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상] 흔하디흔한
성준수x기상호
* 어색한 문장 많음
* 다음 이야기 없음
* 버리려다가 한번 써봤습니다~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능력자가 나타났다. 그러면 본인도 죽는 건데 악당들은 참. 진부한 대사라고 여기면서도 기상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최종수가 속해 있던 팀도 이미 당했다고 했으니까. 대한민국에서 가히 최강의 팀이라고 불리던 팀마저 당했다면 만만한 상대는 아닐 게 분명했다.
김다은이 앞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동안 기상호는 눈을 감고 수만 가지의 미래를 계산했다. 분명 돌파구가 있을 것이다. 작년부터 합을 맞추며 이제는 눈짓만으로 각자의 생각을 읽어내고 움직일 정도로 완벽한 팀이었으니까.
"님 아직 멀었음?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음!"
"잠시만요 다은햄..."
뭔가 이상했다.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기상호는 미래를 단순히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직접 설계한 다음 그중 가장 괜찮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 능력을 쓰고 나면 코피가 터지는 일이 일상이었지만, 이러면 위험 요소를 미리 예방할 뿐만 아니라 효율적으로 임무를 끝낼 수 있었다. 다만 팀원들이 기상호의 생각대로 움직여줘야만 했고, 기상호 역시 함께하는 팀원의 능력에 대해 자세히 알아둬야만 했다. 그래야 팀원의 능력에 맞춰 설계할 수 있었다. 달려오는 지하철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괴력이 있다고 생각해 두고 설계했는데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 아니라고 한다면 큰일이니까. 그래서 같은 팀인 진재유, 성준수, 김다은, 공태성, 정희찬 이들의 능력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계점이 어디까지인지, 능력을 쓸 때 취약해지는 부분이라지 최대로 끌어올리면 어느 정도의 위력까지 낼 수 있는지까지도. 그러나 아무리 능력을 최대치까지 활용해도 졌다. 이기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건, 남자의 시선이 계속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데도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하나하나 쓰러트리며 다가왔다. 이럴 리가 없는데. 여기는 자신의 머릿속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설계를 도중에 멈추면 모든 게 멈춰야 하는데. 마침내 눈앞까지 다다른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눈 떠, 기상호.
"허억..."
기상호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듬직한 김다은의 등 대신 아까 본 남자가 그 자세 그대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얼굴을 덮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벗어 던진 가면은 매끈하게 광이 나는 구두 코 앞으로 떨어졌다.
"당신은..."
"알아보겠어?"
이 사람이 누군지 자신은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다. 모를 수가 없었다.
"...준수햄?"
성준수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기상호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봤다. 본인이 알고 있는 성준수는 비틀거리면서도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럼 이건 누구지? 가까이서 보니 좀 다르긴 했다. 눈앞의 성준수는 다크서클이 좀 더 짙었고 눈빛은 무미건조했다. 감정 하나 없는 차가운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성준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익숙한 듯 흐르는 코피를 닦아주었다.
"지금 뭐하는..."
"자, 가자."
이제 안심하라는 말을 끝으로 기상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일단 죽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진작 죽였겠지. 천장에서 눈길을 돌리면 이쪽으로 향해있는 의자에 앉아있는 성준수가 보였다. 어울리지 않게 손에 들고 읽고 있는 건 만화책이었다. 자주 읽었던 걸까. 표지의 색이 바래져 있어 제목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은 내가 어떻게 하지 않아도 멸망할 거야."
"네?"
기상호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성준수는 읽고 있던 만화책을 덮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미래에서 왔으니까."
성준수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기상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건 기상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늘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능력 좀 적당히 써라. 있는 능력은 써야죠! 그래도 잘하지 않았냐며 웃는 얼굴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었다.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 도시 한 가운데 생긴 거대한 구멍이 주변에 있는 생명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능력자가 없애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하던 순간, 기상호가 말했다. 이거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성준수는 무슨 개소리냐며 허튼 생각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기상호의 능력이 어떤 건지 알면서도,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가 그런 미래를 봤다면 그게 맞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부탁이 있어요. 기상호는 웃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무언가를 성준수의 품에 안겨주었다. 아직 비닐도 안 뜯은 만화책이었다. 그랬었지. 오늘은 기상호가 즐겨 읽는 만화책의 완결이 나오는 날이었다.
“저 대신 결말 꼭 읽고 오셔야 해요."
그리고 기상호는 구멍에 몸을 던졌고, 얼마 안 가 그 구멍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환호하는 그 순간, 오직 한 사람만이 울부짖었다.
괴로웠고, 비참했지만, 죽을 수 없었다. 그가 사랑한 세상을 지키자고 다짐했다. 사랑하는 이의 뜻을 존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연인이 몸을 바쳐 지켜낸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시 서로를 죽이고 약탈하며 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세상이 멸망했어도 좋았을 거라며 기상호를 헐뜯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가 지켜낸 세상은 악취가 났다.
성준수는 생각했다. 고작 이런 세계를 위해 기상호가 희생해야만 했다고? 지키고자 했던 사람을 희생시켜 구할 가치가 있는 세상이라면,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하는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쯤은 없어져도 되지 않을까?
성준수는 제 몸에 직접 실험을 해가며 아무도 자신을 막을 수 없도록 강해지고자 했다. 부작용이 늘어났지만, 실험의 결과로 강해질 수 있었고 그 힘으로 모두를 죽였다. 그리고 너의 희생을 막기 위해 과거로 왔다며 이야기를 마쳤다.
"⋯어차피 세상이 멸망 하나 안 하나 제가 죽는 건 똑같은 거 아닌가요?"
자신이 죽는다는 이야기는 좀 충격이지만, 막는다고 해도 세상이 멸망하면 본인을 포함한 모두가 죽는다. 어쨌든 결말은 똑같은데 왜 막으러 온 거지?
기상호는 성준수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대답 대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다가왔다. 기상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할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일정한 보폭으로 다가온 성준수가 손을 뻗자 기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잉?"
예상치 못한 행동에 기상호는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세뇌라도 시키려나 싶었는데 성준수는 자기 머리카락을 상냥한 손길로 쓰다듬고 있었다.
"그냥 애답게 굴어. 만화책이나 읽으면서."
기상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준 성준수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의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붙잡고 더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언뜻 본 얼굴에서는 슬픔과 그리움이 비쳤으니까.
"그나저나..."
죽는구나, 나. 그래도 아무 쓸모도 없는 자신을 믿어주고 함께해준 사람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괜찮다. 지금이야 모든 이가 탐내는 능력자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초기에는 기상호 역시 제 능력을 다루는 데 서툴러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고 지냈으나, 특별한 능력이라며 이현성이 데려가 준 덕분에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지상팀만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주었고. 그런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라니 그럴 수는 없다.
어차피 지금은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지만. 아무도 상대가 되지 못했던 성준수에게서 혼자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능력을 안 써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준수햄이 기다릴 텐데. 하지만 미래의 준수햄도 신경 쓰이고. 성준수를 걱정하며 성준수를 기다린다. 기상호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고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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