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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삼즈] 중력, 변수, 공

성준수&진재유의 좀비 아포칼립스 au / 1회차 지삼즈 교류회 참여 원고

※소설 <고요한 종말에는 브이로그를>의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차용했습니다.

 

 

 

“시발… 내가 왜 이런…….”

 

교복 셔츠를 껴입은 준수가 억지로 단추를 잠그며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었다. 간신히 잠긴 꼬락서니가 제법 웃겼다. 거울을 보며 잔잔한 현타를 느낀 준수는 결국 다시 짜증을 내며 애써 잠갔던 단추를 모조리 풀어버렸다.

 

“에이씨, 몰라. 안 잠가. 그냥 밑에 나시 입어…….”

 

아무래도 안 입고 처박아둔지 몇 년 됐으니 옷이 안 맞을 만도 했다. 가뜩이나 더운데 옷은 끼고 단추는 잘 안 잠겨서 짜증이 났지만, 안에 민소매를 받쳐입고 편하게 단추를 풀어헤치니 마음이 금세 너그러워졌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몸을 열심히 만들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준수, 머하노. 퍼뜩 안 나오나.”

 

그렇게 멍하니 거울을 보고 있으면 뒤에서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찬가지로 꼭 끼는 교복을 입은 재유였다. 서로 짠 것처럼 검은 티 위에 교복 셔츠를 대강 걸친 둘의 바지와 소매 모두 길이가 묘하게 짧고 팔뚝이나 허벅지가 살짝 타이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났으니 처음 사던 때처럼 딱 맞는 걸 기대하기엔 그들은 양심도 있었고, 그간 지나치게 열심히 살기도 했다.

 

“풉.”

 

그래도 서로의 모습이 웃긴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가자.”

“어.”

 

스물세 살이나 먹은 두 사람은 무슨 코스프레도 아니고 고등학교 교복을 꺼내입은 걸로도 모자라 책가방을 메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나섰다. 거기에 자전거까지 한 대씩 붙잡고 끌고가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를 가는 것이 아니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동네 노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인사를 받는 동네 노인들은 묘하게 새까맣고 번들대는 눈빛으로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말 없이 두 사람을 마주봤다. 준수는 답지 않게 마른침을 삼켰다. 원래도 흰 그의 피부는 오늘따라 더욱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아마도 다수의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들 앞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준수가 재유와 함께 교복까지 입고 팔자에도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좀비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

 

복잡한 이야기를 간단히 줄이면 이렇다.

대한민국 각지에, 아니 세계 각지에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희한하게도 65세 이상의 고령 인구만이 감염된 이 바이러스는 이 안타까운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효과적으로 스며들었다. 원인은 고령 인구를 다 죽여버리려고 한 시도 때문이었는데, 황당무계하게도 새 정착지를 알아보면 고도의 타 문명 외계인들이 저지른 짓이었다.

그들은 지구에 정착하기 위해 자신들의 우수 요원들을 지구인인 척 선발대로 잠입시켰다. 인간의 뇌가 저장한 정보를 손쉽게 왜곡하는 기술 수준을 가진 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유일한 장벽이라면 오래살아서 연륜이란걸 통해 눈치가 빨라진 노인들이었다.

결국 지구 정착의 최고방해물로 노인 인구가 뽑히는 바람에 원천 제거를 시도한 것이 이것이다. 그마저도 잘 안돼서 노인들에게 고도의 공격성과 생체 무기를 쥐어주고 멀쩡하던 남의 행성만 어지럽힌 꼴이 됐지만. 듣기로는 요원에게 실험 대상으로 잡혀간 고지능의 노인 감염자가 역으로 외계인들의 본부를 개박살내 그들 또한 대가리를 잃은 상태라고 했던 것 같다.

 

고령 인구 제거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 미리 파견된 요원들에게는 더욱 확실한 정착을 위해 지구인들을 세뇌하고 계약하여 감시, 관찰, 번식을 하는 임무가 있었고, 목표 달성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유전자 단위로 분석된 적합한 후보군까지 주어져 있었다. 이렇게 전담으로 계약하게 된 이를 ‘대상자’라고 불렀다.

현재 ‘진재유’라는 이름의 대학생으로 위장하고 있는 그, 요원04 또한 차질 없이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해외에서 곧 들어올 예정이었던 자신의 대상자가 계획대로 움직여주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원한대로 흘러가주지 않았다.

 

***

 

때는 준향대 농구부 부산 여름 합숙.

마지막 날에 주어진 자유 시간에 재유는 고교 동창이자 대학 동기인 준수와 함께 졸업한 모교에 찾아온 참이었다. 변한 것도 많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연습했던 체육관은 그대로였다. 자연스럽게 둘은 농구를 하게 됐다.

그렇게 텅 빈 체육관에서 슈팅 연습과 일대일을 좀 하던 둘은 적당히 놀았으니 다시 머물던 유스호스텔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샤워를 먼저 마치고 나간 준수가 보이지 않았다. 벗어둔 농구화와 감아 놓은 이어폰, 반 정도 마신 이온음료 병 등이 스포츠백 옆에 놓인 것을 보면 짐을 싸던 도중인 게 분명했다. 의아해하며 체육관을 나선 재유는 금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준수의 앞에 눈을 번들거리며 이빨을 촉수처럼 뻗은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가 있었다.

 

‘점마 와 저러고 가마이 앉아만 있노…!’

 

이 감염자들은 여타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좀비와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준수가 평소처럼 성질을 내며 달려들지 않은 것은 몹시도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평소 준수가 보여주는 성질머리를 고려하면 덤비지 않는 것도 무언가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좀비가 집어던진 비품에 한쪽 눈을 다쳤는지 얼굴을 움켜쥔 채 제대로 도망치지 못해 코너에 몰려 있는 듯 했다.

 

‘우야노.’

 

원칙적으론 개입하지 말아야 했다. 그의 의무는 대상자의 감시, 관찰, 필요하다면 번식. 딱 그정도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계약한 대상자가 없다. 대상자 후보의 귀국이 계속 미뤄진 탓이다.

머리를 굴리는 동안 맨 앞에 선 감염자의 촉수 같은 이빨이 준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운이 좋게 몸을 피했지만, 한쪽 시야에 문제가 생긴 그의 몸뚱이에 저 이빨이 꽂히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재유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가 죽지 않길 바랐다. 살리고 싶었다. 아무래도 그간 준수의 동급생인 ‘인간 진재유’로 너무 오래 지내왔는지, 감정 상태에 감화된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침착하게 준수의 곁으로 다가간 뒤였다.

 

“준수, 준수. 개안나? 내 말 좀 들어바라.”

“시발, 재유? 넌 왜 왔어? 저 할아버지, 괴물 같은데, 씨… 같이 죽으려고 왔냐? 별로 안 고마운데…”

“먼소리고? 내 안 죽는다. 니도 안 죽을끼다. 그니까 내 함 믿어볼래?”

“너야말로 뭔 소리야?”

“내 니 안 죽게 해 줄게. 무슨 일인지는 이거만 처리하고 설명하자. 그니까 일단은… 대상자로서 내랑 계약해라. 그람 내 합법적으로 전력을 다해 니를 보호할 수 있다.”

“너 지금 무슨, 씨발 개소리를… 알아듣게 좀,”

“빨리! 준수. 급하다. 내도 언제까지 내 맘대로 움직이질 몬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진재유의 표정은 너무나도 낯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농구에 집중할 때도 이 정돈 아니었다. 그땐 우리 편이라서 그랬던건가? 아니, 그것과도 뭔가 달랐다. 그러니까 문명 사회의 구성원이 보여줄 법한 표정이 아니라, 무언가 야생동물을 연상케 하는 눈빛이……. 준수는 이쯤에서 생각을 그만뒀다. 아무튼 절대 농담은아닌 것 같았으니까. 가끔 구라는 치긴 했지만 선 넘는 농담 류는 거의 안 하던 녀석이기도 했고.

 

“시발 존나 뭐라는 건지……. 일단 알았어. 네 말대로 할테니까 이제 뭐든 해 보든가.”

 

그제야 재유가 씩 웃었다. 아이솔레이션에 성공했을 때 짓던 표정과 그나마 비슷한 느낌이다.

 

“잘했디.”

 

결국 재유는 사상초유의 결정을 내렸다. 생물학적 남성 개체를 대상자로 선택해 계약하기로 한 것이다. 심지어 준수는 후보군에서 고려되는 인물도 아니었다.

 

“와, 이게 되네….”

 

덕분에 머릿속에 입력된 1순위 프로그램에 ‘성준수를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명령이 자리잡은 재유는 감염자들의 시선을 바깥 쪽으로 돌린 뒤 가벼운 몸놀림으로 부상당한 준수를 부축해 자리를 피했다.

의무실에 도착한 재유는 제일 먼저 준수의 다친 눈을 확인했다. 다행히 안구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고 충혈이 된 정도였다. 안심한 재유는 캐비넷을 뒤져 발견한 위생안대를 준수에게 건네주며 그의 눈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쳐다보더니 뜬금없이 물었다.

 

“아이고, 아프겠다. 어디가서 이래 다쳐왔노?”

“? 뭔소리야. 방금 좀비 만나서 같이 도망와놓고.”

“……음. 역시 안 되는 갑네.”

“? 뭐가?”

“아이다. 니도 참… 성질머리 보통 아닌 건 진작에 알았지만서도 참… 별나네.”

“시발, 진재유. 대체 뭐라는거야 아까부터. 알아듣게 좀 말해.”

 

그랬다, 준수는… 아마도 성질머리 탓인지 세뇌나 기억 조작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통이라면 요원이 설정하는 기억대로 세뇌되는게 정상이었다. 그래서 재유도 적당히 좀비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농구하다가 다쳤다거나 하는 식으로 세뇌를 시도해봤지만 준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성질을 보면 뇌세포에도 조작을 거부하는 고집과 깡이 있대도 믿을 법 하지 않은가. 스스로 납득해버린 재유는 억지로 애쓰지 않기로 했다.

 

“니가 듣기엔 억수로 말도 안 되는 소릴끼다.”

 

그래서 그 대신에 솔직하게 자신의 정체와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했다. 구구절절 친절하게 설명하며 아무래도 대상자 계약 전에 인간으로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거라고 재유는 자조했다.

그리고 준수는…

 

“씨발 뭔 개소리야. 그래서 니가 외계인이라고? 지구를 침략하러 온?”

 

명쾌한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재유는 애써 해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안 믿으면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진실만을 말했다.

 

“맞다. 말 못한 건 미안타. 근데 내는 침략이고 뭐고 관심도 없다. 대신 아는 게 니보단 많으니까 도움이 될끼다.”

“날 왜 도와주는데?”

 

재유는 캐비넷 문을 닫고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준수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왠지 답변을 망설이는 듯 하던 재유는 이내 망설임을 지워버리곤 대답했다.

 

“그냥 니가 죽지 않았음 좋겠다. 그걸론 안 되나.”

“…….”

“…….”

 

이번엔 준수 쪽이 말이 없었다. 솔직히 몇 년을 함께 한 동료의 말을 듣고 단박에 믿어버리는 것은 성준수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네 말을 전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자신이 죽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은 거짓말같지 않았다. 안대와 피부가 닿은 곳이 걸리적거리는지 손끝으로 살짝 긁적이던 준수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뭐, 그래… 어쨌든 날 도와준다는 거지?”

 

***

 

하지만 재유라고 당장 좀비 사태를 한 방에 해결하거나 무적의 쉘터에 준수를 데려가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좀비의 특성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준수에게 알려줘서 조심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도움이 되었다.

 

“아니 뭐… 시발 그러니까, 눈빛이 좆같은데 웃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다 좀비인거고 얌전하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잘 하면 그냥 넘어가준다고?”

“맞다. 큰 소음이나 낯선 사람, 폭력적 상황 같은 스트레스 자극에 반응하니까 얌전히 눈에 안 띄는 게 제일이다.”

“무슨 좀비가 그래? 믿어도 돼?”

“못 믿겠음 저어기 동네 노인정 가가 욕하고 깽판 함 쳐봐라. 내 안 가르쳐줬으면 니는 인사고 뭐고 씹고 할매할배 앞에서 욕이나 하다가 그대로 요단강 건넜을낀데.”

“야, 너는 시발 무슨 말을 해도…”

“와. 내 말이 틀렸나.”

“아니… 하, 씨바거…….”

 

서울로 돌아가는 일정은 어쩔 수 없이 미뤄졌다. 올라가는 길에 감염자 집단이라도 마주쳤다간 꼼짝없이 죽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너 부산행 안 봤냐?”

“봤지. 근데 이 경우는 서울행이라 해야하는 거 아이가?”

“아무튼.”

 

그렇게 둘은 좀비 사태로 인해 고교 시절처럼 지상고 숙소에서 임시 부산 살이를 시작하게 됐다.

 

“무슨 숙소에 이렇게 아무것도 없어? 얘네 안 쓰나?”

“방학이라 갸들도 합숙 간 거 아이겠나.”

 

하필이면 부산의 고령 인구 비율은 서울보다 훨씬 높은 편이었다. 길가다가 노령의 감염자와 마주칠 확률이 서울보다 월등히 높다는 뜻이다. 게다가 둘은 외지에서 온 성인 남성이기에 갑자기 그들의 시야에 걸리적거리면 별로 좋을 게 없음은 자명했다. 더구나 준수는 덩치나 외모 탓에 원래도 눈에 잘 띄는 편이었는데 말투도 험하고 사투리도 안 쓰니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어그로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자신들을 파악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무슨 놈의 숙소에 먹을 거 하나 없노. 밥은 무야 할 거 아이가.”

“배달을 시켜야하나.”

“니 같으면 이 판국에 배달 하겠나. 그래 위험한디.”

“할머니할아버지들도 배달 기사는 익숙할 거 같은데.”

“그야 그런데, 오토바이는 소리가 크잖아.”

“아.”

 

배달용 싸구려 오토바이의 배기음을 떠올린 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시끄럽지도 거슬리지도 않으면서 무해하고 일상에 스며들만한 게 없을까, 고민하다 문득 재유가 입고 있는 져지에 시선이 닿았다.

 

“재유. 나 생각난 거 있어.”

“뭐고.”

 

준수는 대답 대신 숙소 벽에 있는 붙박이장의 문을 열었다. 보기보다 넓은 이 공간은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살짝 났다.

 

“졸업할때 두고 갔던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장 안으로 팔을 뻗은 준수가 한쪽 구석에 놓인 싸구려 스포준수을 꺼냈다. 대강 먼지를 턴 뒤 그 안에서 준수가 꺼낸 것은 구겨진 지상고 교복이었다.

 

“아.”

 

거슬리지 않으며 무해하게 노인들의 일상에 스며들 수 있는 역할론 확실히 이만한 게 없었다.

 

***

 

다시 현재.

두 사람이 생각한대로 확실히 좀비들은 고등학교 교복 입은 학생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심지어 인사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인자하게 웃어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처음엔 좀비에게 인사하는걸 꺼림칙해하던 준수도 이제는 인사성 밝은 동네 손주 역에 잘 적응했다.

오늘은 장을 볼 예정이었다. 말이 장이지 잡아먹힐 사람 다 잡아먹히고 덩그러니 남은 마트를 털러 가는 행위였다. 그마저도 이젠 남은게 별로 없었다.

 

“에이씨. 냉동만두 다 털어갔네.”

“머 좀 찾았나.”

 

재유가 당면과 어묵을 가져오며 물었다. 준수가 어묵 포장지에 적힌 내일까지의 유통기한을 빤히 쳐다보자 재유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 이거. 물에 뿔리가 고추장 설탕넣고 끓이면 떡볶이 될거같아가.”

“너 요리도 할 줄 알아?”

 

지상고 숙소에서 지내던 당시를 회상하던 준수는 앞치마를 두른 태성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녀석이 늘 요리를 도맡은 탓에 다른 부원들은 가스레인지 근처에도 갈일이 없었다. 재유는 볼을 긁적였다.

 

“필요하니까 지금은…… 잘해야지.”

 

막연히 잘 해보겠다고 말하는 것과는 뉘앙스가 달랐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이제는 그것이 본인이 되어야한다는 묘한 뉘앙스였다. 그것을 어렵지 않게 캐치한 준수가 기함했다.

 

“야 설마… 외계인 능력으로 요리 능력 같은 게 필요해지면 그냥 생기는거야?”

“…….”

 

재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준수는 개부럽다며 중얼거리고는 장바구니에 재유가 가져온 당면과 어묵을 담은 뒤 함께 먹을 만한 맥반석 계란(일반 날계란들은 진작에 상하거나 동났다) 같은 것이 없나 찾아보다 문득 물었다.

 

“야, 너 그럼 설마 농구 잘 하는 것도…”

“와 이거 누구야. 그러니까… ‘진재유’! 맞지 이 이름?”

 

둘 뿐이던 마트에 웬 낯선 남자가 아내로 추정되는 여자와 함께 나타났다. 재유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준수는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남자는 준수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를 가리키며 재유에게 물었다.

 

“이건 누구야?”

“…….”

“대답 안 하네? 그럼 나 그냥 말한다?”

“…….”

“인간 같은데. 이대로 우리 말 듣게 둬도 돼?”

 

대답 없이 일관하던 재유가 퍼뜩 고개를 들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신경 꺼라.”

“아~ 나중에 기억 손 보게? 하긴 넌 그 편이 편하겠네. 뇌조작은 네가 항상 일등이었잖아?”

“용건 없으면 가라.”

“왜 화를 내고 그래. 내가 먼저 말을 걸어서 그랬나? 그래도 나름 지구인스럽게 인사한거라고 생각했는데…….”

“마 됐다. 내 먼저 간디. 준수. 가자.”

 

준수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던 재유의 뒤에서 남자가 여전히 쾌활한 어조를 유지하며 조금 더 볼륨을 높여 물었다.

 

“야 잠깐. 이렇게 그냥 가기야? 너무하네~ 난 너무 궁금한데.”

“뭐가.”

“그야 너 같은 엘리트가 어떤 대상자랑 어쩌고 지냈는지지.”

“그게 와 궁금한데?”

 

줄곧 시시콜콜한 얘기만 꺼내며 본론을 꺼내지 않던 그가 용건을 꺼내자 재유는 그제야 돌아보았다. 재유가 자신을 상대해주자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궁금했던 내용을 구구절절 쏟아냈다.

 

“당연하잖아. 왜 이 나라 번식 가능 성별체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번식 대상의 모습과 동떨어진 특이한 외형을 하고 있는거야? 사용 언어도 국가 표준어가 아니라 지방 방언이라니……. 네 대상자는 어디 있어? 키도 외모도 애매한 이런 취향을 가진 여자라니 너무 궁금한데…”

“재유. 이 새끼가 자꾸 뭐라는 거야?”

 

재유와 아는 사이 같아서 알아서 하게 그냥 두려고 했지만 자신이 모르는 정보가 쏟아지는 것 같아 준수는 얼굴을 확 구기며 물었다.

 

“마. 신경쓰지 마라. 내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상대 안 할라고. 가자.”

“저번에 나한테 대상자로 계약하자고 하지 않았어? 저 새끼가 하는 말이랑 관계 없는 말 맞아?”

 

재유는 고교 농구부 시절 으레 그랬던 것처럼 준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준수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준수를 보며 낯선 남자가 큰 소리로 물었다.

 

“뭐? 그게 네 대상자라고?”

 

순간 재유의 얼굴에 낭패라는 표정이 스쳤다. 낯선 남자는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재유의 안색을 보고는 깔깔대며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어쩐지 옷 꼬라지가 고딩 코스프레도 아니고 그게 뭔가 했더니, 대상자가 남자라서 그런 설정으로 가기로 한 거였어? 어지간하네 너도……”

“궁금한 거 다 해결됐제. 내 진짜 간데이. 준수, 가자.”

“야, 씨. 재유…… 너 가서 설명해줘야 돼, 저 새끼가 한 얘기…”

 

여전히 재유에게서 설명을 듣고 싶은 것은 변함 없었지만 워낙에 재유가 자리를 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 준수는 그냥 끌려가주기로 했다. 그렇게 낯선 남자(아마도 재유의 고향에서 함께 파견된 요원으로 추정)를 등진 둘이 성큼성큼 마트를 나서는데 그가 웃음을 겨우 멈추고는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등을 향해 말했다.

 

“어 그래~ 번식도 못하는 대상자랑 교복 입고 고딩 코스프레라… 차석 요원 취향 잘 알았습니다.”

 

움찔.

 

“씨이발새끼가……”

“준수 임마 또 눈깔 도라삤네. 퍼뜩 안 오나.”

“놔봐, 씨발 저 새끼가 먼저…”

 

말 그대로 야마가 돌아서 좀비의 어그로를 끌 만한 시끄러운 것을 찾아 남자 쪽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려던 준수가 몸에 힘을 뺀 건 남자 옆에 선 초점 없는 눈의 여자 때문이었다. 준수는 세뇌가 통하지 않는 특이 체질이라고 재유는 말했지만, 그렇단 얘기는 평범한 사람들은 세뇌가 통한단 뜻이었으니까. 그녀를 곁에 두고서도 잘도 대상자니 지구인이니 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던 것도 그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고 개죽음당하게 할 순 없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아동용 마이크 장난감을 집어던지려던 준수가 몸에서 힘을 빼고 장난감을 다시 진열대 위에 올려두었다. 이를 놓치지 않은 재유가 그를 더욱 적극적으로 잡아끌었다.

 

“잘했다.”

 

***

 

깽판을 참은 대가로 준수는 숙소에 도착해서 재유가 요리한 떡볶이를 먹으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최초에 재유가 목표로 둔 대상자는 준수의 동생 지수였다. 재유는 미성년 개체의 성장 관찰도 할 수 있는 대상자가 필요했기에 지구 파견 당시 아직 어린 학생이던 지수가 선택되었다. 다만 여학교를 다니며 사교육도 부모 개체의 계획에 따르는 듯 해, 성년이 되기 전까진 그녀와 직접적 인간관계를 맺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 하에 재유가 선택한 것은 성지수의 혈육 성준수의 동급생으로 잠입해 교우관계에 침투하는 것이었다.

 

“그, 지수가 워낙… 인간관계 상 주변인으로 설정할 남자 포지션 중에 자연스러운 게 없었다이가. 오빠 친구를 설정하는게 그나마 제일 괜찮은거였다.”

“무슨 말인지 존나 알 것 같다…….”

 

준수와 가까워지는 설정은 단순했다. 무난한 성격에 농구를 잘 하고, 팀 내에서 준수와 포지션이 겹치지 않을 것. 덕분에 둘은 좋은 실적을 내어 명문 대학교의 농구 특기생 명단에 나란히 포인트가드와 슈팅가드로 이름을 올리지 않았는가. 정말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근데 거서 지수가 해외로 유학을 가뿌리고 이래 안 들어올 줄 우예 알았겠노? 내 지수 따라가 호주 갈 뻔했다.”

“뭐? 장난해? 너 없으면 패스는 누가 돌려?”

“니는 그게 문제가…”

 

그런데 그 시기에 하필이면 세계적으로 초유의 전염병사태가 터져서 한국과 호주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출입국을 막은 덕분에 재유는 대상자를 바꾸는 것까지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것까지 말해주었다.

 

“뭐 그것도 니가 다쳐뿌는 바람에 다 옛말 됐지만. 안 그랬으면 내 다른 가시내랑 계약한 동안 니는 노인 공경 대신 노인 공격 하다가…”

“야, 내 성질 좆같다고 그만 말해.”

“내는 그렇게까진 말 안했다.”

 

피식 웃은 준수는 어묵을 집어먹으며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

 

객관적으로 준수의 얼굴은 나이 드신 분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덩치가 크고, 다혈질에, 툭하면 욕을 하고, 서울말까지 써서 부산의 좀비 노인들에게 결코 호감가는 캐릭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멘 모습은 그런 것들을 쉽게 가릴 수 있었다. 덕분에 남들은 점점 줄이는 바깥 출입도 오히려 더 늘릴 수 있었다. 학생이라면 규칙적으로 등하교를 해야하지 않겠나.

재유의 머릿속으로 접속 가능한 외계 네트워크도 본부가 고지능 감염자에게 습격당한 뒤로는 거의 차단된 것 같다고 했다. 이 네트워크는 요원에게 강제 명령을 내리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며 재유는 자신이 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두 사람은 큰 위기 없이 이 아포칼립스 사태에 적응했고, 생존률도 월등히 높아진 상태였다.

그러나 둘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쳤다. 재난 상황에 단둘이서 지내야하다보니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우습게도, 농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농구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학생들. 문장만 놓고 본다면 무해하고 일상적으로 느껴지지만 농구공이 바닥을 때릴 때마다 나는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소음은 그들을 자극할 여지가 충분했다.

결국 농구가 하고 싶을 때 둘이 할 수 있는 건 체육관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한 쪽이 슈팅하면 다른 쪽이 림 아래에서 공을 받아 소리를 차단하는 것 정도였다.

금방 질려버린 무소음 슈팅 연습에 둘은 농구공을 하나씩 끌어안고 체육관 바닥에 드러누웠다. 준수가 먼저 물었다.

 

“넌 근데 나 때문에 농구한 거 아냐? 너도 이게 재밌어?”

“어. 해보니까 재밌대. 잘 되니까, 더 잘 하고 싶고…….”

 

그 기분 알지. 아주 어릴 적에 처음 클러치 슛을 던지던 회상을 잠깐 한 준수가 다시 물었다.

 

“이 개지랄이 끝나면 넌 너희 별로 돌아가냐?”

“내 얘기 안 했나. 우리 상부도 다 죽사발 났다니까.”

“아, 맞네.”

“내 어디 갈데 없다. 여서 걍 살아볼라꼬.”

 

희한하게도 자신의 여동생에게 접근하기 위한 중간다리로 고교농구선수인 척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한참 되었음에도 재유가 꺼려지지 않았다. 그가 여기에 정착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뛰었다. 꼭 농구공이 바닥을 치는 것과 같은 박자였다. 그와 계속 농구할 수 있다. 그 순간 재유가 물었다.

 

“니는 그럼 이거 다 해결대면 머가 제일 하고 싶노?”

“농구.”

 

망설임 없는 대답에 물어본 사람도, 대답한 사람도 잠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준수는 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너는?”

“…내도 농구.”

 

여자애한테 접근하려고 그 애 오빠가 즐겨하는 스포츠를 하게 됐을 뿐인데, 이 동그란 공은 이상하게도 재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향보다 중력이 강해 재유의 발목을 지상에 꽉 붙들어두는 이 둥근 별처럼.

 

***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에게 대항하는 화학 무기가 개발됐다는 뉴스가 9시를 장악하고 꼬박 일주일.

세상은 점차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끼는 사람들은 모두 연락이 닿았고, 살아있었다. 소중한 사람도, 꼴보기 싫은 사람까지 모두.

그러니 이제 두 사람도 과거의 유적을 떠나 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혹시 몰라 넉넉한 교복을 구해 입은 준수와 재유는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창가에 기대 잠든 준수의 곁에 앉은 재유는 상단에 달린 스크린 하단에 빠르게 지나가는 뉴스 속보들을 멍하니 훑었다. 문득 ‘미확인 지성체에게 세뇌당한 여성 증거 다수 확보’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면에서 임마는 세뇌가 안 먹혀가 다행인가……응?’

 

퍼뜩 무언가가 뇌리를 스친 재유가 잠든 준수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지상고등학교에 원래 없는 학생인 재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은 한번에 성공하지 않았나?

 

‘그땐 됐는데 왜 다시 할라니까 안 돼가 내가 외계에서 온 연구 요원인걸 다 밝히게 해뿟노… 애초에 풀릴라믄 내랑 친구로 지낸것도 풀리야… 아.’

‘애초에 세뇌가 먹힌 게 아이라면… 그냥 임마가 내를 친구라 여겨준 거가.’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품 안에 껴안은 농구공을 내려다본 재유는 왜 그렇게 자신에게도 농구가 재밌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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