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스독] 명탐정, 나,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살인 사건
에도가와 란포 네임리스 드림 / 네임버스물
생각해보자, 요코하마에 처음 왔는데 세계 최고의 명탐정을 만날 확률은?
아니, 그 탐정이 요코하마에 살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렇지만 정말로 만날 확률은?
아니, 아니! 탐정사에 갈 생각이긴 했다. 얼굴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온 거니까. 요코하마라는 성지에 성지순례 느낌으로 온건데 그 성지에 성인이 살아있다고 생각해봐라. 그럼 만나고 싶겠지? 까놓고 말해서 만나러 온 거 맞다. 난 텔레비전에 나온 그 명탐정 한번 만나고 싶었다.
자주 간다던 찻집이라도 갈 예정이었다. 다만, 버스에 앉아있다가 앞자리에서 혼자 멍하니 차창을 바라보는 명탐정을 우연히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냐는 거다! 희박한 거 아닌가? 말도 안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내 말은!
이거 운명 아니냐 이 말이야!
“혹시, 에도가와 란포 씨?”
“…응?”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명탐정. 잠깐 초록색 눈동자에 날카로운 안광이 들었다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든다. 느낌이 아닐 거다. 분명 내가 어떤 인간인지 그 짧은 사이 파악한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인이라도 해줄까?”
하고 그가 비싯 더 입꼬리를 위로 당길 일은 없을 거니까.
“네.”
홀린듯이 대답하니 한참 그대로 있다가 “펜은?” 하고 묻는다. 아, 정신이 나가서 명탐정 님께 펜까지 바라고 있었다. 급하게 가방을 뒤져 펜과 어…, 그리고 종이…, 아니, 종이보단….
내가 건넨 펜뚜껑을 열던 탐정님이 응? 하고 갸웃하며 나를 보는 걸 봤다. 진짜 귀엽다.
“손에다가 써달라는 거야?”
“네.”
“그럼 금방 지워지잖아?”
“그럼 소매에도.”
겉옷을 살짝 걷어 입고 있던 옷 소매를 보여줬다. 미묘하게 방향이 틀어진 눈썹을 빤히 보기만 하자 탐정님은 잠시 고민하는듯하더니 내 손등에만 제 이름을 써주었다.
에도가와 란포, 라고 정자로. 손등을 보니 살갗에 수성펜 잉크가 퍼져 살짝 뭉개진 느낌이 든다.
“왜, 생각했던 사인이 아니야?”
“네…, 아뇨! 완전 기뻐요!”
유명인의 사인이니까 화려하지만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필체를 생각했는데, 이건 뭔가 서명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오히려 좋다. 이거 네임같잖아. 몸에 새겨진다는 내 영원한 반쪽의 이름.
와, 씨…, 낭만적이다. 이대로 타투해야겠다.
내게 펜을 돌려주는 명탐정은 꿈에도 모를 불순한 망상을 하다가, 다음 내릴 정거장 알림에 일어서려는 상대 탓에 정신을 차렸다.
“어디 가세요?”
“살인 사건이 있어서.”
살인, 이란 단어에 방점을 둔 듯한 말투. 무심하게 그럼 이만, 하고 말하는듯이 일어서는 탐정님의 발은 곧 열릴 버스문을 향했다. 그리고 나는,
마치 네임의 상대에게 끌리듯 탐정님을 따라 나섰다. 방금 만들어진 거짓 네임인데도 불구하고 그게 진짜라도 되는 것마냥.
그렇게 나는 살인 사건 현장에 가는 명탐정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내 목적지는 어차피 명탐정이었다. 그러니까 경로를 이탈한 게 하니라 올바른 목적지로 가고 있는 거였다.
물론 탐정님이 내게 썩 꺼지라고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내가 따라가는 걸 알면서도 한참이나 별말하지 않던 명탐정이 갑자기 내게 말을 걸었다.
“살인 사건인데 괜찮아?”
“명탐정님이 단숨에 해결해주실 거잖아요?”
“그건 그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애당초 내가 아니고서야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이니까.” 하고 말을 잇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보이는 눈동자. 둥글게 휜 눈매 사이로 보이는 그 푸른색.
어쩐지 기분 좋아보인다.
“어떤 사건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야.”
“네?”
황당하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막으면 앞으로 일어나지도 않겠지.”
그럼 그걸 살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나? 약간 원초적인 질문을 속으로 하는데 탐정님이 말한다.
“명탐정이란 호칭 말이야.”
“네?”
“늘 생각하지만, 내게 적절한 호칭이라 듣기 좋은데 지금부턴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그럼 뭐라고 불러요?”
왜요? 란 질문도 하고 싶었으나 질문 폭격기가 되고 싶지 않아 조금더 쓸만한 질문을 골랐다.
“내 이름 알잖아?”
“어…, 에도가와 씨?”
“란포, 로 괜찮아.”
아니, 제가 어떻게 감히 명탐정님의 이름을 입에 올립니까…! 황송해서 입술만 뻐끔거릴 무렵 탐정님은 그런 나는 신경도 안 쓰고 걸어간다. 입안의 소리로 란포, 란포, 란포… 되뇌며 따라걸어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어느 유원지 입구. 주말에 비해 한산하지만 그래도 북적이는 인파를 보며 정말 오늘 여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날 확률 같은 걸 생각해봤다.
이 사람 많은 곳에서 그런 음습한 일이 일어난단 사실은 믿기 어려우나 사람이 많기에 별 사람이 모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살인자가 있을 확률은 한산한 거리보다 오히려 높을지도 모르겠다.
티켓발권줄에 서서 생기발랄한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대체 누가….
“자, 여기.”
잠깐 한눈 판 사이에 내 티켓까지 사서 건네는 명탐정님.
“얼마였어요?”
“2800엔.”
“어, 잠시만요. 현금이 있던가…, 혹시 계좌번호 알려줄 수 있어요?”
“…돈 달란 소리 아니야,”
묻길래 대답한 거지. 내 말에 기분 나쁘단 듯이 미간을 찌푸린 탐정님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제 건 제가 사도 되는데요.”
“내가 구두쇠로 보여? 세계 최고의 명탐정인데?”
검소해보이긴 하는데요. 차림새도 그렇고, 버스 타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영락없는 서민이신데. 하지만 본인이 이천팔백엔도 없어보이냐고 툴툴대며 기분 상한 티를 탐정님이 내셔서 나는 그저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고 할 게 아니라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야.”
대답도 지정해줘서 사과의 말도 감사 인사로 바꿨다. 그러자 좀 나아졌는지 그가 팔을 내게 내민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에다 네 이름 써 봐.”
“네?”
“얼른 써.”
어딘가를 보면서 그러는데, 갑자기 뭔짓인가 싶다. 내밀어진 하얀 손목을 보기만 하는데 팔을 흔들면서 재촉하길래 얼른 펜을 꺼내서 조심히 이름을 썼다.
그랬더니 네임 상대마냥 내게는 에도가와 란포라는 사람의 이름이, 에도가와 란포 씨에겐 내 이름이 새겨졌다.
물론 수성펜으로 써서 땀에도 지워질 개사기짓이었지만. 나름 예쁘게 쓴다고 노력한 글씨를 봤다. 그것도 내 최애 손목에 쓰인 내 이름을 보며 뿌듯해하는데 손이 잡힌다. 그리고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전에 뜀박질을 당했다.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두근거리다못해 숨까지 찬다. 에도가와 란포 씨가 뛰는 걸 따라가느라.
오픈런 시간도 아니고 그런 걸 할 곳도 아닌데 왜 뛰는 거야. 물음을 입밖에 내기 전에 발은 멈췄다. 도착지는 어느 커플의 앞.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는 두 사람을 보다가 나도 어리둥절하고 황당하고 당황스러워서, 혼자 멀쩡해보이는 란포 씨의 얼굴을 보는데 그 입이 열린다.
“내 이름은 에도가와 란포. 알겠지만 명탐정이야.”
란포의 말에 한 사람이 작게 아…! 하고 탄성을 내뱉는다. 그러고 나서 여전히 모르는 듯한 제 연인에게 설명을 해준다. 왜, 저번에 천인오쇠로 오해받은 탐정사의 탐정. 텔레비전에 나와서 자기 스스로를 믿어달란 명언을 남긴.
무장 탐정사 천인오쇠 오해 사건은 전국에 에도가와 란포라는 사람을 완전히 알리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나 역시 그 때 처음으로 알게 됐고, 또 첫눈에 반해서 그의 사건 일지들을 조사하게 됐고, 그러다 완전히 입덕해서 요코하마 여행까지 오게 됐다. 근데 뭐, 나같은 오타쿠나 명탐정님을 한눈에 알아보지, 란포 씨는 그 날 이후로 티비에 나온 적도 없고, 실제 하고 다니는 차림도 허술해서 바로 그 명탐정이란 걸 한눈에 알아보기 쉽지 않긴했다.
아무튼 설명덕에 마지막 사람까지 명탐정을 알게 되었고,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다. 그랬다. 왠진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이상해졌다. 튜닝되지 않은 현악기 소리가 들리는듯한 분위기.
“명탐정님이 저희한테 무슨 볼일이….”
그건 나도 궁금했다. 그런데 살인 사건 해결이라 하지 않았나. 어…, 어…?
어.
이 사람들, 용의잔가.
선량하고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여자 하나, 그리고 남자 하나. 얼추 맞춰입은 듯한 옷으로 봐서는 커플이 맞는 것 같다. 정말 평범한 한 쌍. 이들에게 이상한 점이 있다면, 얼굴이 낯익어보인단 점? 어디서 본 것만 같다. 이것 또한 그들이 평범하기 때문일까.
“네임으로 유명한 커플이잖아?”
“네?”
“뉴스에서 봤어. 희박한 확률의, 서로의 이름을 가진 축복의 연인.”
아, 기억났다. 인플루언서 커플이었다. 기적의 산물으로 유명해진 커플.
네임이란 건 흔하지 않다. 몸에 새겨진 이름. 네임은 쉽게 말해 각인이다. 사랑이 운명이란 사실의 증거.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을 날 때부터 가지는 것. 물론 후천적으로 네임이 발현된 사람도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후천적으로 네임을 가질 수도 있기에 정확한 인원은 알지 못하지만(그리고 숨기는 사람도 있기에 더 정확하지 못하지만), 세상에 알려져있는 네임을 가진 사람의 수는 상당히 적었다.
그래도 아주 없는 건 아니어서 학교 다닐때 한번쯤 네임이라는 걸 구경해볼 수는 있었다. 그건 피부에 진하게 새겨진 어떤 필체의 이름.
그걸 보면서 낭만적이라 말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환상적인 사랑을 바라는 때엔 많이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이건 과연 축복일까. 사실 저주인 건 아닐까.
네임은 모두에게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네임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네임이 없는 누군가를 운명처럼 절절하게 사랑하는데, 그는 나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는다. 설령 서로 사랑하게 되었대도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는 이와 없는 이와의 관계는 비극이다.
거기다가 내게 쓰인 네임을 가진 사람이 어느날 다른 사람의 네임을 가지게 된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만큼이나 낭만적인 비극. 하지만 비극은 무대 위에서나 아름다운 법이다. 현실의 비극은 범죄나 낳겠지.
물론 이건, 희박한 확률이다. 이건 서로의 네임이 쓰여질 확률보다도 더 희박한 확률이다. 그러니까 우리 눈 앞에 있는 이 커플들의 존재보다도.
서로의 이름을 찾다가 만난 두 사람. 간단한 이야기지만 로맨틱한 이야기. 듣기론 이들의 이야기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라던데.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왜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는 걸까? 불안해보이는 표정의 두 사람을 보다가 옆 사람을 보는데 가벼운 말이 흘러나온다.
“아니, 별일은 아니고. 그냥 반가워서.”
거짓말 같다. 거짓말 같은 말투는 아니었지만, 이미 에도가와 란포 씨의 행동 목적을 들은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사건이고 그걸 어떻게 해결하려는 걸까, 하는 궁금증에 정신 못차릴 무렵, 팔이 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아까 잡힌 손이 여전히 란포 씨의 손과 엮여 있었다. 엮인 탓에 내 손이 그의 손을 따라 들린 거였다.
그리고 대체 이게 뭐하는 거지 싶을 때, 들었다.
“사실 나도 오늘 마침, 운명의 상대를 만난 참이거든.”
진짜 이게 뭐하는 거지, 싶은 말을.
어이가 터져서 에도가와 란포 씨에게 들린 손만 바라봤다. 그리고 내 손등 살갗에 쓰인 에도가와 란포, 라는 이름과 이름 주인의 손목에 쓰인 내 이름을 보면서 생각했다.
개사기다.
가까이서 보면 살갗 주름을 따라 살짝 번져있는 이름들이 너무 성의 없다. 아니, 이거 존나 대충인데.
터진 어이를 주워담지도 못하고 다음 반응을 기다리는데, 와, 이걸 수긍하네. 눈 앞의 연인들의 미묘한 적의가 살짝 수그러든다.
“네임, 원래부터 있던 거예요?”
“응.”
“그쪽은…,” “나랑은 달라.”
내게 묻는 질문까지 에도가와 란포 씨가 가로챈다. 그러고서 새치름한 눈을 가늘게 뜨고 오히려 되묻는다.
“나를 의심하는 거야?”
“…”
에도가와 란포의 텔레비전 연설의 여파는 대단했다. 사회에 큰 공헌을 했던 탐정사와 명탐정을 오해했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그 연설을 본 사회 구성원 모두의 마음에 남아있지 않을까.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치는 사기까지 믿어줄 일은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고. 일단 나는 잠자코 있는데, 란포 씨가 자신이 바라는 바를 말했다. 그랬더니,
예정에도 없던 더블 데이트를 하게 됐다.
요코하마 항구의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유원지. 그 중에서도 가장 바다가 잘 보이는 곳은 관람차 안이었다.
“이런 거에 속을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요.”
“속은 거 아니야. 속아준 거지.”
에도가와 란포 씨는 바로 앞 칸에 있는 커플을 빤히 보면서 대꾸했다. 뭔 소리야.
“네?”
“바보도 아니고, 애초에 흔치 않은 거잖아, 상호 발현 네임이란 건. 범인은 명탐정인 나를 오히려 대놓고 감시하기로 한 거야.”
대놓고 감시가 이런 건가. 우리 앞 관람차에서 애정 행각 중이신 저 기적의 연인들이 과연 우리를 감시하는 거겠냐고.
솔직히 오늘, 종일 잘 놀았다.
돈 왜 내주나 했다. 내 이천팔백엔치의 역할은 이건가보다 싶을 정도로 나는 오늘 에도가와 란포 씨의 놀이 친구가 되어 드렸다. 롤러 코스터 옆자리에도 타드리고, 별로 안 먹고 싶은 간식도 란포 씨가 맛보고 싶어해서 샀다. 그러니까 란포 씨가 산 것과는 다른 종류의 간식을 사서 둘 다 에도가와 란포 씨가 먹을 수 있게 해드렸다.
뭐지, 이거. 오타쿠 대포상 이벤튼가 싶게, 살인 사건이고 뭐고 위험한 일은 하나도 없이, 정말 데이트 같았다.
그렇다고 로맨틱한 분위기가 있었단 건 아니고, 뭐랄까, 정확히는 최애와의 하루를 산 기분? 아니, 난 돈도 안 냈지만 아무튼! 여하튼, 정말 그냥 놀기만 해서 그런가, 저 분들도 경계심이 흩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보다 더 경계심 없이 내내 놀기만 하던 란포 씨는 오히려 지금 날카로워 보였다. 턱을 괴고 멀어지는 지면을 빤히 바라봤다. 중간중간 슬쩍 앞 칸을 살피면서 뭔가를 찾는 것처럼 시선을 아득한 아래에 두었다.
정말 뭔가가 있는 걸까. 싶을 때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다. 그리고 흔들렸다. 좀 거칠게 흔들렸다. 당연했다. 바닷바람이 거치니까. 그러니까 흔한 일이다. 관람차 튼튼하게 지었을 거다. 근데 무섭다.
무서우니까,
“란포 씨…, 그…, 제발 가운데 앉아주시면 안 돼요?”
“응?”
한쪽으로 기우니까 너무 무서워. 아래를 본다고 란포 씨가 한쪽으로 잔뜩 기울린 관람차의 균형을 위해선 내가 그 반대쪽으로 가서 무게를 맞춰야 했다. 그런데 창가측은 무섭단 말이야.
그렇게 내가 중간에 앉아서 계속 한쪽으로 기운 관람차를 매서운 바닷바람이 흔드니까 진짜 개무섭다. 란포 씨한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의자를 부여잡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여기야말로 정중앙이니까.
“보지 않으면 더 무서울 거야.”
“보는 게 더 무서워요!”
바닥에 내려와 앉아서 창가를 보지 않는 나에게 란포 씨가 한 말은 겁없는 사람이나 할 이야기였다. 보는 게 안 무서웠으면 반대 창가에 가서 균형 맞췄겠지. 란포 씨는 모르는 이야기지만, 사실 나 롤러 코스터 눈 감고 탔다. 눈 딱감고 탔다. 그땐 짧게 끝나서 티 안내고 끝냈는데 이 빌어먹을 관람차는 지면에 내려갈 기미가 안 보인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관람차 정중앙. 여기 주저앉아서 결국 눈을 감는데 뺨에 살그머니 체온이 닿는다.
눈을 다시 떴다. 소매 사이로 보이는 손목. 내 필적의 내 이름. 그리고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잔뜩 흐트러진 옷깃, 그리고 하얀 뺨. 바깥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는 눈은 나를 향하지 않았다.
달래주는 건가, 무서워하지 말라고?
이런 게, 흔들다리 효과였던가. 나 심장 엄청 뛰는데, 이거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르겠어.
닿은 손의 등을 건드렸다. 이 손 아까도 잡았었는데. 이 손의 주인, 난 원래도 좋아했는데. 이런 느낌이었나.
보랏빛으로 스러지는 노을에 물든 란포 씨의 뺨을 보다가 물었다.
“란포 씨, 살인 사건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제서야 내게 주어지는 초록 눈동자. 그리고 그는 턱을 괸 그 상태로 나를 보다가 예쁘게 웃는다.
“일어나지 않아, 절대로.”
혹시 처음부터 없던 사건은 아니었나요, 하는 물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저 나와 놀기 위해서 이런 건 당연히 아니겠죠.
환상을 씌우는 손의 온도를 현실이 일깨운다. 어느새 지면에 닿아 열린 관람차문 새로 스미는 푸르스름한 초저녁 공기.
관람차에서 빠져나와 이미 앞서가는 연인을 보면서 생각했다. 조금 전 란포 씨는 ‘범인은 명탐정인 나를 오히려 대놓고 감시하기로 한 거야’라고 했다. 둘 모두가 용의자인 게 아니라면 한 사람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걸까.
한 사람이 가해자라면 혹시 다른 한 사람은 피해자가 되는 걸까. 란포 씨가 만들어내는 사건 풀이 안의 등장인물은 넷. 란포 씨는 명탐정 역, 나는 우연히 만난 그의 팬. 그렇기에 역할로만 분배하자면 이게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운명적인 상호 네임 발현자가 각자에게 살의를 품을 일이 있을까? 나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결국 사랑하게 되어버린다고 했다. 계속 사랑하고 만다고 했다.
너무나 큰 사랑은 증오로 변하기도 한다던데. 혹은 너무나 사랑해서 같이 죽고자 하는 경우도 있고. 하지만 저 둘은 그런 미친 짓을 하기엔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행복과 불행을 겉모습으로 쉽게 판단할 수는 없는 거지만.
그렇게 나는, 유원지가 폐장할 때까지 연인의 행복과 사랑을 의심했다. 드문드문 만나는 커플의 팬들까지. 그렇게 의심하고 추리하는데, 유원지 영업 시간이 끝났다.
“오늘 즐거웠어요.”
“나야말로.”
엥.
“명탐정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당연히 그렇겠지. 뭐, 두 번은 없을 일이니까, 기념 사진이라도 찍을래?”
“좋아요. 아, 지나가는 사람한테 부탁할까?”
저 사람 어때? 하고서 그들이 행인을 불러세우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뭐야, 오늘 그냥 잘 논 거야? 란포 씨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전부 해결한 거야? 난 분명히 이 세 사람에게 눈을 뗀 적이 없는데, 대체 언제?
어느새 밝은 곳에 가서 사진까지 찍고 핸드폰 번호 교환에 작별 인사까지 하고 헤어졌다. 커플을 보내고 덩그러니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유원지 입구에서 나만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이거 뭐지. 고개를 돌리자 물을 마시던 란포 씨와 눈을 마주쳤다. 이거 뭐냐고요.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갸웃 고개를 기울이고서 다시 물을 들이켠다. 그리고 “오늘 고생했어.” 하고서 걸어나간다.
어, 집에 가는 건가.
“집에 가는 거예요?”
“너는 가도 돼.”
집 도착하면 연락해, 하는 판에 박힌 인사를 던지고서 에도가와 란포 씨는 걸음을 옮겼다.
“란포 씨는요?”
“나는, 말했잖아. 살인을 막는다고.”
다 끝난 거 아니었나?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충격에 잠깐 멈칫했던 발걸음을, 란포 씨가 훨씬 멀어지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따랐다.
급하게 걷느라 잔뜩 들이켠 밤바람을 내뱉을 때, 작은 안개가 진다. 두근댄다. 종종 걷는 발걸음 덕에 더 두근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장면, 추리물에서 가장 클라이맥스인 그 장면.
그것도 내 명탐정의 클라이맥스를 직접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나 지금, 근 몇년치 행운은 다 갖다 쓰는 것 같다.
신나서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꾸물대는데 란포 씨가 말했다, “신날 일 아니야.” 하고.
아, 그치. 아무리 일어나지 않는대도, 살인 사건이라니까. 웃을 일은 절대 아니다. 너무 가볍게 굴면 안 되겠지. 입꼬리 단속도 할 겸, 마음 단속도 하려는데 란포 씨의 걸음이 느려진다. 느려지더니 멈춘다.
“내게 실망할지도 몰라.”
“…네?”
“나는 네가 좋아하는 ‘명탐정’이지만, 그게 내 전부는 아니거든.”
무슨 소리지.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고서 란포 씨는 다시 걸음을 걸었다.
실망할지도 몰라, 내가, 에도가와 란포, 당신에게?
무슨, 개소리지. 최애의 본인 오타쿠 무시발언에 오기가 든다. 설령 당신이 가해자를 줘패서 살인을 멈춘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실망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오늘 대놓고 허술한 사기치는 걸 봐도 실망은 안 했거든.
오히려 관람차에서 다정함에 호감을 가지면 가졌지. 이건 동경과는 또다른 느낌의 감정이었다. 조금더 사적인 애정.
실망 안 할 거예요, 하고 내뱉으려는데 에도가와 란포 씨의 목소리가 더 먼저였다.
“어디 가?”
“…”
“혼자서.”
멀어진 란포 씨가 본인 앞의 더 멀리 있는 사람에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그래서 내가 봤을 땐, 어둠 뿐이었다. 어둠 속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네임 주인을 실제로 만나면 그 결심 많이 흔들릴걸? 무게 하나 없는 이름보단 그걸 향한 마음이 무거운 거거든.”
“똑같던데요? 유원지에서 이미 발견했거든.”
“아닐걸?”
“아니요, 제게 사랑은 다 똑같아요. 어차피 거기서 거기야.”
익숙한 목소리에 몇 걸음 앞으로 걸었다.
“그런 거라면, 유명한 채로 있고 싶어요. 나는 선망 받는 쪽이 훨씬 좋아. 벌이도 좋구요.”
여자였다. 방금까지 유원지에서 함께 있던 커플의 여자쪽.
“당신에게 감정이 빠져있다면 당신 애인을 시켜 죽이는 게 나아.”
“그것참, 좋은 조언이네요.”
비웃는 말투였다. 정의의 사도가 그런 말을 한 걸 비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현실적으로 말하는 거야. 당신이 사랑을 아는 이상, 당신의 네임 주인을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아, 여긴 현 애인에게 대행 살인시키는 걸 포함해서야?”
조금 더 걸어 다가선 란포 씨의 얼굴에 걸린 묘한 웃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보이는 여자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여자의 손에 들린 게 날카로운 흉기란 건 알았다. 그래서 란포 씨가 말한 잠재적 살인 사건의 잠재적 범인이 여자란 것도 확실히 알았다.
“얻을 순 없겠죠. 하지만 지금을 지킬 수 있어요. 내 네임의 주인에겐 내 이름이 없으니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지금, 무슨 소리예요?”
질문을 좋은 타이밍에 한 것이 아니란 건 알았다. 하지만 묻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등장인물은 넷이 아니야, 다섯이지.” 란포 씨가 내 근본적인 착각을 먼저 바로잡아줬다. “우리 둘을 빼고서 셋, 그러니까 저 여자와 저 여자의 애인과, 그리고,”
란포 씨가 시간의 틈을 만들고서 말을 이었다. “저 여자가 가진 네임의 주인.”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데요.”
“방금까지 함께했던 남자와 여자. 둘은 상호 발현 네임이 아니야.”
“…네?”
“이제 이해가 돼?”
머리가 고장이 난 것 같다. 전제부터 틀려버린 풀이에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
“정확히는 제 애인은 제가 네임이지만, 저는 아니에요, 아니었어요.”
멍청하게 서있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여자가 덧붙여 설명해줬다. “제가 속였어요. 네임이 없는데도 저도 그이 네임이 있는 것처럼 피부에 새겼어요. 어차피 저도 호감이 있었으니까 상관 없을 거라 생각해서요.”
“무슨…, 아니, 거짓말이라고요? 그런데도 여태 안 들켰다는 거예요?”
“네, 신기하게 안 들켰네요. 세상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세상은 몰라도 그는 알아, 알 거야.”
란포 씨의 단정에 여자가 시선을 내리깔고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그러다가 다시 올린 시선에 분노가 담겨있다.
“…네가 뭘 알아!”
“잘 알지?”
“하, 그 가짜 네임, 거짓말인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
그럴 줄 알았다. 믿을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명탐정이라고 하더라도 이거 존나 말도 안 됐지. 유원지에서 신나게 놀아서 어느새 잔뜩 번진 내 손등의 볼펜 자국을 봤다. 그리고 똑같이 번져있을 란포 씨의 손목 안쪽도.
“명탐정이 되는 건 간단해. 자신의 눈으로 봐. 이게 당신의 그 유명한 연설이잖아? 말대로, 내 눈으로 직접 보니까 볼펜 글씨던데?”
코웃음과 함께하는 비꼬는 말을 란포 씨는 묵묵히 들었다. 듣기만 했다. 그랬더니 여자는 여태 모아온 음습한 감정을 꾹꾹 담듯이 중얼거렸다.
“발현자가 아니면 이런 거 몰라, 이런 기분 절대로 모를 거야.”
서늘한 밤이 가로등 불빛을 흔드는 것 같았다. 깜빡이는 조명 아래서 작은 그림자를 그리던 가느다란 속눈썹이 불빛을 밀어올린다.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무래도 당신이라면 정말 네임을 죽일 수 있을 것 같네. 재능있어보여.”
“…”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더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대체 뭘 아냐고,”
“당신은 그제야 네임의 무게를 이해할 거야. 그 사랑의 무게. 그걸 알게 됨과 동시에 원망스러워지겠지. 당신 애인도, 당신 자신조차도.”
여자의 말허리를 끊어가면서 말을 잇던 란포 씨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고 있던 생수로 적신다. 그러고선 내게 말했다. “손 좀 줄래?”
건넸더니 처음에 받았던 서명이 지워졌다. 내 손등에 잔뜩 번진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리고 란포 씨는 자신의 손목 안쪽의 내 이름도 꾹꾹 눌러서 깔끔하게 지워냈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흔적이 참 가볍다. 지금 내뱉는 입김이 사라지는 것마냥. 그렇다고 생각했다. 란포 씨가 손수건을 다른 손으로 잡고서 지금껏 쓰던 팔의 손목을 닦을 때까지.
그 때 나는, 관람차 안에서 내 뺨에 얹힌 란포 씨의 손을 기억해냈다. 당시 나는 소매 안에 쓰인 내 필체의 내 이름을 봤다. 그리고 지금,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내 이름을 보면서, 내게 주어졌던 그 따뜻했던 손의 목 위로 보이던 글씨는, 내가 쓴 게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
이건, 그 반대쪽 팔이었다.
몇 걸음 걸어 가까워진 여자에게, 란포 씨는 제 손목의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보이며 말했다.
“처음에 말했잖아? 나는 오늘 마침, 운명의 상대를 만난 참이라고.”
네임이 모두에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에도가와 란포는 내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저 애에겐 내 이름이 없어. 나와는 다르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빙글 웃는 란포 씨에게 여자는 더이상 분노를 토해내지 않았다.
묘한 표정을 짓고 상대를 직시할 뿐이었다.
“만약, 저 애에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네임이 발현했는데, 당신처럼 그를 죽이려고 한다면, 아니 죽여버린다면,” 란포 씨가 숨을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나는 그래도 사랑할 거야. 아니, 솔직히 조금은 기쁠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무겁다는 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알 것 같아.
“하지만 동시에 그보다 더 슬퍼하겠지. 같은 네임 발현자이기에 잘 알 거야. 그 헌신적인 사랑을 끊어버린 대가.”
“…”
“죽도록 사랑했대도 일반적인 사랑과 네임 주인에 대한 사랑은 똑같은 무게가 될 수 없어. 그러니 당신 애인은 상호 발현 네임이 아니었단 거 이미 알았을 거야.”
당신도 이젠 이해하잖아? 하고 말하는 듯한 란포 씨의 말투. 그에 여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선망, 부, 명예. 그런 건, 사랑을 아는 네임 발현자에겐 무의미해.”
“…”
“그러니까 당신 네임이 죽으면 당신도 죽어. 그것도 스스로 죽을 거야.”
“…”
사형 선고라도 내리듯한 그 말에도 여자는 아무말 안 했다. 그저 떨어뜨렸다. 흉기도, 눈물도.
네임 발현자는 운명적으로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산다. 이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나는 저주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확실히 생각해. 이딴 건, 저주가 맞을 거라고.
어느새 내 앞에 홀로 남아, 이름이 지워진 내 손등 위에 펜으로 제 이름을 덧쓰는 란포 씨를 보면서 생각했다. 지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정자로 예쁘게 서명하듯 이름을 쓰는 당신의 사랑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다 쓴 이름이 마를 때까지 쳐다보던 란포 씨는 깊어봤자 겨우 표피에 스민 제 이름을 엄지로 쓸어보다가 내게 물었다.
“나를 좋아하지?”
“…네,”
“여전히?”
“…네,”
“그럼 됐어.” 하고서 방긋 웃으며 표피에 스민 제 이름을 부단히 쓸어보다가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렇게 하면 영원히 새겨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처 다물지 못한 입 안으로 밤 바람이 새어들어왔다. 사실 더 물어볼 줄 알았다. 대답이 더 필요할 줄 알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줄거야? 하고 물어볼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묻지 않았다. 그냥 웃었다.
사랑의 확신조차 묻지 않는 이유는 뭘까.
손등에서 입술을 떼고서 “데려다 줄까?” 하고 묻고 남는 여린 미소에 나는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탐정이 전부는 아닌 란포 씨는 어려웠다, 그것도 내 이름의 발현자인 에도가와 란포 씨는.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확실히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해 못할 사랑의 무게였다. 짓누르지도 않았고 눌리지도 않았다. 그게 당신의 사랑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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