 머리카락과 얼굴은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에 흠뻑 젖었다. 박병찬은 다시 한 번 최종수를 불렀다. 제 손이 최종수의 뜨거워진 몸에 비해 초라할 만치 차가울까봐 걱정스러웠다. 종수야.
미국에서 돌아온 최종수는 정신 없이 잤다. 길었던 불면으로 잠들지 못했던 나날을 이제야 보상 하듯이.
소매를 팔꿈치 위쪽으로 걷은 박병찬은 물 안에 손을 넣어 고무 마개를 폭 빼내었다. 최종수의 몸 절반을 적시던 물은 천천히, 그러나 일정한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 사이에 박병찬은 화장실에서 바지를 내리고 볼일을 본다. 최종수가 눈 뜨면 마주칠 반쯤 깐 엉덩이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신이 있었다. 그게 무슨 자신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아 있어, 그런 게.
하지만 최종수는 계속 잤다. 바지를 올려 입고 세면대에서 손을 대충 씻어낸 박병찬이 다시 한 번 최종수의 어깨를 손으로 문질렀다. 알몸의 최종수는 잠결에 짜증을 냈다. 박병찬은 욕실의 환풍기를 켜는 스위치를 누르고 욕조 끝에 걸터 앉아 최종수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바지가 조금씩 젖어들었다. 욕조의 물이 종아리에서 발목까지 줄어들었을 때 최종수는 뒤늦게 눈을 떴다. 잠자는 욕실의 공주는 입맞춤 없이 혼자서도 눈을 떴고 박씨 왕자는 할일이 없었다. 최종수는 젖은 몸이 식어 간지럽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감았다 뜬 속눈썹 위로 옅은 방울이 맺혔고 최종수가 손으로 눈을 슥슥 비볐다.
“박병찬 여기서 뭐해.”
“나는 너 깨우려고 했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깨웠는데, 네가 짜증 내서 일단 기다렸어.”
“아…… 왜?”
짜증이 심해서 일단 기다렸다는 대답에 돌아오는 왜, 라는 질문은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들렸지만 박병찬은 알아들었다. 박병찬은 벽에 걸린 수건을 손으로 휙 끌어내려 최종수의 얼굴 앞에 짠, 하고 보여주었다.
“형아가 친절이 종수의 몸을 닦아주고 침대에서 재우려고 기다렸다.”
싫다 좋다 말도 없이 젖은 손으로 얼굴을 슥슥 닦아내던 최종수는 힘없이 일어나 욕조를 빠져 나왔다.
“샤워 안 해? 머리라도 감지.”
“……그럼 나가 있어.”
“오냐.”
박병찬은 살짝 촉촉한 수건을 들고 욕실을 나갔고 최종수는 다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수건을 끝에서 끝까지 조물조물 만져보던 박병찬이 빨래건조대에서 마른 수건을 가져오는 동안 닫힌 문 너머 샤워기 소리가 들렸다. 쏴아, 쏟아지는 물소리가 뚝 끊긴다. 한 차례 샤워를 끝낸 최종수가 느릿느릿 걸어나오는 동안 박병찬은 욕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바깥 공기와 수증기 감도는 따뜻한 공기가 뒤섞여 최종수는 몸을 짧게 떨었다.
“아씨, 추워.”
“뭘 이 정도로. 참아.”
최종수의 피부에 고였던 물방울은 좌우로 마땅한 길을 내어 아래로 흘렀다. 가슴과 윗배, 배꼽을 지나 아랫배, 허벅지, 무릎, 종아리, 발목까지. 박병찬은 마른 수건을 들어 최종수의 뒷목부터 차근차근 닦아주었다. 누가 친구한테 이렇게 잘해주냐. 속으로 웃었다. 아직 남자친구라고 부르기 뭐한 최종수의 젖은 몸을 닦아주며 박병찬은 기분이 이상했다. 특히 종수의 종아리 뒤쪽, 무릎 안쪽의 물기를 닦아줄 때는 약간 심장이 벌렁거렸다. 발간 손목 안쪽과 퉁퉁 불은 손바닥의 물을 쓸어내고 수건을 목 뒤에서 시작해 머리에 아무렇게나 얹었다. 회색 터번을 두른 것 같은 모양이었다.
“종수야. 졸려?”
“아니. 지금은 잠 깬 것 같아.”
“그럼 머리도 말리자. 드라이어 가져갈 테니까 침대방에 가 있어.”
“응.”
최종수는 넓은 침대 바로 옆에 놓인 원목 서랍장 안에서 속옷을 꺼내 입었다. 축축한 수건이 머리에서 흘러내려 몇 번이고 다시 제 자리에 올려두었다. 처음의 터번 형태는 없고 사우나 가는 아저씨의 땀닦는 수건처럼 엉성하게 얹혔다. 박병찬은 최종수를 바닥에 앉히고 자신은 침대에 앉아 헤어드라이어를 켰다. 뜨거운 바람으로 머리를 말려준다.
“종수야.”
“응.”
“너 어디 아파?”
“아니. 왜?”
“안 아프면 됐다. 혹시나 했지.”
박병찬의 가슴 아래에서는 ‘너 너무 많이 자서…….’ 그 말이 심장과 함께 두근두근 울렸다. 최종수는 더 묻지 않고 머리카락을 박병찬에게 맡겼다. 윙 울리는 드라이어 소리만 길게 공간을 차지했다. 최종수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찰랑찰랑 흔들던 박병찬의 손끝은 뜨끈해진다. 기분 좋아진 작은 동물처럼 최종수는 꾸벅꾸벅 졸았다. 머리가 무겁게 앞으로 풀썩 꺾였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중에는 무릎을 세워 이마를 불편하게 기댔다. 박병찬은 드라이어를 끄고 최종수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최종수. 그러지 말고 잘 거면 침대에서 자. 최종수는 나른하게 침대로 올라와 박병찬의 손을 잡았다.
“아니아니. 야 아직 열 시도 안 됐어. 난 안 졸린데?”
박병찬이 얽힌 손을 풀며 웃었고 최종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박병찬이 아이고 이 잠만보야, 하고 앓는 소리를 낸다. 잠만보? 최종수는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그게 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박병찬은 이불을 당겨 최종수의 목 아래까지 덮어주었다. 최종수는 고집 피우지 않고 박병찬의 손이 빠져나간 제 손을 말아쥐어 또 한참 크는 아기처럼 잔다. 최종수의 머리카락은 물기 없이 말랐다.
*
냉장고가 텅 비어있는 꼴은 약 3주간을 유지했다. 보다 못한 박병찬이 주차장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던 차를 이끌고 혼자서 장을 보고 왔다. 솔직히 본인은 먹는 거 귀찮고 관심 없는데 최종수도 거의 식물처럼 지내는 거 보고 이건 안 되겠다 싶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왔지만 또 빠트린 게 있어서 박병찬은 최종수와 아파트 아래에 있는 편의점에 왔다. 나란히 걷던 최종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혼자 찔린 박병찬이 “다음에는 뭐뭐 살 건지 네가 잘 적어두고 같이 장 보러 가면 되지.” 라고 씩 웃으며 말했다. 당기세요, 라고 적힌 유리문을 당겨서 여는 박병찬의 뒤를 따라 시원한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 최종수는 시큰둥했다.
고기쌈장, 깐 양파, 종이호일, 오렌지맛 환타, 새 치약과 함께 박병찬은 소주 한 병을 꺼내서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다. 최종수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며 박병찬에게 물었다.
“술 마시게?”
“응. 너도 마실래? 한 병 더 꺼내올까?”
“아니.”
“왜. 같이 마시지. 우리 저녁 고기 구워 먹기로 했잖아.”
“야 너는 진짜 시즌 아니라고 관리도 안 하냐?”
……싸가지가 없어도 웬만치 없어야지. 소주 한 번 마신다고 했다가 박병찬은 애새끼랑 절교하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이것도 최종수의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
잠귀가 밝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박병찬은 잠결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몇 시인지 가늠 되지 않을 만큼 집안은 캄캄했고 욕실 안에서 누군가 첨벙거렸다. 그것은 물을 채운 욕조에 푹 담긴 최종수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와 닮았다. 박병찬은 침대 옆자리의 덩치 큰 남자의 가슴을 더듬더듬 만졌다. 최종수는 박병찬의 옆에 있다. 박병찬의 불안 가득한 손길에 최종수는 어린애처럼 으응, 하고는 어깨를 뒤척였다. 이불이 제 몸에서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손을 피해 반대로 몸을 돌려 누웠다. 잠든 최종수는 박병찬의 옆에 있는데 저 소리는 어디에서 들려오는 걸까. 잘못 들었겠거니 하고 최종수의 어깨로 팔을 뻗으며 숨을 푹 내쉬었다. 달그락…… 퐁당…… 꼬륵…… 참방……. 무시하고 자려다가도 간헐적인 소리가 잠들지 못한 농구선수의 귀를 간지럽혔다. 박병찬은 손을 길게 뻗어 침대 옆 탁상에 올려놓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윗집에서 늦은 시간에 목욕을 하나. 뭐 언제라도 뜨밤을 보낼 수 있으니까 윗층에서 씻는 소리가 선명히 내려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자꾸만 윗집도 아랫집도 아닌 이 집 욕실에서 소리가 울리는 것 같을까.
잡힌 손을 살살 흔들어 빼낸 박병찬은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갔다. 유리컵에 물을 붓고 입술을 적시는 동안 또 다시 물과 사람의 피부가 찰박찰박 닿는 소리가 들렸다. 물을 꼴깍 삼켜낸 박병찬은 눈을 감고 소리에 귀기울였다. 내가 귀신 무서워 할 나이는 지났지.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은 박병찬은 저벅저벅 욕실로 향했다. 닫힌 문 앞에 섰다. 스위치를 눌러 불을 먼저 켰다. 짧은 호흡 후 닫힌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욕조는 텅 비었고 욕실 내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타일바닥에 물기도 없고 문 아래에는 박병찬이 슥슥 바닥을 닦아 밀어둔 젖은 수건이 놓여 있었다. 박병찬은 허리를 숙여 수건을 집어들었다. 욕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베란다 빨래 바구니에 수건을 던져놓고 돌아왔다. 욕실 전등을 끄고 다시 최종수가 누워있는 침대방으로 갔다. 박병찬은 옆의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시커먼 남자가 깨지 않도록 신경 써서 침대에 누웠다. 등에 닿는 침대 매트리스가 포근하다. 박병찬은 최종수의 어깨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끌어올려 다시 덮어주었다. 잠결에 꼬물꼬물 최종수가 손을 잡아왔다. 박병찬은 최종수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엮으며 눈을 감는다. 역시 윗집이었나 봐. 그렇게 생각하며 베개에 머리를 푹 눕히는데.
활짝 열어놓은 욕실 문이 끼익, 소리 내며 달칵, 닫혔다. 바람으로 인해 절로 닫히는 게 아니다. 소리만 들으면 최종수가 목욕하러 들어가나 보다 했을 테다. 그만큼 똑같았다. 아…… 이 집에 목욕 좋아하는 최종수 귀신이 있나 보네. 감은 눈을 뜨지 않던 박병찬의 심장이 개쫄아붙었지만 결국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한다.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 욕실귀신은 꽤 친근한 이미지였다. 응 그래그래. 물속에 사는 인어공주 최종수. 물 맞으면 머리카락이 더 착 가라앉고 조금 마르면 꼬불꼬불 휘어지는 최종수. 하지만 물속에서는 농구 못하지. 뽈 못 잡지. 뽈 잡으려고 마녀한테 가서 인간다리 만들어 올 최종수. 그리고 빈 종이에 글을 써서 나한테 하고픈 말을 전하겠지. 나랑 일대일 해.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가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욕실 저 너머의 그것이 무엇이든 시끄럽게만 굴지 않으면 박병찬도 이대로 인간 최종수를 꼬옥 껴안고 잠들 수 있다. 맞잡은 손의 온도가 따뜻했다. 최종수는 잠잘 때 몸이 따끈해지는 편이었다. 박병찬이 귀신 무서워 할 나이가 지나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
다음날 아침, 박병찬은 양치질을 하다가 잇몸에서 피가 났다. 어라. 퉤, 뱉는 거품이 흰색이 아니라 분홍색이었다. 무심결에 너무 세게 닦았나. 박병찬은 양칫물을 머금은 채 어눌한 발음으로 밖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최종수에게 말을 걸었다.
“종수야. 새 칫솔 남는 거 있냐.”
“싱크대 옆에 있는 선반 아래 찾아 봐.”
양치질을 대충 끝내고 박병찬의 칫솔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입을 헹궈낸 후 부엌으로 간다. 양치컵에 담긴 최종수의 군청색 칫솔과 똑같은 디자인의 칫솔이 투명한 플라스틱 포장 안에 조르르 꽂혀 있었다. 박병찬은 최종수와 똑같은 모양새의 칫솔 중에 분홍색을 골랐다. 가장 마지막에 최종수의 선택받게 될 핑크. 가장 눈여겨 보지 않을 핑크. 그리고 어쩐지 이 색깔을 골라서 양치컵에 꽂아두면 면도하러 들어온 최종수에게 한 소리 들을 것도 같고.
“박병찬 칫솔 이거 뭐야.”
빙고. 박병찬은 흠흠흠 소리내어 웃으며 대답했다.
“뭐긴 뭐야.”
“다른 색깔 없었어?”
“있었는데 왜. 핑크가 어때서. 남자는 핑크지.”
박병찬이 캐리어 가득 가져온 옷 대부분은 무채색이고 얌전한 컬러라는 걸 최종수는 뻔히 안다. 핑크색 옷은 커녕 소품도 들여놓지 않으면서.
최종수는 세면대 앞에 서서 허리를 깊게 숙여서 세수를 했다. 미온수를 틀어놓고 이마부터 턱끝까지 비누칠을 했다. 푸, 푸, 세수하는데 숙인 옆구리 근처에 뭔가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쪽에는 욕조가 있었으므로 부엌 쪽에서 움직이는 박병찬은 아니었다. 최종수는 보지 않아도 그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수전을 끄고 물이 고여 흘러내려가는 크림색 세면대를 바라보았다. 눈알을 옆으로 굴리지도 못하고 굳어버린다. 몸을 뒤집어 삼키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몸을 감추지 않고 멀뚱히 최종수의 옆에 서 있었으며, 최종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수 후 흘러내리는 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이마에서부터 콧등으로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우습게도 팔꿈치가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최종수는 허리를 벌떡 세웠다. 그제야 그것은 욕조 아래로 몸을 숨겼다.
최종수는 욕조 안에 담긴 게 무엇인지 자세히 보지 않는다. 얼굴에 흐르는 물을 닦지도 못했다. 욕실에서 빠져나와 그것이 문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최종수는 빠른 걸음으로 박병찬이 있을 부엌으로 갔다. 원목식탁에 앉아 우유와 국그릇을 꺼내두고 호랑이가 엄지를 척하고 올리고 있는 콘푸로스트 포장을 뜯는 박병찬을 불렀다.
“박병찬.”
“어?”
“욕조에 이상한 거 있어.”
이상한 게 뭔데? 또는 무슨 말이야? 따위로 반문하지 않는다. 박병찬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뜯지도 않은 콘푸로스트를 겸허하게 내려놓으며 박병찬은 식탁에서 일어나 맨손으로 욕실로 갔다. 식칼이나 가위를 들고 들어간다면 최종수가 깜짝 놀랄 테니까, 필요하다면 주먹으로 패버릴 생각이었다. 역시 이 집 욕실에 귀신이 사는 게 분명하다. 제 등 뒤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최종수의 어깨를 두번 두들겨준다. 박병찬은 기합을 넣고 욕실문을 빵 열어 젖였다. 아까 본 욕실과 똑같았다. 깨끗하고 아무 것도 없다. 맨발로 척척 들어가 욕조를 스윽 내려다보아도 어떤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 것도 없는데 종수야.”
“분명히 뭐가 있었다고.”
“눈으로 제대로 봤어? 뭐가 있었는데.”
“몰라.”
박병찬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입으로 음- 하고 소리를 낸다.
“종수야. 그거 아냐? 아무래도 이 집 욕실에 귀신 있는 것 같다.”
“뭔 헛소리야.”
“어어, 진짜라니까. 나도 전에 너랑 같이 침대에 자다가 잠깐 깬 적 있는데 자세히 귀 기울이니까 문 닫힌 욕실 안쪽에서 뭔가 퐁당퐁당하는 소리 들려서 개쫄았거든.”
“세상에 귀신이 어디있어.”
“그으래 종수야. 우리 구단 사람들 옛날에 한 번 우승기원제사 지내고 어떻게 아다리가 딱 맞아서 그해 처음 우승했는데, 그 뒤로 아직도 어디 용하다는 선녀님한테 날짜 받고 그날 선수들이랑 감독님이랑 구단 윗사람들 싹 모아서 제사 지낸다. 구라 같지? 나도 절 올린 적 있어.”
“야 그거랑 그게 같아?”
“뭐 크게 다른가.”
최종수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서 욕조와 그 앞에 선 박병찬을 번갈아보았다. 이 일에 자그마한 책임감을 느낀 박병찬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쩔 수 없다, 종수야.
“퇴마를 하자.”
“퇴…… 뭐?”
퇴마? 단어를 듣자마자 최종수는 짜증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박병찬은 퇴마의식을 위해 실내복으로 입던 트레이닝 바지를 훌러덩 벗는다. 입고 있던 검은색 반팔을 두 번씩 접어 흘러내리지 않도록 어깨를 드러냈다. 양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제가 딱 한 잔만 마신 소주도 냉장고에서 병째 꺼내왔다. 욕실청소용 락스와 다용도 청소솔과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예전의 칫솔을 들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면대 위에 올려둔 폼클렌징과 칫솔치약을 시작으로 수납장에 든 남성 스킨, 여분의 면도기, 뚜껑에 먼지 쌓인 가글, 수건 등등을 죄다 꺼내 욕실 바깥으로 내어 놓았다. 박병찬은 대용량 바디샴푸를 묻힌 욕실용 수세미를 주물러 거품을 낸 다음 거울을 싹싹 문지르고 화장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락스를 구석구석에 뿌려댔다. 그 사이에서 초록색 빛깔의 소주병이 눈에 확 들어온다. 욕실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던 최종수가 박병찬에게 말했다.
“야 쪼그리고 앉지 마. 무릎에 안 좋다며.”
“그럼 뭐 화장실 청소를 서서 하냐? 이 정도는 괜찮아.”
박병찬이 최종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퇴마 의식이다. 이게 왜 집주인 최종수를 위한 퇴마냐고 묻는다면…… 아마 이 욕실에 사는 것은 박병찬의 음란마귀일 가능성이 99.9퍼센트라서 그렇다.
의식은 약 50분 간 이어졌다. 문 바깥에 앉아서 박병찬을 기다리던 최종수도 나중에 소파에서 잠들었다. 의식의 맨 마지막에 소주병 뚜껑을 열어 양치컵에 콸콸 부었다.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아깝지 않았다. 양치컵에 부은 소주를 타일바닥에 뿌리던 박병찬은 양치컵을 기울여 소주 한 모금을 꼴깍 삼켜본다. 크, 절로 나오는 소리와 함께 눈살이 구겨진다. 좋아하지도 않는 소주 맛을 음미한 후 입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했으니까 꺼져주라. 찾아서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나는 괜찮거든? 근데 애가 무서워 하잖냐. 무엇인지도 모를 존재에게 겁박도 해본다. 혼자 말해 놓고도 헛웃음이 비죽 흘러나왔다.
이제는 끝난 것 같았다. 박병찬은 허리를 젖혀 찌뿌드드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이고 삭신이야. 팔자에도 없는 퇴마의식을 하느라 몸이 힘겹다. 박병찬은 물에 젖은 속옷과 앞쪽에는 락스가 튀고 등쪽에는 땀에 젖은 셔츠를 벗고 욕실 앞에 벗어두었던 바지도 빨래통에 훌쩍 던져버린다. 박병찬이 의식을 치르는 동안 자신은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생각하던 최종수는 드럼 세탁기에게 할 일을 주었다. 세탁기는 철썩철썩 빨래를 하고 있었다.
서랍 속 새 실내복을 꺼내서 주워입고 거실로 나온다. 긴 소파에서 쿠션으로 얼굴을 가리고 잠든 최종수를 흔들어 깨웠다. 지친 박병찬과 졸린 최종수는 함께 침대로 간다. 아, 빈속에 소주 마셨더니 갑자기 속이 쓰리네. 최종수의 옆에 누우며 박병찬은 입 찢어지게 하품을 했다. 눈도 못 뜨는 최종수의 손가락이 박병찬의 손으로 익숙하게 엮여들었다.
모서리마다 한 컵씩 뿌려놓은 소주 냄새가 욕실 안에서 풀풀 풍겼다.
04 사랑
한참 낮잠을 자고 일어난 최종수는 옆자리의 박병찬을 보았다. 박병찬이 이 시간까지 낮잠을 오래 자는 건 처음 봤다. 운동도 많이 하는 선수면서 욕실 청소 한 번에 곯아떨어졌다. 그러게 퇴마는 무슨 퇴마. 최종수는 머리를 긁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수마가 덜 빠져나간 몸은 구름을 밟는 듯 걸음이 흔들렸다. 부엌에는 박병찬이 꺼내놓은 우유가 냉장고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최종수는 박병찬이 꺼내놓은 우유와 그릇과 콘푸로스트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러다 다시 뒤돌아서 침대방으로 돌아와 박병찬이 걷어찬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 덮어준다. 박병찬은 바보다. 고등학교 때 경기에서 만난 그 순간부터 바보였다. 바보같은 박병찬을 최종수가 좋아했다. 농구 보다는 덜 생각하는 것 같아. 아니 그래도 요즘 만난 사람 중에서는 제일 많이 떠올리고 있는데. 원래도 긴 하루가 더더욱 길어지던 나날 속에서 아무래도 박병찬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계속 생각하다가, 그날 사랑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유일무이한 첫사랑이다.
빨래가 다 끝났으려나. 멀거니 서 있던 최종수는 웅크리고 자는 박병찬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눈을 끔벅이며 세탁기가 있는 뒤쪽 베란다로 갔다. 베란다는 열린 창문에서 바람이 들어와 싸늘했다. 빨래가 끝나 멈춘 세탁기는 조용하다. 모아놓은 빨래 바구니에는 박병찬이 아까 입었던 검은색 티셔츠가 덜렁 놓여 있었다. 티셔츠 앞뒤로 군데군데 락스가 튀어 검은 셔츠에 연갈색과 하얀색의 얼룩이 졌다. 최종수는 박병찬이 벗어둔 티셔츠를 집어들었다. 티셔츠의 락스 자국을 빤히 내려다보던 최종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이 울렁거린다. 락스냄새와 마른 땀냄새 섞인 이 티셔츠를 남몰래 숨겨두고 싶어졌다. 이걸 숨겨둔다고 해도 무심한 박병찬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텐데. 그랬냐고, 전혀 몰랐다고, 그런데 그 옷을 왜 숨겨뒀느냐고 물어보면서 그냥 웃고 말겠지. 온갖 예민은 다 떨어대는 척하면서 사실은 누구보다 무던하고 제 감정에 둔한 박병찬. 어쩌면 박병찬에게는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
베란다 타일바닥을 딛는 맨 발바닥 아래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생경했다. 아, 슬리퍼. 최종수는 베란다 문 아래에 놓인 슬리퍼를 찾아서 발을 집어넣었다. 세탁기 쪽으로 가려다가 다시 빨래 바구니 속 박병찬의 티셔츠를 본다. 손가락은 까딱하지도 못하고 보기만 한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잘 모르겠다. 바라던 게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흐릿해져서 최종수의 손바닥은 텅 비었다. 이전의 자신이 무엇을 바랐는지도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젖은 빨래를 널어야 하는데도 최종수는 침대 위의 박병찬 옆자리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손을 꼭 맞잡고 자는 박병찬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스르륵 눈을 감으면…….
베란다에 가만히 서서 최종수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락스냄새가 덕지덕지 묻은 박병찬의 티셔츠에 얼굴을 박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
최종수는 한쪽 손에 후라이팬을 들고 욕실 문을 열었다. 박병찬의 퇴마 의식을 거친 욕실에서는 번쩍번쩍 빛이 났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다. 후라이팬을 손에 쥐고 세면대 근처에서 허리를 숙였다 펴도 그 존재는 더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그게 효과가 있다니. 최종수는 어처구니가 없다. 손으로 세면대를 잡아 지문을 묻히는 것도 미안해질 만큼 욕실 모든 곳이 뽀득뽀득 했다.
끼니도 거르고 두 시간 가까이 푹 자고 일어난 박병찬은 눈 뜨자마자 최종수를 찾았다. 자면서 베개에 헤드뱅잉이라도 했는지 머리 옆쪽이 헝크러져 있었다. 수분이 부족한 목 아래에서 쇤 소리가 났다.
“어이, 최종수야.”
“응.”
박병찬은 부엌으로 가서 마트 브랜드 명이 적힌 생수병의 뚜껑을 열었다. 이제 제 집의 물건을 다루듯 자연스럽게 찬장에서 컵을 꺼냈다. 입안 전체가 뻑뻑하게 말라 물을 한 컵 마셔야만 다음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최종수의 눈은 박병찬에게 향했고 박병찬은 최종수를 똑바로 보며 천천히 물을 삼켰다. 박병찬의 젖은 입술이 반듯하게 열린다. 5년 전, 2주간 내내 스무 살 최종수를 귀찮게 했던 스물두 살 박병찬의 순진하고 노골적인 질문.
“너 정말로 나 사랑해?”
정말로? 아직도? 박병찬은 답을 알고 있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다. 최종수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마네킹 같은 무표정으로 부엌에 선 박병찬을 보았다. 박병찬의 얼굴 위로 그가 베란다에 벗어두었던 검은 티셔츠의 락스 얼룩이 겹쳐 보였다. 최종수의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흔적이었다. 어? 대답해 봐, 종수야. 아직도 나 사랑하냐고. 박병찬은 식탁에서 최종수의 옆으로 걸어온다. 자다가 뭔 봉창 두드리는 소리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박병찬 말하는 거 왜이렇게 양아치 같지. 최종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박병찬이 소파 바로 옆에 앉는 동안에도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박병찬은 제 팔꿈치로 최종수의 옆구리를 꾸욱 찌른다. 그리고 물음에 덩달아 부끄러워진 스물다섯 살 최종수는 스무살 때 그랬던 것처럼 박병찬과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고.
“응. 사랑해.”
겨우 대답했다.
최종수의 대답에 박병찬은 냅다 입을 맞췄다. 절대 낮잠 전 한 모금 마신 술기운 따위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러니까, 5년 전에 최종수가 미국에 가기 전에 걸어둔 저주에 대한 박병찬의 진심이었다. 입을 잘못 놀린 탓에 박병찬의 모든 연애를 망하게 했으니 이건 전적으로 최종수의 책임이었다.
서로의 앞니가 꼴사납게 퍽 부딪쳤다. 박병찬은 멈추지 않았고, 짐승처럼 달려든 연상의 남성에게 기겁한 최종수는 숨을 쉬지 못했다.
*
박병찬의 손을 강하게 붙든 최종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만 할래. 듣고 있던 연상남은 연하남에게 배운대로 코웃음 친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박병찬은 잡힌 손을 힘으로 눌러서 최종수 위로 엎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구만 뭘 그만해.”
얼굴이 회색빛으로 질린 최종수도 필사적으로 박병찬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팽팽하게 대치한다.
“너랑 하면 죽을지도 몰라.”
힘이 밀리는 건 절대 아니었는데 최종수가 뱉어낸 말이 이상해서 팔 한쪽이 삐끗했다. 최종수가 지금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은 사람? 박병찬은 한 개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머리도 나름 좋고 말귀도 잘 알아먹는 편이라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버벅댄 적이 없는데 최종수와 있으면 늘 한 박자씩 멈칫하게 된다. 뭐래는 거야.
“왜?”
“…….”
“대답 기다리다가 해 떨어지겠다, 종수야.”
“……너무 좋아서.”
여전히 한 개도 이해하지 못한 박병찬은 방긋 웃는다. 이제 작전을 바꿔서 최종수를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온몸에 힘을 풀고 최종수를 품에 안으려고 팔을 벌렸다. 형아는 우리가 나름 대화가 잘 되는 조합이라고 믿어왔는데. 너무 진지하게 헛소리를 하니까 이것도 웃기고 재미있다, 종수야. 박병찬은 뚫린 입이라고 되는 대로 말해버리고 박병찬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최종수는 두피가 뜨거워진다.
“그러지 말고. 응?”
“싫다니까. 넌 날 죽이고 싶어?”
“이 짜식이 형한테 정색하네. 안 죽어. 왜 죽는다고 생각해?”
“죽는다고.”
“아니, 설마. 종수야. 죽는 건 농구하다가도 심장마비 와서 죽을 수 있어.”
“뭐라는 거야. 농구하다가 왜 심장마비가 오는데.”
“그럼 같이 자다가 죽는 건 말이 되냐?”
최종수는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기로 마음먹은 박병찬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심장은 몸 한가운데에 있는데 발끝부터 열이 올라 머리 뚜껑이 열릴 것만 같았다. 덥석덥석 몸을 짚어오는 박병찬을 손으로 힘껏 밀어낸다. 최종수는 이마를 감싸쥐고 몸의 면적을 최소한으로 줄여보려고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최종수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지던 박병찬이 조용히 물어본다.
“종수야. 진짜 싫어?”
“어…….”
“뽀뽀 열 번만 해보면 너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첫번째. 최종수는 여전히 시멘트로 굳힌 듯 몸이 딱딱했고 박병찬은 능숙하게 최종수의 뒤통수를 움켜지고 입을 맞췄다.
두번째. 최종수는 눈을 꾹 감고 손으로 박병찬의 손을 잡는다. 박병찬은 한쪽 손은 최종수와 맞잡고 한쪽손은 아직 사귀자고 말도 못한 남친 미만 친구 이상 남성의 어깨를 잡고 눌렀다.
세번째. 최종수의 입술에서 입을 떨어트린 박병찬이 헤, 웃으며 최종수에게 묻는다. “야. 오늘부터 형아랑 1일이다?”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이 시-뻘-게-진 최종수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끄덕 움직였다. 박병찬이 환하게 웃었다. 오예. 최종수의 입술에 묻은 침이 전등에 비춰질 때마다 반짝반짝 번들번들 빛이 난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박병찬은 최종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번째. 박병찬의 입술이 맞닿으면 최종수가 입을 벌린다. 열린 입술이 떨린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숨 쉬는 타이밍이 어긋났다.
다섯번째. 이제 슬슬 최종수도 입을 맞춰온다. 고개를 꺾으며 호흡이 섞였다. 입만 맞추고 있는데도 몸 전체가 들썩들썩 반응해서 박병찬도 적잖이 당황한다. 입술과 혀의 감촉에 소름이 돋는다. 아씨. 기분 좋아. 어떡해.
최종수는 첫사랑 박병찬과 이런저런 시도하던 중에 서서히 눈앞이 캄캄해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뽀뽀 아홉 번째에는 다시 한 번 박병찬을 밀어내고 숨을 몰아쉬면서 딸꾹질까지 했다. 박병찬도 뺨에 열이 오른 느낌이 들긴 했지만 최종수는 가슴부터 눈두덩까지 색칠한 것처럼 빨개졌다. 딸꾹질이 쉽게 멎질 않는 최종수를 보던 박병찬이 다시 슬쩍 최종수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붙여온다. 종수야. 닿는 몸이 뜨거울 것 같았는데 차가워서 박병찬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최종수는 거의 운다.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려도 되나 싶을 만큼 최종수는 식은땀을 쏟았다. 뱅글뱅글 도는 눈으로 박병찬을 보던 최종수는 신경질이 나는 듯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눈물은 안 나는데 훌쩍임이 거세진다. 몸이 뜨겁게 열이 올라 머리가 둥둥 울렸다. 뽀뽀 아홉 번에 모든 행위가 질려버린 최종수는 숨을 씨근덕거리고 이미 한참 전에 상하의를 탈의하고 드로즈만 입고 침대에 누워있던 박병찬은 웃음을 참아댔다. 애새끼가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다는 듯 배를 잡고 웃는다. 뽀뽀고 뭐고 분위기는 이미 물건너 갔다. 훌쩍이는 콧물이 멈추질 않아 인중으로 쭈르륵 흐른다. 최종수는 검지로 코를 막았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연인 최종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박병찬은 웃음이 멎는다. 최종수의 코 아래로 흐르는 붉은 피에 경악했다. 박병찬은 제 입술을 깍 깨물었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얼마나 빠르게 일어섰는지 이불 위에 앉은 먼지가 공중으로 풀썩 일어날 지경이었다. 박병찬은 침대 옆 서랍장 위에 놓인 티슈를 성급하게 팍팍 뽑아서 최종수에게 한 뭉치를 건넸다.
“어어, 종수야.”
“왜.”
“이걸로 막어. 너 코피 난다.”
“뭐?”
최종수는 그제야 손바닥을 바라본다. 코에서 흘러내린 빨간 피가 인중과 입술을 지나 곰발바닥 사이즈의 큰 손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최종수는 어금니를 악물고 박병찬을 노려보았다.
“야이씨, 박병찬…….”
“에헤이, 코피가 대체 왜 나지. 너 내 몸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박병찬이 티슈로 최종수의 코 아래를 누른다. 울컥 넘치는 피 비린내에 최종수의 눈이 빙글뱅글빙글뱅글 돌았다. 달아오른 흥취는 아까 전에 식었는데도 머리가 어지럽다.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이 시간까지 한끼도 안 먹었는데. 아까도 물만 조금 마셨잖아. 그러다 자고 일어난 박병찬이 자기 사랑하냐고 물어봐서 대답했더니 갑자기 눈이 돌아가지고 몇 번씩 뽀뽀하느라 심장도 이상하게 뛰었단 말이지. 할 땐 이상하게 기분 좋았는데 지금은 기분이 안 좋아. 속도 메스꺼워. 신물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리고 또 박병찬이…… 박병찬이 자꾸…….
티슈를 코피로 물들이는 어린 애인이 아무 말도 못하고 남자친구 잘못만 손꼽아 세다가 눈을 까뒤집었다. 박병찬이 “야아아, 최종수!” 하는 사이에 최종수는 쌍코피를 흘리며 침대에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
최종수가 느닷없이 기절해서 진짜 놀랐는데 금방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에 박병찬은 긴장한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최종수의 곧은 코를 몇 번 들여다보고 피 묻은 티슈를 손으로 뭉쳐 부엌 쪽 쓰레기통에 버리고 침대방으로 돌아왔다. 코피가 금방 멎어서 다행이다, 종수야. 잠든 최종수는 대답도 못하는데 박병찬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안심했다.
속옷만 걸치고 있던 박병찬은 침대 아래로 훌렁훌렁 벗어둔 실내복을 다시 꿰어입고 최종수의 옆에 누웠다. 아, 오늘 정말로 한끼도 못 먹었네. 박병찬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잠든 애인의 닦여나간 코피와 식어버린 땀을 혀로 핥았다. 찝찌름하고 짜다. 어우. 입맛을 쩝 다시며 천장을 향해 돌아누웠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웃겨 죽겠다. 분홍색 칫솔부터 코피까지 가지가지 했다. 혼자 킬킬 웃던 박병찬은 캄캄한 방안의 잠든 최종수를 본다. 내일 종수 일어나면 이틀은 안 재워야지. 잠든 최종수의 손을 잡으며 박병찬은 몸을 한쪽으로 웅크렸다. 내일 아침에 눈 뜬 최종수가 잠자는 시간 마저도 아깝다고 느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박병찬에게 더 깨어있자고, 농구하자고, 같이 우주 다큐멘터리 보자고, 네가 조형고 농구부 후배들 만날 때 나도 장도고 농구부 애들을 좀 만나보겠다고, 박병찬 너랑 같은 팀에 들어가고 싶다고, 혹은 어느 구단이랑 계약 관련 미팅을 하기로 했다고, 내일도 모레도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다고.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박병찬은 장난스럽게 눈을 번쩍 뜬다. 옆구리를 세워 일어나 정자세로 기절하듯 잠든 최종수의 위에 올라탄다. 박병찬의 무게에 최종수가 끄응, 신음했다.
박병찬은 최종수와 마지막 열 번째의 입맞춤을 했다. 입술 위의 부드러운 압박감에 최종수가 저 아래 꿈결을 헤엄쳐 올라와 잠의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듯했다. 입술을 떼어낸 박병찬은 최종수의 짙은 눈썹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최종수와 박병찬이 어두운 공간 가운데서 시선이 마주친다. 당연하게도 옆자리에 있는 상대가 서로라는 것을 안다. 당연한 것. 당연한 사람. 박병찬은 나지막하게 최종수의 이름을 불렀다. 본인의 목구멍에서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소리를 내어서. 종수야.
나도 그냥 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것 같아.
끝
중간의 문어 설명 출처 : https://www.goeonair.com/mobile/article.html?no=2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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