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렉스 패리스 힐튼

S성 사랑합니다

PITA BREAD by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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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그룹 총수 일가를 태운 버스가 산길에서 추락사고를 당했고, 탑승자 모두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속보를 보고도 성준수는 큰 감흥이 없었다. 그야 자신은 SS그룹 관계자도 아니었고, SS그룹 구단인 썬더스 소속도 아니었다. 근데 뭐, 썬더스여도 딱히 신경 썼을 거 같진 않았다.

한국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는 SS그룹—사성그룹의 총수 일가 몰살 위기로 경제위기가 어쩌고 수군거리는 동안 성준수는 공이나 던졌다. 알 바인가? 리그가 중단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 왜 다같이 오순도순 한 버스로 이동하냐, 그런 생각은 했다. 세단 아니면 안 탈 거 같은 사람들이. 아, 전영중은 이거 심각하게 보고 있으려나? 걔는 안 그런 척 남 사정 듣기 좋아하지.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완전 남의 일이었다. 그게 맞았고. 성준수가 사성그룹과 가진 관계성이라고는 집에 있는 사성전자 백색가전 몇 개와 핸드폰 정도였다. 재벌 일가의 삶 따위와는 완전히 유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재난은 예고가 없는 법이다. 아무런 개연성 없이 들이닥쳐 삶을 뒤집어 놓고 홀연히 떠난다. 사성그룹이 성준수의 일상을 박살 냈다는 뜻이다.

사고 30분 경과. 사성그룹 총수 일가 사고 및 구조 소식.

사고 1시간 경과. 탑승자 전원 중태.

사고 3시간 경과. 사성그룹 만일의 사태 대비해 후계자 탐색.

사고 6시간 경과. 사성그룹 이용재 회장 5촌 당고모 이 모 씨의 아들이 후계 유력 후보.

사고 7시간 경과. 사성그룹, 농구선수 전영중 씨와 연락 중. 엥?

여기서 전영중이 왜 튀어나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성준수가 습관처럼 틀어놨던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이름에 수건을 놓쳤다. 전영중? 그 전영중 아니지? 하지만 농구판에 전영중은 한 사람인데? 부정도 못 하게 8시 뉴스가 자료화면으로 그 전영중의 사진을 크게 띄운다.

시바, 좆됐네.

성준수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달려가 핸드폰을 주웠다. 이건 전영중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에는 전영중 이름으로 부재중 전화 세 통이 찍혀있었다. 시이바, 진짜 좆됐나본데? 통화를 누르자 발신음이 제대로 울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받았다.

"전영중, 괜찮냐!?"

하하, 준수야....... 전영중의 목소리가 느긋하게 흘러나왔다.

비상이다. 술도 안 마셨는데 여유롭게 말하는 전영중? 백퍼 문제 있다. 술 마셔서 이 상태여도 문제 있고. 얘는 경기 전날에 절대 금주거든. 성준수는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머리를 털며 속옷과 양말을 꿰어 입었다. 마음이 급했다.

-아니.

여기까지가 경기 마치고 피곤에 찌들은 몸으로 오밤중에 부산까지 달려 내려오게 된 경위다.

부산역에 내려 이제 표지판도 보지 않고 방향을 잡았다. 성준수도 제가 이렇게까지 부산에 자주 오게 되리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괜히 제2의 수도가 아닌가 보지. 전영중이 들으면 그딴 말 하지 말라며 바닥을 구르며 제 몸으로 닦아댈 소리였다. 실제로 구른 적 있었고. 드래프트에서 티렉스의 지명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엉덩이를 떼던 전영중. 우리 무슨 저주 걸린 거 아냐? 기껏 동거 시작했는데 또 찢어진다고? 또 부산이라고? 나 그냥 농구 때려치우고 내조나 할까? 집에 오자마자 거실에 쓰러져 한다는 말이 그따위라 탱글한 엉덩이를 걷어찼다. 야. 닥치고 내려가. 내가 재첩국 맛집 보내줄게. 그날 성준수는 거실에서 자야 했다.

지금 이런 따스한 추억을 상기할 때가 아니긴 했다. 성준수는 택시를 잡으려다, 근처 마트에 들어가 봉지에 밀키트를 가득 채워 나왔다. 경험적으로 지금 전영중에게는 이게 필요했다.

티렉스에서 잡아준 숙소 앞에는 아니나 다를까 방송사, 신문사에서 나온 기자들과 그들을 막는 사성그룹 경비업체 직원들로 프레스 존을 방불케 했다. 공중파에 통신사... 뭐야, 디스패치는 왜 왔어?

이럴 거 같긴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대담한 성준수도 조금 위축됐다. 내가 뭐 못 올 데 온 것도 아니고. 어깨에 힘 딱 주고 양옆으로 갈라선 기자들 사이를 저벅저벅 걸어갔다. 어, 성준수 선수? 스포츠티비 기자가 알은체했지만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호출벨을 누르려는데 경비업체 직원이 가로막는다. 입주민이십니까? 아뇨, 방문인데요. 몇 호 방문입니까? 제가 그것까지 말해야 합니까? 말씀하셔야 합니다. 기자들 다 듣게 전영중 몇 호에 사는지 말할까요? 전영중 씨는 방문 금지입니다. 이때부터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댁들 걱정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비키세요. 안 됩니다. 아니 전영중 호출해서 문 열어주면 허락인 거잖아요. 안 됩니다. 찰칵찰칵. 아니 씨, 안 되기는... 왜 자꾸 안 된대? 안 됩니다. 그쪽이 뭘 안다고 안 된다는 건데?

"내가 애인 만나러 간다는데 왜 막냐고!"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준수야, 무슨 번개 치는 줄 알았어. 대낮같이 번쩍거리던데."

번호키 첫 숫자를 누르자마자 전영중이 문을 열었다. 신발장에 비뚜름하게 기대 내뱉는 얼굴을 빤히 보다 뺨에 찹, 손을 얹는다.

"불쌍한 새끼."

"자기야아......."

말랑한 뺨을 조물거리자 전영중이 우는 소리를 내며 무게를 실어 매달렸다. 아니, 불쌍한 새끼는 아닌가? 솔직히 하루아침에 사성그룹 후계자 되기? 개꿀 아냐? 그러나 상대가 전영중이다. 성준수라면 이제 황태자의 삶을 누려보실까, 하며 열 손가락에 다이아반지 끼고 공 튀길지 모르지만 전영중은 제가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은 부담스러워했다. 먹기야 주는 대로 잘 처먹었지만.......

"이거 깜짝 카메라지? 전 국민이 전영중 놀리기 중인 거지? 그치? 이게 말이 돼?"

"영중아."

"으응."

"네가 손흥민도 아니고, 아무리 유명해져봤자 한국 농구선수따리인데 그렇게까지 공들여 깜짝 카메라 하진 않지."

그렇...지. 맞는 말이긴 한데 어째 서운하네. 급속도로 식은 분위기에 전영중이 몸을 일으켰다. 밥은 먹었냐? 아니 아직. 몇 시인데 아직이야.

익숙하게 냄비를 찾아 인덕션에 올린다. 시작은 부대찌개 밀키트 2인용 2봉지부터. 내일 아침 얼굴이 두 배로 붓더라도 지금은 잔뜩 스트레스받은 남친을 맵짠으로 달래줄 시간이었다.

빠르게 익어가는 부대찌개에 성준수를 뒤에서 끌어안고 구경 중이던 전영중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등에 맞닿은 배에서 꾸르륵, 잘게 떨리는 소리까지. 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어서....... 민망한듯 이어지는 변명에 손을 들어 머리를 툭툭 쳤다. 그럴 거 같더라.

라면 사리 세 개 넣어 끓인 부대찌개를 전영중은 야무지게도 먹었다. 후식으로 내놓은 샤인머스켓 한 송이까지 깔끔하게 해치우고 한결 누그러진 정신으로 성준수에게 기대앉는다.

"넌 알았냐?"

"드래곤재랑 육촌인 거?"

"어."

"너는 네 육촌 얼굴 알아?"

"만난 적 있을지도? 근데 기억 못 하지."

그치. 어디 종갓집 아들이 아닌 이상에야 기억하려 하지도 않지. 보통 그렇지. 끄덕끄덕. 근데 드래곤재가 육촌이면 기억할 만하지 않냐. 근데 난 모르니까. 우리 집 외가 쪽이랑은 교류 거의 없어. 아 그럼 모를 수 있지. 끄덕끄덕.

"너 사성그룹 상속받게 되면 그쪽 돌림자 써야 하나?"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아니, 심각해. 전용중은 존나 구리다고."

"전씨 집안 사람이 이씨 집안 돌림자를 왜 써? 그리고 내 돌림자 '중'이라서 바꿔야 한다면 전영용이나 전영재 아닐까."

어쨌든 구린 건 매한가지였다. 니 개명할 거면 헤어지자. 전영용이랑은 못 사귄다. 전영재라는 사귀고? 아니, 차단하고 번호 바꿀 건데. 부른 배로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푸스스 웃는다. 제 긴장을 풀어주려는 성준수의 헛소리였다.

하여간 성준수의 방법이 유효한 건 분명했다. 조금 전까지 포멀한 정장 입고 사성전자 회장 전영중으로 국회 출석하는,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르는 아득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녹아내렸으니.

이래서 연애하나 보지. 성준수는 이제 전영중의 섬세한 감수성을 짐작할 줄 알았고 응당 달래주었다. 숨이 조금씩 느려지는 걸 느낀 성준수가 어깨를 문질러 깨운다. 야, 들어가서 자. 응, 너도....... 한 몸처럼 엉겨 붙은 두 사람이 자연스레 침대에 함께 눕는다. 성준수는 한밤중 부대찌개의 업보로 못생겨질 게 분명한 남자친구의 얼굴을 한참이나 주물렀다.

그렇지만 내가 사실 대한민국 일짱 재벌의 상속자?라는 하이틴인지 막장인지 하여튼 그런 드라마 주인공이 어디 편하게 살던가. 온갖 기자회견과,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주변인의 변화, 라이벌의 질투와 시기, 음모와 협잡이 난무하는 이 거지 같은 정재계에 버려진 전영중.

—같은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아직은. 그러나 상속자 전영중의 고난이 지난밤을 끝으로 정리됐을 리가 없었다.

피곤했던 건 전영중만이 아니었던지라 성준수 역시 알람 다섯 개를 모조리 끄고서도 한 시간 더 지나서야 일어났다. 여덟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운동 늦겠는데. 어차피 부산이니까 지각 확정이지만. 감독님께 당분간 부산에 있다 경기 날 올라가겠다고 말씀드려 볼까. 퉁퉁 부은 눈으로 핸드폰을 보자 간당간당해진 배터리와 백 개가 넘는 메시지 알람이 보였다. 어, 시발? 전영중이 깨지 않게 조심히 갖고 온 걔 폰에는 +999가 찍혀있었고.

"왜... 감독님이 나 찾아?"

베개에 얼굴을 박고 있던 전영중이 느릿하게 폰을 가져간다. 역시 퉁퉁 부어 눈인지 입술인지 구분 안 되는 것을 겨우 뜨고 보더니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 이후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둘 다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려 채팅방마다 답장 보내고 링크를 눌러보느라 정신없었다. 형 이게 왜 뉴스 탔어요? 괜찮아요? ㄹㅇ임? 도움 하나 안 되는 안부 문자는 무시했고.

전영중과 성준수가 부대찌개 끓여 먹으며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던 사이 발행된 수백 개의 인터넷 기사를 요약하자면.

1. 전영중은 사성그룹 상속자로 기정사실이 되었으며,

2. 그에게는 5년 넘게 사귄 애인이 있는데,

3. 동성의 농구선수인 성준수로 둘은 후로 게이다.

가장 빠르게 올린 곳은 디스패치로, 경비업체 직원에게 핏대 세우며 소리 지르는 성준수를 예쁘게도 찍어 올렸더랬다. 농구선수도 공인으로 쳐야 하나? 초상권 보호 좆같이 하네. 실명에 얼굴까지 다 까버리고. 그러나 성준수는 평소 척수반사처럼 내뱉던 욕을 꾹 참았는데,

"야아아아아아악!"

하고 소리 지르는 전영중은 진짜, 엄청, 무척이나 희귀했기 때문이다.

하, 시발. 성준수가 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아무리 빡쳐도 저기야, 친구야, 성준수라 부르는 게 맥시멈인 전영중 인생에 야 발언은 딱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중학생 성지수가 저 좋아한다는 남자애한테 스토킹 당했을 때였고(성준수가 나서기도 전에 그 새끼 앞니를 털었다), 두 번째가 지금이다.

"야, 진짜 미쳤어? 너는 시발, 안 들여보내 주면 나한테 전화하든가! 지금 게이라고 동네방네 광고해? 조선일보 전화해 줘? 우리 전면광고 낼까? 전영중 성준수 후장 섹스하는 게이 새끼라고?"

"아니, 자기야 들어봐."

"개빡치는 소리 할 거면 다물자."

"조용히 할 게 자기야."

아이씨 이거 안 통하네....... 평소면 자기야 소리에 화내다가도 광대를 부풀리던 녀석이 이를 악물고 내뱉는 말에 침묵하기로 했다. 어쩐지 어제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지더라. 기자들이 방문자라고 그냥 찍은 게 아니었구나? 아주 대놓고 기사 쓰라고 발악했네? 연달아 내뱉는 말에 반박 없이 고개만 숙인다. 그래봤자 퉁퉁 부은 얼굴이라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성준수도 눈치라는 걸 볼 줄 아는 인간이다. 원래 빡침 역치 높은 애들이 눈 돌아갔을 때 더 대책 없기도 하고.

눈치 본다는 게 이 상황이 끝나길 마냥 기다리겠다는 뜻은 아니다. 전영중은 자고로 사연팔이에 약했다. 일단 입술 한번 축이고. 대 개인 방송 시대에 어떻게든 수요층을 만들어 내고자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오는 크블티비 덕에 프로선수 성준수는 카메라를 마주할 기회가 늘었다. 그게 저기해서 그랬다던 수준의 문장 구사력이 조금이나마 좋아졌단 소리다.

"당황해서 그랬어."

"그게 뭐 얼마나 당황할 일이라고......!"

"8시 뉴스에 네 얼굴 나오는데 그럼 안 놀라냐? 너랑 전화 끊자마자 그, KTX 타고 달려 온 거야. 나 어제 경기였던 거 알잖아, 영중아. 내가 피곤해 뒤지는 것보다 네 멘탈이 더 걱정됐다고. 근데 밑에서 막길래 마음이 급해서 나도 그만......."

거짓말은 아니니 말이 술술 나온다. 따지자면 이 행위는 성준수에게 연인 사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도리니 구태여 말할 필요 없는 것에 속했다. 그러나 제가 들으면 '뭐 어쩌라고 니 생색내냐?'만 튀어나올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처럼 들린다는 걸 이제는 안다. 전영중이라든가, 또는 전영중이라든가.

과연, 전영중은 눈을 치뜨면서도 성준수의 입을 막지는 않았다. 좋은 징조다. 성준수는 재계약할 때처럼 최대의 화술을 발휘한다.

"그리고 우리 게이인 거 어차피 농구판에서는 다 알고 있었잖냐. 시간문제였다고 본다."

성준수가 매번 연봉협상에서 망한 이유였다. 씨발, 준수야....... 전영중이 이마를 짚었다.

"어차피 부모님들도 다 아시고......."

"입."

"응."

내가 또 너의 섬세한 무언가를 박살 냈구나. 존나 어렵다 진짜. 성준수는 입을 다물고 무릎을 치고 벌떡 일어나 '아니 근데'로 반박하려는 자아를 꾹 눌렀다. 아니 근데 농구판에서 알고 있나 더 넓게 퍼지나 그게 그거 아냐?

"준수는 아웃팅이라는 말 알아?"

"따지자면 아웃팅에 커밍아웃을 같이한 거지."

"야."

"알았어. 미안해. 꼬투리 안 잡을게."

준수, 까지 진정했다가 다시 튀어나온 야 발언에 꼬리를 내린다. 아이씨 까다롭게 구네. 덩치는 소만한게....... 게이 새끼니까 게이 새끼라고 뉴스 나지 언제까지 숨길 수 있다고. 사성그룹 후계자가 게이면 오히려 좋은 거 아냐? 대한민국 LGBT에게 희망적인 소식 아니냐고.

"......그래도 게이 뉴스 덕에 사성 쪽 걱정은 좀 덜었네."

"그래?"

역시 남자친구가 최고지? 같이 있으니까 든든하지? 불쑥 고개 든 자신감에 무어라 말하려는데 부은 눈을 꾹꾹 누르던 전영중의 입이 먼저 열렸다.

"게이라고 조리돌림당할 생각에 사성은 이제 뭐 문제 같지도 않다.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덮는다는 게 이런 건가?"

그냥 전영중이 허락할 때까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성준수는 감독님께 전화드린다는 핑계로 거실로 도망쳤다.

그래, 전영중 선수 얘기는 나도 들었다. 잘 챙겨주고. 단체훈련은 며칠 빼자. 그래도 일주일은 안 넘기는 쪽으로 해봐. 경기 날 보자.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판이라는 게 이래서 좋았다. 농구선수였던 사람이 감독 하고, 농구선수였던 사람이 키운 애들을 농구선수였던 사람이 뽑는다. 전영중 하면 그 팀의 누구라도 대략 견적은 뽑아줄 수 있단 소리다. 걔 게임 들어가면 집중 잘하긴 하는데 이번 일이면 멘탈 완전히 나갔을걸요. 트레이딩에 풀렸다가 우리 팀이 될 수도 있는 선수를 매정하게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티렉스 애들이랑 훈련하면서 뭐 전략 같은 것도 한 번 떠보고. 그건 페어플레이 정신 위반 아닌가요. 마! 전쟁터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일단 이기고 봐야 하는 거야. 이거 다 정보전이야! 소싯적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군 면제 받은 감독의 발언이었다.

그렇게 두 구단 간 비공식 합의로 성준수는 전영중의 멘탈케어와 스파이의 임무를 띠고 티렉스로 출근했다. 어느 쪽도 엄청 소질 없어 보이지만 일단은 그렇게 됐다. 단체훈련은 당연히 안 되지만 체력단련실과 코트는 써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기자들 사이를 뚫고 나오느라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

"같이 출근하니까 우리 꼭 같은 구단에 있는 거 같다. 다음 시즌에 이적하면 안 돼?"

"재첩국이 입에 맞았나 나도 내려오라 이 지... 이러네."

그새 싸울 뻔한 위기가 한 번 있었고.

간밤에 전영중을 달래주느라 제대로 파악 못 한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너 정말 사성그룹 상속자가 맞냐? 얘기가 나온 건 맞는데 확정은 아니다. 경비업체는 기자들이 하도 난리니까 보내준 거다. 오늘 경기라 자세한 건 경기 마치고 얘기하기로 했다.

근데 왜 어머님이 아니라 널 상속자 삼는 거냐? 사성그룹 방침이 여자 회장은 안 된단다. 지랄도 풍년이다. 동감이다.

근데 너도 모를 정도로 교류가 없었던 게 말이 되냐. 할아버지 대에서 아주 원수 보듯 대하고 연을 끊었다.

"외증조할아버지께서 가게 지점을 크게 키우셨는데 형한테 홀라당 뺏기고 팽당하셨대."

"연 끊으실 만했네."

"어쩐지 가전제품도 지엘전자만 쓰시더라고. 폰은 사과폰."

"아하."

역시 연 끊는 데는 금전 문제만 한 게 없지. 전영중은 묻는 말에 착실히 답하며 거친 부산 시내를 운전했다. 빠아아아앙! 깜빡이 한 번 만에 끼어드는 차를 향해 클락션 누르는 표정이 평온했다. 3년 전까지는 없던 운전 습관이다. 부산 사람 다 됐네. 이렇게 말하면 화내겠지?

"그래서, 만약 받아야 한다고 하면 네가 이어받을 거야?"

노란불 끄트머리에 가속해 교차로를 지난 전영중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얘 운전 이렇게 안 했는데 진짜 부산 사람 다 됐네.

핸들을 꺾으며 전영중이 물었다.

"너라면 어떻게 할 거 같아?"

"뭘 어떡해. 받겠지. 나 아니면 안 된다는데."

"아니, 안 되는 건 아니고. 그쪽도 다른 사람 찾아보고 있긴 한데... 그렇게 대충 대답하지 말고 성의 있게 생각 좀 해! 네 애인 고민 중이잖아!"

"왜 화를...... 아니 어차피 나한테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뭐 하러 고민해?"

"준수야, 가정 몰라? 혹시 만약에라는 단어는 알아?"

존나 말도 안 되는데 뭔 만약에야. 그러나 성준수는 의자에 깊게 기대고 순순히 가정해 본다. 내가 사성그룹 후계자고 갑자기 그룹 전체를 상속받는다? 역시 개꿀인데? 당연히 받아야지. 그렇지만 농구는 해야 하니까 상속 이런 건 변호사 세무사한테 알아서 하라 시키고. 경영도 전문경영인한테 맡기고. 아, 그래. 기왕 재벌 된 거 농구 부흥 프로젝트를 해야겠다. 협회에 지원금 빵빵하게 넣어서 유소년 지원 프로젝트 만드는 거 괜찮지 않아? 농구하고 싶은데 사정 안 되는 애들이나 수술받아야 하는 애들 재활까지 지원하는 거지. 드라마 제작사에 협찬 넣어서 농구 미니드라마 몇 개 만들어 홍보하고. 우리 학교 스토리 드라마틱하니까 그걸 드라마화해도 되겠다. 영화도 만들고. 그리고 전현직 농구선수들 비시즌에 구단별 할당제로 잘생기거나 말 잘하는 애들 예능 내보내고. 공중파 스포츠뉴스 시간에 농구 뉴스 무조건 넣게 할 거야. 케이블에 농구 중계 정규로 넣고. 아예 골프 채널처럼 농구 채널 만들까?

"그... 말 끊어서 미안한데, 가정하고 말하는 거다? if라고."

안 내켜 하더니 어느새 신나서 늘어놓던 성준수의 입이 멈췄다. 아, 하아 시발.

지금 예산 때려보고 있었는데. 내 농구 부흥 프로젝트. 좆같네. 존나 허무하다. 이럴 거면 묻지나 말든가. 중얼거리던 성준수가 의자를 젖히고 누웠다. 누가 봐도 실의에 빠진 모양새였다. 아니, '만약에'인데 이렇게까지 진지할 일인가....... 오버한 건 성준수지만 시킨 건 전영중이었으니 어쨌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딱 솜사탕 물에 씻어서 날린 너구리 된 기분이다."

"그거 보통 내 역할이던데......."

"뭔, 니 솜사탕 씻어 먹냐?"

"그런 뜻은 아니고......."

잠시 솜사탕과 전영중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보던 성준수는 이내 솜사탕을 머리에서 치웠다. 이런 생각을 길게 하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으므로. 대신 같은 물음을 던진다. 그럼 너는 재벌 되면 뭐 하고 싶은데?

어느새 그들은 사성그룹은 쏙 빼놓고 넘쳐나는 상속자의 돈을 어떻게 처리할지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음, 나는 일단 블랙카드를 발급받을 거야. 그리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메뉴판 들고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해보고 싶어."

사뭇 진지한 대답이었다. 대충 이해는 갔다. 그런 곳의 1인분은 둘이 합쳐 .2톤에 육박하는 남자들에겐 너무 적었고, 여러 개를 시키자니 너무 비쌌다. 무엇보다 분위기 잡자고 가는 곳에서 늘어놓고 먹기는 좀... 멋없지.

그러나? '여기부터 여기까지 주세요'를 해버리면 그때는 배고픈 돼지 둘이 아니라 플렉스 하러 온 커플이 된다. 물론 접시는 싹 비우겠지만, 주문만은 기깔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이 커플인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성격 차니 뭐니 수시로 싸워도 결국 똑같은 놈들이란 소리다.

"괜찮은데?"

성준수 역시 살면서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짓이었다.

사실 성준수가 부산까지 달려온 데는 오늘 티렉스의 경기 일정이 잡힌 이유가 제일 컸다. 전영중이 경기 직전에 멘탈 터져서 출전도 못 하고 끙끙 앓는 꼴은 제가 못 볼 것 같아서. 만약 어제가 전영중의 경기고 오늘이 성준수의 차례였다면 성준수는 내일 경기 마치고 내려간다며 너 알아서 버티라고 만 하루는 방치했을 터였다.

성준수는 가볍게 몸을 풀고 전략을 복기하는 팀과 동떨어져 홀로 체력단련실을 사용했다. 이윽고 도착한 상대 팀이 성준수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다 이내 알만하다는 듯 웃었다.

"상속자 남친 벌써부터 관리하는 거야?"

"그딴 미친 소리 전영중 앞에서는 절대 하지 마라. 걔 이 일로 얼마나 스트레스받는데."

"하하, 그래. 경기는 볼 거지?"

"당연히 봐야지."

이규가 손을 설레설레 흔들어 인사하고 간다. 원래 그리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 대화가 적당했다. 홈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저지를 걸친 전영중이 그들과 인사 나누며 제게 왔다.

"나 찾으러 왔어?"

"아니... 응. 슬슬 기자들도 들어오는데 안 보이길래......."

씻기 전이라 땀에 절었는데 전영중은 개의치 않고 끌어안는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는 게 아무래도 심상찮았다.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기자들이 평소보다 많은 것 같아서."

아. 그럴 수 있지. 기자만이 아니라 소문의 전영중 얼굴 보자고 찾아온 사람들로 관객석을 꽉 메울지도 모른다. 매진된다면야 구단에게 좋은 일이라지만 글쎄. 모두 순수하게 전영중 얼굴 한 번 보고 경기를 즐기러 왔다면 좋겠지만 분명 아닌 놈도 있겠지.

"뭐가 걱정되는데."

"그냥. 다."

"말을 해야 알지."

"그냥 오늘 경기 못 뛰겠다고 말할까 봐."

"넌 남자친구가 오랜만에 부산까지 와서 직관하는데 경기 뛰는 거 안 보여줄 거냐?"

깊게 숨을 들이마신 전영중이 웃는다. 땀 냄새. 향기롭지? 어어 그렇다고 치자, 자기야. 실없이 농담이나 하는 동그란 머리를 토닥이며 달랜다. 말해봐. 다 들어준다니까. 허리를 감싼 힘을 더해 바짝 당기자 뒤꿈치가 슬쩍 들릴 정도였다.

사람들이 게이 새끼라고 욕할까 봐 무서워. 또? 너도 같이 욕먹을까 봐 무서워. 또. 주제도 모르는 미친놈이라는 소리 들을 것 같아. 미친 새끼라는 말은 나한테 맨날 듣잖아? 너한테 미친 건 맞으니까 그건 타격 없어. 우와 시발, 또. 사성그룹이 너랑 헤어지라 그러면 어떡하지. ...응? 후계 봐야 한다고 모르는 사람이란 정략혼 시키면 어떡해. ...으응, 또. 게이는 사성그룹 회장 할 수 없다고 너랑 강제로 헤어지고, 농구도 그만두게 해서 너랑 못 만나고, 사실 게이 아니었다고 정정보도 나가고, 우리가 사귄 시간이 없던 일이 되면? 나 다른 여자랑 결혼 못 해. 안 설 거 같아. 너 아니면 섹스 안 할래. 너랑 헤어지기 싫어 어떡해.

진짜 이 새끼를 어떡하지. 반사적으로 튀어나가려는 욕설을 참고 제가 티렉스 홈구장에 있는 이유를 가까스로 떠올렸다. 나는 전영중을 도우러 왔다. 반드시 온전한 멘탈로 경기에 내보내야 한다. 너른 등을 힘주어 토닥였다. 그랗지만 어쩌다 생각이 저와 헤어지는 것까지 흘러갔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섹스는 또 중요해? 물론 중요하긴 하지.......

성준수는 니 제정신이냐고 반박하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참아야 한다. 전영중은 지금 일생일대의 고민 중이고 나는 그걸 함께 해결해야 하는 애인이다. 이 새끼는 차기 사성그룹 회장이다.

한참 속을 다스리며 전영중을 토닥이느라 엉겁결에 다정한 연인 행세에 성공한 성준수가 마침내 그를 떼놓았다.

"영중아."

"응?"

"그냥 저질러."

뭘 저질러? 이미 저지를 건 네가 다 저질러놓은 거 같은데. 뜨끔했지만 성준수는 생각해 둔 말을 마저 뱉었다.

"정 못 견디겠으면 멋있게 볼 한번 넣고 세레머니로 성준수 사랑한다고 외쳐."

"미쳤나......."

"아예 못을 박으라고. 오늘 기자들도 다 와있을 거 아냐."

"아니, 진짜 게이라고 광고라도 하라는 거야? 남의 일이라고 막말한다?"

"어차피 전 국민이 알게 된 거, 아예 네 입으로 말하라고. 멋있게."

"그게 멋있어?

"니가 멋있게 하면 멋있겠지? 너 굳이 안 해서 그렇지 폼나는 거 잘하잖아."

갑작스러운 칭찬에 말문이 막혔다. 폼 난다고 생각했어? 그렇구나. 네가 봐도 멋있었구나. 전영중이 수줍게 웃자 성준수도 따라 웃었다. 복잡한 건지 단순한 건지. 하여간 이상한 새끼. 부기가 다 빠진 뺨을 툭툭 친다.

"가서 외치고 와. 그러고도 헤어지라는 소리 나오면 부자 돼서 남친 차버린 사람이라는 소리 들어서 안 된다고 뻗대면 될 거 아냐."

그래서 전영중이 성준수 사랑해 세레머니를 했냐 하면.

했다. 백보드를 부술 것 같은 파워풀한 덩크 후에 그렇게 외쳤다. 1층 관중석 제일 뒤에 서 있던 성준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제가 시켜놓고도 진짜 하면 쪽팔릴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들으니 기분이... 좋더라.

전영중 미친 새끼. 성준수는 씩 웃으며 핸드폰을 들고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다시 말하지만 두 사람이 커플인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경기 끝나고 성준수가 다짜고짜 데려간 곳은 호텔 스카이라운지 식당이었다. 이런데를... 이렇게 입고 와도 돼? 전영중은 제가 입을 운동복을 내려다보았다.

"야, 뭐해?"

피케 셔츠에 면바지를 입은 성준수가 말했다. 아니, 너는... 운동복이 아니기라도 하지. 이렇게 입고 나타나면 TPO 안 맞아서 식당 입구 컷이라고. 이런데 올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하란 말이야.

결국 성준수가 제 손을 잡아 성큼 들어갔다. 의외로 거절 없이 12명은 족히 앉을 룸에 무사히 입장하고 메뉴판이 놓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 룸을 둘이 쓴다고?? 이런 룸은 최소 주문 금액 있지 않아?

"해보고 싶다며."

"뭐, 뭘......."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그거."

그걸 지금? 갑자기? 여기서? 아니, 부자 되면 해보고 싶다는 거였지 이렇게 다짜고짜는 아니었는데? 나 카드도 없는데? 핸드폰에 깔린 사성페이밖에 없다고. 그 와중에도 성준수는 매너 있게 의자를 빼 제 남자친구를 자리에 앉혔다.

"준수 이런 매너 있는 짓 어디서 배웠지?"

"매너가 있어도 문제냐? 아무튼, 해봐."

그래 놓고 저는 대강 의자를 빼서 삐딱하게 앉는다. 몸을 쭉 빼 전영중 쪽으로 기대서는 메뉴판 아무 데나 펼치고 굳어있는 녀석 대신 본식으로 페이지를 넘겨준다.

"내가 재벌 3세는 아니지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재벌도 별거 아니라고. 그러니까 쫄지 말고 시켜."

당연히 허세였다. 먹음직하게 플레이팅 된 스테이크 사진 옆 5종의 스테이크 메뉴 가격을 빠르게 암산한다. 그것만으로 40만 원이 조금 넘었다. 앞의 애피타이저와 뒤의 파스타까지 하면....... 성준수는 잘게 떨리려는 손을 꽉 쥐었다.

준수야아....... 전영중은 감동받아서 메뉴판을 쥔 손을 감쌌다. 추운가, 손이 차네.

"와인도 시킬까?"

"......당연하지."

아주 탈탈 털어먹는구나 시바 거. 그러나 성준수는 기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오십만 원이 깨지나 백칠십만 원이 깨지나 어차피 박살 날 통장이다. 고작 와인 한 병에 연연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렇게 전영중은 꿈의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를 말하게 된다. 주문받는 직원이 당황해서 네? 한 번. 여기부터 여기까지 맞으십니까? 두 번. 애피타이저부터 파스타까지 맞으시죠? 도합 세 번의 질문 끝에 무사히 주문이 끝났다.

운동선수 둘의 먹성에 접시가 빠른 속도로 비워지고 주방만 비상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애피타이저와 파스타, 스테이크를 해치우고 와인으로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져서야 전영중이 입을 뗐다.

"애들끼리 그런 얘기 하잖아."

깨끗하고 세금 문제없는 10억이 갖고 싶다던가, 이름도 모르는 먼 친척의 상속자가 되고 싶다던가. 장난으로 내뱉는 그런 말들 말이야. 나는 그랬어. 내가 무슨 패리스 힐튼도 아니고 갑자기 뭔 상속자냐. 난 그런 큰돈 무섭더라. 농구하면서 연봉 받아 잘 먹고살면 되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

"굳이 고르자면 패리스 힐튼이 키우는 강아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패리스 힐튼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건 안 되지. 개는 농구 못하잖아."

"...그게 요점이 아니잖아."

"어쨌든 안 돼. 농구는 해야 할 거 아냐. 니 농구 하고 싶다며."

진짜 답답하다. 됐으니까 그냥 들어. 아니, 개는 농구를 못 한다고. 그냥 좀 들으라고. 너 취했어? 순식간에 와인 한 병을 해치우고 취기 오른 두 사람이 쓸데없는 걸로 언성을 높인다.

"내가 패리스 힐튼의 강아지가 되고 싶다 해서 지금 당장 사족보행 짐승으로 변하는 것도 아닌데 말도 못 해?"

"가능성이 .1%여도 말하지 마. 닌 나랑 농구해야 하니까."

"준수야. 고맙긴 한데 당연히 0%라 로맨틱하려다 말았어."

"로맨틱하라고 한 말이 아니라 존나 진심이었는데."

"아니... 하, 그래. 어쨌든 하루종일 생각해 봤단 말이야. 나도 사성이랑 얘기하려면 마음을 정해야 하니까."

이 말 하나 하기가 이렇게 힘든가. 쓸데없는 실랑이로 기운 빼고 목을 축이려는데 와인잔도 병도 비어있어 그냥 물이나 마셨다. 와인 한 병 더? 그래, 마셔라 마셔.......

"나 농구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상속받으라고 하면 받게."

"......그래?"

"응. 내가 그만두더라도 너는 계속할 테니까."

다 식은 뇨끼를 콕 찍어 입에 넣는다. 농구 안 하는 전영중을 생각하면 제가 더 아쉬웠다. 그러나 남의 선택에 함부로 말을 얹을 수도 없는 일이다. 저 생각 많은 녀석이 결심했다면 이유가 있겠지. 관성적으로 사는 녀석이 변화를 택할 만큼 중요한 이유가.

"그리고 상속받으면 그거 하자. 농구 부흥 프로젝트."

그러나 그 이유가 제가 되길 바란 적은 없었다. 성준수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꽉 다문 입 끝을 전영중이 문지른다. 하하, 여기 크림 묻었다. 장난스러운 손을 사납게 쳐낸다. 이게 진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야, 그거 그냥 한 말이었어. '만약에'였잖아."

"근데 넌 진짜 아쉬워했잖아."

"그딴 이유로 농구선수 때려치우고 회사나 경영한다는 게 말이 되냐?"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 나 원중고에 두고 떠난 준수 드라마화되는 건 봐야지."

"지랄 말고."

"준수야."

커다란 손이 와인을 채운다. 내려놓은 잔에 제 것을 가볍게 부딪치고 입에 가져가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젖을 것처럼 우울했다.

"코트에서 안 뛴다고 농구 그만두는 건 아니잖아. 선수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지원하겠다는 거야."

시발, 전영중. 진짜 별소리를 다....... 알코올에 뇌가 촉촉하게 적셔진 두 사람에게 전영중 은퇴라는 비극적인 미래는 이미 확실시 된 것처럼 느껴졌다. 성준수는 머리를 헤집고 전영중이 채워놓은 잔을 들었다. 절반쯤 찬 것을 단번이 들이키고 알코올이 15%가량 함유된 숨을 길게 뱉는다. 야, 근데.......

"상속받는 거 확정도 아닌데 왜 확정처럼 말해?"

"준수야, 분위기."

"아니, 진짜로. 네가 1순위인 거 확정이야?"

"너 와인이 아니라 휘발유 처먹었냐? 로봇이야? 어머님이 낳으실 때 감수성 깜빡하셨어?"

"너 1순위냐고 묻는데 우리 엄마 얘기가 왜 나와? 그리고, 농구 부흥이든 뭐든 네가 돈을 받아야 할 거 아냐!"

"아니, 지금 네 원대한 계획을 위해 내가 농구 그만두겠다는 데서 감동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가 시켜서 그만두는 것처럼 말한다?"

와인 두 병에 취해 감정조절 못 하는 애새끼 둘이 진심으로 싸우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마 기물파손은 못 하고 왁왁하며 싸우다 전영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성준수가 평소보다 0이 두 개는 더 붙은 금액을 결제하고 택시를 탔다.

각자 대리기사와 택시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 앞에서 재회한 둘은 쿵쾅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게 서로에 대한 최대의 항의였다. 아랫집 사람이 층간소음으로 항의하러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으나 구단 임대 아파트라는 건 이럴 때 좋았다. 올해 드래프트로 들어온 신입은 영중이 형이랑 준수 형 기분이 안좋으시구나... 하며 가만히 귀를 막았다.

각방 쓸 줄 알았던 둘은 준수야아 나 사실 농구 그만두기 싫어... 하고 비련의 주인공마냥 훌쩍이고, 그런 제 애인의 동그란 머리를 끌어안은 채 불쌍한 새끼... 하고 도닥이며 침대에서 재회한다. 이내 침실에서 반복되는 층간소음에 아래층 후배는 귀마개를 꼈다. 음, 영중이 형이랑 준수 형 화해하셨구나. 빠르네.......

지독한 와인 숙취에 시달리며 잠에서 깼다. 두 병을 시켰으니 딱 한 사람당 한 병씩 마신 셈이다. 죽겠네, 진짜. 성준수는 핸드폰을 찾아 더듬거리다 제 옆에 맨살 그대로 드러낸 몸을 철썩 내리쳤다. 매서운 스냅에 몸을 비틀자 그 아래 깔려 연신 진동을 울리던 핸드폰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부터 뭐야? 제 앞에 도착한 메시지 백여 개에 놀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전영중 핸드폰을 찾는다. 아니나 다를까, 걔 폰은 +999에 전원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씨발, 메시지 때문에 노이로제 걸릴 거 같네. 성준수가 제 폰을 확인하며 전영중 것을 세워 널찍한 가슴에 그대로 찍었다.

"헉, 어억... 준수야, 나 갈비뼈 나갔나봐......."

"지랄 말고 네 폰 터지기 직전이니까 확인해. 또 뭔 일 났나 본데?"

슬그머니 눈을 떠 화면을 확인한 전영중이 튕기듯이 몸을 일으킨다. 아, 씨.......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바쁘게 카톡방을 순회한다. 이번엔 또 뭐지? 준수 나 없을 때 또 이상한 소리 했어? 성준수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전영중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또 말없이 링크를 클릭하고 대답하기를 한참이었다.

범람하는 정보를 정리하자면, 지난밤 혈관에 와인을 흘려보내고 뜨거운 밤을 보내던 사이 저 멀리 북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사성서울병원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는데.

1. 혼수상태였던 이용재 회장이 정신을 차렸고,

2. 숨겨둔 혼외자식이 있다고 밝혔으며,

3.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를 입적시킬 예정이다.

드래곤재는 일반 병실로 옮겨져 무사히 회복 중이고, 다른 사람들의 상태도 아주 긍정적이란다. 그 긍정적인 환자 중에는 드래곤재의 아내도 있었고.

대 파란이 예상되는 사랑과 전쟁 예고편 같은 뉴스에 인터넷은 또 한 번 터져나갔다. 과연 막장 드라마의 나라다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전개였다. 어쩐지 어젯밤에 기자고 경비업체고 한 명도 안 보이더라니.

인터넷은 이미 혼외자식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느라 한국 농구선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실 일부 있긴 했는데, 신인 때부터 흔하게 키스 사진을 찍힌 마당에 새삼 게이니 뭐니 어그로를 끌어도 농구판에서는 으응 뉴비 왔니? 공아지나 보고 가렴 따위의 반응만 돌아와 금방 식을 예정이었다.

햄, 축하드립니다! 이제 다시 서울 오시면 되겠네요! 감독님이 오후 훈련 합류하라는데요? 매정하게 몰아치는 메시지는 무시한다. 구부정하게 앉아있다 먼저 입을 뗀 건 성준수였다.

"축하한다. 농구 계속 하면 되겠네."

"으응. 다행이네."

위로하는 쪽도, 받는 쪽도 매가리가 없긴 매한가지였다. 베갯머리송사 대신 세웠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와르르 무너졌다. 솜사탕... 씻겨 내려갔네. 그러게....... 어제 먹은 거 반 이체해 줄까? 됐어. 내가 너 밥 하나 못 사주겠냐.......

"그래도 뭐 하나는 건졌네."

뭐... 밥? 덕분에 든든하게 먹긴 했지. 먹고 나서 개같이 싸웠지만 화해도 했으니까. 이득인가? 이득이겠지?

어딘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성준수가 입을 열었다.

"너 올스타전 컨셉 패리스 힐튼 하면 되겠다."

그리고 이게 올스타전에 패리스 전과 그의 반려견 시바 성이 등장하게 된 경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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