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or FLIGHT

FIGHT or FLIGHT 05

센티넬X센티넬 빵준

어느새 날씨는 상당히 추워졌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전영중이 센터로 온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는 것과 같았다. 얼마 뒤면 성인이 된다. 전영중은 별로 남지 않은 올해의 날짜를 세며 첫눈을 기다렸다. 첫눈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준수야, 첫눈 오면 뭐 할 거야? 성준수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둘 중 하나겠지. 센터에서 눈 치우거나 현장에서 전투하거나. 뭐가 됐든 좆 같은데. 기대하는 전영중과 달리 성준수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했다. 나는 그래도 기대되는데, 준수야. 그 말에 성준수는 별 희한한 놈을 다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전영중을 쳐다보았다. 눈이 번거롭게 느껴지는 성준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전영중은 말을 아꼈다. 그래도 왜 첫눈이 기대되느냐고 한 번 물어주기라도 했으면 참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신이 나서 대답했을 텐데. WPC에서 울고 있던 밤, 네가 처음 말을 걸어준 날, 그날이 첫눈이 내린 순간이었다고. 창밖으로 흩어지던 하얀 눈송이를 배경으로 말을 걸던 네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고. 원래 모든 것의 처음에는 강렬한 기억이 스며든다.

첫눈이 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훌쩍 넘어서였다. 여느 때보다 추웠지만 이상하게 눈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그랬다. 결국 전영중이 흰 눈을 마주한 것은 12월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꼭 모든 것은 기다릴 때 가장 늦장을 부리는 것 같다.

사실 첫눈은 WPC에 홀로 지냈을 적에도 지겹도록 봐왔다. 올해의 첫눈을 기다린 것은 성준수와 함께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첫눈이라서 그랬다. 분명 그랬는데. 숙소에는 오직 전영중 혼자였다. 성준수는 현장 지원을 나가느라 부재중이었다. 전영중은 식당에서 창 너머를 바라보며 성준수를 생각했다. 눈을 맞으면서 전투를 치르고 있을 성준수를. 시야가 가려져 짜증 난다며 온갖 욕을 짓씹고 있을 모습이 선하게 그려져 웃음이 샜다. 준수, 고생 좀 많이 하겠네. 그 와중에도 걱정이 앞서는 건 우정일까 애정일까. 감정의 경계라는 것이 참 모호했다. 늦은 만큼 펑펑 내리는 눈을 구경할 새도 없이 식판을 정리하고 숙소로 내려갔다. 기대하던 만큼 즐겁지가 않았다. 역시 혼자 볼 때는 별로 안 예쁘네. 조용한 전영중의 중얼거림만이 남았다.

성준수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 쌓인 눈의 두께가 조금 줄어들었을 때쯤이었다. 전영중은 잘 다녀왔냐고 묻지 않았다. 눈 때문에 좆 같았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 훤히 보여서 그랬다. 그런데 성준수가 먼저 운을 뗐다. 야, 눈 오더라. 봤냐? 전영중은 의외의 질문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겠네, 너 기대하고 있었잖아.

첫눈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한 달도 더 된 이야기였다. 그걸 성준수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모르는 사이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신경 쓰고 기억하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어쩌면 서로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어, 그런데 혼자 보니까 별로더라. 전영중은 부러 그렇게 대답하며 여지를 남겼다. 성준수도 전영중의 그 말에 숨은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말은 금방 다가왔다. 첫눈이 온 것이 12월이 넘어서였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센터 내에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종교는 있었다. 아니, 이러한 상황이니까 더더욱. 센터 안이 크리스마스니 뭐니 하며 트리가 세워졌다. 사실 별 의미는 없었다. 오래전 그랬다는 것처럼 쉬는 날인 것도 아니고. 여전히 센티넬들은 훈련에 참여해야 할 것이며, 누군가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스러져갈 것이었다.

연말이건 말건 또다시 현장에 나갔다가 막 복귀한 전영중은 가이딩도 마다하고 성준수부터 찾았다. 그 모습을 보고 몇몇은 같이 지내더니 닮아가는 거 아니냐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전영중이 성준수처럼 가이딩 거부하는 그런 건 아니었고, 그저 마음이 급했다. 왜냐하면 하루가 다 끝나가고 있었으니까. 숙소 문이 오늘따라 느리게 열리는 것 같았다. 쏟아지듯 들어가 성준수를 마주했다. 급히 달려온 것 치고는 제법 담백하게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성준수."

"갑자기?"

"네 생일 12월 24일로 하기로 했잖아."

"아, 그랬지."

그럼 그동안 성준수는 본인 생일 챙겨주는 사람 없이 오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을까. 이제야 떠올렸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은 마음이 불편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왜 그렇게 스스로에게 무심하게 구느냐고 당장에라도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성준수 같아서 전영중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에 다른 말을 꺼냈다. 생일 선물 필요한 거 있어? 지금이라도 챙겨주게.

"휴가."

"웬일이야? 준수 입에서 그런 말이 다 나오고."

"꼽냐?"

"쉬지도 않고 일할 땐 언제고. 너 구르는 데 패티쉬 있는 줄 알았잖아."

"생일선물이 혹시 지랄이냐?"

"걱정해 주는 거잖아."

"됐어, 씨발. 안 받아."

"휴가 진짜 필요해? 주원 쌤한테 말해볼까? 정 안 되면 아빠한테 연락하고. 성준수 중위 휴가 좀 주십시오, 하고."

"씨발, 둘 다 좆 같아. 안 받고 만다. 말한 내가 병신이지."

준수야, 기분 나빴어? 씨발, 너 같으면 좋겠냐? 오늘도 어김없이 의미 없는 말싸움이 오갔다. 속을 대차게 긁어대면서도 자꾸 선물을 주겠다는 전영중에게 성준수는 또 한발 물러서 줬다.

"그럼 나도 소원권 주든가."

"소원권?"

"어. 너 예전에 나한테 받아 갔던 거."

"준수야, 내 소원 무효로 하는 데 쓰지 않는 조건으로 줄게."

"씨발, 그럼 그게 소원권이냐? 내 맘대로 써야 소원권이지."

무효로 하니 마니를 가지고도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이번에는 전영중이 한 발 물러섰다. 와, 준수 고집은 못 꺾겠다. 너만하겠냐? 둘 다 끝까지 한 마디를 안 졌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었다. 크리스마스였다.

"준수야 내일, 아니 오늘은 뭐해. 임무 나가?"

"아니, 훈련. 너는 쉬겠네."

전영중은 저번처럼 놀러 나갈 수라도 있게 휴가 기간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정해진 일정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기념일이든 신년이든 개인 휴가 기간이 아니라면 훈련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이는 근육처럼 뇌도 운동을 통해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리학자 요한 스프루츠하임의 가설에 근거했다. 1960년대에 과학자들은 경험의 직접적인 결과로 뇌에  측정 가능한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주제를 살펴보는 가장 간단한 방은 다양한 환경, 예를 들어 장난감과 쳇바퀴가 가득한 풍요로운 환경과 우리 안에 쥐가 딱 한 마리만 들어 있는 결핍된 환경에서 각각 쥐를 기르는 것이었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쥐들은 과제 수행 성적이 좋았으며, 뉴런의 가지가 길고 풍부했다. 반면 결핍된 환경에서 자란 쥐들은 학습 능력이 떨어지고, 뉴런이 비정상적으로 쪼그라든 상태였다. 이는 인간의 뇌를 부검했을 때도 동물 연구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해당 결과는 뇌가 노출된 환경이 뇌의 섬세한 구조에 반영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뉴런의 가지돌기에 영향을 준다면 그것과 비슷한 레우논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근거는 충분했다. 그렇기에 센티넬들이 다양한 훈련 상황에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전영중은 그런 어려운 건 모르겠고 그냥 쉴 수 있는 날이 좀 더 많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자신과 성준수는 정부 소속의 센티넬이고, 그에 따라 여러 특혜를 받고 있으며, 그렇다면 마땅히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함께 임무를 나가는 건 두 번째였다. 둘 다 새해가 되고 나서 나가는 첫 임무라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성인이라는 단어는 조금 더 특별한 힘이 있다. 자신의 행동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것 같고, 동료의 실수까지 자신이 수습할 줄 알아야 할 것 같고. 물론 안 그랬던 적이 있겠냐마는.

이번에 향한 곳은 전세가 밀리고 있는 곳이었다. 이미 파견된 센티넬들이 있었지만, 그로는 부족했다. 베이스캠프 정리도 잘 되어있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전영중과 성준수가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가이드를 구하는 일이었다. 전시 상황에서 보호 대상 1순위는 가이드였다. 그들이 있어야 센티넬이 계속해서 싸울 수 있으니까. 여기저기 빗발치는 총알을 중력으로 잡아 멈추거나, 얼음 방벽을 만들어 막았다. 준수야, 오늘 좀 치네? 씨발, 조용히 하고 집중이나 해라. 말은 험하게 하면서도 함께 임무를 나오는 게 두 번째라 그런지 저번보다 합이 더 잘 맞았다. 겨우 상황을 수습하고 나서야 파견 현황 보고를 올릴 수 있었다. 베이스캠프를 옮겨야 했는데 전영중 덕에 그 과정이 수월했다.

다음날에도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매복 지역이 발각당해 센티넬 하나가 전사했다. 결국 백업을 맡던 전영중이 무리하게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입술 위로 뜨끈하고 비릿한 것이 흘렀다. 그 위로 입김이 새하얗게 번졌다. 공격을 피해 다니던 성준수는 어느새 숲의 중앙까지 와 있었다. 점점 해가 지고 있었다. 재빠르게 나무 아래로 뛰어내려 축축한 흙바닥을 구르면서 성준수는 생각했다. 제가 너무 안일했을지도 모른다고. 방금까지 성준수가 있던 곳에서 한 차례 거센 폭발음이 들려왔다. 함정이었다. 저를 고립시켜 죽이려고 숲 한가운데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토끼몰이하듯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고개를 돌려 확인할 새도 없이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칼날을 피했다. 심장을 겨냥한 듯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이 갈비뼈를 스쳤다. 성준수는 신음을 억누른 채 수풀 아래 몸을 숨겼다. 적의 기척이 가까이에 느껴졌다. 확인 사살을 위해서인지 그것은 점점 가까워졌다. 한 발짝. 두 발짝. 성준수는 더욱 낮게 숨을 죽였다. 인영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성준수는 발목을 확 낚아챘다. 결빙된 살갗이 괴사하며 까맣게 썩어들어감과 동시에 억눌린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 잠시의 틈을 놓치지 않고 목뼈를 잡아 비틀었다. 훈련으로 인해 이제는 정형화될 정도로 익숙해진 동작이었다. 기괴하게 꺾인 시신을 내팽개치고 소리를 낮춰 걸음을 옮겼다. 다시 전영중과 합류해야 했다.

진눈깨비가 내린 숲속은 온갖 비린내가 진동했다. 흙비린내, 물비린내. 어젯밤부터 내려 얇게 쌓였던 눈이 녹으며 바닥이 질펀해졌다. 성준수는 제 몸에 겨울 냄새를 묻히며 걸었다. 생각보다 상처 부위가 깊었다. 피 냄새가 진해지기 전에 지척에 있을 포위망을 벗어나야 했다. 간혹 날아오는 총탄이나 칼날을 피하며 숲 가장자리를 향했다.

낮은 기온 탓에 숨에는 김이 잔뜩 서렸다. 체온이 낮아지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매복이 발각당하는 바람에 신경 안정제를 먹을 틈도 없었다. 어딘가에 짓밟히며 녹아갔을 알약이 그리워졌다. 아마 가이딩을 받았다면 이렇게까지 몸 상태가 안 좋아지진 않았으리란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것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습기에 축 늘어진 앞머리를 몇 번 손으로 쓸어 넘겼다. 상황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적당한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나서야 조금 긴장이 풀렸다. 그대로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려 눈을 감았다. 차라리 다른 약을 먹었더라면 좀 더 나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가끔 그런 센티넬들이 있었다. 마약을 사용하는 센티넬들이. 이 시대에 마약 정도는 불법으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정부에서는 암암리에 센티넬들의 마약 투여를 허용했다. 약물은 도파민을 분비시켜 쾌감을 증대시키고 이는 이능력의 증폭으로 이어졌다. 약물 투여. 하지만 그것만큼은 성준수는 극구 사절이었다. 몸과 마음을 대가로 얻는 능력. 능력을 증폭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약의 효과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렇게 계속 약물을 찾다가 망가진 센티넬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면 죽어도 그것만은 싫다고 다짐했다. 버릴 것 다 버리고 나가는 전장이었다지만 제 영혼까지는 태우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길 포기했대도 나로서 남는 것까지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몸과 마음을 대가로 얻는 능력. 성준수는 의미 없는 가정을 하지 않는다. 성준수는 눈을 질끈 감고는 다시 일어섰다. 숲 밖을 향해서.

무전이 끊긴 센티넬이 무사 귀환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그 확률에 대해 고개를 저었겠지만 주어가 성준수라면 얘기가 달랐다. 응급처치로는 충분하지 않았는지 피로 흥건한 흉부를 그대로 드러낸 채 성준수는 베이스캠프로 복귀했다. 쉴 틈도 없이 귀환 소식을 상부에 전달했다. 넝마가 된 성준수의 상태를 보고도 그들은 가이딩을 받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가이드가 아닌 의료진이 와서 상처 부위를 살폈다. 칼날에 깊이 베인 상처를 마취 없이 꿰맬 때도 성준수는 신음 하나 내지 않고 독하게 버텼다. 굳이 엄살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의료진 막사를 벗어나는 성준수 손아귀에 떨어지는 건 신경 안정제와 진통제 몇 알이었다.

성준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전영중을 찾았다. 제 상처를 꿰맬 때 밖에서 들려온 대화 소리로 전영중 또한 멀쩡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난리 중에 센티넬 하나는 죽고 성준수는 사라졌으니 전영중은 두세 배의 일을 해야 했을 것이다. 몸이 남아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막사를 나오기 전 들은 것에 따르면 전영중도 밤늦게까지 성준수를 찾아다녔다고 했다.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잘도 근처 숲을 뒤지고 다녔단다. 성준수는 전영중의 그런 은근히 고집스러운 면을 알았다. 주변에서 좀 쉬라고 말려도 들은 척도 안 했겠지.

상황이 다소 정리된 동트기 전 아침이라 온통 고요했다. 그러다 홀로 개운한 얼굴로 어느 막사에서 나오는 이가 보였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박서진이었다. 전영중과 성준수가 지원을 오기 전부터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센티넬. 그것도 원중.

야. 성준수가 건조하게 불렀다. 성준수의 악명은 센티넬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해서 박서진은 잔뜩 쫀 얼굴로 대답했다. 네, 네? 왜 부르세요? 야, 됐고, 전영중 어디있어. 박서진은 쫀 상태에서도 할 말은 했다. 그건 저도 모르죠. 원중 센티넬들은 어딘가 성격에서 삐딱선을 타는 부분이 하나씩은 있었다. 성준수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면서 다시 물었다.

"진짜 몰라?"

"네. 저도 방금 가이딩 받고 나오는 길이라."

"왜?"

"그야 준수 선배 찾는다고 밤새 탐색 능력 쓰느라고요."

"아 씨발, 그래서 진짜 모르냐고."

"……."

"진짜 몰라? 하 진짜 좆 같네."

"…저도 몰라요, 진짜. 아마 가이딩 막사 쪽에서 가이딩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래, 알겠어."

"저 가도 돼요?"

"어. 꺼져."

아이씨,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박서진이 멀어져가며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준수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전영중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 근처 막사를 살피며 돌아다니니 희미한 빛의 그림자가 길게 퍼진 곳이 하나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전영중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좀 있어 봐. 순간 성준수는 우뚝 자리에 멈춰 섰으나, 이내 자신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척을 죽이고 다가간 것도 아닌데 밖에 누군가 서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신경 쓰지 않거나. 뒤이어 서로를 탐하는 소리가 질척였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성준수는 보지 않아도 서로의 입술을 물고 빨고 있을 그림이 생경하게 그려졌다. 왠지 모르게 속이 메스꺼웠다. 보통은 최소한의 스킨십으로만 가이딩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저 정도라면 필시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필요에 의한 가이딩을 받고 있을 뿐인데도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발에 채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그 소리에 막사 안쪽의 소리가 잠깐 멎는 것이 들렸다. 성준수는 등을 돌려 본인의 막사로 돌아와 물도 없이 약을 씹어 먹었다. 입안이 된통 썼다.

다시 전선에 나갔을 때는 어제보단 상황이 나아져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바뀌는 게 전세라는 것이었다. 성준수는 포위당했던 어제와는 다르게 매복한 반란군을 찾으러 수색에 나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전영중의 등이 보였다.

동이 트고 나서야 한참 뒤에 막사 안으로 들어온 전영중이 이미 누워있는 성준수를 보고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성준수는 부러 자는 척을 했다. 전영중도 성준수를 깨우지 않고 램프 조도를 낮추기만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전영중이 먼저 일어나 있었다. 준수 일어났어? 어. 그 뒤로 이상하게 내내 어색했다. 기분이 내내 좋지 않은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그랬다. 응축된 감정은 억누를 수도 없게 소용돌이쳤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만든 회오리에 가슴 안쪽이 외풍이 든 듯 시렸다.

준수야, 너 오늘 좀 이상하다? 뭐래, 씨발, 수색이나 해. 평소보다 거칠게 대답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짜증은 치미는데, 몸 상태는 더없이 좋았다. 수면 시간은 적었지만 긴장이 풀리며 푹 잔 덕인 것 같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침착하게 반란군을 찾아내어 가차 없이 죽였다. 생각 없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살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제 손으로 사람을 죽이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자신의 안에서 괴물이 깨어나 점점 자신을 대체하는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전영중도 그러했을까. 악몽을 꾸곤 하던 전영중도 저 같았을까. 제 능력을 사용해 사람을 기이하게 일그러뜨려 놓는 전영중의 등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험난한 지형을 벗어나 광활한 공터에 도달했다. 사방이 탁 트인 곳이라 성준수는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없는 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앞에는 여전히 중력의 흐름을 이용해 제 능력을 탐지 능력처럼 사용하고 있는 전영중이 보였다. 탕. 그건 소음기가 부착된 총에서 나는 작은 파열음이었다. 그러나 성준수에게는 그 어떠한 폭발음보다 크게 들렸다. 쩌저저적. 전영중의 주위가 급속도로 얼어붙어 두꺼운 빙벽을 생성했다. 날씨가 추워서 다행이었다.

준수야. 지금 방해되게 뭐 하는 거ㅇ…. 전영중은 등을 돌려 핀잔을 놓으려다 빙벽에 꽂힌 탄환을 마주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의 상황도 즉시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 이후로 몇 번의 파열음이 더 들렸다. 꽤 거리가 있는 것 같았으나, 특히나 감각이 예민한 원중 센티넬들이 그 소리를 놓칠 리 없었다. 전영중은 심상치 않은 기운에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그대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성준수의 눈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능력의 증폭. 그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 있었다. 폭주라고 일컫는 신경 발작과 다르게 초감각적 능력을 극대화하여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센티넬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을 받았을 때, 혹은 위험 상황이라 인지했을 때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는 사람이 신체 일부를 잃었을 때 뇌가 스스로를 재편하는 것과 같은 메커니즘이었다. 예전에는 존재하던 신체 부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경계가 알아내면, 피질에서 그 부위에 할당되었던 영역이 줄어든다. 예를 들어 사고로 손을 잃은 경우, 손과 이웃한 팔 근육을 제어하는 뇌 부위들이 전에 손을 제어하던 영역을 서서히 병합하는 것과 같았다. 레우논이 스트레스나 자극으로 일부 손상되면, 그 주변 레우논이 영역을 재편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폭발적인 힘이 발휘되었다. 대개는 신경 발작으로 이어졌으나, 아주 희귀하게 증폭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성준수는 증폭 상태에 있다. 공터와 그 일대가 빠르게 얼어붙었다. 단순히 날이 춥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건 그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전영중은 일렁이던 중력의 흐름이 멈춘 것을 깨달았다. 매복한 반란군들이 다 얼어붙어 발이 묶인 탓이겠지. 대기 중의 수증기까지 얼어붙으며 조각조각 작은 얼음덩이들로 바뀌어 내렸다. 전영중은 성준수가 제어력을 잃기 직전이라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준수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기에.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가이딩을 한사코 거부하는 성준수에게 억지로 가이드를 끌고 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기에 가이드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준수야, 너 괜찮냐? 이제 그만 해도 돼. 역시나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폭주 상태로 넘어갈 것 같았다. 전영중은 다짜고짜 성준수의 눈 위에 큰 제 손을 올렸다. 눈 감고 있어. 좀 진정해 봐. 효과가 있었는지 성준수의 몸이 떨림이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준수야, 너 진짜 손 많이 간다. 그러면서도 전영중은 성준수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자신이 가이드가 아니라는 게 조금 아쉬웠다. 성준수가 남의 손길을 죽도록 싫어한다는 건 한참 뒤에야 떠올랐다. 그가 전영중을 뿌리치지 않았기 때문에.

매복 수색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증폭 상태에서 무사히 벗어난 성준수는 전영중과 함께 남은 반란군들을 찾아 해치웠다. 와중에 근거지를 알아내기 위해 심문할 대가리 한 명은 생포까지 해왔다. 파견 직후까지만 해도 열세였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쾌거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닷새의 휴가를 받기까지 했다. 어쩌면 증폭을 겪은 성준수의 상태를 고려한 처사일지도 몰랐다. 전영중은 그 덕에 함께 쉬게 된 케이스고. 대신 며칠 뒤 있을 반란군 포로 심문 자리에 참석하기로 했다. 말이 좋아 참고인이지 그저 겁박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았다.

섹터 7에서 전사한 센티넬의 장례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핑계라는 것은 모두가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다들 진짜 이유를 알았다. 죽은 센티넬, 한상현이 원중 센티넬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전쟁고아 출신의 원중 센티넬. 남은 가족마저 없는 그의 이름을 이제는 모두들 잊어갈 것이었다. 불과 한달도 되기 전 있었던 김한의 죽음과는 확연이 달랐다. 센티넬의 죽음에도 의연한 센터의 모습에 전영중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전영중을 보며 성준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뭐랬어, 보여주기식이랬지. 그렇게 내려앉는 목소리가 잔뜩 무거웠다. 전영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휴가 기간 내내 성준수는 내내 잠만 잤다. 깨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가이딩을 받지 않는 성준수는 잠을 자며 스스로를 돌봤다. 센티넬은 회복력도 일반인의 수준을 능가했으니 참 다행이었다. 전영중은 종종 성준수의 방 안을 들여다보았으며, 때때로 방 안의 중력을 낮추곤 했다. 성준수가 편히 잘 수 있도록. 성준수의 얼굴이 한결 편해지는 걸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폭주까지 갈 뻔한 성준수를 진정시킨 것도 그렇고. 전영중은 자신이 가이딩에도 소질이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난번처럼 도심에라도 나가볼까 했던 결심은 자연스럽게 무산되었다. 잠만 자면 좋냐고 지랄할까 싶다가도 관뒀다. 자느라 반응도 없는 상대에게 빈정대봤자 아무 소득이 없었다. 성준수와 다시 대화다운 대화를 한 것은 휴가가 끝난 직후 심문실로 불려 가면서였다.

"요 준수, 이제야 좀 정신이 드나 봐."

"눈 뜨자마자 시비 거는 거 보니까 너도 건강한가 보다?"

"어, 누구보다는."

"씨발, 하루라도 지랄을 안 빼먹어요. 야, 준비해. 심문실 가야지."

"근데 우리가 굳이 갈 필요가 있나? 물론 부르면 가야겠지만."

"그냥 가르치는 거야. 필요하면 현장에서라도 목 따기 전에 정보 캐오라고."

"……."

건조한 목소리와는 달리 잔뜩 살벌한 내용에 전영중은 눈알 몇 번 굴리다가 푸핫 웃었다. 나라님들답네. 농담처럼 던진 말에 성준수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 같지 않은 눈빛으로.

이런 시대에서는 고문 방법도 세련됐다. 옛날옛적 그랬던 것처럼 굶기고 잠을 못 자게 하고 이를 뽑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주로 힙노타이즈 센티넬을 이용했다. 환각을 보여주거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필요한 정보를 캐냈다. 말만 세련됐지 방식은 더 잔인했다. 인력이 부족하면 엘리멘트나 사이코메트리 계열도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되었다. 이번 반란군의 대가리를 잡아 온 전영중과 성준수의 역할은 실토하는 내용의 신빙성 확보였다. 대가리를 생포한 현장의 주변 정보와 발언의 일관성을 검증하기 위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대가리는 생포한 반란군을 부르는 은어였다. 대개 정보가 많은 윗대가리들을 잡아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생긴 말이었다.

반란군들은 왜 이렇게 질긴지 웬만한 환각에도 쉽게 정보를 불지 않았다. 손톱으로 제 허벅지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르는 꼴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처음 겪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린 전영중과 달리 성준수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마치 마네킹처럼. 지나치게 태연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진전이 없자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대가리를 위한 건 아니고 정부 측 힙노타이즈 센티넬을 위해서였다. 모두들 따로 마련된 휴게실로 이동하고 전영중과 성준수만이 남아있었다. 감시 역할을 떠맡은 탓이었다. 유리 벽 너머의 대가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심한 전영중은 다시 심문단이 올 때까지 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등을 기댔다. 옆에 앉아있던 성준수가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갔을 때 대가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전영중과 성준수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너희 둘, 원중 애들이지? 둘은 그 말에 상대하지 않았다. 대가리가 어떤 말을 하든 심문과 관련된 말이 아니면 무시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전영중과 성준수가 무시하거나 말거나 대가리는 말을 이었다.

"너희 둘, 정부를 그만큼 믿어? 어린애들 데리고 실험하는 정부를? 정상적인 새끼라면 소년병을 앞세우는 일 따윈 안 해. 속고 있는 거라고. 너희는 그저 권력의 희생양이야.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해."

야, 성준수, 저 새끼 입 닫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물으려던 순간 전영중은 말을 아꼈다. 성준수의 표정이 더없이 싸늘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해라, 씨발. 그렇게 읊조리며 유리 벽을 한 번 내리쳤다. 보통이었다면 쫄았을 텐데 반란군에서 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간 건 아닌지 성준수의 눈을 마주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 느꼈는지 대가리는 금세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그렇게 휴식 시간은 허무하게 지나갔다. 오랜 심문에도 대가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심문관도 이렇게 독한 놈은 오랜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점점 환각의 강도를 높이자 대가리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강. 되묻기도 전에 그는 혀를 깨물고 자살했다. 그게 끝이었다. 허무하게도.

"야, 너는 안 무서웠냐?"

"뭐가."

"자살하는 거 지켜보는 거. 눈 하나 깜짝 안 하길래."

"여러 번 봤어."

"너도 참 대단하다."

"나도 좀 평범하게 살고 싶다."

"그러게, 쉽지가 않다, 준수야."

"하 씨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성준수는 여느 때와 같이 한숨과 욕을 동시에 짓씹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는 성준수를 보며 전영중은 생각했다. 그러한 세상에서 함께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참으로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결국 숙소에 돌아가는 길에 나눈 대화는 맥락 없는 대화였다. 맥락 없는 대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그 관계가 쌓아온 시간이다. 그것을 통해 전영중은 자신이 성준수와 꽤 많은 시간을 나누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해. 그 말은 이상하게도 성준수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지우려 할수록 되레 선명해지기만 했다. 대가리가 말한 본질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센터에서 육 년째 구르면서 모든 행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는지, 정부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결국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동안은 단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 까마득한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에서는 정부의 정의에 대해 배웠고, WPC에 제 발로 들어가서는 정부에 충성하는 법을 배웠으며, 센터로 이관된 후에는 정부를 위해 일하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물음표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은 당위성을 가진 문장으로 설명됐다. 센티넬 행동 강령 선서문부터가 그러했다.

성준수는 전영중에게 전쟁의 목적을 알고 있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고위 장교 집안이라 해도, 전영중에게까지 전쟁의 이유를 알려줬을 것 같지는 않았다. 충성을 위해 아들을 WPC에 처박은 집안이라면 더더욱. 센터보다 더할 정도로 맹목적인 충성을 가르쳤겠지. 아마 이야기한다 해도 전영중은 성준수만큼 의문을 품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김한의 장례식 이후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었다. 성준수는 불만을 토로하고, 전영중은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성준수가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모든 의문점에 대한 대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문제라서 더욱 그러했다. 분명히 위화감은 있었으나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국가와 정부에 절대 충성한다. 그 말이 모든 사고를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침대만큼, 아니 그보다 자주 누워야 했던 실험대를 떠올렸다. 과연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인가? 여동생을 위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자발적으로 누웠으니 괜찮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왜 대가리는 정부를 의심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자꾸만 분절되었다. 심문실에 함께 들어간 적은 종종 있었으나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라 더욱 그랬다.

성준수는 질문을 바꿔보았다. 자신은 WPC에서 힘들었는가? 그 질문에 대해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원중 프로젝트는 어떠한 면에서는 자살을 닮았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나날들이 연속된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대부분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아이들을 돌려보내지는 못할망정 유사 자살의 길로 밀어 넣는 정부는 과연 옳은가? 역시나 성준수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생각이 분절을 넘어 단절되었다.

전영중 또한 균열의 흔적을 더듬어보고 있었다. 대가리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듣고 넘기기에는 찝찝한 면이 있었다. 밥을 먹는데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조재석이 밥 먹는 데 딴생각하는 전영중은 처음 본다며 놀리듯 말했지만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체 우리가 무엇에 속고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센티넬로 전쟁 속으로 등 떠밀어지는 게 부당하다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꼼짝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피로가 쌓여가는 날들은 분명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싫냐고 물으면 답을 하지 못했다. 좋냐 혹은 싫냐를 가르는 개인적인 호불호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로해도 주어진 일은 해야 한다. 그것이 센티넬들이 공통으로 지닌 책무였다. 물론 그 정도가 지나치면 항의를 하겠지만. 마치 성준수 혼자만 지나치게 구르던 때처럼.

문득 창 너머로 센터 앞마당이 보였다. 조경 관리를 위해서인지 심어진 꽃나무들도 보였다. 아직 날이 추운데도 꽃을 피웠다. 꽃들도 인간을 닮아 제 삶의 속도를 잃어버리고 보다 빨리 피어나고 있었다. 늦게 피어난 꽃보다 빨리 피어난 꽃이 먼저 시들겠지. 강제로 개화시킨 꽃이라면 더더욱. 센터에 있는 자들도 꽃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전영중은 그 사실이 조금은 서글펐지만 억울하지는 않았다. 정부에 충성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명제였으므로. 결국 대가리의 말은 전영중 마음에 오래 남지 못했다.

"요~ 준수, 요새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하 씨발, 티 나냐?"

"어, 좀 많이. 뭔 일인데?"

"하 씨…, 걍 전에 대가리가 했던 말이 자꾸 신경 쓰여서."

"무슨 말? 별말 아니지 않았어?"

"본질을 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준수야, 정부에 충성하는 것 말고 본질이 뭐가 있어. 전영중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다 반란 분자로 찍힐 수도 있다는 경고도 함께였다. 성준수는 여기서 구른 햇수가 몇 년인데 그 정도도 모르겠냐며 응수했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오랫동안 있었다면서 감은 다 잃었나 봐?"

"이 새끼는 하루라도 시비를 안 걸면 혀에 가시가 돋나?"

"걱정되니까 그런 거 아니겠냐."

"누가 걱정을 그따위로 하는데."

한참을 투닥거리다가 전영중이 먼저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본질에 대해서는 왜 궁금해하는데. 그것을 묻는 전영중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전쟁의 이유가 뭔지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어."

"우리야 그냥 하라면 하는 거지. 관성대로."

"그렇지만 다들 각자의 목적이 있듯이 정부도 있을 거 아냐. 너는 안 그러냐?"

"준수는 있어? 너만의 정의가?"

"어. 나는 여동생 지키는 게 내 정의고 내 목적이야."

"준수야, 우리는 정부에 충성하는 게 정의여야 해. 너도 알잖아."

"씨발, 그렇겠지. 그러라고 돈 들이부어서 인공 신경망 달아주며 초능력 만들어준 거니까."

가족과 충성. 같은 길을 걸어오더라도 둘의 정의는 결국 달랐다. 어쩌면 둘 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처럼 대차게 확인할 길이 없었을 뿐이지. 분위기가 제법 냉랭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다가 성준수가 먼저 입을 뗐다. 씨발, 말을 말지. 오늘 건 못 들은 걸로 해라. 방문이 가차 없이 닫혔다. 거실에 홀로 남은 전영중은 들으라는 듯 말했다. 하, 성준수 저거, 또 지 할 말만 하고 들어가지. 성질머리 봐라. 

전영중과 대차게 싸웠음에도 성준수의 하루는 변함없이 흘러갔다. 현장 지원이 오면 말없이 불려 나갔고, 쉬는 날이 적어도 불평하지 않았으며, 가이딩을 받지 않는 대신 꾸준히 받는 생체 데이터 수집에도 순순히 참여했다. 바쁜 나날의 반복이었다. 그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의문은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센티넬의 삶이라는 건 그랬다. 충성과 복종을 기반으로 하는 삶이라는 것은.

"섹터 2-A 구역입니다. 지원 바랍니다. 다시 한번 보고합니다. 여기는 섹터 2-A 구역. 지원 바랍니다."

성준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무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기술이 이렇게나 발전했는데, 전장에서는 아날로그적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는 게 제법 불편했다. 하지만 해킹 위험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 데이터베이스가 해킹당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쾅, 근처에서 나는 파열음에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코 아래를 막았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사람 형체가 보여 능력을 조준했다. 연기 사이로 푸른 섬광이 조금씩 형체를 갖출 때, 연기 아래로 얼굴이 드러났다. 갈색 머리와 눈 아래 눈물점까지.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완전한 아군의 얼굴이었다. 뒤에요! 그 말에 성준수는 재빠르게 자신의 뒤쪽에 얼음 기둥 여러 개를 메다꽂았다. 저 멀리 수풀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마 즉사일 터였다.

"햄, 아직도 저 못 알아보시는 건 아니죠?"

"어. 약간."

성준수는 찬 기운이 감도는 손을 내리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성준수의 사나운 표정을 본 소년이 후덜덜 떨었다. 성준수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데 혹까지 달게 된 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다. 섹터 2 파견 직전 이주원이 저를 부를 때부터 불길함을 감지했어야 했다.

이주원은 성준수를 부르더니 대뜸 말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원중 센티넬 하나가 있어. 탐색 센티넬인데 합 한 번 맞춰봐. 네가 오래됐으니 원중 대선배로 좀 챙겨주고. 성준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럼 최종수 시켜요. 걔가 저보다 더 오래 있었잖아요.」

「종수는 능력 범위가 넓잖아. 지금 이미 섹터 1 파견 중이기도 하고.」

「하….」

「서포트 있으면 너 더 잘하잖아. 그거 알아서 그래. 챙겨주라는 건 그냥 하는 소리고, 너 그동안 계속 임무 나간 센티넬들이랑도 안 맞아서 싸우고 그랬잖아.」

「네….」

「그런데 걔도 임무 처음이라서 얼타고 있으면 네가 또 화낼까 봐 미리 말해주는 거야. 조금만 신경 써달라고.」

「알겠어요….」

성준수는 센터로 돌아가면 이주원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냥 하는 소리라기엔 성준수가 챙겨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탐색 센티넬이라면서 아직까지 능력이 불안정해 기복이 널뛰었다. 적이 어디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잘못 이야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직접적으로 살상이 가능한 능력은 아니다 보니 총 한 자루도 쥐어졌는데, 그 실력도 영. 에임이 완전 구데기였다. 한마디로 성준수는 답답해 미치기 직전이었다. 이런 애랑 합을 맞춰 보라고 전장에 보낸 건 애 보라는 뜻으로밖에 안 보였다. 이게 전쟁터인지 탁아소인지 구별이 되질 않았다. 성준수는 입 안으로 욕을 짓씹었다. 물론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욕들도 이미 대다수였다. 그걸 알아서인지 그는 알아서 성준수의 눈치를 봤다.

야, 기상호. 그저 이름을 불러도 화들짝 놀라며 벌벌 떨었다. 기상호라 불린 센티넬이 이곳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건 적군도, 죽음도 아닌 성준수일 것이다. 센터에 이관되었을 때부터 성준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는데, 첫 임무까지 함께라니.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더랬다. 실제로 함께하니 더욱 죽을 맛이었지만. 모든 게 처음이라 자꾸 실수하거나 버벅대게 되었는데 성준수는 그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었다. 차라리 갈구기라도 했으면 넵넵 죄송함다 연발하면서 고개라도 숙였을 텐데. 오히려 그런 반응이 견디기 힘들었다.

기상호는 새롭게 들어온 원중 센티넬이었다. 능력은 정확히 말하자면 탐색 및 분석. 백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능력이었다. 반란군이 어디에 매복해 있는지 전방위로 감지가 가능했으며, 거리가 가까운 경우 상대의 특성까지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직 그 능력을 완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사실상 전장에서 가까운 거리로 마주하기도 전에 사살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분석 능력은 거의 쓰지 못했다. 아마 이후에 센터 심문실에서나 유용하게 쓰이겠지. 그럼 남는 것은 탐색인데, 거리의 오차가 상당했다. 전쟁은 사실상 정보 싸움인 만큼 그런 잘못된 정보에 전세가 기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성준수가 예민하게 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너 또 어디 갔었어."

"예? 저 잠시…,"

"전쟁에 잠시가 어딨어? 그따위로 굴다가 너만 뒈질 거 같아? 자리에 붙어있으라고 말했지."

"……."

"하 씨발, 이런 애도 임무를 나오고…."

성준수가 짜증을 내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섹터 2에 도착한 이후부터 기상호는 자꾸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아직 범위에 제한이 있어 최대한 넓은 지역을 탐색하고자 돌아다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이해하기에는 성준수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제발 정해진 자리에 붙어있으라고 마저 쏘아붙였다. 그러하겠다고 대답하는 기상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기가 잔뜩 죽은 것이 보였다.

똑바로 해, 그러다 등급 내려가서 그제야 울면서 후회하지 말고. 성준수의 그 말에 기상호가 퍼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기상호도 A등급이었다. 아직은. 능력의 범용성을 고려해 주어진 후한 등급이었다. 센티넬의 등급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어느 정도 올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프랑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는 자신의 창의성의 기원에 특별한 흥미를 가졌다. 바로 무의식적 생각이었다. 자신이 어떤 수학 문제를 두고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실패를 거듭하며 고군분투할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그 문제에 전혀 손을 놓고 있지 않은 와중에 가능한 풀이 과정이 불쑥 머리에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나중에 찬찬히 확인해 보면 그것은 언제나 옳은 것이었고. 푸앵카레는 이 '무의식적 생각'의 과정은 의식적 연구의 과정을 거쳐 준비되고, 힘을 얻은 두 번째 자아가 완전히 의식적 인식의 단계 아래에서 당면한 문제를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써 실행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어쩌면 실험의 성공 또한 이러한 무의식적 생각이 발현되었는가 아닌가를 두고 갈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능력을 어떻게 발현하고 사용하는가에 대한 답은 스스로 찾아야 했으니까. 그것에서부터 능력의 차이가 나타났다. 더욱 뛰어난 창의성을 발견할수록, 자연스럽게 능력의 위력과 범용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등급은 분류의 편의성을 위한 것일 뿐,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센터 내에서는 암묵적으로 등급은 계급과도 같았다. 특히 원중 센티넬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계라 어쩔 수 없었다. 성준수는 기상호에게 그러한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었다. 기상호는 눈치 하나는 빨라서 그 말 하나로 의도를 파악했다. 성준수가 왜 그러한 말을 했는지도. 등급 하락을 겪어본 자만이 그 참담함을 알고 있을 테니까.

임무를 마치고 센터로 복귀한 전영중은 숙소에 또 홀로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듣자 하니 며칠 전에 성준수도 현장으로 파견을 나간 것 같았다. 심지어 신입 하나와 함께.

"와하하, 우리 준수, 어쩌다 신입을 떠맡았대."

"너 꼭 성준수 부를 때 그러더라. 우리 준수라고."

옆에 있던 지국민이 말했다. 원중 센티넬들 사이에서 거의 금기되다시피 했던 성준수라는 이름은 이제 자연스럽게 대화 속에 녹아있었다. 전영중과 어울리기 시작하는 성준수를 보며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좁혀진 것 같았다. 물론 아직까지 성준수를 어려워하는 것은 남아있었지만.

성준수와 함께 나간 신입의 이름을 묻자 지국민이 기상호라는 답을 주었다. 전영중은 다시 웃으면서 답답해할 성준수를 생각했다. 그 모습을 직접 봤어야 한다고도.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전영중은 성준수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랐다. 가이딩도 거부하는 마당에 크게 다쳐서라도 오면 큰일이었다. 여전히 지난 임무 중 심장에 칼이 꽂힐 뻔했다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섬찟했다.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걸지 말라고 했는데 전영중은 성준수가 무사히 돌아올 때면 그것 하나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매달리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니, 이런 상황이라 더욱더. 전영중은 이 감정의 이름을 무어라 붙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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