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에서 9까지

01. 혈중흡혈농도 下

준상

- 뱀파이어 AU

- 전편 https://penxle.com/acorn/1463146073


이종족(異種族). 기본적으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種族들을 뜻하나, 실상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에도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는 존재들을 일컫는다. 흔히들 전설 혹은 소설과 같은 가상의 매체 속에서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로 인간들 사이에서 지금도 함께 살아간다.

그들의 잘살아가느냐 묻는다면……….

그거야, 뭐.

개개인의 차이는 있지 않을까.

血中吸血濃度

혈 중 흡 혈 농 도

헌혈의 집. 그곳이 어디던가. 대한적십자사의 혈액관리본부에서 운영하는 헌혈 장소로 헌혈 가능 대상자라면 누구든지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그곳에서 모인 혈액은 수혈과 같이 급히 타인의 혈액을 받아야 할 때 사용되며…….

잠깐,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성준수는 저도 모르게 떠올리던 지식을 지운 채 어이가 사라진 낯으로 기상호를 봤다. 분명 헌혈의 집이라 말했는가? 책자의 적힌 문구도 선명하게 그거들이 진실임을 보여주고 있었다만, 이로써 더욱 현실성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들키면 어쩌려고 남들 다 헌혈하는 곳에서 뱀파이어에게 줄 목적의 피를 채혈하는 건데. 실상 감추고 싶은 생각 아무도 없는 거 아니냐, 이건. 그리고 그런 생각이 얼굴에서 전부 드러난 것인지 기상호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래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다 숨기라는 말이 있죠.”

“존나 지랄은….”

“햄? 그런 반응은 저도 쬠 상처를 받는데도요.”

“아닌 거 다 아니까 개구라 작작 쳐라.”

“넵.”

무슨 말을 못 한다며 꿍얼거리는 기상호를 내버려둔 채 성준수는 나름대로 납득한 모양인지 펼쳐진 책자를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기상호와 같은 상태인 사람이(성준수는 이들을 이종족이 아닌 사람의 분류 중 하나로 두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는지 이들의 혈액을 공급해 주는 헌혈의 집 또한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나마 서울이 많았고, 그다음은 부산… 뭐야, 김해엔 왜 이렇게 많이 있어. 서울과 부산 다음이 김해이라니 어딘가 이상한 분포에 읽어 내려가던 시선을 멈추고 기상호를 바라봤다.

“야.”

“예?”

“너 고향이 어디랬냐.”

“저요? 김해…이긴 한데.”

“그래?”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

본인의 궁금증만 해결한 채 기상호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은 성준수가 다시금 책자를 읽어내렸다. 그저 처량하게 남은 기상호만이 마치 세상에 왕따라도 당하는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저기요? 준수햄? 몇 번의 부름 역시 무자비하게 씹힌 기상호가 입만 삐죽 나온 채 자기는 완전 뒷전이라며 중얼거리다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당장 성준수가 고개를 돌려 그 꼬라지를 봤다면 누구 때문에 지금 이 지랄 떨고 있는데 존나 가지가지 한다고 한 소리 들을 모양새였다. 기상호에겐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점차 변해가는 성준수의 얼굴에 스스로 위기감을 느낀 그가 제 상태를 주섬주섬 복구시켰다.

“…피 하나 주는데 무슨 절차가 왜 이렇게 복잡해.”

욕만 나오지 않았을 뿐 말 하나하나에 욕이 한가득 느껴졌다. 하지만, 준수햄… 국가에서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않나요. 절차가 복잡하지 않으면 그걸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디요. 애초에 준수햄처럼 단순한 사람은 세상에 잘 없다니까요. 전할 수 없는 말만 가득 쌓아두던 기상호가 그래도 전입신고를 할 때마다 거의 건강검진을 마치는 자신보다는 낫다며 성준수를 위로했다. 다만, 그 위로가 씨알도 먹히지 않아 시바거, 네가 뭐라고 몸 하나 옮기는데 그런 식으로 구는데. 하는 말만 들었지만 말이다. 아니, 난 그냥 준수햄을 위로하려고. 오늘치 억울함 백 퍼센트 채운 기상호가 햄은 제 맘도 모른다며 찡찡댔다.

“아니, 아오… 하. 넌 억울하지도 않냐? 네가 그거인 거 빼고 나랑 다를 게 뭐가 있어.”

“…햄 세간의 사람들은 그걸 큰 차이라고 해요. 애초에 조금 모난 구석만 있어도 별세계 사람 취급하는 곳에서 우째요. 왼손잡이보다 오른손잡이가 더 많다고 왼손으로 그린 걸 낭만으로 치는 이 세상에서요.”

가끔 보면 기상호 이 새끼는 말하는 거에 동조가 아니라 부득불 오류를 찾아내 다르다며 싸움을 거는 것 같았다. 아니 시발, 애인이 이런 말 하면 감동받기는커녕 이 세상이 쓰레기인걸 어케요…. 하는 자식을 두고 뭐 하자는 건지. 전투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성준수가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책자를 거의 내던지다시피 했다. 탁자에 딱히 무언갈 막을 장치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책자는 자유를 얻은 것처럼 탁자 위를 가로질러 바닥을 향해 날랐다.

툭.

기상호는 순간 그 소리가 제 목 떨어지는 소리인가 싶었다. 실시간으로 채워지는 서늘한 공기에 제 목이 제자리에 있나 한 번 더듬은 그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튼, 일단 계약서에 사인까지 한 마당에 무를 수도 없었다. (사본으로 저장해둔 건 아니라 사실 찢으면 바로 무를 수 있긴 했다.) 이 좆같은 책자 그만 보고 싶으니 니가 잘 요약해서 설명하라는 성준수의 말에 정신을 제대로 차린 기상호가 랩 하듯이 줄줄줄 내뱉었다.

“일단 계약서를 구청에 제출하고 며칠 기다리면 햄이 그, 제 혈액 제공자임을 증명하는 문서가 집으로 하나 날아올 거예요. 예전엔 서류 사본들고 헌혈의 집에 가서 관계 증명을 한 후 제출하고 일주일 정도 기다려야 완전히 승인이 되었는데, 요즘은 그 정도까진 아니고예. 가려는 헌혈의 집에 연락하셔서 흡혈박쥐인간 혈액 제공 건으로 연락했다고 하믄 거서 알아서 잘해주실 거예요.”

“야야.”

“예?”

“구청에 가야 하는 거면 평일에 말했어야지.”

“저희가 한낱 직장인에 불과하다는 걸 잊으심 안 돼요, 햄.”

“시바거, 이럴 때 연차 쓰지 언제 연차 쓰는데.”

“엄… 저랑 데이트하실 때?”

“새끼… 지랄은.”

“아앙, 좋으면서.”

지금 붉어진 귓가를 하고선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다구요? 뭐, 그렇게 말하면서도 귓가는 붉히는 게 좋아서 저 역시도 여태까지 이에 대해 말한 적이 없기도 했다. 현란한 말솜씨로 (실상 이건 오직 성준수에게만 통하는 같잖은 스킬에 가까웠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낸 기상호가 월요일 되면 바로 반차 내고 구청에 갔다가 저녁 데이트하고 오자며 성준수를 꼬셨다.

그리고 기상호 기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성준수는 아주 잘 꼬셔졌다.

비록 월요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밀린 업무에 치여 반차의 반도 꺼내지 못한 채 화요일이 되어서야 끝내주는 반차와 데이트를 즐겼지만 말이다.

*

“야야, 일어나라.”

“으에… 준, 준수햄? 오늘 쉬는 날 아니었었나요…,”

거의 끝말은 다시 잠에 빠질 것처럼 발음이 다 샌 모양새였지만, 듣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성준수는 기상호를 다시 재울 생각이 없었기에 그가 둘둘 싸매던 이불을 휙 거둔 채 말을 이어갔다. 기상호의 애처로운 햄… 추버요…. 같은 소리는 성준수 귓가에 닿지도 않았다.

“야, 씹. 니가 오늘 가서 채혈하고 오면 된다고 했잖아. 같이 안 가?”

“아아…?”

“그러니까 지랄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서 준비해라.”

“아… 아니, 준수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일으켜 이불 끝자락조차 보이지 않게 된 침대에 앉은 기상호가 허탈하다는 듯이 성준수를 봤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성준수의 눈썹이 씰룩 올라갔다.

“왜.”

“제가 깜빡하고 말씀을 안 드렸나 본데… 하암…. 저희는 헌혈의 집 못 가요.”

“왜?”

“그야… 제가 가면 거기가 더는 채혈 장소가 아니라 그저 한낱 뷔페일 텐데. 가기엔 좀 그렇지? 않을까요?”

“…….”

“그럼…, 준수햄이 이해한 것으로 알고 저는 다시 죽이는 잠을….”

커어어… 소리와 함께 그대로 다시 누워버린 기상호를 두고 성준수는 가까스로 사자후를 참을 수 있었다. 저 새끼는 인생에 도움이 된 적 없다며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떠올린 그는 바닥으로 떨군 이불을 다시 가져와 기상호 위로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뭐,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니 저 혼자 다녀오면 될 터. 사실 성준수도 야근하고 돌아온 자식을 다시 깨워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헌혈의 집에 전화하던 날 기상호가 말하길 따로 성준수가 챙길 건 없댔다. 이미 유선상으로 이야기를 다 마쳤으니, 따지면 예약 환자가 찾아가는 거나 다름없다는 말에 그게 그거랑 같냐고 말했었으나, 아무튼 기상호는 평소에 헌혈하듯이 하고 오면 된다고 했다. 물론, 추가적으로 헌혈은 전혈 헌혈로 이루어질 예정이며 혹시라도 헌혈 전 검사에 빠꾸먹으면 다음 일정을 예약하고 돌아오라 그랬으니, 성준수가 할 일은 아주 건강한 몸으로 헌혈의 집을 찾는 것밖엔 없었다. 그러나 성준수는 현재 누구보다 긴장한 얼굴로 차를 몰고 헌혈의 집으로 향했다. 만약 기상호가 봤다면 저희 혹시 상견례라도 가나요? 할 법한 상태였다.

어떻게든 도착한 헌혈의 집은 언제나 봐왔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긴 한데. 오히려 너무 평범한 모습에 어젯밤부터 가지던 긴장이 우습게 되어버린 성준수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냥 여기서 자기가 뭘 하든 남들 눈에는 그냥 헌혈하는 사람으로 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실상 따지면 별반 다를 게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데스크 앞에서 이름을 대자 직원은 익숙한 일을 하는 것처럼 아~ 오늘 예약해 주신 성준수 님 맞으실까요? 하고 담당자분을 불러올 예정이니 문진표 작성 후에 문진실로 잠시 대기해달라며 물 흐르듯이 안내했다. 순간적으로 이게 맞나? 했으나, 문진표를 작성하고 문진실로 들어가자마자 담당자의 기상호 님 혈액제공자분이시죠? 하는 말에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보여주며 그렇다는 답을 하자 담당자는 저희 헌혈의 집에서 혈액제공자분이 찾아오시는 건 거의 10년 만이네요, 라는 말로 성준수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비록, 그 노력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아무튼, 헌혈할 때처럼 대면 문진까지 마친 그는 기상호에게 차마 묻지 못했던 것을 물었다.

“저….”

“아! 혹시 궁금하신 게 더 있으실까요?”

“그, 헌혈한 피는 어떻게 전달되는 겁니까?”

“아아~ 저희 쪽에 혈액 배송을 담당하시는 분이 따로 있어서 그분이 일주일 내로 자택에 배달해 드릴 예정이랍니다. 제공자님께서도 알고 있듯이 아무래도 대한민국에 극소수의 분들만 계시기 때문에 다양한 사항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아주—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형태로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분명 믿음과 신뢰가 가득한 말인데,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 듯한 기분은 뭘까. 어딘가 찝찝함을 한구석에 둔 채 성준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대기하셨다가 안내에 맞춰서 헌혈하시면 된다는 말을 끝으로 성준수를 내보낸 담당자는 무언가를 더 체크하며 문진실에서 사라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는 성준수는 그저 오래도록 그 모습을 담을 뿐이었다.

담당자의 말처럼 이후의 일은 여느 때와 비슷했다. 제 혈액이 어디로 제공되는지조차 몰랐던 과거와 달리 아주 확실한 경로를 지닌 것이었으나, 당장 실감이 나진 않았다. 담당자의 말처럼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형태로 배달된 혈액을 본 후에야 실감할 것인지…. 성준수는 그렇게 헌혈을 마치고 회복 시간까지 가진 후에야 헌혈의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어딘가 영 찝찝했지만, 할 일은 전부 마쳤으니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되리라. 성준수는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서 며칠 후.

오늘 온대요, 햄! 단어 하나하나에서 기쁨이 느껴지는 기상호의 메신저를 받고 나서야 성준수는 제 혈액이 다시 자신의 집으로 오는 형태에 대해 다시 고찰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기상호가 위생적 이유로 그렇게 운영된다는 말을 분명 하긴 했지만, 바로 제공자를 옆에 두고 다른 장소에서 뽑은 혈액을 다시 집으로 보내 마시는 형태를 뭐라 정의해야 한단 말인가. …생쇼?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한 성준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옆에 있던 동료가 그 모습을 보고 빠르게 타자를 놀리는 것 따윈 보이지도 않았다.

고심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 맞춰 점차 마우스 소리가 커졌으나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기상호가 이 꼴을 봤다면 햄이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꽤 진귀하네요. 같은 소리나 지껄였겠지. 그런 생각을 이어가며 별로 소중하지도 않은 회사 시간을 열심히 소비해 나갔다. 그렇게 퇴근하기 직전 옆에서 성대리 오랜만에 밥이나 먹을까? 하는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살벌한 눈빛 한 번으로 단박에 제압당했다. 어어, 그래. 개인의 자유시간은 중요하지… 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 과장은 뒤로한 채 지하에 내려가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 저 오늘 야근이여ㅠㅠ 9시 전까진 갈게요! ] 18:31

18:38 [ 그래. }

……

18:42 [ 조심히 와. }

띠롱,하고 울린 메시지에는 그런 말이 담겼다. 갑작스레 잔업이 잡힌 건지 뺄 틈도 없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기상호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해줄까 했던 성준수는 대충 아무거나 때우자는 결론을 내린 채 시간을 두고 답장했다. 그리곤 아마도 현관 앞에 놓여 있을 택배를 떠올렸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는 또 왜 이렇게 느리게 내려오는 것인지 그가 조금만 더 젊었으면 다 무시하고 계단으로 31층을 올라 계속해서 쌓여가는 기묘함을 해결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체력을 아주 잘 알고 있기에 발만 까닥이며 숫자판만을 노려봤다. 2…. 1…. B1…. 드디어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탄 성준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한마디를 더 보냈다.

18:56 [ 그럼 택배는 내가 뜯어놓을게. }

{ 넵! ]

{ (OK사인을 보내는 강아지 이모티콘) ] 18:56

바로 연락을 본 모양인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모티콘을 보내고 사라진 이의 프로필 사진을 노려봤다. 하다못해 그냥 어디에 놓아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믿고 맡긴다는 듯이 씨익 쪼개는 강아지 이모티콘이 기상호랑 존나 똑같았다. 이 새끼는 지랑 똑같은 거 쓰네. 과거에 자신이 니 같다며 보내줬던 이모티콘임을 까맣게 잊은 성준수가 이상한 것에 화풀이를 시전했다.

— 31층입니다.

기계음이 청량하게 울렸다. 오늘따라 집이 엘리베이터에서 먼 것조차도 마음에 안 들었다. 저 멀리 (실상 그렇게 멀지도 않다.) 현관 앞에 놓인 하얀 아이스박스가 보인다. …설마 저기 안에 담긴 게 내 혈액이라는 건 아니겠지. 주위를 둘러봤으나 그 외의 물건은 없다는 것처럼 황량하기만 했다. 아니겠지. 국가적 조직에서 감춘다고 보내는 꼴이 이럴 리가. 아니어야만 했다. 그게 아니면 존나 어이가 털려서 당장 기상호에게 전화를 걸지도 몰랐으니까. 성준수는 걸음을 재차 놀려 아이스박스 앞으로 갔다.

[대한식품]

주문자: 기**님.

떡하니 적힌 상호명과 아래의 주문자로 적힌 제 연인의 성씨에 성준수는 시발, 이거 미친 거 아냐? 같은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기상호의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계속 생각났다.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지. 미쳤냐고. 말 그대로 들킬 염려는 없겠으나 한순간에 인권이 사라진 것은 느꼈다. 하, 꿈인가. 헌혈한 이후로 부족해진 수면이 결국엔 이런 환상을 만들어내나 싶었다. 성준수는 몇 번 제 눈을 비볐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하얗게 빛나는 아이스박스 그 안에 그의 혈액이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돌았네…….”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한마디 욕으로 줄여 받아들인 성준수가 아이스박스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뭐 반송시킬 수도 없고… 심지어 그 기상호는 기대까지 하는 마당에 뭘 하겠나. 온도 유지를 위해 아이스팩도 두둑하게 넣어진 건지 무게가 꽤 나갔다. 막상 보면 풀릴 기묘함이 풀리지도 않은 채 유지되었다. 만약 뱀파이어를 애인으로 두고 있는 이들이 모인 사이트가 있다면 당장 찾아가고 싶었다. 나만, 나만 이게 이상한가? 시바거, 이걸 어디에다가 물을 수도 없고.

점심도 대충 먹어 완전히 굶주린 배도 잊어버린 성준수가 아이스박스에서 칭칭 싸매진 테이프를 뜯어냈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자 보이는 주위를 잔뜩 감싼 아이스팩들 그리고 그 안의… 순두부 패키징과 비슷한 형태의 혈액팩이 당당하게 드러났다. 아주 친절하게 혈액형까지 적혀 있었다.

B형.

…잠깐, 기상호 혈액형이 뭐였지? 애초에 뱀파이어에게 혈액형이라는 게 존재하던가? 당장에 책자를 꺼내 읽어내리면 알 수 있을 내용이었으나, 그러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리저리 엉킨 머릿속으로 그저 되니까 이렇게 배송까지 보냈겠거니 했을 뿐.

같이 온 종이에는 [당일 섭취 권장. 냉장 보관 필수. 최대 유효 기간: 채혈 후 35일]라는 문구가 적혀있어서 더욱 어이를 잃어버렸다. 물론, 냉장 보관 필수라는 말에 그것을 들어 냉장고에 넣긴 했지만. 그렇게 식욕과 어이 모두 잃어버린 성준수가 식탁 의자에 앉아서 사색에 잠겼다. 이리저리 튀는 생각은 하나로 뭉쳐지질 못했다. 감정은 당장 기상호를 털어서 미쳤냐고 물으라 하고 있지만, 이성은 이미 계약에 사인까지 다 해놓고 뭘 더 따지냐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당황스러움은 성준수 생애 처음이나 다름없었기에 무엇이 되든 기상호를 기다려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감정과 이성의 적절한 합의였다.

그런데.

얘는 대체 왜 이 사실을 나에게 알렸지?

나랑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한낱 애인에게 이런 중대한 비밀을.

전구에 빛이 들어오듯 무언가 켜졌다. 이거 설마….

청혼이었나?

기상호가 알았다면 예???? 하고 펄쩍 뛰었을 생각이었다.

….

띠리릭—

“다녀왔… 으아아아아악!!!”

기상호가 예고했던 것처럼 시침이 9시로 완전히 향하기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온 기상호가 불 하나 켜지지 않은 채 음산하게 식탁을 지키고 있는 성준수를 보고 기겁하며 벽에 달라붙었다.

“뭐, 뭐에요, 햄?”

“왔냐.”

“방금 덕분에 다른 곳으로 돌아갈 뻔했는데도요.”

“앉아라.”

“옙.”

저 햄은 또 왜 저런대. 슬그머니 불을 켜고 의자에 앉은 기상호가 식탁 위에 금방 꺼내어진 듯한 혈액팩을 발견했다. 그런 형태에 이상함을 느끼긴커녕 드디어 왔구나! 하는 눈빛으로 혈액팩을 들었다가 다시금 성준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왜.”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예정이신지……?”

“니 새끼가 다 처먹을 때까지.”

“아아… 그러시구나….”

음,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이다. 빠르게 포기한 기상호가 벌떡 일어나 정수기로 받은 물로 혈액팩 그대로 씻어 오더니 입을 열어 혈액팩에….

“잠깐.”

“으에?”

“뭐하냐.”

“혈액 섭취…?”

“왜 그딴 식으로 마시는 건데.”

“그야….”

이게 가장 본능적인 모습이니까요. 혈액을 눈앞에 두고 좀 돌아버린 모양인지 기상호는 그 말만 남긴 채 혈액팩에 제 이를 박았다. 따지면 송곳니에서 튀어나온 바늘 같은 존재가 혈액팩에 박혔다고 하는 게 맞았다. 마시는 건지 마는 건지 내는 소리도 없었다. 그저 소리 소문 없이 무서운 기세로 혈액팩의 담긴 혈액이 사라질 뿐. 성준수는 제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모든 생각을 잊었다. 저건 숨 쉬는 것도 잊은 모양인지 원샷으로 넘기는 솜씨가 한두 번은 아닌 듯했다. 물론, 기상호에겐 익숙한 일이었겠지. 자신은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까지 다다르자 어딘가 부아가 치밀어오르려는 찰나.

“캬하… 오랜만이라 죽이네요, 이거.”

산뜻한 낯으로 몇 년 가지고 있던 피로를 모조리 없애버린 듯한 모습에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기상호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준수햄에게 말하기 전까지 선짓국으로 해결하느라 너무 힘들었다는 등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저를 만나고 누군가의 혈액을 마신 일도 없을 듯했다. 이런 걸로 모든 게 무마가 되면 안 되는데. 사랑이 또 뭐라고. 성준수는 이해를 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 네가 좋으면 됐다.

하며.

*

준수햄이 어딘가 이상하다. 햄 앞에서 혈액팩 먹방을 한 이후로 보이는 행동이 어딘가 기묘해졌다. 역시 애인이 혈액팩을 무슨 아아 때리는 것처럼 마셔서 실망했나? 아니면 그때까지 뱀파이어에 대해 실감도 못 했다가 내 마시는 모습 보고 정이라도 떨어졌나? 하지만, 그건 아닐 텐데. 분명 먹방을 끝내고 마주한 성준수의 눈빛은 오직 사랑만으로 가득했으므로, 기상호는 제 생각이 너무 과하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영 무언가를 숨기는 것처럼 구는 성준수 덕분에 기상호도 오랜만에 맞이한 상쾌한 신체를 더 즐기지도 못했다. 평일에 묻기엔 둘 다 바쁜 몸이니 주말 되면 바로 물어봐야지 했던 게 목요일 밤. 금요일에 눈뜨자마자 성준수에게 저녁에 레스토랑이나 가자며 저를 꼬셨고, 밤사이에 모든 걸 홀랑 잊은 기상호는 좋다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렇게 달콤한 금요일 정시 퇴근과 함께 이어진 레스토랑 데이트는 정말 끝내줬다. 음식도 맛있었고, 홀 안에 흐르는 노래도 좋고, 준수햄 얼굴이야 뭐. 더 말할 게 있기나 했을까. 다른 사람이 봤다면 누가 보더라도 이후에 무슨 이벤트가 있을 장소에 두 사람이었으나, 기상호는 아무것도 몰랐다.

성준수가 입을 열기 전까지.

“…야.”

“네?”

레어로 구워 육즙이 그대로 흐르는 스테이크를 삼킨 기상호가 맹하게 대답하며 성준수를 봤다. 그리고 성준수는 답지 않게 긴장한 모습으로 나이프를 내려놓더니 제 겉옷 주머니를 뒤적였다. 기상호는 그 순간에서도 뭐지? 하는 생각만 가득 차 있었다. 성준수가 케이스를 꺼내는 순간에서도 말이다.

“큼, …그러니까 그때 그게 니 나름 청혼 아니냐”

그거…?

아, 설마.

…이거 아니었다고 하면 존나 욕먹겠지.

“아무튼 나도 그거에 너무 놀라서 저기했던 것 같아서.”

아니, 저기했다는 게 뭔데요.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기상호에게 내민 선명한 반지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커플링은 애초에 제 왼쪽 약지에 잘 끼워져 있으니, 누가 보더라도 너무 화려해서 꼭 결혼식에서만 끼워야 할 것 같은 비주얼의 반지는 분명 받는데 한 달 이상 걸렸을 것처럼 생겼다. 어엄… 그때의 자신이 보인 진실이라는 게 물론, 자기네들 사이에선 하나의 증표로 작용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막 잘 나가고 있는 사람을 발목 잡고 싶진 않았는데. 애초에 이 정도까지 생각을 안 하기도 했거니와… 그렇지만? 이거… 꽤….

나쁘진 않을지도?

“저희 그러면…,”

원래 끼고 있던 반지를 쏙 뺀 채 슬그머니 뻗는 손이 꼭 반지를 끼워달라는 모양새와 비슷했다. 모든 걸 파악하고, 알아차린 기상호가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은 채 입꼬리를 씩 올렸다.

“결혼식은 언제가 좋으세요?”

이 기상호 주어진 기회는 놓치지 않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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