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상] 다시 보통의 나날

준수상호 전연령용

백반집 by d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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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동거 준상 일상물 한뼘의 번외편인데 본편보다 더 길다는게 ,, ^^,,;

이하 상세 타임라인은 후기에.

 



A.어쩌면 누군가에겐 몰래 카메라



[지상고 농구부 동문회]


 명목이 거창한데 반해 말이 지상고 농구부지, 솔직히 말하면 쌍용기 영광의 멤버끼리 만나는 자리다. 제 밑에 후배들의 면을 준수나 재유가 제대로 기억할 리 없으니, 그냥 영광의 시절을 재현해 내게 만든 6명이서 만나는 자리라는 거다. 거기에 어쩌다 현성이나 인진이 참석하는 정도. 그럼에도 도착 예상 시간을 공유하는 메시지에 조급증이 일어, 연신 시계를 보는 마음이 급했다.

 우리 구단은 서울 구단 아니니까 쪼매 봐 달라 하지 않았나. 햄들은 진짜 차가운 사람들이다. 아무리 비시즌이라도 바쁘긴 마찬가진데, 기상호를 위해 비시즌에 약속을 잡았다는 둥 위하는 척 생색을 냈다. 내는 지금 선수 연봉협상이 코앞이라 야근해도 부족하다고! 팀장의 눈치를 보면서 가방을 챙겨 비굴하게 일어나서 출구를 향해 몸을 돌리기 무섭게,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외치고 칼퇴를 질렀다. 갈굼은 미래의 기상호에게 맡기고, 휴대폰을 들어 도착 예상 시간을 찍어보았다.

 하…. 경기도민은 삶의 많은 시간을 대중교통 이동 시간으로 보낸다더니. 내도 KTX 타게 해도….



[저 이제 출발해요ㅜ 늦을 듯여ㅜ]


 ㅇㅇㄱㅊ 쿨하게 도착하는 메시지들에 안도가 되면서도 퇴근길 지옥철을 버텨야 할 생각에 한숨이 샜다. 하…, 광역버스를 탈 생각을 잠깐 했으나 만석 되면 바로 출발해버리는 차를, 이미 어지간한 맛집 대기열보다 더 심하게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생각을 접었다. 서울 출신이라곤 성준수 하나밖에 없는데 왜 다 서울에서 못 봐서 난리야! 여도 터미널 있고 어! 기차도 쪼매 가면 서고! 어! 분노한 상호가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내밀며 발걸음을 빨리하는데, 자켓 주머니에 넣어둔 진동이 지잉 길게 울렸다.


“어? 햄이 뭔 일이지?”


 얼마나 늦는지 물어보려고 그러나? 싶어서 상호가 얼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엄지를 문질러 전화를 받았다.


“햄! 왜요!”

- 후문으로 나갔어?

“아뇨!”


 주말에 검토해야 할 자료를 담은 노트북이 담긴 서류 가방을 끌어안고 어깨로 유리 문을 밀어내는데, 빵. 클락션이 울린다.


“햄!”


 조수석 차창이 내려지며 보이는 무심한 낯에 상호의 눈이 잔뜩 휘어졌다.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은 기분이라 부리나케 뛰어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오르는 얼굴에 미소가 숨겨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운전하는 성준수다. 정면을 주시하며 엑셀을 밟고 핸들을 돌리는 동작이 능숙하기 그지없어 신난 눈으로 쳐다보는데, 준수가 흘끔 본다.


“기상호.”

“저 데리러 온 거예요?”


 신나서 어깨까지 돌리면서 묻자, 구단 건물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서행하던 차가 속도를 더 느리게 움직였다.


“찢어 죽이기 전에 안전벨트 매라.”

“…, 넵. 죄삼다.”


 그제야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 연신 울리는 경고음이 신경 쓰여 미간이 좁아진 걸 깨달은 상호가 얼른 벨트를 맸다. 평일엔 보통 서로 마주하고 밥을 먹거나 소파에 널부럭거리며 시간을 보낸 탓에, 보기 드문 준수의 옆선이다. 주말에도 두 사람의 성향상 어지간한 일이 없는 이상 밖으로 나가지 않으므로, 보내는 일과는 늘 위에 서술한 상황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니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옆선이겠는가. 게다가 운전에 집중하는 성준수는 멋있다. 앞차가 멈춰 선 탓에 주홍빛 조명을 받은 얼굴이 일몰을 감상하는 것 마냥 근사했다.


“야.”


 사진이라도 찍어 둘까 고민하는데 준수가 여전히도 앞을 노려보는 자세 그대로 입을 연다. 으응, 네. 햄. 내 얼굴에 구멍 나겠다? 정차한 틈을 타 고개를 돌린 준수의 말에, 햄 옆모습 너무 잘생겨서 계속 봤어요. 솔직하게 말하자 준수가 왼손 약지에 껴져 있는 반지를 엄지로 슬슬 굴리다가, 피식 웃는다.


“넌 내가 그렇게 좋냐.”


 아, 진짜 말도 안 되게 잘생겼네.

방금의 물음에 대한 답은 딱히 생각 안 해봤는데. 연애를 준비, 시작! 하고 한 것도 아니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시작하지 않았는가. 좋아하냐는 물음에 대답은 yes. 그러나 얼굴 보고 좋아 죽을 만큼이냐고 묻는다면 현실적으로 no. 저보다 이성적인 준수도 같은 대답을 할 거라고 상호는 생각했다. 제가 먼저 만나자고 청해서 시작된 관계이긴 해도, 처음 스킨십을 시작할 때를 생각하면 동성 간의 스킨십을 상상도 해본 적 없어 둘 다 한참을 헛물켜지 않았나. 지금이야 사타구니를 긁다 가도 내키면 배부터 냅다 붙이고 보는 사이지만…. 대답을 하지 않자 준수의 얼굴이 험악 해진다.


“좋죠.”

“하…, 엎드려 절 받는 것도 아니고. 씨발.”


 기어를 덮다시피한 큰 손 위에 제 손을 올리며 몸을 낮춰, 다시 전방을 바라보는 준수를 올려다보며 상호가 싱글싱글 웃었다.


“햄도 내 좋아하잖아요.”


 응? 하자, 반 말하지 마. 다소 꼰대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좋으믄서 아닌 척은. 햄 옆모습이 너무 화보 같아가 봤어요. 우리 햄 선수 시절 때도 화보 찍은 거 내 잡지로 사가, 본가에 보관 중이잖어요. 아, 지금이 더 잘생겼는데. 햄 사진 찍어 놓으면 안 돼요? 아 윽수 잘생겼는데…, 우리 햄 사진 찍어 놓고 내만 보고 싶은데…. 하 누구 애인인지 차암 잘생겼네…. 한참을 이어진 주접 섞인 수동적인 요구에 준수의 좁혀진 미간이 풀렸다.


“그럼 말을 하지 말고, 차라리 찍어. 씨발….”


 성준수의 말에 상호의 입꼬리가 비죽 솟았다.


“햄 내 사랑하죠?”


 휴대폰을 꺼내면서 히죽 웃으며 말을 꺼내자, 준수가 핸들을 꽉 쥐고 답해온다.


“그럼 씨발 안 사랑하는데, 데리고 살겠냐?”


 저도 햄 사랑해요.

 셔터음이 나는 휴대폰 잡고, 상호가 배시시 웃었다.




 왤케 늦음? 경기도에서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줄 아나. 근황보다 먼저 나온 타박에, 준수의 이마 위에 힘줄이 솟는다. 퇴근시간 러시아워로 도로 위에 오래 갇혔던 준수의 인내가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 햄은 정말 끓는 점이 낮다니까. 금방 끓었다 이내 침착해지는 건 성준수의 장점이라고 상호는 나름 생각했다. 자연스레 서로 떨어져서 빈자리를 차지하며 상호가 불판 위에 익은 고기를 속속들이 골라냈다.


“맨날 돼지고기야.”

“야, 너 돈 많이 버냐? 난 아니다.”


 태성이 자연스럽게 꼽주며, 상호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준다. 준수의 눈치를 보는데, 재유와 한참 대화 꽃을 피우느라 바쁜 것을 보고 희찬과 바로 잔을 치고 꺾었다. 크, 인생의 쓴맛. 최근 이어진 야근과 모처럼 맞이한 불금, 가끔은 그리워하던 반가운 얼굴들인 탓에 넘어가는 술이 달았다. 상호가 신나서 어깨를 들썩이자, 희찬이 고마 니…, 직장에 찌들어부럿노. 하며 소주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마, 준수. 니도 한잔해야제.”

“나 차 갖고 왔어.”

“대리 불러삐.”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재유가 소주잔에 소주를 따른다. 준수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상호를 쳐다보는데, 또 신나서 잔을 꺾고 있던 상황이라…. 올 땐 준수가 운전했으니 상호가 운전해야 하는 게 맞는데. 좆됐다. 속으로만 생각하며 상호가 핫하, 준수햄…. 하고 말았다.


“술이 넘어가냐?”

“선배들이 잔도 안 털었는데, 어? 냅다 잔부터 부딪히고. 나때는 말이야….”

“아 시작됐다. 진재유 선배님의 라떼 발언.”

“저는 아이스초코요.”


 태성과 다은이 사이좋게 받으면서, 재유의 입이 불만스레 다 물린다. 참, 재유 햄. 요새도 재유 햄을 뛰어넘을 녀석은 없어요? 막내 희찬과 상호까지 서른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프로 선수로 뛰고 있는 건 둘. 재유와 태성이었는데, 희찬의 물음에 재유가 입술을 오므리면서 웃음을 숨겼다.


“하, 내도 은퇴하고 싶은데. 자꼬 일 년 만, 일 년 만 해가….”


 쟁쟁한 신인들이 치고 올라오는 와중에도 고액 연봉을 챙기면서 꿋꿋하게 자리를 버티는 스타 플레이어 진재유의 발언을 누구 하나 제대로 듣지 않고 고기를 집거나, 소주를 마셨다. 햄, 내 사이다 도. 다은에게 손짓하자, 다은이 사이다를 손에 쥐여준다. 재유의 말을 유일하게 듣는 시늉이이나마 하던 희찬이, 익은 고기를 미친 속도로 흡입하다가 답했다.


“그럼 1차 재유 햄이 사면 되겠다.”

“느그 이럴라고 내 만나나.”


 다분히 클리셰적인 발언에 희찬에게 가세해 불판의 고기를 해치우던 상호가 희찬과 함께 씨익 웃었다.


“네. 선배님.”


 재유가 코를 찡그렸다. 배곯는 가난한 직장인들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하고 읍소하자, 지갑을 열어 테이블 위에 척 소리가 나게 카드를 올린다. 아 여윽시 조선의 포인트 가드, 은혜가 끝이 없으시다. 지상의 주접은 네버 엔딩이었다.


“상호 니는 아직도 현역 선수같이 묵네.”

“아니 재유 햄이 쏜다 카니까. 이런 날 아이면 은제 제대로 묵노.”


 불판에 끊임없이 추가되어 쌓이는 고기를, 저만 먹는 것도 아닌데 희찬이 감탄한다. 그러니까 니가 그렇게 각목 같은 팔다리를 가진 기다. 아인데. 내도 요새 배 나와가 식단 조절하는 건데. 맞나, 내는 관리 그런 거 몬한다. 소주 안주로 고기만큼 좋은 게 있을까? 잘 익은 돼지고기를 연신 훔치며 냉면을 먹을까 공깃밥에 된장찌개를 추가할까 고민하는데, 다은과 시선이 마주쳤다.


“햄, 냉면 물까, 된찌 물까.”

“님 지금 뭘 묻는 거임?”

“응?”

“정답은 둘 다임.”

“ㅇㅋ.”


 다은의 현답에 상호가 감탄하며 바로 손을 올리자, 여태 관망하고 있던 태성이 시선을 준수에게로 흘긴다.


“즈언하, 점마 고기도 안 먹이시고 대체 무얼 하신 겁니까.”

“씨발. 내가 쟤 굶겼냐? 야. 기상호. 내가 너 굶겼어?”

“아, 아닌데요….”

“니가 계란말이 하나 못하는 게 내 탓이야, 지금?”


 저격은 태성이 했는데, 괜히 골리려다 상호만 몰렸다. 죄 없이 젓가락만 쪽쪽 빨며 대답을 못하고 태성에게 눈을 흘기는데, 태성이 무심한 눈으로 상호에게 시선을 흘린다. 내가 그렇게 며칠 굶은 사람처럼 먹었나. 갑자기 올라온 두 사람의 동거 화제는, 메뉴판을 훑던 다은이 제안한 냉면이냐 공기밥이냐라는 주제로 넘어갔다. 휴, 다행이다. 추가 메뉴를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잠시 정적이 내려앉자, 상호가 아까 말한 희찬의 화제를 상기했다.


“삼십 대 되면 배 나오드나.”

“엉. 그렇다대. 다은 햄 배 나온 거 봐라.”

“님들이 모르나 본데, 이거 남자의 인품임.”


 다은이 킥킥 웃으면서 포만감에 일시적으로 부른 배를 다독인다. 뭐래. 만삭 산모 같구로. 몇 개월이세요? 9개월이요. 자꾸 말 시키면 나옵니더. 둘이 주고받는 만담을 뒤로하고 상호가 제 배를 만졌다.


“쪼매 나온 것 같기도 하고.”


 도톰한 외투에 가려진 배를 꾹꾹 눌러보면서 살집을 가늠하는데, 건너편에 앉아 재유랑 작금의 농구 흐름을 논하다가 그마저도 뜸해진 준수가 툭, 말을 던졌다.


“안 나왔는데.”


 가늠해 보려던 지상고 출신의 바보들이 그 말에 젓가락질을 뚝 멈춘다. 그래 보여요? 어. 안 나왔어. 복근만 잘 있더만 뭘. 준수의 덤덤한 대답에 히히, 제가 운동을 또 소홀히 하진 않았죠. 그쵸, 햄. 평소처럼 시답잖은 대화를 하다가, 두 사람 외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안 상호가 조심스레 테이블 위로 눈을 굴렸다.


“…, 왜?”

“저기 두 분의 침대 위 사정까지 저희가 알고 싶진 않거든요?”


 아니 침대 위가 아닐 수도 있잖아! 당황한 상호가 사태를 수습하려 허둥지둥 아무 말이나 꺼내며 소주 병을 드는데, 잔이 있다며 한사코 거절당하기 시작했다. 소주를 받아주는 건, 방금 잔을 비워 손을 내민 준수뿐이다. 울상이 된 얼굴로 우예 수습하노, 햄 도와주소. 하고 준수를 쳐다보는데 준수는 멀끔한 낯으로 눈만 깜박이다 잔을 든다.


“처마셔.”


 각자 채운 잔을 깔끔하게 쨍 소리 나도록 치고 꿀꺽 삼키는데, 재유가 눈을 깜박이며 질문을 던졌다.


“둘이 무슨 사이야? 와 아직도 침대를 같이 쓴다카노?”

“…….”


 희찬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귓속말을 해온다.


“마, 니…. 재유 햄한텐 말 안 했나.”


 느그한테도 말한 적 없는데, 재유 햄한텐 언제 말했겠어요.

 …, 씨발.


“점마랑 전하 같은 반지 끼고 있는 거, 몰랐어요?”

“…, 엉?”


 재유가 술이 올라 벌게진 얼굴 속 풀린 눈을 게슴츠레하게 들어 보인다. 태성이 턱 끝으로 준수와 상호를 가리키며 여상한 얼굴로 입을 다시 연다. 닥쳐, 재앙의 주둥아리야!


“둘이 사귄 지 좀 됐을걸요?”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음? 참나.”


 다은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을 받았다. 님들 대체 언제부터 안건데. 왜 당사자인 나한테 티도 안 내고 한 번을 묻지도 않고, 알아서 납득한 건데. 천천히 당황하는 재유의 낯을 보다가, 보란 듯이 반지를 내보이며 잔을 굴리는 준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햄, 어케 좀 해봐요! 눈으로 열심히 구조 신호를 보내는데, 준수가 피식 웃는다.


“아닌데.”

“내삐나.”

“씨발아, 반말하지 마. 아니라고.”


 그라믄 뭔 데요! 희찬도 가세한다. 점입가경이 되어버린 판을 보며 상호가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여러 해를 살아온 눈치로 알았다. 성준수는 이 판에…,


“결혼한 건데.”


 주도권을 제게로 돌릴 생각인 것이다.


“…, 이걸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고?”

“뭐. 청첩장이라도 줘? 근데 식 안 올릴 건데.”


 기상호는 그냥 존나 울고 싶었다. 흘끔 본 성준수는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버린 기상호를 보며, 그 얼굴을 안주 삼아 술이나 마셨다. 씨발…, 이 와중에도 잘생겼어.



“…, 뭐고. 몰래카메라가.”

“재유야.”


 응? 재유가 준수를 바라본다. 기상호는 숨어들 쥐구멍이 없나 찾는 지경에 이르렀다.


“난 이런 걸로 장난 안 친다.”


 판사의 선고처럼 엄숙하게 내려진 말에, 기상호는 졸지에 아웃팅 당하며 으아악 소리를 치고 싶었으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꾹 참았다.

 이 와중에도 성준수 존나 멋있어.

 이딴 생각이나 하는 기상호도,

 제법 노답이었다.




B. 蜜月(밀월)


 어쩌다 국제 대회가 있거나 전지훈련 갈 때나 쓰던 여권을 들고 신나하는 꼴을 보니 한숨이 먼저 나왔다. 전지훈련이나 아시아 규모의 국제 대회보다 훨씬 멀리 떠나는데 어찌나 신나 있는지. 식은 제대로 못 올릴지언정 신혼 여행만은 놓칠 수 없다며, 기상호가 박박 우긴 탓에 시즌이 종료되고, 입사 초 1년간 제대로 못쓴 연차를 영혼까지 몰아서 긁어다 쓴 결과물이다.

 이 여행을 위해 근 2주간 일거리를 집에 가져와서까지 일하고 새벽에 겨우 잠들 정도로 열심히 일한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타박을 하면 안 됐다. 반년 전부터 준비한 여행이 디데이로 다가온 것에 신난 얼굴이, 기대감 가득한 눈빛이, 반짝였다.


“햄, 차 갖고 가요?”

“멍청아. 너 그새 까먹었냐? 리무진 타고 간다니까.”


 옷가지는 현지에 도착해 아울렛에 들러 사기로 한 만큼 서로가 갖고 있는 대형 캐리어는 아직 가벼웠다. 매번 드럭스토어를 갈 수 없으니 미리 준비한 세면 용품과 속옷 몇 벌, 잠옷과 일상 복 몇 가지가 전부인 캐리어를 나눠 들고 천천히 나설 준비를 하는데, 상호가 다시 캐리어를 펼친다.


“아 뭐해. 리무진 타러 가야 된다니까?”

“타포린 백 하나만 챙길게요!”


 아니, 지가 바리바리 바리스타도 아니고. 짐을 뭐 그렇게 많이 챙긴다고. 어디서 본 건 많아서 머리 위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것을 보며 준수가 쯧, 혀를 찼다. 현관 앞에서 팔짱을 끼고 하는 꼴을 바라보자, 햄.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우리 아부지 같아요. 해서 매를 번다 싶어 한 대 때렸다. 이게 허구한 날 까불고 있어.

 커피를 하나씩 나눠 들고 리무진에 캐리어를 실은 뒤, 올라타 같은 자리에 앉자 상호가 여전히 반질한 낯으로 준수를 바라보았다. 비행기 처음 타는 것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좋다고 쪼개.


“햄, 좋다. 그쵸.”


 창가 자리를 좋아하는 상호가 제게 창가 자리도 양보하면서 어깨를 비비고 묻는다. 웃는 낯에 타박 주기도 뭣해서 준수가 창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어.”


 바깥바람을 쐬어 어지간히 신났는지 방방 뜨던 녀석이, 이동 시간이 길어지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통로 쪽으로 기울어지던 고개가 이제 록페스티벌을 즐기며 헤드뱅잉을 하는 사람들의 그것과도 같아지자, 어깨를 채서 제 쪽으로 당겼다. 어깨 높이가 비슷해 한참 기울어진 고개가 어깨에 닿는다. 실리는 무게를 기꺼이 받아낸 준수가, 위태롭게 허벅지 위에 놓여있던 커피컵을 제 음료구 위에 올려 두었다.

 엔진의 소음과 어깨 위 놓인 기상호의 입에서 나는 새근새근한 숨소리만 들리는 것을 나름대로 즐기며 풍경을 눈에 담았다.


“햄, 여 라운지가 밥이 윽수 맛있다카대요!”


 수화물을 넘기고, 면세품을 찾은 상호가 신나서 또 조른다. 잠시간 취한 휴식에 살아났는지, 신나서 공항 내부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상호가 라운지 앞에서 소리쳤다. 대체 어떤 새끼가 우리 집 개새끼한테 바람을 넣은 건지. 면세품이 든 쇼핑백을 들고 신나서 팔을 휘젓는 것을 지나가던 객들이 피해 가는 것을 보고 준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씨발, 사람들한테 피해 주지 말랬지.”


 농구 선수 출신 특유의 긴 신장과 긴 팔이 타인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상호가 바로 차렷 자세를 하고 서있다. 전봇대 같고 좋네. 라운지 적용 카드가 뭐가 있더라. 속으로 셈을 하던 준수가 상호를 지나쳐 라운지 입구로 들어섰다.


“뭐해. 안 따라와?”

“햄!”


 기내식은 윽수 맛이 없다더라고요. 미리 배 채우고 가면 좋잖아요. 내가 낼게요. 혼자 신나서 하는 말에 공금 외로 따로 모으는 적금을 여기에 쏟아부을 생각이냐고 타박을 준 준수가, 카드를 내밀었다. 데스크 직원이 상냥한 웃음으로 본인 외 동반 1인은 할인되시는 카드네요. 결제할까요? 묻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자, 준비된 남자 성준수! 하며 상호가 엄지를 추켜올린다. 제발, 가만히 있어….

 심지어 이 자식도 프로 선수 출신이니 라운지 출입이 처음은 아닐진대, 왜 이러나 모르겠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자, 저는 항공사 라운지만 가봤지 이렇게 잘 차려진 라운지는 처음 와본단다. 어차피 라운지에서 주는 식사가 그게 그거지. 뭐 대단한 거라고.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충전하는데 상호가 푸실리 샐러드를 접시 한가득 들고 와서 먹으며, 준수에게 컵라면을 내밀었다.


“너는 좋은 거 먹고, 난 컵라면이나 먹어라?”

“아니에요, 햄! 여기서 먹는 컵라면이 완전 별미랬어요!”

“하…, 씨발. 내가 말을 말아야지.”


 자리에서 일어나 핑거 푸드 몇 가지를 담아오자, 상호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준수가 담아온 것을 훑더니 일어나서 똑같은 걸 담아온다. 애 앞에선 뭘 못한다더니. 어휴, 씨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고 온 게 생각나 전채 요리를 가볍게 먹은 뒤, 끼니가 될 만한 메뉴를 고르자 상호가 옆에서 참견해온다. 햄 그건 맛이 별로, 요건 맛있고요. 지는 비빔밥이나 만들어 먹으면서 첨언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는데, 잠시 사라진 상호가 어묵 꼬치를 한 움큼 집어온다.


“너…, 요새 굶고 다녀?”

“아뇨. 부산 생각나서요.”


 운동을 관둔지 좀 되긴 했지만, 운동선수만큼 먹지 않는 것이지 일반인 식사량은 가볍게 웃돈다. 상호가 신나서 먹는 것을 흘끔 보던 준수가 제 몫의 접시를 해치우고 입가심으로 커피를 즐겼다. 신나서 준수 몫까지 과일과 디저트를 담아온 상호가 새 포크로 파인애플을 찍어 준수에게 수줍게 내민다.


“내가 직접 깎아줘야 되는디….”

“너 과일 존나 못 깎잖아.”

“햄 원래 허니문은 좋은 얘기만 하는 거예요.”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리는 것을 보던 준수가 상호가 내민 포크를 받아 과일을 입에 물었다. 과육이 입안에서 으깨지며 달콤한 과육과 향이 입안을 채운다. 제가 준 것을 꼭꼭 씹어 삼키는 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상호가, 디저트를 입에 넣는다.


“엑. 햄 이거 맛없어요.”

“뷔페가 다 그렇지 뭐.”


 다들 맛있다 해서 기대했는데. 누가 그러디. 재유 햄이요. 재유는 원래 다 잘 먹어. 준수가 무덤덤하게 답하고 머그잔을 들어 커피로 달아진 입안을 달래는데, 상호가 새치름한 눈빛을 보낸다. 뭐.


“햄 지금 내 앞에서 외간 남자 얘기하시는 거예요?”

“기상호.”


 네? 대답해 보세요. 하…, 씨발. 재유가 남이냐?로 시작하는 장편의 잔소리 대서사를 읊을까 고민하다가, 괜히 제 입만 아플 것 같아 준수가 짧게 대답했다.


“지랄하지 마세요.”

“힝.”


 이걸 안 받아주네. 툴툴거리는 입을 평소 같으면 확 꼬집어 버릴 텐데, 오픈 된 라운지 공간이라 할 수 없는 것에 탄식하면서 준수가 천장만 쳐다봤다.

 씨발, 내가 육아를 하는 건지, 연애를 하는 건지….



 큰 출혈을 감소하더라도 부러 비즈니스를 잡은 보람이 있었다. 아마 이코노미를 탔다면 둘 다 구겨져서 한참을 고생했으리라. 2m를 훌쩍 넘는 거구 새끼들과 같이 경기를 한 탓에 제가 큰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비행기를 탈 때마다 느낀다. 아. 꽤 컸구나, 하고. 비즈니스 좌석을 조작하며 신나 하던 상호가 여기 애니메이션도 있어요! 햄 저 도라에몽 봐도 돼요? 하고 묻는다.


“상호야.”

“네, 햄!”

“제발 그런 것 좀 일일이 물어보지 마….”


 피곤한 낯을 쓸어내리며 말하자, 기상호가 굉장히 쑥스러워 한다. 아니, 왜 어떤 무드도 없는데 낯 부끄러워하는 거야.


“햄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햄이 된다고 하면….”

“….”

“다 해도 될 것 같아요.”


 야. 내가 똑똑한 사람이면 부부처럼 살자는 니 말에 좋다고 안 했겠지. 스스로 제 아둔함을 인정할 이유가 없으매, 준수는 답하지 않고 상호를 쳐다보았다.


“햄은 옳은 선택만 하잖아요.”

“….”

“그쵸?”


 저와 여생을 보내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냐는 확신을 받고 싶어 묻는 말에,


“그래.”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성준수 스스로도 이 선택만은 아주 옳은 선택이라고 믿었으니.



 비싼 좌석을 고른 보람이 있게 시트에 제 커다란 몸을 웅크려서 자는 것을 보며, 준수가 담요를 끌어올려 주고, 조명을 낮추었다. AI와 사랑을 하는 남자의 감성적인 멜로 영화를 한참 집중하며 보는데,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음을 던진다. 옆에 곤히 잠든 이가 깰까 준수가 간이 테이블 위에 있는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목례하는 것으로 가볍게 대꾸했다.

 옆에 숙면 중인 이가 있음을 알아챈 스튜어디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와인을 채워주고 카트를 몰며 사라진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했는데. 이따 디저트 타임이 오면 그땐 깨워야겠다.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다시 시선을 옮겼다. 남자 배우가 AI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애적 표현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에, 준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상대임이 분명한데 저게 되나?


제 옆에 앉아 입을 작게 벌리고 오물거리는 녀석을 보던 준수가 느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저런 며칠 노숙한 것 마냥 궁핍하게 자는 동성의 꼴을 보고도 키스를 하는데, 저를 위해 맞춰진 것 같은 AI랑 사랑을 나누는 건 뭐 놀라운 일이겠는가. 어쩌면 먼 미래엔 정말 저럴지도 모르지. 지금 저도…, 이러고 있는데.



 사는 곳에 반대편이나 다름없는 땅에 도착하자 상호가 신나서 방방 떴다. 잊지 않고 아이스크림도 먹여 놨고, 잠도 많이 재웠으니 날뛰는 강아지를 잠재울 방법이 없다. 휴대폰을 꼭 쥔 채, 비행기가 착륙하기 무섭게 꺼낸 슬링백을 보며, 저게 과연 내일모레 삼십줄이 맞는가 의문이 들었다. 해외에 나가면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며, 저 가방을 인터넷 쇼핑을 뒤져 한참을 고민하고 산 성의를 생각해 치솟는 욕을 참았다.

 여권이며, 지갑, 카드, 현금 등 중요한 보관품을 넣어둔 슬링백이 방방 뜨는 상호의 움직임을 따라 출렁인다. 그래…, 저렇게 제대로 준비한 게 어디야.


“햄, 어디로 나가야하죠?”


 이 새끼는 눈을 발바닥에 달고 다니나. 씨발 표지판 안 보여?

 …, 방금의 칭찬이 10초도 못 가는 것을 보며 준수가 또 화를 참았다. 허니문은 좋은 얘기만 하는 거래요…, 허니문은 좋은 얘기만 하는 거래요….

 이러다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제가 성불하게 생겼다.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난 기상호는,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식사를 하고 싶다며 졸랐다. 몇 줄 아는 영어도 없으면서 신나서 방방 뜨더니 본토의 스타벅스를 꼭 가야 한다고 졸라, 이곳은 맨해튼이 아니니 기념비적이지도 않은데 꼭 가야 하냐 물었다가, 햄은 정말 낭만이 없으시네요! 하고 매도 당했다.

 …, 존나 어이가 없어서.


“음…, 맛이….”

“맛이 뭐.”

“별 차이가 없어요.”


 숏 사이즈를 판다는 점 외엔 별다른 포인트가 없는 것에 실망한 기상호의 얼굴을 보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수혈해 지친 정신을 깨운 준수가 피식 웃었다.


“그냥 즐겨.”


 적당히 넘어가자는 뜻을 이해한 상호가 헤헤, 웃더니 준수의 손을 잡는다. 음료는 이미 다 마셔 얼음만 소리를 내는 컵을 들고, 잡은 손은 보란 듯이 휘적 거리는 것을 보고 준수가 번화한 거리를 눈에 담았다.


“아는 사람을 만날 일이 없다니! 너무 좋지 않아요?”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신이 난 녀석을 보던 준수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낯선 이들로 가득 찬 거리, 동성 커플을 보는 눈도 그냥 흘끔. 정도의 관심이 전부인 것에 녀석은 어지간히 신났나 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신나 돌아다니는 것을 보던 준수가 손에 힘을 주어, 녀석을 당겼다.


“슬롯머신 근처라도 가면 뒤질 줄 알아.”

“…, 해앰. 여기는 도박의 성진데!”

“길바닥에 나앉아서 부랑자처럼 자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라고.”


 아 안 해요 안 해! 항복했다는 듯 팔을 들어 올리는데, 제 팔도 휙 올라간다. 야. 기상호. 넵. 얼른 손을 내린 상호가 준수에게 다가와 아양을 떨었다. 공항부터 있었는데, 쪼매만 해요. 쪼매만. 예? 카지노는 아예 루트에도 안 넣었잖아요. 연신 조르는 말에, 준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세 판. 더는 안 돼. 허락이 떨어지자 신난 상호가 방방 뜬다.

 그러고 다시 생각했다.

 이게 육아인지, 연애인지 모르겠다고.


 여행을 가자고 한 말에 말이 신혼이지, 휴가를 해외에서 보내는 게 아닌가 싶어 어딜 가고 싶냐 물었더니, 미국을 가고 싶단다. 천성이 오타쿠라 일본을 가고 싶다고 할 줄 알았더니. 의외라는 물음을 대신해 표정으로 지어 보이자, 상호가 일본은 이미 몇 번 가봐서요-. 한다.


‘물론 햄이랑 메이드 카페 가보고 싶긴 한데요….’

‘죽인다.’


 의외의 행선지에 놀랐으나, 번화한 도시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성준수도 어느 정도 있는지라 동의하며, 일정을 짰다. 뉴욕 어때? 하고 묻자, 고민하던 기상호가 뉴욕은 후 일정으로 넣고, 선 일정은 라스베가스부터 가면 안 될까요? 왜? 하고 묻자, 다 지가 생각한 게 있단다.

 며칠 못가 같이 쓰는 컴퓨터에 잔뜩 남은 검색 기록으로 알게 되었으나, 준수는 스스로의 입에서 말이 나올 때까지 묵인해 주기로 했다. 근데 녀석이 미국 올 때까지 말을 안 하는 거다. 그래서 그냥 라스베가스에서 며칠 보내다가 잊겠거니 했는데.



“햄 일어나세요!”


 이 씨발.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 전날 잠을 설치다 늦게 잠든 탓에, 준수가 울리는 머리를 짚고 욕을 삼켰다. 라스베가스 일정은 제게 맡겨 두라고 할 때부터 불안했다. 같이 여행을 간 적은 없어도, 기상호는 계획적으로 사는 것과는 애매하게 거리가 먼 까닭에 느슨한 여행을 기대했는데.


“몇 신데.”

“일곱 시요!”


 염병. 모처럼 온 휴가에도 이 시간에 일어나야 하다니. 옷을 제대로 꿰어 입은 상호가 준수를 조른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아오, 씨발. 흰 셔츠에 슬랙스를 받쳐 입고 준비까지 마친 꼴을 보니, 또 욕을 섬길 순 없어서 준수가 마지못해 일어나 휴대폰 알람을 확인하고 욕실로 들어섰다. 저거 뭐가 예쁘다고 데리고 사는 거지? 어김없이 찾아온 현타에 분노의 양치질을 하고 간단한 세안을 마친 뒤, 옷을 입자 상호가 극구 반대한다. 햄 저랑 커플이니까 맞춰 입어야죠! 아주 가지가지 하네. 짜증을 억누르며 슬랙스에 티셔츠를 입었다. 편한 옷만 한가득 넣어올 줄 알았더니, 저런 옷을 챙겨 입고 꼭두새벽부터 움직이자고 조르다니.


“어디 가는데?”


 해 뜬 민낯의 다운타운을 지나 커피숍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로 속을 채우게 하더니 또 부지런히 움직여 상대적으로 한적한 거리로 들어선다. 쓸데없이 땅덩어리만 큰 나라에 큼직하게 지어진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걸 구경하며, 그 사람들 못지않게 바쁜 상호를 따랐다. 구글 지도를 부지런히 보면서 걸음을 옮기던 상호가 마침내 제가 원하던 곳에 당도했는지, 준수를 향해 팔을 벌린다.


“짠!”


 건물에 적힌 대문짝만 한 WEDDING을 보며 준수가 이마를 가볍게 쳤다.


“기상호. 그러니까….”


 헤죽 웃는 얼굴을 보는데 화도 못 내겠다.


 그러니까,

 니가 라스베가스까지 와서 하고 싶다던 게.

 결혼이었니?


“햄, 얼른 줄 서요!”


 저를 이끌고 가는 것에 저항 없이 끌려가며 준수가 어처구니를 잃어 나온 웃음을 숨기지 않고 터트렸다. 매번 상상을 초월하네, 진짜.


 이른 아침에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커플들이 줄을 서 있어 놀라웠던 것도 잠시. 저들 뒤로도 이어지는 줄에 저들과 같은 동성 커플이 있는 것을 보고 이젠 놀라지도 않았다. 그런 나라였지, 참. 상호는 햄한테 서프라이즈 할 생각에 잠을 못 잤다며 난리를 치다가, 긴장이 풀렸는지 선 채로 졸았다. 참으로 여러 가지 하는 기상호를 보다가 준수가 그를 이끌어 안으로 들어선 뒤, 신청서를 작성했다. 여권과 라이선스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직원이 축하한다고 말해, 감사를 표하는데 부끄러움과 현실감이 몰려왔다 예상 질문지를 가져온 상호 덕에 인터뷰에 바른 답만을 답하고 받은 종이에 그제야 두 사람의 영문 스펠이 적힌 걸 보고 지독한 현실감이 찾아온다.

 나 지금 얘랑 진짜 서류 상으로 묶였네.

 결혼했구나.


“햄 이제 진짜 품절남이에요.”

“어.”


 무를 생각도 없었는데, 무르기 없기. 하는 기상호의 말을 듣고 뒤통수를 누르자, 아 햄! 한다.


“너 이거 서류만 준비한 거야?”

“아니죠. 우리 내일 턱시도 입고 결혼식도 할 거예요.”

“증인은?”


 현실감을 찾으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묻는데, 여전히 빛나는 눈을 한 상호가 히죽 웃는다.


“현지 코디네이터를 구했죠. 주례도 있어요.”


 이걸 혼자 준비했다고 대견하게 여겨야 하나, 미리 상의도 없이 일을 벌였다고 혼을 내야 하나. 갈등하는데, 상호가 서류를 들고 수줍게 웃는다.


“햄, 우리 진짜 결혼하는 거라니까요?”

“어어….”

“좋죠?”


 저렇게 묻는데, 이 씨바꺼 당장 안 물러? 할 수도 없었다. 가볍게 눈을 감으며, 준수가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만들었다.


“더럽게 좋네.”


 성준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으로.



 밑단이 짧은 턱시도를 입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던 상호가 이런 7부 바지 입은 신랑이 둘이나 있다니 너무 웃기지 않아요?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부케는 누가 들죠? 니가 들어. 햄이 들면 더 꽃 같을 텐데. 상호야, 형은 지금 충분히 참고 있거든? 둘이 속살 거리는 것을 듣던 코디네이터가 흡족하게 웃었다. 뭘 그런 시선으로 쳐다봐. 한국어를 반절 정도만 알아듣는 여성을 보며 준수가 어색한 웃음을 짓고 시선을 돌렸다.

 서로 종교가 없는 건 매한가진데, 결혼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 장소가 우습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어디까지 준비를 했나 싶어 따라주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라이선스를 건네자, 이후 절차는 자기들이 해준다는 설명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따분한 표정의 주례가 읊는 성혼 선언문을 들으면서 간단하게 긍정을 표하는데, 상호의 낯이 계속 밝다. 피로에 찌들지 않은 얼굴을 실로 오랜만에 보는 까닭에 준수도 적당히 표정을 꾸몄다. 사진사가 사진을 촬영하는 것에 어색하게 굳어 있는데, 상호가 사진사에게 가서 결과물을 보더니 휴대폰 번역기를 사용해 빠르게 뭐라 뭐라 말한다. 마찬가지로 의무감에 젖어 있던 남자가 상호를 바라보는데, 팁을 쥐여준 상호가 이렇게! 이렇게! 오케이?까지 하는 것을 보고, 준수가 고개를 저었다. 여태까지 권태로운 낯이던 주례가 준수와 상호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뭘 웃어. 커플 처음 봐? 시비라도 걸고 싶었으나, 성준수 역시 농구용 영어 외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 속에서 받치는 열을 참고 꾹 넘겼다.


“햄, 사진사가 사진을 드릅게 못 찍어가, 팁 주고 관광지 한국인 정신을 보여주었어요.”


 속닥거리는 상호가 언젠가 말해주었던 유머가 떠오른다. 관광지에서 한국인에게 사진을 부탁하면 열과 성을 다해 인생 샷을 만들어준다는 속설이었지. 돈을 먹인 보람이 있는지 무릎까지 꿇으며 긴 신장의 두 남성을 담아낸 사진사가 엄지를 들어 올린다. 따봉? 하고 물으면서 다가간 상호가 오! 굿! 하면서 긍정해 보였다.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어차피 햄 성격에 웨딩 사진을 제대로 찍을 것 같진 않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찍자고요!”


 관광지에 도착한 이후로 찍은 사진이라곤 풍경이 전부였으니, 이 정도의 요구는 들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바쁜 와중에 이 모든 걸 준비하느라 몇 배 더 바빴을 상호가 채플 주변을 돌며 사진을 찍자고 조르는 것을 참아주는 성의로 준수는 나름 보답했다. 원본 이미지를 CD에 담아준다는 말에 웃돈을 얹는 상호를 보며, 또 혈압이 솟았으나 그냥 솟기만 하고 말았다. 참자, 참자.


“10일만 지나면 인터넷에서 결혼 증명서 발급받을 수 있대요.”


 신이 난 상호가 가까이 다가와 볼에 가볍게 입 맞춘다. 직접 준비했다는 반지를 왼손에 끼워주면서 괜히 저 혼자 감동해 해앰…, 하던 상호에게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컸다. 부부로 살자는 농담 같은 말에 긍정하면서 얼렁뚱땅 시작됐더라도, 반지까지 기상호에게 맡긴 건 좀 그렇지 싶었다. 이상한 데서 추진력이 있는 녀석이 괴물 같은 추진력을 발휘했다고 봐도 무방해서, 저만큼이나 커 오랫동안 농구공을 잡았던 손에 반지를 끼워주는데 마음이 울렁거렸다.


“나중에 이거보다 더 비싼 걸로 할 거야, 씨발.”

“그땐 진짜 제대로 사진도 찍고 그래요.”

“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대신 돈은 내가 낼 거야. 햄은 집에 나 살게 해주고, 나 책임까지 져주잖아요. 나직하게 말하며 헤헤 웃는 얼굴을 보던 준수가 이 놀음의 클라이막스는 제가 만들어야지 싶어, 반보 움직여 가까이 다가가며 가볍게 입술을 겹쳤다.


“햄 이제 큰일 났다.”


 그래, 큰일 났다.

 이제 진짜 빼도 박도 못하게, 평생 끼고 살아야겠네.

 준수의 말에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는지 모를 상호가 준수를 끌어안았다.



 국내선을 타고 넘어오자, 배로 번잡한 도시인 게 벌써부터 체감된다는 것을 느꼈다. 라스베가스에 머문 며칠간은 그래도 꽤 멀쩡한 착장으로 다니던 상호는, 여행 도착 첫날과 같은 착장으로 돌아갔다. 박스 티셔츠에 반바지, 슬링백. 커플룩이 어쩌고 하더니, 몽창 까먹은 녀석을 보며 준수는 그냥 늘 입는 검은색 티셔츠에 긴 면바지를 입었다.


“있잖아요, 햄.”

“뭐.”


 기상호가 고통스러운 낯을 한다. 속이 안 좋나? 기내식이 나올 리 없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해서 가볍게 요기만 한 참이었다. 시가지에 도착해서 제대로 된 끼니를 하자며 어떤 식당에 갈지 간단하게 알려주는데 대화를 끊은 상호가, 준수의 손목을 간절하게 잡았다.


“한식이 먹고 싶어요….”


 저 씨바거. 어제 컵라면 먹으면서 감동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미리 예약을 해두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준수가 급하게 휴대폰으로 한식당을 검색했다. 당장 갈 수 있는 곳 중 무난한 곳에 가려 하다 보니, 졸지에 국내에도 있는 체인점 식당에 가게 생겼다.

 씨발. 진짜.



 뉴욕의 상징과도 같은 빌딩 앞에 있는 순두부를 먹었다. 물가 비싸기로 소문난 서울 땅에서 먹어도 1만 원도 안 할 메뉴를 16불이나 주고 먹어야 하다니. 통탄스러웠으나, 이번 여행에서 돈을 아끼지 않기로 한 건 피차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상호가 라스베가스에서 준비한 일정만 해도 어림짐작해 상당한 돈이 들어갔을 거다. 그러니 참아야 했다.


“햄, 미안해요…. 햄이 햄버거 먹고 싶다고 했는데.”


 미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수제 버거, 유명 요리 프로그램에 소개된 뉴욕 본토의 레스토랑 등을 둘이 관광할 경로에 촘촘하게 넣어둔 걸 상호가 잊을 리 없었다. 애초에 계획했던 루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라 물티슈로 손을 닦아낸 준수가 신나서 수저질을 하고 있는 상호를 보았다. 어차피 이미 지나간 일, 과거를 뒤돌아보며 후회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됐어. 급하게 먹다 체하지 말고 천천히 처먹어.”


 왼손으로 물 잔을 밀어주자, 오른손으로 받은 상호가 엄지를 뻗어 부드럽게 약지에 낀 반지를 쓸어내린다. 애교 섞인 스킨십에 계획이 틀어진 것에 대한 불쾌함도 잊고 준수도 수저를 들었다. 스푼과는 분명 다른 익숙한 식기들과 익숙하게 접할 수 있으되, 어지간한 메뉴에 순두부가 들어가는 퓨전식 식사를 마치고 걸음을 옮기자, 신난 상호가 손을 내밀었다.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유하게 풀어져서 손을 내밀고, 덥석 잡거나, 팔짱을 끼고 걷는다. 햄 저거 봐요. 이따 저기 가서 선물 사요. 조용히 눈을 굴리며 구경하다가 한 번씩 툭툭 뱉는 말에 간단한 긍정과 부정을 보탰다. 루트에 있는 곳이면 그래, 없는 곳이면 시간 되면. 혹은 안 돼. 번영하고 번잡한 도시 특성상 저마다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저들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상호가 신나서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들도 도시의 소음과 함께 사라진다.


“우와! 햄 내 사진 찍어줘요!”


 가벼운 옷차림의 상호가 신호 앞에 서서 팔을 벌린다. 의문스러운 일부의 시선을 관광객의 권리라는 듯 가볍게 무시하고, 방방 뜨는 것을 한참 보다, 준수가 양해를 구하고 물러나 휴대폰을 들었다. 좀처럼 저를 찍어 달라는 말을 안 하는 녀석이 방방 뜨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옆에서 중년의 사내가 미소 지으며 묻는다. 닉스 팬? 뭐라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준수는 설명이 길어지는 것은 한사코 거절하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즐기라는 간단한 답과 함께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자리를 비켜주는 남자를 향해 목례를 지은 준수가 다가오는 상호에게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니폼 입고 올 걸 그랬어요!”

“시즌 중이 아니니까, 기분이라도 내고 싶어서.”

“다음엔 진짜 경기 보러 와요.”


 초롱 하게 빛나는 눈을 보면서 준수는 생각해 두었던 말로 초를 치진 않기로 했다. 국내 리그와 미국 리그는 일정을 거의 비슷하게 소화하기 때문에, 시즌 내내 바쁜 상호가 미국 경기를 보는 건 다소 무리가 있었다. 만약 경기를 보러 오려면…. 구단의 성적이 나빠 정규 시즌만 소화하고 마감하거나 아니면 구단을 그만두거나. 어느 쪽도 좋은 방향성은 아니라 부러 말하지 않은 준수가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카메라로 촬영했다. 누군가에겐 그냥 큰 건축물이지만 둘에겐 늘 꿈꾸던, 그리던 무대가 숨어있는 곳.


“햄도 찍어요!”


 상호가 준수의 팔을 잡아당기며 아까의 자리로 민다. 대단한 관광지라거나 인증샷 스폿이 아닌 까닭에 미미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을 보며 준수가 얼굴을 붉혔다. 난 이런 거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타박하려는데, 상호가 크-! 우리 준수 햄 인물이 산다. 혼자 대단한 팔불출인 양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찍는다. 시즌 중이어서 경기를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농구를 목적으로 온 여행은 아니었으니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기약 없는 다짐이지만, 이뤄지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농구공을 손에 쥔 뒤로 한 번도 농구를 그만두겠노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현재의 업도 농구와 떨어져 있지 않다. 농구를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는 두 사람이, 이곳에 다시 돌아와 사이좋게 앉아 더 큰 세상의 농구를 보는 것도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코트에서의 무수한 꿈들이 이뤄졌던 것처럼.


“여긴 아직 봄 같네요.”

“좋잖아. 선선해서.”

“으-, 햄 아직도 시즌 중인 거 같아가 찝찝한 거 알죠.”


 상상만으로도 싫다는 듯 몸서리치는 상호를 보고 준수가 실없이 웃었다. 적당히 해가 저물어가는 도시의 사람들은 여전히 분주하다. 수많은 사람들 속 이방인인 두 사람만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좀 전의 식사 메뉴에 대해 소소한 대화를 하다가, 저녁 메뉴를 묻는 상호에게 버팔로 윙에 맥주는 어떤지 묻자 금세 긍정한다. 이번 여행에 제법 만족하는 점은, 여행의 동반자인 연인이 음식에 대한 큰 호불호가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먼 타국까지 여행을 온 건 처음인데, 큰 마찰 없다는 것만으로도 준수에겐 나름의 수확이었다.


“어? 햄 여기!”


 손으로 신나게 NY의 핸드 모션을 하며 유명 팝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상호를 보고 준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뉴-욕-. 여가수의 보컬을 따라 하며 제대로 가사도 모르는 노래를 마구잡이로 허밍 하는 것을 보다가 예약 내역을 보여주고 마지못해 기념사진까지 찍은 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순식간에 고층 빌딩에 올라선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튀어나간 상호가 우와, 햄 이거 봐요! 고개를 바쁘게 움직인다. 더 좋은 전망대가 여럿 생긴 걸 알고 있지만, 준수나 상호나 예전의 로망을 꿈꾸기 때문에 아마 도쿄로 여행을 갔다면 스카이 트리가 아닌 도쿄 타워를 선택했을 것이다. 해서 더 높은 층을 대신해 영화와 음악에 소재가 되는 빌딩에서 저무는 일몰을 감상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뭐. 기상호는 그런 배경은 쥐뿔도 모르겠지만 신나하는 걸 보고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야경도 예쁘겠어요.”

“…, 또 보고 싶어?”


 일부 일정을 정정하고, 밤 시간대로 예매를 다시 해야 하나 싶어 휴대폰을 드는데 상호가 고개를 젓는다. 아뇨. 또 오면 되니까요. 다음을 기약하는 얼굴이 노을에 젖어 다정하게 빛난다. 다음엔 꼭 농구 경기도 보고, 야경도 봐요. 먼 미래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는 녀석이 그 언젠가 와 오버랩 된다.


‘……, 이대로 독신으로 살 거면, 그냥…. 우리 둘이 살 거면…, 부부처럼….’


 부가적인 말을 떼더라도 앞으로의 미래를 부부처럼 살고 싶다며, 바닥에 앉아서 느리게 머뭇머뭇 말을 꺼내던 기상호가, 좀 더 단단하게 자라 다시 미래를 기약한다. 함께 지내온 날보다 기약할 미래가 더 아득함에 잠시 먼 곳에 시선을 던졌던 준수가 손을 내밀어 상호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틈 없이 단단하게 잡으면서, 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엔 진짜 보러 오자.”


 얼마간 지는 일몰을 보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몇 번 찍은 뒤에서야, 상호가 아 맞다. 타임랩스 그거 찍어볼걸! 아쉬워한다. 그 또한 다음에 하자 약속하자, 상호가 씨익 웃었다. 햄도 이제 미래를 기약하네요. 다음 행선지로 갈 빠른 루트를 찾아 맵을 검색하던 준수가 출구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결혼했으니까.”

“하…, 책임감 있는 남자.”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는 걸 아는 상호가 입을 가리고 웃다가, 앞서 걷는 준수를 얼른 쫓아왔다. 해진 거리는 퇴근하는 뉴욕의 사람들과 관광객으로 붐빈다. 각자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면서도 둘은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많으니 평소의 보폭만큼 성큼성큼 걸을 수 없기도 했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좀처럼 여유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햄! 저거 봐요. 아이돌! 케이팝!”


 타임스퀘어의 전광판에 송출되는 유명 연예인의 생일 광고를 본 상호가 신나서 소리쳤다. 평소보다 상기된 얼굴이 신나서 손가락질까지 하는 것을 보던 준수가 휴대폰을 들어 올리자, 상호가 금세 표정을 정갈하게 바꾼다.


“…, 판 깔아주니까 뭐 하냐.”

“혼자 찍는 건 남사시러버가…, 햄 같이 찍어요.”


 유명 관광 스폿이라 이미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어디던 많은데, 혼자 부끄럼을 타던 상호가 준수에게 가까이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카메라 어플을 셀카 모드로 바꾼다. 제 핸드폰도 아닌 것을 제 것처럼 만지더니 고양이 귀와 수염을 한 동물 필터를 씌워서 셀프 카메라를 찍는데, 상호의 입이 가로로 길게 벌어지고 턱이 들리며 보란 듯이 포즈를 취한다.

 모로 봐도 허니문을 온 부부라기보단, 수학여행 내지 우정 여행 온 친구 사이 같다. 뚱한 표정의 준수를 보고 햄 웃어요! 웃어! 하던 상호를 노려보던 준수가 주변을 훑고 카운트되는 카메라를 바라보다가 비죽 웃었다. 장단은 맞춰줘야지.

 모처럼 장단을 맞춰주는 준수에 신나서 히히 웃던 상호가 필터를 끄고 다시 버튼을 눌러 카운트를 시킨다. 목을 빼고 주변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휙 돌려 볼에 입술을 가볍게 누른 기상호 때문에 준수의 눈만 커졌다.


“커플 같은 사진도 찍어야죠.”


 우리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법한 도시에서 여전히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상호가 수줍게 웃는다. 고개를 움직여 어깨를 툭 치며, 화난 거 아니죠? 묻는 상호의 손을 준수가 꽉 잡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식사를 하면서 가볍게 마시던 맥주가 꽤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준수는 테이블을 두드렸다. 식사 값보다 술값이 더 많이 나오겠다. 연신 추가되는 주문에 지루한 표정을 하던 서버의 눈에도 이채가 돌았다. 오래된 가게임이 티가 나는 빈티지한 감성에 내내 들떠있던 상호가 폭주하여 맥주를 마셔 잔이 꽤 쌓여 있다. 직장을 들어가더니 술이 배로 늘어난 상호는 꽤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선수일 적엔 그래도 꽤 조심하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요샌 아주 고삐 풀린 망아지다. 회사의 강요로 그동안 술자리를 갖는 줄 알았는데, 반은 본인도 자리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나 보다.

 어차피 식후 일정은 호텔로 돌아가는 것이니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 있는 상호를 풀어놔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준수는 적당히 입술을 축였다.


“햄, 너무 좋아요.”

“날씨가?”


 취해서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감싼 상호가 푸흐흐 웃다가 양손을 턱에 받혀 꽃받침을 만들고 준수를 향해 웃다가 입술을 오므려 조심스럽게 말한다.


“햄이요.”

“이 씨발. 술 냄새.”


 날숨에 짙게 닿는 맥주의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자, 무드 없긴. 상호가 투덜거린다. 이쯤이면 됐지 싶어 빌지를 들어 올린 준수가 갈까? 하고 묻자, 상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정리했다. 여행의 정취와 기분 좋은 취기도 준수의 인내심이 남아있을 때나 용납되는 것이라는걸, 다년간의 눈칫밥으로 알기 때문이다. 기상호와의 다년간의 삶은 이런 데서 편안함을 준다. 제 뒤를 따르는 상호의 발걸음을 들으며, 준수가 걸음을 옮겼다.

 해가 져도 번화한 시가지를 걸으면서 흥얼거리던 상호가 뒤에서 답삭 준수를 끌어안는다. 키나 무게나 큰 차이가 없는 탓에 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이자, 술에 취해 흥이 오린 상호가 킥킥 웃는다.


“햄, 이제 선수 아니라고 이래 약해져가….”

“상호야.”

“네, 네?”


 평소에 이렇게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드문 만큼, 졸아든 상호가 놀리던 것도 멈추고 고개를 든다. 아직 완전히 취하진 않았네. 딱 그 정도의 생각만 한 채로, 여전히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은 내버려 둔 채, 준수가 미소 지었다.


“뒤지고 싶어?”


 기상호가 깔끔히 물러난다.

 역시 아직 덜 취했네.




 기상호와의 관계 변화를 표현하자면, 가랑비에 옷 젖듯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흠뻑 젖어 있을 만큼 스며들어 있는. 처음 대면만 해도 저를 어려워하던 녀석이 시간을 겹겹이 쌓으며 동경을 품더니, 일정 지점에 이르러선 편하게 대했다. 둘이 갖는 술자리에서도 아무 말이나 섬기지만, 적당한 소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주기 때문에 꾸준한 만남이 이어졌다. 허물어진 타인이라는 벽을 쉽게 넘어와 제 자리를 잡더니, 어느 순간 애정을 품고 저에게도 애정을 달라 조르기에 준수도 내어주었다.

 저 데리고 살아 달라고만 했을 때도 둘 다 편한 관계 이상은 아니었는데. 녀석의 말마따나 이대로 혼자 살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던 시점에, 기상호가 던진 다소 낯간지러운 ‘부부’라는 표현은…, 솔직히 싫었는데 그 낯에 뜬 감정은 무시를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마, 하고 수락했다. 녀석이 제 공간에 머무른 시간이 길어진 만큼 녀석의 공백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진 거다. 성준수 존나 물렀네. 녀석에게 공간을 허용하고, 스스로에게 박한 평가를 내린 시점부터 이미 글러먹었다. 운동선수가 타인을 상대로 방심하다니. 하지만 승패가 나뉘지 않는 게임이었고, 꽤…, 즐거운 게임이었다.

 스스럼없는 애정 표현에 작은 틈을 허했더니, 이내 없이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아 버린다. 평생 인생에 농구 외에 다른 건 존재하지 않을 것 같던 제 세상에 기상호가 비집고 들어와 그 못지않은 공간을 차지하고 아무렇지 않게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그 낯을 마주하는 성준수도 저 모르게 함락당해버린 제 마음을 보고 허, 웃었다.


“햄, 저 다 씻었는데….”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더 얼큰하게 술이 오르는지 빨갛게 익은 얼굴이 샤워가운을 입고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온다. 제대로 여미지도 않고 트렁크 팬티를 입고 있는 모습에 아까 기상호가 입술을 비죽이며 무드 없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씨발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여기가 서울에 있는 집구석이랑 다른게 뭔가. 밀월여행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무드 없이 아무렇게나 말려 까치집이 되어 버린 머리카락, 술에 취해 풀린 눈, 보기 좋게 익은 게 아닌 술에 절은 얼굴, 걸치다시피한 샤워가운에 트렁크 팬티라니. 준수는 무드란 무드를 다 씹어 먹고 있는 제 반려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씨발…, 타이틀 매치하러 가냐?”


 벨트만 매면 아주 챔피언이시겠어요, 아주? 비꼬자 으흥 하고 웃은 상호가 아예 샤워가운도 던져버리고 침대에 누워 해외리그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던 준수에게 답삭 안긴다.


“이잉, 봐주세요.”

“지랄 말고 쳐 주무세요.”


 어깨에 코를 박고 비비면서 햄이랑 저랑 같은 냄새 나요. 하고 애교를 부리는 걸 밀어냈다. 꺼져. 얌전히 자라. 경고하자 싫은지 비음을 내더니 아예 다리를 벌리고 준수의 위에 앉는다. 어쭈? 이것 봐라.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입술을 겹치려 하는 녀석을 피하며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던지자, 녀석이 아예 준수의 양 볼을 잡고 입술을 비빈다.


“으븝, 야, 기상호!”

“햄 우리 허니문인데.”


 꿀처럼 달콤한 달 같다니. 하늘에 있던 달이 내일 당장이라도 두 동강 나서 떨어질 것만 같은 행색으로 못하는 말이 없는 기상호를 노려보자, 녀석이 새치름하게 웃는다. 술이 올라 붉어진 눈가 아래의 눈물점이 발간 살결 위에 콕 찍혀있는 것을 준수가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햄, 저도 곧 있으면 서른이잖아요.”

“근데.”

“잊지 못할 마지막 이십 대의 추억도 햄과 함께해서 너무 좋아요.”


 난 니 그 촌스러운 사각팬티만 봐도 천년의 욕정이 식을 것 같은데. 이딴 새끼랑 도대체 어떻게 키스를 했지? 여전히 볼을 쥐고 제 혼자 정취에 취해 지껄이는 걸 보면서 뒤지기 싫으면 알아서 내려가라 하자, 상호가 연신 고개를 도리질 친다. 아 햄 쫌! 모처럼 분위기 잡는디!

 니가 니 꼬라지를 봐라.

 분위기가 잡히나.


“햄은 이제 동성혼이 허락하는 나라에선 빼도 박도 못하는 내 배우자잖아요.”

“어어.”

“싸우지 말고 잘 살아요, 우리.”


 황혼까지 바라보는 듯한 아득하면서도 다정한 시선에 숨이 막히며 지독한 현실감이 찾아왔다. 녀석의 말마따나 동성혼이 허락하는 나라에선 서류상으로 배우자로 엮인 관계이니만큼, 이제는 무를 수도 없다. 아니, 무르고자 하는 생각도 없었는데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를 또 제멋대로 섬긴다.


“음. 아닌가? 잘 살기 힘들 수도 있으려나?”


 쓸데없이 현실적인 녀석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자, 가까이 다가와선 콧등을 스치고 가볍게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누른다.


“그럼 행복하게 살아요.”

“어.”

“제가 많이 좋아해요, 준수 햄.”


 엉덩이를 들고 무게를 싣지 않은 채로, 가볍게 입을 맞추던 상호가 씨익 웃는다. 수백 개의 꽃잎이 나부는 바람에 쏟아지는 것처럼 마음 안쪽이 온통 간지러워서, 준수가 손을 뻗어 상호의 목덜미를 잡고 그대로 입술을 맞췄다. 하체를 지탱하던 힘을 잃고 제 위에 주저앉는 녀석이, 제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속눈썹이 겹쳐질 정도로 눈을 가늘게 만들어 웃는 것을 보고 준수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다른 건 몰라도 여행에 잔뜩 고조된 녀석의 얼굴이-,

 밀월 같다는 것 하나만은 알 것 같았다.



 햄 내일은 뭐 할 거예요? 은근하게 묻는 말에 준수가 목덜미에 가볍게 잇자국을 내면서 답했다. 센트럴 파크에 가서 피크닉. 늦잠 자면 두고 갈 거야. 아아앙. 깨워주야 돼요…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내는 것에 웃음 섞인 숨을 뱉으면서 아까부터 하지 않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팬티 좀 어떻게 해 봐.”


 무드 좀 그만 박살 내. 명색이 밀월여행이라며?





C. 변수는 언제나 발생한다.


 느리게 진동하는 휴대폰 알람에 상호가 액정을 바라보았다. 이런 씨발.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욕까지 절로 튀어나온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기상호가 손을 덜덜 떠는 진동에도 알람을 끄지 못하는 이유.


[결혼기념일❤️ D-1]


 결혼기념일 하루 전이었기 때문이다.


 성준수 성격상 저런 걸 절대 까먹지 않는다. 결혼기념일이라는 낯부끄러운 말에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긴 했어도 매해 잊은 적이 없었다. 그간엔 잘 안 잊었는데, 올해는 용병 물색부터 같이 하자고 졸라오는 탓에 꽤 바빴다. 후보군의 기존 데이터와 영상 자료를 훑고 그의 습관이나, 팀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를 헤아리느라 눈코 뜰 새 없어서, 준수가 가사일 당번도 사서 해결해 줬을 정도다. 햄도 존나 바쁘댔는데. 하지만 햄은 안 까먹었겠지. 나는…, 뒤졌다.


“하아….”


 이 말도 안 되는 기념일은 하필 금요일이다. 비시즌 기상호의 근무는 주 5일제로 돌아가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는 공휴일을 앞둔 날이다. 만약, 제대로 된 대비를 하지 못할 경우 준수는 전혀 서운해하지 않겠지만 기상호는 죄책감에 눌려 죽을 수도 있었다. 더더군다나 속이 보통 꼬여있는 게 아닌 준수가 다른 마음을 먹으면 1년 치 갈굼 감이다. 준수는 뒤끝이 없는 편이지만, 한 번 뒤끝이 생기면 끝이 없는 사람이었다.

 당장 퇴근길에 백화점이라도 들러서 뭐라도 살까 싶었지만, 여기는 시가지에서 벗어난 경기장이고 백화점에서 살만한 물건은 이미 지난해까지 모두 치뤘다. 정장 입을 일 없는 준수에게 넥타이며 반지며 온갖 의미 있는 선물을 다 갖다 바친 탓에 더 이상 바칠 현물적인 선물이 없었다. 망했다. 내 우야노….


“다녀왔습니다아….”

“어.”


 주방에서 물을 꺼내 마시던 준수가 간단하게 답하는 것에 지레 겁먹은 상호가 허억 호들갑을 떠는데, 힐끔 본 준수가 다시 물컵을 치우고 거실로 걸어 나온다.


“내일 주소 찍어줄 테니까, 거기로 와.”

“네네….”

“까먹었냐?”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다시피 기상호는…, 허세가 있었다.


“햄, 저 기상호에요. 못 믿으세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벗어나지 못한 달밤에 피에 미친 기상호 어쩌고 모드가 되어 실눈을 만들고 혀로 입술을 핥자, 준수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시선을 피한다. 그의 이런 냉대는 익숙했으므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상호는 최선을 다해 표정을 만들었다.


“엿 같은 표정 짓지 말고, 알아서 와.”


 저를 스쳐 지나며 소파에 앉은 준수가 리모컨을 들고 텔레비전을 켠다. 목덜미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무시한 상호가 입고 있던 폴로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밥은?”

“씻고 먹을게요.”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상적인 준수의 말에 광대가 비죽 올라가며 웃음이 샌다. 상호가 팔을 벌리고 준수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해앰, 오늘 너무 힘들었어요. 용병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 안 되는 걸까요? 눈이 너무 아파요. 한참 칭얼거리며 소파 가까이에 자리하자, 야구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던 준수가 상호의 허리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인다.


“수고했어.”


 성준수의 날개뼈 위에 조심스레 손을 올리면서 상호가 느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아. 이 한마디를 들으려고, 오늘도 열심히 일했구나, 나.



 머리를 대기 무섭게 잠든 준수의 옆에서 숨을 새액새액 쉬면서 양을 헤아리던 상호가 핏대 선 눈을 부릅떴다. 우야노.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고, 신은 인간에게 버틸 수 있는 시련만 준다 카던데…, 타개할 방법이 없노.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아니 어떻게 그걸 잊어버렸지? 정신이 나가삣다. 계속 생각해도 뚜렷한 방법이 없다. 어지간한 현물은 다 선물했고, 꽃다발을 가져가봐야 어디 먹지도 못할 걸 가져왔냐고 물건의 실용성을 일일이 따지는 준수에게 면박만 들을 것이다.

 꽃? 예쁘잖아요. 어. 이미 기존에 써먹은 패턴이기도 해서, 사실 더 써먹을 것도 없다. 잠든 준수를 뒤로하고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에 앉아 애인을 위한 이벤트를 검색하는 데 초를 켜고…, 아주 장황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이미 늦었다. 감성은 한 톨도 없는 대신 계획성이 철저한 성준수가 이미 장소를 예약했다. 그 말인즉, 퇴근하는 상호는 그냥 준수가 준비한 플랜에 맞춰 움직이면 된다는 뜻이었다. 다년간의 성준수 패턴을 분석하건대, 아마 호텔에서의 디너 후 숙박이겠지.

 꽃다발 X, 초 이벤트 X, 전자기기 둘 다 물욕 없으니 X, 스마트워치…, 올해 초에 신년 선물로 같이 맞췄으니 X. 농구공…, 그는 농구 아카데미를 운영해서 농구공이 차고 넘치니 이도 X. 농구화…, 더 사면 남아날 신발장이 없어서 준수한테 쌍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일 지경이다. 게다가 현물은 사러나갈 시간이 없었다.


“아…!”


 언뜻 뜬 이미지에 눈이 반짝 빛난 상호가 씩씩하게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역시, 솟아날 구멍은 있구나.



 준수가 준비한 끝내주는 전망에서 코스요리를 먹는데 긴장으로 속이 더부룩하다. 별로야? 묻는 말에 아니라고 고개를 도리질 치며 나이프를 쥐고 고기를 갈랐다. 제 손바닥 반도 안 되는 고기를 먹으면서 느긋하게 즐겨야 한다니, 작년에 간 뷔페가 좋았던 거 같은데. 디저트로 나온 셔벗까지 챙겨 먹자, 커피를 마시던 준수가 갈까? 하고 묻는다. 먼저 체크인을 맞췄는지 카드 키를 들고 있 는걸 상호가 얌전히 따랐다.

 서로의 기념일이라 축하하는 자리긴 해도 직접적으로 축하하는 말은 꺼내지 않는 성격이라, 상호가 오면서 준비한 와인과 치즈로 기분을 냈다. 그래도 햄이랑 살아서 좋아요. 약하게 오른 취기에 상호가 웃으면서 말하자, 준수가 피식 웃는다. 긍정의 표현에 또 웃음이 샜다.


“저는 햄이랑 실내포차에서 소주만 따도 좋은데.”

“그래서 지금 돈 지랄했다고 꼽 주는거야?”

“아뇨. 그냥 햄이랑 있으면 어디든 좋다고요.”


 그간 퇴근하고 피로에 젖어 긴 대화를 나누지 못한 탓에 간간이 근황이 돈다. 준수가 준비해왔던 와인까지 두 병을 모조리 비우고 나자, 취기와 함께 약하게 졸음이 몰려온다. 빈 잔과 병을 룸 한편에 치운 준수가 묻는다. 나 먼저 씻을까? 상호가 반쯤 기운 고개를 방치하며 끄덕였다. 그러세요.


“졸리면 먼저 자.”

“내도 씻어야죠….”


 사무실에서 여 온다고 땀 흘려가…. 더듬더듬 말하자 준수가 머리칼을 한 번 쓸어주고 욕실로 향한다. 탁, 문이 닫히자 기울던 고개가 크게 꺾이며 잠이 확 달아닌다. 명색이 기념일인데 이러고 끝날 순 없었다. 각성을 해야 한다 생각하며 뺨을 내려치고 눈을 부릅 뜬 상호가 몸을 스트레칭했다. 금요일에 이렇게 전망이 좋은 룸을 빌리려면 준수는 돈을 깨나 썼을 것이다. 통장의 출혈을 생각하며 잠을 내쫓은 상호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반드시,

 특별한 기념일을 만든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샤워가운을 꼭꼭 여민 상호가 나온 것은 제가 생각해도 한참이 시간이 지난 후여서, 준수가 이미 잠들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문을 열었더니 그는 특유의 가부장적인 자세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뭐 볼 것도 없는 바보상자를 허구한 날 보고 있는 준수의 모습에 상호가 반보씩 걸음을 옮겼다.


“해앰….”

“물을 길어서 씻는 줄 알았더니?”

“건 아니고요…, 기냥 쫌 오래 걸려서….”


 뭔 개소리냐는 듯 준수가 귀를 닦는 시늉을 하다가 무감한 눈으로 묻는다.


“하게?”

“그라믄 안 해요?!”

“피곤한데, 기분만 내면 됐지.”


 성준수 진짜 유부남 다 됐다. 명색이 신혼인데 사각팬티 입는다고 꼽주던게 언젠데. 아무리 서른보다 마흔에 가까워진 나이라지만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제가 그간 준수에게 제대로 어필(?)을 하지 못했나 싶어 과거의 행적을 돌아보는데 근 수개월은 진짜 무드 분쇄기였다. 무릎이 다 늘어난 츄리닝 바지를 입고 배를 긁다가 어? 하는 순간 겹친 게 전부였으니, 저 이가 저렇게 고인물스러운 유부남이 된 건 다 제가 이유인 것이다.

 허,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의 기상호는 성준수와 함뜨를 하기 위해 각을 120% 쟀다는 말씀이다. 침대가까지 가서 남자의 자존심을 세우는 포즈인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과 어깨를 편 포즈를 취하자, 준수가 아. 이 새끼 또 뭐 하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본다.


“햄, 내를 귀찮아하믄 안 되죠. 우리는 부분데!”

“…, 상호야. 염병하지 말고 자자고 할 때 자자?”


 아! 이게 아닌기라! 발을 동동 구르던 상호가 어떻게 하면 준수를 꼴리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딴 고민은 사실 할 필요도 없긴 했다.- 상호가 오랜만에 자신에 찬 표정을 지으며 준수를 바라보자, 그가 눈썹을 들며 표정의 함의를 묻는다.


“햄, 그래도 우리 기념일이잖아요.”

“그래서 뭐. 준비 안 해도 괜찮다니까?”


 기대 없는 표정을 보며 상호가 가운을 벗었다. 리모컨을 쥔 채 손목을 흔들던 준수가 기상호의 기행에 눈을 돌린다. 손안에서 흔들리던 리모컨이 멈췄다.


“…, 미쳤어?”

“해앰.”


 몸을 배배 꼬던 상호가 수줍게 준수를 향해 웃으며 바지를 들어 맨 허벅다리를 드러냈다.


“이 안에 안 입었는데.”

“하….”


 수줍게 웃으며, 은근하게 준수를 쳐다보자 그가 이마를 문지르다가 고개를 든다.


“이, 깜찍한 개새끼가.”

​-


 상기된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눈으로 감각을 전하는데 준수의 눈에서 또렷하게 읽히는 애정에 웃음이 샜다.


“저도 햄 좋아해요.”


 잠시간 멈춘 정사에 제 진심을 담아 말하자, 준수가 천천히 눈을 감는다. 감긴 눈두덩 아래 가지런한 속눈썹을 헤아려보는데 천천히 뜨인 눈이 여전히 다정을 품은 채 시선을 맞춘다.


“응, 많이.”


 평소의 날이라면 해주지 않을 애정표현을 고스란히 받으며 상호가 행복하게 웃음 짓는데, 이내 시야가 뒤집힌다. 시야 가득 차 있는 준수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여러 번 찍자, 준수가 얼굴을 더 가까이해 입술 선을 혀로 덧그리고, 천천히 새를 벌려 혀를 밀어 넣는다.

 혀끼리 맞닿으며 비벼지는 것이 밀어를 불어 넣는 것보다 은밀하고 달콤하였다.

-


“형 유니폼이 이게 뭐야, 상호야.”

“으….”

“세탁소에도 못맡기겠다.”


 젖은 유니폼의 밑단을 잡고 누운 상호에게 보란 듯이 들춰 보인 준수가 여전히 번들거리는 눈으로 웃는다.


“어차피 내가 빨테니까….”

“…, 해앰.”

“더 못쓰게 만들어도 괜찮겠지?”


 잊고있었다.

 빨래 당번은 성준수가 도맡고 있다는 걸.

 망했다, 씨발.


-


 햄 카니까, 내가 존나 힘들다고 했는데….

 기념일 쉽지 않구로….


-


 제 딴엔 눈을 떴다고 떴는데 겨우 보이는 좁쌀만 한 시야에, 대체 눈이 얼마나 부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불 대신 쓴 듯한 바스 타월을 밀어내며 상호가 퉁퉁 부은 눈을 비볐다. 햄, 몇시에요? 준수가 옆에 없다는 것은, 그의 기상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는 뜻이다.


“더 자. 체크아웃 시간 여유 있어.”

“허리가 아파가 더 못 자겠어요….”


 겨우 고개를 드는데, 볼에 차가운 페트의 감각이 느껴진다. 준수가 건넨 물을 받아 마시면서, 상호가 잔뜩 쉰 목소리에 스스로 놀랐다. 와, 이거 월요일엔 돌아오겠나. 큰일이네.


“그럼 집에 가?”

“응…, 집에 가서 잘래요.”


 어물어물 발음하는데, 입술이 까슬하다. 혀로 입술을 축인 상호가 준수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바라보다가 그 안에 들어있을 물건을 추론하고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성준수 지상고 시절 유니폼이지. 내가 미쳤지.


“최근 기념일에 받은 선물 중에 제일 좋은 선물이었던 것 같은데.”


 모처럼 나온 그의 솔직한 감상에도 기쁜 기색 없이 두 번은 못하겠다며 손사래를 젓자, 준수가 쇼퍼백을 내려두고 침대 가로 걸어온다.


“햄. 내 지금 윽수 못생겼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에, 거스러미 앉은 입술. 아마 온 얼굴이 눈물로 젖었으니 얼굴이 퉁퉁 부었을 것이다. 쉽게 붓는 얼굴을 갖고 있으니, 이 얼굴이랑 같이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거라고 어림짐작하며, 상호가 여전히 냉기를 품고 있는 생수병으로 얼굴을 짓눌렀다.


“…….”

“해앰, 긍정이던 부정이던 해줘요.”


 우는소리를 내자, 준수가 가까이 앉아 머리칼을 정리하고 눈곱을 떼준다. 아, 기상호 존나 가지가지 했구나. 눈곱도 끼다니. 이제 우리가 신혼은 아니지만 진짜 모든 무드를 개작살 냈구나.


“내가 좋으면 그만 아냐?”


 성준수는 없는 말은 못 했다. 못생겼다는 물음에 답을 회피하는 대신, 저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답변을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럼에도 곰실곰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고 상호가 입술을 오므려 쭈욱 내밀었다. 그럼 뽀뽀해 주세요. 내 좋다며. 눈을 감고 보란 듯이 내민 얼굴에 준수가 미동도 없다. 그래 못생겼나. 민망해져서 감았던 눈을 아주 조금 뜨는데, 입술 위로 포근한 감각이 느껴진다.

 저와 비슷한 체온을 가진 것이 여러 번 겹쳐서 가볍게 내리누르다 떨어진다.


“됐어?”


 결국 참지 못한 웃음이 입술에 걸렸다.



다음엔 못하것어요. 저도 이제 삼십 대여가….

씨발, 너만 삼십 대냐?

햄, 기념일인데 좋은 말만….

기념일 지났어.

근데 햄 저 콩나물국밥 먹고 싶어요….


니는 전주 사람도 아니고 경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서 돼지국밥 생각은 안 나냐? 재첩 국은?

햄, 저 콩나물국밥.

알았으니까 옷이나 갈아입어.


비싸서 볕이 좋은 건지, 날이 좋아 볕이 좋은 건지 모를 방 안에서 평소와 같은 말소리들이 도란도란 이어지는 여느 날의 아침이었다.


 


에피소드 구간 별 타임라인 정보 

A. 30대 초X20대 후(B보다 뒤) / B. 30대 초X20대 후 / C. 현재 시점(30대 중후X30대 초 예상)

비즈니스에서 준수가 본 영화는 HER입니다. 색감이 아주 예쁜 영화인데, 후기에 쓰는 걸 깜박했어요! 추천합니다..

신행은 로스엔젤레스 > 뉴욕 입니다. 아마도 대충 유추 가능하신 그 건물들이 맞습니다. 완전하게 결혼까지 마친 준상 얘기 쓰느라 재밌었고요,, 30대 일상이다보니 아무래도 여러 갈래로 내용 써도 될만한게 많아서 쭉쭉 이었는데 본편보다 길어졌네요. 거슬리는 오탈자가 있다면 DM으로 제보 부탁드립니다. 빠르게 수정하겠습니다.. 신행 가는 준상이 제일 재밌었는데 분량상 너무 길어지다보니 끊었고, 글 내에선 상호가 직장인이라 프농 비시즌(여름)에만 그나마 움직임이 자유롭다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ㅠ(고증은 사실 자신 없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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