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스독] if. 上

에도가와 란포 네임리스 드림

어젯밤 일이었다. 공원을 지나다 시체를 봤다.

몇 주 전부터 정신 나간 것처럼 불빛이 깜빡이는 가로등이 있던 공원이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그 땐 가로등 불빛이 깜빡이지 않아서.

공원 시설 관리 인력이 드디어 일을 했는지 어제따라 유난히 하얗던 조명이 푸석하게 흩어진 머리카락을 한가득 비췄다.

어색하게 누워 있었다. 분명 스스로 눕지는 않았을 자세로.

그 아래 바닥은 짙었다. 짙은 색의 무언가가 스며있었다. 저 사람에게서 나왔겠지, 저건.

검게 물든 의복 끝에 남은 붉은 기를 확인하자마자 눈을 질끈 감고서 전화기를 꺼냈다. 혹시 범인이 근처에 있을지 몰라, 왔던 길로 뛰어 돌아가면서 전화했다.

그리고 이번엔, 오늘 밤 일이다.

같은 곳을 지나갔다. 그리고 같은 자리.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텅 비어있었다. 피가 스민 흔적조차 없었다.

핸드폰 화면을 켰다. 통화 목록을 봤다. 있었다. 어제 경찰에 전화한 흔적.

기묘하다.

전화한 이후에 나는 경찰서로 가지 않았다. 집으로 갔다. 경찰은 자신들이 확인하고서 다시 전화를 주겠다고만 했다.

그리고 여태 아무일도 없었다. 서에서 나를 부르는 일도 없었다. 다시 전화해볼까 싶다가도 괜히 들쑤시는 걸까봐 가만히 있었다.

통화 기록을 보다가 하얀 조명이 쏟아지는 곳을 봤다. 홀린듯이 다가섰다. 쪼그리고 앉아 이제는 주위 바닥과 똑같은 색의 바닥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검지 끝으로 훑었다.

땅과 닿았던 지문을 봤다. 아무것도 없다.

기억이 현실이었다는 증거를 한 손에 들고, 전부 망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다른 한 손에 들고서 쏟아지는 하얀 조명을 맞고 있었다. 주위는 보이지 않았다.

“살인 사건을 쫓고 있는 거야?”

그래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밤을 잊은 눈에 어둠을 돌려주기도 전에 조명 아래로 목소리 주인이 들어섰다.

케이프 차림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남자였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띈 건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그리고 위에 씌워진 챙 비뚤어진 모자. 마지막으론, 손에 든 막대사탕 하나.

남자는 사탕을 검지와 엄지 끝으로 잡고 흔들거리다가 다시 입 안으로 쏙 넣으며 덧붙여 말했다.

“범인은 결국 사건 현장에 돌아온다는데 말이야, 요즘엔 그렇지도 않아.”

그러고선 눈을 새초롬히 뜨고 사탕을 우물거리면서 어제 피가 고여있었던 장소를 신발코로 툭툭 친다.

“참, 안타까운 일이야.”

“당신도 봤어요?”

“…”

내 반가운 듯한 목소리에 남자는 시선을 바닥에서 살짝 들어올려 나를 보기만 했다. 뭐지. 내 물음이 좀 이상했나.

하지만 이상하다고 치면 내 물음 이전 남자의 말이 더 이상하다.

“너는 어떤데?”

조용히 묻는 남자의 말에 더 이상함을 느낀다. 나는, 당연히 봤지, 봤으니까 사라진 시체에 당황하고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해도 되는 걸까.

이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봤죠, 봤는데, 그런데 당신 누구예요?”

경계심이 든다. 스산한 바람이 피부에 스민다.

남자는 표정을 지우면서 사탕을 까드득 깨물었다. 그리고 막대를 입에서 쏙 빼내 바닥에 버렸다.

가벼운 종이 막대가 아스팔트 바닥에서 구른다. 쓰레기, 이렇게 대놓고 버리나. 그런 가벼운 생각을 하며 바람을 타고 멀리 구르는 막대를 보는데 시야가 어두워진다.

성큼 다가온 남자의 그림자가 내 위에 져서. 사탕 깨무는 작은 소리가 달큰한 냄새를 퍼트린다. 이거 소다향일까.

천천히 쪼그려앉아 나와 시선을 마주한 남자의 눈동자색은 초록. 떨어지는 조명에 드디어 보인 그 초록 눈동자에 라무네 구슬처럼 푸른기가 도는 것같단 생각이 드는데 남자가 말했다.

“손, 다시 한 번 볼래?”

무슨 소리야, 생각하면서도 시선을 내렸다. 손은 아래쪽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발견한 보색. 방금 본 초록의 보색.

그 초록색 눈동자가 강렬했던 걸까. 왜 손에 잔상처럼 붉은 색이 남은 것 같지?

멍하니 보고있는데 남자가 말했다.

“피잖아, 그거.”

그런 것도 몰라? 하는 어투. 실제로 다시 보니 끈적한 피가 손에 묻어있다. 이거 뭐지. 왜 묻어있지.

“뒤에 있는 시체.”

“네?”

남자는 내 물음에 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턱짓으로 뒤를 돌아보라고 재촉할 뿐. 밤이 무겁게 묻어 고개가 뻣뻣하다. 천천히 다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발견한 건 남자의 말대로 시체였다. 내가 어제 본 그대로 누운 시체였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분명. 하얀 조명이 시체에 쏟아진다. 더 자세히 보였다. 푸석한 머리카락 사이로 부릅뜬 눈에 빛이 쏟아지는데도 푹 꺼진 것 같이 느껴졌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

눈만 도르륵 굴려 남자를 다시 보니 말이 이어진다. 기다렸다가 누른 녹음기처럼.

“사건은 현재진행형이야.”

그래 보였다.

“그리고, 네 지문은 방금 시체에 남았네.”

“제, 제가 안 했는데요.”

바로 대꾸했다. 아무래도 나는 억울한 건 싫은 모양이다.

“하지만 현장에 남은 건 그뿐인걸.”

사실만을 말하는 남자의 표정이 건조하다. 하지만 당신이 증인이 되어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언제부터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그는 뭔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애당초 나보고 살인 사건을 쫓고 있는 거냐고 물었으니까. 범인이 사건 현장에 돌아오는 게 아니라고도 했고.

그러니 적어도 그는 내가 범인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내가 범인이 아니란 거, 당신은 알고 있잖아요.”

“내게 너를 도와줄 의무는 없는데.”

입꼬리를 올리며 남자는 말했다. 세상 차갑다.

처음 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아도 괜찮지만, 물론 그게 살인 사건과 관련된 거라면 더욱 그렇지만, 그래도. 뭔갈 알고 있는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그가 뭐하러 나한테 말을 걸었을까.

“도와주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요.”

내 뻔뻔한 대꾸에 남자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여 눈꼬리까지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의뢰할래, 나한테?”

당신 누군데.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남자가 바로 대답했다.

“내 이름은 에도가와 란포. 명탐정이야.”

그러니까, 탐정이란 건가. 이건 영업이고?

“의뢰하면, 확실하게 내가 범인이 아니란 걸 증명해주나요?”

“명탐정에게 불가능이란 건 없어.”

단호하게 대답하고서 한걸음 다가온 남자가 말했다.

“이능력 사건이라도 마찬가지야.”

“…이게 이능력 사건이란 거예요?”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은 것 같네.”

왠지 기분 나쁜데.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단 의미니까.

“방금 당신 입으로 말했으니 그정도야 당연히 유추하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주제에 살인 사건에 끼어든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

“난 평화가 깨지는 건 싫으면서 본인 일상을 깨는 사건이 있었으면…, 하는 건 상당히 멍청한 생각이라고 생각해.”

“그런 생각으로 여기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사람은 보통 누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나.

남자는 내 짜증스런 대꾸에 별말없이 뭔갈 주머니에서 꺼내 건넸다. 빤히 바라보고만 있자 말했다.

“손, 닦아.”

뭐야, 이 사람. 종잡을 수 없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 그렇지만 나는, 내 쪽으로 더 내미는 그 호의의 증거를 집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말하고 손을 닦았다.

잘 지워지지는 않았다. 진득하게 굳어가는 피와 건조된 손수건의 부조화였다.

“조금 더 기다려.”

열중해서 손을 깨끗이 만드는 중에 남자가 한 말이었다. 고개를 들어보자 전화중이다. 내가 아니라 수화기 건너의 상대에게 한 말인듯했다. 전화벨소리는 못 들었는데.

뭐, 진동이었겠지. 안일하게 생각하며 아직 깨끗한 천 부분에다 손톱을 닦는데, “난 재미있는 일은 조금도 버리고 싶지 않거든.” 하는 말에 고개를 들자 마주친 푸른 눈동자. 그게 내게 비끼듯 주어졌다 떨어졌다.

재미? 이 사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신에겐 이게 그냥 재밌는 일이야? 어이가 없어서 빤히 보자 태연스레 전화를 끊는 남자.

“친구야.”

“아, 네.”

그걸 설명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난 당신이 한 말의 내용이 더 신경쓰이는데.

“재미있는 이능력을 가진 친군데, 뭔지 궁금해?”

“아니요, 별로.”

“그래? 안타깝네.”

그다지 안타까워하는 것같진 않은 표정으로 남자는 전화 화면을 끈다. 그리고 새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받지 않아 조용한 중에 연결음만이 작게 울려퍼졌다.

“그, 저…, 에도가와 란포 씨?”

“란포로 괜찮아.”

“아, 네, 란포 씨. 있잖아요, 이거 당신한테 의뢰하면, 잘 해결되는 거 맞는 거죠?”

남자, 에도가와 란포는 내 물음과 동시에 ‘전화를 받지않아…’ 로 시작하는 기계 음성에 통화 종료를 누르면서 “물론 네가 범인이 아니란 걸 증명하는 건 어렵지 않아. 그래서, 의뢰하는 거야?” 하고 되물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대가론 내가 원하는 걸 받을 거야.”

마디가 섬세한 손가락으로 메시지를 보내는듯 타자를 치던 에도가와 란포가 말했다. 아, 대가 비싸려나. 얼만지 묻는 게 우선이었어야 했나. 그냥 탐정도 아니고 명탐정이라고 했는데.

그냥 취소할까 생각하는데 휴대폰 화면을 끈 에도가와 란포가 나를 바라봤다.

“돈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 생각을 이번에도 읽은듯한 말이었다. 뭐, 이번엔 놀랍지는 않았지만, 대가를 원하는 만큼 받는다고 하면 보통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겠죠.

“있잖아, 너. 지금 하고 싶은 일 있어?”

“네?”

“이거 하면, 지금 죽어도 여한 없다고 생각할 만큼, 인생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 말이야.”

갑자기 버킷 리스트를 물어서 당황스럽다.

“갑자기 그런 걸 물으면 어떻게 말해요?”

“나는 말할 수 있는데.”

“뭐라고 할 건데요?”

“없다고.”

장난같은 대답에 뭐라고 딴지를 걸기 전, 말이 이어진다.

“그런 거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 웃음기 어린 입가 새로 나온 말은 앞선 말의 반복이었을 뿐인데, 공허하다. 말 의미처럼 무언가 없는 듯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내겐 그런 게 없으니까 네게 묻는 거야. 지금부터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볼까 해서.”

왜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호의. 아니, 호의인가. 그나저나 이게 의뢰랑 무슨 상관이야?

“근데 이거 의뢰랑 관련있는 거예요?”

“응.”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데.

당연히 있지 않냐는 듯한 표정으로 수긍을 한 에도가와 란포에게 생각한 바를 그대로 말하려는데 그보다 빨리 독촉이 떨어진다.

“없으면 그걸로 끝이야.”

뭐가? 뭐가 끝이야?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는 건 바보같은 짓이라고 양친이 가르쳐주지 않았어?”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어요.”

“가르침은 말이 다가 아니야.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하니까.”

“란포 씨 부모님은 가정교육에 진심인 분들이신가보네요.”

“…”

그런데 갑자기 조용해져서. 내 말이 패드립 수준이었나 고민할 무렵, 에도가와 란포가 입을 다시 열었다.

“응, 그래서 좋아하지 않아. 그러다 어느날 둘 다 죽어버렸거든.”

미친. 패드립한 거 맞구나. 미안함에 할말을 고르는데 에도가와 란포는 그런 거 별 신경 안 쓴다는 듯 내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기회 놓칠 거야?”

“특별해져보고 싶어요.”

에도가와 란포의 눈썹이 미묘하게 틀어진다. 그러면서 고개를 기울이면서 이렇게 되물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명탐정이라면서 그런 것도 못 알아내나. 물론,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나도 놀라긴 했지만. 내가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단 걸 몰랐다.

방금 전, 에도가와 란포의 말대로 나는 정말 멍청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을 쳇바퀴처럼 느끼는 사람. 쳇바퀴를 한번쯤 벗어나고 싶은. 하지만 평화는 깨트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지금 내가 두근거린다고 한다면 당신은 무슨 말을 할까. 기묘한 사건에 휘말렸지만, 그걸 해결해줄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 이 상황이 딱 좋아서 두근거린다고 한다면.

“아까 전, 당신이 멍청하다고 한, 그런 느낌으로요.”

“아. 그런 거면, 넌 이미 충분히 특별해.”

“무슨 소리예요?”

“그럼, 지금부터 그 사실을 증명하는 걸로 할까?”

방긋 웃으며 에도가와 란포가 내 손에서 손수건을 빼간다. 그러고선 내손을 잡아 끌었다. 그제야 인식한듯 언뜻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겼다.

어떻게요? 하는 내 물음은 발걸음 소리에 묻혔다.

요코하마의 밤은 흐드러진 조명 바깥처럼 짙었다. 찬 바람에 못다핀 꽃이 밤에 저문다. 피가 지워지지 않은 손을 덮은 손은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밤을 걸었다. 그런 밤을 걷는다. 나는 오늘을 영원히 잊지 못할 테지. 안일하게 그런 생각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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