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상] 한 뼘

준수상호 전연령용

백반집 by d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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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세 : 고치기 힘든 나쁜 버릇


 트럭 한가득 실린 귤을 보다가 지갑을 꺼내 만원 한 장을 내밀었다. 둘이니까…, 오천원치만 주이소. 검은 봉지 안으로 두툼한 손아귀에 잡힌 귤이 묵직하게 자리한다. 내밀어진 것을 받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녁 먹고 후식으로 먹어야지. 손가락에 걸고 달랑달랑 걷는데, 진동이 길게 울린다.


[늦어.]


 사이좋게 농가 먹을라 했는데…. 입맛을 쩝 다셨다.


 끝나고 소주 한 잔? 은근하게 권유하던 동료의 말을 무시하지 말 걸 그랬다. 한 손으로 안전귀가 필수!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 스팀 신작이나 한 번 훑을까. 무료한 시선이 저 멀리 능선 끝에 걸린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귤은 같이 먹어야지.


 검은 봉다리를 들어 올리며 상호가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188187* 키가 더 컸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 둘 다 그러질 못했다. 주기적으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게 좋다는 태성의 잔소리에 생일로 했다가, 서로 태어난 해로 했다가, 이젠 키로 했다. 다음엔 몸무게로 해야 하나? 근데 그건 맨날 바뀌잖아. 하이고, 외우기 어렵겠구로. 혼잣말을 하다가, 썰렁한 실내 온도에 어깨를 움츠렸다. 햄은 참, 절약정신이 투철하단 말야. 외출로 전환된 보일러를 틀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스탠드 불빛 하나 켜놓고 소파에 무게를 싣자, 아늑하게 몸을 감싸온다. 소파는 참 잘 고른 것 같아. 소파 하나 사는데 뭐 그렇게 염병 천병을 떠냐며 퉁박을 주던 준수도 막상 설치되고 몇 번 낮잠에 들자 더 이상 군소리하지 않게 되었다. 훌쩍 키 큰 운동권 남자들 등치를 너끈히 받쳐주는 소파가 얼마나 드문데. 텔레비전을 켤까 하다가 리모컨을 쥔 채 그만두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회의를 하다 온 탓에 지나치게 피곤했기 때문이다. 보일러가 열심히 돈 덕인지 방바닥에서부터 온기가 올라와 상호의 몸을 노곤하게 했다. 지금 자면 안 되는데…, 안 씻고 외출복 그대로 있는 거 걸리면 성준수가 또 인상 쓸 텐데….


 아. 모르겠다.

 잘란다.

 정신이 까마득히 멀어졌다.



◀◀◀

 연애를 안 해본 건 아니다. 나 좋다는 사람 굳이 거절할 필욘 없을 것 같고 주변도 다 하길래 새내기가 되고 몇 번 해봤다. 아주 짧았지만 CC도 해보고, 과 내에서 썸도 타보고. 내 딴엔 열심히 했는데, 나중에 이성 동기들에겐 내가 개새끼가 되어있더라. 뭐 이런 적도 있었다. 제가 좋아하는 일만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연애에선 영 수동적으로 움직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짧으면 2주, 길면 2개월도 못 가는 연애를 몇 번 해보고 우정은 쌓을지언정 연애 감정 같은 번거로운 것과는 담을 쌓자 생각했다.

 너 프로 안 가고 싶어? 부모님은 너 낳고 이십 년을 넘게 뒷바라지만 하고 계시는데, 그냥 어영부영 졸업할래? 와-, 나 농구 졸라 열심히 했네! 혼자 정신승리하면서?

 감독의 말은 따가웠고, 솔직히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중학교부터 바쳐온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연애에 최선을 다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마다 다르 듯, 고된 훈련을 하면서도 연애에 최선을 다하는 부원들도 있었지만, 그건 걔네 얘기고. 농구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운이 좋아서 월반하듯, 3학년 무렵 프로에서 부름을 받았다. 성과가 보이는 상태에서 달려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소개팅이며 어찌 연락처를 알고 먼저 오는 연락을 모조리 거절하고 농구 하나에만 몰두했다. 프로의 세계는 선배들의 말마따나 냉정하기 그지없어 상대편과의 경쟁 외에도 팀 내 포지션 경쟁도 치열했다.


 ‘너 아니어도 대체할 사람 많아.’ 증명하듯 위와 아래가 압박했다. 농구 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욕심내는 만큼은 했다. 재미와 흥미는 먼 얘기가 되었다. 차근히 나이를 먹고 꾸준히 경쟁을 하다 보니 그냥 혼자가 된지 오래되었다. 몇 해를 거듭한 스토브리그의 어느 순간, 레귤러에서 벤치를 데우는 역할로 들어가는 게 많아진 그 순간에서야 허함을 느꼈다.


‘외로웠나 봐요.’


 이 새끼가 바쁜 사람 불러 놓고 헛소리야. 다른 팀에서 뛰느라 비시즌이 아니면 얼굴 보기도 힘든 준수를 앉혀 놓고 상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네.’

‘미쳤냐?’


 혼자 자조적으로 웃자, 준수의 잘생긴 눈썹이 찌푸려진다. 파하, 찬 웃음을 터트린 그가 소주를 마신다. 와인을 마실 것 같이 생겨선 동네 술집과 소주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농구 흥행 보증 수표 중 하나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저는 알아서 저 할 일을 하겠다는 양 안주를 추가하고 김이 올라오는 김치 우동을 축낸다.


‘햄 나 외로운가 봐요.’

‘근데, 어쩌라고.’


 내가 살다 살다 후배 새끼 연애사업도 간섭해야 하냐며 준수가 숟가락으로 상호의 정수리를 딱 소리가 나게 때렸다. 햄 존나 아픔! 소리를 빽 지르자 내가 니 친구냐? 말 똑바로 해. 까칠한 답변이 돌아온다. 노릇하게 구워진 은행을 씹으며 상호가 구시렁거렸다. 솔직히 햄 정도로 벌면 맨날 분위기 좋은 와인바, 라운지 이런데 데려가 줄만도 하잖아요. 여친이랑 그런데 안 가요?


‘있는지부터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냐 개새끼야.’


 상호야, 상호야, 이 개새끼야. 언제 눈치가 느냐. 준수가 한숨을 쉬었다. 말 한 번 꺼냈다가 욕으로 된통 맞은 상호가 입술을 비죽이며 소주를 축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준수의 마지막 연애가 상호 저보다 오래됐음을 추론해낸 상호가 입을 헤 벌렸다. 햄 진짜 마지막 연애 그때 예대 긴 생머리 누나가 마지막이에요? 그 얘긴 왜 꺼내냐. 처맞고 싶다고?

 이때다 싶었는지 숟가락을 들어 올리는 험상궂은 얼굴에 쪼그라들지 않게 된 것도 벌써 몇 년 됐다. 상호가 느물거리는 웃음을 입에 걸었다. 햄은 안 외로워요?


‘어. 별로. 그냥 이대로 혼자 살다 죽을 것 같은데.’

‘저도 요새 그런 생각 하는 중. 늙어서 혼자면 그렇게 슬프다던데, 어떡하죠. 반려동물이라도 키울까요? 근데 원정 가믄 몬 보는디. 우야노…. 갸가 죽으면 또 우예요. 내도 같이 칵 죽을 것 같은데.’

‘왜 아주 사후 세계까지 씨불여보지?’


 가지가지 한다는 눈빛을 쏘아보내는 준수에게 햄 근데 진짜 이제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인생에 대한 고민을 술술 불었다. 그래봐야 대학에 발가락 걸쳐 놓은 프로 선수. 군대 문제도 있고, 20대 후반도 안 된 선배들은 벌써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 은퇴를 했다. 프로 되면 뭐라도 된 것 같을 줄 알았는데, 겁나 허망하네요. 저는 농구 관두면 뭐 하고 살아야 될까 막 그런 생각도 들고…. 농구 귀신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단 걸 상호도 알고 있었다.


 톡, 이마를 때리고 뻥과자가 상호의 허벅지로 떨어진다. 팔자가 늘어지다 못해 눌어붙어서 아주 븅-신 같은 소리 하네. 오랜만에 성준수표 걸쭉한 욕을 듣는다. 기내초 짱 먹었다던 준수는 고교 시절부터 해서 지금까지 의외로 주먹질을 한 적은 없다. 그 주먹보다 아픈 말로 때려서 그렇지. 그럼 외롭다는 생각할 시간에 건실한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하고 살아 새끼야. 머리가 있음 생각을 하라고.


 언젠가 현성이 했던 말이 뒤에 따라붙는 것에 상호는 애먼 코만 훌쩍였다. 뭘 찍어도 맛없게 나올게 분명한 누런 조명 아래에 잘생긴 낯이 매서운 말을 한다.


‘햄은 미래 계획 있어요?’

‘뭐. 프로에서 평생 뛸 순 없으니까.’


 준수라면 평생 프로에서 뛸 거라고 할 줄 알았는데. 어깨를 으쓱인 준수가 지도자 과정 따위의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는 걸 보고 상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럼 햄이 나 데리고 살아주면 안 돼요? 집세 낼게요.’

‘미친 새끼가.’


 딱.

 숟가락으로 이번엔 이마를 맞았다. 아 존나, 햄이 숟가락 살인마도 아니고 와 자꾸 때리노! 내 머리 나빠지면 성적 떨어져요! 딱. 반말하지 말라고 한 대 더 맞았다. 벌게진 이마를 문지르며 울먹이다 준수를 쏘아보자 그가 성격 나쁜 미소-성준수 팬들 피셜 킬링 스마일(직역 : 상대를 죽이겠다는 뜻)-을 지으며, 웃는다.


‘생각해 보고.’



 눈을 뜨니, 주방에 불이 들어와있다. 와, 언제 적 꿈이고. 내 완전 보송보송했네. 그런 철없는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준수의 귀환을 알았다. 가디건을 벗어 옷걸이에 건 다음 스타일러에 넣어두었다. 셔츠와 양말, 바지는 벗어서 빨래 바구니에. 반바지와 목이 늘어난 티셔츠로 갈아입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래도 잠깐 잠들었다고 피로가 가셨다.


“햄, 왔어요?”


 기척만 내고 말 한마디 없는 준수에게 말을 걸자, 어. 하는 답변이 돌아온다. 왔음 쫌 깨워주지. 저 할 일 마치고 깨울 사람인 걸 알아서 퇴근길에 산 귤을 들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훈김을 내며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준수에게 다가가 킁킁 향기를 맡자, 준수가 힐끔 돌아보고 다시 제 할 일을 한다. 밥은요? 아직, 너는? 내도 아직.


 기지개를 켜서 기분을 환기한 뒤 찬장에서 보울을 꺼내 귤을 옮겨 담자, 귤 샀어? 준수가 묻는다. 앞에서 팔길래요. 비타민 챙겨야죠. 운동선수를 관두고 나서 좋은 점은 먹고 싶은 걸 영양소 생각하지 않고 먹어도 된다는 것이다. 삼십 줄이 넘고 나선 관절 여기저기가 쑤셔 영양제도 챙겨 먹기 시작했다. 젊어서 땡겨 쓴 걸 지금 돌려받는 거지. 햄도, 나도. 혼자 중얼중얼 거리자, 준수가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준다.


“수고했어.”


 소파에 앉아있다 잠들 정도로 피곤했던 마음이 준수의 그 무뚝뚝한 한마디에, 다정한 손길에 사르르 녹는다. 힘들었나 보다. 별 무드도 없는 상황에 검은 봉다리를 여전히도 손에 쥔 채 상호가 준수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코를 비비며 잔뜩 어리광을 부렸다. 햄도요.


◀◀◀

 은퇴는 성준수가 먼저 했다. 저보다 2살이나 많았으니 뭐 당연한 건가. 오래 뛸 줄 알았는데, 고질적인 부상과 성적 부진, 구단의 사정 등등. 핑계를 대려면 수도 없이 많았다. 아시안 게임 국대 출신 미남 슈터의 은퇴에 떠들썩했던 미디어도 금세 조용해졌다. 프로 스포츠계에 이런 말이 있다. ‘잘하면 잘생긴 거다.’ 은퇴할 때의 준수는 전성기급은 아니었어도 여전히 잘생겼다. 라고 상호는 생각한다. 비공식으로 진행된 은퇴 투어에 상호는 눈물 콧물을 쏟으며 준수에게 꽃다발을 안겼다.


‘니가 왜 울어.’

‘금방 따라갈게요.’

‘미친 새끼야, 한 십 년 뒤에 해.’


 덕담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에 해앰-! 준수를 끌어안고 상호가 펑펑 울어도 다 그러려니 넘어갔다. 플레잉 코치라도 할 줄 알았던 준수는 대학을 마치고 지도자 과정 연수를 하느라 두문분출하더니, 갑자기 선배가 연 농구교실에 말도 안 되는 급여를 받으며 1년을 굴렀다. 저 햄 도랐나. 입만 열면 험한 말 일색인 사람이 머리통이 공보다 작은 애들한테 농구를 가르쳤다.


‘햄…, 그게 진짜 적성에 맞아요?’


‘어. 말귀 못 알아듣고 제멋대로 쿠세 하나 못 고치는 새끼들보단 제로베이스가 나아. 나는 공태성 같은 새끼 못 가르침.’


 준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고, 태성을 준수가 가르친다는 생각을 했을 때서야 지상고 출신 모두가 납득했다. 다들 삼 년 안에 사업을 접지 않을까 예상했던 제가 연 농구교실을 꽤나 오래 잘 운영하고 있었다. 햄들은 아마 모르겠지. 준수햄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이의 체중이 얼마나 빠졌는지, 키는 얼마나 자랐는지 꼬박꼬박 기록하고, 코멘터리를 달아서 주는 세심함으로 학부모의 마음을, 아이들에겐 신뢰와 카리스마로 마음을 얻었다. 소규모로 운영하다가 분점을 낼 정도로 유명세를 치른 준수의 농구 교실은 기상호 제2의 삶을 시작할 장소였는데.

 세상이 기상호를 가만두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다소 거만한 소리일 순 있겠지만 준수가 농구를 관두고 딱 2년이 더 지난 시점에 은퇴 얘기가 거론됐다. 2부 리그로 다운됐을 때부터 알고 있기도 했고, 플레잉 코치 제안이 제 앞까지 넘어올 거란 생각을 안 하기도 해서 그냥 준수처럼 덤덤했다. 아, 햄이 이래서 덤덤했구나 싶기도 했다. 그냥 변화하는 시간에 대해서 순응해야지. 재계약이 불가할 것 같다는 통보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는데, 상호를 붙잡은 건 구단이었다.


‘저, 전력 분석원! 저희 구단 전력분석원이 되는 건 어떠세요? 시간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군대 다녀오셔도 기다릴 수 있어요! 연봉도 최대한 상향해서 드릴게요!’


 초롱 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상호에게 가장 원하던 포지션은 그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진로에 대해서 그저 준수햄네 빌붙자! 정도로만 생각했던 상호는 일단 학업을 마치고 제대로 배워보겠다며 말을 잘랐다. 숙소에서 짐 정리를 하고 준수의 집으로 곧장 찾아가자, 이 집이 네 여관인 줄 아느냐고 하면서도 그는 오갈 데 없는 후배가 불쌍했는지 문을 열어뒀다.

 생각해 보고. 는 유효한 것이라 상호는 기쁜 마음에 입술을 오므리고 조심스럽게 준수가 남겨놓은 한 뼘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연봉으로 대학 등록금 내고, 준수에게 집세를 보태려다가 한 대 맞았다. 손찌검은 안 하고 숟가락으로. 준수는 은근 도구 사용을 즐기는 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쉬는 날이면 부지런히 농구 교실을 도왔다. 종종 오는 성인반을 상대해 주고, 개선해야 할 점을 짚어주었지만 곤조가 어찌나 강한지. 준수가 아이들을 예뻐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함께 오는 귀갓길에는 떡볶이를 한판 다 비울 기세로 먹는 상호를 보며 질려 하는 준수를 목도하고 말을 잃었다. 난 이제 그렇게 못 먹어. 그 말에 손에 잡고 있던 포크가 서서히 테이블을 향해 내려앉았다.


 아, 우리 이제 운동선수 아니지.


 적응이 더디다고 시간이 기다려주는 것은 아니다. 고작 두 학기. 졸업 유예를 고민하며 진로를 알아볼까, 재입학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구단에서 끈질기게 연락이 왔다. 우리 팀 사정 아시잖아요, P.O 못 가면 이번에도 줄줄이 은퇴하고 재계약 불가 통보해야 해요…. 구걸하는 말에 마음이 물러져 성의 없이 대답하는데 준수가 전화를 빼앗아 딱 한 마디했다.


‘그건 그쪽 사정이죠.’


 서로 다른 구단에서 뛰었고, 상호의 경우 원클럽맨으로 오래 뛴 만큼 구단에 대한 애정이 남다름을 아는 준수가 시바꺼, 애를 호구로 보나. 대신 화를 내주었다. 또 입술이 오므라들고, 발끝이 간지러운 감각이 서서히 온몸에 퍼졌다.

 하고 싶냐? 입김을 불어 내려앉은 앞머리를 올린 준수가 물었고,


‘성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상호가 주접을 떨었다.

 그날은 숟가락 대신 솥뚜껑만 한 성준수의 손바닥으로 마빡이 터졌다.


 중학교 때부터 관성처럼 하던 농구다. 준수도 농구를 떠나지 못했고, 상호도 농구를 떠나지 못했다. 어쩌면 아마 사는 동안 평생. 영영. 애정, 증오 뭐 그런 감정을 떠나 현성은 농구에 대한 ‘짝사랑’이라고 낭만적인 표현을 했으나, 농구는 그저 농구였다. 단어 하나로 둘의 인생에서 완전했다. 그러니 기상호가 군을 마치고, 전력분석원으로 구단에 취직하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준수는 별말 않았고, 각자 코치며 감독으로 활동하는 농구인들은 안타까워했다. 이런 씨발 졸업도 하기 전에 애를 후려? 이런 험한 말을 하면서 상호는 제가 꽤 수요 있는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왜 난 농구인한테만 인기 있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날은 그래도 저 띄워주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기분이 좋아 잔뜩 취기가 올랐었다.


‘너 이 새끼, 길바닥에서 객사하기 싫으면 잘 따라와라.’


 취기와 졸음에 취해 반쯤 감은 눈으로 아기 오리가 어미 오리를 쫓듯 준수를 쫓는 상호를,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척척 걸어나갔다. 햄은 술도 잘 먹드라. 내는 아직도 성준수 반 치도 못 따라간다…. 졸리면서 꽁알꽁알 준수에 대한 찬양 반, 욕 반을 읊조렸다. 원래 이쯤 하면 그 성격에 뒤지고 싶냐고 물어볼 텐데, 입을 꾹 닫고 간다. 성질대로 하지 그냥.

 아파트에 들어서자, 무슨 축지법이라도 익힌 양 준수가 속도를 올려 사라졌다. 여기서부턴 알아서 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납제. 그나마 투철한 귀소본능이 집으로 저를 이끌었다. 이제는 거의 닫힌 거나 다름없는 눈을 겨우 게슴츠레하게 떠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딱 한 뼘만큼 문이 열려있었다.


 한 뼘.

 성준수가 제게 내어주는 그 한 뼘이, 기상호는 못 견디게 좋았다.


 소파를 등받이 삼아 바닥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가 귤을 까서 위로 올렸다. 준수가 받아들면서 채널을 바꾼다. 준수는 소파 위, 상호는 소파 아래. 두 사람이 앉기에 모자람이 없는 소파인데도 이게 고정적인 자세가 되었다. 껍질을 부지런히 까서 알맹이를 입에 쏙쏙 담은 채로 상호가 준수를 돌아보았다.


“햄 내일 반찬 사 올 건데, 진미채랑 깻잎이랑 또 뭐 사 올까요?”

“장조림, 멸치볶음.”

“계란말이는요?”

“니가 해.”


 준수가 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상호가 눈만 데루룩 굴렸다. 아 귀찮은디. 고민하는 낯을 읽었는지 준수가 리모컨으로 이마를 꾹 누른다. 쓸데없는 거 사오지 말고, 냉장고에 계란 남았으니까 니가 하라고. 넵. 상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요리를 잘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 평생 운동만 해온 남자 둘이 사는데, 요리를 잘할 리가 있나. ‘계란말이었던 것’의 수준이 아니고 ‘계란으로 된 무언가를 만들려 시도했던 것’의 결과물을 몇 번 겪은 뒤에야 그나마 괜찮은 게 나왔다.

 상호가 이 집에 객식구로 얹혀 살기 시작할 무렵엔 외식과 배달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할 줄 모르니까. 사 먹고, 시켜 먹고, 식비가 후달리니 완제품을 쇼핑해서 샀다. 식단 관리는 오래 해왔으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마늘과 쑥만 먹는 것도 아니고. 보존제를 넣어 어딘가 시큼한 맛이 나는 레토르트도 몇 달 지나니 물렸다. 동거 아닌 동거의 3년 차, 상호의 취직 처가 결정된 순간부터는 둘이 나름 합의해서 집안일의 당번을 정하게 되었다.


“쓸 데 없는 거 사지 마. 할인한다고 아무거나 집어오지 마. 반찬만 사.”


 오랜만에 준수의 입에서 긴 말이 나온다. 상호가 누굴 애로 봐요? 하고 투덜거리자, 응. 니 존나 애잖아. 준수가 받아쳤다. 성준수가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게, 평소에 돈 쓰는 구석이 별로 없는 기상호는 충동구매를 참지 못했다. 1+1이면 싼 거 아냐? 장바구니. 뭐 계란이 두 판에 팔천 원? 어머, 이건 사야 해! 60개면 금방 먹지! 또 장바구니. 그렇게 십만 원을 훌쩍 넘긴 장을 봤고, 성준수한테 박살이 났다. 너가 무슨 코끼리야? 일주일이면 다 먹지 않을까요? 상호의 철없는 소리에 그다음부턴 장 보기는 함께라는 룰이 추가됐다. 여러 해를 거듭하다 보니, 준수의 감시가 느슨해졌을 뿐이다.


“햄…, 있잖아요.”

“뭐.”


 오른 다리는 무릎을 접어 소파 위에, 왼 다리는 바닥에. 길게 뻗은 다리 위에 고개를 올리자, 준수가 시선만 내려 올려다보는 상호의 얼굴을 마주한다. 상호는 수줍게 웃었다.


“코코볼도 사두 돼여?”


 일부러 깜찍하게 물었다. 준수가 눈살을 찌푸리다가 시선을 피한다.


“원 플러스 원 사면 뒤져.”

“헤헤. 넵.”


 깜찍한 기상호는 준수 햄의 말을 잘 들어 1+1은 안 사고, 1+1+1을 샀다. 개이득 가격! 개이득 구성!에 또 쏠랑 속아 넘어갔단 뜻이다. 준수는 배보다 배꼽이 큰 것을 보며 이 시바 새끼가 또 일주일 처먹고 물린다고 버리려고. 씨발. 지옥 가서 다 말아먹어 씹새야. 하고 입을 닫았다.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자, 동료가 묻는다. 뭐 알아낸 거 있어? 어. 우리 팀이 올해…, 존나 별로라는 거? 상호가 성의 없이 말했다. 프로쯤 왔으면 쿠세를 고쳐야 하는데 그걸 못하는 새끼들만 주워왔는지 전력분석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지경이다. 이걸 코치와 감독에게 보여주고 선수 본인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전술에 이용해 먹을 정도로 영리하게 쓸 수 있는 애들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다도 서지 않는다.

 습관인 척 페이크를 쓰는 것도 작전의 한 방향이지만, 그것도 소프트웨어가 받쳐줄 때의 얘기다. 아 봐도 모르겄는디. 현장 나가면 좀 알 것도 같고. 상호가 아리쏭 하다는 표정을 짓자, 통계학을 전공했다는 동료가 숫자 말고도 봐야 할 게 많긴 하지. 끄덕였다. 금요일 저녁 칼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점심께에 출근하는 전력분석원에게 그런 달콤한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내일도 경기, 모레도 경기…. 내가 왜 인생의 반 이상을 농구만 파고 있을까. 현타가 몰려온다.

 비시즌이 찾아오면 선수들은 몸 만들면서 숨 돌리기라도 하지, 상호는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업계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 일을 ‘봉사직’이라고 불렀다. 애정 없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즌 중엔 경쟁팀과 우리 팀의 승패 원인 분석, 비시즌엔 우리 팀 선수들 연봉 주기 위해 연간 성적 분석 및 향후 전망. 아…, 존나 때려치우고 싶다. 펴 본적도 없는 담배의 간절함을 외치며, 노트북과 메모패드를 들었다.


[햄 저 오늘 경기장요ㅜ 늦어요.]

- ㅇㅋ


 대답은 꼬박꼬박 잘해주네. 팀장의 차에 올라타며 상호가 엄지손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햄 저 경기장 이동 중.

쉴 틈이 없어요ㅠ.ㅠ 나 살려주…. 힘들어요ㅠ….]

- 관둬.


 진지하게 사표 쓰고 나오면 미쳤냐고 또 날뛸 거면서. 높고 푸른 하늘을 보면서 코를 훌쩍였다. 시즌 중에 휴가를 쓰면…, 팀장님이 집 앞까지 찾아오겠지? 마케팅팀은 잘만 쉬던데 우리 팀은 조금도 못 쉰다. 한숨을 쉬면서 가까워지는 구장을 보고 조심스레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마, 농구야…, 오늘은 너가 쪼매…, 지겹다.



 마지막 수업을 마친 뒤, 준수는 오랜만에 밀린 서류 작업을 했다. 누구는 얼마나 컸고, 누구는 체중이 얼마나 줄었고. 공무원 시험 준비와 체대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가볍게 운동을 시작한 성인부와 청소년부의 상담지를 체크하고…. 사장으로 앉아있으니 할 일이 태산 같았다. 경영은 운동과는 다른 영역이라, 졸업 전 복수 전공을 했어야 했나. 후회가 앞선다.

 상호가 소속된 팀의 생중계를 틀어 놓고 멍 때리는데, 채팅이 쉴 새 없이 올라온다. 뭐 반은 욕이었다. 죽어라, 농구 접어, 농구 펴 ㅋㅋ 이런 댓글들을 훑는 시선이 무감했다. 선수 생활해 본 입장에서 죽일 놈이 된 적도 있고, 성준수 죽도록 사랑해라는 외침을 들어본 적도 있기 때문이다. 꽤나 비등한 스코어로 기세 싸움이 지독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3쿼터, 상호네 팀이 밀린다. 아, 이럼 또 얼굴 죽상하고 들어오는데.


“어.”


 에이스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는 화면이 빠르게 지나가며, 관객석에 앉아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상호가 잡혔다. 집중했는지 웃는 기색 없이 눈이 쉴 새 없이 코트를 쫓는다. 아, 기상호 선수 오랜만이네요. 경기가 마음에 안 드나 보죠? 표정이 별로네요. 해설이 알은체를 했다. 화면은 다시 경기로 돌아갔는데, 채팅창은 아직 상호의 이야기를 한다. 은퇴한지 몇 년째여도 원클럽맨 아우라는 좀 다른지, 팬들이 난리가 났다.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 ㅋㅋ 제발 ㅠㅠ 상호님 제발요ㅠㅠ]

[기상호 왜 벤치 아니죠? 당.장. 내려오세요.]

[KSH KSH KSH!]


 현역 시절에도 상호가 이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가. 지금 서있는 녀석도 상호만큼 날카로운 기색이 없긴 해도 못하는 축에 속하진 않는데. 아 지금 ㄹㅇ 0.5 KSH 수준임ㅋㅋ 하는 댓글을 읽고 허. 소리가 나왔다. 1 KSH의 단위가 허접을 표현하는 말이 아닌 준수한 수비를 표현하는 단위로 바뀔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안타깝게도 1 SJS는 여전히 단위 값이 똑같았다.-준수는 떠내려가는 댓글을 고정하려 스크롤을 올린 뒤, 휴대폰을 들어 댓글을 사진 찍었다.


[ 사진

1 KSH 상향 됐네

ㅊㅋ. ]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폰을 덮었다.


 화면 안의 선수들은 농구화를 신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준수는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상호가 이제 우린 건강을 신경 써야 할 나이라며, 사이좋게 신자며 사다 준 지압 슬리퍼를 신고 있다. 준수의 품에 좆같은 지압 슬리퍼를 안기며 상호가 말갛게 웃었다.


‘햄이랑 하루라도 더 오래 같이 살고 싶어요.’


 넌 무슨 그런 말을 반지도 아닌 지압 슬리퍼를 주면서 하니.


 기상호는 감성적인 대사를 지껄이는 것치곤 퍽 아재스런 감성을 가졌는데, 이럴 때 그 태가 났다. 영양제를 사서 쟁이는 것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건강 아이템을 사는 것도 보통은 상호고, 그걸 꼬박꼬박 챙기는 건 준수의 몫이었다.

 오늘은 그만 접을까. 어느 정도 서류 작업을 매듭짓고 화면을 보자, 경기는 4쿼터로 넘어가 있다. 마지막 서류는, 방송 출연 제의. 준수 또래에 유난히 밀집했던 얼굴 실력 모두 출중한 스타플레이어들이 은퇴하자 잠시 반짝했던 인기도 제법 식었다. 몇 년이 지났으니, 프농 다시 한번 부흥시켜 보자며, 이런 제안이 들어오는 것이다. 현역 때 성심당, 성식빵이라고 불렸던 준수의 화려한 과거를 잊은 게 분명하다. 이딴 제의를 받아들일 것이었으면, 애초에 해설 제의가 들어왔을 때 거절하지 않았을 거다. 상호는 유튜브가 체질이라며 놀렸지만, 준수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진 않았다.


 편하고 아늑한 지금이 좋았다.

 승패 따윈 상관없이 그냥 이 순간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까마득한 고교 시절의 성준수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을 이 미래가, 좋았다.



◀◀◀

하이파이브를 하면 짝, 맞아떨어지며 경쾌한 소리가 날 때도 있지만 모든 순간이 그렇진 않다. 둘의 동거도 마찬가지였다. 준수는 공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즐겼고, 상호는 불규칙 속에 규칙이 있다고 믿는 편이었다. 프로 선수 시절 오랜 숙소 생활로 간소하던 살림 살이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었고, 그 안에서 규칙과 불규칙이 난무했다.

 당연히 먼저 폭발한 건 성준수였다. 이 씨발! 여기가 돼지우리야? 폭음으로 소파에 늘어져있던 상호가 아, 햄. 이 안에 다 질서가…, 그 질서 두 번 찾다가 너네 집 길바닥 될 줄 알아.

 둘의 초반 동거 생활은 딱 1년 잠잠했고, 상호의 군 입대 후 아예 조용했다가, 전역한 해부턴 그냥 범퍼카에 타고 서로를 들이 받듯이 살았다. 고등학교에서 1년, 대학에서 1년 도합 2년의 합숙 생활을 겪어서 서로 잘 맞진 않아도 안 싸울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싸웠다. 몇 일 싸우면 몇 달 잠잠했다. 관계가 변한 직후에는 뜨거웠고, 금세 들러붙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 햄, 흰옷은 따로 빨아야 된다니까요!’

‘그럼 니가 빨아 씨발아. 내가 가정부냐?’

‘햄, 빤스 좀 뒤집어 넣지 마시라고요!’

‘니나 양말 뒤집어 넣지 마, 십새끼야.’


 와 이렇게 안 맞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안 맞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치킨을 먹을 때 저는 날개를 좋아한다며 다리는 햄 다 먹으라며 양보하던 놈이, 불어 터진 라면을 왜 먹어야 하나며 툴툴거렸다. 하필 밸런스 게임인지 뭔지가 유행하기 전이라 불같이 싸웠다. 그래서 규칙이 하나 둘 생겼다. 라면은 각자 끓여먹을 것. 한입만 할 경우,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기. 물론 내가 맞고 햄이 틀리지만.-이때 또 숟가락으로 한대 때렸다.-하도 싸워서 가정부를 고용할까 하다가 공간에 남을 들인다는 게 싫어 그만두었다.

 뭐 때문에 싸운 날이었더라.

 기억도 안 난다.


 상호는 한참 씩씩거리며 A4용지에 집에 굴러다니는 몇 개 안되는 펜 중 하나를 집어 열심히 동거의 규칙을 세웠다. 숟가락으로 때리지 않기를 제안했다가 기각 당해서인지 화를 풀질 못했다. 이제 은퇴도 다 한 마당에 먹고 싶은 거 먹자며, 밥을 지었다가 꼬들밥과 죽밥으로 인해 벌어진 싸움이었다. 혼자 나름 중립 기어를 박으며 여러 조항을 덧댄다. 준수가 원할 법한 것 하나, 저가 원하는 것 하나.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볼은 부풀고 입술은 댓 발 튀어나온 녀석과 식탁을 사이에 두고 의견을 조율했다. 닥쳐, 싫어, 그래라. 단답에 가깝게 나오던 말에도 상호는 속사포로 투덜거릴 뿐 알아서 조항을 추가했다.


‘하나 더.’

‘이제 다 쓴 거 아니에요?’


 동거 조항을 쓰다가 화가 풀렸는지, 상호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빛냈다. 이십 대 후반에 저런 얼굴은 좀 반칙 같기도 하고. 빡빡 깎아놓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꽤 자라 예전 모습이 나오는 머리칼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싸워도 잠은 같이 자기.’


 무뚝뚝한 성준수가 내밀 수 있는 화해의 손길이었다.


‘히히. 햄은 역시….’

‘닥쳐.’

‘날 참 좋아한다니까.’


 못이긴 척 웃으며 글자를 적는 얼굴이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겠다.


 좋단다, 등신.

 누구에게 하는 말인 줄도 모르겠다.



 직장인이 퇴근해서 소파에 늘어지며 하는 말은? 정답은 말이 아니다. 흐어어…. 코창력으로 유명한 가수의 추임새를 따라 하듯 피곤한 신음을 내지른 상호가 소파에 엎어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서 신발을 벗으면 소파가 있다는 게 참 좋았다.


“씻어라.”

“햄, 진짜 진짜 힘들었어요.”

“역전승했다며.”


 아 솔직히 졸라 답답하지 않아요? 경기하는 동안은 간섭도 못해요.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함. 솔직히 저 오늘 금마한테 빠큐 날릴 뻔했어요. 너무 못해서. 우리 용병은 또 구매 대실패. 저 그레놀라보다 효율 없는 듯. 준수의 몇 마디 말에 오늘의 푸념이 한가득 쏟아져 나왔다.


“관둬.”

“응?”

“농담으로 한 말 아냐. 힘들면 관둬.”


 아 진짜. 팔걸이에 걸쳐진 무릎을 밀어 소파 끄트머리에 있는 준수에게로 조금 더 다가갔다. 허벅지에 턱을 올리고 준수를 올려다보자, 그가 시선을 흘끔 내렸다가 다시 텔레비전으로 옮긴다. 벌써 그게 몇 년 전 얘긴데. 좀 있으면 손가락 두개로 꼽을 만큼의 세월도 전에 얘긴데, 성준수는 착실하다. 찰방이던 마음이 흘러넘치는 기분이다. 차가운 손끝을 준수의 늘어진 손에 포갰다가 천천히 손가락으로 손바닥의 금을 따라 그었다. 미동도 없는 준수를 보면서 손바닥 위에 JS라고 이니셜을 쓰다가 또 혼자 재밌어서 큭큭 웃자, 뭐 하냐? 준수가 물었다.


“뭐게요.”

“준수.”

“아인데. 지상인데.”

“…, 뒤지고 싶냐 기상호?”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리다가 손가락 마디를 벌려 갈퀴가 이어지는 부분을 천천히 훑다가 느리고 애틋하게 손을 쥐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연한 살을 굳은살로 살살 긁자 손가락이 강하게 죄인다. 엄지를 손바닥으로 밀어 넣어 습하게 땀이 배기 시작하는 손바닥을 지문의 감각에 의지해 문지르고 손톱으로 긁자 손이 꽉 잡혔다. 졸지에 엄지가 가두어져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다가, 검지를 움직여 손등을, 검지와 중지 사이의 연한 살을 문질렀다.

 준수의 반응을 훔쳐보려는데,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텔레비전만 본다. 손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엄지를 검지 아래에서부터 밀어올려 준수의 검지를 죄고 손톱 끝을 꾹꾹 누르다가, 혼자 차오른 애정을 주체 못하고 핏줄 선 손등에 입술을 내리찍었다.


“햄, 해요. 응?”

“내일 출근한다며.”


 엄지로 다시 검지를 밀어 손끝을 세워 입안에 넣고 끝만 살짝 깨물자, 준수가 손가락을 구부린다. 입을 열어 그것을 물자 혓바닥에 손가락 마디가 닿았다. 혀의 가운데를 누르는 뼈의 감각을 즐기며 살가죽을 핥고, 아랫니로 마디를 긁어 손가락을 펴게 만든 뒤, 쪽 소리가 나게 빨았다.


“그건 내일의 상호가 알아서 하겠죠.”

“힘들다고 징징거리면, 뒤져.”

“잉잉.”


 가슴 위로 팔을 둘러 감은 준수가 상호의 상체를 끌어당겼다. 물에서 건져지듯 올라가는 상체를 따라 팔걸이에 걸쳐져있던 하체가 소파의 쿠션으로 내려앉으며 높이가 바뀌었다. 준수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대었던 상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장 얇은 피부끼리 맞닿으며 달콤한 소리가 났다.


 어떤 행위의 전조를 알리는 신호탄 같은 입맞춤이었다.

 그로 인해 입안에 침이 고이고, 눈에 웃음이 걸렸다.


 길고 하얀 목에 팔을 둘러 감았다.


 아. 너무, 너무 좋은 우리 햄.


-


“햄은, 너무 짓궂어요….”

“오전 반차?”

“우리 그런 거 없는 거 알믄서….”


 잔뜩 쉰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하자, 생수병을 딴 준수가 상호의 입술을 축였다. 고분고분 받아 마시면서 울먹거리자 준수의 다물린 입술이 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씨발 거, 관두는 게 좋겠어.”


 이런 말만 해줘도 풀리는 거 알면서.

 해앰-. 상호가 준수를 끌어안았다.




◀◀◀

 동거가 처음부터 순탄하지 못했다보 니, 관계가 처음부터 대격변을 일으킨 건 아니었다. 그냥 나이를 먹다 보니 이대로 혼자 살 것 같았고, 언젠가 동네 술집에서 했던 고해처럼 준수에게 생각해 본다던 준수에게 저를 의탁한 채 계속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 관계에 다른 색이 덧입혀진 건, 두 남자가 욕정의 노예기 때문도 아니다. 

 처음은 그랬다. 성준수가 허락하는 한 뼘의 거리감이 좋았다.

 저에게만 허락된 틈 같아서. 그 틈을 억지로 비집고, 햄이 참 좋은데, 햄 같은 부인이면 내가 바로 데리고 사는데. 혼자 푸념처럼 늘어놓는 소리에, 햄도 글치 않아요? 공감을 얻고자 했다.


“난 개새끼 데리고 사는 기분인데.”


 술에 몽창 취해서 늘어놓는 말을 들어주던 준수가 솔직하게 답했다. 준수의 직장은 준수가 사장이다 보니, 술자리가 적었다. 상호는 계급 사회의 일원인 만큼 술자리가 잦았다. 취해서 오는 일은 다반사였다. 남들보다 늦은 사회 초년생, 낯가림도 심한 상호가 어떻게든 사회에 물들어 보겠다 발악 아닌 발악을 할 때였다. 이쯤 준수가 상호를 핸드폰에 저장해놨던 저장명은 [개상호]였다. 맞아, 이 땐 제가 생각해도 개였다.

 그래도 그저, 이대로도 좋다 생각했다.


“햄. 우리, 결혼할까요?”

“미친놈이 터진 주둥아리라고 아무 말이나 섬기네.”


 리클라이너에 앉아있던 준수가 발로 툭툭 상호를 건드렸다. 술 처먹었으면 니 방 가서 곱게 자라? 아인데. 내 존내 맨정신인데. 풋사랑처럼 설익은 감정도 아니고 농도 짙고 무거운 감정이었다. 저를 밀어내는 준수의 발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껴 넣고 진지하게 상호가 준수를 설득했다.


“어치피 둘 다 은퇴해가 스포츠면에 나올 일도 없고, 이대로 독신으로 살 거면, 그냥…, 우리 둘이 살 거면…, 부부처럼….”

“야.”


 으응? 혼자 늘어놓던 말을 듣던 준수가 턱을 괸 채, 바닥에 철퍼덕 앉아 준수의 발가락을 조물거리던 상호를 내려다보았다.


“너 나 좋아하냐?”

“…….”


 술은 깨 가는데, 얼굴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맞네. 익은 얼굴에서 답을 얻은 준수가 거만한 웃음을 지었다. 아 표정 존나 얄밉구로. 발가락 털 뽑아버릴까. 두들겨 맞을 법 한 생각을 하면서 벌어진 입을 닫지도 못하고, 상호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래서 책임져달라 했냐?”

“건 아니고….”


 상호가 가둔 발가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꼼지락 거린다. 감각은 그대론데 생각 회로는 굳었다. 성준수는 아무런 표정 없이 여전한 눈길로 상호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욕을 해! 나를 때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성적표를 받은 것처럼 굳은 채 있는데, 준수가 다시 시선을 텔레비전으로 돌렸다.


“그래, 하자.”

“예, 예?”

“하자고 결혼. 불효하지 뭐.”


 …, 뭐 그렇게 농담이 한 80%로 시작된 연애였다. 키스를 하려다 몇 번 무드가 안 잡혀 말아먹기도 했다. 야. 나 토할 것 같아. 햄은 이 얼굴이 토가 쏠린다고요?! 내 객관적으로도 괜찮은디! 야. 넌 안 그래? 준수의 수려한 낯을 보다가 상호는 볼을 붉혔다. 낯 간지러버가 못하겄어요. 그래. 하지 말자.

 연애를 하듯 차근히 단계를 밟았다. 상호의 입에서 관계를 개편해 보자는 제안 전까지, 둘은 평생 동성애 따윈 생각도 못 했다. 객식구로 얹혀살다가 이대로 살다가 죽을 것 같으니 그냥 부부처럼 살자 하고 합의를 하면서 관계가 묘하게 변했다. 한 뼘의 호의고 나발이고 관계를 정립하는 단어의 힘이 대단했다고 밖엔 할 말이 없었다.


 결혼한 지인들한테 그래서 대체 결혼 사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벼락같은 운명의 사랑인가?라는 논제를 돌렸을 때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안다. 아,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겠다.’

‘맞아. 이 사람이랑 살면 평생 살겠다. 뭐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어. 그럼 상호야….’


 솔깃한 상호에게 친구가 속삭였다.


‘그때를 조심해야 돼.’

‘개새끼가 총각귀신 만들려고 하네. 그냥 뭐 대단한 사랑을 하는 건 아니고, 이 사람 아님 안 되겠다. 하는 순간이 있으니까 그냥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지. 우리 나이에 사랑은 무슨.’


 어깨를 으쓱이며 맥주 대신 콜라를 마시는 기혼자를 보며 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은 무슨. 들끓어 오르는 불같은 감정은 순간이고, 영속은 영원히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될지언정 꽤 유효하다. 상호는 그런 사람이라면, 준수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준수에게 가 일장 설명을 늘어놓자, 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 보면 우리도 남사시런 짓 하면서 덤덤해지지 않을까요?”


 히히 웃는 말에, 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의 손바닥 안에 손장난을 치며 말하던 상호가 준수의 왼손 약지를 쥐고 내랑 결혼해 주이소-. 또 장난스레 말했다.


“야. 그럼 내가 바가지 좀 긁을게.”

“네?”

“술 작작 처먹어. 쫓겨나기 싫으면.”


 넵. 빠르고 존나 착하게 상호가 답했다.


 낯간지러운 스킨십은 유튜브를 보던 상호가 제안했다. 우리는 이제 부부니까, 손만 털 수 없는 거여요. 관계의 확립을 바라는 말에 준수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존나 염병하네, 이 새끼? 서로 헤어지지 않겠단 각오로 관계를 덧입혀 보자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한텐 평생 가도 못할 짓이었다. 서로 퇴근하고 오면 꼭 끌어안고 수고했어. 하고 도닥여주는 거예요. 좋죠! 별 거 아니잖아요!

 포옹은 선수끼리도 하던 가벼운 스킨십이다. 열심히 설득하자 준수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고, 좆대로 하세요. 답했다.

 처음엔 솔직히 토가 쏠렸다. 둘 다 엉덩이를 빼고 어깨를 들이 받듯이 억지로 스킨십을 했다. 그러다 일주일에 두 번은 술을 처먹는 기상호가 먼저 답삭 앵겼다. 준수의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이 맞닿아 체온을 나누며, 수고했다 속삭였다.


 술에 잔뜩 취해 먼저 잠든 준수의 침대에 엎어져 그를 끌어안으면서도 시도했다. 이 개새끼가! 하면서도 익숙함에 젖어든 준수가 상호의 뒤통수를 때리는 건지 도닥이는 건지 모를 손길로 받아주었다. 어쩌다 휴무가 맞으면 준수의 손바닥을 건반으로 누르 듯 치던 손장난도 깍지로 바뀌고, 서로에게 기대어 온기를 나누는 것도 익숙해진 무렵-, 첫 키스를 했다.

 오랜만에 농구공을 들고 우레탄 코트 위에서 원온원을 잔뜩 한 뒤에, 땀에 젖어 현관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운동 직후 샘솟는 아드레날린에, 축축한 입술이 잔뜩 젖어 혀를 얽으며 한 난잡한 첫 키스를 였다. 이온음료 맛이 나는 혓바닥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빨아 부풀어 오른 입술에 입술을 내리찍으며, 비로 소야 염병할 커플이 된 것 같다며 상호가 웃었다.


 준수가 마주 웃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좋잖아.”


 한 뼘보다 더 가까워진 거리가, 준수 말마따나 아무래도 좋았다.



“뭐해?”


 일주일에 딱 하루 쉬는 날, 상호가 부지런히 택배를 뜯는 걸 보고, 막 현관문을 연 준수를 보고 물었다. 엄마가 김치 보내줬어요. 김장 김치를 오랜만에 먹는다며 다리 사이에 스티로폼 상자를 가둔 상호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엄마가 담근 김치-, 상홀 위해 담갔지. 지랄하네. 준수가 맞받아쳤는데도, 신난 상호의 귀엔 닿지 않나 보다. 올해는 갈까? 상호가 스티로폼 속 비닐 포장을 들고일어나려다 멈춘다.


“왜 민족 대명절은 시즌일까요?”


 아. 그렇지. 기상호는 아직 프로농구인이었다. 명절이 없단 소리다. 추석도 시즌, 설날도 시즌. 준수가 혀를 쯧, 찼다. 인간관계가 협소한 두 사람이, 제대로 관계를 고해바친 건 가족이 전부였는데, 죽음의 5단계와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존나 귀찮았지. 그때.

 처음은 부정. 우리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며 경을 쳤다. 차마 얼굴 볼 용기가 안 나서, 둘 다 전화로 고해바쳤는데 둘 다 똑같이 고성을 들었다.

 그다음은 분노. 소리 없는 분노가 몇 달을 이어졌다. 딱히 인정받을 생각 없었잖아. 이건 사실이었다. 관계를 인정받기보단 그냥 통보였다. 너님이 떠드셔도 나는 결혼을 한 몸이다, 정도의. 단순히 한 두 달 만나고 토로하자! 정한 것도 아니고,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고 나서도 몇 해를 보내다가 그냥 가끔 묻는 것도 귀찮은데 아예 얘기할까요, 하는 상호의 말에 꽤 오래 대화를 나누고 결정한 터라 준수도 토로했을 뿐이다. 아들은 남자랑 결혼했습니다. 결혼식 하길 원하시면 캐나다던, 뉴질랜드던, 네덜란드던 나라를 알아볼게요. 일방적인 통보였고, 일방적인 분노였다.


 둘 다 가족과 떨어져 산지 오래된 터라, 직장에 찾아오지 않는 이상 만날 일이 없었다. 저 밑에서 노후를 즐기시는 상호의 부모님도, 해외로 여행 다니시며 여생을 즐기는 준수의 부모님도 그저 분노만 쏟아냈다.

 다음은 협상과 우울. 이건 꽤 길게 갔고, 기상호의 마음을 무르게 만들었는데, 둘 다 헤어질 생각은 없었다. 가족의 회유,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눈물 많고 무르던 상호는 생각보다 단단한 목소리로 별 표정 없이 답했다.


‘엄마, 나는 이 사람 아니면 못 만나. 안 될 것 같아.’


만날 저한테 징징거리고 유약한 소리만 하던 기상호가 둘의 관계에 대해선 물러섬이 없었다. 준수는 거기에서 어떤 확신을 얻었다. 아, 나 얘가 아니면 앞으로 평생, 영영 고독만 느끼다 서서히 죽어가겠구나. 그래서 준수도 물러섬 없이 대답했다.


‘나 얘 아니면 안 돼. 죽어요.’


 가슴에 대못을 박으며 수용하게 했다. 몇 년간 왕래가 없다가, 부모에게 알렸던 계좌를 모두 해지하고 일방적으로 돈을 보내고, 매해 선물을 각자의 집으로 보내면서 평생 높을 것 같던 벽이 허물어졌다. 찾아뵐게요. 했던 날 기상호는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드려 맞았다. 준수는 그냥 구경했다. 남의 집 귀한 아들 때리진 못하시겠다며, 그러는 걸 구경했다. 그치,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기상호는 맞을만해.

 마찬가지로 준수도 그 고운 여사님 손에 두드려 맞았는데, 이때는 상호가 편들었다. 때릴 데도 없는 햄을 왜 때리세요. 차라리 절 때리세요, 준수 햄 어머님! 젖살만 내려앉았다 뿐이지 내내 관리해 번지르르한 낯을 때리지 못하고 모친은 앓아누웠다. 거한 드라마 한 편 찍고 나서야 부모님도 어느 정도 둘의 관계를 인정했다. 그게 2년도 안 됐지만.


“미리 내려가지 뭐.”

“뭐 사갈까요? 어머니 스카프? 가방?”

“너 돈 잘 벌어?”

“…, 햄 아픈데 찌르는 거 아니에요.”


 끙차, 스티로폼 상자를 안아 든 상호가 주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준수가 따라 걸음을 옮겼다. 따라 걸으며 내내 코트 품에 있다가 막 꺼내어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려놓자, 김치를 옮겨 담아 잽싸게 냉장고에 밀어 넣은 상호가 식탁에 앉는다.


“뭐예요?”

“뭘까.”


 봉투를 열어보는 눈에 기대가 가득하다. 반지 낀 왼손으로 봉투를 열어보는 손길이 들떠있는 것을 보고 준수가 물컵에 물을 따랐다.


“붕어빵!”


 달달한 걸 워낙 좋아하니, 지나칠 수가 없었다. 눈이 가느스름해지고 눈물점이 비죽 솟아, 즐거움을 견디지 못하는, 이 얼굴 하나 보겠다고 코트 안에 부러 냄새가 밸 것을 알면서도 품어왔다. 신난 상호가 어깨춤을 추면서 붕어빵을 꺼내려다 티셔츠에 손을 문질러 닦고 벌떡 일어난다. 팔을 벌리는 것을 보고, 준수가 한 걸음을 뻗어 팔을 벌리고 있는 상호를 끌어안았다.


“수고했어요.”

“너도.”


 귓가로 서로의 숨이 닿는다.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이 하루를 온전히 마무리했음을 알렸다.

 준수가 제 심미안을 해치는 흔적을 바라보기만 하자, 소파 밑에 앉아있던 상호가 고개를 들고 와요? 하고 묻는다.


“굳었네.”


 에, 그러네. 상호가 뒹굴어 거실장 위에 있는 물티슈를 들고 온다. 배를 긁으면서 가까이 온 상호를 준수가 위아래로 훑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 프로 시절 입던 유니폼 반바지. 백수의 차림새가 따로 없는 모습을 보고 혀를 쯧 찼다. 저게 뭐가 좋다고. 무감한 눈으로 물티슈를 꺼낸 상호가 소파를 박박 문질렀다. 물티슈를 수거한 상호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냄새는 다 빠졌나 봐요.”


 물티슈를 뒤로 휙 던진 상호가 준수의 허벅다리 위에 앉는다. 준수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일은 월요일-.”

“근데?”

“소파는 누가 닦았는지 왐마, 엄청 깨끗하네?”


 어깨를 눌러 준수를 소파 등받이에 깊게 묻은 상호가 허리를 숙여 몸을 쫓아온다. 조금의 무드도 없는데 열기가 몰린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는데, 상호가 볼에 입술을 비비며 속삭였다.


“염병 천병 소파 사길 잘했다. 그쵸? 여보.”


 목에 팔을 두르는 것에 화답하듯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으로만 답했다.

 어. 존나 잘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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