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상] Baby Oh, Baby!
준수상호 전연령용
Baby Oh, Baby!
(해석 : 애새끼 오, 애새끼!)
01. 기상호의 경우
상호는 나이 지긋한 교수가 대강의실의 스크린을 펼쳐놓고 한참 늘어놓는 설명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성과 사회라며. 건전한 이성 교제나, 상호 만족할 수 있는 성관계에 대해 알려주는 과목 아니었어? 뭔가 김이 샜다. OT에서 꿀 강의를 알려준다며 주름잡던 선배들을 믿은 내가 바보다. 자책하면서 따분하게 가방에 딱 한 자루 넣고 다니던 삼색 펜을 돌렸다.
“성별을 구분하는 것 외에, 형질도 있지요. 요즘은 형질을 묻는 게 아주 무례한 발언인 걸 알고 있으니, 내 학생들의 형질을 묻진 않을게요.”
딴에는 농담인지 코를 찡긋거리며 발언하는 노교수의 말에 여러 학생들이 어색한 웃음을 터트린다. 그래, 이 학점의 노예들아. 남자, 여자 외에 나뉘어있는 형질. 서로를 홀리기 위해 매혹적인 향의 페로몬을 뿌린다고 했던가. 상호는 목을 좀 젖혀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묵은 먼지와 건축된 지 오랜 건물에서 나는 특유의 묵직한 향
그 외에 느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 기상호는, 베타니까.
특기생으로 진학하되, 강의에 몇 번 참여하고 나서야 알았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베타가 있다는걸. 농구부에 가입했던 중학생 시절 이후로 기상호의 세상은 줄곧 알파와 알파 그리고 어쩌다 베타로 구성되었으니까. 엘리트 체육이라는 말을 쉽게 풀면 엘리트만 할 수 있는 체육이라고 표현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베타 중에선 어쩌면 우수했을지도.
그러나 재학 시절 느낀 알파의 천장은 엄청난 것이다. 선배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좆같은 냄새가 나네. 할 때에 상호는 느리게 눈을 끔벅이며, 무슨 냄새가 나요? 땀 냄새? 여기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눈치 없이 말을 꺼냈다가 옆구리를 툭, 치는 희찬의 눈치에 입을 가로로 길게 닫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마, 니는 좋겠다. 안 겪어도 돼가.”
상호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헤집는 선배들의 투박한 어투와 달리, 마음은 온통 어두컴컴했다. 다들 공감하는 것에 저는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누군가 선을 그어놓은 것 같았다. 단순 체격과 실력의 격차로 느끼는 천장이 아닌, 형질로 만들어진 경계. 그 무형의 경계선을 노려보다가, 이미 2차 형질 검사도 끝난 마당에 무어가 중요한 일인가 싶어 최선을 다해 공을 튕길 뿐이었다.
“기상호, 우리 밥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서울 말씨 곱다 곱다 하더니 진짜 곱네. 상호가 고교 시절보다 더 큰 세상으로 나오고 나서 느낀 감정은 이것이다. 살갑고 부드러운 어조를 쓰는 말투들. 저처럼 사투리를 고치지 못한 동기들도 종종 있지만, 보통은 저렇게 낯간지럽게 말을 쓴다. 음성부터가 다정한 말씨를 귀에 담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귀가 간지러워져 손끝으로 귓불을 꾹꾹 누르다가, 어. 내도 간다. 하는 말이 나온다.
상호가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알던, 서울 말씨를 쓰던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외려 상호보다 더 거친 단어들을 마구잡이로 입에서 뱉어냈다. 새싹이 움트고 푸르른 잎사귀들이 저마다 신입생들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캠퍼스를 느리게 걸으며 그를 생각한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땐 그 멀건 얼굴에 상호마저도 입을 헤 벌렸다. 우예 사람이 저래 곱노. 고등학교에 오면 다 저보다 훨씬 멀대 같고, 우락부락한 사람들만 있을 줄 알았다. 체육관에서 희찬과 둘이 서서 선배들을 마주 보고 인사를 건넬 때 마주친 얼굴이 곱다 외로 표현할 말이 없었다.
“3학년. 성준수.”
농구는 실내 체육임을 강조하는 허연 낯에 꽉 찬 이목구비가 섬세한 선을 그리는 게 너무 신기해서 상호는 한참을 쳐다보았었다.
“…, 봐.”
“예?”
“뭘 꼬나보냐고. 씹새야.”
서울에서 왔다 카지 않았나? 첫인상부터 강렬했던 그는 말끝마다 빙시, 뭔 놈, 새끼 같은 단어들을 엮어 문장으로 구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욕을 뱉었다. 성격이 궂다는 말 외엔 할 말이 없었는데, 다행히 팀 운이 좋았다. 분위기 메이커로 팀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는 희찬을 필두로 다정한 3학년 선배 역할을 해주는 재유도 있었고, 서로 조금만 조심해도 부딪히지 않는 팀.
그리고 모난 준수 햄의 성격을 눌러주는 감독님과 코치님까지. 처음엔 이름도 안 불러주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는 욕을 줄이고 팀에 융화되었던 순간들도 소소하게 기억난다. 그럼에도 졸업하던 날까지 그는 언어습관을 고치지 못한 채-, 떠나버렸지만. 드문드문하던 팀 단톡방은 지난해 연락이 끊겼다. 괜찮아, 대학리그에서 보면 되니까.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진학에 매진하여 올라온 학교는 낯설고, 커다란 세상을 보여주었다. 여기도 베타, 저기도 베타.
대다수의 알파와 소수의 베타만 존재하던 세상에서 대부분이 베타인 세상으로 상호는 끌어 올려졌다.
“내 잔이 굴러가는 게, 넘 웃기지 않냐. 히히.”
말을 뱉고 난 뒤, 둔한 감각과 정신 머리를 깨우칠 생각으로 혀끝을 살짝 물어보았다. 둔한 감각이, 당신은 이미 지나친 음주의 경계를 지나다 못해, 꽐라입니다. 라고 알려준다. 뭐가 웃겨? 턱을 괸 채 반쯤 졸던 동기가 묻기에,
“지 혼자 굴러가잖아.”
받은 잔은 이가 빠진 잔이었다. 서버를 불러 잔을 바꾸려던 동기의 손목을 쥐고 이가 빠진 잔을 제가 쥐어 그 안에 맑은 소주를 채워 털어 넣었다. 굳이 그런 걸 왜 써. 다칠 수도 있는데. 이 모난 것도 제 용도를 증명 해보겠다고 세상에 나왔는데, 저마저 안 써주면 누가 써주겠는가 싶어서 썼다.
믿어주던 감독님도, 코트 위에 공간을 내어주던 팀원들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뿌연 머릿속으로 지난해가 생각이 난다. 지난 3년간의 증명에도 형질 앞에서 고민하던 대입 담당자들, 스카우터. 희찬에게 넌지시 대학 입학까지만 어떻게 하고, 농구를 그만둘까 물었었는데. 열등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베타로서 가치를 증명하여 프로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도 점점 많아지는 추세인데 어째서. 욱하는 마음도 들었고, 슬픈 마음도 들었다.
희찬에게 말하고도 어이없어서 스스로 웃다가, 텅 빈 체육관에서 혼자 슈팅을 하는데 길게 진동이 울렸다. 스팸인가, 곧 끊기겠지? 했는데 계속 울리길래 부모님일까 싶어 전화를 받았다.
‘빙시야. 디질래?’
큰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들은 지 한참 된 목소리라 상호가 눈을 굴려, 어…. 준수햄? 하고 묻자, 미쳤냐? 아니다. 그냥 관둬라. 열정도 없는 새끼한테 씨발,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자책하듯이 길어진 문장에 상호의 눈이 커졌다가, 이게 그 나름의 위로라는 걸 알고 눈물이 툭 터졌다.
‘햄, 너무 힘들어요.’
-뭐가 새끼야.
‘지가 베타라서요….’
-…, 씨발.
별 걸뱅이 같은 새끼들이 같잖은 이유를 대면서 애새끼한테 비아냥 거린다며 준수가 저보다 더 화를 낸다. 이 햄은 진짜 부산까지 와가 배워간 게 욕 밖에 없노. 편 들어주는 말에 턱 선을 타던 눈물이 후드득 비처럼 쏟아졌다.
-질질 짜지마.
“네.”
-형질 그거 좆도 아니야. 약 없으면 경기도 못 뛰는 병신 같은 새끼들이 어딜….
“햄….”
-땅굴 그만 파고, 시발. 우승기나 쟁여놔 등신아. 니가 농구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성준수의 말에 이상하게 응어리지던 열등한 마음이 풀어진다.
근데 햄, 저 초닥교 과학대회 3관왕인디요.
눈치 없다고 혼날까 싶어 이 말은 목젖까지만 치고 꾹 삼켰다.
“잠이 오냐, 새끼야?”
하얀 손이 상호의 눈을 덮는다. 서늘한 밤공기를 닮은 체온이 뜨거운 눈가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게 아쉬워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자, 이마에 딱. 별이 튀었다.
“준…, 수 햄?”
“얼마나 처먹었어.”
“아닙니다, 선배님. 저희 지금 소주 딱 두병 마셨습니다.”
“지들 주량도 가늠 못하는 새끼들이 술을 그렇게 처먹어? 이 새끼 뻗어있는 거 안 보여? 니 눈알은 옹잇구녕이냐?”
“죄송합니다!”
마, 준수 햄 혓바닥 살아있네. 풀어진 혀로 아무렇게나 중얼거리며 낄낄 거리다 하얀 손을 툭, 건드려보았다. 미쳤냐? 성준수가 눈으로 물었고, 기상호는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햄이다, 햄. 어디 더 해보라는 듯 준수의 눈썹 한쪽이 올라간다. 저딴 표정을 해도 잘생겨가 큰일이 고마.
“햄, 어디 갔다 이제 왔어요. 지는 햄 보고 싶었다 아입니까.”
테이블에 이마를 비비며 상호가 투정 부리자, 허. 미친놈. 하던 준수가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갑작스럽게 일어나게 되자, 시야가 핑 돈다. 이가 빠진 소주잔은 데굴데굴 굴러 준수가 앉은 자리께로 가서 그 앞에 반쯤 차있던 잔을 톡 친다.
“야 이 꽐라 새끼야. 호칭 똑바로 안 하냐?”
살벌한 표정을 한 수려한 얼굴이 시야에 꽉 찬 순간 여기가 코트 위였던가 생각이 들었다가, 느리게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동기들끼리만 테이블에 앉혀줘서 까먹었다. 이건 개총이었다. 안면 근육이 풀어져 헤실 거리던 얼굴이 억지로 바르게 자리 잡는 것도, 늘어지려던 상체에 힘을 꼿꼿하게 주어 허리를 바짝 편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만큼 몰리는 선배들의 시선이 많았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야. 이 새끼 집에 보내.”
“걔 기숙사요.”
“아-, 좆같네.”
선배들과 친해져 팀웍이 돈독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감독과 코치까지 한 수 접어주는 개총이라, 상호는 같은 기숙사동을 쓰는 인간들의 배려 없이는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처지였다. 간당간당 하긴 해도 통금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애꿎은 휴대폰 액정만 꾹꾹 누르면서 연신 시간을 확인하는데, 옆자리에 앉은 준수가 이가 빠진 잔을 바로 세워 소주를 따르더니 쭉 마신다.
이 햄은 어째 목울대도 잘생겼노.
“술에 미친 새끼들….”
방금 햄도 한잔 말았잖아요. 말하면 혼날 것 같아서 꾹 참는다.
“이 꼬라지일 것 같아서 나왔더니, 씨발. 진짜 이 꼬라지로 자빠져있네.”
“오, 성준수? 너네 학교 후배라더니 챙겨주러 나왔냐?”
“꺼져.”
준수의 동기인 듯, 자리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이들이 무릎을 반쯤 편 채로 엉거주춤 인사한다. 인사하려고 다리에 힘을 주는데 준수가 어깨를 눌러 앉혔다. 되도 않는 짓 하지 말고 쳐 앉아있으라는 듯 어깨 위에 놓인 손에, 얌전히 궁둥이를 붙였다.
“괜찮냐? 약은 먹었고?”
“니 알 바임?”
새끼, 걱정을 해줘도. 혀를 쯧 차곤 쿨하게 인사한 선배가 자리를 비우자 준수가 눈을 질끈 감고 빡침을 참더니 의자를 뒤로 밀었다.
“일어나.”
“예?”
“뭘 얼빵하게 예? 이러고 있어? 얘 내가 데려간다.”
후배님 챙겨주는 선배님 오-. 하는 야유에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든 준수가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거칠게 일으킨다.
이렇게 챙겨주는 선배님이면, 후배님은 그냥 기숙사 가면 안 될까요? ( ᴗ_ᴗ̩̩ )
아기 상호는 아늑한 기숙사 침대를 생각하며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선배님, 저 기숙사 가도 되는데요….”
“깝치지 말고 따라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저보다 앞에 학번의 과잠을 입은 준수의 뒤를 바지런히 쫓는데, 걷는 거리가 한참이다. 굴다리를 지났다가 또 말도 안 되는 언덕을 오를 때, 이 형이 지금 만취 상태의 저를 훈련 시키나 생각이 들어 상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준수를 노려보았다.
“선배, 지금 우리 어디 가는데요?”
“닥치고 걍 와.”
설명도 귀찮다는 듯 말하는데, 꾸짖을 갈! 하는 소리처럼 들려 다시 깨갱거리며 뒤를 쫓았다. 학교 부지는 보통 산을 깎아 만든다더니, 더럽게 넓은 캠퍼스를 이 늦은 시간에 가로지를 수 없어 정문 앞 번화가에서 후문까지 걸어왔다는 건 후문을 지나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택시를 타면 금방일 거리를 일부러 걷게 만든 건가? 햄은 지인짜 악마다…. 울렁이는 속도 가라앉고 졸음이 밀려오며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햄, 햄 왜 대면식 땐 안 왔어요….”
비교적 깨끗한 빌라 건물 앞에 선 상호가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씨발. 내가 길바닥에서 이런 신파를 찍고 싶지가 않거든? 와라? 동기들의 사근사근한 서울 말씨가 그리워질 정도로 살벌한 목소리에 상호는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내는 햄만 기다렸는데….”
“니가 나 쫓아왔냐? 농구하려고 왔지.”
성질을 누를 때마다 폐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듯한 한숨과 함께 비소를 건 준수의 얼굴을 보며, 상호가 느리게 거리를 좁혔다. 오라는 말에 얌전히 따른 행동에도 준수의 인상이 펴지질 않는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늘어져있는 준수의 소맷부리 끝만 겨우 잡고 입을 우물거리다가 다시 열었다.
“내 오라는 학교 많았는데, 햄이랑 농구하고 싶어가….”
“니 오라는 더 좋은 학교 가지 그랬냐?”
“내가 어떻게 햄 앞을 막아요….”
“그럴 자신은 있고?”
준수의 말을 믿고 연습에 연습을 얹고, 끝없이 경기를 뛰는 동안 쌓인 실적 덕에 상호를 찾는 학교는 골라갈 정도는 됐다. 애초에 같은 학년에 있는 이들이 모두 각자 재능이 뛰어나 저들이 원하는 학교로 가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질이 좆도 아니라던 사람이 있는 학교가 오고 싶었다. 그 말이 마지막을 버티게 해준 말이라.
“이번만 재워준다. 다음에 술 취해서 이 근처 배회하면 뒤진다.”
“네에….”
괜히 토 달면 문전 박대 당할 것 같아 얌전히 그 뒤를 따르자, 기본 옵션을 다 갖춘 집이 펼쳐졌다. 귀찮아서라도 어질러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작은 거실과, 침대가 놓여있는 방. 먼저 앞서 걷던 준수가 주방으로 들어가 약을 털어 넣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햄 술 먹고 약 먹으면…!”
“이 약은 그래도 돼.”
“그런 약이 어딨어요!”
“있어. 억제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무감한 눈으로 물을 마셔 모조리 삼켜버린 준수를 보다가 아까의 상황이 생각났다. ‘괜찮아? 약은 챙겨 먹었고?’ 준수 햄 동기라고 했던가. 오전에 들었던 강의도 생각이 난다. 번식 활동을 하기 위한 것으로 알파에겐 러트가, 오메가에겐 히트가 있어 발정한다고 했나. 이 기간에 짝이 없는 이들의 무분별한 성교를 막기 위해 해당 형질을 가진 이들에겐 휴가도 내어준다고 했지. 그럼 햄은…, 지금 러트인가?
“햄, 러트에요?”
“어디서 또 좆같은 걸 들었어.”
“성과 사회에서….”
준수도 알고 있던 강의인지 내내 찌푸린 표정이다가, 아. 하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을 하지 않은 채로 욕실의 문을 열고 상호를 밀어 넣었다.
“니한테 술 냄새 나니까 씻어 새끼야.”
“옷은요?”
“개새끼가 입을 옷은 없는데.”
“햄….”
팔을 교차해 엑스 자로 몸을 가리자 준수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표정, 씨발.”
휙 뒤를 돈 준수가 개켜 놓았던 티셔츠와 반바지를 던진다. 헤헤, 감사해요. 상호가 웃었다. 러트에 대해서 무지한 척했지만, 모를 리가 있나. 고등학교 때도 종종 훈련에 불참하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차별방지법이 도입되고 난 후부터 학교에서도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사이클이라 표현하지 않고 월에 3일-4일 정도는 학교에서 비울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베타에게도 마찬가지라, 사이좋은 베타 가족들은 그 핑계로 여행을 가기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알파에게 뒤쳐질까 두려워 매일 훈련을 하던 상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상호 빼고 모두가 알파인 곳에서 3-4일 정도의 훈련 불참은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 놀랍지도 않다. 햄들 말론 뇌가 좆에 달려있는 것처럼 본능만 추구하게 된다고 했는데, 준수 햄은 어떻게 저렇게 의연할까. 준수 햄이라 가능한 걸까? 뜨순 물을 맞으면서 제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될 생각을 하던 것이, 준수가 화장실 문을 쾅 차면서 끝이 났다. 나, 나가요 햄! 소심한 말은 덤이었다.
“아까 니가 한 말대로 그거니까. 거실에서 자.”
길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기 좋은 날씨에 얇은 겉 이불 하나만 툭 던져준 준수가 말했다. 이 정도만 해도 존나 좋은 대우인 줄 알아야 되는데, 저짝에 큰 침대가 있는 걸 아니 설움이 북받쳤다. 쪼맨한 지상고 숙소도 아니고, 원정 경기 갈 때마다 자던 숙박업소도 아닌 멀쩡한 집인데. 심지어 얼핏 보니 침대도 크던데.
“햄…, 낼 저 체력 테스트 있는디.”
“그럼 씨발, 집주인인 내가 거실에서 자리?”
“같이 자믄 되잖어요….”
하 이 씨발, 뭣도 모르는 베타 새끼가…. 중얼거리는 말에 뼈가 있다. 그러니까 지금 동침하면 준수 주니어가 깨어난단 소리일까? 허구한날_애새끼라고_했던_후배에게_거기에_본능이_달린_선배가.avi 라도 보게 되는 걸까? 상호는 여전히 술에 취해 반쯤 회전을 포기한 머리로 요상한 생각을 했다.
“너 눈깔을 왜 그렇게 떠.”
“햄, 저 레귤러로 뛰고 싶은데요….”
“니가?”
“후보 선수라도 되고 싶은디, 그랄라믄 체력 테스트를 잘 봐야 하고….”
어디 계속 나불거려 보라는 듯 준수의 눈썹이 한쪽만 치우쳤다. 준수의 티셔츠, 준수의 반바지까지 입은 상호가 손끝을 쪼물거렸다.
“제가 햄 꺼 쪼까 빼주면, 햄도 저랑 같이 잘 수 있지 않을까요?”
하, 이 좆만한 새끼가.
성준수가 한숨을 터트렸다.
02. 성준수의 경우
매일 유니폼이 바뀌다 결국 고교 시절 유니폼으로 바뀌는 꿈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갉아먹던 시절에 녀석은 추운 겨울을 밀어내는 봄바람과 함께 나타났었다. 점차 좁아지는 천장을 보며 한껏 예민을 떨어대면 혼자 움츠러들어 눈치를 보다가도, 또 그새 뒤를 받치거나 앞서 나가며 받치던 녀석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선 끝에 걸렸다.
몸도 채 여물지 않은 중학교를 갓 졸업한 녀석이 이미 피지컬만으로는 성인이나 다름없는 녀석들을 막아냈다. 솔직한 말로 기특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당시에 저는 알파 새끼들을 모조리 약 쟁이라고 낮잡아 표현했는데, 입시를 결정짓는 주요 대회 때마다 러트 때문에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부작용은 불면. 쌓이기만 하는 정욕을 고작 약과 수음으로 해결하려 했으니, 아무리 체력을 소진해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건 비단 성준수만의 문제는 아니고, 뭐 농구부 에이스라고 불리는 놈들은 더러 겪는 증상이었지만.
참가할 수 있는 대회는 줄어들고, 집 나간 슛감은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감을 찾을 때까지 농구공을 던지면 된다. 말은 쉬웠다. 하루하루 초조함은 불어나는데, 러트는 꼬박꼬박 찾아와 3-4일씩 훈련을 나가지 못하니 예민이 극에 달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준수가 공을 잡거나 말거나, 베타인 기상호는 꾸준히 연습에 나오고 느리게 발전을 이뤄나갔다. 그래서 처음 느낀 감정은 형질에 대한 열등감. 학교에 고작 여섯뿐인 선수 중에 베타인 건 기상호 밖에 없었지만, 대회를 나가면 베타 녀석들은 차고 넘쳤고 또 대회를 거듭할수록 날고 기었다.
러트가 올 때마다 좆같은 악몽은 꾸준히 발전했다. 실력엔 발전이 없는데.
‘햄,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코치가 연습 경기에 상호를 투입했던 날, 패배감에 젖어 거친 숨을 내쉬던 준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날의 경기를 말아먹은 건 명백히 성준수였는데, 그딴 소리를 지껄였다. 지가 점수를 못 내서 졌다는 식의 말에 수그러진 고개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정수리를 꾹 눌렀다.
“그 말 할 시간에, 연습해. 씨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기억이라곤 온통 노이즈 낀 게 전부다. 감독이 바뀌고, 그의 전술이, 선수를 운용하는 능력이 먹힐 때마다 팀은 일취월장했다. 비로소 공의 무게를 깨닫고, 기상호의 존재가 눈에 걸렸다. 녀석이 만약 제 앞을 막았더라면, 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베타. 만년 벤치에나 짜져있을 것 같던 녀석이 어느새 옆을, 뒤를, 앞을 차지했다. 제 영역에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들이밀고, 저를 끌어안고.
존나 이상한 기상호.
03. 다시 기상호의 경우
이상하게 준수 앞에선 거짓말을 못하겠다. 속을 훤히 꿰뚫어보는 듯한 예리한 시선 때문일 수도, 잘생긴 얼굴 때문일 수도 있다. 변명 거리야 삼만 개도 댈 수 있었다.
전날 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준수가 저를 맞이했으며, 씻고 기숙사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체력 테스트를 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둔 것도 모두 준수가 저를 챙긴 덕이다. 준수 햄, 햄, 저 이번에도 벤치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신나서 스트레칭 중인 준수에게 다가가자, 준수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야 직속 후배인 새끼가, 고작 벤치에 만족할 거야?”
1학년이 레귤러로 뛰기 힘든 걸 알면서 준수가 그런 말을 한다. 만족할 리가 없잖아요…, 햄. 축 늘어져서 말하자 또 으휴, 씨발. 성질을 한 번 내더니 공을 던져준다. 연습해. 넵. 냉정한 준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성준수 선배랑 친해?’
‘같은 학교 나왔는디.’
‘그래서 친해?’
동기가 옆으로 와서 넌지시 묻는다. 3학년쯤 겨우 레귤러에 들어 준수를 대회에서조차 겪어보지 못한 녀석이지만, 상호 저와는 구면인 사이였다. 눈을 데구루루 굴리던 상호가 공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내가 좋아하지.’
동경과 존경, 그 너머에 있을 감정까지 애매하게 담아 모호한 대답을.
형질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 저를 끄집어낸 별것도 아닌 형질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안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그전부터 시작된 짝사랑이라 할지라도. 동경 어드매의 것으로 이해했는지, 그래 저 선배가 대단하긴 하더라. 프로에서도 상위 지명될 수 있다는 말 들었어. 라는 이야기를 한다. 아직 3학년인데도 그런 평가를 듣다니, 역시 준수 햄은 존나 대단한 사람이구나. 상호는 뭐 그 정도의 생각만 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 우리 햄인데.
햄이 연습을 안 나왔다. 어? 하고 코치에게 묻자, 뭐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상호가 베타라는 걸 기억해 냈는지, 성준수 컨디션 구려서 당분간 연습 못 나온다. 하고 뭉뚱그려 대답했다. 벤치에 남기 위해서 눈치밥만 몇 년을 먹었던 상호는 그 말이 곧 준수의 러트라는 걸 알았다. 열에 들뜬 시선으로 저를 내려다보던 준수가 생각이 났다.
“야, 농구공에 광이 날 정도로 닦아놔라.”
공 닦고 체육관 정리하는 건 1학년의 몫이라, 연습이 끝나고 난 뒤 각자 역할을 정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제 일을 하던 중 존나게 공에 광을 내던 상호가 물음을 던졌다.
“러트 그거, 많이 힘든가?”
“엥. 야 존나 힘들지. 씨발.”
프로 가면 왜 빨리 결혼하는 줄 알아? 성적에 존나 지장 오니까. 안정적으로 경기에서 성적 내려면 당연히 짝이 있어야 돼. 우리 선배들 중에서도 짝 있는 사람들 많을걸? 일장 설명을 늘어놓는 알파 동기가 말했다. 그 말에 여럿이 동의한다. 진짜 죽어라 수음하는데, 그걸로 해결이 안 된다고.
“그럼 짝 없는 사람들은 어케 하노.”
“뭘 어떻게 해. 약 먹고 겁나 자고, 깨면 걍 존나 하는 거지.”
나 저번 러트 때 죽을 뻔. 낄낄 거리는 말을 들으면서 준수를 생각했다. 햄도 그걸할려나. 그러기엔 좁은 숙소에 부대껴 사는 동안에도 신음 소리 한 번을 들은 적이 없다. 준수의 러트는 뭔가 존버로 시작해서 존버로 끝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러트와 맞물려 시험 기간을 앞두고 전체 휴가가 주어진 상황이었다.
“야 성준수네 집 아는 사람.”
대답하는 놈이 없다.
“…, 없어? 프린트물 전해주라던데. 씨발, 학과에 물어봐야 되나.”
“제, 제가 갈게요!”
반질하게 공을 닦아내던 상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후문에 있는 준수의 집은 찾아가기 쉬운 편이다. 그 주소를 모르니, 당연히 못 가는 거지만. 프린트물을 쥔 채 탐탁지 않게 상호를 쳐다보던 준수의 동기가 파일철을 내밀었다. 그래, 같은 알파 새끼가 가봐야 기싸움만 나지. 니가 가라. 서로의 형질을 감춘다곤 하지만 농구부에서 베타는 당연히 눈에 띄기 마련이다. 몇 달 만에 연습을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상호를 보고 베타임을 간파한 선배가 덤덤한 얼굴로 내민 파일을 상호가 받았다.
공용 현관을 지나 준수가 사는 집의 현관문에 도달한 상호가 소심하게 벨을 눌렀다. 햄 깨웠다고 지랄하면 어쩌지? 햄은 그럴 사람인데. 근데 많이 아픈가. 아프면 거시기…, 가 아픈 건가. 허접한 생각이 떠나질 못하는데 안쪽에선 기척이 없다. 다시 한번 벨을 누르고, 대답이 없는 현관문을 두드렸다.
“햄, 저 상혼데요….”
상호 스스로가 생각해도 졸라 소심한 말이었다. 기별 없이 찾아온 까닭에 우편함에 프린트물을 넣어두어야 할까 고민까지 하는 찰나, 철컥. 잠금이 해제되며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와 함께 좁은 빛이 새어 나왔다. 빛을 등진 준수의 얼굴이 잘 뻗은 코를 기점으로 음영을 만든다.
“뭐야.”
“슨배가 이거 전해주라 해가….”
“그걸 널 시켜? 그런다고 해?”
이마를 짚는 준수의 광대가 붉다. 저 햄이 홍조 띄우는 건 또 첨 보는데, 와 저것도 잘생긴 기고. 저만큼 멀거니 큰 남자가 열에 들뜬 게 뭐 대수라고 입안에 침이 고인다.
“하…, 상호야. 내가 오늘 상태가 존나 별로거든?”
저가 엉거주춤 손에 들고 있던 파일철을 확 빼앗은 준수가 당장이라도 현관을 닫을 것처럼 말을 뱉는다. 상호는 저도 모르게 닫히려는 현관문을 잡았다. 어…, 내일은 간만에 휴가고. 준수 햄은 아프다. 이 낯선 땅에서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동고동락했던 선배에 대한 측은한 마음 그리고, 입안에 고인 침만큼 마음에 고인 흑심으로 상호는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햄 아파요? 내가 간호해줄까요?”
씨발 새끼가. 멱살을 쥐며 준수가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다.
언젠가 겪었던 상황인 것 같은데. 기시감을 느끼는 건 기상호가 예지몽이 있는 탓은 아니고. 그냥 저번 상황을 리와인드 한 것도 같은 상횡이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침대 가에 앉은 성준수의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은 상호가 떨리는 눈을 들어 저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준수의 시선과 마주했다. 확실히 햄은 저렇게 사람을 내려다보는 게 어울린다. 알파, 답다고 해야 하나. 옛날엔 알파가 군림하는 위치에 주로 섰다던데. 형질의 경계가 모호해진 지금도 그런 건 뭐 유전자를 통해 남나? 사는 데에 하등 도움 안 될, 지금의 무드에 조금도 기여하지 않을 생각을 하며 떨리는 손으로 느슨한 허리춤을 잡았다.
“씨발, 그게 관상용인 줄 알아?”
“아뇨, 아뇨 햄…, 존나…, 햄 존나 상남자네요.”
“하….”
아무래도 준수는 현타가 온 것 같았다. 열에 들떠 번들거리기까지 하는 안광에 시선을 맞추면서 상호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었다. 지금의 상황이 어쩐지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꿈에서도 꾼 적 없는 상황이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
“흐으, 흐….”
“너, 씨발.”
풀린 시선으로 여전히 집요한 시선을 마주한 채 호흡을 갈구하는데, 젖어도 예쁜 입술이 또 험한 말을 내뱉는다. 젖어 번들 거리는 입술에서 시선을 들어 올려, 잘 빚은 콧방울을 지나 선이 예쁜 눈매 아래 검은 시선을 마주했다.
“다른 새끼한테도 이럼 뒤져.”
“햄 있잖아요….”
“빙시야, 분위기 깨지마. 질문하지 말라고.”
이마를 콩 친 준수가 상호와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시선을 내려준다. 심장에서 울리는 빠른 속도의 박동을 기껍게 느끼며 입을 열었다.
“첫 키스는 원래 이렇게 강렬한 거예요?”
준수가 그 말에 눈을 질끈 감고 씹어뱉듯 내뱉었다.
씨발, 나도 처음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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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수 햄, 근데 이거 나중에 굳잖아요.”
“후배님 그게 걱정돼?”
그럼 안 되겄냐. 대거리질 하려다가 상호가 괜히 또 말이 씨가 될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고1 이후의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찬과 태성이 만담 듀오처럼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마, 상호야. 넌 될 수 있으면 말을 하지 마라.’
‘와.’
‘듣는 사람 빡치니까.’
이 무드에서 할 생각은 아닌데, 한 마디라도 아끼면 딱밤이 줄었다. 그래서 얄미운 소리는 코트 위에서만 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당연히 밑에 후배들 생각한 것도 없잖아 있었고. 아무튼 다시 돌아와 입을 다무는데, 준수가 정말 너무나도 어여쁘게 웃었다.
04. 다시 성준수의 경우
눈이 풀려 흐린 시선조차 불쌍하게 생긴 측은한 중생의 눈물점에 연신 입술을 내리찍고 밑에 둔 베개와 등을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천천히 어루만져주자, 잠시간 정신을 잃었던 망할 애새끼가 정신을 차렸다. 잠시간 충격으로 혼절이라도 했는지 몽롱한 시선이 현실감을 찾지 않고 천장을 부유한다. 그 잠시의 시간이 뺏기는 것에도 골이 나서 부르튼 아랫입술을 앙, 깨물자 초점이 돌아오며 시선이 맞춰진다.
“준수 햄, 나 살아있어요?”
“어.”
디진 거 같은데…, 차에 치인 기분인데. 일방적으로 원망의 시선을 받았다.
-
드디어, 가졌다.
감상은 짧고 만족은 길었다. 첫 키스라고 했으니 모든 것이 다 처음이겠지. 앞으로 마지막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열한 만족감이 속을 가득 채운다. 알파 사이에 몇 안 되는 소수의 베타. 그중에서도 유별난 성격을 가진, 눈 밑의 점이 시선을 잡아끌고 애교로 곰살 맞게 굴어 무장 해제를 만들어 버리는 새끼.
제가 덮어 씌운 페로몬에 흠뻑 젖어있는 것도 모르고 풀어진 눈으로 다정한 시선을 받아낸 상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입술을 뻐끔거리는 것이 키스를 조르는 것 같아 턱을 쥔 채로 입술을 내리누르자, 수줍은 혀가 새어 나와 입술을 가르고 섞이길 종용한다.
하, 씨발.
존나 예쁜 내새끼.
페로몬 한 점 없는 녀석의 체취. 땀으로 인해 습기 밴 피부 위로 입술을 내리찍다가 입을 벌려 이를 세웠다. 처음인 녀석에게 노팅을 할 생각은 없지만, 저열한 영역 표시는 하고 싶었다.
이건, 내거야.
이를 박아 넣자 놀란 상호가 고개를 젖힌다. 그 시선을 고스란히 마주하며, 준수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혀 느른한 웃음을 지었다.
“응. 진짜 끝. 자자.”
땀이며 눈물 따위를 모두 훔치고 눈물점에 입술을 내리누르자, 겨우 손을 들어 준수의 손을 잡은 상호가 풀어진 눈을 감으면서 웅얼거렸다.
“햄이, 이래 맨날 다정했으면 좋겠어요….”
05. 애먼 동기의 경우
“야, 파스 뭐냐?”
“잠을 설쳐가….”
뒷덜미에 파스를 꾹 누른 기상호가 시선을 피하며 손안에서 공을 굴렸다. 위치가 미묘하긴 했는데 잠을 잘못 자서 담이 걸렸다면 또 저 위치만큼 파스 붙이기 좋은 위치도 없다. 연습 경기 얼마 안 남았는데 컨디션 관리 좀 하지. 걱정하는 동기의 말을 들은 상호가 목뒤를 누르며 고맙다 답했다.
“지금 잡담하냐? 뭐 좆같은 실력이 자고 일어나면 일취월장하기라도 하나 봐?”
“죄삼다!”
얼차려를 준 것도 아니고 고작 비아냥거릴 뿐인데 빠릿하게 차렷 자세를 하고 3학년 성준수에게 답했다. 저 인간은 성질이 더럽고, 무엇보다 무서웠다.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 건 아마 1학년 중엔 소심하지만 곰살맞은 기상호가 전부였다. 가까이 다가온 기색도 몰랐는데, 아무튼 놀라서 후다닥 몸을 물리자 준수가 상호의 목덜미에 손을 올리고 근육을 꾹꾹 누른다.
“아프면 쳐 쉬어. 훈련에 방해되지 말고.”
“이익…!”
따지려는 걸 참는 듯 입술을 즈려 물던 상호가 고개를 팩 돌려버린다. 준수의 눈썹 한쪽이 치솟는 걸 보다가 중재를 하려 들자, 준수가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인간이! 후배의 머리를 쓰다듬는! 광경을 보다니!
공을 드리블하던 준수가 그 자리에서 점프하여 손목 스냅으로 가볍게 슛을 쏘았다. 포물선을 그리며 림 안으로 가볍게 들어가 버리는 공을 보고 작게 감탄사를 내었다. 삼 점은 무슨, 사점도 되겠다. 뭔 공이 저렇게 홀린 듯 들어가냐. 저와 마찬가지로 상호도 멍하니 포물선을 그리고 통통 소리를 내며 구르는 공을 바라본다.
갑자기 후배들 기 죽이는 거냐고 단체로 야유 아닌 야유를 하는데, 아랑곳 않고 미간을 좁힌 채 짜증스레 불만을 누그러뜨린 준수가 상호의 가까이에 있던 저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미안.”
“이게 다 햄이!”
“담에 존나 잘 알려줄게.”
뭘 알려준다는 거지? 방금 그 오지는 삼 점 슛? 이래서 대한민국은 학연, 지연, 혈연이라고 하는 구나. 연고지 선배가 슈터는 아닌지라 속으로 한탄을 하는데 여전히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상호가 준수를 쳐다본다. 근데 아무래도 기상호는 무르고 만만한 구석이 있으니, 누구도 안타까워할 리 없었다. 냉혈한 성준수는 오죽하겠는가.
“씨발. 뭘 꼴아봐.”
“죄삼다!”
성준수와는 조금의 연고도 없어 이번에 처음 엮인 저만 줘터졌다.
…,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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