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스독] 명탐정이기 이전에

명탐정, 나,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네임 살인 사건 번외 :: 에도가와 란포의 경우

어느날, 에도가와 란포의 손목에 글씨가 생겼다.

란포는 제 하얀 손목 안쪽에 쓰여진 글씨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보면서 생각했다.

이거 파내면 어떻게 되지? 그리고 파낸다고 하면 얼마나 깊이 해야 하지?

오늘 미술 시간에 썼던 조각칼이 아직 란도셀에 있단 걸 기억해낸 란포는 혼자서 불법 시술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 그전에 칼날 소독해야지. 감염되면 큰일나니까. 생활 상식을 생각하며 팔랑팔랑 뛰어서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뛰쳐들어간 란포는 현관에 란도셀을 벗어제끼고 알콜솜을 찾았다. 없었다.

최근까지 있었는데. 란포는 엊그제 넘어져 다 깨진 제 무릎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엄마가 여기서 알콜솜을 꺼냈는데. 그게 끝이었나. 아쉬워서 잘 말린 붕대도 풀어보다가 가위로 자르다가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냉장고에 아빠가 먹다남은 도수 높은 일본주가 남아있을 거야. 술도 알콜이니까.

들고 있던 조각조각난 붕대고 가위고 전부 제자리에 두고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연 틈새로 냉기가 새어나왔다. 안에 들어있던 반찬들을 보다가 구석에 놓인 일본주를 찾았다.

커다란 병이어서 겨우 꺼냈다.

“으…, 차가워.”

란포는 옷소매를 잔뜩 늘려 손바닥과 술병 사이를 천으로 가렸지만 여전히 한기가 손바닥 새로 밀고 들어왔다. 참지 못하고 얼른 병을 식탁 위에 올렸다.

그리고 비게 된 손에 호호 입김을 불면서 술병을 바라봤다. 액체가 반쯤 차있는 술병. 딱 그만큼 맺히는 물방울들.

온기가 돌아오는 양 손바닥을 비비면서, 란포는 제 조각칼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휴지도.

술뚜껑을 열어 안에 있던 액체를 휴지에 축이면서 란포는 중얼거렸다. “냄새…,”

지독해.

어른들은 왜 이런 걸 마실까. 이게 뭐라고 아껴마실까. 아빠의 반응을 봐선 이 술이 꽤 비싼듯해보여서 더 이해가 안 됐다. 이 정도 크기 사탕을 사면 또 몰라.

휴지가 충분히 축축해진 걸 본 란포는 얼른 술뚜껑을 닫았다. 조각칼을 꺼냈다. 잘 적셔진 휴지로 칼날을 닦았다.

이름이 새겨진 손목을 보다가 그대로 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거,

“아파!!”

안 그래도 칼에 베여서(본인 스스로 벤거지만) 아픈데, 술이 아픔을 극대화시킨다. 그탓에 줄줄 새어나오는 피만큼이나 란포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와중에 영민한 머리는 이게 술 때문인 것 같단 생각을 바로 해버려서 들고 있던 걸 내팽겨치고 그대로 화장실로 가 세면대에서 그은 손목을 씻어냈다. 핏물이 물줄기를 따라 흐른다.

살을 베면 아프다는 사실을 왜 잊고 있었을까. 울어서 흐린 시야 사이로 보이는 글자. 사실 핏물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잊지 못할 그 이름이 새겨진 곳이 아팠다. 너무 아팠다.

울면서 세면대 대야가 차오르는 걸 봤다. 손목이 담가진 물이 옅은 붉은 빛이 되는 걸 보면서 란포는 생각했다. 언제 멎을까.

이 피 언제 멎을까. 아픔은 언제 멎을까. 이름은 지워질까. 이름 정말로 지워질까? 지워질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데 대체 왜 아픈거야?

수용성이라 혹시 물에 지워지면 어떡하지? 란포는 수도꼭지를 끄고 제 손목을 제 눈앞에 들이밀었다. 퐁퐁 밀려나오는 혈액 주변에 여전히 글씨는 남아있다. 여전히 알아볼 수 있게 이름이 적혀있다.

란포는 손으로 피가 새는 손목을 살짝 눌렀다. 이름이 쓰인 그곳을 눌렀다. 맥박이 콩콩 뛰었다.

눈을 감았다. 심장도 콩콩 뛰었다.

맥박을 재촉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심장을 지그시 누르는 아픔이 있다. 만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다.

나는 보자마자 알 거야. 네가 이 이름의 주인이란 걸. 란포는 깨달았다. 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맥을 짚던 손을 떼자 멎어가는 피가 이름 위에 흩어져있다. 피가 굳을 때까지 멍하니 그 이름을 보던 란포는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었다.

마침 돌아온 엄마가 란포가 벌인 난장판을 따라 화장실까지 들어와 기겁을 했다. 본인 아들이 자살 시도한 줄 알아서.

이후, 모든 게 호기심에서 시작된 걸 알고서는 그 벌로 간식 일주일 금지령 내렸다.

란포는 몹시 상심했다.

*

엄마도 아빠도 세상에서 없어진 날이었다.

제게 벌을 줄 사람은 더는 없다. 세상에 나를 책임질 사람은 나 혼자다.

란포는 그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장례식에 온 모두가 울고 있는데 그 중심의 란포만 울지 않았다. 그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세상에 혼자 남았단 사실의 의미를.

란포는 장례 내내 손목에 쓰인 이름만 쳐다봤다. 이름이 있는데, 왜 내가 혼자란 거지.

그건, 네임 보유자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고독을 느끼지 못했다. 느낄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운명의 상대와 이어져있으니까.

살아있는 사람과 이어져 있다. 그것이 주는 안정감은 그들을 한시도 외롭게 하지 않았다.

늘 누군가 곁에 있는 기분. 월하노인이 엮어준다는 붉은 실이 정말로 있는 듯한 느낌. 그러니 외롭지 않다고. 네임 보유자들은 그렇게들 말했다.

설사 상대에게 자신의 이름이 없다고 하더라도.

란포는 장례 이후 무덤 앞에 앉아 손목에 적힌 이름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나 외롭지 않아.”

죽어버린 양친에게 전하는 말.

“정말 그래.”

물론 진심이었다.

“내 한몸 건사하는 게 걱정되긴 하지만, 그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나, 아빠 아들이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도 란포는 계속 조잘거렸다. “경찰이 되면 이런저런 사람을 많이 보니까 언젠간 만나겠지. 그리고 만난다면 꼭 말해줄거야.”

늘 그려온 손목의 네임 상대. 이름만으로 상상한 그 얼굴을 그리면서 란포는 웃었다.

“나는 네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고.”

내뱉고서 한참을 서있던 란포가 그럼 잘 있어, 하고서 자리를 떴다.

그리고 아빠 이름으로 입학하게 된 경찰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래도 여전히 외롭지 않았다. 저와 어울리지 않는 일자리를 전전하면서도 똑같이 외롭지 않았다.

이 사회에 제 자리가 없는 것 같단 생각을 하면서도 란포는 외롭단 생각은 안 했다. 다만, 원망이 피어올랐을 뿐.

왜 너는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아?

그런 작은 원망.

외로움은 없었지만 닿는 온기도 없었다. 적힌 이름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너를 찾을 길이 없어. 아니, 찾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아무래도 네겐 내 이름이 없는 것 같은걸.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계속 나 혼자일 리가 없잖아.

희망이 없다. 에도가와 란포는 이름이 적힌 손목을 부여잡고 생각했다.

혼자라는 감각.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 건 운명과 만날 수 있단 희망에서 주어지는 것. 하지만 현실 끝에 닿게 되는 건 외로움보다 더한 감정.

원망은 갈 곳이 없다. 갈 곳 없이 맴돌다가 새까만 밤에 제게 돌아온다.

사회는 괴물같다. 어른들은 차갑다. 잘못된 퍼즐조각처럼 나는 사회에 끼지 못한다. 와중에 이름 주인은 나를 찾으러 오지도 않아. 별빛에 하얗게 빛나는 손목 살갗에 까맣게 새겨진 이름. 밉다.

밉지만, 미워할 수가 없다.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 사회에서 손목의 이름만이 내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란 걸 말해주니까.

흐려지는 눈가를 박박 비비며 란포는 어두운 밤하늘에 박힌 작은 빛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한참 별을 세다가 잠들고 해가 뜨면 일어났다.

*

수번의 아침 끝에 란포는 자신을 아직 어린아이라고 말해주는 어른을 만났다. 그 빛에 이끌려 명탐정이 되기로 했다.

*

명탐정이 된 후, 란포는 이름 주인을 충분히 찾을 수 있었다. 이전에 양친의 묘 앞에서 말한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당연했다. 원한다면 같은 이름은 모조리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찾지 않았다.

원망이 남아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운명을 믿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란포는 조금의 단서도 찾지 않았다.

그러다 드디어 너를 만났을 때,

에도가와 란포는 확실히 알았다. 이름은 자신에게만 새겨져 있었단 걸. 실망이 비죽 고개를 들이민다.

알고 있었다. 그 확률이 월등히 높았으니까. 하지만 기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래도 너는 나를 찾고 있었다. 나를 좋아했다. 다만 너는 명탐정인 나를 좋아했다. 란포는 한눈에 알았다.

하지만 명탐정이 아닌 나는 좋아해줄까. 명탐정 이전의 나를. 란포는 그때를 생각한다. 후쿠자와를 만나기 이전, 이름이 생겨나고, 이름을 보면서 인생을 견디다 아침을 맞이하던, 아무것도 아닌 어린애였던 때를.

“사인이라도 해줄까?”

그 말에 기뻐하며 긍정 대답을 하는 네게 란포는 펜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너는 그 펜으로 살갗에 이름을 써달라고 한다.

란포는, 네 요청에 제 이름을 정자로 네 손등에 쓰면서 넘치는 감정을 새겨넣는다. 그렇게 쓰면 정말로 제 이름이 네게 새겨질 것처럼.

하지만 현실은 물로 지워도 지워질 볼펜자국일 뿐. 허무하다.

인연 만드는 법은 에도가와 란포에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지금 만들고 싶은 건 흔한 인연이 아니라 운명이다. 일방적이지 않은.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사랑해줬으면 좋겠는데. 마치 내가 너를 만나기도 전에 사랑한 것처럼.

란포는 관람차에서 손을 잡고서 너와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마음을 담은 행동에 돌아올 반응이 사랑과 거리가 멀까봐. 명탐정답지 않은 내게 네가 실망할까봐.

좋아한다고 말해. 여전히 좋아한다고 해줘. - 에도가와 란포의 사건은 내내 이어졌다.

“나를 좋아하지?”

“…네,”

“여전히?”

“…네,”

사랑에 확신은 필요없었다. 같은 농도의 사랑일 리가 없으니까. 애초에 사랑까지 가지도 못할 감정이다. 마음과는 다르게 에도가와 란포의 이성은 차갑다.

“그럼 됐어.” 란포는 방긋 웃으며 네 살갗 표피에 스민 제 이름을 부단히 쓸어보다가 입을 맞췄다.

다만 네가 매번 여전히 좋아해준다면, 그러다 그 어떤 나를 보고서도 좋아한다고 말하는 날에는 겨우 사랑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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