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에서 9까지

00. 후라이팬으로 계란치기

준상

- 준상 합작 백업

- 모든 전문적인 고증을 생각하지 않은 가벼운 로코입니다.

음― 이 익숙하고도 달갑지 않은 병원 냄새.

 

인터넷 소설에 나오는 여주들의 단골 대사와 함께 기상호는 눈을 떴다.

 

…….

근데 내가 왜 이런 명대사를?

 

스멀스멀 밀려오는 혼란에 제가 일어난 상황을 파악하려는 찰나 강렬한 통증이 기상호를 엄습했다. 저가 모르는 사이에 누가 망치로 때려 박았는지 욱신대는 머리가 요란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통증을 따라 자연스레 움직이는 손에는 주삿바늘이라도 꽂힌 듯 썩 매끄럽질 못했으나, 당장의 통증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몇 번 머리를 누르자 아까보다 줄어든 통증에 숨을 내뱉었다. 줄어든 통증의 원인이 제 손으로 누른 행동인지 아니면 링거를 통해 들어가는 진통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곤 이내 슬그머니 누워있던 등을 세우면 그 옆에는 환자분? 정신이 드시나요? 을 묻는 간호사와 함께.

 

아주 미끈한 낯으로 눈가를 찌푸린―, 지상고등학교 3학년 농구부 선배 성준수가 있었다. 그것도 기상호가 짐작도 못 할 감정이 담긴 눈빛을 한 채로 말이다.

 

아니, 대체 왜?

저 아직 암것도 안 했는데요?!??!?!

 

……아닌가, 했나?

 

 

후라이팬으로 계란치기

계란은 써니사이드업으로 해주세요!

 

 

31년의 인생 중에서 이렇게 놀랐던 적은 또 없었다. 물론, 놀람의 주체는 언제나 기상호였으나 이번에 친히 새롭게 갱신해 주셨다. 미친 새끼…. 김다은에게서 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그것도 운동이 아닌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지나가던 전동킥보드에 치였단다. 씨발. 누가 횡단보도에서 전동킥보드를 처타고 다니는데. 그 새끼들이 누구냐고 물으려다 당장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아니, 잠깐만. 이게 왜 안 중요하지? 성준수 입장에선 당연하게 든 의문에 그는 응급실로 찾아가자마자 김다은을 붙잡고 그 새끼들은 어디 갔냐고 물었다. 그리고 김다은은 익숙하게 지금 말하신 그 새끼들 보러 경찰서에 가야 한다고 미처 전하지 못했던 것만 빨리 말한 후 원하는 결과 보여드리겠다며 말머리를 돌렸다.

일단 기상호는 머리를 제외하고 다친 구석 하나 없었지만, 기절한 채로 깨어나지 않아 병원에 이송하게 되었단다. 병원에서 CT를 찍은 결과 큰 이상은 안 보이지만 깨어나야 확실할 것 같다며 일단 제가 아는 보호자가 성준수뿐이라 이렇게 연락했다 말했다. 애초에 기상호의 부모님은 부산에 계시고, 형제들은… 기상호네 누나가 서울에 있던가? 언젠가 받은 연락처를 뒤적거리던 성준수는 환자분께서 곧 의식을 차릴 것 같다는 간호사의 말에 화면을 끄곤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는 제 후배이자, 연인이자, 말 그대로의 개새끼를 보던 성준수의 눈빛이 미묘해져만 갔다. 그야 놀란 듯 성준수를 바라보는 기상호의 눈동자가 마치 12년 전처럼 아주 말끔하고 깨끗하기만 했으니까. 그 안에 패시브로 깔린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여전했으나, 그것조차도 과거에 가까운 것이었지 현재진행형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치 모든 기억이 과거로 돌아간 사람처럼.

 

“너… 지금 몇 살이냐?”

“네? 예??? 당연히 16살이죠??”

“씨바거……………….”

 

일련의 상황을 모두 지켜본 간호사가 급하게 의사를 불렀다.

 

*

 

일시적인 부분성 기억상실. 갑작스레 뇌에 큰 충격이 가해져 일시적으로 기억을 상실했다는 게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이상은 없으며, 이런 경우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돌아오기 때문에 주변에서 도움을 주면 크게 문제 될 일도 없단다. 확실히 운동선수였다 하시더니 몸은 튼튼하시네요. 같은 농담에 가까운 의견을 마지막으로 남기곤 몸을 일으킨 의사는 간호사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그대로 커튼을 걷고 나갔다. 기상호 보호자님, 입원 수속이랑……. 이리저리 휘몰아치는 정보에 성준수는 기상호를 붙잡고 수속이나 그런 거 다 하고 올 테니, 간호사 말만 따르고 있으라는 명령 아닌 명령만 내리곤 저를 찾는 목소리 쪽으로 향했다.

 

그러니 세상을 뒤덮은 커튼들 사이에서 기상호 혼자만이 동떨어진 채였다. 의사의 말로는 자신이 기억을 잃었고, 지금은 12년이나 지난 시점이며, 자신은 고등학생이 아닌 성인이었다. 그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던 기상호는 왜 어른인 자신의 일차적인 보호자로 성준수가 와 있던 건지 깊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뭐, 조금 생각했더라도 곧바로 역시 주장이니까? 하고 결론을 내렸겠지만.

착실히 간호사 선생님들의 말씀에 따라 입원까지 무사히 마친 기상호는 호화로운 1인실에서 힐끔힐끔 성준수만 바라봤다. 저희 집 그럴 돈 없는데요?? 내가 있으니까 조용히 해라…. ……넵! 너무도 호화스러운 병실에 대한 항변도 한차례 만에 끝나버려 완전히 더 꺼낼 말도 없어진 기상호는 당장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침대를 박차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다. 이거 몸은 그대로지만, 두뇌는 어려졌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내뱉기에는 성준수의 눈빛은 여전히 살벌했으며, 여전히 기상호는 성준수가 전하는 저것이 무슨 감정인지 읽히질 않았다.

 

“지금 정확히 16살 언제냐.”

“저희가 처음으로 우승했을 때…요.”

“이후의 기억은 아무것도 없고?”

“그, 있었으면 의사 선생님께 말?했겠죠?”

“……그래, 그렇겠지.”

 

역시 이상했다. 성준수라는 사람이 이렇게 유하질 못하는데. 물론 그간 봐왔던 그가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입시 악귀임을 알긴 했다. 그래도 입시 악귀가 퇴치된 시점에서조차도 이런 유함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하물며 제가 밖에서 농구한 걸 보곤 다치면 어쩔 거냐며 6명 밖에 없는 농구부 생각은 없냐 시전했던 사람인데. 음…… 그것도 나름 걱정이라면 걱정이었나? …암만 생각해도 그건 아닌 듯.

그런 기상호의 머릿속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가는지 모를 수가 없던 성준수는 가만 그 꼬라지를 바라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멀쩡한 것에 안심이 되면서도 왜 이렇게 빡이 치는지. 당장이라도 잡고 흔들어서 진짜 다 처잊은 거냐고 묻고 싶은 생각이 드는 한편 왜 그 직후부터 지금까지였어야만 했는지 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게 갑작스레 잃어버린 12년의 세월 그 안에는 전부 성준수와 기상호의 연애가 들어갔으니까. 정작 당사자는 삶의 반절이 한순간에 사라져도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앞으로 갈 길이 너무도 멀었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모든 진실을 말할 수는 없는 법. 어른이 된 성준수는 말을 삼키는 법을 배웠다. 지금은 퇴원에만 집중해야 했다. 미래의 기상호가 진실을 알고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든 말이다.

 

하루, 이틀… 매번 똑같이 흘러가는 병원 안의 시간은 너무도 지루했다. 하루는 사고 날 때 같이 있었다는 김다은이 입원한 기상호를 찾아오더니 상황을 파악하곤 레알임? 하고 반응했다가 금세 12년 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다은햄은 시간이 지나도 다은햄이구나. 물론, 무얼 물으려 해도 님! 기다림의 미학 모르셈?? 하면서 말을 돌리는 꼴을 보니 영 석연치는 못했다. 두뇌만큼은 현재 16살인 기상호가 30살, 다은햄이 30살 아저씨라니 나도 그럼 아저씨라는 건가?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살아온 세월이 다르니 무엇 하나 정보를 얻을 틈도 없이 김다은은 돌아가야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게다가 그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온 사람은 오직 성준수뿐이었으니. 지루함이 배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원래 지금쯤이면 체육관에서 연습하고 있을 건데…. 그런데 지금의 나는 뭘 하고 사는 거지? 준수햄에게 물어볼까. 그러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더 피곤한 질문 하고 있냐는 시선 받으면 어쩌지. 그래도 내 미래인데! 좀 궁금할 수도 있지. 내가 아는 준수햄이라도 미래를 다 알고 있는 주변인을 만나면 대학 잘 갔는지 물어… 안 보나? 뭔가 그럴 것 같기도……. 사실 기상호의 기억은 16살까지였음에도 그 기억들이 막 또 엄청나게 선명한 건 아니었다. 굳이 고르자면 마치 가장 위에 두고 찾지 않았던 앨범을 꺼내 확인하는 느낌이랄까. 인식은 16살로 하고 있음에도 쌓여온 시간에 의한 이질감이 너무도 컸다.

으… 이거 오래가면 어떡하지.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일시적인 거라길래 준수햄한테는 가족들에게 굳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준수햄은 네가 그러면 그렇지 했다. 기상호라면 응당 당연히 그럴 거라는 듯이 말이다. 근데 준수햄이 날 그렇게 많이 아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나중에 더 친해진 건가? 꿋꿋하게 진실을 숨겨둔 성준수로 인해 여전히 무엇도 눈치채지 못한 기상호는 아주 밝은 미래만을 그려냈다. 기상호에게만 길었을 뿐, 실상 며칠 되지 않는 병원을 벗어나 성준수가 말하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마지막 퇴원까지 도와준 성준수는 문병을 오면서도 딱히 무언갈 말해주는 편이 아니었다. 미래? 현재?의 기상호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잘 말해뒀으니,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쉬라고 했지만 그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기상호가 쓰던 폰도 사고로 완전 아작이 난 상태라 퇴원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성준수에게서 받을 수 있었다. 완전히 모든 정보와 차단된 상태였던 기상호는 제가 본 말들과 행동만으로 얼기설기 정보를 엮어 끝내 준수햄이 개과천선했구나! 하는 결론을 내린 채 앞장서는 성준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따라가는 존재는 결코 어미 새가 될 수 없음에도 말이다.

 

“…야.”

“네?”

 

이윽고 기상호의 집이라는 곳 앞에 선 성준수가 익숙하게 도어락을 열며, 기상호를 불렀다. 어딘가 미묘한 그 순간까지도 기상호의 눈은 오직 도어락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만 박혀 있었다. 12240110… 숫자가 그려낸 것은 분명 크리스마스이브랑 제 생일의 조합이었다. 내가 크리스마스 전날에 이사를 왔나. 번호에 대한 추리를 열렬히 이어가던 중 아주 선명한 목소리가 꽂혔다.

 

“병원에서는 말 못 했는데, 우리 사귄다.”

“……….”

 

“……예???????”

띠리릭―. 문이 열렸음을 알리는 신호에 맞춰 기상호의 목소리 역시도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 새끼가 미쳤나. 복도에서 그렇게 소리칠 줄 몰랐던 성준수는 여전히 얼어있는 기상호를 잡아끌었다. 그제야 기상호는 성준수가 누른 현관 비밀번호의 의미를 깨달았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만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이자, 성준수의 생일이었으니까.

 

얼마나 정신을 빼고 있던 건지, 퍼뜩 고개를 든 기상호는 어느새 신발도 잘 벗어두곤 거실 소파에 앉은 채였다. 방금 충격으로 기억이 돌아올 법도 한데, 여전히 16살 이후의 미래는 깜깜했다. 이거 쉽지 않네…. 이제 그 상황으로부터 회피까지 시작한 기상호의 앞으로 넘칠 듯 물이 가득 든 컵이 놓였다. 성준수는 마치 이곳에 오래 산 사람처럼 컵도 잘 꺼내고 물도 잘 따라서 기상호 앞에 잘 놓아주더니 이제는 리모컨까지 잘 찾아 티비를 켰다. 아무리 봐도 이건 자주 놀러 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동… 동거를 한다는 증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상호는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막은 채 지하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내었다.

 

“저… 저희가 진짜 사귄다고요?”

“그래.”

“언제부터요?”

“하……. 넉넉하게 잡아도 3000일 넘게.”

“미칬나… 이거 캐붕아이가…….”

“지금 여기서 가장 미치겠는 건 나야, 이 새끼야.”

 

아니, 애초에 제 안의 준수햄은 막 디데이를 체크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데도요? 하는 말을 가까스로 삼킨 채 고개를 돌리면 막 틀어진 티비에서 나오는 건 뭔 이상한 예능이었다. 12년 뒤에는 이런 게 유행인 건가? 번쩍거리는 티비에 잠시 시선이 팔린 기상호를 성준수는 차게 식은 눈으로 봤다. 그렇게 잠시 생각보다 숨 막히지 않을 정적이 이어갔으나 이를 깬 건 기상호 배에서 나온 꼬르륵 소리였다. 슬그머니 입을 가리던 손을 내려 제 배를 감싼 기상호의 눈이 힐끔 성준수를 향했다.

 

“저… 너무 놀라서 열량 소비 다 했나 봐요.”

“지랄도 존나 가지가지 한다.”

 

금방이라도 굶어 죽으라고 말할 듯한 눈빛이었으나 실제로 일어난 건 그 이상의 말 없이 부엌으로 향하는 성준수의 모습이었다. 이에 기상호는 저도 모르게 역시 캐붕이라고 중얼거렸지만 이미 부엌으로 간 성준수의 귀에는 다행스럽게도 닿지 않았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예능이 틀어진 티비를 뒤로하고 슬금슬금 식탁으로 가 앉은 기상호가 이 정도면 발을 뻗어도 되겠다 했는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럼 저희 막 그런 것도 했겠네요??”

“그런 거 뭐.”

“있잖아요, 그거, 그 막….”

“네가 말하는 게 키스라면 한참 전에 했다.”

“그 말씀은 더한 것도 했다는…?”

“무슨 별. 애초에 8년 넘게 사귀고 있는…,”

“아, 아니! 말하지 마세요. 미래를 알기엔 전 아직 젊고, 어리고, 창창하니까요!!”

 

급하게 성준수의 말을 막은 기상호의 얼굴은 잔뜩 붉어진 채였다. 제 뒤에서 혼자 버벅거릴 게 분명해 성준수의 고개가 잠시 기상호를 향했다. 이 새끼는 지가 물었으면서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기억을 잊은 것에 못마땅함을 느끼면서도 기상호 안에 고등학교까지의 기상호만이 남았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아직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성준수가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며 덧붙였다.

 

“여긴 애초에 니 미래고, 니 새끼는 과거에서 온 게 아닌데 말이지.”

“하지만, 제 마음은 고등학생인 데도요!”

“네 몸은 이미 닳고 닳았으니까 이제 좀 닥쳐봐.”

 

꺄, 꺄악―! 작위적인 소리를 내곤 제 몸을 가린 기상호는 의자 뒤로 끌며 성준수에게서 주춤주춤 멀어졌다. 사람을 무슨 변태 새끼마냥 보는 시선이 등 뒤로 선연하게 느껴지자, 성준수는 참지도 않았던 욕설이 다시금 차올랐다. 그러나 다친 사람을 쥐어패는 취미는 없었으므로 가까스로 화를 누그러트리고자 했다. 끝내 닥치질 못하고 이어서 들려오는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역시 실제로 머리 다친 건 사실 준수햄인거죠?”

“………. 그래, 내가 오래전부터 기억상실이 대가리 치는 걸로 돌아오나 궁금했는데 네가 정성이 존나 갸륵해서 그걸 해결해 줄 모양인가 봐.”

“기, 기억 잃은 환자를 때리는 건 제네바 협약에 위반되는 행위이며…….”

 

그사이 달궈진 후라이팬을 들고 뒤도는 모습에 기상호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저걸로 후려치면 폭력이 아니라 살인인 거 아이가. ‘금일 뉴스입니다. 준상구에서 달궈진 후라이팬으로 자신의 고등학교 후배를 살해한…’ 라는 내용의 뉴스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분명 저녁 9시 뉴스로 뜨겠지. 준수햄 지금은 뭘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프로까지 가셨던 몸일 테니까 그런 기사라도 나면 큰일이다. 얼굴이 알려진, 심지어 준수햄 정도의 얼굴이면 팬들은 더 상당할 터. 제 목숨을 희생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실상 따지면 기상호 목숨이 달린 상태라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아무튼 그런 모습이 지금의 성준수에게는 꽤 먹히는 일이었는지 달궈진 후라이팬이 기상호 머리로 향하는 일은 없었다. 입시 악귀였던 그 시절이었다면 정말 어떤 사단이 일어나긴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기억이 돌아오기만 하면 네 그 편한 생활은 그날도 끝이라는 살인 예고를 들었지만 지금 일어날 일은 아니니 기상호는 미래의 자신에게 맡기기로 쿨하게 결정했다. 당장은 제 목숨이 보전됐다는 사실과 굶주린 배와 아직도 믿지 못하는 진실만으로 벅찬 몸이었으니까.

 

“그래서… 계란은 완숙?”

“저어……는 반숙이 좋은데요.”

“뭐?”

“예?”

“언제부터.”

“태, 태어날 때부터?”

“구라까지 마, 자기도 완숙이 좋다면서 이거 완전 천생연분이라고 별 지랄을… 아 씹.”

“………딸꾹.”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가? 예상치 못한 공격이 크리티컬이었던 모양인지 갑작스레 시작된 딸꾹질을 반숙으로 예쁘게 구워진 계란후라이를 먹는 순간에서도 멈추질 못했다. 샛노란 노른자를 젓가락을 쿡 찌른 기상호는 차마 성준수를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이 계란을 입에 넣을 자신도 없었다. 음식에 죄는 없다지만, 저 말은 좀 많이 죄가 있지 않나. 자긴 아무것도 모르는 아니, 뭐, 들은 건 많긴 하지만. 어쨌든 아직 파릇파릇한 16살인데. 기상호는 스스로가 그런 발언을 했다는 사실에 충격먹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건 그 성준수가 저 발언을 지금까지 기억한다는 거였다.

어쨌든, 저 이후로 뚝 끊긴 대화로 인해 이따금 이어지는 딸꾹질을 제외하고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와 이리 딸꾹질이 안 멈추지. 이럴 땐 물을 마시면 된다 했는데. 고개를 들지도 않고 손을 더듬더듬 뻗어 컵을 잡아 벌컥벌컥 물을 마신 기상호는 분위기라도 읽었는지 그제야 멈춘 딸꾹질에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비록 여전히 음식에 손을 댈 순 없었지만.

 

“…야, 야. 밥상머리 앞에서 제사 지내냐?”

“여기 책임엔 준수햄도 좀 있다고 보는데도요.”

“씨바거… 잊고 처먹어. 내가 강제로 잊게 만들어 주기 전에.”

“넵! 잘 먹겠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까지 외치는 건 좀 그럴 것 같아 알아서 자중한 기상호가 반으로 가른 계란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노른자가 뚝뚝 흐르는 만큼 계란은 입안에서 고소한 향을 퍼트리며 눅진한 식감을 주었다. 그런데 그 맛이 꼭 예전 같지가 않아서. 분명 기상호는 반숙을 더 좋아함에도 성준수가 기껏 해준 계란후라이가 맛있지 않았다. 뭔가 이것보다는 좀 더 퍽퍽한 게 좋은 것 같은디….

가령 완숙으로 된 계란후라이처럼.

 

“헉.”

“또 왜.”

“준수햄… 반숙이 맛없어요.”

“이 새끼는 그게 해준 사람 앞에서 할 말이냐?”

“아니, 그게 아이라! 제 뇌는 반숙을 원하는데, 제 입맛이 완숙을 원하는 것 같아가….”

“…….”

“준수햄?”

 

갑자기 들려오지 않는 답에 고개를 들면 마치 밥 먹다가 돌 씹은 사람마냥 떨떠름한 낯의 성준수가 보이는 것이다. 밥에 돌이 있었나? 싶어 제 밥을 한번 씹어보면 그저 잘 도정된 흰쌀밥의 맛이었다. 밥은 씹을수록 달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네. 혹시라도 못 찾은 돌이 있을까 죽이 되도록 밥을 씹다가 삼킨 기상호가 다시 한번 성준수를 부르려 했으나 그것은 갑자기 의자를 끌며 일어난 성준수로 인해 무산되었다. 성준수는 밥 먹는 것도 잊은 건지 양손을 식탁 위에 얹고는 엄숙하고 진지하게 기상호를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안 되겠다.”

“예? 뭐가요?”

“너 빨리 기억 찾자.”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데요??”

“야, 우리 모토가 뭐냐.”

“저희 모토가 있어요???”

“안 되면 될 때까지 해야지. 안 그래?”

“저기요?? 준수햄????”

 

어디서 버튼이 눌린 건지 기상호가 뭔갈 더 알아가기도 전에 끝난 식사를 마지막으로 성준수가 말했던 그 모토에 맞춰 기상호는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갔다. 다행히도 성준수의 너른 아량으로 인해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건 피할 수 있었다. 비록, 성준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기상호의 정신이 미성년자라는 자각이 있는 모양인지 빠르게 허락했다. 아무튼 그날을 시작으로 손님방에서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바쁜 하루의 반복이었다.

그 성준수는 기억에 좋다는 음식을 시작으로 기억력 증진 뇌 운동이나,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보려는 것처럼 온갖 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는 플래시백으로 기억이 돌아올 수 있으니 사고 현장으로 가보자는 말에 갔다가 횡단보도만 37번 건넌 사람이 되었으니 말 다 하지 않았는가. 기상호는 질린 얼굴로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하라고 한 적 없지 않냐고 물었지만 바로 씹혔다.

 

그리고 또 당장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은….

 

“상호야~”

“병찬햄!!!”

“이 새끼가 어딜 당연하게 튀어 나가고 있어.”

 

성준수에게 옷깃이 낚아채진 기상호가 햄! 미래의 병찬햄이 16살의 기상호에게 얼마나 희귀 요소인지 아십니까? 한마디 했다가 몰라. 이 새끼야를 시작으로 이어진 백 마디의 욕을 먹고 비로소 얌전해졌다. 그 꼬라지를 본 박병찬이 너희는 한 명이 기억을 잃어도 비슷하구나 하고 감상을 내뱉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그렇게 욕먹고도 감탄하는 건 멈출 수 없던 모양인지라. 기상호는 여전히 눈을 빛내며 우와… 병찬햄이 어른. 33살의 병찬햄은 올타임 전설의 레전드구나. 쥑인다.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박병찬은 이미 기상호를 만났을 때부터 어른이었으며, 전설과 레전드는 동어반복이므로 어떠한 것도 되질 못했지만. 오직 성준수만이 이 모든 게 스스로의 존나 잘못된 선택임을 깨닫고 이마를 짚었다.

 

그들이 갑작스레 박병찬을 만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혹시 모르니 지인들도 한번 만나보자는 기상호의 말에 성준수가 일리가 있다 판단하여 끄덕인 결과물이었으니까. 그 발언이 사심이 가득 섞인 것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만나게 되어서야 그것들이 사심임을 알게 되었다.

정희찬은 당연하게 넘어갔다지만 최종수 이름은 왜 나오나 했더니. 이유가 다 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잡아둔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할 수도 없던지라 성준수는 계속해서 주접을 줄줄 내뱉는 기상호를 끌고 거의 실신할 것처럼 웃는 박병찬을 둔 채 자리를 벗어났다. 갑작스레 약속 잡은 상대가 떠난 것임에도 박병찬은 둘의 행각에 1년 치 웃음을 전부 얻었기에 별다른 미련은 없었다. 단지 기상호가 기억이 돌아온 후가 궁금해졌을 뿐이었다.

 

“희차이 니 와 이리 든든해졌노!”

“멈춰봐라 내 그 이야기만 들으면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이 올라오는 것 같으니까.”

“응, 알았다.”

 

오랫동안 외국에 나가 있던 친구를 반기듯 힘차게 달려가던 걸음을 슬그머니 멈췄다. 기상호는 짧은 세월 동안 너무나도 듬직해진 제 친구를 다시 한번 새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희차이 이제 종아리 걷어차도 안 뿌러지겠다. 감격한 마음에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살짝 올려 하늘을 본 기상호는 존나 이해 안 간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성준수를 외면했다.

준수햄은 말해도 또 암것도 모를 기다. 병찬햄이 있었는데 매정하게 나까지 휙 끌고 가고…. 하지만 그 상황에서 뭐라도 더 했다면 큰일이 날 게 분명했기에 기상호는 얌전히 정희찬을 만나러 왔다. 누군가를 만난다고 기억이 당장 돌아오는 건 아니었으나, 퇴원한 이후로 쭉 같은 사람을 만나다가 새로운 사람이 주는 신선함이 꽤 크게 다가왔다.

 

아무튼 과거와 달리 많이 든든해진 정희찬은 그렇게 되기까지의 여정이 꽤 험난했던 모양인지. 몇 번 헛구역질하다가 가까스로 진정했다. 차마 제 친구의 점심 식사를 보고 싶진 않았던지라 짧은 인내의 시간을 가진 기상호는 다시 빨빨거리며 정희찬에게 다가갔다. 희차이 니 요즘 우째 지내고 있는데. 진짜? 그럼 내는? 아, 그건 준수햄이 말하지 말라 했다고. 왜 그리 꽁꽁 숨기는지 니는 아나. 알아도 준수햄이 뒤에서 존나 살벌하게 보고 있어서 말하기 싫다 이거가? 알았다. 친구라는 놈이 영……. 아 치지 마라! 내 아직 환자다! 투닥대는 모습은 옛날과 같았으나 특별히 기억이 돌아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끝내 기상호도 성준수도 별다른 소득 없이 정희찬과 식사를 마치고 다음을 약속했다. 다음엔 부디 본래의 기상호로 돌아와달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부탁을 받은 기상호의 표정이 조금 기묘해졌으나, 그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최종수였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공사다망하신 분인지라 그는 밤사이의 아주 짧은 시간만 낼 수 있다 답했다. 성준수는 그에 별 지랄을 다 한다고 했지만 지금 와서는 그 짧은 시간이 어쩌면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말로 최선이 맞았다.

 

“오,”

“……?”

“오른쪽으로 가다가 멈춰서 점프슛.”

“야, 이…”

“막아봐.”

“……이 미친 새끼 이거 기억 안 잃은 거 아니야?”

“헉! 제가 무슨 말을….”

 

당장이라도 기상호를 잡아챌 것 같은 최종수의 모습에 기억 잃었으니까 이 모양이라고 대꾸한 성준수가 기상호 기억 돌아오면 그때 알아서 하라는 말만 남기고 기상호를 질질 끌고 갔다. 뒤에서 졸졸 따라오는 기상호가 자연재해에게서 인간을 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잠시 유예를 준 것이지 살린 건 아닌지라 따로 답을 주지 않았다. 그 무응답을 기상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성준수가 알 바가 아니었다.

 

결국 세 번의 만남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끝에서 기상호는 어쩐지 만족한 낯을 하고 있었으나, 제 생각에 잠긴 성준수의 시야엔 안타깝게 들지 못했다. 이거이거 준수햄 아주 다른 생각에 빠지셨군요? 어리석게도. 짧게 악역 놀이에 심취해 있으면 정신 차리라는 듯 붙여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야, 안 되겠다.”

“뭐, 뭐가요?”

 

지레 찔린 기상호가 제 목숨만은 안 된다는 듯이 남은 손으로 슬쩍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싸늘하게 무시당했다. 머쓱해진 채로 슬그머니 손을 내렸지만 성준수의 시선은 여전히 기상호를 향하고 있었다. 어딘가 묘해진 분위기에 괜히 부담스럽다며 숙인 고개로 꽂히는 목소리는 기상호가 예상하던 혹은 기대하던 그 무엇도 아니었다.

 

“내일은 농구하자.”

“예? 갑자기요?”

“종일 굴리다 보면 뭐라도 떠오르겠지.”

“전 가끔 준수햄의 사고방식을 따라갈 수 없어요.”

“그거야 뭐.”

 

나도 너 볼 때 가끔 하는 생각이니 우리 둘이 똑같네.

 

그렇다고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반칙 아이가. 갑작스레 들어온 꽉 찬 직구에 잡힌 손도 슬쩍 빼내곤 그, 그럼 빨리 가서 자야겠네요! 하고 외친 기상호가 고장 난 채로 집까지 달려갔다. 그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자각이 없는 성준수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으로 빈손을 몇 번 쥐였다 폈다가 이미 사라진 자취를 따라갔다.

 

그렇게 오늘은 성준수의 말대로 온종일 농구였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더라도 몸이 가진 루틴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성준수의 말에 따라 바쁜 나날 속에서도 꾸준히 트레이닝은 이어갔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평일임에도 개방된 체육관에서 그동안 미뤄놨던 숙제를 해치우듯 사람을 굴리는 모습에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일로 정말 심장이 터지지는 않겠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이제 운동 정도는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면전에서 들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햄… 이거 완전 인간 학대 아입니까.”

“진짜 학대가 뭔지 보여줘?”

“아뇨! 그건 아인데… 이게 농구가 맞지만? 저는 준수햄과 일대일로 하는 그런걸? 생각했는데 말이죠?”

“31살이 16살에게 농구하자면 그건 그냥 학살 아니냐.”

“제, 제 몸은 28살인데…!”

“뭐, 그래서 덤비겠다고?”

 

네가? 하는 시선이 여실히 느껴졌다. 쫄이라 물으면 누가? 하는 게 한국인의 정신. 그건 16살의 기상호도 다르지 않았다. 까짓거 함 해보죠. 정신이 어디서 나온 줄 아나. 바로 에바게리온. 이게 아니라. 지금의 기상호에게 남아있는 건 오로지 전진뿐, 후퇴는 없었다. 지 스스로 없앤 거면서 말이 많다고 할 생각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으니 가까스로 세이프였다.

 

간단하게 10점 내기로 시작된 농구는 성준수도 그리고 내기를 제안한 기상호도 한쪽이 처절하게 발릴 거라 예상한 것이었으나 실제로 보인 양상은 조금 달랐다. 이것이 바로… 성인의 몸? 그동안 기본 트레이닝만 이어가서 체감하지 못한 성장이 확연히 느껴졌다. 성준수가 던지는 공을 손끝으로 또다시 긁어 궤도를 비튼 기상호가 링을 맞고 튕긴 공을 잡아 성준수와 거리를 벌린 후 쐈다. 성준수만큼 깔끔한 샷은 아니더라도 올곧게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 공이 그물을 통과했다.

 

“이게 바로 그 【The 달밤의 피에 미친 기상호 파이널 업그레이드 최종 트루 ver.】란 말인가?”

“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닐 텐데. 이걸로 9대 8이다.”

“아! 햄! 한창 각성 나레이션 중에 볼을 넣는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여운에 잠길 틈도 주지 않던 성준수는 당연하다는 듯 그물을 통과한 공을 잡아채 기상호가 뭘 하든 말든 그대로 슛을 쐈다. 날아간 공은 깨끗한 선을 그리며 이내 그물조차 스치지 않고 통과했다. 저건 진짜 언제 보더라도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지. 아니, 31살이 되었으면 은퇴도 했고, 체력적으로 점차 낮아질 시기 아인가? 28살의 기상호는 저 성준수에게 이기기는 하러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차오르기 전 이번에 실패하면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그의 뇌를 먼저 지배했다.

그 후론 뭐, 죽기 살기로 덤볐다. 마지막 기회에 기세가 완전히 바뀌어 성준수가 패배하는 역전극을 보여줄 수도 있었겠지만. 성준수가 어디 그럴 사람인가? 덩달아 마지막까지 죽기 살기로 슛을 쏘는 모습에 기상호도 두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이게 연인들의 농구? 땀으로 뒤범벅된 채로 중얼거리자 성준수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뭐 생각나는 건 없고?”

“음…… 준수햄.”

“왜.”

“미래에도 아주 끝내주는 농구 선수가 되셨군요.”

“나 참. 그게 끝이냐?”

“아니면 앞으로 농구 그 자체인 『The Basketball』 이라 불러드릴까요?”

“일 절만 하자.”

“…넵! 이제 씻으러 가죠!”

 

가을인데 왜 아직도 덥지. 손부채질하며 어서 가자고 이끄는 기상호의 모습에 성준수가 웃음을 흘렸으나 그것도 곧 뒤돌아보는 기상호에 의해 금방 사라졌다. 별 소득도 없고 앞으로 또다시 막막할 일만 가득했으나 기상호와 이렇게 농구했던 게 또 얼마 만인가? 어른이라는 건 개인의 시간을 내기 힘들다는 뜻이었고, 둘 다 여유가 될 때엔 농구가 아닌 다른 걸 우선했으니 이렇게 각 잡고 한 농구는 은퇴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비록 그 말 그대로 기상호에게 전하진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또다시 주말이 돌아왔다. 사고가 난 지도 이제 열흘이었다. 둘 다 일을 하지 않는다고 당장 생계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었으나, 12년의 세월을 잃어버렸다는 건 사소한 부분에서도 항상 티가 나기 마련인지라 성준수는 내심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처럼 기상호보다 먼저 일어난 성준수가 소파에 앉아 기억을 돌아오게 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면 그것보다 조금 늦게 손님방에서 기상호가 나왔다.

깼냐? 하는 물음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을 들려주더니 기상호는 아주 자연스럽게 성준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선 언젠가의 익숙한 일상처럼 아침이 너무 빨리 오는 것 같다며 찡찡댔다. 그 순간에서조차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성준수는 문득 무언갈 깨달은 사람처럼 미끈한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 이 새끼. 기억 돌아왔지.”

“………네엡?”

“뇌 굴리지 말고 지금 네 꼬라지를 보고 똑바로 답해라.”

“그게… 준수햄 여기에는 정말 많은 사정이…….”

“많은 사정이?”

“다, 다 불겠습니다!”

 

어느새 몸도 일으킨 채 소파에서 무릎 꿇고 앉은 기상호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짧게 요약해서 말하라는 걸 참은 성준수가 길게 이어지는 변명을 들었다.

 

기상호는 나름 진실로 억울했다.

 

병실에 있을 적에는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병원에서 자고 일어나며 하루하루가 얼마나 조여오는 기분이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정말로 기상호는 그랬다. 의사 선생님이 혹시 거짓을 말한 게 아닌지 끊임없이 생각할 정도로. 그런 상황에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건 집으로 돌아간 후부터였다. 정확히는 눈빛으로는 불만족스럽다 말했지만, 기상호가 쉴 수 있도록 이미 정리를 다 한 손님방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을 때부터 말이다.

기억은 꿈에서부터 넘어왔다. 처음으로 넘어온 꿈은 가장 최근의, 그리고 기상호에겐 가장 먼 미래의 기억이었다. 그날 저녁에 반숙 계란후라이를 해준 것처럼 성준수와 기상호는 부엌에서 같이 요리하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함께하는 시간이었던 걸까? 서로 간의 거리가 생각보다 더 가깝다는 걸 느낀 기상호가 은연중에 괴리감을 느꼈으나, 꿈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그 괴리감은 금방 사라졌다. 그렇게 둘은 어느 평범한 연인들처럼 간단하게 저녁을 차려 식탁에 앉아 그간 있던 일들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숙으로 잘 익힌 계란후라이를 입에 넣는 순간 기상호는 눈을 떴다.

 

“설마… 이렇게 쭉 기억이 돌아오는 기가.”

 

잠에서 깨어난 기상호가 아직도 선연한 계란후라이의 맛에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다만 이 사실을 성준수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혹여라도 단발성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그 성준수에게 또 다른 실망을 안겨줄 것만 같았기에. 애초부터 성준수에게 자신은 실망의 존재나 다름없음을 알았다. 지금 와선, 그러니까 지상고가 우승하게 된 이후부터는 나아졌으나 16살의 기상호는 꿈결에서 맛본 먼 미래와 그때의 짧게 지속되었던 순간보다는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가까운 과거들에 뜻을 맡겼다.

만약 내일도 비슷한 꿈을 꾼다면 그때는 꼭 준수햄에게 말해야지 다짐한 기상호는 밝아오는 해를 느끼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조금은 돌아온 기억이 조금 나태함을 부려도 성준수가 봐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기에 때가 되면 깨우겠거니 싶어 못 이어간 잠을 이어갔다. 미래에 어떤 꿈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이의 말로였다.

 

그리고 다음 날 꾼 꿈은. 기상호 몸 위에서 땀을 흘린 채 기상호 자신을 바라보는 성준수의 어딘가 상기된 낯……까지 인식하자마자 꿈에서 깨어나 튀어 오르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뭐고 이거. 그리 길지 않았던 꿈인데 바깥은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즐비했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를 지르다 보면 방 안에서 지랄발광하는 기상호에 무슨 일 있나 싶어 아침을 준비하다 말고 성준수가 문을 두드렸다. 야, 들어간다? 하는 말과 동시에 열리는 문에 기상호가 급히 필살 유혹의 포즈로 바꾼 채 혀로 입가를 쓸며 가까스로 말을 떼었다.

 

“왜… 그러시죠? 준.수.햄?”

“………미친놈.”

 

정말 못 볼 꼴이라도 본 사람마냥 중얼거리며 곧 있으면 아침 다 되니까 미친 짓 그만하고 나오라는 성준수의 반응에 기상호는 안도 하면서도 아주 살짝 상처받았다. 꿈에선 막! 그렇게! 봤으면서! 하지만 역시 다음으로 꾼 꿈이 이런 것인지라 제 입으로 말할 수 없던 기상호는 네엡… 하고 답하며 침대에 머리를 몇 번 박은 후 방을 나섰다. 그날 식사는 유독 닿아오는 시선이 더 따가웠지만, 음식엔 죄가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그다음부턴 정말 잠시간 눈을 감기만 하더라도 꿈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것을 기상호는 성준수에게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이전과 달리 별다른 이유가 있던 건 아니다. 음, 정말 아니라 할 수 있나? 기억이 갑작스레 완전히 돌아온 것도 아니고, 마치 퍼즐처럼 돌아온 기억들은 전부 성준수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그러고 잠시 기억을 정리하다 보면 부차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이 있긴 했으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따라 기상호는 말할 수 없었다. 준수햄과 어떻게 사귀었는지는 기억나는데 다른 건 기억 안 나네요! 같은 말을 하라고? 기상호는 절대 그러질 못할 사람이었다. 꿈속에서 보이는 성준수의 눈빛이 점차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당장 16살이라 생각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떤지 알아차리기 시작한 기상호에겐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비밀로 하는 기억들이 늘어갈수록 기상호는 16살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점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저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던 성준수가 정말로 머나먼 과거가 되었다. 지금의 기상호는 성준수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농구에서든, 연인이든,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말이다. 그러니, 그때의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가졌었는지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남겨진 스케치 위로 새롭게 그림을 덧그려지는 것처럼 기상호는 점차 28살의 기상호가 되어갔다.

따라 지인들을 만나자 한 것도 어느 정도 기억이 돌아온 기상호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정말 16살이었다면 구태여 만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도 세상에 동떨어진 기분을 더욱 느끼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놀리겠는가? 진지하게 이어가던 생각이 무색하게도 기상호는 결국 기상호였던지라 찾아온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그것이 비록 미래의 자신이 해결해야 할 사건들이 되더라도 말이다.

 

이 기상호 내일은 안 보고 사는 것에 아주 능통해졌다구요?

성준수가 들었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말이었다.

 

아무튼 점차 먼 과거, 16살의 기상호에겐 가까운 미래의 꿈을 꾸다가 이제는 우승했던 그 시점의 꿈까지 꾸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성준수와의 썸부터 연애까지의 모든 과정을 알게 되었지만, 딱 하나 비어있었다. 그래서 누가 고백해서 사귀게 된 거죠? 야속하게도 그 순간만을 빼고 기억한 기상호가 기회를 놓치지 않아서 이런 벌을 주신 건가요 하며 주먹으로 침대를 한 번 쳤다. 오늘은 성준수가 종일 농구를 하자는 날이었다. 기억이 전부 돌아오면 당당하게 다 돌아왔으니 농구는 안 해도 된다고 말하려 했건만 다 틀렸다. 마지막 조각이 없다고 완성되지 않는 퍼즐이라니 이게 말인가. 딱 그 기억 하나면 전부 돌아온다는 사실을 짐작한 기상호가 오늘 끝내주게 농구해서 체력을 다 빼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건 자의적으로, 타의적으로 아주 잘 이뤄졌다.

 

드디어 마지막 꿈이다. 딱 봐도 계절은 매서운 겨울이었다. 부산엔 여전히 눈이 내리질 않았지만, 차갑게 얼어 퍼석거리는 모래의 감촉만큼은 선연했다. 꿈인데도 말이다. 그때가 되니 기상호는 알아차렸다. 이때는 자신이 성인이 된 생일날이었다. 진짜로 20살이 된 1월 10일.

실상 작년, 19살에 이미 한 번 고백을 받았었다. 당연히 그 성준수에게. 그러나 그것은 불발로 끝이 났다. 그야 기상호가 놀래선 저… 빠른 인데요? 같은 소리를 내뱉고 말았으니까. 아니, 썸을 그렇게 탔으면서 상대가 빠른 연생인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 저도 모르게 툴툴댔지만, 고백한 그 당사자가 가장 충격인 모습에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쏙 들어갔다.

 

기상호는 되려 저는 괜찮은데, 그냥 사귈까요? 했지만 성준수가 단호하게 미성년자와 사귈 생각은 없다 말하며 1년 유예를 시작했다. 정말 그 나날들 전부 시곗바늘을 돌려서라도 빠르게 시간이 흐르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던가. 되레 참지 못한 채 사귀자고 몇 번 말한 것도 기상호였으나, 성준수는 안 된다는 듯이 좀 더 기다리는 말만 남기고 기상호를 돌려보냈다.

그 속에서 시간은 야속하게도 느리면서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 날엔 죽어라 흘러가지 않았지만, 어느 날엔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렇게 12월이 끝나고, 방학이 찾아오고, 곧 생일인데 내려오라는 가족의 부름까지 찾아왔다. 그를 무시하기엔 썸만 탄다고 가족을 찾아가지 않은 세월이 길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성준수에게 생일 때 내려가야 할 것 같다고 하자 성준수는 화내는 것도 없이 순순히 수긍하며 조심해서 다녀오라 말했다.

결국 준수햄 성불이 된 건가? 그 상황까지 오자 기상호는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그렇지 않던가. 나였다면 당장 31일 자정 지나자마자 사귀자고 할 텐데. 성준수는 그걸 더 버티겠다는 거였다. 기상호에게 약속이 잡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쨌든 그에 대고 무어라 할 순 없었으니 기상호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싱숭생숭하게 생일을 맞이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성준수에게서 뜬금없이 연락받았다. 자기가 지금 광안리인데, 여기로 올 수 있겠냐고. 기상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럼요!! 하고 답하곤 어딜 가냐는 가족들의 물음에 답할 새도 없이 패딩만 입고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택시를 잡고 광안리까지 말 그대로 날아간 기상호는 겨울 바다에서 부산에 사는 자신보다도 더 바다와 어울리는 이를 찾아냈다. 성준수는 바닷바람이 춥지도 않은지 코트만 입은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기상호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준수도 마냥 덤덤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따라 기상호는 멈추지 않고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달려오는 소리에 뒤도는 성준수를 덮칠 수 있는 정도의 속도로.

 

키가 비슷한 두 남정네가 서로 들이박았으니 거의 넘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잡고 버텨낸 성준수가 이 새끼가 미쳤냐며 소리쳤다. 지금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을 성질머리에 웃음을 터트린 기상호가 몸을 바로 세우며 어쩐 일로 왔냐고 물었다. 말이 물음이었지 그냥 당장 고백하라는 신호에 가까웠다. 그건 성준수 역시 알아차렸는지 주머니를 뒤적여 반지 케이스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기상호는 이 대사를 지금도 기억한다. 아주 선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기상호의 마지막 피스는 이곳에 있었으니까.

 

‘난 다른 사람들처럼 간지러운 말 같은 거 잘 못해. 그러니까 한 번만 말한다.’

‘네, 잘 새겨들을게요.’

‘어느 순간에서도 나랑 함께해 줘. 난 이제 농구랑 너만 있으면 되니까.’

‘…….’

 

저도 그래요, 준수햄.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그 품에 안기자 성준수가 이러다 반지 떨군다며 잔소리하다가 이내 그 역시도 제게 안겨 온 체온을 반겼다.

기상호는 그 순간만큼 겨울이 춥지 않았다.

 

앞으로는 영원히 잊지 못할 길고 긴 꿈에서 깨어나면 완전한 그림을 보여주듯 모든 기억이 재정비되어 기상호에게 돌아왔다. 어떻게 이걸 잊었지? 할 정도로 소중하고, 즐겁고, 기꺼운 기억들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벅찬 상태에서 곁에 없는 체온에 비척비척 나온 기상호가 성준수를 찾아 파고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는 게 기상호의 변명들이었다.

 

“……아무튼 이 기상호 이제 다 기억났다 아입니까. 28살 기상호 다시 등장!”

“한 마디만 더 해봐라.”

“…그! 그래도 이런 제가 좋??죠???”

 

다가올 미래를 필사적으로 피하려는 것처럼 성준수에게 붙어 온갖 생존 화법을 구사하던 기상호는 피할 수 없음을 예감하며 눈만 꾹 감았다. 물론, 그것도 강하게 얼굴을 쥐는 손길에 강제로 뜰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 보면, 과거 괜스레 민망해져서 고개를 피했던 자신이 이상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정작 성준수는 그런 거 하나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왜 기억을 잃었을 때엔 이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생각한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데. 지금 자신도 아마 분명 성준수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을 터였다. 연인으로서의, 그리고 가족으로서의 애정이 가득 담긴 눈동자일 테니까.

 

아무튼 그건 그거고. 곧 다가올 업보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기상호가 준비되었다는 낯으로 성준수의 판정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상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성준수는 그런 기상호 얼굴 꾸기듯이 붙잡은 채로 한참을 빤히 보다가 그저 픽 웃으며 기상호가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래, 이 눈깔 하나만큼은.”

마음에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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