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탐정사에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상황에 처한 일반인부터 단순한 공권력으로는 해결하지 못 하는 난관에 처한 경찰들까지, 광범위한 인물이 찾아온다. 각양각색의 의뢰인들을 맞이하는 탐정사답게 의뢰인의 출신에는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정부 소속의 인물, 그것도 이능 특무과의 일원이 찾아온 것을 그렇게 가볍게 받아들
현재 시각 오후 1시 반. 몇 시간 전과 다르게 주변 풍경을 볼 여유가 생겼다. 하늘이 새파랗다. 날이 참 좋다. 뭐, 그런 감상뿐이지만. 나는 지금 이번 학기 시간표를 환상적으로 잡아서 오전 수업만 듣고 바로 귀가하는 중이었다. 점심을 같이할 친구 같은 건 없어서. 하나 생긴 줄 알았던 친구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나조차 걔
다자이 오사무는 이상한 인간이었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 “그럼 죽어버리지 그래?” “너무하네에-.” “맨날 죽고 싶다 염불하면서.” “혼자 죽긴 싫다니까…. 자네가 같이,” “그 말 한 번만 더 해 봐.” 아무튼…, 내 서늘한 말에 다자이가 목소리를 줄이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가는 눈으로 빤히 그 뺀질뺀질한 얼굴을 쳐다보자 눈을 한 바퀴 도르륵
어느날, 에도가와 란포의 손목에 글씨가 생겼다. 란포는 제 하얀 손목 안쪽에 쓰여진 글씨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보면서 생각했다. 이거 파내면 어떻게 되지? 그리고 파낸다고 하면 얼마나 깊이 해야 하지? 오늘 미술 시간에 썼던 조각칼이 아직 란도셀에 있단 걸 기억해낸 란포는 혼자서 불법 시술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 그전에 칼날 소독해야지. 감염되면
분명 새벽달을 보고 오늘은 일진이 좋겠구나, 싶었더랬다. 구름이 달을 가리지 않았고 달빛이 더할 나위 없이 밝았으니까. 그러나 해가 밝아오면서 구름이 조금씩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지상에 빗방울을 조금씩 흩뿌렸다. 투둑. 툭. 땅을 적시는 소리가 곧 거세지더니 강한 빗줄기가 몰고 오는 소음으로 세상이 시끄러운 동시에 고요함에 먹혀들었다. 빗소리로 시끄러웠
코믹스 10권 정도의 시점. "면담이다." 단호한 목소리. 소파에 방만하게 누워있던 남자는 빠르게 눈을 떴다. 자는 척이 허술했다. 눈을 뜬 남자의 시야에는 사무실 천장 대신 희멀건한 뭔가가 있었다. 초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들이밀어진 탓이었다. 사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남자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 으레 말하는 것처럼 까만 것은 글
차에서 내리자 사방에서 메마른 가을 바람이 불었다. 가벼운 소재의 검정 코트와 진한 회색 맨투맨, 블랙진 차림의 젊은 남자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이 내린 좌측 운전석 문을 닫은 다음, 바로 뒷좌석의 문을 열고 머리를 숙여 차 안으로 상체를 반쯤 밀어넣었다. 잠시 후, 두 발짝 정도 뒤로 걸어 나와 여유 공간을 확보한 그가 다시 몸을 곧게
*BEAST 세계에서는 나카하라와 다자이의 첫 만남이 원본 세계와 달랐을 것이라는 날조를 포함합니다. 화장로 문이 닫혔다. 직접 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다. 나카하라는 막 꺼내 문 담배에 불을 붙이고 끝이 살짝 탈 정도로만 숨을 들이마셨다. 애써 화장장이 있는 건물 본관에서 멀리 떨어진 흡연 구역을 찾아 왔다. 별것도 아닌 소식을 전하러 온 부하
남자는 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각도며, 배치며 철저한 계산 하에 구속된 상태인 만큼 '바라보고 있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대못으로 바닥에 고정된 오른손은 상처에서 흘러넘친 피와 지혈제가 엉겨 크고 작은 고름이 차오른 것처럼 보였다. 사방이 녹물과 핏물로 범벅된 감옥 바닥과 큰 차이가 없었던 탓에
비포장도로를 달리던 검정색 세단이 크게 흔들렸다. 조수석에 앉아 좁은 창틀에 팔꿈치를 올린 채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있던 다자이는 그 덕분에 창문에 머리를 박았다. 운전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길의 문제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사람인 만큼 운전 좀 똑바로 하라는 힐난을 시작으로 여지껏 액셀과 브레이크 구분도 못하냐느니, 그만한 앉은키로
어젯밤 일이었다. 공원을 지나다 시체를 봤다. 몇 주 전부터 정신 나간 것처럼 불빛이 깜빡이는 가로등이 있던 공원이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그 땐 가로등 불빛이 깜빡이지 않아서. 공원 시설 관리 인력이 드디어 일을 했는지 어제따라 유난히 하얗던 조명이 푸석하게 흩어진 머리카락을 한가득 비췄다. 어색하게 누워 있었다. 분명 스스로 눕지는 않았을 자세로. 그 아
생각해보자, 요코하마에 처음 왔는데 세계 최고의 명탐정을 만날 확률은? 아니, 그 탐정이 요코하마에 살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렇지만 정말로 만날 확률은? 아니, 아니! 탐정사에 갈 생각이긴 했다. 얼굴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온 거니까. 요코하마라는 성지에 성지순례 느낌으로 온건데 그 성지에 성인이 살아있다고 생각해봐라. 그럼 만나고 싶겠지? 까놓고 말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