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해후 下

PITA BREAD by 22
96
3
0

한바탕 뛰고 오자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내려앉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꽤 밝았는데 아직 새벽이다. 하루가 다르게 낮이 짧아진다. 나이 먹으면 시간 가는 게 빠르게 느껴진다더니 그런 건가? 근데 오늘도 나 혼자잖아? 요즘 애들은 기초체력 훈련을 너무 안 해. 팀의 고참 라인에 들어가게 되고부터 제법 꼰대 같은 생각도 한다. 샤워하고 일등으로 밥 먹어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숙소 부지 입구를 들어가자 어제 본 얼굴이 보였다. 선수 생활 막바지에 감액 계약. 굴욕적 이적. 그 뉴스의 장본인인 성준수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옆에 두고 벙긋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귀를 두드린다. 아.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빼자 가차 없는 욕설이 날아든다.

 

"차에 치여 뒤지려고 이어폰 끼고 조깅하냐?"

"준수는 새벽부터 입소야? 연봉 부족해서 월세 못 내고 쫓겨났어?"

"에휴, 씨바거. 말해 뭐해."

 

준수야, 아침부터 욕을 안 하면 가시가 돋아? 애들 아직 자는데 매너 없이 그렇게 큰 소리로 욕하면 놀라서 다 깨겠다. 너는 새끼야 애새끼들이 아직도 처자게 놔두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졸졸 따라간다. 2층에도 운행하는 엘리베이터를 두고 굳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서 계단을 오르고는 아직도 뒤에 있는 날 쳐다본다. 왜 안 꺼지냐고 욕이라도 하나 했더니,

 

"넌 몇 호야?"

"어, 205호?"

"잘됐네."

 

번호키를 눌러 204호를 연다.

 

"씻고 나와.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렇게 아침 7시부터 콩나물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게 됐다. 내 앞에 특 콩나물국밥 하나. 준수 앞에 콩나물 알밥 하나. 이게 맞아? 아침부터 갑자기 성준수랑 콩나물 국밥을?

 

"준수 대기업 신입 연봉도 못 받는 거 아냐? 국밥 사 먹을 돈은 있고?"

"걱정되면 니가 계산하든가."

"밥 사줄 것처럼 불러놓고 나한테 계산하라는 건 무슨 심보야?"

"아, 사줄 테니 닥치고 처먹어 그럼."

 

그러더니 쳐다보지도 않고 콩나물 알밥을 삭삭 비빈다. 뜨겁게 데운 뚝배기에 날치알 익는 소리가 요란했다. 진짜 이게 무슨 상황이지. 감액 계약, 굴욕적 이적의 성준수가 내 앞에서 알밥을 비비고 있다.

 

"왜 이적한 거야?"

"왜 안 묻나 했다."

 

숟가락 위로 야무지게 뭉쳐친 콩나물 알밥이 입안으로 사라진다. 허기진 사람처럼 말없이 밥만 해치우는 모습에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적당히 식은 콩나물 해장국을 밀어 넣는다.

 

"너랑 농구시켜주겠다잖아."

"큽, 쿨럭!"

 

미처 넘어가지 못한 밥알이 기도에 걸렸다. 일부러 음식 삼키는 타이밍에 말한 거 아냐? 케헥, 켁, 콜록, 컥! 테이블 밖으로 몸을 구기고 연신 기침하자 에휴, 하고 휴지를 내민다.

 

"뭘 놀라? 네가 나 추천했다며."

"아니, 콜록! 그건 또, 누가, 콜록, 켁!"

 

팀에 마땅한 슈터가 없었다. 프로 진출해서 하나같이 저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지만 마지막 샷을 맡길 만큼 눈에 차지는 않았다. 마침 들려오는 준수의 재계약 불발 소식에 감독님을 찾아갔다. 노련한 슈터 한 명 영입하면 후배들도 잘 이끌어줄 수 있지 않겠냐고.

감액계약 당할 줄은 몰랐다. 그게 꼭 제 잘못 같았다. 준수는 잘생긴 덕에 비시즌만 되면 시에프니 예능이니 러브콜을 받는다. 그딴 기사가 나가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은퇴하고 방송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게 낫지 않았을까?

목까지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하고 두 손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꼬락서니를 본다. 들킨 게 민망해서 아직도 사레들린 척하는 거 같은데. 어째 전영중은 갈수록 귀염성이 없다. 나이 들어서 좀 나아진 거 같지만, 여전히 성격은 배배 꼬였고. 옛날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농구 선수로 32살이면 그래도 오래 뛰긴 했다. 1티어 선수는 아니지만 슛은 또박또박 넣는 슛쟁이라 이만큼은 뛸 수 있었다 싶고. 누군가 그렇게까지 선수로 남고 싶냐고도 말했다. 동감이다. 재계약이 불발되자마자 방송국 PD에게서 연락왔으니까 당장 농구를 안 해도 먹고살 길은 있었다. 그럼에도 왜 아득바득 농구를 하냐.

농구를 지독하게 사랑한 건 아니고, 순전히 전영중 때문이었다. 물론 전영중을 지독하게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 자식이랑 오래 얽히다 보니 한 번쯤은 같은 팀에서 뛰고 싶었다. 그도 그럴게 전영중이랑 알고 지낸 지 벌써 20년...은 아니고, 한 15......

 

 

 

세기 정도?

 

 

 

 

 

 

 

 

초등학교 입학식부터 이상하게 어디서 본 듯한 녀석이 있었다. 키는 저처럼 다른 애들보다 머리 반개는 더 커서 어디서든 눈에 띄는데, 행동반경이 겹치지는 않는 녀석. 어디서 봤더라. 초등학교 1학년이 친구를 사귀어봤자 유치원, 태권도장, 놀이터, 학원 중 하나다. 아니면 엄마친구아들? 아무리 노려보아도 공을 차고 노는 동그란 머리통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같은 반이 된 적도 없고, 소풍은 장소가 갈렸는지 만난 적 없었다. 어디서 봤더라. 저 동그란 게 분명 말 건 적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본 체도 안 한다. 바닥에 떨어진 찌그러진 캔을 괜히 발로 찼다. 깡! 그게 4학년 형 머리에 맞을 줄은 몰랐지만. 그렇게 한 살 위의 형이랑 주먹다짐하게 됐다.

저 덩치만 큰 게 자길 모르는 척하는 게 싫었다. 아니, 분명 아는 얼굴인데 왜 아는 척을 안 하지? 그렇게 흘겨보기만 또 1년. 동생을 삥뜯던 6학년 형들의 코피를 터트리고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얘들아. 이 반 짱이 누구냐?"

 

단정하게 입은 선생님과 달리 편해 보이는 옷을 입은 어른 둘이 들어왔다. 어른이 뭘 저런 걸 묻나, 하는데 반 아이들이 날 보고 있었다. 나였어?

 

"학교 끝나고 체육관으로 와라. 안 오면 혼날 줄 알아!"

 

불안함에 선생님을 봤지만 끄덕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저번에 6학년 형들 때렸다고 잡혀가는 거 아냐? 에이, 설마. 그 일로 혼날 거면 진작에 혼났겠지.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진짜 형들 때려서 경찰들이 잡아가려고 온 거면 어떡하지? 엄마한테 전화해야 하나? 엄마는 잘 때렸다고 했는데?

체육관에는 세 명이 더 있었다. 키가 엇비슷하고, 그중에 유독 동그란 녀석. 그렇게 쳐다봐도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그 녀석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눈 너머에서 오래된 기억이 보였다.

"에이 씨......."저 멀대같은 새끼.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소리에 영중이는 얼빵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맹추. 또 나만 기억하네.

 

 

 

어린 누이를 망아지 위에 앉히고 한참을 걸었다. 보리수 열매가 먹고 싶다는 말에 안장에 걸 수 있는 바구니를 몇 개 챙겼다. 놀러 나온 거나 마찬가지지만 식솔이 많으니 따가는 김에 다 같이 먹을 양 정도는 따가야 했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 큰 바위 근방에 보리수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는 말만 듣고 낯선 길을 나선 참이다.

들꽃을 꺾어 누이 손에 쥐여주며 야트막한 산을 넘었다. 슬슬 더워지는 시기에 바람도 없어 제법 땀이 났다. 이마를 닦기 몇 번, 마침내 새빨간 과실이 주렁주렁 달린 보리수나무 군락이 보여 누이에게 바구니를 쥐여 내려주고 강가로 갔다. 채신머리 없이 소매를 다 적셔가며 세수하고 멍하니 앉아 숨을 돌렸다.

강나루에는 줄배가 하나 있었다. 조금씩 바람이 불어 축축이 젖은 머리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잔물결에 나긋이 흔들리는 줄배를 보다 몸을 일으켜 망아지를 길게 묶고 바구니를 챙겼다. 이대로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과일부터 따둘 생각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일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질 것 같아서.

보리수나무 쪽으로 향하자 누이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가는 게 보였다. 납치? 달려가는데 그가 보리수 가지 끝을 잡아 내려주었다. 누이가 제 손이 닿는 곳까지 늘어진 열매를 보고 활짝 웃으며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새빨간 과실이 와르르 떨어졌다.

다가가자 소박한 옷을 입은 소년이 돌아보았다. 키는 저만하고, 머리는 하나로 묶어 뒤통수가 동그랗게 도드라졌다.

 

"어, 안녕?"

 

그게 전영중과의 첫 만남이었다.

 

 

 

짧은 대화로 제법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이 돌쇠 같은 녀석이 의외로 동갑이고(놀랄 수밖에 없는 게, 그때도 또래 중 큰 편이었다), 혼자서 줄배를 끌어 강을 건너왔고, 누이를 목말 태워 올려줄 만큼 힘이 셌다. 물론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고, 후들거리긴 했지만.

제 키보다 높게 올라간 누이는 무서워하면서도 신나서 비명을 질렀다. 오라버니, 이것 봐. 오라버니는 여기에 손 안 닿지? 하면서 한 손으로 보리수 열매를 뜯어 던졌다. 중심을 잡느라 머리가 쥐어뜯어지고 다 터진 보리수가 철퍽철퍽 떨어져도 와하하 웃고 그만이었다.

 

"네 누이 진짜 귀엽다. 동생 있으면 좋겠단 생각은 안 해봤는데."

강물에 머리를 대충 헹군 녀석이 물기를 쭉쭉 짜더니 그대로 넘겼다.

"그렇게 귀여움 데려가든가."

"그래? 그럼 내 누이 할까?"

 

그 말에 어린 누이가 까르르 웃으며 도망쳤다. 영중 오라버니 동생은 싫어! 넉살도 좋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다짜고짜 오라버니란다. 근데 이 머슴 같은 건 왜 말을 놓지? 못 배워서 이러나?

 

"보리수는 다 딴 거야? 자리 남았어? 자두도 있는데 가져갈래?"

"좋아!"

 

누이는 냉큼 바구니 안 보리수를 다른 바구니에 나눠 덜고는 내밀었다. 자두 한두 알씩 담아주던 영중이 에이, 그냥 다 가져가 하며 와르르 쏟아주었다. 상큼한 냄새가 물씬 났다.

 

"다 주면 어떡하려고? 네 주인한테 혼나는 거 아냐?"

"엉?"

"과일 따러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면 놀다 왔냐고 혼날 거 아냐."

 

과일 따위를 힘도 좋은 남자애에게 따오라 시키는 것도 이상했다. 남자애는 좀 더 힘쓰는 일을 시키고 이런 건 보통 시비를 시키지 않나?

영중은 큰 눈만 끔벅이다 아! 하더니 손뼉을 치며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까짓거 혼나지 뭐. 그보다 내일도 올 수 있어? 근처에 꿩 둥지 있는데 같이 잡으러 가지 않을래?"

"그래, 뭐......."

 

얘는 무슨 시종이 놀러 다닐 생각만 해?  이러다 경을 치는 거 아닌지 몰라. 처음 만난 사람을 걱정하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저 정도 넉살이면 혼나지 않고 넘어갈 방법이라도 있겠지.

영중은 망아지의 안장에 바구니 네 개를 단단히 매고 누이까지 태워주고 나서야 나루터로 갔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보자. 영중이 줄을 당겨 강을 반쯤 건너가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발을 돌렸다.

다음날, 약속대로 강나루에 가서야 자신이 뭘 착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준수, 안녕?"

 

그렇게 말하며 설레설레 손을 흔드는 영중은 귀걸이에 비단옷을 입고 머리는 하나로 묶어 금색 실로 자수 놓인 붉은 댕기를 하고 있었다. 활을 팔에 걸고 넉넉히 채워진 화살통을 들어 보였다.

 

"주인어른이 신라 귀족한테 무시당하지 말라고 단단히 챙겨주셨어."

"아니......"

 

놀러 나온 시종이라 생각했는데 차려입은 모양새가 영락없이 귀족 아들이었다. 못해도 주수(主帥)의 아들쯤은 되겠지. 겉모습만 보고 멋대로 시종으로 무시한 제 잘못이었다. 그렇지만 하는 짓이 누구네 집 돌쇠였는데?

 

"착각해서 미안."

"아하하하! 너 진짜 재밌다!"

 

목덜미까지 화끈해지는 느낌에 문지르자 영중이 와락 팔을 둘렀다. 괜찮아. 내가 어제 워낙 격식 없이 입긴 했지. 가자. 꿩 잡으면 내가 기가 막히게 구워줄게. 영중은 정말 꿩 둥지 위치를 알았고, 활도 잘 쐈으며, 허풍은 아닌 게 꿩도 잘 구웠다. 나뭇가지만 비벼 용케도 불을 피우더니 척척 꿩을 손질했다. 진짜 이상하고 재밌는 놈이었다.

그 이후로 자주 영중과 만나 놀았다. 매번 만나던 강나루에서 시간과 날짜를 정하고, 혹시 엇갈리면 흙바닥에 글을 쓰거나 돌 틈에 서신을 남겨 다음 약속을 정했다. 누이와 셋이 놀 때도 있었고, 누이가 없을 때면 말 두 필을 몰고 가 해가 기울 때까지 달리고 놀다 급히 헤어지기도 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한바탕 말을 달리고 개복숭아로 목을 축인 뒤 나란히 바위 그늘에 누워 낮잠을 즐겼다. 싸늘한 바람에 눈 떠보니 반쪽짜리 달 막 떠오르던 참이었다.

큰일 났다는 생각에 영중을 때려 깨우고 줄배로 데려갔다. 비몽사몽간에 잘 따라오던 영중이 나루터에서 서자 덜컥 잡아끌며 멈췄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야숙하면 안 돼?"

"위험하게 무슨 소리야. 빨리 건너가. 집까지 또 한참 달려야 한다며."

"......그럼 너 먼저 가.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내가 널 보내고 가는 게 맞지. 건너가는 거 다 보고 가게 빨리 타."

 

재촉에도 영중은 우물쭈물하며 저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게 왜 이러지. 밀어도 덩치만 큰 게 못 박힌 듯 버티고 섰다. 짜증이 나 직접 뗏목에 올라타 당기자 우왓, 하면서 올라탄 영중이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뭐하냐?"

"준수야 그게......."

 

말을 흐리는 영중의 눈이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울어? 설마 사내놈이 울어?

 

"어두......워서......."

 

물살에 요동치는 뗏목 위에서 머리를 짚었다. 그래서 무섭다고?

엉덩이를 걷어차 물에 빠트리려다 참았다. 그래, 해가 저물고 헤어진 적은 없으니까 영중이도 밤에 강을 건너는 건 처음일 수 있지. 하현달이라 강 건너까지 보일 정도로 밝진 않고.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새카만 강물-아니 그제까진 잘만 헤엄쳤으면서. 마침 어제 비가 와서 물이 조금 불었네. 에휴. 한숨만 내쉬다 그냥 줄을 당겼다.

 

"어어, 준수야 뭐해?"

"건너편으로 보내주면 집에는 갈 수 있지? 말 매어놨다며."

"그렇긴 한데......."

"집 가는 길은 말이 기억할 테니까 무서우면 눈 꽉 감고 말고삐만 잡고 있어."

"안 무서워!"

"그러시겠지."

 

빨라진 유속에 줄을 당기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처음 해보는 일이었고. 발을 단단히 디디고 서 온몸으로 줄을 당기자 옷이 젖어 들었다. 얘는 어린놈이 이런 걸로 어떻게 매번 건너온 거야? 익숙하지 않은 노동에 팔이 아파질 즈음 무사히 건너편 나루터에 도착했다.

 

"......내일 또 나올 수 있어?"

 

배에서 무사히 내린 영중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물었다. 오늘 늦게까지 봐놓고 뭘 또 보재. 거절할까 했는데, 약속하기 전까지 놓아주지 않을 표정이었다. 오늘따라 귀찮게 구네.

 

"그래."

"꼭 나와야 돼?"

"알았으니까 좀 가라."

 

투덜거리자 영중은 머쓱하게 매어둔 말로 향했다. 투레질 소리를 들으며 다시 줄을 당기고, 더 이상 못 가겠다 싶을 즈음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 해본 노동에 손바닥이며 팔이 너덜너덜해졌고, 집에 돌아가니 늦게까지 뭐 하다 이제 오냐고 혼난 건 덤이다.

다음 날, 어른들 눈치를 보다 말을 빼내 강나루로 달렸다. 어제 쓸린 손바닥이 고삐를 당길 때마다 아팠다. 겨우 도착해 손바닥을 호호 불자 나루터에 웅크리고 있던 영중이 몸을 일으켰다.

달려와 제가 말고삐를 잡아 말을 두어 번 쓰다듬어주고는 손을 잡았다. 발갛게 부은 손바닥에 약을 발라 붕대로 간단히 감싸고는 남은 고약을 쥐여주었다.

 

"이거 주려고 부른 거야. 잘 바르면 살갗도 안 벗겨지고 금방 나아."

"여기 온다고 말고삐만 안 쥐고 흔들어도 더 빨리 낫지 않았을까?"

"아냐. 그래도 이게 더 빨라."

 

막무가내로 제가 옳다고 우기는 영중에게 그래라, 하고 만다. 정말 그게 목적이었는지 영중은 오늘도 늦게 가면 혼나지 않겠냐고 다음에 보자며 후다닥 나루터로 뛰어갔다.

그 이후로도 소년들은 계속 만났다. 머리가 커가며 공부니 집안일이니 배울 게 많아지면서 횟수는 줄어 달에 한 번 만났다. 함께 산수유를 따고, 그걸로 만든 술을 훔쳐 와 나눠 먹기도 했다. 활쏘기 내기를 하기도 했다. 보통은 별생각 없이 응했다 영중에게 지고, 손끝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해 다음 만남에 설욕하는 식이었다. 준수, 또 손에 딱지 앉도록 연습한 건 아니지? 그렇게 도발하는 미운 머리통을 쳐줬다. 그즈음에는 만나는 횟수가 계절에 한 번으로 더 줄어들었다. 강을 두고 사이가 점점 나빠진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날, 옷을 차려입고 나루터로 갔다. 영중은 익숙하게 고삐를 잡아 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 이제 못 와."

"응. 그럴 거 같네. 서라벌에 가?"

 

끄덕이자 그렇구나 하는 대답만 돌아온다. 영중이 옷을 못 알아볼 리 없다 생각했다. 화랑의 의복. 수도로 가 훈련받고, 군세를 모으고, 언젠가 칼을 쥐고 강을 건너 너희를 짓밟으러 가게 될 거라고.

그런 시대였다. 속도 모르고 영중은 조우관에 꽂힌 깃털을 쑥 뽑아 이마를 찰싹찰싹 때렸다. 와하하, 웃긴다. 이거 달고 달리다 날아가 버리는 거 아냐?

 

"이게 진짜!"

"뭘 벌써 인상 쓰고 있어. 잘 다녀와. 준수 몸이 영 아니라고 집으로 돌려보내지거든 돌아와서 이 형님한테 활 쏘는 법이나 다시 배우든가."

"웃기네. 지난번에 내가 이겼잖아."

"지지난번엔 내가 이겼거든요."

 

얄미운 대꾸에 주먹을 휘두르자 어이쿠, 하고 피하더니 관에 깃털을 대충 쑤셔 넣는다. 하여간 섬세하지 못한 새끼. 조우관을 벗자 영중이 꽉 안았다.

 

"잘 지내. 다치지 말고."

"니 걱정이나 해라."

 

잘 지내고. 껴안는 힘이 강해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조이고 나서야 영중은 떨어졌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약속은 없었다.

 

 

 

기억한다고 말은 했지만 엄연히 따지면 '기억'보다는 '본다'는 것에 가까웠다. 드라마처럼, 혹은 생생한 꿈처럼. 한 번에 다 보인 것도 아니고 나이를 먹을수록 비슷한 나이에 있었던 일이 하나씩 보였다. 다 보인 것도 아니고 영중이와 관련된 날에 한해서다. 자기 일 같기도 하고, 타인의 이야기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버틸 수 있던 거 아닐까? 아니면 조그마한 어린애의 뇌는 현실과 과거를 분간 못 하고 미쳐버렸을 게 분명하다.

티비를 보듯 한 겹 걸러진 과거의 기억이라지만 스며든 감정은 알 수 있었다. 잘 만든 드라마를 보면 모르게 몰입하게 되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날의 감정은 유독 강렬했다. 붉고 검은 필터를 덧씌운 것처럼 사위가 어둑했다. 마을은 불타고 손에 들린 칼끝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산 쪽으로 갔다! 그 소리에 제일 먼저 말머리를 돌렸다. 망아지 때부터 함께 한 영민한 말은 제 주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내달렸다.

씨발. 이렇게 될 줄은 알았다. 그런 세상이었으니까. 빈번히 국경에서 싸움이 번지고 이웃의 땅을 잡아먹는. 그래도, 강 하나 사이에 두고 보리수를 나눠 먹는 사이였기에 막연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강 마을은. 전영중은.

미끄러져 가며 기어코 능선까지 오른 말은 시키지 않아도 익숙한 얼굴에게 달려갔다. 영중은 반시체나 다름없는 병사를 양옆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뛰어내리자 말이 영중에게 얼굴을 부볐다.

 

"아직도 여기서 뭐 해. 돌았냐?"

"하하. 준수야, 여기에 안 돌은 사람이 어딨어."

"지랄 말고 빨리 타."

 

입이 많이 거칠어졌네. 그렇게 말하는 놈의 얼굴에 체념이 서렸다. 병사들은, 좀, 어차피 죽는다고! 한 놈을 떼어내고 다른 놈마저 떼어내려는데 영중이 손을 놓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가. 나만 믿고 목숨 건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버리고 나 혼자 살아.

 

"그렇다고 뒈질 거냐고! 너라도 살아야지 병신아!"

 

함성이 가깝다. 승리를 확신한 이들이 내뱉는 고양된 외침이 끔찍했다. 말이 영중의 옆에 몸을 낮춘다. 멀리 도망쳐서 어디서든 목숨 붙이고 살아. 살고 봐야 할 거 아냐! 바닥을 뒹구는 병사에게서 다 죽어가는 신음이 들린다.

 

"내가 어떻게 그래."

 

패배자의 초라한 낯에도 자존심은 남아있었다. 자존심이라기보다 의무에 가까웠다. 여기서 죽어야지. 네 목숨값이 뭐 얼마나 한다고. 산을 타고 온 병사들이 멀리서부터 화살을 쏴댔다. 영중은 말 엉덩이를 걷어차 도망 보내고 저를 감싸안았다.  마구잡이로 쏘아진 화살에 낮게 울리던 신음이 그쳤다. 영중은 비틀거리다 저를 안은 채로 능선 아래로 굴렀다. 절벽같이 가파른 산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단단한 팔이 머리와 허리를 감쌌다.

한참을 굴러떨어진 느낌이었다.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언제 멈췄는지 모르겠다.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팔을 밀어내자 맥없이 풀어진다. 야, 전영중.

등에 부러진 화살이 네댓 개 박혀있고 나무 밑동이 벌겋게 젖어있었다. 미친, 야! 멱살을 틀어잡자 몸이 벌러덩 하늘을 향해 드러눕는다. 준수, 괜찮아? 안 보여서....... 더듬거리는 손을 잡았다. 가물거리던 눈이 희미하게 휘었다.

그러니까, 좆같은 새끼. 도망치랄 때 도망쳤으면 대가리 깨질 일도 없었잖아. 왜 고집부리다 화살 처맞고 지랄이야. 너랑 같이 산에서 구르다 뒈질 뻔했는데. 개새끼야. 일어나봐. 시발아, 좀. 욕만 쏟아내는데 영중은 뭐가 좋은지 웃었다. 눈 뜰 힘도 없으면서 입은 무어라 계속 중얼거렸다. 귀를 가져가자 미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집에 가. 준수야. 집에 가."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말만 반복했다.

아, 진짜 개좆같은 세상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준수는 현실로 돌아왔다. 웰메이드 드라마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것처럼 감정이 넘쳤다. 천장이 가까운 2층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려보냈다.

열일곱. 전학을 권유받은 날 밤이었다. 농구를 그만두지 말아야겠다. 전영중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나도 계속해야지. 영중이는 어느 생에서든 피지컬은 뛰어났으니까 당장은 밀리더라도 버티면 분명 주전으로 뛸 수 있을 거다. 아득바득 살아남아 대학이든, 프로든 언젠가 같은 팀으로 뛸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언젠가.......

 

 

 

□□□□ □□□□.

 

 

 

 

 

그 이후로도 종종 영중을 만났다. 드라마에 자막처럼 부연 설명이 붙지 않이도, 영중을 만날 때면 자신이 과거를 기억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매번...... 좀...... 상황이 좆같았다. 전염병이 돈 마을을 돌보고 있는데 그 새끼가 낀 관군이 통째로 태워버리려 오지 않나, 어디 역모가 있대서 진압 하러 갔더니 쇠스랑을 들고 꼬나보지 않나. 무슨 유탄을 맞아 절벽에서 나란히 떨어지기도 하고. 뭔, 씨발, 사실 철천지 원수고 전영중이 내 모가지 따보려고 계속 만나는 거 아냐?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다기엔 매번 저를 보는 눈깔이 처음과 같아서. 다짜고짜 욕을 먹어도 동그랗고 맹한 눈으로 멀뚱히 보는 게 저 새끼는 기억을 전혀 못 하는 게 분명해서, 언제는 화가 났다가 또 언제는 귀여웠다(미친 건가?).

그래도 모처럼 좋은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이 기회를 놓치긴 싫었다. 북한이 미쳐서 미사일을 남쪽으로 쏘지 않는 한 전쟁 날 일도 없고, 동그란 구멍에 공만 잘 넣어도 영웅이 되는 세상이다. 이번에야말로 제 마지막 바람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 □□□□. 선명한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희미한 그 바람을.

문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전영중 저 시발 거는 2학년부터 피지컬에 불이 붙더니 3학년 내내 주전으로 뛰고 대학에서 받은 러브콜이 몇 개라더라. 1부 끄트머리 대학에 간신이 합격한 자신과 달리 대학을 골라갔다 들었다. 그러고도 만날 때마다 시비조로 말하는 꼬락서니에 화가 나 언제는 아주 발라버렸다. 뭐, 벤치워머? 몸이 더 비리비리해져? 벤치워머한테 처맞아봐라.

처음엔 안 그러더니 갈수록 말하는 게 얄미워죽겠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농구하는 줄도 모르고. 다른 선수들보다 피지컬이 딸린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안다. 키만 겨우 컸지, 근육도 잘 안 붙는 몸이다. 남들 두 배는 웨이트하고, 슛 연습은 세 배는 더 한다. 슛이라도 또박또박 넣어야 이런 몸으로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누가 그런 몸으로 계속 농구하래! 악이 받힌 말이 떠오른다. 내 말이, 시발.

그렇게 열심히 농구했더니 프로팀이 갈렸다. 몇 년 후 전영중의 팀에서 이적 연락이 와 갔더니 그 새끼는 떠났단다. 국대는 지 혼자 하고, 기어이 금을 따와 군면제도 받았다. 열받아서 입대하고 상무팀에 들어가 시즌 비시즌 없이 훈련해서 다음에 전영중 앞에서 내 등번호만큼 쑤셔 넣어줬다. 올스타전에 뽑혀서 이번엔 같은 팀이 되려나 기대했더니 유니폼 색이 달랐다. 매번. 그러다 서른둘, 구단과의 재계약이 불발됐다.

이 정도면 온 우주가 날 방해하고 있는 거 아냐? 이게 맞아? 그냥 쟤랑 게임 한 번 같이 뛰고 싶었을 뿐인데 그거 한 번을 안 해줘?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세상이 도는 느낌이었다. 무력감에 조깅도 거르고 침대에 틀어박혔다.

그때 점퍼스에서 연락이 왔다. 영중이 있는 구단이었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다고 드라마틱하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이를 먹었어도 전영중은 1티어 파워포워드였고, 나는 필요할 때 나가 슛을 쑤셔 넣는 슛쟁이였다. 그래도, 제법 재밌었다. 귀신같이 스크린을 걸어주거나 눈빛만 주고받으며 스위치 할 때는 오래된 고양감이 떠올랐다. 전영중과 같이 농구할 땐 이런 느낌이었지.

□□□을 □□□□.

다짐이 무색하게 현대사회는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은 법이다. 경기는 큰 굴곡 없이 풀렸다가 안 풀리기를 반복했고, 그새 두 해가 지나 전영중의 은퇴 얘기가 나오고, 은퇴 경기 날까지는 또 순식간이었다.

중반부터 교체로 들어가던 영중이 1쿼터부터 뛰었다. 마지막 경기는 풀로 뛰게 해달라는 요청을 감독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교체 투입이 체력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험적인 이유였으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영중은 아직도 팀에서 체력 좋은 선수에 속했다.

 

"준수, 준비해."

"네."

 

저지를 벗고 몸을 푼다. 백코트 하던 영중이 그 모습에 씩 웃었다. 새끼, 쪼개긴. 오늘 컨디션이 좋은지 숨도 별로 안 차 보이고 경기 흐름이 나쁘지 않았다. 투입되는 이유야 뭐, 안정적으로 점수차 좀 벌려보고 싶은 거겠지. 감독의 바람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마지막 경기니까 이기고 기분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게.

투입되자마자 볼이 돌아왔다. 사이드에서 3점. 몸을 던지려 하자 커다란 몸뚱이가 날아든다. 마음이 급했겠지. 한 번 볼을 튀기고 라인 안쪽에서 던졌다. 철썩 소리를 내며 공이 깔끔하게 빨려 들어갔다. 나이스 준수. 손바닥을 내리친다.

경기는 순조로웠다. 공이 오고 돌파하면 스크린이 단단하게 막아선다. 영중의 스크린은 언제나 그랬다. 반응이 빠르고 든든했다. 아무 걱정 없이 던질 수 있게. 흡. 격돌한 선수들의 숨소리를 뒤로 하고 몸을 위로 던진다. 더 높게, 한 번 더 3점.

 

"야이 씨발 진짜!"

 

멀리서부터 달려온 건지 손이 옆에서 치고 나왔다. 어차피 손은 공을 떠났다. 흔들림 없이. 그러나 날아온 손이 노린 건 공이 아니었다. 허공을 가른 손이, 손목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목을, 어, 이거 인텐셔널.......

쿵! 세상이 뒤집히는 소리가 났다. 뒤통수에 충격이 있었는데 감각이 둔하다. 공이 들어갔나 확인하려 해도 몸이 들리지 않았다. 저 씹새끼가....... 귀가 울리고 소리가 멀었다. 바닥이 우르르 진동했다. 어깨와 다리가 잡혔다. 몸이 붕 뜨는 감각. 빛이 어지럽게 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코치와 팀 닥터가 옆에 서 있었다. 한참 만에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고 나지막이 욕을 뱉었다. 시발. NBA도 아닌데 오바하고 지랄들이야.

 

"경기는요?"

"아직 하고 있어. 앰뷸런스 불렀으니 병원부터 가자."

"경기는요."

"경기 말고 네 몸부터 걱정해. 너 머리부터 떨어졌어."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세상이 빙빙 돈다. 살아있는 걸 보면 대가리가 깨지진 않았나 보지.

 

"영중이 은퇴 경기에요. 걔 마지막 경기는 이기고 가야죠. 경기 어떻게 되고 있어요."

"......4쿼터 3분대. 경기는 3점 차로 지고 있다더라."

 

하여간 쉽게 되는 법이 없어. 메슥거리는 속을 참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준수 선수, 누워있어요."

"진통제 좀 주세요. 경기장으로 갈게요."

"머리 깨질 거 같고 메스껍죠? 뇌진탕일 가능성이 높아요. 가서 진찰부터 받아요."

"7분 더 경기장에 앉아있다고 갑자기 안 죽어요. 진통제 주세요."

 

거기서 팀 닥터와 코치를 설득하느라 2분을 더 썼다. 사실 설득이 아니라 고집이다. 안 된다는 말과 약 달라는 말만 반복하다 코치가 전화를 걸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발, 진짜. 팀 닥터가 작게 욕설을 뱉으며 약을 꺼냈다. 겨우 삼키고 약발이 듣기도 전에 일어나 벤치로 향했다.

전영중을 □□□□.

벽을 짚으며 벤치에 들어가자 경기장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코트를 달리는 선수들의 시선이 한 번에 꽂히며 흐름이 무너진다. 성준수? 병원 간 거 아냐? 감독이 다시 불렀어? 미쳤나? 제 고집 때문에 미친놈이 되어버린 감독님은 콧등만 눌렀다.

 

"저 투입시켜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벤치에 앉아."

 

남은 시간은 4분. 마음이 급했다. 슬슬 약빨이 돌면서 두통도 견딜만 한 수준이 되었다.

 

"저 아시잖아요. 클러치 상황에서 절대 빗나가지 않는 거."

 

점수차는 3점과 5점을 왔다갔다 했다. 영중은 힘에 부치는지 입을 벌리고 헉헉대고 있었다. 고민하는 사이 분침이 바뀐다. 2:59. 감독이 타임아웃을 선언했다. 뛰어 들어오는 영중은 눈을 마주치고도 웃지 않았다.

 

"준수야, 미쳤어? 머리가 깨졌으면 요양을 해. 너한테 맞아서 저기 코트 파인 거 안 보여?"

"지랄하지 말고 스크린이나 제대로 서."

"감독님! 진짜 이 새끼 내보내실......."

"이기고 가야지. 진 개새끼로 선수 생활 마칠래?"

 

은퇴 경기를 무조건 이겨야 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전영중의 마지막이 패배라는 건 내가 싫었다. 돌아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도발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를 갈았다.

네 마지막은 찬란해야지, 영중아.

 

 

 

성준수가 코트에 나타나자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 진짜 미쳤나 봐. 미친 건 감독이 아니라 성준수였다. 마지막 3분을 위해 성준수는 녹음파일도 남겨야 했다. 2월 20일. 금일 경기는 오로지 성준수 본인의 요청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2쿼터 부상 이후 4쿼터 출전 시간에 대해서는 구단 및 관련자에게 책임이 일절 없고 이후 후유증 및 장해가 발생하더라도 보상과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중이 눈가를 짓누르며 작게 욕설을 읊었다.

준수는 멀쩡해 보였다. 몸싸움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밀리긴 했으나 공을 잡으면 바로 뛰었다. 앞으로, 위로. 성급하게 튀어 오른 17번을 제끼고 손을 올렸다. 골대 바로 앞에서 올려진 공이 백보드를 맞고 들어간다. 착지에서 비틀거리는 준수를 영중이 잡아 세웠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어깨만 두드리고 반대편 코트로 뛴다.

자리를 잡을 새도 없이 달려든다. 전영중은 한발 느리게 백코트를 시작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저 종이짝을 믿느니 내가 2인분 해야지. 바닥난 체력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는다. 뻗은 손이 무색하게 공이 림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좁힌 점수가 다시 벌어진다. 영중은 숨을 몰아쉬며 공을 받았다. 20번에게 던져주고 제 자리로 달려간다. 전술대로, 하나씩. 화려하게 돌파하는 20번에게 수비 둘이 붙는다. 달려가 온몸으로 부딪치자 31번이 오픈됐다. 가슴께 날아든 공을 바로 잡아 올린다. 철썩, 소리와 3점이 더해진다. 이제 1점 차.

30초. 애매하게 남은 시간에 상대 팀은 시간을 끌었다. 간을 보듯 여기저기 돌려지는 공에 준수가 손을 뻗었다. 틱. 애매하게 걸린 공이 맥없이 튕기자 영중이 달려갔다.

 

"뛰어!"

 

공이 라인 밖으로 나가기 전에 몸을 던져 잡았다. 눈앞의 오렌지색 유니폼에 무작정 던졌더니 31번이다. 20번에게 돌아간 공이 멈칫하자 상대 팀이 자리를 잡았다. 클러치 슈터로 유명한 준수에게는 파워포워드가 붙어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슈터가 없는 게 아니지. 11번에게 공이 돌아간다. 슛페이크에 두 명이 달려든다. 팀에 믿음직한 슈터가 없어서. 그때나 지금이나 영중의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멀리서 달려오는 한 명에게 쫄아 공을 31번에게 돌린다. 막아! 달려가던 23번이 방향을 틀어 15번과 준수를 틀어막았다.

근데 어디서 본 상황 같다?

영중이 엄지를 뒤로 뺐다. 눈을 마주친 준수가 웃었다. 영중의 스크린은 단단하고, 무엇보다 든든했다. 퉁. 공이 영중의 뒤로 튕긴다. 경기 종료 1초를 남기고도 전영중은 제 키만한 애새끼 둘을 틀어막았다. 눈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방해되지 않는다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준수는 높게 뛰어 공을 던졌다. 평생을 담은 슛이었다.

거봐. 난 클러치 상황에서는 놓치지 않는다니까.

길게 버저가 울린다. 조금 늦게 공이 림을 통과한다. 주먹을 꽉 쥐었다. 83:81. 전광판의 숫자가 더해졌다.

 

"우와아아아아악!"

"봤냐, 전영중!"

"와악! 와아아아악!"

 

준수의 몸이 번쩍 들렸다. 이 미친! 내려놔 새끼야! 어깨를 쳐도 영중은 준수를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 미친 성준수, 준수야! 미친놈아! 달려온 팀원들에 준수를 퍽퍽 친다. 이 미친놈들아!

 

"야이, 씹새들아, 나 환자......."

 

진짜 세상이 돌았다. 눈이 뒤집히는가 싶더니 유언 대신 욕설만 남기고 준수의 몸이 축 늘어졌다. 중심을 잃은 몸에 영중이 덩달아 나자빠졌다. 준수, 준수야? 들것!

 

 

 

 

 

눅눅한 온기가 서린 병실에 준수가 누워있었다. 베개 옆에 하얀 국화가 하나 놓인다. 가만히 보던 영중이 의자에 앉았다.

 

"시발아, 내가 이 짓거리 하지 말랬지."

 

준수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국화를 전영중의 얼굴에 패대기쳤다.

 

"준수야? 화나? 왜? 진짜 죽을 뻔했잖아."

"뇌진탕으로 죽는 사람도 있냐?"

"왜 없어. 넌 대가리 꼬라박은 게 우스워? 머리 잘못 박으면 건강한 사람도 순식간에 저세상이야."

"야, 내가 욕하지 말랬지."

"준수는 하는데 나는 왜 안돼? 나 그리고 이미 많이 했는데?"

 

이 새끼 저 새끼 많이 했는데? 은퇴 경기에서는 씹새끼도 해봤는데? 내가 어린애야? 종알거리는 입을 베개로 퍽퍽 내리쳤다. 다섯 대쯤 맞아서야 영중이 조용해졌다.

2쿼터, 준수는 실려간 이후 상황에 대해선 얼추 들었다. 저 새끼 죽여버린다고 달려드는 걸 빅맨 둘이 달려들어 겨우 막았다고 한다. 인텐셔널 파울 한 선수는 바로 퇴장당해 라커룸으로 들어갔고. 경기장 분위기는 뭐, 더없이 흉흉했다. 그리고 퇴근길에 마주쳐서는 기어코 그 새끼한테 한 방 먹여줬다던가. 일부러 한 대 때리고 나서야 말린 거 아니냐는 추측이 있지만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경기는 유튜브에도 올라왔지만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다. 바닥에 머리 박는 걸 보면 괜히 더 아파질 것 같고, 영중이 그렇게 화내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저 새끼 성격 더러운 건 이미 아는데 뭐 하러 봐.

 

"내 은퇴 경기가 네 은퇴 경기 된 건 알아? 구단에서 너 혹시라도 후유증 생겨서 말 나옴 안된다고 출전시키지 말라더라."

"새끼들, 이기게 해줬더니 싸가지가 없네."

"네가 그렇게까지 몸 던질만한 경기도 아니었잖아."

 

고작해야 수십번의 경기 중 하나고 거기에 전영중 은퇴 경기라는 딱지가 붙었을 뿐이다. 파울이야 준수의 의지가 아니었다지만 4쿼터의 출전은 누가 봐도 무리한 경기였다.

 

"왜 이적하냐고 물었을 때 내 대답 기억해?"

 

너랑 농구시켜주겠다잖아. 준수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아침 해가 빛나고,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고, 콩나물국밥이 끓고 있었다.

 

"영중아. 좋은 세상이지 않냐? 고작 공 하나 잘 집어넣는 걸로 뭘 구할 수 있대."

 

피시방에서 티맥타임 영상을 봤을 때 어렴풋하게 떠올랐던 다짐을 이제 알 수 있었다. 전영중을 구해야지. 그 하나만을 위해 만남을 반복했다. 제가 가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작 은퇴 경기 하나 이긴다고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진 않지만, 네 마지막을 승리로 장식해줄 수는 있잖냐. 나는, 우리는, 그 수많은 시간 동안 한 번도 서로를 구하지 못했는데 너는 날 돕고, 나는 네 마지막 승리를 구했잖아.

그리고 이번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인연도 끝나겠지. 기억은 끊기고, 다음 생에 또 만난다 한들 못 알아보고 지나치게 될 거다. 그래도.

 

"나는 그게 내 은퇴 경기였어도 괜찮아. 경기 내내 즐거웠으니까."

 

행복했다고, 영중아.

 

"......시발, 왜 니가 후련해 보이냐."

"이 새끼가 욕하지 말라니까."

"이미 실컷 하고 다녔대도."

 

전영중은 팔짱을 끼고 무릎을 달달 떨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시발, 시발 하고 욕하는 중이었다. 욕하지 말라니까 더 하네. 설마 요 2년 붙어살아서 그런가? 내 잘못인가? 이게 바로 거울 치료?

 

"......야, 준수야, 안 되겠다. 같이 살자."

"뭐?"

"아니, 왜 너 혼자 후련해지냐고! 나는 너랑 선수 생활 시작하자마자 끝나서 아쉬워 죽겠는데 왜!"

"뭘 시작하자마자 끝나. 2년이나 했는데."

"2년으로 안 돼! 같이 살아! 퇴원하면 우리 집 들어와!"

 

15세기를 질질 끈 미련이 끝났으면 후련해할 만도 하지! 차마 할 수 없는 반박을 입안에 가두고 있자 제가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전영중은 더 몰아붙였다. 침대도 새로 사고. 방 하나 남는 거 있으니까 바로 들어와. 퇴원 날까지 정리해둘 테니까 딴 데로 새지 말고. 알았지?

 

"아니, 미친놈아."

"아 그냥 같이 살아!"

 

농구선수의 성량으로 냅다 소리를 질러 다시 베개를 던졌다. 미친놈아, 닥치라고! 베개 위로 주먹질이 날아가고 나서야 영중은 입을 다물었다. 베개 아래로 빼꼼히 드러나 배시시 웃는 얼굴에서 코피가 흘렀다.

 

 

 

아마도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