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사기도 마음먹은 대로는 안 된다
2021 문호사서 게스트북<제국도서관 관찰일지> 참가 원고 │타쿠보쿠X특무사서(여) 啄司書
“사서 씨, 타쿠보쿠 씨랑은 잘 되고 있어?”
“예?”
지옥의 월말 보고 시즌이 끝난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휴식 시간이다. 긴 겨울도 끝나 슬슬 봄이 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시기였다. 열린 창문 틈새로는 아직 조금 찬 바람이 불어 들어왔지만,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식당 전체를 감싸고 있어 그렇게까지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런 평온한 점심의 간식 시간. 선물로 들어온 버터 쿠키를 한입에 와앙 넣으려던 사서는 갑자기 들려온 알 수 없는 질문에 손을 멈췄다.
“아니…. 누구랑 뭐요?”
“타쿠보쿠 씨랑 잘 되고 있냐고.”
맞은 편의 켄지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쿠키를 집어 우유에 쿡 찍는 동작은 물론 깜찍할 정도로 귀여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 질문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사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이시카와 선생님 이야기가 왜 나와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켄지도 사서를 따라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다.
“어라, 두 사람 사귀는 거 아니었어?”
“네???”
무심코 큰 소리를 내고 만다. 금시초문이다. 내가 사귄다고요? 누구랑?? 알쏭달쏭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을 것이 분명했다. 사서의 표정을 읽었는지, 이번에는 고개를 아까와 반대쪽으로 살짝 기울인 켄지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상하다, 분명히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예!? 그렇고 그런 관계가 뭔데요!?”
“으음, 그러니까, 한 침대에서….”
“잠깐, 켄지 씨.”
미야자와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신페이다. 한쪽 손의 갸와즈 인형이 귀엽게 움직였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 사서 씨는 델리케이트한 시기라구.”
“아, 그렇구나! 미안, 생각하지 못해서….”
“아니, 그….”
델리케이트한 시기라는 게 대체 뭔데. 내가 무슨 사춘기 청소년이야? 그 시기를 벗어난 지는 한참 지났는데요? 정말로 금시초문이다. 내가 누구랑 한 침대에서 뭘 해? 사서는 이 이야기의 맥락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 아니라고 부정해야겠다. 분명 어딘가에서 뭔가 오해가 있었겠지. 한참을 혼란스러워한 이후에야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 이야기 어디서 들었어요?”
“응? 청개구리의 짝짓기 울음소리? 동물 사전일까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사전 좋았어.”
“아, 그거 제가 신청 넣었어요.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그 이야기요! 그, 그러니까…. 저랑 이시카와 선생님이? 사귄다는…?”
대화라는 것은 원래 사람이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법. 잠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맞은편의 두 사람은 사서를 놔두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이어갔던 것인지 대화의 화제는 짝짓기 시기 청개구리의 울음소리에 관한 내용으로 넘어가 있었다. 사서의 말을 마저 듣고 나서야 ‘아아, 그 이야기구나?’라며 제 손바닥을 가볍게 맞부딪힌 켄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도서관 사람들이 이야기해줬어. 나는 응접실에 있던 사람들한테 들었어!”
“헤에, 나는 식당에서 밥 먹다가 들었어~ 그치, 갸와즈?”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지금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거야? 이 도서관 전체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사서는 겨우 질문했다.
“저, 그럼 혹시 그 이야기를 들은 게 언제쯤인지….”
“음, 일주일 정도 전이려나?”
일주일! 소문이 도서관 전체에 퍼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망했다. 사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단단히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이 분명했다.
“앉아 봐요. 비상이에요.”
“뭔데 그래? 표정이 심각한데….”
사서실 문을 박차듯 열고 들어가자, 응접용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늘어져 앉아있던 타쿠보쿠가 깜짝 놀라 움찔했다. 사서는 심각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지 않고 식당에서 가져온 버터 쿠키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소문이 났답니다.”
“소문? 무슨?”
손이 자연스럽게 버터 쿠키로 향한다. 웬 쿠키? 라고 물어보지도 않는 게 당연히 자기가 먹어도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평소에도 선물 들어온 게 있으면 조금 가져와서 자주 나눠 먹었으니 그럴 수 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 중요한 것은 쿠키 따위가 아니다.
“선생님이랑 제가 사귄다는 소문이요.”
“뭐?”
그것이 지금까지 들어본 타쿠보쿠의 목소리 중 제일 어이없어하는 목소리였노라고 사서는 단언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런 소문이 났어? 왜?”
“몰라요. 그리고, 하…. 무슨…. 한 침대 쓴다는 소문까지 났대요.”
마른세수를 하며 힘겹게 한숨 섞인 말을 잇는다. 부끄럽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속에서 올라오는 깊은 어이없음과 열 받음이 섞인 한숨이었다. 어이없는 것은 타쿠보쿠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누구랑 뭘 해? 내가 얘랑? 그 전에 도대체 무슨 경위로 그런 소문이 돈 거야? 설명을 재촉하는 눈으로 고개를 까딱이자 사서는 타쿠보쿠의 눈이 아니라 천장을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설명해주기도 어지간히 열 받아 하는 눈치였다.
“우리 저번 주에…. 월말 보고서 마감을 했잖아요?”
“응.”
월말 보고서 마감이란, 매달 말에 찾아오는 죽음의 기간이다. 제국도서관도 일단은 관공서인지라 어쩔 수 없이 매달 상부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있고, 거기다 특수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기에 관련 서류도 추가로 제출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중요 서류들은 대부분 손으로 써서 제출해야 하는데, 사서의 손글씨가 형편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윗사람들에게 올리는 것인데 괴발개발로 쓴 서류를 보낼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대필을 세울 수밖에. 거기에 마침 돈이 부족한 타쿠보쿠가 지나가고 있었다. 연중무휴 365일 돈이 없기에 타쿠보쿠는 자주 사서의 일을 도와주고는 했다. 말하자면, 제법 긴 시간 동안 조수로 일했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서류 처리에 관해서 두 사람의 호흡은 제법 좋은 편이었다. 정신없이 일해야 하는 월말에는 일주일 이상 사서실에 둘이서 틀어박혀 서류를 검토하고 도장 찍고 자필로 채워야 하는 부분 채우고 검토하고 도장 찍고….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운 현장이었다. 처음에는 잠도 따로 이불 펴고 자고 밥도 챙겨 먹고 휴식 시간도 잘 챙기던 둘이었지만 마감이 다가올수록 그럴 정신은 없고 갈수록 정신이 피폐해지니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그날의 분량이 끝나면 같은 침대에서 잔다는 자각도 없이 간이침대에 동시에 쓰러져 잠을 자고, 제출 직전까지 바쁘게 일하다가 누가 점심 안 먹냐고 물어보고 나서야 늦은 끼니를 해결했다. 물론 ‘우리 5분만 자고 하자….’ 하다가 아무도 못 일어나고 사이좋게 5시간씩 잠들어 다음날 울면서 밀린 일을 처리하는 것도 일상다반사이긴 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사서가 취임한 지 벌써 5년 차에 접어들었으니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호흡을 맞춘 전우에 더 가까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때 간이침대에 같이 누워 있는 걸 누가 봤나 봐요.”
“보통은 그걸 누워있다고 하는 게 아니라 시체 두 구가 쓰러져 있다고 하지.”
“아무튼 그래서 소문이 났대요.”
“그것만으로?”
타쿠보쿠가 얼굴을 찌푸린다. 사서도 따라서 얼굴을 찌푸렸다. 단어가 단어이다 보니 말을 고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려 머뭇거리는 어투가 되고 만다.
“그리고 무슨, 했… 다는 뉘앙스의 대화가 있었다고….”
“우리 둘이?”
“네.”
“대체 무슨 대화? 일주일 전이면 한창 마감하던 시기잖아.”
그 시기의 대화는 정말로 ‘힘들어요….’ ‘이 몸도 힘들다….’ 수준의 말뿐이었기에, 타쿠보쿠는 더욱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답을 알고 있는 사서는 타쿠보쿠의 말에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이거 진짜 어이없는 거 아는데…. ‘허리 아파요.’ ‘뭐, 어젠 힘냈으니까….’ 였대요.”
“하?”
타쿠보쿠의 표정도 따라서 굳어진다. 저 대화의 내용을 올바르게 풀이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간이침대에서 자서) 허리 아파요.’
‘뭐, 어젠 (업무를) 힘냈으니까….’
앞선 의혹이 있는 상태에서 저것만 떼어놓고 보면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문장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너무나 커다란 어이없음에 할 말을 잃은 타쿠보쿠와 달리 사서는 열 받아서 죽을 것 같은 모양이었다. 계속 천장을 쳐다보며, 사서가 혼잣말이라기에는 제법 무서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니, 뭘 이런 걸로 소문이 나 소문이, 지금 5년째인데…. 진짜 장난해? 진짜, 나는….”
아, 이 표정과 몸짓은, 상부에서 보고서 양식을 잘못 보내서 기껏 완성한 서류가 통과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던 몇 년 전 이후로는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걸 지켜보던 타쿠보쿠가 조용히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사서는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 나는 근대인들이 내 이름 가지고 궁합 볼까 봐 4년 동안 본명도 말한 적 없어!!”
“그런 이유였어?!”
4년 만에 이유를 알게 된 타쿠보쿠였다.
아아악! 자리에서 일어나 한껏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더니, 사서는 금방 진정해서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정말, 이 녀석의 이런 전환이 빠른 면은 오래 봐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타쿠보쿠는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무튼 선생님, 그래서 할 말이 있어요.”
“뭔데?”
“우리 사귑시다.”
“저기 미안한데, 처음부터 천천히 설명해주라.”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롤러코스터 같은 대화다. 사서는 타쿠보쿠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딱 일주일만 연애를 하고 헤어지는 거죠. 말하자면 계약 연애를 하는 거예요. 도서관에 소문이 다 퍼진 상태에서 우리가 일일이 부정하고 다녀봤자 힘들기만 하고 효과도 없을 테니까, 차라리 화끈하게 기정사실로 만든 다음에 헤어져서 모두에게 알려버리는 거에요.”
“리스크 크지 않아?”
“어차피 아는 사람의 연애는 전부 작품화되기 마련이에요. 차라리 좀 리스크가 커도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헛소문을 종식시키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고요.”
확실히 아주 터무니없는 제안은 아니다. 어쨌든 효과 하나는 확실할 테니 말이다. 자기가 생각해도 참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는 듯이 당당한 표정으로 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서를 잠깐 바라보다가, 타쿠보쿠는 씨익 웃었다.
“얼마에 해 줄 건데?”
“돈 받으려고요?!”
답을 듣자 펄쩍 뛴다. 상대가 금전을 요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는 얼굴이다. 온몸으로 ‘정말 질린다!’라는 메시지를 표현하고 있는 사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타쿠보쿠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공짜보다 무서운 말은 없는 거 몰라? 얼른 불러. 만 엔 이하로는 장사 안 해.”
“비싸! 흥신소도 아니고…!”
“아, 그럼 흥신소에 의뢰하시던가.”
한 몫 벌 타이밍을 놓칠 수는 없다는 듯한 얼굴로 해맑게 웃고 있는 그를 배신감에 찬 표정으로 노려보던 사서는 겨우 입을 열었다.
“…만 엔에 해 줘요.”
“2만 엔.”
“왜 두 배로 뛰었어!? 만 오천!”
“만 칠천.”
“아직 월급 안 들어왔거든요! 만 오천에 해 주세요!”
“좋아, 만 오천.”
원하는 가격이 나오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그 표정을 보고 사서는 자신이 완전히 말려들었음을 느꼈다. 내가 먼저 선수 쳐서 가격을 불렀어야 했는데! 하지만 머리를 싸매도 이미 체결된 계약인 법. 이제 무를 수는 없다. 선금을 달라는 듯 사서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타쿠보쿠를 잠시 억울한 얼굴로 바라보던 사서는 깊은 한숨을 쉬며 지갑을 열었다. 엄청나게 속은 기분이었다.
“좋아, 선금 받았고.”
“하아아, 내가 왜 이런 일에 돈까지 써야….”
“소문을 끝내고 싶은 거잖아? 좋게 생각하라고.”
“이 날강도! 범법자!”
“어허, 왜 이러시나. 우리 사이는 합법적으로 체결된 계약으로 묶여 있는 거 아닌가?”
은근히 ‘계약’이라는 단어에 힘을 준다. 이렇게 생돈이 날아가는구나. 아아, 봄 한정판 굿즈 이것저것 사려고 했는데. 하지만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면 어쩔 수 없다. 울며 겨자 먹기에 가까운 심정이었지만 사서는 지갑에서 꺼낸 돈을 타쿠보쿠에게 내밀며 애써 단호하게 말했다.
“나중에 딴소리 하기 없기에요! 우린 지금부터 연인인 거예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 연애 중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적극 어필한 뒤에 화려하게 깨지는 거고요! 알았죠?”
“걱정 붙들어 매셔. 돈 받은 만큼은 일할 테니까.”
그리하여 이 얼토당토않은 계약연애가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 며칠은 순조로웠다.
연인 흉내라고 해봤자 간단하다. 그냥 평소보다 좀 더 자주 같이 다니고, 가까이 붙어있고, 남들 보는 앞에서 가끔 스스럼없이 스킨십! 둘은 나름대로 적절한 선에서 공작을 계속했다. 구석진 서가에서 둘이 붙어있다가 일부러 들키기, 식당에서 같이 밥 먹으면 빵 하나 더 챙겨주기, 흐뭇한 표정으로 편지 읽다가 남이 뭐냐고 물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기….
다들 이미 눈치챘겠지만, 죄다 의심스러운 행동들뿐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원래 낌새가 있던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했다면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소문이 돌 뿐 실제로는 별다른 관계가 없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러고 있으면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사서 씨, 뭔가 협박 같은 거 당하고 있는 건 아니지?”
“맞아. 뭔가 곤란한 일이 있으면 말해보렴.”
“컥, 쿨럭….”
먹던 카스테라가 이상한 곳으로 넘어갔다. 갑자기 목이 막혀 콜록거리자 타카무라가 사서의 등을 쓸어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사레가 들린 것은 옆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타쿠보쿠도 마찬가지였지만, 놀라울 정도로 아무도 그에게 반응해주지 않았다.
“…너무한 거 아냐?”
“등 쓸어줘?”
“필요 없어.”
타쿠보쿠는 낄낄거리며 등을 쓸어주려는 척 손을 드는 이사무를 노려보았다. 오후 3시, 담화실. 좋은 카스테라가 들어왔으니 차나 한잔 하자며 하쿠슈가 부른 모임에 참여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하쿠슈에 타카무라, 거기에 이사무까지 모일 건 뭐람. 이건 꼭 그러니까…. 취조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 오천 엔짜리 계약 연애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눈치로 알고 있었지만, 잘 넘어가면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길게 끌고 갈 일도 아니고, 어차피 적당히 하다가 끝날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불러서 대놓고 물어볼 줄은. 일단 맛있는 것을 미끼로 불러놓고 어려운 질문을 턱 던지는 것마저 어쩜 이렇게 대놓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어필일 수 있는지. 의심스러워도 그냥 좀 넘어가 주면 안 되냐고, 좀. 질린다 진짜…. 그러나 차마 그런 말은 못 하고 차만 들이키는 수밖에. 찻잔만 속절없이 비어갔다.
“혀, 협박이라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요즘 이상하잖니? 너랑 타쿠보쿠 말이야.”
“아, 아하하, 이상하다뇨, 그냥 평소대로인걸요!”
날카로운 시선이 꽂히는 것을 애써 무시한다. 하쿠슈 선생님, 눈빛이 무서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사건의 전말을 듣고야 말겠다는 저 눈빛, 시마자키 선생님을 본받은 걸까. 그런 건 안 받아도 되는데…. 의자에 앉아있는 건지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사서는 살살 타쿠보쿠의 눈치를 살폈다. 슬쩍 눈이 마주친다. 곧 돌아오는 신호는 대충 ‘나한테 맡겨라’라는 것이었다. 침묵이 이어지는 것을 못 견디겠다는 듯 타쿠보쿠가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애 좀 그만 괴롭혀라. 우리 사귄다니까?”
“그러니까 그 과정에서 모종의 협박이나 부정행위가 없었는지를 묻고 있는 거잖아.”
“아니, 도대체 날 뭘로 보고 있는 건데….”
“이시카와 군, 평소 행실이 이렇게 돌아오는 거야.”
타카무라의 입에서 평소 행실 운운하는 이야기가 시작되면 할 말이 없다. 타쿠보쿠는 ‘그거야 그렇지만….’ 하고 대답하는 대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서, 미안! 스스로 역경을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타쿠보쿠 찬스는 3분도 안 돼서 끝나고 말았다.
“뭐, 소문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아무 전조도 없었던 너희 둘이 갑자기 엄청나게 티를 내면서 연애를 한다? 거기서부터 의심이 시작되는 거란다. 순수한 애정이 아닌 무언가가 끼어있을 거라는 의심이.”
키타하라 하쿠슈는 사실 추리소설가였나. 날카로운 눈빛에 사서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위험해, 하쿠슈 선생님은 날카롭다. 이래서 작가라는 사람들은 늘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연인 흉내가 어설펐다는 것까지는 차마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눈앞의 상대를 경계하고 만다. 하쿠슈의 말에 타쿠보쿠는 소리치며 반박했다.
“아, 아무것도 없었다니까! 의심도 정도껏 해!”
“코타로 군.”
“우웁.”
이름이 불리자마자 타카무라가 타쿠보쿠의 입에 카스테라를 쑤셔 넣는다. 먹고 조용히 하고 있으라는 뜻이다. 타쿠보쿠를 털어도 나올 것이 없을 테니 철저하게 사서를 공략하겠다는 작전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사서는 헛숨을 들이킬 뻔했다.
“자, 말해보렴. 뭐가 있었는지 말이야.”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그 모습은 어쩐지 마왕과도 같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들키면 전부 끝장이었다.
“아니, 그게….”
“그게?”
“그, 그러니까….”
틀렸어. 변명거리가 전혀 떠오르질 않는다. 이대로 끝인 건가, 이제 이시카와 선생님이랑 나는 부부사기단으로 잡혀가서 법정에 서는 거지, 그런 거지…. 눈이 뱅글뱅글 돌 것만 같았다. 변명을 생각하지 못해 이어지는 침묵에 담화실에 예사롭지 않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긴장감을 깬 것은 의외의 한마디였다.
“뭐, 잘 해봐. 제법 어울리는 한 쌍 아냐?”
계속 조용히 상황을 관전하고만 있던 이사무가, 두 사람의 편을 들어준 것이었다.
“이사무.”
“게다가 지금은 뭔가가 있었다는 물증도 없잖아?”
“선생님….”
“만약 정말로 뭔가가 있었다고 해도, 둘이 좋다는데 뭐 어쩌겠어? 일단 놔둬 보고, 나중에 정말로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이사무의 의견도 맞는 말이라 그렇게 나오면 또 할 말이 없다. 지금 당장은 심증뿐이고, 아직 뭔가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니 덮어놓고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입을 다물고 있었던 하쿠슈가 그래도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찌푸리자 이사무는 능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생은 짧으니, 사랑하라 소녀여」, 잖아?”
종지부를 찍는 전매특허 대사가 나오면 이제는 정말로 더 할 말이 없었다. 타카무라는 졌다는 듯 웃으며 지금껏 붙잡고 있던 타쿠보쿠를 풀어주었다. 그걸 지켜보며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었던 하쿠슈가 이사무를 노려보았다.
“넌 얼마 받은 거니?”
“무슨 그런 아침드라마 악역 같은 말을 해.”
“하아….”
짧은 한숨. 하쿠슈의 시선이 타쿠보쿠와 사서 쪽을 향했다. 이번에는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제대로 털겠다는 메시지가 담긴 시선이었다.
“타쿠보쿠,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지만 다음은 없어.”
“다음이고 뭐고, 진짜 사귄다니까.”
“마, 맞아요. 의심하지 말아 주세요!”
다행히도 어떻게 넘어가기는 했구나. 하지만 사서는 너무 긴장해서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냥 놔두세요.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렇게 쥐 잡듯이 잡으려고 하시는 거죠?….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비싼 카스테라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족족 모래알처럼 느껴지는 탓에 맛을 음미할 수도 없었다.
차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다과 시간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사서와 타쿠보쿠는 담화실을 나섰다. 눈치챈 사람이 있으니 서둘러 작전 회의를 해야 했다.
“어―이.”
“아, 요시이 선생님.”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을 누군가가 불러세운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자마자 타쿠보쿠가 겍, 하고 질렸다는 듯 소리를 냈다.
“겍, 이 뭐야,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네가 그렇게 나오니까 싫은 거라고. 그래서 왜 도와준 건데?”
“뭔가 재미있어 보이길래 말이지.”
이사무는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 아, 저 웃음은…. 사서는 이사무의 미소를 보고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사무는 진심으로 타쿠보쿠와 사서의 사이를 응원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게 짜고 치는 사기 연애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던 거다.
이사무의 대답을 들은 타쿠보쿠는 골치 아파졌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한참을 그러다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은 타쿠보쿠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이사무는 ‘나중에 술 사라’ 라고 상쾌하게 말한 뒤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의외의 사람에게 들켜버렸네요….”
“아―! 이사무에게 들키는 게 제일 골치 아프다고!”
복도에 짜증 섞인 절규가 울려 퍼졌다. 그 절규를 들으며, 사서는 이사무가 사라진 복도 쪽을 쳐다보았다. 이사무가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할 일은 없겠지만, 문제는 벌써 눈치채거나 의심하고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는 사실이다. 의심은 언제나 믿음보다도 빨리 퍼지는 법이다. 왠지 불안해져서 사서는 엄지손톱을 잘근 씹었다.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쌩돈 만 오천 엔을 날리고 그냥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뭔가 손을 써야 해.
열린 복도의 창밖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공기가 제법 따뜻해진 것이, 곧 꽃이라도 피려는 모양이었다.
뭔가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며칠 전이었는데요.
그 며칠 동안 이것도 저것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잔뜩 힘을 넣었던 공작들이 전부 실패해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다들 안 믿어주는 거지? 상대가 이시카와 선생님이라 역시 신뢰감이 없어서 그런 건가? 하지만 이제 와서 상대를 탓하기에 지금은 너무 늦었다. 이런저런 소식통을 돌려 확인해본 바로는, 진짜 사귄다는 여론이 절반, 아니라는 여론이 절반. 여기서 더 밀린다면 위험할 것이었다. 날이 점점 풀리는지 방금 자판기에서 뽑은 차가운 오렌지 주스 캔 표면에 금방 물이 맺힌다. 아, 물 떨어진다.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으로 사서는 한탄하듯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어떡하죠.”
“이대로 밀고 가던지, 아니면 사실을 고하고 깨지던지 둘 중 하나겠지.”
“후자는 절대 안 돼요.”
“엉. 나도 하쿠슈한테 죽고 싶진 않거든….”
대답은 제법 담담하게 했지만, 물러설 수 없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다. 다 마신 주스 병을 바닥에 내려놓은 타쿠보쿠가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까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으니 넘어갔겠지만, 진실을 들고나오는 순간 끝장일걸.”
벽에 기대 타쿠보쿠의 말을 들으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사서의 시선이 순간 어딘가를 향했다. 사서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확실한 증거….”
“응?”
“확실한 증거를 만들 생각을 왜 못 했을까요….”
“증거?”
“그러니까, 연인들만 하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너무나도 의지에 찬 모습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서를 보고, 타쿠보쿠는 당황해서 따라 일어났다.
“야, 잠깐….”
“저랑 해요, 여기서.”
“뭐!?”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새파랗게 질린 타쿠보쿠에게 사서는 당당하게 외쳤다.
“하자고요, 키스!”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목적어 좀 붙여!!!!!!!”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 지르고 있지만, 당연히 헷갈린 쪽이 잘못이다.
"갑자기 왜 그래?!"
"아니, 저기 선생님들이 오시길래요."
사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로 몇 명인가가 무리 지어 외출에서 돌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도서관 신문 편집위원들이다. 확실히 찬스라면 찬스였다.
“잘 생각해봐요. 지금 여기서 키스하는 걸 들키면 기정사실로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하자고? 제정신이야?”
“제정신인데요! 이렇게 뒷공작을 계속하느니 그냥 한번 화끈하게 하고 끝내는 게 낫지 않아요?”
“너 말이지….”
질렸다는 듯이, 혹은 타이르려는 듯이 말문을 열었지만, 어차피 뭐라고 말해도 사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 그랬지, 사서는 이상한 부분에서 스위치가 들어가면 상상도 못 할 일을 저질러버리는 타입이었지. 하긴 그러니까 지금 사기연애 공작 같은 거나 하고 있지…. 타쿠보쿠가 뒤늦게 후회하며 고민 아닌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다른 문호들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 본 사서가 다급하게 타쿠보쿠의 옷깃을 잡았다. 아무래도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빨리 한 번 하자고요. 입술에다 안 해도 되니까! 네?”
“아, 좀…!”
“그럼 왜 나랑 키스하기 싫은데요? 들어나 봅시다.”
이렇게까지 싫어하면 오히려 오기가 생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뽀뽀해주마. 이거 안 해주면 계약 위반이야! 그 전에 일단 사정 청취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서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진지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타쿠보쿠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피하고 있는 것이 왠지 대답하기 싫은 것 같았다.
“얼른―”
“네가,”
대답을 재촉하려던 말과 대답이 겹쳐버리고 만다.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끝나고 타쿠보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딱히 진심인 것도 아니잖아.”
“진심?”
“그러니까…. 이 관계에 말이지.”
그건 무슨 뜻이에요? 라고 되물어보려던 순간 턱이 들어 올려졌다. 입술이 잠시 맞닿았다 떨어졌다. 낯선 감촉에 놀라거나 시선을 맞출 틈도 주지 않고 타쿠보쿠가 사서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마 봤을걸. 잠깐 이러고 있어.”
“네….”
그렇게 대답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색하게 굳은 손은 공중을 헤매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겨우 상대방의 등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서로 끌어안은 상태가 되자 멀리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멈춘 대신 가까운 거리에서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 이 정도 거리면 내 심장 소리도 들리겠는걸…. 체향이 섞인 섬유유연제 냄새며 호흡까지도 신경 쓰일 정도가 되자 얼굴에 살살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이거?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러니까 이건 공작이고 나는….
…아, 그렇구나.
나 이시카와 선생님을 좋아하나 봐.
사서는 알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은 단단히 일이 잘못됐을 때다.
원래 단 한 번의 성공은 아흔아홉 번의 실패를 숨겨주는 법. 공작은 화려하게 성공했고, 도서관 전체에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기정사실화 되었다. 도서관 신문 쪽에서 특종 기사로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이제 확인사살로 확실하게 헤어지기만 하면….
헤어지기만 하면.
정원에 부는 바람이 이제는 제법 따뜻했다. 벤치에 앉아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것을 보던 사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호잇.”
“히익?!”
갑자기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아, 사서는 놀란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이사무가 씨익 웃으며 음료수를 건넨다.
"자, 마실 거."
"아, 감사합니다….“
"그래서, 상담? 보나 마나 이시카와 관련이겠지 뭐. 무슨 일인데?"
예상이 적중했는지 음료수를 받아든 손이 그대로 멈춘다.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서를, 이사무는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겨우 말을 고른 사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모호한 대답과 함께, 사건은 일주일 전으로 돌아간다.
소동은 소동이고, 일은 일이다. 그 모든 공작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도서관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봄이 되면 온갖 연구과제들이 물 밀듯 밀려오기 때문에, 평소의 잠서 작업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배로 늘어나 버린다.
타쿠보쿠는 그날 잠서를 담당한 회파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아침에 찻잎이 섰는데도, 드물게도 운이 나쁜 날이었다. 운 없게도, 침식자의 칼날에 잘못 스쳐 부상을 입고 돌아오고 말았다. 소식을 들은 사서는 바로 보수실에 뛰어들어 보수 작업을 시작했다. 찢어진 페이지를 갈고, 희미해진 글자를 보수한다. 거치대에 걸린 잉크 팩에 연결된 줄이 이따금 흔들리면 손을 재촉해 작업을 서둘렀다.
몇십, 몇백 번을 해온 작업인데도 손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단순히 여기서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이다. 하필이면 마음을 자각해버린 직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긴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말 것이다. 그야 당연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알아버렸으니까, 그리고 그 소중함이 모두에게 갖는 동등한 조건의 소중함이 아니게 되어버렸으니까. 그래서 사서는 필사적이었다. 너무 집중해서 스스로가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칸막이 커튼 너머의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서는 작업을 멈추고 커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커튼이 천천히 걷히고. 침대에 걸터앉은 타쿠보쿠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피곤한 듯이 얼굴을 약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니, 모약 상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왜 울상이야?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이런 건 이제 익숙하잖아.”
“선생님.”
어떻게 익숙해질 수 있겠느냐는 말은, 목구멍 속으로 꾹 눌러 숨겼다. 사서는 익숙해질 수 없다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는 대신 작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사각사각 종이가 갈리는 소리와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와 펜촉에 뭉친 잉크를 이따금 잉크 병 입구에 덜어내는 소리가 보수실을 채웠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상대를 향한 배려인지 자신을 위한 일인지는 본인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보수를 끝내고 펜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타쿠보쿠가 사서에게 말을 걸었다. 대화라기보다는 날카로운 혼잣말을 들려주는 것에 가까운 어조였다.
“왜 그렇게까지 열심이야? 이제 와서.”
“무슨 뜻이에요?”
“진심인 것도 아니잖아, 너.”
“그럼 사람이 다쳤는데 대충 해요?”
체념이 절반에 누굴 향한 것인지는 몰라도 비꼬는 말투가 절반이었다. 사서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 이렇게 말하려던 게 아닌데. 금방 또 후회하는 마음이 들고 만다. 더 대화할 생각이 없는지 타쿠보쿠는 아무 말 없이 침대에 누웠다. 책의 보수가 끝난 뒤에는 육체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니, 어차피 앞으로 몇 시간은 여기 누워있어야 할 것이었다.
사서는 타쿠보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모약 상태는, 어떤 말을 해도 진심인 시간이지만 동시에 어떤 말을 해도 진심이 아닌 시간이기도 하다. 사람의 약한 부분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니 체면이라는 한 겹을 덧씌우는 일 같은 건 불가능하다. 어떤 말을 들어도, 어떤 말을 해도, 덮고 넘어가는 것만이 가장 원만한 해결법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면.
“선생님.”
“…….”
“좋아해요, 진짜로. 지금이니까 말하는 거지만.”
“뭐?”
“다 잊어버리셔도 돼요.”
잠깐, 무슨 뜻이야. 그렇게 되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것이 문장으로 구현되는 일은 없었다. 잠이 밀려온다. 보수한 책이 이제서야 안정제로서의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글자가 홍수처럼 밀려오는 감각에 타쿠보쿠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잠들었다.
그렇게 암묵적 합의 하에 서로 잊어버릴 일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보수가 끝난 다음 날이었다. 아침 일찍 사서실에 찾아온 타쿠보쿠가 사서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사서가 받아들지도 않았는데 책상에 봉투를 내려놓고,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이거 그만하자. 돈 돌려줄게.”
“네?”
그리하여 계약은 파기되었고, 두 사람은 원래 관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게 끝이면 상담하러 안 왔겠지?”
“하하….”
힘 빠지는 헛웃음을 들으며 이사무는 주스를 홀짝였다. 사서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그게, 그 이후로 만날 수가 없어요. 저를…. 완전히 피하는 것 같아요.”
아직 뜯지도 않은 주스 병을 꼭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이, 어지간히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이것도 실연이라면 실연인데 그 이후 따라오는 감각이 아픔이나 쓸쓸함이 아니라 ‘화’라니, 정말 여러 의미로 상황 적응도 전환도 빠른 아가씨라고 이사무는 생각했다.
“피하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피하고 있는 거야.”
“왜죠?!”
“나라고 알겠나, 그건 본인에게 물어봐야지.”
“하아아, 열 받아.”
사서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화도 아니고 분노의 레벨이로구만. 이사무는 미묘한 기분으로 웃었다. 그래도 일단은 상담해달라고 요청을 받은 몸,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의 고민에 낸들 알겠나, 하고만 대답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생각이지만, 이시카와는 말이지, 도망치고 있는 거야.”
“도망? 저를 피해서요?”
“아―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답을 들은 사서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두어 모금 남은 주스 병을 살살 흔들며 이사무가 말을 이었다.
“그 녀석,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당신을 소중한 사람으로 두기 싫은 거야. 정말로 소중해지면 상처 입혔을 때 돌이킬 수 없게 되잖아.”
“그런….”
“그러니까 자기 마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거겠지.”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이대로라면 평생 얼굴도 못 보고 살게 될 것 같은데.”
“얼굴도 못 보고 사는 건 싫어?”
“네. 싫어요.”
조금 놀려줄 생각으로 짓궂게 건넨 말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제법 놀라웠다. 사서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계약 파기는,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상대랑 가짜 연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게 부담스럽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치만 일부러 피해 다니는 건, 그럴 수 없어요. 좋다고 한마디 했는데 왜 자기가 먼저 도망가? 난 쫓아간 적도 없어! 깔끔하게 그만하고 정리하자고 먼저 말한 건 그쪽이면서 왜 마치 구질구질하고 미묘하게 끝난 것 마냥 아무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얼굴도 안 보려고 해? 납득 못 해요. 차라리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라고!”
그야말로 에스컬레이터식 분노 점화의 훌륭한 예시다.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는 우다다 말을 뱉어낸 뒤 시원하게 주스 병뚜껑을 따서 보는 사람이 상쾌할 정도로 호쾌하게 원 샷. 뒤이어 크하―! 하고 뱉어내는 숨까지 그야말로 백 점 만점이었다. 이게 술자리였다면 박수라도 쳐 줬을 텐데, 하고 이사무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요는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거지?”
“네. 정말로 도망치고 있는 거라면, 붙잡아서 뭐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들어야겠어요.”
결의에 찬 눈빛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면 이렇게 해 볼까…. 이사무는 엷게 웃었다. 어떻게 해결할지 대충 방향성이 잡히기 시작했다.
“밀고 나가는 건 좋다고 생각해. 이 경우에는 아무래도 정면 돌파가 정답일 테니까.”
“정면 돌파요?”
“응. 퇴로가 있으니까 도망치는 거거든. 차라리 도망칠 구석조차 없게 몰아넣는다는 느낌으로 밀고 가 봐.”
“으음, 그치만 어떻게 몰아넣죠….”
“뭐어, 그 부분은 내가 도와줄 테니까, 당신은 적절한 질문을 준비해서 밀고 나가라구.”
“…효과 있을까요?”
이제 와서 갑자기 불안해졌는지 사서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사무는 나 못 믿어? 라고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내용이 어떻건 간에 적어도 답은 들을 수 있겠지. 당신은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대답을 듣고 싶은 거잖아.”
맞는 말이다. 사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 마신 주스 병의 뚜껑을 닫았다. 뚜껑은 몇 번 달그락거리다가 이내 딱 맞아 기분 좋게 닫혔다. 우회로도 퇴로도 없다. 남은 건 정면 돌파뿐이다.
가위바위보와 무사들의 대결과 고백은 근본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있다. 결과를 짐작할 수 없는 단판 승부라는 점이다. 사서는 그런 얼빠진 생각을 하며 심호흡을 했다. 사람이 별로 지나다니지 않는 정원의 깊은 곳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유독 조용했다. 그야말로 폭풍전야다. 바로 얼굴을 보고 말하는 건 피할지도 모르지만 편지라면 받아줄 것이라는 이사무의 조언으로, 사서는 타쿠보쿠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니까 앞으로 닥쳐올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싸움이다. 목숨을 건 결투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사서는 어쩐지 점점 비장한 기분이 되어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정신을 집중하는 거다.
“…불러놓고 뭐 하냐?”
“우아아악!?”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차마 빈말로도 멀쩡한 인간의 소리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비명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뒤를 홱 돌아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한다. 정작 목소리의 주인은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어이없어하고 있었지만. 사서는 긴장해서인지 너무 놀라서인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누르며 말했다.
“아, 안 올 줄 알았어요.”
“다시 가?”
“아뇨!”
눈은 바라봐주지 않은 채로, 타쿠보쿠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한동안 피해 다니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대화하려니 좀 어색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답을 듣고 싶었어요.”
“알아.”
“지금부터 하는 질문에 답해줄 수 있어요?”
“미안.”
돌아오는 것은 짧은 사과다. 사서는 고개를 똑바로 들어 눈앞의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나뭇잎 사이를 통과한 햇살이 쪼개져 반짝거리며 타쿠보쿠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어째서죠?”
시선이 부딪쳤다가 다시 멀어졌다. 말을 고르려는 듯 타쿠보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순간의 침묵은 꼭 영원 같았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배려해 주시는 거라면 필요 없어요. 전 특별한 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냥 선생님의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
“왜 그만두자고 했어요?”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답하는 대신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하기로 마음먹기라도 한 듯, 타쿠보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화라도 내면 좋을 텐데. 사서는 조금 씁쓸한 기분으로 말했다.
“저 때문인가요? 제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말해서? 부담스러워져서?”
“아니, 아냐.”
“그게 아닌 거면 대답해 주세요. 납득하고 깔끔하게 끝낼 수 있도록 이유를 말해 주세요.”
“이 몸은 별로 좋은 사람은 못 돼.”
“제가 그걸 모를 것 같아요?”
“결국 상처받는 건 너야. 그럴 바에야 미리 관두는 게 나아.”
“…그건 선생님 생각이잖아요.”
아, 이 말은 피해 갈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타쿠보쿠는 그제야 제대로 사서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시선 끝에 서 있는 사서는 평소보다도 더 단단해 보였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을 하고는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건 선생님 생각이라구요. 정말로 절 생각해서 그만두자고 했던 거라면, 그건 틀렸어요. 전 누군가를 좋아할 때 언젠가는 상처받을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모를 만큼 무르지 않아요. 그리고 그 말이 맞다고 해도, 그건 제가 감당해야 할 제 일이잖아요?”
“널 걱정하고 있는 거라고.”
“왜 멋대로 남의 앞날부터 걱정해요? 누굴 언제 어떻게 좋아할지는 제가 정해요. 정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으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그런 건….”
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그런 건 그냥 나를 핑계로 삼아서 도망치고 있는 것뿐이잖아요!”
“넌 모르잖아!”
다 끝나지 않은 말을 자르듯 타쿠보쿠가 소리쳤다. 후회인지 불안인지 걱정인지, 잔뜩 찡그린 얼굴에서 좀처럼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소중하게 못 대해줄지도 몰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고! 원래 그런 성정이니까! 같이 불행해질 뿐이라고!”
“그러니까 그래도 상관없다고,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거잖아! 그런 게 무서워서 도망치다니 바보 아냐?!”
한 발자국도 지지 않고 사서도 맞서서 소리쳤다. 지금까지 묵혀 있던 마음을 와르르 쏟아내니 어쩐지 눈물도 함께 쏟아질 것처럼 눈앞이 뿌옇게 어른거렸다. 사서는 손등으로 눈가를 한번 슥 훔쳤다.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소리쳤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게서 도망치지 말라고!!”
갑자기 큰 소리가 난 탓에 놀란 것인지 어딘가의 나무에서 새 몇 마리가 파드득 날아올랐다. 맺혀있었던 말을 다 꺼냈는데도 긴장이 풀리지 않아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사서는 고개를 숙인 채로 심호흡을 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앞쪽에서 들려왔다.
이제 될 대로 돼라. 사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엥, 선생님? 표정이 왜….”
“야, 뛰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예상 외의 광경이었다. 타쿠보쿠가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사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스킨십 찬스를 기뻐할 틈도 없이 그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잠깐만, 어디 가요!?”
“어디 가고 자시고, 도망가야지!”
“도, 도망!?”
“뒤 좀 돌아봐라.”
그 말에 사서는 불안감과 함께 침을 꼴깍 삼켰다. 슬쩍 뒤를 돌아본 순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호러 게임의 한 장면이었다. 뭔가 그런 거 있지 않았나? 이유도 잘 모르겠는데 무서운 존재한테 엄청나게 쫓기는 게임. 아아, 이름 생각 안 난다…. 뭔가 굉장히 불합리한 게임이었는데….
“앗, 우와악!!”
현실도피의 끝에 다른 세계에 도달한 페널티로 돌부리에 발이 걸렸다.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한 사서를 타쿠보쿠가 아슬아슬하게 잡아 주었다.
“뭐 하는 거야! 딴생각 하지 말고 제대로 뛰어!”
“죄, 죄송해요. 근데 우리 왜 쫓기고 있는 거죠?!”
“내가 알겠냐?! 그냥 일단 튀는 거지!”
“예?!”
이건 아마도 평소 자주 쫓겨 다니는 그의 경험에서 우러난 행동일 것이다. 하긴 인간은 보통 누군가가 쫓아오면 도망치도록 설계되어 있다. 요컨대 생존본능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제는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필사적으로 뛰면서 사서는 다시 한 번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타-쿠-보-쿠!!”
사서와 타쿠보쿠의 뒤를 쫓아, 굉장히 무서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키타하라 하쿠슈와 타카무라 코타로가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왜, 왜 이렇게 된 건데…!”
사서는 빠르게 과거의 잘못과 업보를 되짚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물론 연애사기를 좀 치긴 했지만, 저는 오히려 돈을 떼먹혔던 쪽인데요!? 그때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떠오른 것은 ‘이걸로 만사 해결☆’이라는 상쾌한 웃음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고 있는 이사무의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 이런 대화를 나눴었지. “으음, 그치만 어떻게 몰아넣죠….” “뭐어, 그 부분은 내가 도와줄 테니까…”
…….
범인의 정체, 알아버렸다.
흔들다리 효과도 흔들다리에서 떨어져 죽으면 노릴 수 없는 거 아닌가. 만사 해결은 뭐가 만사 해결인데!? 우리의 죽음이!? 하긴 뭐든 죽으면 해결되긴 하죠!? 사서는 이사무를 믿고 그에게 맡긴 것을 깊이 후회했다. 주정뱅이에게 진지하게 상담했던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사무는 상담을 들어주던 때에도 좀 취해있었던 것 같았다. 진지하게 듣지 말 걸…!
후회는 뒤로 미뤄두고, 계속 달리려니 죽을 맛이었다. 긴 문장을 말할 힘도 없어서 사서는 타쿠보쿠의 손을 꽉 잡았다. 그래도 오랜 시간을 같이 일한 눈치가 있어, 금방 사서의 호흡이 거칠어진 것을 알아챈 타쿠보쿠는 은근슬쩍 옆으로 빠지며 경로를 바꿨다. 큰 나무기둥 뒤에 숨자마자 하쿠슈 일행이 그 앞을 지나갔다. 쫓고 있는 상대가 바로 근처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아…. 괜찮아?”
“하아, 하아…. 뭐, 네에….”
“너 진짜 체력 좀 붙여라.”
누가 더 쫓아오지는 않는지를 곁눈질로 확인하며 타쿠보쿠가 말했다. 사서는 나무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사람에게 어려운 요구를 하시네요….”
“윗몸일으키기 열 개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냐?”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사서는 어쩐지 이런 대화를 다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일주일은 생각보다 긴 기간이다. 그동안 얼굴도 못 봤으니 이런 상황이건 저런 상황이건 기쁜 것은 기쁜 것이다.
한참 나무 너머를 살피던 타쿠보쿠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하쿠슈 일행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가버린 모양이었다.
"됐어. 간 것 같으니 돌아가자고. 앞으로 마주치는 건 잘 피해 다니는 수밖에…."
"잠깐만요."
그대로 돌아가려는 타쿠보쿠의 자켓 자락을 사서가 붙잡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타쿠보쿠에게 사서가 말했다.
"우리 아직 얘기 안 끝났잖아요."
"아?"
그렇게 말하는 사서의 표정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타쿠보쿠는 그제야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원래 둘이 이야기하던 중이었지.
“꼭 지금 이 상황에 해야겠어?”
“그치만 여기서 이대로 헤어지면 계속 도망 다닐 거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으면….”
“다음이 있겠냐, 이번에도 일주일 만에 얼굴 봤는데!”
다음으로 미루자는 말에 초속으로 사서의 반론이 날아들었다. 하긴 그건 너무나도 확실히 자기 잘못이라서 타쿠보쿠는 차마 변명을 하거나 다른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무슨 핑계를 대도 사서가 납득하고 물러나 줄 기색은 전혀 없었다. 하긴 증거를 만들겠다고 다짜고짜 입술부터 부딪히고 보려는 사람인데, 순순히 이 자리에서 그럼 다음에 보자며 헤어져 줄 리가 없다.
“또 도망치게 두지는 않아요.”
타쿠보쿠가 주춤해있는 틈을 타 사서가 그를 몰아붙였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사서의 결연한 표정이 어쩐지 속상함이나 화를 넘어선 무언가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 같아서 타쿠보쿠는 바로 도망가지 못했다.
“야, 저기, 그러니까….”
“좋아해요. 대답해 주세요.”
“미안! 내가 미안, 아무튼 미안!”
“미안하다는 말로 다 끝나면 세상에 경찰이 왜 있냐. 대답!”
“아니, 신고할 거야!? 무슨 죄목으로!?”
“그 부분은 아직 고려 중입니다.”
“고려 중이냐고….”
적당히 눈치를 봐서 그대로 줄행랑을 칠 생각이었는데 사서는 도무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밧줄 같은 게 있었다면 분명히 붙잡혀서 꽁꽁 묶였을 것이라고 타쿠보쿠는 생각했다. 고양이에게 몰리고 있는 쥐처럼 눈치를 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치지만,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상대는 두 걸음 다가와 거리가 가까워질 뿐이었다.
아, 안되겠다. 얼른 도망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빠져나갈 길을 찾아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던 타쿠보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아까 잠시 숨어있었던 나무 그늘 너머에서부터 하쿠슈와 타카무라가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였다. 타쿠보쿠는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을 머릿속에서 최대한 빠르게 시뮬레이션했다. 역시 떠오르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모든 상황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도망치기다!!”
“앗!?”
뒤돌아 냅다 달리기뿐이다.
그걸 신호로 타쿠보쿠를 쫓던 이들이 모두 일제히 그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도 발소리가 들리자 사서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난데없이 지옥의 레이스가 시작된 거지? 이거, 안 잡히려면 나도 뛰어야 하는 거지?
“뭐냐고, 뭐냐고…!”
“뭐냐고는 이 몸이 하고 싶은 말이거든!?”
왜 이렇게 된 거지? 대단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좋은지 싫은지를 듣고 싶을 뿐인데, 왜 대답 한 번 듣기가 이렇게까지 힘든 거지? 하긴 이 사람은 처음부터 그랬다. 좀 가까워졌나 싶으면 냅다 선을 그어 버린다.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고 거리감을 욕심내게 만들면서도 너무 가까워지려고 하면 금방 도망쳐버려서 얼굴조차 볼 수가 없다. 좀 잡혀주면 안 되나. 한번 잡으면 다시는 안 놓아줄 테다. 사서는 으득 이를 갈았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저쪽 끝에 연못이 보이기 시작했다. 방향도 생각하지 않고 막 달렸던 것인데 정원 깊은 곳에서 달려서 입구 쪽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타쿠보쿠―. 잡히면 죽어―."
"살려 줘!!“
등 뒤에서 하쿠슈의 말이 들려왔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평온한 목소리에서는 그야말로 강자의 여유가 묻어나다 못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한편 그만큼의 강자가 되지 못하는 사서는 절박한 마음으로 소리쳤다.
"잡히면 진짜 가만 안 둬!"
"아니, 그니까 너랑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면 되잖아!"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요!"
명확한 근거는 없었지만 왠지 지금 대답을 듣지 않으면 그냥 터무니없는 해프닝으로 남아버려 어중간한 결말을 맺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런 건 절대 사절이다.
“아무튼 이번에야말로 대답을 들어야겠어요. 각오하세요!”
“각오!?”
각오까지 해야 하냐!? 사람은 너무 당황하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던데,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의미 모를 긴장으로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사서는 있는 힘껏 달려 거리를 좁혔고, 타쿠보쿠는 있는 힘껏 도망쳤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한참을 달리던 타쿠보쿠는 잠시 멈칫했다. 이대로 계속 달리면 바로 앞이 연못이라 도망칠 길이 없어진다. 급하게 방향을 바꿔 달리려던 타쿠보쿠에게 사서가 지금이 기회라는 듯이 달려들었다. 타쿠보쿠는 질색해서 소리쳤다.
"야, 잠깐! 물! 뒤에 물!"
"잡았다…! 앗."
“아―!"
물론 그걸 말리는 말보다도 사서의 행동이 더 빨랐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연못으로 미끄러졌다. 짧은 비명 직후 풍덩, 하는 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앞 뒤 안 보고 달려들면 험한 꼴 보는 법이다. 그나마 연못이 깊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흠뻑 젖은 타쿠보쿠가 사서를 붙잡고 흔들었다.
"야, 괜찮아?!"
"아하하, 죄송합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 상황이 어이없는지, 똑같이 흠뻑 젖었는데도 사서는 신나게 웃고 있었다. 웃냐? 죽을 뻔했는데 웃음이 나와? 타쿠보쿠는 한마디 해 줄 생각으로 짐짓 화난 듯이 말했다.
"이게 연못이었으니 망정이지 저수지나 뭐 그런 거였으면 어쩔 뻔했어!"
그러자 사서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로 쿡쿡 웃으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둘이서 나란히 물귀신이 되나?"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이쯤 되면 혼낸다고 먹힐 리도 없다. 그렇게 판단한 타쿠보쿠의 인정사정없는 헤드락이 사서에게 날아들었다. 사서는 항복을 외치며 제 머리를 조이는 타쿠보쿠의 팔을 퍽퍽 쳤다.
"아, 아파, 잠깐, 잠깐, 하‥ 항복, 항복!! 항복!!!"
“제발 하나에 꽂혔다고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지 좀 말라고, 제발!”
“앗, 자, 잠깐만! 따지고 보면 이건 다 선생님 탓인데요?! 아!!”
그렇게 나오면 양심이 찔릴 수밖에 없다. 타쿠보쿠는 팔 힘을 슬쩍 풀었다. 타쿠보쿠의 품에서 겨우 빠져나온 사서가 겨우 살았다는 듯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축축하게 젖은 도서관 정복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이제 모르겠다. 하쿠슈한테 잡히건 말건 일단 돌아가서 옷 갈아입자고. 이대로는 감기 걸리니까.”
“…그럼 저한테도 잡혀주신 건가요?”
“네, 네. 잡혔습니다. 잡은 걸로 치십쇼―.”
완전 패배했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항복을 선언하는 타쿠보쿠를 보고 사서가 아하하, 웃었다. 기뻐서 웃는 것인지 웃겨서 웃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타쿠보쿠는 생각했다. 사서는 젖은 자켓에 붙은 개구리밥을 털어내며 말했다.
"아무튼 이제 도망치지 마세요. 저 많이 속상했어요. 선생님이 절 다시는 안 보기로 마음먹은 줄 알고…."
"…….“
“그래서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거예요.”
사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타쿠보쿠는 왠지 마음속 한구석이 저려오는 것 같았다. 그건 분명 평소 잘 보여주지 않는 낯선 표정을 봐 버린 탓도 있겠지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는 약간의 죄의식 때문이기도 했다.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한 행동이 상대를 가장 상처받게 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온 것은, 결국 그녀가 말한 대로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있던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뭐든 좋으니 지금 대답해 주세요."
"…그래.“
타쿠보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을 부딪쳐 오는 상대에게는 진심을 돌려주어야 한다. 마주친 눈동자에 이제 망설임은 없었다.
“그럼…. 제대로 말할게요.”
크흠, 사서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좀처럼 들려주지 않는 청아한 목소리에 기합을 넣어 외쳤다.
"나랑 사귈래 아니면 죽을래!!"
"네?“
"잘 선택해야 할 거다!!"
타쿠보쿠는 할 말을 잃고 사서를 쳐다보았다. 표정에 깃든 것이 완전히 전국시대의 무장이었다. 무슨…. 전쟁 포로한테 선택권 주냐 지금?
“좋아해요, 정말로. 대답은요?”
사서가 씨익 웃으며 타쿠보쿠의 후드 끈을 잡아당겼다. 아, 정말. 이 녀석은 항상 이렇게…. 타쿠보쿠는 패배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할 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하아, 좋아. 좋다고!”
답을 들은 사서가 활짝 웃으며 품에 안겨 왔다. 세상에서 제일 무드 없는 고백 현장에 랭킹을 매긴다면 순위권도 노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타쿠보쿠는 사서를 끌어안았다. 젖은 머리카락이며 옷에서 물비린내가 났지만 축축한 천 너머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만은 따뜻했다.
이렇게 해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계약 연애는 끝이 났다. 돌려받은 2만 엔은 이사무에의 보답 술값으로 녹아 없어졌고, 하쿠슈와 타카무라에게는 거짓말을 했던 것도 잘못이지만 위험하게 무모한 짓을 했다며 왕창 혼이 났다. 도서관 신문에서 [특종! 계약 연애에서 진짜 연인으로!?]라는 싸구려 타이틀과 함께 1면에 대서특필 된 것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글의 소재로 삼으려고 호시탐탐 덤벼오는 것을 막아내느라 고생도 좀 했다. 결국 처음에 목표했던 ‘조용히 계약 연애를 하고 조용히 깨지기’라는 목적은 단 한 글자도 달성하지 못한 셈이지만, 나름대로 온화한 일상은 잘 굴러가고 있다.
사서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제 봄도 거의 다 지났다. 다음 주쯤 되면 완전히 여름 날씨가 되겠지. 높게 자란 이름 모를 풀이 창틀 밑에서 흔들렸다. 누군가가 사서실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한 명뿐이지.
“들어간다?”
“네―.”
사서는 타쿠보쿠에게 경쾌하게 대답했다. 불어오는 바람으로부터, 눅눅하고 뜨겁지만 풋풋한 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담, 그날 평소 움직이지 않는 근육을 잔뜩 움직여 달렸던 사서는 근육통,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쌀쌀한데 연못 물에 빠져 흠뻑 젖은 타쿠보쿠는 감기로 결과 둘이 사이좋게 앓아누워 한동안 고생했다는 것은 아직까지 종종 거론되는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이야기.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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