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처음 알았다
*정채봉 시인님의 "그때 처음 알았다" 라는 시에서 인용하여 쓴 글 입니다. 글을 읽기전에 시를 읽으셔도 좋고 후에 읽으셔도 좋습니다.
*완결기념... 외전 마지막화가 너무 심금을 울려서 펜슬 테스트겸 포스타입에 발행했었던 글을 다시 올려봅니다.
기상호는 자신의 고등학교 선배인 성준수를 좋아하게 됐다. 기상호의 이상형은 친절한 사람인데 성준수를 좋아한다니 누가 들으면 퍽 웃길지도 몰랐지만 착한 짓을 100번 해도 나쁜 짓을 1번 하면 욕을 먹고, 나쁜 짓을 100번 해도 착한 짓을 1번 하면 칭찬을 받는다고 예전에는 자신에게 짜증을 내던 사람이 쌍용기 대회가 끝날 때쯤에는 친절해져서 더 마음이 움직인 걸지도 몰랐다.
"야. 뭘 멍 때리고 있어."
"아이에요. 그냥 조금... 이제 훈련도 잘 안 나오실 테니깐 기분이 이상해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공이나 던져. 너는 내가 졸업하기 전까지 무조건 슛 있게 만든다."
"제 의사는요..?"
"있겠냐? 던져봐."
기상호는 잉잉 우는소리를 내며 림을 향해 공을 던졌다.
"하여튼 자세랑 각도는 좋은데 특이해..."
"햄. 저희 쉬었다 하면 안 돼요?"
"그래 좀 쉬자."
성준수를 물을 마시더니 땀을 닦고 체육관 벽에 앉아서 잠시 눈을 감았다. 창문에서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와 눈이 부셨는지 살짝 찡그린 얼굴조차 감탄을 내뱉게 될 외모였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머리색보다 더 진한 참숯 같은 검은 눈동자.
'눈이 마주쳤..?'
"뭘 봐?"
"자, 잘생겨서요"
'휴 기상호 임기응변 쩔었다ㅍvㅍ.'
"연습할 힘이 생겼나 보네? 그럼 다시 시작한다"
기상호가 성준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도 딱히 달라지는 점은 없었다. 성준수가 자신의 슛을 봐주면서 가까이 있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다. 애초에 학년 차이로는 2년, 나이로는 3살이나 차이 나는데 자신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고 대학 가면 더 잘난 사람이 널리고 널렸는데 성준수에게 기상호란 그냥 고등학교 후배일 뿐이었다. 잘 될 마음도없었고 어차피 졸업하고 나면 볼일도 없어서 서서히 잊을 테니 졸업할 때까지만 마음속에 담아두기로 생각했다.
'그래도 졸업식 날엔 특별한 거 해드리고 싶은디...'
"희차이. 니 햄들 졸업식 날에 뭐 해드릴꺼가?"
"졸업식날? 그냥 평범하게 꽃다발 사드리지 않겠나."
"근데 우리 4명이나 있다 아이가. 다 꽃다발 사드리기엔 좀 그렇지 않나"
"재유햄 2개, 준수햄 2개 해드리면 되지."
"글나..."
기상호는 정희찬과 함께 체육관 바닥에 앉아 얘기를 나누면서 시선은 자연스레 성준수에게로 향했다.
'어... 맞다. 햄 신발 빨간색이었지.'
그리고 기상호의 머릿속이 반짝하고 빛났다.
'준향대도 상징색이 파랑이었던 것 같은데....'
"준수햄 신발 있다이가..."
"준수햄 신발? 왜."
"쩝 아이다. 가자. 쉬는 시간 끝났다."
"뭐고 싱겁게"
기상호는 주말에 자신의 본가로 돌아가 온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롱 안에 숨겨져 있는 돼지 저금통을 꺼내고는 한 손에 커터칼을 들었다.
"크흡 꿀꿀아 미안타. 다음엔 꼭 좋은 주인 만나리..!"
평소에 저금해둔 돈과 기상호가 아끼는 저금통의 꿀꿀이를 가르며 나온 돈을 합하자 그래도 농구화 한 켤레 정도는 살 수 있을만큼의 돈이 생겼다. 무수히 많은 농구화 중에 뭘 선물할까도 고민했지만 역시 자신이 위시리스트 1위로 담아놓은 파란색 농구화를 성준수의 사이즈로 결제했다.
'...근데 이거 어떻게 전해줘야 되지? 분명히 햄 성격상 내 돈으로 샀다 하면 부담스럽다고 안 받을 것 같은디'
고민은 길었지만 빠르게 배송 온 농구화가 어디 망가진 곳은 없는지 요리조리 돌려보며 기상호는 다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해답을 찾는 동안 졸업식 날은 빠르게 찾아왔다.
-햄 졸업식 끝나고 잠깐 시간 있어요?
-어. 시간 많이 남긴 하는데 왜?
-뭐 줄 게 있어가지고... 졸업식 끝나면 뒤뜰로 가 있을게요.
-? 그래. 끝나고 갈게.
"야 기상호. 아니 졸업식 끝나고 바로 주면 되지 뭘 뒤뜰까지 부르냐."
"아이 일.급.비.밀이라 그렇죠. 이거요."
"이게 뭔데?"
"지금 풀어봐요"
성준수가 포장을 풀고 조심스럽게 신발 박스를 열었다.
"이거 농구화냐?"
"후후 맞습니다. 햄이랑 같이 농구하면서 점점 진짜 같은 팀원이구나 라고 느꼈거든요. 근데 저희 다 파란색 신는데 햄 농구화가 아직 빨간색이라가... 물론 햄은 이런 거 신경 안 쓰시는 거 아는데 오래됐기도 했을기고...."
"그래서 돈 좀 깨졌을 텐데 니 돈으로 샀다고?"
"저만 쓴 건 아니고..! 햄들이랑 희찬이한테 당연히 다 받아가지고 샀죠"
"그럼 같이 주지 왜 니가 따로 주는데?"
'우와... 이 햄 의심이 장난 아니네.... 그래도 나 기상호. 임기응변에 능한 남자.'
"다들 부끄럽다고 해가 제가 대표로 햄한테 전달하기로 했어요."
"아무튼 고맙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제 졸업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상고의 부원이었다는 걸 인정받는 것 같네."
"햄은 언제나 지상고 부원이었죠! 대학 가서도 잘 지내세요 햄."
기상호는 미소를 살며시 지으며 푸스스 웃어 보였다.
"야, 너."
"네?"
"꼭 준향대 와라."
"네?? 아니 그게 말이야 쉽죠."
"너 이제 슛 조금 있잖아. 수비는 잘하는 편이고. 안 될 게 뭐가 있는데?"
"그렇죠... 없죠...."
"아 전화 오네. 아무튼 연락해라. 간다"
"잘 지내세요 햄!!"
그렇게 작별 인사와 함께 기상호의 짝사랑도 끝이 날줄 알았으나 기상호가 준향대에 문을 닫고 합격하며 이야기는 다시 흘러가게 된다.
"그래. 안 본 지 2년이나 넘었는데 마음이 남아있겠나"
그러나 기상호는 학교에서 성준수를 다시 마주친 순간 자신이 아직도 성준수한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짜노... 낸 망했다."
'그 와중에 햄은 더 잘생겨짔네.... 애인도 당연히 있겠제...?'
고등학생 때야 다신 안 볼 생각이었어서 괜찮았지만 성준수에 대한 마음을 아는 상태로 적어도 2년은 봐야 하다니 기상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기상호는 성준수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에 전부 삐걱대고 슬금슬금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준수는 눈치는 없지만 남의 상태는 기민하게 알아채는 사람이었고, 처음에야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기상호가 고의적으로 자신을 피해 다닌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야."
'헉 준수햄 목소리?'
"야... 야! 기상호!"
"해, 햄 우짠일로ㅎㅎ..."
"너 왜 나 피해 다니냐?
"제가요? 제가 햄을 왜 피해 다니겠어요 와하하하"
"뭐래. 내가 모를 줄 알아? 오늘 훈련 끝나고 남아라."
"넵..."
기상호가 시선을 내리깔고 바닥을 보며 대답했고 그 순간 자신이 예전에 선물한 농구화를 신고 있는 성준수의 발을 발견했다.
'저거 글케 비싼 것도 아인데...'
이미 다 해져서 바꾸거나 버렸을 줄 알았던 신발은 2년이나 지났지만 마치 새것처럼 보였다.
"상호~ 뭔 생각해?"
"병찬햄ㅠㅜㅜ 준수햄이 훈련 끝나고 남으래요. 저 멀쩡히 돌아갈 수 있겠죠?"
"어... 음.. 상호 너 사고 쳤니?"
기상호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래도 살아 돌아갈 순 있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그걸 위로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지만 준수가 남아서 연습하고 가라고 한 적은 있어도 남아서 얘기하자고 한 적은 없거든... 근데 둘이 같은 고등학교였잖아"
"그쵸...."
"그냥 얘기 나누고 싶은 거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네요ㅠㅜ"
기상호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 마냥 훈련 시간의 끝이 점점 다가오는 게 무서워졌다. 매번 힘들었던 훈련 시간에 빨리 끝내 달라고 빌었었는데 그 훈련 시간이 끝나지 말아 달라고 빌어본 적도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시간 사이에 기상호는 그럴듯한 변명도 생각했고 솔직히 성준수야 자신이 피해 다녔다고 해도 궁금해서 그렇지 별생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딴 이유 때문에 피해 다녔다고?"
"죄송합니다"
"하 사과할 것 까진 아니고 앞으로는 갑자기 피해 다니지 마라."
"네넵"
"가자. 아 너 기숙사야?"
"넹. 근데 훈련시간 땜시 룸메가 불편해할 것 같아가 다음 학기에 나갈까 생각 중이에요. 햄은 자취하죠?"
"어. 가끔 놀러 와라."
"부러버라. 일단 알바하고 있긴 한데 보증금은 부모님한테 받는다 쳐도 언제 월세에 전기세에 가스비까지 벌지 막막해요..."
"그러지 말고 다음 학기에 같이 살던가. 학밑에 좋은 매물 있던데. 어차피 훈련 시간은 같으니 신경 안 써도 되고."
"헐 해앰... 제가 사랑하는거 알죠?"
"몰라 인마ㅋㅋㅋ"
성준수는 신나서 달려가는 기상호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날 좋아하는 건가?'
그러니깐 성준수가 기상호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 오래전 일이었다. 눈치가 빨랐던 건 아니고 기상호한테 농구화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서 고맙다고 애들한테 일일히 메시지를 보내자 자신들은 모르는 얘기라는 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값이 좀 나가는 농구화를 이유 없이 줬을 리는 없고 그제야 최근 기상호의 행동들에 대해 짚어보니 결론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자신에 대한 마음 때문에 그 큰돈을 썼다는 거에 부담감을 느꼈고 성준수는 기상호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사실은 조금의 호기심, 호감은 있었는지 입학 기념으로 부모님한테 파란색 농구화 한 켤레를 더 선물 받고 기상호가 준 농구화는 아껴서 신게 되었다. 기상호가 준향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어떻게 기상호를 대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고민했던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같은 관을 쓰고 심지어 같은 과인 기상호는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훈련시간 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기상호가 일부러 자신을 피해 다닌다는 걸 깨닫고 불러내기까지 했지만 같이 살자고 말했던 건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래도 뭐 거의 1년 동안 같이 살아봤었는데 괜찮겠지.'
그리고 성준수는 일주일 만에 기상호와의 동거가 안일한 생각이었단 걸 깨달았다. 불편하거나 했던 건 아니고, 집안일은 그래도 척척 잘하고 말도 잘 듣지만 기상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문제였다. 기상호는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접은 건지 별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어느 날 기상호의 이름을 부르니 뒤돌아서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는 기상호를 보며 심장이 뛰었기 때문이다. 그래. 같은 고등학교, 이제는 대학교 후배이기까지 한 기상호를 좋아하게 되었다. 성준수는 기상호가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다시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들었던 기상호의 이상형을 떠올리며 성준수는 기상호에게 더 친절히 대하려고 노력했으나 기상호는 "햄. 죽을병 걸린 건 아니죠?" 라며 설렘은 개뿔 무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한 집에서 살기란, 오히려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다. 그리고 그건 기상호도 기상호대로 죽을 맛이었다. 이뤄질 수 없다는걸 아는데. 좋아하는 마음을 포기해야 하는데. 매번 성준수를 마주칠 때마다 기상호의 심장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없이 콩닥거렸다.
'미치겠다. 저 햄은 갑자기 와이리 친절히 대하는데!!'
그 와중에 갑자기 친절해진 성준수 때문에 심장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기상호는 지금 사는 집이 좋든 말든 혼자 살기 위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훈련이 없는 날에는 알바를 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성준수와 마주치는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래서 불편할 것 같으니깐 내년부턴 따로 살자고?"
"옙. 햄 이제 4학년이니깐 프로 준비도 해야 하고..."
"그건 맞긴 한데"
"햄 아쉽나 보네요ㅋㅋㅋ 하긴 저 만한 룸메이트를 또 어디서 찾겠습니까"
'애초에 너 아니면 동거도 안 했어 등신아....'
"그래. 대신 계약 3월 까지니깐 3월 까지는 있어야 하는 거 알지?"
"당연하죠. 집도 빨리 알아보께요"
'하 그냥 남는 집이 없었으면 좋겠다.'
기상호에 대한 마음과 동거가 익숙해질 때쯤 성준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쟤 말대로 프로 준비하면 더 바빠지고 만날 시간도 줄어들 텐데 이제 집에서도 못 만나면 어떻게 해야하지...'
성준수. 그가 누군가. 도내 최상급 쿨 뷰티 미남.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서툴렀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건 3점 슛을 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리고 아무런 대책도 못 세운 채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가 크리스마스 전날이자 성준수의 생일이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밖에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고 경남과 부산에서 살아와 눈을 많이 본적이 없는 기상호는 눈이 그렇게 좋은지 밖에 나가서 놀자고 성준수를 조르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을 마지막으로 접자. 심지어 기상호는 미성년잔데...'
성준수와 기상호는 추위에 대비해 단단히 준비를 하고 집 밑으로 내려갔다.
"오! 눈사람이다. 저희도 만드까요?"
"그러던가."
기상호는 열심히 눈을 뭉쳐 자그마한 눈사람 두 개를 나란히 세워놓았다.
"이거는 햄. 이거는 저."
그러면서 성준수를 향해 뒤돌아 웃어 보이는게 '아. 그래 내가 저 미소를 보고 쟤를 좋아하게 되었지. 내가 이 마음을 포기할 수 있을까?' 성준수의 심장은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열심히 놀고 집에 들어간 날 저녁, 기상호는 성준수의 방에 쳐들어와 케이크와 함께 선물을 건넸다.
"무드등?"
"햄 혼자 살게 되면 외로우실까 봐서요. 외로우면 키세요. 야가 제 대신 햄 지켜 줄거에요ㅍvㅍ."
"뭔... ㅋㅋㅋㅋ그래, 고맙다."
그리고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 기상호는 일어나자마자 코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감기 걸렸어?"
"그런가 봐요."
"코 먹지 말고 약은."
"먹었죠. 그래도 열은 안 나서 다행..."
"그렇게 눈이 오는데 뛰어나가서 놀 때부터 알아봤다.“
"그치만 눈을 별로 본 적이 없었어가..."
기상호는 성준수가 시킨 죽과 약을 먹었고 졸려오는 눈을 감았다 뜨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 되어있었다.
"일어났어? 몸은 어때."
"거의 다 나은 것 같아요!"
"그럼 옷 갈아입고 따라 나와봐."
"엥? 갑자기 어디 가게요?"
성준수는 다 갈아 입었다며 방에서 나온 기상호를 지켜보더니 자신의 방에서 목도리를 꺼내와 목에 둘러주었다.
"감기 걸렸다는 애가 좀 따뜻하게 다녀라."
그리고 성준수가 앞장서서 간 곳은 다름 아닌 한 레스토랑이었다.
"여서 밥 먹게요? 오늘 사람 많아가 자리 없을 텐데..."
"예약해 놨어."
"네?!"
"그러니깐 빨리 들어가자."
기상호는 성준수의 뒤를 졸졸 쫓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와 온통 커플뿐이네요. 햄도 이런 곳엔 애인이랑 오셨어야 했을텐디."
"됐어. 있어도 니랑 먹는 게 더 편해."
"저 지금 감동 먹었어요. 햄 저 진짜 아끼시는구나."
"알면 잘해라 좀."
"헉 햄 근데 여기 가격이..."
"내가 사는 거니깐 마음껏 먹어라."
"지, 진짜요? 좀 부담시러븐데"
"너 집 나가기 전 선물이라고 생각해."
'농구화가 이것보다 더 비쌌을 거면서...'
맛있게 밥을 먹은 기상호는 배를 두드리며 다시 성준수와 함께 둘이 사는 집으로 돌아갔다. 성준수는 씻고 나와 침대에 누우면서 오늘 이후로 기상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려고 했고, 기상호는 오늘 성준수의 태도 때문에 밤새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
'이제까지 안 믿겨서 무시했는데... 햄도 내 좋아하는 것 같제..?'
그렇게 겉으로 보기엔 똑같지만 둘의 마음은 어긋나기 시작했고 시간은 흘러 한 해의 마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빠른 이었던 기상호는 드디어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인 성인이 되기 30분 전이었다.
"햄햄! 저희 술집 가요!!"
"그래. 어디 갈래, 학교 근처 거기?"
"아 거기 맛있다고 하긴 하던데. 좀 멀지 않나. 햄은 괘않아요?"
"상관없어."
기상호는 성인이 되어 고삐가 풀린 건지 그동안 자신만 빼고 모두 술을 마셨던 서러움을 푸는 건지 성준수의 만류에도 거의 모든 술을 종류별로 시켜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둘 다 운동하는 남자여서 그런지 주량은 약하지 않았지만 신난 나머지 빨리 마시자 취기는 금방 훅 올라왔다.
"햄 그거 아라여? 솔지키 고등학교 때 햄 음청 무서웠으요"
"알어... 나도 그때 미안했다."
"ㅍㅎㅎ그래도 햄한테 엄청 고마웠다이가...."
"나도. 니는 그거 아냐?"
"뭔디요?"
"니가 졸업식날 준 농구화. 그거 너 혼자 산 거라며?"
"어... 어떻게 아셨어요?"
기상호는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애들한테 당연히 고맙다고 메세지 했지. 근데 다들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하더라고. 하여튼 개 허술해."
"해, 햄이 빨간색 신으셔가 신경 쓰여서 그랬던 거였어요. 고맙기도 했고 존경하기도 하고..."
"그렇냐."
순식간에 둘의 주위를 감싼 공기에는 어색함이 맴돌았다.
"큼. 일어설까?"
"넵...."
성준수와 기상호는 술집에서 계산을 하고 나와 밤하늘 밑을 걸으면서 집으로 향했다. 아직도 어색한 공기, 겨울이여서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새벽. 기상호는 우뚝 멈춰 섰다.
"저 햄 좋아해요. 햄은 저 어때요?"
집으로 향하는 길목은 가로등이 고장 났는지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성준수의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아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기상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눈앞에는 언젠가 봤던 참숯처럼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에는 달이 비쳐서 빛나고 있는 게 마치 별처럼 보였다. 그 별은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고 그 별은 그대로 자신의 품 안에 스러졌다. 지상에도 별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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