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에서 9까지

01. 혈중흡혈농도 上

준상

- 뱀파이어 AU



이종족(異種族). 기본적으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種族들을 뜻하나, 실상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에도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는 존재들을 일컫는다. 흔히들 전설 혹은 소설과 같은 가상의 매체 속에서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로 인간들 사이에서 지금도 함께 살아간다.

 

그렇다면 왜 이종족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밝히지 않는가? 이에 대한 연구자들의 사사로운 주장은 제각각 달랐으나 단 한 가지의 주장만큼은 일치했다. 바로, 그들의 존재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99.999%의 인간들 사이에서의 단 0.001%의 존재. 심지어 그것마저도 인류의 삶 속에서 희석되고, 진화하면서 과거 이종족의 특성들은 당연한 이치처럼 점차 퇴화했다. 인간들은 이제 먼 과거 속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만으로 그들을 특정할 수 없었으며, 애초에 무리를 짓고 살아가지 않는 이종족들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질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점들이 기묘하게 맞물려 비정상성 속의 정상적인 사회가 만들어졌다.

 

따라 이종족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는 저마다 달랐다. ‘이종족’이라는 특성을 가진 인간으로 대할지. 혹은, 인간과 다른 ‘괴물’로 대할지 말이다. 과거엔 이 때문에 여러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이곳에서 다룰 건 아니다. 어쨌든, 세상은 그럼에도 발전하고 발전하여 프라이버시라는 이름으로 이종족 자체를 특정하지 않게 된 국가가 대다수였으니까. 물론, 인간만으로 벅차 그들을 복지적으로 케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당신이 종종 접하는 외국에서의 기이한 사건들은 대체로 이종족이 만들어낸 사건일지도 몰랐다. 가축들의 피가 전부 사라진 채로 발견되었다던가, CCTV에 네발로 뛰어가는 동물 아닌 무언가가 찍혔다던가, 사람을 홀린다는 목소리가 저음질로 녹음되어 유튜브에 퍼진다던가. 그것들은 전부 특이한 사건으로 막을 내리고, 한순간 이목을 끌어도 오래 가질 못했다.

그렇다면, 이곳. 한국은 어떨까. 예상했던 것처럼 한국은 당연하게도 그들을 복지라는 이름의 관리를 시행했다. 그러니까, 전국 각지에 있는 이종족들을 파악하여 인구를 체크하고, 그들끼리만의 네크워크를 연결해 주며, 국가에서 할 수 있는 복지를 지원했다. 개인에 대한 프라이버시보다 국가와 개인의 안전을 더 우선시하는 국가다웠다. 이종족들의 반발이 강했을까? 하면 전혀. 혼란의 시대와 갑작스럽게 치솟은 발전 속도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급급해 오히려 국가의 복지가 닿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미 절멸하여 한국 내에서는 이종족 하나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따금 목줄이 차인 상태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곳에서 그렇지 않은 인간이 또 어디 있던가. 이종족들을 그런 판단 끝에서 국가에게서 받을 수 있는 모든 복지를 받으며 한국에 완전히 정착했다. 정부는 사회의 혼란을 대비하여 그들을 직접적으로 내세우지 않았으며, 한국의 이종족들은 온전히 그 이름이 지워진 채 인간으로서 사회를 살아갔다.

 

뭐, 남들처럼 학업이라든가, 취업이라든가, 연애라든가.

그런 것들 전부 다 하면서 말이다.

血中吸血濃度

혈 중 흡 혈 농 도

 

길 가다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프렌차이즈 카페. 토요일 오전 11시라는 아주 어정쩡한 시간이었으나, 카페 안에는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다. 저기 노트북을 들고 무언가 작업하는 사람이라든가. 가만 핸드폰만 보며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라든가, 그리고 왠지 모르게 고해하는 느낌으로 제 앞의 미남을 두고 땀만 삐질삐질 흘리는 사람이라든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예에…, 뭐, 그?렇죠?”

 

미남, 성준수 앞에서 땀만 삐질삐질 흘리던 기상호는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아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급하게 마신 탓에 머리가 찡―하고 울렸으나, 그게 중요하진 않았다. 자신이 점점 말을 망설일수록 성준수의 낯이 썩어가고 있다는 게 더 중요하지. 하지만, 기상호에겐 정말로 이건 수억 번을 고민하고, 고민해서 말해야 할 일이었다. 부모님께선 무덤으로 가지고 갈 사람에게만 말하라 했으니, 이 얼마나 막중한 일인지 성준수가 알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밑밥도 깔지 못하고 고해의 장이 펼쳐졌으니까.

전혀 나아지지 않은 기색을 한 채 깡생수 마시는 것처럼 한입에 초코라테를 끝내버린 성준수가 컵을 내려놨다. 주변에 아예 사람이 없지 않다는 걸 의식했는지 컵이 그대로 깨지거나, 탁자를 쪼개는 듯한 소리는 다행스럽게도 들리지 않았다. 비록, 눈으로는 다 찢어버리고, 기상호도 죽여버리겠다는 의지를 담긴 했지만. 아무튼 잠시간 말이 없던 성준수가 입을 열었다.

 

“너 또 나랑 헤어지고 싶냐?”

“네??? 제가요???”

“그런데 왜 자꾸 말을 질질 끄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널 뛰는 주제에 기상호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헤어지는 거였다면 이렇게 각 잡고 말하지 않았다. 서로 추잡하게 니 탓이니, 내 탓이니 따지다가 헤어지자며 반지나 던지고 도망쳤겠지. 실제로 몇 번 있었던 일이라 그게 아님을 성준수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설마, 어쩌면 이번엔 정말로 헤어지는 거라 생각한 걸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기상호는 급히 말을 이었다.

 

“저, 사실!! 뱀파이어…입니다만…….”

 

시작은 우렁찼지만, 끝은 미약했다. 개미굴에 들어갈 정도의 목소리를 낸 기상호가 슬쩍 성준수를 바라봤지만, 감히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오묘함 그 자체. 아니, 뭐, 사실 읽어보자면 이 새끼가 또 뭐 이상한 거 처보고 와서 지랄인가 하는 기색과 함께 정말 거짓이 아닌지 확인하는 쪽이긴 했다. 그래도 조금? 믿어주려고 노력은 하는구나! 성준수와 함께 지내면서 어떤 상황이든 긍정적이게, 다른 말로는 본인 좋게 해석하는 능력만 키워진 기상호가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챙겨온 책자를 가방에서 곱게 꺼냈다.

 

기상호의 뇌 속에서 얼마나 많은 판단이 오갔는지 모르는 성준수는 그사이 어딘가 수줍은 낯을 보이며 함께 내밀어진 개두꺼운 책자를 집어 들었다. 「혈액 공급 지침서」. 제목마저 수상했다. 하지만 그 아래로 적힌 보건복지부와 대한적십자사라는 명칭이 어디서든 꺼내기만 하면 사기로 잡혀갈 책의 신분을 보장했다. 그러니까 이게 국가에서 직접 낸 책이 맞다는 뜻이잖아. 기대에 찬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인의 눈동자와 신분은 보장되었지만, 내용은 보장되지 못한 책을 번갈아 보던 성준수는 천천히 책자를 넘겼다. 처음, 흡혈박쥐인간(이하, 뱀파이어)이라 적힌 글씨를 보자마자 보험약관처럼 팔락팔락 넘기던 종이는 마지막 페이지에 끼워진 종이를 마주하고 나서야 멈췄다.

 

 


혈액 공급 계약서

 

정기적으로 혈액을 공급할 자 “성준수”(이하 “갑”이라 한다)와 정기적으로 혈액을 수급받을 자 “기상호”(이하 “을”이라 한다)는 아래와 같이 혈액 공급 계약을 체결한다.

 

제1조(혈액 공급)

①. “갑”은 3개월에 1회씩 지정된 장소에 찾아가 혈액을 제공하여 “을”에게 원활한 혈액 수급이 이뤄지도록 한다.

②. 혈액은 오직 “갑”이 공급하는 것에 한하며, 공급을 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일 시 이를 미리 “을”에게 해당 상황을 고지하여 혈액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한다.

 

제2조(비밀유지의무)

①. “갑”과 “을”은 본 계약의 이행 과정에서 알게 된 “이종족”에 대한 극비 사항을 제3자에게 결코 누설하여서는 안 된다.

XX.03.16 추가 ⑴. 여기서 말하는 “이종족”이란 흔히들 말하는 뱀파이어……


그리고 딱 여기까지 읽은 성준수가 책자라 쓰고 사전이라 읽는 종이 뭉치를 덮었다. 사실은 정부와 기상호가 합심하여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닌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오랫동안 사용된 것처럼 수정되고 덧대어진 계약서의 내용이 이런 내용일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종족”이라니, 성준수의 세상에서 그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단어인가. 애초에 오직 자신만을 염두에 둔 듯 프린팅된 “갑” 성준수의 이름하며, “을”에 당당히 기상호가 들어가 있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이에 대한 진위를 논하기엔 이곳은 너무도 공개적이었으니, 성준수는 금방이라고 구길 것처럼 책자를 고쳐 잡으며 기상호를 불렀다.

 

“상호야.”

“넵!”

“좋은 말로 할 때, 네가 하나하나 천천히 설명해라.”

“그, 그럴까요? 제가 뱀파이어, 그러니까 책자에 적힌 대로 흡혈박쥐인간인데…….”

“야, 야! 여기서 말고 새끼야!”

“으으읍!”

 

기상호는 당장이라도 남의 대화에 집중 기울이는 사람 생각보다 없다. (사실 이건 기상호의 착각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건 누가 듣더라도 그뭔씹 오타쿠 내용이라 흥미도 안 가질 거라는 항변을 하고 싶었지만, 코까지 덮은 손 덕분에 제 목숨부터 구해야 했다. 얼마나 세게 누른 것인지 거의 잡아 뜯듯이 손을 치운 기상호가 헉헉대며 그럼 집으로 가자고 힘겹게 말했다.

 

“처음부터 집에서 이야기하면 됐을 거 아니냐.”

“그게… 중대 발표는 역시 카페라 생각해서?”

 

쯧, 식은 눈으로 혀를 크게 찬 성준수가 책자를 챙기고 먼저 일어나 자리에서 벗어났다. 분명 이 새끼를 어떡하지 했으나, 가까스로 참은 것임이 분명했기에 기상호는 차마 붙잡지도 못하고 남은 자리를 정리한 후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까지 둘 사이에서 어떠한 이야기도 오가지 않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무튼 어떠한 사고도 없이 무사히 입성하자 자연스레 거실 소파엔 성준수가 그 밑으론 기상호가 무릎을 꿇은 채로 그를 올려봤다. 이거 꽤 폐하께 죄를 낱낱이 고하는 죄인이 된 것 같은데. 똑같진 않아도 비슷한 감상을 가지긴 한 모양인지 성준수는 무릎을 꿇은 기상호를 잡아끌어 소파 위로 올렸다. 비록 어딘가 어색하게 소파 위에서 서로 마주하고 앉은 자세가 되었지만, 다시 내려가면 벌어질 일을 감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지라 기상호는 침을 몇 번 삼키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말할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말할 수 있는 거 전부.”

“넵! 알겠습니다!”

“이럴 때 대답은 또 존나 빨라? …애초에 네가 그거인 건 어떻게 증명할 건데.”

“엄, 그야 이빨…?”

 

그러곤 기상호는 제 입술을 죽 잡아당겼다. 다른 인간들처럼 고르게 난 치아는 충치 한 번 생긴 적 없는지 깨끗했다. 그동안 혀나 손가락으로 만져보기만 했지 눈으로 자세히 본 적은 없던 성준수는 제 눈엔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치아를 보곤 뭐 어쩌라고 하는 시선으로 기상호를 꼬나봤다.

 

“아이, 송곳니를 보셔야죠. 송곳니.”

 

자세히 봐야 보여요. 즉, 자세히 안 보면 눈치챌 수 없는 요소라는 뜻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송곳니가 날카롭나? 하는 찰나 송곳니 가운데로 가느다란 바늘 같은 무언가가 나오자 성준수는 얼굴을 기상호 입에 박을 것처럼 가까이했다.

그러니까, 이게 그 기상호가 말하는 증거라는 셈이지. 분명 인간에게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세히 관찰하지 않은 이상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소엔 잘 감춘다는 것일 테고. 다만 이게 뭐랄까….

 

“이건 아무리 봐도 그거보다는 그냥 모기 아니냐?”

“햄… 종족 차별적 발언이에요, 그거.”

“아니, 씹. 날카로운 송곳니도 아니고 송곳니에서 이상한 게 튀어나오는데 어쩌라고. 니는 니 스스로 살면서 한 번도 그렇게 생각 안 했어?”

“하, 하긴 했는데.”

“그러면서 뭘.”

 

그제야 입에 박은 고개를 떼어낸 성준수가 들고 온 책자를 다시 펼쳤다. 드디어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읽어주실 모양이구나! 희망으로 가득 차 한계까지 벌어졌던 입을 잘 가다듬은 기상호에게 내려진 건 또 다른 말이었다.

 

“뭐해, 더 설명 안 하고.”

“어? 책자로 읽으시려는 거 아니었어요?”

“너는 수업 들을 때 책만 읽으면 다 이해하는 새끼였냐?”

“아니요.”

“그럼 묻는 거에 대답 늦을 때마다 어떻게 될지 잘 생각하고 답해라.”

“어떤 학생도 그런 협박은 하지 않을 거예요, 햄…….”

“네가 내 선생이냐? 내 애인이지.”

그런 말로 이 기상호를 설레게 하실 생각이었다면 큰 경기도 오산입니다. 넵. 너무 좋네요. 물론, 성준수는 그를 노리고 한 대답이 아니었겠지만 당사자가 그렇게 들었다니 된 거 아닐까. 얌전히 수긍한 채 다가올 질문들을 기다린 기상호에게 잠시간의 침묵 후 드디어 첫 질문이 도착했다.

 

“일단, 여기. 한국형 뱀파이어라는 건 정확히 무슨 말이냐?”

“그건…, 아. 한국에 맞춰 진화한 뱀파이어라는 뜻일걸요? 미디어에 나오는 뱀파이어를 보면 대개 십자가에 약하거나, 마늘을 먹지 못하잖아요.”

“모르는데.”

“넵, 그러시겠죠…”

“뭐 임마?”

“……. 아무튼, 곳곳에 십자가가 걸린 교회들과 마늘을 안 넣은 음식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 특성에 맞춰 뱀파이어도 그에 면역을 가지게 된 채로 진화하게 되었다는 뜻이랄까…요.”

 

음, 하긴 이 새끼랑 같이 어제저녁으로 마늘보쌈을 조진 걸 떠올린 성준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기상호가 말한 뱀파이어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그런 제약이 걸린 거 아닌가? 책자에서는 친절하게 현재의 뱀파이어는 인간에게 어떠한 해도 가하지 못합니다. 라고 적혀있긴 하다만 의아한 건 의아한 거였다.

 

“미디어에 나오는 건 다 구라냐 그럼?”

“아이, 그건 아니죠! 외국에 나가면 여전히 마늘을 못 먹는 뱀파이어뿐이라데요. 애초에 외국은 알레르기에 대한 대응이 철저하니까 알레르기라 하믄 다 된다고요.”

“너희들도 그러지 왜.”

“엄…… 한국은… 알레르기라 해도 몰래 넣거나, 넣어야지 더 맛있다면서 먹으면 낫는다는 말로 억지로 먹이거나 해서? 거기에 맞춰서 진화한 셈이죠.”

“결론은 한국이 쓰레기다?”

“그것보단 덕분에 어디서든 적응할 수 있는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해주시길….”

“별 지랄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답하는 모양새에 인상을 찌푸린 성준수가 다시 책자를 넘겼다. 책자는 국가에서 보급한 것을 증명하듯 하주 빽빽하고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책에 따르면 분명 다른 이종족도 존재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언급되지 않는 걸 보면 자기들끼리의 무리가 있는 듯했다. 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알아서 잘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생각보다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던지라 계약서를 따로 빼놓고 책을 덮은 성준수가 기상호를 바라봤다.

 

“애초에 이 공급 계약서라는 거. 구태여 음식으로 가공되지 않은 혈액을 찾는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해선 아주 길게 말해야 하는 사연이…….”

“시간 존나 많으니까 째깍째깍 대답이나 해라.”

“저희에게 널린 게 시간이긴 하죠? 음, 그러니까 준수햄 말대로 한국의 뱀파이어들은 혈액이 포함된 음식들만으로도 어떻게든 살 수 있긴 해요. 애초에 정식적인 혈액을 찾는 일도 세 달에 한 번씩이면 충분하고요. 다만, 음식의 형태로 가공된 혈액과 그렇지 않은 혈액은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라서요.”

 

그 말에 성준수의 미끈한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 새끼 사실 혈액이라는 게 마약으로 작용하는 거 아냐? 점점 말하면서 얼굴 풀어지는 폼이 꼭 몇 달간 풀떼기 식단 하다가 오랜만에 삼겹살집 가서 고기에 손댄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말 그대로 존나 의심간다는 낯을 지우지 못한 성준수가 책자를 탁탁 치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비록 기상호는 설명하는 것에 빠져 그러한 기색조차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늘과 땅 정도라고.”

“넵, 인간들도 컨디션 안 좋을 때 병원을 찾아가 수액을 맞거나 하잖아요? 뱀파이어들은 필수적으로 수액을 맞아줘야 하는 인간에 가깝다 보면 된다 이거죠. 결국 신선한 피를 먹으며 살아온 종족이기 때문에 근본까지는 진화를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데요.”

“그렇다면 굳이 가축의 피를 공급해서 마시는 게 아니라 인간의 혈액을 고집하는 이유는 뭔데?”

“준수햄은 가끔 이상한 부분에서 똑똑하시다니까….”

“이 새끼가 아까부터 따박따박.”

“아, 아니! 말할게요. 저희가 딱히 인간의 혈액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공급되는 혈액 중에서 고르는 것에 가깝단 말이에요. 개들도 헌혈하시는 거 아시죠? 근데 인간만큼 헌혈량이 많진 않아서… 안 그래도 공급이 적은 곳에 가서 비비는 것보단 인간이 낫다 이거죠.”

 

그제야 모든 오해가 풀린 (오해는 성준수 혼자만의 몫이었으며, 기상호는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성준수가 이해했다는 듯 드리우던 기색을 지워냈다. 그리곤 아주 쿨하게 탁자 위에서 나뒹굴고 있던 펜을 집어 계약서의 사인란에 제 사인을 집어넣었다. 기상호의 사인은 이미 되어있던 터라 오직 성준수의 몫만이 남았던 계약서가 드디어 완성된 것이었다. 물 흐르듯 체결된 계약에 오히려 기상호가 엥? 소리를 내며 성준수에게서 계약서를 가져왔다.

 

“더 물어볼 거 없으세요??”

“없어.”

“아이, 그래도 이래 막 싸인하면 나중에 어카실려고?”

“상호야.”

“넵.”

“이게 구라든, 사실이든 문제가 생기면 내가 좆되겠냐… 아니면.”

 

네가 좆되겠냐. 뒷말은 들리지 않았으나 기상호의 귀에는 아주 선명하게 새겨졌다. 음, 지금이라도 계약을 물러달라고 해야 할까. 이 종이를 씹어 삼키면 전부 없던 일이 될 텐데…. 하지만 준수햄이라면 내 배를 갈라서 계약서를 꺼내고 내를 죽이겠지? 내 스스로 자충수를 뒀다 아이가 이거. 속마음을 줄줄 불 생각도 없었으니 그 대신이라고 계약서를 쥐던 손이 덜덜덜 떨렸다.

 

“큼…, 야.”

“……….”

“야, 씹. 기상호!”

“예…… 예??”

 

성준수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기상호가 제 앞으로 내민 팔뚝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핏줄이 아주 선명한 게 이게 바로 간호사 선생님들이 선호하는 팔이라는 걸까? 왜 팔을 내밀었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채 멀뚱한 시선을 이어가던 기상호가 고개를 돌려 성준수를 바라봤다.

 

“팔이… 참 아름다우십니다?”

“돌았냐?”

“아니, 갑자기 팔 들이대신 건 준수햄이면서…….”

 

표정에 한가득 억울함을 담은 기상호가 추울까 싶어 걷어진 소매를 슬슬 내려줬다. 아무리 집이 따뜻하다 해도 이리 내밀고 있으면 안 된다 아입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몸이 재산인 법이라고요. 준수햄도 참, 이리 보여주는 건 다른 곳에서도 충분한디.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꼼꼼하게 옷까지 정리해 준 기상호가 금세 뿌듯해진 낯을 보였다. 방금 벌어진 아득한 상황에 성준수는 잠시 이마를 부여잡았다가 다시 소매를 걷어 맨살을 보여주며 말했다.

 

“야, 너 뱀파이어라며.”

“네…, 근데요?”

“근데요는 무슨 얼어 죽을 근데요. 우리가 지금 쓴 게 뭐야.”

“계약서를 썼죠? 저희가?”

 

근데 이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죠? 하기도 전에 빠르게 행동과 말이 덧붙여졌다. 제 입술 앞까지 온 팔뚝을 보며 기상호가 웅얼댔다.

 

“너 혈액 공급 필요하다며.”

“네.”

“마셔야지.”

“네?”

 

아, 아하……? 그제야 모든 걸 파악한 기상호가 파하학 웃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멀쩡히 허공에 팔뚝을 내민 성준수만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 채 말이다. 만약 이곳이 여전히 카페였다면 누군가의 썰이 되어 일파만파 퍼졌을 행태였다. 집이었기에 성준수의 체면이 지켜졌다. 기상호의 생명이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뭐하냐, 너.”

 

꽉 쥔 주먹과 함께 소매가 걷어진 팔뚝에 핏줄이 아주 끝내주게 섰다. 이대로 내려치면 아마 이종족의 인구수 하나가 줄어드는 형태로 이뤄지겠지? 주먹이 쥐어지는 순간부터 최대한 웃음을 참은 기상호는 (그럼에도 피식거리며 새어 나오는 웃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쓰러졌던 제 몸을 일으켜 양 무릎 위에 제 손들을 올렸다.

 

“햄… 큽, 음, 아이. 그게 아이라. 오해! 오해하실 수 있죠. 근데 저희가 막 그렇게 남의 팔이나 신체를 그거하진 않, 크흠, 않거든요?”

“뭐?”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소독도 되지 않은 행위를 하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비위생적이라 입을 댈 생각도 안 든다 이거냐?”

 

아직 가을인데 시선에서 시베리아 겨울바람이 느껴진다, 이거. 이제 완전히 죄인이 된 기상호가 사약을 받은 사람처럼 떨며 온몸으로 부정을 표했다. 이 햄은 현대 의학 아래에서 살아온 사람이면서 가끔 이렇게 돌직구로 군단 말이지. 그 점이 좋은 거긴 하지만… 아니, 이게 아니라. 금세 딴 길로 갈 뻔한 생각을 가까스로 다잡은 기상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확, 확대해석 금지!”

“그럼 뭔데.”

“저희가 그래도 나름 정부 기관 아래에서 관리되는 존재들 아입니까. 다 연동되어 있단 말입죠.”

 

암암, 그렇고 말고요. 여 계약서에서도 지정된 장소라 나와 있다 안 합니까. 계악서의 내용을 아주 세세하게 뜯어볼 생각도 없던 성준수가 그제야 자신이 사인한 계약서로 시선을 돌렸다. 살, 살았다……. 마지막 숨결처럼 흘러나온 본심이 들렸나 싶어 힐끔 성준수를 바라보던 기상호가 아무런 낌새를 느끼지 못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디 가서 하라는 건데.”

 

드디어 일단락된 상황에 기상호가 다시 성준수의 소매를 내려준다. 물론,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당장에 목숨을 구한 것만으로도 평생 운은 다 썼다 싶다. 어느새 성준수 손에 계약서를 쥐여준 기상호는 책자를 파라락 넘기며 한 페이지를 보여줬다.

 

“그야 당연히…….”

 

헌혈의 집이죠.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책자 안 「뱀파이어도 안심! 우리 모두에게 공유하는 헌혈의 집 명단」 문구가 성준수의 눈과 귀에 선명히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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