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상] temple, stop! plz!

준수상호 전연령용

백반집 by d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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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첫출근,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 대졸 기상호의 인생 제2막! 시작합니다!라고 거창하면 좋을 텐데 아침부터 꼬였다. 역에서 만나자던 다은 햄이 토스트에 홀려 연락 두절된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테이크아웃 종이컵을 들고 출근하는 스마트한 직장인을 모방하고자 회사에서 가까운 카페에 갔는데 완전 미스였다. 오전 카페인에 굶주린 회사원은 20명이 넘었던 것이다. 대기번호를 받았을 때 불안 초조한 마음은 결국 첫 출근 20분 전이 아닌, 출근 정시에 뜨거운 테이크아ㅁ웃 컵을 든 것부터 시작했다.


 기성 사원들의 따가운 눈초리는 덤이다. 상호는 먼저 도착한 다은을 얄밉게 노려보았으나, 그가 누구인가. 님 첫날부터 정시 출근? 에바. 하고 마는 것이다. 이래서 학연 조또 쓸모없구나 하고 깨달았다. 배치받은 부서로 옮기는데 누가 이 사무실에서 침묵의 공공 칠빵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적이 꽉 차있다.


“이 씨발!”


 보고 회의를 하러 사라졌다던 팀장이 자리를 비운 새 휴대폰을 쥐고 벌떡 일어난 남자가 욕을 뱉었다. 아…, 존나 무서운데. 차라리 저희들을 회의실로 넣어주고 팀장이 오길 기다리게 해주지. 뜨거운 테이크아웃 컵을 쥔 상호가 놀라 어깨를 움칠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육두문자로 점철된 말을 쉴 새 없이 내뱉는다.


“이거 퀄리티 왜 이 지랄 났는지 설명할 공태성 주임?”

“하-, 납품 시간 부족해서 걍 넘길라 했는데요.”

“씹새끼야, 반려 당하면 다시 할 시간은 있냐?”


 아 쫌, 기냥 넘어가요. 시간 읎다고요. 귀에 익은 반가운 사투리를 들으며 상호는 눈을 빛냈다. 일어난 남자도 키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공태성 주임이라 불린 사내는 훨씬 더 키가 컸다. 뭔 사무직을 키를 보고 뽑나….


“사무실 분위기 또 왜 이래? 신입사원 온다고 했는데, 애들을 왜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만들어?”


 나른하게 하품을 하면서 나타난 저들보다는 연배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다행히 면접 때 본 얼굴이다. 구면의 그가 팀장임을 알자, 다은과 희찬, 상호가 어정쩡한 자세에서 벌떡 일어났다. 셔츠에 정장 바지를 걸쳐 입고 있는 얼굴에서 광이 나는 것 같다. 비록 머리숱이 좀 없어 보이긴 하지만.


“기획 1팀, 팀장 이현성. 잘 부탁한다. 선임 누군지 알려줄게, 다 인나 봐라.”


 이미 일어난 남자들은 앉지도 않고 아직도 서로 눈을 부라리는데,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따분하게 눈을 돌린 현성이 신입사원들을 모아 데려갔다.


“과장 서인진. 인진이 바쁘니까 물어볼 거 있으면 사수한테 물어봐라. 사수는 이따 배속해 줄 게. 쟈는 성준수 대리. 우리 회사 최단기간 시말서 쓴 애다. 배울 점은…, 많을 건데 성질이 좀 드럽다.”

“팀장님.”

“암튼, 그 옆에는 진재유 대리. 일 잘하고, 똑똑하고. 근데 좀 꼰대니까 알아서 기고.”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합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이게 소개야 앞담이야? 싶을 정돈데, 정작 소개를 당하는 당사자들은 아무런 표정 없이 웃음을 샐샐 짓는다. 넵, 넵. 짝다리를 짚고 서서 인상만 찌푸리는 준수와 다르게 재유가 직접 다가와서 명함을 준다. 이게 바로, 명함 돌리기 스킬! 진짜 회사를 다닌다는 기분에 명함을 받으면서 신입들이 각자 감회에 들려던 찰나,


“이번에 진급한 공태성 주임. 뜨거운 상남자니까, 쫌만 조심하면 된다. 신입사원 온 김에 진급 시켜준거라 아마 좋은 사수는 안돼도, 회사 돌아가는 건 좀 아니까 잘하면 된다.”


 뒷목을 잡고 하품을 쩌억 하던 태성이 신입들의 시선을 받고 고개를 까닥 숙인다. 말 걸다 한대 맞는 거 아냐?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희찬이는 구면이지? 인턴에서 이번에 정규직 됐다.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정희찬, 이다은, 기상호. 상호 씨는 성 대리 옆으로, 다은 씨는 진 대리 옆으로, 희차이는 공 주임이랑. 직속 사수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백업 잘 해주고. 알았지?”

“넵!”

“신입 관두지 않게, 갈구지 마라. 어?”


 군기 바짝 들어 씩씩한 소리를 내자, 팀장이 쫄지 말라며 등을 툭 쳤다. 새삼 강의실이 얼마나 탁 트인 공간이었는지 깨닫는 달지, 파티션 아닌 파티션을 사이에 둔 자리에 앉아 상호가 식은땀이 벤 손을 허벅지 위에 비볐다.


“저…, 대리님, 전 뭐부터 하면 될까요?”


 이름값을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는데, 수려한 낯의 준수가 눈살을 팍 찌푸렸다. 신입의 열정, 패기 따위의 기세가 팍 죽으면서 어깨가 움츠러든다.


“켜.”

“네?”

“컴퓨터부터 키시라고요, 씨발.”


 아…, 이 사람 인성이 왜 이모양이지?



temple, stop! Plz!

(해석 : 사원, 제발 멈춰!)



*혐성(신조어) : 혐오스러운 인성의 준말


 저의 사수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좋은 말이 있을까? 그는 글러먹었다. 재유는 깎듯이 대하기만 하면 유하게 넘어가는 스타일이고, 태성은 틀린 걸 몰라서 지가 되레 팀장한테 박살 나던데. 성준수는 씨발 꼼꼼한 데다, 피드백이 좆같기까지 했다.


“기상호 니는 존나 빡대가리냐?”


 이번 달 월세, 청년희 망저축, 주택청약, 전기세, 수도세, 신간 예판, 극장판 특전 4주치….


 별의별 소비 내역을 생각해가며 속으로 감내하다 눈을 들면, 존나 무서운 성준수의 얼굴이 있다. 이름값을 하긴 개뿔. 저건 야차의 얼굴이다.


“뭐? 오이시쿠나레? 너 노재팬 끝나도 국민 정서 예민한 거 몰라?”

“넵, 죄송합니다….”

“손가락 하나만 제스처 잘못 지어도 사과문 올라가는데, 이딴 걸 아이디어라고 제출해?”

“죄삼다….”


 존나 획기적인데. 젠지들이 오이시쿠나레에 얼마나 환장하는지도 모르면서. 대리님은 트렌드에 뒤처졌어요! 이 노땅아! 속으로만 욕을 하며 고개 숙인 채 눈물을 말렸다.

 울면, 않되…! 난 존나 어른이니까…! ಥ_ಥ


“우냐? 니가 뭘 잘했다고 질질 짜, 새끼야. 클라이언트가 아 개쩌는 기획이시네요. 당장 이걸로 가시죠. 이럴 거 같애? 씨발, 이거 들고 가면 시말서 제 3탄이야.”

“댈님 말은 바로 하셔야죠. 시말서 5탄이죠.”

“이 씨발 새끼야.”


 상호가 드라마에서 보던 회사는 이러진 않았는데. 무슨 귀족의 대화법처럼 서로를 비꼬고 헐뜯는 정도였지, 육두문자가 오가고 하극상이 이렇게 밥 먹듯 일어나진 않았는데. 출력물을 내려치던 준수가 넌 씨발, 종이야 미안해 복창해. 까지 말하기에, 상호는 눈물을 머금고 종이야 미안해, 지구야 미안해…. 같은 헛소리나 했다.


“마, 상호 개안나.”


 메신저로 옥상 고? 한 희찬 덕에 잠시 한숨을 돌렸다. 마이쮸를 내밀며 어깨를 다독이는데, 그 배려에 눈물이 또 찔끔 나오려 한다. 사나이 기상호,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던데…. 태어났을 때 한 번,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 번, 성준수가 존나게 갈굴 때 스물마흔다섯 번….


“내가 부족한 탓이지, 뭐.”

“그래도 성 대리님은 칼퇴는 시켜준다 아이가. 공 주임은 그런 거 없다. 같이 해나가는 거라며 집엘 안 보낸다.”


 그러고 보니 희찬의 눈 밑이 거뭇하다.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나자 다은과 희찬이 같은 시간에 퇴근하지 못하게 된 걸 알았다. 기다리려고 엉덩이를 뭉개면, 준수의 서슬 퍼런 눈이 따라온다. 바쁜데 분위기 흐리냐? 눈으로 이미 육두문자를 뱉고 있으면서도 일을 더 도우려 하면 당장 꺼지란 축객령이나 내렸다.


“그것도 내가 부족한…, 탓….”

“보내주면 고마운 줄 알아. 광고 회사에서 칼퇴가 왠 말임.”


 광고인. 얼마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말인가. 상호가 꿈꾸던 건 지리는 카피로 빵뜬 TVC를 송출시키고 [뜨는 광고란 이런 것입니다! 뭘 해도 다 되는 광고 천재, 기상호] 이런 책을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현실은 주어진 쥐꼬리만한 예산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쥐어짜기 위해 죽어라 수치를 뻥튀기해서 보고하고, 일이 마르지 않도록 새로운 일을 가져오기 위한 제안과 기획의 연속이다. 좀 전의 오이시쿠나레도 제안에 들어갈 기획 아이디어 단에서 제출한 것인데, 준수에게 가루가 되게 까였다. 왜…, 좋지 않나? 팀장 현성도 저의 오타쿠적인 기질을 높게 사 채용해 주었으니, 제 전공보다 더 전공스러운 오타쿠력을 자랑했을 뿐이다.


 그리고, 개박살 났다.



“그래도 시말서를 그만큼 썼는데 회사에서 안 자르는 거면 유능하다는 거잖아. 그런 사수 밑에서 배우면 행운이지.”

“그런가?”


 ㅇㅇ. 내 말 믿으셈. 무한 긍정 희찬이 다독여주자 다시 힘이 난다. 존나 무서운 성 대리님이 기다리는 기획1팀 사무실로 돌아가며 입안에서 마이쮸를 녹였다.


“다 짰냐?”

“안 울었는데요….”

“데일리 리포트 오전까지 나한테 보고해라.”

“넵.”


 고객사의 데일리 리포트를 위해 하청사에 연락을 돌리고 데이터를 모아 취합하면서 상호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래도 제법 메일함을 읽는 것이나, 엑셀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것엔 익숙해졌다. 그냥 성준수만 존나 무서울뿐. 그 와중에도 옆자리의 준수는 뭐가 바쁜지 끊임없이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울리는 전화에 씨발…, 작게 읊조리고 전화를 받아 중얼중얼 설명을 이어나간다.


 이번 KPI는 150% 도달했고, 그중 임프레션은 200%고, 클릭이 좀 아쉽긴 한데…, CPC가 어쩌고, 뭔 온갖 범람하는 업계 용어에 상호의 머리가 어찔했다. 100% 넘으면 무조건 좋은 거 아닌가? 분명 공부했는데, 봐도 모르겠다. 시선을 느꼈는지 준수가 네네, 대답하며 시선을 맞춘다. 화들짝 놀란 상호가 떨리는 동공으로 소리 없이 열리는 준수의 입을 보았다.


‘뭘, 꼴 아 봐.’ 


 고개나 연신 도리질치고 모니터에 눈을 박았다.

 아아, 존나 무서운 성준수 대리님.



 개 같은 사수 부사수 제도. 요새 학교에서도 이런 매칭은 안 해주거든요? 미팅 앱도 이렇겐 안 하겠다.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상호가 국밥에 부추를 얹었다. 엄마, 나 입에서 돼지국밥 냄새가 날 것 같아…. 브런치, 파스타, 빠에야 등등의 서양식만 먹을 것 같은 고급 진 얼굴로 왜 맨날 국밥이란 말인가. 심지어 메뉴도 거의 돼지국밥 원툴이다. 제육볶음을 먹으러 가자며 인진을 데리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현성이 성자 같아 보일 지경이다. 제육볶음은 곁가지 반찬이라도 메뉴가 바뀌기라도 하지, 돼지국밥은 부추, 깍두기, 배추김치, 양파가 전부 아닌가. 눈물을 머금으며, 돼지 부속을 솎아내던 상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리님은 돼지국밥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닥치고 먹어.”

“넵.”


 밥 먹으면서 휴대폰을 보는 것도 아니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아니고. 조금의 스몰토크는 완전히 단절시키면서, 꼭 둘이서 밥 먹는 이유가 뭔가. 아니, 둘이서만 먹던 건 아니다. 일주일째 돼지국밥 원툴로 달리는 성준수를 보고 모두가 도망간 것뿐. 다은 햄은 오늘 중국집 갔던데. 존나 부럽다. 쒸앙…. 허연 국물을 벌겋게 만든 상호가 억지로 수저질을 했다.


“별로.”

“네?”

“별로라고.”


 물을 마시며 곱씹다가 그것이 좀 전 상호가 던진 물음의 답인 걸 알았다. 별론데 와 맨날 이것만 처묵노! 속으로 치받는 물음을 꾹 누르자 준수가 뭐 불만 있냐는 양 한쪽 눈썹을 밀어올린다. 저 잘생긴 낯에 미간 좁히기, 눈썹 올리기, 찬 웃음 내뱉기 외에 제대로 된 표정이 걸리는 게 없다. 국가적 얼굴 낭비란 생각을 하며, 상호가 물을 마저 삼켰다.


“지겹냐?”

“아닙니다!”


“그럼 내일은 니가 메뉴 고르던가.”

 헐 시발. 성준수가 이런 배려를 한다고?


 상호는 아주 조금, 감동받았다.


“야, 기상호. 이거 뭐냐?”


 이 회사는 매우 수직적인 구조인 주제에, 수평적인 구조를 지향한다며 사원에게 ‘님’자 호칭을 통일한다던데. 왜 우리 대리는 야, 기상호, 새끼. 이 세 가지 명칭만 구사한단 말인가. 제안서에 들어갈 아이디어에 대한 설명을 구구절절 쓰던-말 짓는 재주가 없으니 구구절절 쓸 수밖에 없었다.- 상호가 조심스레 파티션 너머 준수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조직 구성원에 Temple 기상호 뭐냐고.”

“네? 사원이니까….”

“이 씨발. 템플 뭐냐고. 너 사원임?”

“사원이잖아요.”


 아니 씨발! 준수가 이마를 탁 친다. 어휴, 씨발! 개씨발! Hoxy 대리님은 씨발봇인가…? 어펜딕스에 들어가는 실무 구성원에 직급을 넣어야 한다길래, 회사원(officer)는 아니니, 정직하게 모 포탈 사이트의 번역기를 빌린 것뿐인데. 설마 AI도 구라를 치나?!


“너 절이야? 씨발, 스님이세요?”


 조곤조곤 욕을 내뱉는데, 너무 살벌해서 기가 팍 죽었다.


“영어는 동음이의어 많이 쓰니까….”

“모르면 걍 AE라고 쳐 적으면 되잖아.”

“넵. 죄삼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맡기냐. 자조적인 준수의 말에 기가 더 죽는다. 메신저에선 희찬과 다은이 ‘ㅋㅋㅋ’를 도배하고 있다. 템ㅋㅋㅋ플ㅋㅋㅋ 기템플ㅋㅋㅋ 기상호 종교 불교임? 개웃김 진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메시지를 보며 상호가 눈물을 훔쳤다. 그래, 너넨 떠들어라. 나는 존나 진지했다…. 기계는 아직 사람을 따라올 수 없구나. 현실을 절감한 상호가 휴지를 뜯어 눈물을 훔쳤다. 최근엔 이런 사소한 업무적인 실수로 혼나는 일이 없어서 방심했다.


 안 그래도 어제도 새벽에 퇴근했다던 준수의 낯이 파리하게 질리고 눈 밑은 거뭇한 게 죄책감을 자극한다. 대리님, 기 템플이 죄송합니다…. 근데 그걸로 이렇게 화낼 정돈 아니잖아요, 개새끼야….

 흙흙, 모래모래, 먼지먼지…. ( ᴗ_ᴗ̩̩ )



 입사 삼 개월 차. 수습도 끝났고 돼지국밥의 악순환에서도 벗어났다. 그래도 주 1회 돼지국밥을 먹고 있으니, 이쯤 되면 돼지가 기상호고 기상호가 돼지인가 싶을 경지에 오르긴 했다. 존나 쌉 유능한 우리 팀 개새끼 성준수 대리님께서는 무슨 칼퇴 트라우마라도 있는지 여섯시가 지나고 자리보전하고 있는 저를 갈궈서 굳이 굳이 퇴근시키지만, 그래도 회사는 성준수의 폭언 하나 견디면 다닐만했다. 물론 다른 팀 젠틀 가이 박병찬 대리님이나 조신우 대리님만큼 서윗하진 않지만, 그래도 정말 희찬의 말마따나 성준수는 유능하니까.


 칼퇴봇 성준수 대리님 덕분에 다른 여가 생활을 생각할 만큼 광고 회사치고 워라밸도 나쁘지 않았다. 퇴근 기록이 두시까지 남아있고 오전 예약 메일로 업무 오더를 내리더라도, 상호는 꼬박꼬박 여섯시에 퇴근해서 아홉시에 출근하는 삶을 살았단 뜻이다.


 근데 그런 성 대리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야근할 일이 생겼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한 이 특별한 금요일 오후 다섯시 오십오분에 말이다.


“야. 퇴근 준비 안 해?”

“퇴근 못할 거 같은데요….”

“왜.”

“광고주 반려당할 것 같은데, 수정을 안 해주신대요….”


 울망한 얼굴로 영상 결과물을 보면서 준수를 쳐다보자, 준수가 눈썹을 들어 올린다. 준수와 현성의 컨펌을 받고 진행한 상호의 첫 영상 기획물이었다. 가벼운 배너 제작 건이었고, 광고주가 준 소스에 기획 오더도 세세하게 내려 준수마저 나쁘지 않네. -성준수 최고의 칭찬이다.- 라는 평가를 내렸던 건인데, 오색 찬란한 영상 제작물이 광고주가 애초에 상호와 아이디어를 나눴던 것과 전혀 다르게 나 온것이다. 심지어, 기획안과도 다른데, 영상 담당 PD는 누가 금요일 오후에 수정 요청을 하냐며 뻐팅겼다.


[저는 수정 못하겠으니, 급하시면 상호님이 하세요ㅋㅋ 저는 기획안 주신 대로 만들었는데요?]



 메신저 팝업을 준수가 말없이 노려본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 팔짱을 끼고 있는 준수에게 상호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에, 대리님이 마지막으로 컨펌 주신 기획안 넘겼고요. 이거 오늘 라이브라 데드라인 오전까지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50분에 주셨습니다. 시안 확인하고 수정 요청드리니, 안 된다고 하셔서요….”

“이걸 광고주 보여줬어?”

“아뇨. 아직 못 보여드렸어요. 오전부터 달라고 독촉했는데, 조금만 기다려보라면서 기획안 그대로 만들어 준다고 하셨는…, 데. 끄흡.”


 저 나름 노력했으니, 설움이 복받쳤다. 준수가 맨날 질질 짠다고 또 울면 눈알을 후벼버린다고 했는데, 눈물이 차오르는 걸 막을 수 없다. 모처럼 대리님이 맡겨주신 일인데, 약속도 미뤄야 하고 PD도 달래고 얼러서 같이 야근을 하더라도 좋은 결과물을 내고 시안을 세팅까지 해야 했다. 광고주한테 연락해서 양해도 구해야 한다. 태산 같은 할 일에 눈앞이 껌껌한데, 준수가 휴대폰을 든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지상 기획 성준수입니다. 통화 괜찮으실까요? 네네. 다름이 아니고, 저희 시안 제작이 조금 지연될 것 같아서 퇴근 후에 시안 컨펌 가능하신지 문의드리고자 합니다. 네네, 라이브는 문제없고요. 네. 업무 마무리  중이실 텐데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제작해서 전달드리겠습니다.”


 늦어지는 부분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는데, 휴지 뭉텅이를 들고 상호의 눈을 벅벅 비빈다. 대리님이 진짜 내 눈알을 후비려고 그러나 으악! 하려다가, 눈물 그치라는 뜻인 걸 알고, 휴지를 받아 눈물을 훔쳤다. 인사치레까지 몇 마디하고 통화를 종료한 준수가 의자를 벌컥 밀어젖힌다.


“뭐해?”


 눈물 그치는 중인디요.


“일어나.”

“왜요?”

“족치게.”


 준수가 제 긴 다리를 자랑하듯 성큼성큼 걸어서 복도를 가로질러 파티션을 때려 부술 듯 쾅 내려쳤다. 다들 로켓 발사 준비 자세로 퇴근 외칠 준비를 하는 5시 59분에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단 뜻이다.


“기상호…, 님이 넘긴 시안 제작 건 관련해서 할 말이 있는데요.”

“월요일에 하시죠?”

“씨발 좆같은 시안 다섯시 오십분에 넘긴 새끼님께서 하실 말입니까? 오늘 라이브라고 기상호…, 님이 씨발. 오전까지 달라고 했다는데 왜 다섯시 오십분에 주십니까?”

“뭐 우리 팀은 한가합니까? 맨날 기획자만 바쁘다고 하시려고 여기 계세요?”


 준수의 등 뒤에서 불꽃이 이는 효과가 나오는 것 같다. 상호는 영상팀 영중과 준수의 대립에 오도 가도 못하고 삐질삐질 땀만 흘렸다.


“좆같은 시안 멀쩡히 뱉어내시죠?”

“월요일에 하겠습니다.”

“시안이 좆같아서 컨펌이 안 났는데, 그냥 가시겠다? 이거 대표님 보고해도 됩니까?”

“…, 광고주 피드백 받고 말씀하시죠?”


 영상팀 씹새끼들은 눈이 발에 달려서 색깔 구분도 못합니까?부터 시작한 성준수 표 언어적 폭력이 시작됐다. 광고주 CI 컬러는 왜 바꿉니까? 브랜드 아이덴티티 컬러도 몰라요? 미대 허벌로 다니셨나 봐? 개씨발 이딴 시안으로 뭔 TVC 제작까지 꿈꾼답니까? 이쯤 되면 이 팀이 왜 있는지조차 궁금하네요. 문서에 있는 내용도 제대로 숙지 못하고 개 좆같이 만들어 놓고서, 크리에이터라며 자부심 부리는 이유라도 들어봅시다.


 줄줄이 늘어놓는 말에 영상팀 얼굴이 썩어들어간다. 그러나 상호는 뒤에서 주먹을 쥐고 홀로 일대 다수를 상대하고 있는 준수를 응원했다. 지지 마, 성대리! 지지 마!


“아니 시발 백만 원짜리 영상에 뭔 공을 그렇게 들입니까.” 

“먼저 퇴….”

“누가 씨발, 지금 집에 가.”


 준수가 퇴근 인사를 부르려는 영상팀 PD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헐 씨발, 존나 멋있어. 기 존나 쎄. 저런 깡이 있어야 시말서를 네 번이나 쓰고도 회사를 다니는구나.


“야, 가.”

“가 봐. 다음 주에 그 자리 남아있나.”

“성 대리 말이 좀 심한데?”

“영상팀 결과물이 더 심한데?”


 한마디도 지지 않고 준수가 받아쳤다.


 우리 준수 대리님, 인성 개쓰레기라 어디다 쓰나 했는데,

 영상팀이랑 싸우는데 저급한 어휘를 다 쓴다….

 잘한다 개새끼! 이겨! 기획팀 책임 아니라고!


“예, 대표님. 저 준순데요. 영상팀이 개좆같이 시안 만들어서 오늘 라이브 예정인 1천만 원짜리 광고 라이브가 안 될 것 같거든요? 근데 지금 퇴근하시겠답니다. 이거 라이브 안 되고 광고주가 계약 해지 내용증명 보내도 괜찮은 거죠? 아, 단기건 아니고 장기 캠페인입니다. 이번 건만 1천이고, 다음 소재 5천 짜리요. 네. 다음 주 기획전 앞서 티징 개념으로 기획 세일하는 소재요.”


 얼굴도 가끔 보는 대표님께 다이렉트로 전활 걸다니. 준수는 조금도 밀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쵸? 하고 대답한 준수가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야, 전영준. 대표님이 전화 바꿔달라는데?”

“개새끼야.”

“대표님, 영준 PD가 저보고 개새끼라는데요?”


 허겁지겁 걸어온 영준이 전화를 뺏는다. 넵, 대표님. 넵, 넵.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네, 다 하고 가겠습니다. 저희 팀 다 남아서 시안 뽑고, 광고주 컨펌받고 가겠습니다. 넵넵.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기획팀에 협조하겠습니다. 넵, 죄송합니다.


 영준이 눈알로 사납게 욕을 하는데, 준수가 나긋한 웃음을 지으며 중지를 들어 올렸다. 준수의 기세에 힘을 얻은 상호가 옆에서 자신의 빛이 되어준 대리를 우러러보았다.


‘좆 밥 새 끼.’


 우리 혐성 대리가 또 승리를 거머쥐었다.


 영상팀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한큐에 통과된 소재를 세팅하고 라이브 된 것까지 확인하니 오후 아홉시. 기다리겠다는 친구 때문에 상호는 준수에게 구십 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하고 쏜살같이 튀었다. 저녁을 건너 뛰고 삼겹살에 소주를 때리며, 오늘 점심이 돼지국밥이었음을 또 상기해 표정이 썩었다.



“씨발 한식 말고 다른 게 먹고 싶어….”

“너 외국 살다 온 거 아니잖아.”

“니가 맨날 국밥만 먹어봐라. 양식이 얼마나 먹고싶은지 아나.”


 모르지? 어깨를 으쓱인 상대가 소주잔에 소주를 꼴꼴 따랐다. 근데 나 너 야근하는 거 첨 봄. 하는 말에 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내도 존내 첨 야근해 봤다. 준수 햄이 야근 대신해준다는데 죄송시러버서 그러십시오, 할 수 있어야지.


“준수 햄? 회사에 아는 사람 없다하지 않았어?”

“가서 알았다. 엄마…, 친구 아들.”


 그랬다. 성준수는 사실 상호 어머님의 친구 아들이었다. 어릴 땐 이모라고 불렀던 꼿꼿하고 아름다운 분의 아드님. 고등학교 동문이라며 부산과 수도권의 거리임에도 해에 한두 번은 꼬박 얼굴을 보고 지내던 엄마의 친구. 걸쭉한 본 투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는 엄마랑 수도권 상류사회 사모님 같던 준수의 어머니랑 도통 무슨 연인진 모르겠지만, 두 분의 교류에 어린 자녀들이 나가는 일도 종종 있었단 말이다. 첫날 퇴근 후 엄마랑 통화하면서 여기도 성씨가 있더라. 신기 하제.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성대리가, 그 성준수였다.


“뭐야, 엄친아? 설마…, 그 니 첫사랑?”

“첫사랑 아니라고!”


 기상호 인생 흑역사. 6살의 아기 상호는 저보다 연상인 성준수를 처음 봤을 때 그 고운 얼굴과 저랑 자동차로 놀아주는 다정함에 반해 엄마의 치마를 붙잡고 졸랐다.


‘나 준수 햄이랑 결혼할래!’


 여섯 살 주제에 얼마나 더 큰 대한민국을 꿈꿨는지. 밀빵 같이 보드라운 피부를 가진 준수의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준수랑 결혼하고 싶니 상호야? 간드러진 서울말에 상호가 엄마의 치마 뒤에 숨어 수줍은 웃음을 내비쳤다.


‘네, 이담에 돈도 이따만큼 벌어서 준수 햄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요….’

‘어머?’

‘준수 햄을 내한테 주이소….’


 수줍게 한 말에 두 어머님들이 웃음을 터트리든 말든, 상호는 꿈에 부풀었다. 그때 준수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사실 기억 안 난다. 이 대사마저도 상호가 성장하는 것에 서운함을 느낀 엄마가 놀리고자 매일 써먹던 레퍼토리라 외운 것이다. 준수랑 결혼한다고 하더니? 상호의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이미 다 아는 레퍼토리였다. 상호 첫사랑 누군지 아니?로 시작하는….


 지금 맞은편에 있는 녀석은 상호가 대학 시절 기숙사를 함께 쓰던 동기로 엄마가 상경해서 한 번 해준 레퍼토리를 근 몇 년째 우려먹는 것이다. 사악한 새끼. 성준수 못지않은 새끼.


“그래서 요새 연애하고 싶다고 노래 안 부른거야? 응? 첫사랑 만나서?”

“건 아니고, 쪼까 바빠가지고….”

“야. 맨날 칼퇴한다며.”


 그지. 성준수의 가호로 매일 칼퇴를 하고 있었다. 첫사랑이라고 운운하는 것도 우습다 생각하는 게, 엄마가 말해주기 전까지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기도 했지만, 그 혐성이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는 혐성인가 싶기도 해서 상호는 찝찝한 얼굴로 핑계를 댔다. 안 그래도 녀석을 만나며 연애 사업을 해볼까 얘기를 꺼낼까 싶긴 했는데, 갑자기 준수로 화제가 튀어 말하기도 뭣해졌다.


“진짜 바빴다. 글고 내가 언제 연애 시켜달라 했는데. 내 누누히 말하지만 나는 사람한테 관심 없다. 근데 광고 회사는 원래 이래 돌아가는 기가.”

“바쁜 거 알면서 들어간 거 아냐?”

“무슨 소리야. 돈 때문에 들어간 거지.”


 이미 입사 첫 달에 끝나버린 꿈을 회상하며 상호가 씁쓰레한 소주를 넘겼다.


 난 존나 예전에 망했어. 돈 때문에 하는 거지.

 그러니까 씨발, 광고나 넣어 광고주들아.


 1차에서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페브리즈를 뿌려 냄새를 지운 상호와 동기가 걸음을 옮기다 예전부터 종종 가곤 했던 바를 찾았다. 앞선 노포집 감성과는 다르게 세련된 인테리어로 장식된 바에 자리하자, 허리가 곧게 펴진다. 알딸딸한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그대로 즐기며 상호가 느른한 웃음을 지었다. 배부르고, 등 따시고, 눈치 주는 사람 없고. 이게 인생이지.


“넌 요새 만나는 사람 없어?”

“뭐, 그냥 그냥.”


 맞은편에서 휴대폰을 만지던 녀석이 생긋 웃는다. 지중해의 바다색을 닮은 술을 마신 상호가 상대의 웃음을 그대로 따라 하며 입을 열었다.


“똥꼬 헐어 새끼야.”

“응, 니 후장 관리나 잘 하세요.”


 타격감이 전혀 없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만지다가, 고개를 돌려 바를 훑는다. 그 시선을 따라 상호도 천천히 눈으로 공간을 훑었다. 여자만 앉은 테이블에 껄떡거리는 남자, 각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한 커플. 모임처럼 보이는 사람들. 즐거운 웃음과 소란스러움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것에 취기가 훅 올라온다. 피부로 확 와닿는 주말에 즐거운 미소가 입에 걸렸다.


“여기도 이제 머글들의 성지가 되어가는구나.”

“헤테로겠지.”

“시바, 그게 그거지. 어차피 나 같은 새끼는 공감도 못한다고.”


 상호의 동기는 몇 해전 커밍아웃을 한 녀석이다. 조별 과제로 느낀 인0간 관계의 피로함과 회의감에 현실 연애와 담을 쌓고 온갖 애니메이션을 섭렵하던 상호의 세상에 발을 디딘 녀석은, 나 게이야. 근데 너 같은 오타쿠한텐 관심 없음. 이라고 깔끔하게 선을 긋고 이래저래 상호를 끌고 다녔다. 이곳도 동기의 아지트 같은 장소로 LGBT가 모인다는 곳이었는데, 몰리는 일반인 손님들을 무시할 순 없었나 보다.


“근데 입구에서 일일이 물어볼 순 없잖아? 님 게이임? 하는 것도 웃기겠다.”

“뭐 그렇지. 그래도 한층 내려가면 아직 그렇게 관리되긴 해.”

“…….”


 묘하게 눈치를 주는데, 항상 둔하던 눈치가 이럴 땐 제대로 발휘된다. 그러니까, 이 새끼가 지금 나한테 내려가자고 하는 건가?


“상호야.”

“내 집에 갈래.”

“너 내 친구잖아….”


 애절한 목소리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니 친구 오늘부로 뒤졌음. 하려는데 녀석이 힘차게 손을 들었다. 자리 옮기고 싶은데요! 마침 지상층이 만석이라 일반인 손님을 받기 난해했던 서버가 싹싹 하게 달려와서 지하로 내려가고 싶다는 동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묘한 시선을 주고받는다. 뭘 쳐 주고받고 있어, 좆같게.


“내 호모 아니다.”

“안다. 26년째 순결을 간직하고 미도리쨩에게 순애를 보내는 거 다 안다고, 오타쿠 새끼야.”

“원래 밑에 까진 안 갔잖아!”

“그전에는 지상층까지 다 나랑 같은 새끼들이었으니까!”


 칙칙한 사내 새끼들을 치울 생각에 신이 난 것인지 상호가 몇 모금 마시지도 않은 블루 사파이어와 앞에 있는 호모 새끼의 피치 크러시를 들고 사라져버린 서버가 지하에서 자리를 잡고 방긋 웃었다. 잔에 물기를 닦으며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자, 새로 등장한 얼굴을 향해 여러 시선이 쏟아졌다. 호기심 섞인 탐색하는 시선에 등골이 쭈뼛 선다.


“니 내 이럴라고 만나자 했나.”


 뭔 신파에서도 안 쓸 대사를 친우에게 읊조리자, 그가 앙큼을 떨며 무얼? 하고 묻는다. 무얼은 씨발, 동백꽃 필 무렵 이후로 처음 듣는다.


“리뉴얼 되곤 처음 와 봤단 말야. 너도 여기서 첫사랑은 잊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보는 건 어때?”

“내가 다시 말하지만, 현실 인간은 냄새나고 혐오스럽고….”

“네네, 다음 중2병.”

“씨발.”


 흑석동 흑염룡 어디 안가네. 친구의 말에 가운뎃 손가락을 들어 올리다가, 여전히 쏟아지는 시선에 상호가 눈을 굴렸다. 탐색하는 시선들 속에 섞인 호의들이 샐그러니 웃음을 짓는다. 뭘 저런 간지러운 웃음을 짓고 쌌노. 똑같은 거 달린 새끼들이. 일방적으로 오는 호감에 두려움을 느낀 상호가 달달달 다리를 떨었다. 맞은편에 있는 놈이 하나만 낚으면, 일어난다. 제발, 제발!


“둘이 오셨어요?”


 씨발 내가 대학교 때 선배들이 시켜서 벌주 받으러 가서도 안 할 대사를. 느끼한 대사에 속에서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으려 허겁지겁 빨대를 물었다. 좀 전까지 오르던 술이 확 깨는 기분이다. 동기는 상대방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다.


“둘이 왔지만, 혼자가 될 수도 있고? 또 새로운 둘이 될 수도 있고?”


 쌍팔년도에도 안 칠 대사를 치는 걸 보며 상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년간 동고동락했던 후줄근한 모습이 먼저 기억나는 동기의 후훗, 하는 웃음 따윈 조금도 듣고 싶지 않았다.


“화, 화장실 좀.”

“응. 다녀와.”


 성준수가 갈굴 때마다 종종 했던 호주머니 속에서 빠큐하기 스킬을 쓰며, 상호가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저런 낯간지러운 온도는 저와 조금도 맞지 않았다. 여기도 호모, 저기도 호모. 호모가 가득한 세상에서 얼른 탈출하고 싶다. 내일 아침에 조조로 끊어놓은 마X카 쨩의 특전도 받아야 하고, 막차가 끊기기 전에 얼른 가야겠다. 화장실 대신 내려왔던 계단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여전히도 닿아오는 여러 쌍의 눈이 간지럽게 상호의 전신을 훑는다. 으악! 기상호 살려!


“기상호.”

“나 집에….”


 손목을 잡아오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집에 가겠다고 친구에게 말하려 입을 열었는데 저가 술에 취해서 그런가. 흔히 말하는 끼떠는 목소리의 친구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게 들렸다.


“기상호.”


 …, 성준수 대리님이 여기 왜 계세요?




 주말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금요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영화관에 가서 겨우 특전만 받고 돌아오고 나서도 잠이 오질 않았다. 기절하듯 자고 또 일요일 밤을 새우니 월요일이 다가왔다. 당일 연차는 반려에요^^ 존나 친절하게 웃는 진 대리님한테 욕도 못 하고, 상호는 지옥 같은 회사 건물에 당도했다. 어플을 통해 미리 주문한 커피는 정신이 나가 뜨.아를 시켜버렸다.


 국제 얼죽아 협회에서 우수회원이었던 상호를 탈퇴시키겠다고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손에 뜨거운 커피를 들고, 건물 밖을 배회하며 8시 58분이 되자마자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9시에 출근을 찍었다.


“기상호.”

“네? 대리님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넌 별로 안 좋은 아침 같은데.”


 비꼬는 건 평소의 성준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호가 주말에 너무 재밌는 애니메이션을 봤다며 또 씹덕식 대화 넘기기를 시도했다. 보통 영화를 봤다고 하면 자연스러운 스몰 토크의 시발점이 되기 마련이지만, 애니메이션을 봤다고 하면 다들 그뭔씹의 표정으로 대화를 단절하기 때문이다. 마우스를 몇 번 딸깍이던 준수가 아예 상호를 향해 의자를 돌렸다.


“옥상.”


 그는 존나 용건만 간단히의 화신처럼 말했다. 오전 리포트가 있다고 토를 달고 싶었다.


 그렇지만,

 씨발. 넵.

 기상호는 권한이라곤 1도 없는 아기 사원이었따. ( ᴗ_ᴗ̩̩ )



 주말 이후의 업무 파악이 한창을 오전 아홉시에 옥상에 올라오는 건 모닝빵을 때리지 못한 골초뿐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휑한 비 흡연구역에서 상호는 준수와 조우했다. 보통 면담할 땐 캔 음료라도 사주는데, 준수는 아무것도 안 사준다. 슬랙스 주머니에 손을 꼽고 있는 거만하고 예리하지만 잘생긴 인상의 준수를 바라보며 상호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금요일에….”

“햄, 저는 햄이 호모라고 소문낼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이 미친 새끼가.”


 금요일이라는 화제가 튀어나오자마자, 상호가 먼저 매를 맞기 위해 말을 내뱉었다. 준수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며, 저는 성 대리님의 오지고 지리는 업무 능력을 흠모하고 있으며, 비록 방금 우발적으로 햄이라고 하긴 했지만, 맹세컨대 준수 햄을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라고 회사에 발고하지 않을 것이며, 준수 햄의 은밀한 성적 취향도 모르쇠 하겠다 뭐 이런 말들을 마구잡이로 지껄였다.


“야. 기템플, 미쳤냐?”

“아뇨! 맨정신인데요!”


 하, 하고 준수가 웃었다. 아 날카로운 웃음. 킹리적 갓심으로 개 잘생기긴 함. 생뚱맞은 생각을 하며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준수를 올려보는데, 준수가 시그니처 같은 쉼표 앞머리의 한쪽을 훑는다.


“상호님, 저도 상호님 성적 취향에 조또 관심 없거든요? 영준 PD가 갈구면 얘기하라고 하려고 불렀는데 뭔 개소리를 하시는지?” 


 상호의 입술이 벌어졌다 닫혔다. 그러니까 에바를 싸서, 지금 또 준수의 눈밖에 낫다는 뜻인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씨이발, 내가 이런 애새끼랑 뭔 거국적인 얘길 한다고.... 준수는 현타가 온 듯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젖혀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보통 그런 얘긴 당연히 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암묵적인 동의하에 지켜져야 할 비밀인 것이다.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상호를 준수가 내려다보았다. 역광이 비치는 얼굴 눈만이 상호를 뚫을 것처럼 쳐다본다.


“또 햄이라고 하면 뒤진다.”


 존나 굴종 그 자체, 한때 흑석동 흑염룡으로 불렸던 상호는 넵. 하고 착하게 대답했다.




02.


 오늘따라 소주가 달아요. 히히 웃는 꼴을 보며, 뭘 쳐 쪼개고 있어…, 등신 같은 게. 생각을 하던 준수가 잔을 꺾었다. 쓰다. 오늘은 술이 잘 받는 날이었다. 술이 달면 안 받는 날이니 조심하는 게 좋고, 술이 쓰면 술이 평소보단 잘 받는 날이니 주량까진 마셔도 좋다는 신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건 술의 맛 정도가 아닐까?


 제안서를 모처럼 잘 마무리 지어 팀장 주최로 연 회식이었다. 이미 저들끼리 돈독해진 신입사원들끼리 자리에 앉아있는 걸 보다가, 준수가 잔을 채우려는데 빠르게 다가온 손이 소주 병을 앗아든다.


“자작하면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재수가 없다잖아요!”


 빠르게 다가온 상호가 사수를 챙긴답시고 소주 병을 기울인다. Chu! 카와이쿠테 고메응…, 같은 말 같지도 않은 십덕 아이디어 기획안을 또 낸 골 때리는 새끼를 노려보다가 채운 잔을 비웠다. 잔을 비웠으니 꺼지라는 뜻을 담아 노려보자, 상호가 헤헤 웃고는 희찬과 다은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어휴, 씨발. 그래도 이 정도 눈치라도 생기다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번 신입들은 잘 버텨서 다행이야.”


 준수가 평소 성격대로 공태성한테 들이 받듯, 신입들을 들이 받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광고 회사 특유의 사람이 갈려나가는 구조 때문이다. 잉잉,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하고 3개월도 아닌 일주일 만에 신규 채용한 인원들이 갈려나간 탓에, 성준수 제발 성질 좀 죽여! 라고 현성이 부탁했다. 그래서 엿 같은 실수를 해도 여러 번 넘어가고, 10번 화낼 걸 2번만 화냈다.


 아예 띨빡은 아닌지 상호의 허술한 리포트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준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버텨야 한다. 이 성질머리를 받아줄 직장은 몇 군데 없다…, 인생은 존버다. 존나게 버텨야 한다. 근데 씨발, 저 새끼가.


“기상호 왜 뽑은 겁니까?”


 솔직히 뽑을 이유보다 안 뽑을 이유가 더 많아서 신입들이 왁자한 틈을 타 현성에게 은밀하게 묻자, 현성이 따분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펼쳤다.


1. 희찬이 정규 채용되면서 인재 추천으로 추천했다.

2. 포트폴리오로 낸 기획안이 독특했고, 분석 근거는 생각보다 똑똑하게 잘 뽑더라.

3. 저래 보여도 현실감은 있는지 실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명확했다. 근데 그건 지만 가능할 지도.

4. 원래 저런 애들이 멘탈이 존나 쎄다.

5. 당장 사람 안 뽑으면 퇴사하겠다고 악다구니 질러 놓고서 왜 뽑았냐니 뭔 개소리냐.


 현성이 다섯 손가락을 모두 접어 보임에 준수도 납득했다. 실제로 재유와 태성, 저가 야근에 지쳐 사람 안 뽑으면 퇴사하겠다고 난리를 치긴 했다. 가르치고 고쳐 쓰는데 시간이 더 들 줄은 몰랐지만, 점점 가르침의 시간도 단축되긴 했다. 물론 십덕스러운 아이디어를 갖고 올 때마다 목 조르고 싶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귀엽잖아.”

“네?”


 기상호가요? 하려다가 신입들의 젊음이 귀엽다는 뜻인 줄 알고 표정을 썩혔다. 쟈들이랑 저희도 얼마 차이 안 나는데요, 팀장님. 태성의 물음에 너네는 너무 오래 겪어 징그럽다는 말만 들었다. 희찬과 어깨동무를 하고 꺄꺄 거리는 꼴을 보면 그래도 제법 어린 티가 난다. 웃는 상호의 얼굴을 따라 실룩이는 눈물점을 보다가, 준수가 다시 잔을 기울였다.


 귀엽긴, 개뿔.


“야, 알아서 챙겨.”


 흥이 오른 현성이 노래방까지 가는 건 좋았다. 신입 사원들이 앞서 자기들이 재롱을 떨어보겠다며 노래를 부르는 것도 뭐,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술이 올랐고, 여긴 시커먼 남자들뿐이라 갑자기 남자 노래방 18번인 발라드가 줄줄이 선곡으로 이어짐에 따라 선곡의 자유가 밀린 신입들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면서 좋음이 증발한 자리에 좆같음 만이 남았다.


 각각 사수가 부사수를 챙기라며, 떡이 된 희찬과 상대적으로 멀쩡한 다은을 사수들이 데려갔다. 노래방 소파와 물아일체 된 것을 노려보던 준수가 한숨을 쉬었다. 그대 기억이, 지난 사랑이…. 철 지난 밴드의 노래를 웅얼거리는 입을 쭉 찢어놓을까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녀석을 업었다. 아, 진짜 개샹 고문관 기상호.


“너 진짜 뒤진다.”

“히히! 상호 죽는대요!”


 아오 씨발! 술에 취해 힘 빠진 몸은 지독하게 무겁고, 제안 PT를 끌려가느라 입은 정장은 온몸을 불편하게 죄어왔다. 집을 말해보라고 하면 모른다고 하고, 휴대폰 잠금을 풀어서 택시 하차지라도 보려고 했는데, 전원이 나갔다. 술과 별개로 운세가 망조였다. 겨우 술 취한 놈을 택시에 실어 제가 자취하는 집까지 끌고는 왔는데,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물을 찾는다. 애물단지 새끼. 진짜 쌍욕을 하려다가, 어릴 적 준수를 꽤 귀여워해 주셨던 상호의 모친을 생각하고 분노를 참았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고 했다.

 현성이 신입들 도망가는 꼴 더 이상 보기 싫다며 잘해주라고도 했다.


“한 잔 더 합시다!”


 …, 씨발 한 대만 치면 안되나.



 진지하게 한 대만 치고 싶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대만. 어차피 기억 못 할 거 아냐.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놨던 기상호의 멱살을 쥐고 주먹을 들어 올린 건 살인을 참았으니, 폭행 정도는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에서 온 것이었다. 번지르르한 낯에 죽빵을 꽂을 생각을 하니 아직 때리지도 않았는데 희열이 차올랐다. 멱살을 쥔 채 주먹을 높이 들어 올리는데, 술에 취해 감겨있던 상호의 눈꺼풀이 느리게 열린다. 때리려던 주먹에 힘이 느슨하게 빠졌다.


“어?”


 다갈색의 흐린 눈이 농도만큼이나 달콤한 웃음을 짓는다.


“예쁘다.”


 준수의 볼을 감싸 쥔 상호가 술에 전 제 입술을 부볐다. 말랑하게 젖은 살이 윗입술을 한 번, 아랫입술을 한 번 덮듯이 핥고 푸우, 숨결을 불어 넣는다. 이 씨발 술 냄새. 확 퍼진 알코올 향에 전의를 잃고 멍한 시선을 그대로 상호에게 쏟아붓는데, 녀석이 다시 잠들었다.


 아, 진짜 이 개새끼가.


 지도 잘못한 걸 아는지, 기상호가 부리나케 도주했다. 이 새끼를 어떻게 조질까 생각하다가 그렇게 술이 떡이 됐으면 뭣도 기억 안 나겠다 싶어 준수가 차분히 주말을 보냈다. 대신 월요일에 묵사발을 만들어버려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맑은 기분으로 출근했는데, 책상 위에 커피가 놓여있다. 누가 둔 것인지 너무나도 뻔한 커피를 보면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리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대리님 ㅠㅠㅠ 읽기만 하지 마시고, 읽으셨음 점이라도요 ㅠㅠㅠㅠㅠㅠ]

- .

[대리님 죄송해요ㅠㅠㅠㅠ제가 밥살게요 ㅠㅠㅠㅠㅠㅠ]

- .

[택시비도 얼마 나왔는지 알려주세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ㄲㅈ

[아아앙 대리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옆에서 끄흡…, 타닥…, 타닥…. 하는 소리가 신경 쓰여 무시할까 하다가 준수가 한 번 더 키보드를 두드렸다.


- ㄷㅊ

[넵 ㅠ^ㅠ]


 옆자리에서 우중충한 오오라를 흩뿌리며 아침부터 무얼 생각하는지 리포트엔 구멍을 숭숭 내질 않나, 별 헛짓거리를 다 하고 있다. 점심시간 기상호를 패줄 생각을 하며 스트레스를 달랜 준수가 커피를 쪽 마셨다. 하아, 끄흡…. 별 이상한 소리를 내는 루틴을 반복하길래 한 번 더 닥치라고 치자, ㅠxㅠ(상호 닥치는 중) 이런 말을 보낸다. 되도 않는 1인칭이 어이없어 준수가 허. 하고 웃었다.


 기상호, 일어나. 밥 먹으러 가자. 

 대리님, 설마 또…. 돼지국밥은 아니죠?


 부산에서 올라온 새끼 혹여라도 향수병 걸려 다시 고향으로 튈까 봐 부산은 돼지국밥이 유명하니까. 하면서 국밥만 먹였더니, 이제는 질겁을 한다. 수도권에 내도록 산 준수는 지방 사람의 마음을 조금도 공감하지 못해 눈꺼풀만 천천히 내리감았다 떴다. 그럼 뭐 먹고 싶은데. 파스타, 파스타 먹어요! 다급하게 외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가 밥 산다는데, 뭐 먹고 싶은 거 먹게 둬야지.


“이 새끼가 밥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내나….”

“죄삼다.”


 상호 입사 이래, 준수는 점심시간을 편하게 쓴 적이 없었다. 점심시간은 업무 외 시간인가, 업무의 연장선인가. 현성이 연신 아덜 튀지 않게 잘 좀 해도! 한 까닭에 챙김이 이어졌을 뿐이다. 재유는 다은의 풋살 동호회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귀에 피가 날 지경이라던데, 상호는 의외로 조용히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지 눈칫밥을 먹는지 모를 지경으로 준수의 눈치를 보긴 했지만.


 뭐, 내가 지 잡아먹어?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파스타를 앞에 두고 죽상이기에 한마디 했는데, 울상이 된다.


“대리님, 지가 지금은 못하겠고, 이따 할 말이 있는데요….”

“뭐.”


 퇴근하고 시간 쪼매 내주심 안 돼요? 사투리인지 표준어인지 모를 것이 툭 튀어나오는데,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아마 일전에 준수가 일방적으로 마무리 지었던 이야기와 금요일에 술에 만취해 저에게 신세를 지었던 것에 대한 사과가 하고 싶은 거겠지.


 솔직한 말로 일전에 거기서 만난 건 존나 의외였지만, 그걸로 성준수가 사내에 호모라고 소문나도 상관없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성적 취향을 두고 발언을 했다가 직장 내 성희롱으로 잡혀가기 좋고, 현성은 부하직원의 성적 취향은커녕 부하직원에게 1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업무 능력 파악해서 졸라게 부려먹어 직원의 파이를 늘려주기. 부하 직원 육성에 꿈은 있지만, 그들의 사생활은 일절 터치 안 하는 아주 우수한 상사였단 말이다. 그 밑에 있으니, 이 지랄 같은 성격도 넘어가는 거다.


 물론 성준수한테 누가 님 호모세요? 하고 대놓고 묻겠냐는 제 성질머리에서 오는 자부심도 있었다. 역지사지. 지랄을 하면 지랄로 맞받아친다. 지랄을 안 해도 지랄로 맞받아친다. 성준수의 모토를 아는 사람들이 성준수를 괴롭힐 수나 있겠는가. 거기에 눈앞에 기상호는 같은 공간에서 마주친 상황 아닌가. 지도 호모로 몰리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사회 초년생이 그런 이야기를 아무한테나 경솔하게 하긴 해도, 기상호는 안 그럴거란 믿음이 있었다. 어딘가 돌아있지만, 이상하게 소심한 탓과 누가 묻지 않으면 타인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지 않은 품성이 그랬다.


 상호의 예고에 포크로 면을 돌돌 쥐면서 머릿속으로 오후 업무를 생각했다. 얼추 여섯시에 퇴근이 가능할 것 같은 스케줄을 짜고 여전히 깨작거리는 상호가 금요일의 일로 무슨 발언을 할지 구성을 시작했다. 도둑 키스한 건 홀랑 까먹은 것 같아 보였으니, 지가 존나 민폐 끼친 걸 무릎 꿇고 사과하려는 거겠지. 할복이라도 할 것 같은 태도로 할 것인가,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는 해괴한 다짐을 할 것인가. 정도의 생각을 했다.


 근데, 저렇게 깨작거릴 거면 돼지국밥이나 먹지 왜 파스타야.


“대리님, 시간 괜찮으신가요….”


 비굴한 말에 인상이 팍 찌푸려지다가, 가방을 챙겨서 일어나있는 상호의 뒷덜미를 콱 죄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 둘이 같이 퇴근? 현성이 감탄을 한다. 남을 조금도 챙기지 않을 것 같은 준수가 제 부사수를 착실히 챙기는 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웬수 하나 챙기는 게 뭐 대수라고. 목례만 짧게 까딱였다.


“어디서 얘기하고 싶은데.”

“음, 음…. 조용한 곳?”


 그래서 다시 옥상에 올랐다. 건물 옥상은 여섯시 반에 폐쇄하기 때문에 여섯시쯤 되면 사람들이 1층에 있는 흡연구역으로 자연스레 자리를 옮겨 인적이 드물었다. 어차피 사무실에 있는 이들도 옥상은 잘 찾질 않으니 이 공간만큼 가장 적합한 공간은 없다 싶어, 저번의 데자뷰를 느끼며 준수가 벤치에 앉았다.


“이제 씨부려 봐.”


 조가비처럼 다물었던 입이 벌어지고, 다시 고민을 반복하듯 흐아, 허. 하는 이상한 소리가 상호의 입술 사이로 새어져 나왔다.


“햄 있잖아요, 금요일에 제가 실수한 거요….”


 벤치에 앉은 준수 앞에 마주 서고자, 서있던 상호가 우물쭈물 말을 내뱉었다. 군대에서 배웠는지 칼각으로 잡은 바짓단을 구겨질 정도로 짓누르면서 금요일을 이야기한다. 존나 힘들었지. 솔직히 일주일 치 점심을 스테이크로만 산다 해도, 기상호는 그 대가를 기꺼이 지불해야 함이 맞았다.


 187의 장신인 기상호를 등에 업고 누구도 들이지 않는 집에 엄마 친구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업어 데려가 재운 것만 해도 성준수는 존나 성자였다. 지금도 햄이라고 하지 말라 했지만, 까마귀 고기를 먹은 기상호가 햄이라고 하는 걸 봐주고 있지 않은가.


“뭐, 뒤지고 싶다고?”

“아니, 아니. 말 좀 들어보이소.”


 들어주려는데 말을 질질 끄는 기상호가 답답해서 말허리를 잘랐더니, 윗니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상호가, 이번엔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쥔다. 한 대 맞아주려고? 그제야 구미가 당긴 준수가 벤치에 기대고 있던 등을 앞으로 숙여 주먹을 쥐고 씨익 웃었다.


“제가, 제가 햄을 책임질게요!!”


 주먹을 꾹 쥐고 소리친 상호가 가방에서 허겁지겁 통장을 열어 준수의 손에 쥐여준다. 준수는 잠시 뇌가 굳었다. 이게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또?


“니가 왜 날 책임져.”

“제가 햄한테 키스했잖아요.”


 그게 키슨가? 소주 냄새에 절어서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한 번씩 답삭 문 게 키스였나? 전투력 만만이던 성준수를 무장해제 시킨 건 맞지만…, 그걸 키스라고 할 수 있나? 일방적 추행이면 모를까? 준수의 표정이 기묘해지자 저를 탐색하듯 바라보던 상호가 움찔 몸을 떤다.


 그러고 보니 유년 시절 준수랑 결혼하고 싶다고 조르던 기상호가 생각이 났다. 그때도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모친이 한참 어린 녀석의 말을 귀여워하기에 그냥 별말 않고 넘어갔는데, 이젠 저 녀석도 머리털 새카만 성인이지 않은가.


“너 잊어버린 거 아니었냐?”

“주사는 부려도, 필름은 안 끊겨가….”


 사회 초년생 통장이 뭐 볼 게 있다고 이것까지 쥐여주면서 연애도 아니고, ‘책임’을 운운한단 말인가. 얘는 좀 생각이 별나라에 가있다. 고작 입술 한 번 겹쳤다고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 진다니. 준수가 손으로 하관을 감싸며 심각하게 눈썹을 모았다.


“야.”

“넵.”

“너 그거…, 첫 키스야?”


 이십 대 중반이 되도록 이성의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지 상호가 발을 반보 뒷걸음질 치며 제 입술을 가렸다. 책임을 지라더니 되레 저보고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에 준수가 또 하, 하고 비소를 지었다. 위로 솟은 눈꼬리를 따라 느리게 감았다 뜨이는 눈을 보다가 그 옆에 콕 박힌 눈물점을 응시했다. 당황에 서린 표정을 보다가, 몸을 기울이고 손을 뻗어 상호의 손목을 쥐었다.


“애인도 안 만들어봤어?”

“네, 네. 저 에이 섹슈얼이요.”


 어떤 미친 에이 섹슈얼이, 멀쩡한 성적 지향성을 가진 게이한테 키스하냐. 등신.


“눈 감아.”


 순종적으로 감기는 눈꺼풀을 보며 희열이 차올랐다. 손목을 쥔 채 잡아당기자 딸려오기에, 목덜미를 잡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제 말 잘 듣는, 얼굴 반반한 자칭 에이 섹슈얼의 강아지를 어떻게 살라 먹을까. 그 생각에 입안에 침이 고였다.




03.


 상호는 저 스스로를 ‘에이 섹슈얼’이라고 평가했다. 왜냐면 사람에게 큰 호감이 생기지 않았던 탓이다. 성적 지향성을 따지자면 그래도 성별 다른 쪽이 좋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여캐들을 최애 삼아 가벼운 덕질을 했던 것도 그 이유였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무난하게 OTT에서 서비스하던 애니메이션을 심도 있게 보게 된 건, 대학에서 들어간 동아리의 탓이 컸다.


“너, 내 동료가 되어라!”


 동아리 홍보 전단을 보다가 그냥 아는 애니메이션의 표지를 그려놓은 만화 동아리의 그림을 보고 ‘오.’한 게 전부였는데, 대답이 썩 재밌었다. 가벼운 흥미 본위로 발을 디밀었다가 늪처럼 빠졌다. 쿄애니가 무엇인지, 망가 그거 낯 뜨거운 단어 아닌가? 했던 머글적인 사고관이 망가란 만화의 일본어적 표현이다! 전혀 그런 외설스러운 단어가 아니야! 로 발전하는 급발진 과몰입 오타쿠가 되어버린 것도 순식간이었다.


 2D의 세계로 떠나버리니 3D에서 오는 관계가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멀쩡한 낯에 옷도 제법 멀쩡하게 입는 주제에 이성과의 교제를 하지 않게 되면서, 상호는 스스로를 고찰했다. 아. 나 에이 섹슈얼이구나? 동아리에 있던 후죠시가 보여준 BL 상업지를 봐도 그냥 ‘오. 더 큰 대한민국.’ 하며 취존의 영역으로 남겨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장르 덕질을 오래 하다 보면 성의 경계는 흐려지기 마련이다. 여캐와 여캐가 스킨십을 하는 건 무수히 많으며, 소년만화를 표방한 순정만화가 범람했다. 동아리원들과 각자의 해석에 대해 말할 때도 후죠시는 아무렇지 않게 제 후죠시스러움을 논했으며, 십덕 새끼들은 아무렇지 않게 백합의 아름다움을 전파했으니, 자연스럽게 세뇌된 탓이 컸다.


 현실 연애를 하지 않아도 즐길 거리는 차고 넘쳤다. 예를 들면, 애니메이션이라던가 만화책이라던가 라노벨이라던가. 매 분기 별로 신작 애니메가 쏟아져나오는 상황에서 굳이 연애까지?라는 생각을 한 상호는 이십 대 초반을 지나 중반이 되었고, 이성에게 설레지 않는 자신을 고찰하며 스스로가 에이 섹슈얼임을 의심치 않았다.


‘예쁘다.’


“으악, 씨발!”


 스스로의 행적을 회상하다가 이불을 발로 깠다. 그러니까, 씨발 이건 하나의 사고다. 애니메이션 최애를 보듯 준수를 봤단 말이다. 솔직한 말로 술에 절어있긴 했지만 그 상황에 제법 꼴렸다. 어릴 때 예쁘게 자란 애들은 커서 못생겨진다던데, 성준수는 그런 굴욕을 겪지 않고 너무나도 완벽한 2차 성징을 이뤘다. 외려 더 잘생겨졌으면 잘생겨졌지, 못나지진 않았단 뜻이다.


 저게 혓바닥인지 칼날인지 미친인지.... 섬세하고 고운 이목구비와 말간 피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걸걸한 입을 갖고 있어도, 얼굴이 개연성이고 서사였다. 상호는 츤데레나 시발데레 계열의 캐릭터들을 오래 사랑한 역사에 기반하여 성준수를 현실에 걸어 다니는 3D 최애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 지랄맞은 성격과 갈굼도 의연하게 버틸 수 있었다.


 헤헤, 최애가 말을 한다. 지극히 오덕적인 상황에서 그가 저를 가끔 ‘기 탬플’이라고 불러도, 내 최애가 나를 애칭으로 불러주었어! 하는 무슨 아이돌 파는 오타쿠적인 마인드로 회사를 존나게 버텼단 말이다. 그럼에도 현실과 가상세계를 구분하듯, 하늘 같은 대리님을 성애한 적은 없었다. 그냥…, 얼굴 졸라 예쁜 시발데레 최애 쯤으로 생각했단 뜻이다.


 귀신같은 알X스가 부른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 모두…♪' 이딴 가사가 깔려야 할 것처럼 게이들이 서로의 호감을 드러내는 바에서 만났을 땐 그의 성적 지향성을 취존해줄 마음도 만만했다. 그야 상호는 무성애자고, 준수는 그냥 3D 최애일 뿐이었으니까.


 근데…, 술이 웬수였다.


“븅딱아 왜 거기서 입술을 부비냐고….”


 여러 애니를 섭렵하면서도 하지 않았던 성애적 표현을-이상한 면에서 현실적인 상호는 저가 2D가 아님을 알아서, 종이 최애와 드림을 꿈꿔본 적이 없다.- 했다. 잦은 야근으로 거친 피부 결을 감싸고 술에 취해 냄새가 진동했을 입술을 현실 최애에게 부빈 것이다. 이건 진짜 시말서 4장 쓴 대리님이 여태 저질렀던 잘못에 비해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눈뜨자마자 낯선 천장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날의 행적을 보고 성준수가 일어나기도 전에 줄행랑쳤다.


 아니 햄은 어케 입술도 말랑말랑하지? 최초로 벌인 접문은 기상호 주니어를 발딱 서게 했다. 근데 너무 죄스러워 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늘 같은 대리님을 상대로 수음을 한단 말인가. 키스도 감지덕지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걸 떠나서 준수에게 죽었다.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튀었다는 점에서 준수는 참수형을 시킬지도 몰랐다. 오들오들 떨며 당도한 월요일 밥을 사겠노라 한 건 정말 살고 싶은 의도였다.


 인간의 생존본능이란…. 그래도 양심은 있었고, 거듭 반성을 한끝에 준수의 입술을 뺏어간 책임은 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이도 결혼을 할 수 있는지 동성혼을 몇 번 검색해 봤으나, 아직 대한민국은 열린 나라가 아니어서, 동거를 하는 커플들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었다. 덕질 외에 것으론 입사 이후 조신히 통장에 적립했던 급여 통장을 준수에게 쥐여준 건 그런 이유였다.


 망쳐버린 최애의 기분을 포함한 인생을 책임지자! 뭐 이런 결론이 앞뒤를 절사하고 나와버린 것이다. 결혼까지 하자는 뜻은 아니고, 그냥 당신의 사치 생활을 책임지겠다. 정도의 뜻이었다. 현실 세계에선 흔히 합의금이라고 하고, 덕질적인 측면에선 ‘조공’하겠다는 뜻이었는데.


 그 고고한 준수 햄이 저에게 키스를 했다.


 맨정신에 겹쳐진 입술이, 벌어진 틈으로 잠시간 입안을 훑고 가는 혀가 너무나도 감미로웠다.


 이런 씨발, 나 에이 섹슈얼 아닌가 봐.


 통장 작전은 개박살이 났다. 작고 귀여운 월급으로 무얼 먹여 살리냐며 한숨을 내쉬던 준수가 저녁으로 돼지국밥을 사줬다. 돼지국밥. 햄은 나를 아무래도 살찌워서 잡아먹으려는 걸까? 불안해서 울망한 눈으로 물어보자, 준수가 희번뜩한 눈을 부릅뜨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잡아먹을 건데.”


 근사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상호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 식인은 범죄예요…. 저도 인육계는 취향에 안 맞아서 햄을 존중해 드릴 수가 없어요…. 더듬더듬 말했다가 마빡만 터졌다.


“이 새끼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르쳐야 하나. 씨이발.”


 이마를 짚고 머리가 아프다는 시늉을 보며, 제 업무적인 능력에 대해 돌아본 상호가 준수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제가,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뭘 열심히 해. 그냥 대리님이 가르쳐 주시는 건 뭐든. 호칭은 햄이 되었다가, 대리님이 되었다가 상호의 머릿속만큼 정신없이 이루어졌다. 이마를 짚고 있던 준수가 상호를 힐끔 보면서 입술을 끌어올렸다. 준수는 입술을 끌어올리면 존나 예뻤다.


“뭐든?”

“네!”


 얼굴에 홀려 존나 씩씩하게 대답했다.


 …….


 기상호 미친새끼.

 과거의 기상호를 죽이고 싶다.


 폭풍 같은 업무가 지난 일주일 뒤, 상호는 준수의 자취방 욕실에 갇혀 온몸을 뽀득뽀득 씻었다. 뭐든 배워보겠다며? 팬티 한 장 안 준 냉혈한 성준수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존나 도S 새끼. 우리 팀 개새끼는 보통 악랄한 게 아니었다. 뜨거운 물 아래에서 살이 익을 듯이 샤워를 하고 앞뒤를 꼼꼼하게 씻으라는 준수의 명에 따라 어찌나 성의 있게 몸을 닦았는지 모른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훈김에 절어 나온 상호에게는 수건 한 장만이 주어졌다. 그것도 페이스 타올이라 아래를 겨우 가렸더니 준수가 품평하듯 위아래로 시선을 오르내린다.


“해, 햄. 옷 좀….”

“없어.”


 그러더니 휙 상호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사실 같은 남자끼리 성기를 포함해 전라 노출을 하는 게 뭐 대수인가 싶긴 했다. 그럼에도 최애에게는 근사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라, 상호가 수건의 실밥만 꼼질꼼질 만졌다. 준수가 들어간 새 수건으로 분노의 머리카락 말리기를 시전하며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술에 취한 날은 제대로 보지 못한 준수의 공간은 제법 성준수를 닮아있다. 침실엔 덩그러니 침대와 협탁. 거실 겸 부엌엔 2인용 식탁. 어디에 앉아있어야 준수가 놀라지 않을까? 아무리 연애를 안 해본 기상호여도 이 무드가 섹스의 전조임을 모를 리 없었다. 근 일주일을 준수를 상대로 수음하기도 했으니, 은근한 기대감도 몰려왔다.


 오늘 존나, 나는 성준수랑 거사를 치르겠구나.




“왜 그러고 서있어.”


“네? 헉!”


 들리는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준수가 로브를 입고 등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냉장고를 열어보는 건데. 아마 에비앙이 있지 않을까? 머리칼을 말리느라 아래를 무료 공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수건으로 사타구니를 가렸다.


“어차피 다 볼건데.”


“예? 예…?”


“답지않게 굴기는.”


 너무나도 기상호답게 굴고 있는데 무슨 소리세요. 하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준수가 손목을 붙잡고 침대에 상호를 집어던진다. 머리카락까지 산뜻하게 말린 준수의 보송한 얼굴이 위에 보인다. 감탄이 일었다.


“해본 적 없지?”


 단정하는 말에 발끈했다가, 반박할 말이 없어 상호가 고개만 끄덕였다. 평균보다 훌쩍 큰 두 남자의 무게를 받은 매트리스가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준수가 목덜미를 감싸고 엄지로만 스윽 쓸어냈다. 목선을 어루만지는 듯한 촉감에 간지러워 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귓불을 은근하게 짓누른다. 손톱으로 몇 번 긁는 것에 반응이 없자 귓바퀴 안으로 검지를 넣어 긁는데, 상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저도 모르게 나왔다. 맨살 위로 손끝이 닿으며 우묵하게 파인 쇄골의 안쪽을 훑다가, 가슴팍을 만지는 손에 긴장은 했을지언정 간지러운 느낌 이상의 것을 받지 못하자 준수가 미묘한 표정을 한다.


“넌 진짜 존나 둔하다.”


 맨 가슴팍을 더듬는 손길에 뭐가요? 하고 대꾸하려다가 아! 소리를 내뱉었다. 간지러움보다 조금 더 앞서는 감각에 다리가 꼬인다.


“으응.”

“완전 둔한 건 또 아닌 거 같고.”

“햄, 저희 지금 해요?”


 인상을 팍 찌푸린 준수 때문에 산통을 부순 걸 알았다. 아마 메신저였으면 ㄷㅊ라는 말이 올라오고도 남았을 것이다.


“근데 그럼 누가 위에요?”


-



“진짜 힘든데….”

“책임진다며?”


 그걸 책임진다는 건 아니었는데요. 제 최애와 소통이 되지 않는 답답함에 상호가 가슴을 내려치다가, 다시 울상 지었다.


응응, 응. 상호 말 잘 들을게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했는지 볼기를 토닥이는 손길에 속에서 욕이 나왔다. 개새끼. 우리 팀 개새끼는 씨발, 나한테도 개새끼….


“그럼, 나는 말 잘 듣는 사람이 나 책임지는 게 좋더라.”


 부은 입술을 꾹 내리누르면서 하는 말에 상호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퉁퉁 부은 입술을 누르고 엄지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상호가 혀로 손가락을 감아 사탕처럼 빨았다. 제가 말을 잘 들으면, 이 행위가 끝날 거라는 알량한 생각에 한 짓이었다.


-


햄 나 죽어요! 빽 소리를 지르자, 준수가 다시 귓바퀴를 문다.


“안 뒤져.”


“책임지기로 한 약속 안 잊었지?”

“네에, 끄흡, 네….”


 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으응, 평생….”


 이건 사회에 방생하면 좆 된다.  잔뜩 젖은 손을 들어 올린 준수가 상호의 손을 잡고 약지 손가락 입에 넣어 콱 깨문다. 잇자국을 멍하니 보다가, 제가 준수의 어깨에 낸 잇자국을 강아지처럼 혀로 핥다가, 준수의 부은 입술에 그만큼 부었을 입술을 겹쳤다.


 아, 존나게 힘드네.




04.


 국제 직장인 협회의 규약에 의하면 사수와 부사수는 퇴근도 함께하는 운명공동체여야 하며, 이걸 어길 시 무슨무슨 법에 의거하여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웅얼거리는 상호의 뒤통수를 한 대 친 준수가 으휴, 씨발. 하고 욕을 뱉었다.


“뭐가 문젠데.”

“소재가 반려돼가….”

“그니까, 멀쩡한 소재가 왜 반려되냐고.”


 초록색 포탈 창 배너는 글로벌 기업들과 다르게 인간이 일일이 검수를 하는데, 여기서 좆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의외로 유도리 있는 AI와 다르게, 조금의 융통성도 없고 검수 담당자의 입맛에 따라 반려되기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이 많았다. 직통 전화번호도 없이 이메일로 일방적인 반려 처리를 보낸 검수 담당자에게 상당히 설움이 북받쳤는지, 상호의 눈 아래가 발갛게 물들어있다.


“배너 길이 다시 봐봐.”

“분명 틀린 게 없었는디. 어…?”


 제작 가이드 내 권고 사이즈를 열어 놓고 완성된 이미지의 속성을 열어 크기를 비교하자 1px이 부족했다. 이 씨발. 그러니까 반려 당하지. 상호가 억울하다는 듯 책상을 내리쳤다. 손바닥이 책상에 닿기도 전에 닿은 금속의 소리에 놀란 상호가 왼손 중지에 걸린 반지를 소중하게 보듬어서, 마음이 조금 녹는다. 퇴근 한 시간 십분 전, 검수 담당자 퇴근은 십분 전인 상황에서 발견한 실수에 상호가 초조함에 젖어 다리를 떨었다.


“대리님, 이거 디자인팀에 수정 요청 하면 저 죽겠쬬?”


 끝말이 애교스러운 까닭을 알아서 준수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틈을 타 손을 내밀어 상호의 턱 아래를 긁었다. 온순한 시선의 강아지가 그 손길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기대감의 젖은 눈으로 저를 본다.


“기다려. 족치고 올 테니까.”

“햄….”

“닥쳐.”


 입술을 지퍼로 잠그는 제 연인 겸 부사수, 기상호 사원을 보면서 입술을 짓씹었다. 내일은 회사의 창립기념일이고 모레는 주말이다.

 기상호, 오늘 밤부터 일요일까지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내려갈 줄 알아.


 너는 뒤졌다.



 


준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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