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스독] 이웃집 다자이

[문스독] 이웃집 다자이 1

다자이 오사무 네임리스 드림

다자이 오사무는 이상한 인간이었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

“그럼 죽어버리지 그래?”

“너무하네에-.”

“맨날 죽고 싶다 염불하면서.”

“혼자 죽긴 싫다니까…. 자네가 같이,” “그 말 한 번만 더 해 봐.”

아무튼…, 내 서늘한 말에 다자이가 목소리를 줄이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가는 눈으로 빤히 그 뺀질뺀질한 얼굴을 쳐다보자 눈을 한 바퀴 도르륵 굴리던 그가 환하게 웃으며 곧 말한다.

“더불어 사는 사회잖아. 인정을 좀 베풀어 봐.”

“…”

다시 말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상한 새끼였다. 양심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뭐 하는 새끼길래 가난한 유학생한테 이렇게 빌붙어 먹는 건지.

어이가 없어 대답을 먹은 내게 “응? 어제저녁부터 한 끼도 못 먹었다구.” 하면서 칭얼대는 그의 말에 결국 오늘도 식량을 뜯기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와 달리 양심이 살아있는 나는 비렁뱅이의 사정을 듣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지라.

그나저나 도대체 뭘 하면 어제부터 굶냐. 제 몸 하나 건사 못하는 그를 보면서 저런 한심한 인간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눈으로 보면 조금 상처받는데.”

“…배 안 채울 거야?”

“조금 더 그렇게 봐도 돼.”

한숨을 쉬며 문을 더 열어주자 그가 헤실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온다.

“인스턴트 요리면 될까.”

“응, 거기 즉석밥도 주면 고맙지.”

가리키는 쪽은 주방 찬장이었다. 이 새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미 우리 집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다. 사실 직업이 기생충인 게 아닐까. 아니면 도둑이라든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데 다자이가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한다.

“취업준비생이야.”

“응?”

“자네가 생각하는 거 전부 다 아니고 그냥 취준생이라구, 나.”

그러고는 읏차, 하고 일어나서 찬장 문을 열어 즉석밥을 하나 꺼낸다.

“가져간다?”

그걸 흔들며 말하는 다자이. 그리고 조금 전 건넨 인스턴트 카레와 함께 품에 안고 문을 나서려길래, 얼른 물었다.

“너 취업활동해?”

“당연하지.”

어쩌면 무례할지도 모를 질문에도 여상스레 대꾸한 그가 문을 닫기 전 나를 돌아보며 방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잘 먹을게.”

곧이어 삐걱거리며 닫히는 문. 낡아빠져서 그런지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조금 뒤 옆집에서 다시 그 소리가 딱 두 번 들렸다.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리고 조용하다.

낡은 맨션이라 생활 소음이 크게 들릴 법도 한데 이후에 어떠한 소리도 다시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전자레인지 소리 하나 안 들리냐. 고개를 갸웃하다가 슬슬 나도 저녁을 먹어야 한단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인스턴트 요리를 꺼낸 전자레인지 선반 가장 아랫장 앞에 쪼그려 앉아 뭘 먹을지 고민했다. 나도,

“카레 먹어야지.”

버릇처럼 혼잣말을 하곤 대충 즉석밥과 카레를 그릇에 쏟아 데웠다. 그리고 인스턴트 김치를 보관통 채로 식탁 위에 꺼냈다. 이런저런 소품 덕에 반 이상 자리가 사라져 거의 모퉁이에서 먹어야 했지만 혼자서 끼니를 때울 자리로는 충분했다.

“으, 너무 달아.”

포장에 한국 정통 어쩌구 적혀 있는 주제에 달큰한 맛을 내는 김치를 카레밥에 올려 먹으면서 다음엔 꼭 한인 마트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조금 멀어서 근처 마트에서 샀더니 역시 맛이 없다.

그나저나 다자이는 반찬도 없이 카레를 먹나. 이것도 조금 건네줄 걸 그랬나. 어차피 맛없는데 음식물 처리도 할 겸. 숟가락에 묻은 붉은 고춧가루와 노란 카레. 나는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아직 날이 덜 풀려 차가운 방안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손에 든 숟가락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먹어야 살지. 기계적으로 노란 물이 든 쌀알을 우물우물 씹다가 이번 주말엔 외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혼자서 갈만한 곳이 어디가 있지. 여기저기를 떠올리다가 외식을 할 수 있단 사실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전부 이 값싼 집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기숙사 신청 기간을 잘못 알아서 이대로 얼어 죽고 마는 건가, 하던 중에 어찌저찌 구하게 된 집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게 분명할 건물이긴 했지만. 언제 철거할지 몰라 오늘내일하는 건물이긴 했지만. 그래도 진짜 말도 안 되게 월세가 싼 곳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계속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는 그런 곳.

무슨, 정부가 가진 뒷건물이라도 되나. 범죄 조직이 관련된 건 아니란 부동산 중개인의 말을 떠올렸다. 그런 ‘건’ 아니라면 정부밖에 더 있나. 괜히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해보았다. 진짜 말도 안 된다. 헛웃음을 지으며 카레를 퍼먹었다.

솔직히 건물이 너무 낡고 초라했던지라 치안이 조금 걱정되긴 했었다. 와르르 맨션이란 말이 어울릴 듯도 한 이층짜리 건물이었으니까. 이층 방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면 일 층으로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은. 그러나 주위 환경이 괜찮았고, 무엇보다 가격이 말도 안 되게 싼 데다가, 건물을 혼자 쓰는 거란 말에 바로 계약을 했더랬다.

마지막 남은 카레마저 싹싹 긁어먹고서 물을 들이켰다. 개수대에 그릇에 물을 채워 빙글빙글 돌리며 노란 찌꺼기를 비워냈다. 물도 참 잘 나온다. 혹시 녹물이 나올까 봐 필터를 끼우긴 했다. 아니, 나왔나? 하얗던 필터가 조금 노란 것 같기도 하다. 꽤 매끄러워진 표면에 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색을 지워낸다. 빨리 지우지 않으면 누렇게 변하니까.

그리고 곧 수저와 그릇을 건조대에 올려두고 소파 위에 올라갔다. 무릎을 꼭 안고 아무런 소식 없는 핸드폰을 한번 훑는데, 그사이 작은 창으로 스며드는 햇빛이 서서히 어둠에 가려진다. 뭘 했다고 벌써 해가 져.

툴툴대면서 전등을 켰다.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한참이나 보다가 문득 옆집 인간도 전등을 켰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다자이 말이다.

나는 가끔 그가 정말 죽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만큼 조용하단 뜻이다. 벽은 두드리면 텅텅 빈 소리가 날 정도로 얇은데 어떻게 이렇게 소리가 안 날까. 굉장히 신묘하다. 다자이가 이상한 인간이란 말은 사실 이런 점도 포함했다.

벽지 무늬를 손으로 짚어내다 다자이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를 만난 건 딱 이 주 전이었다.

분명히 건물에 사는 건 나 혼자라고 했다. 그랬는데 웬 남자 하나가 있더라. 급하게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더니 하는 말이 “아, 그 사람…, 거기 사는구나….” 였다.

무슨 황당한 소리를 태연자약하게 하시는지. 사기 계약인가. 물러야 하나. 외국인한테 불리하진 않겠지. 어째 싸더라. 별별 생각이 다 드는 중에 수화기 너머로 그런 말이 이어서 흘러들어왔다.

“그 사람,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같이 살아도 괜찮아요.”

아니, 무슨. 거의 모국어처럼 쓰던 외국어를 잊어 어버버하는 중에 또다시 흘러드는 목소리는 마지막으로 진짜 기적의 논리를 펼쳤다.

“여자 혼자 사는 거 꽤 위험할 텐데, 그 사람이랑 같이 살면 더 나을 거예요.”

무슨 헛소리야. 얼굴도 모르는 남자랑 치안 개같이 나쁜 곳에 사는데 뭐가 안전해.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 중개인은 좋은 하루 되세요. 하는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전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때,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지금이라도 계약을 해지하고 셰어하우스라도 구해야 하나, 하는 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었다.

천천히 현관에 다가가 문을 열지 말지 고민하는데 말소리가 문 너머서 들리더라.

옆집 사람인데, 인사차 들렀어요.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일단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중개인의 말도 있고 하니 일단은 믿어보려는 마음이었다. 사실 경찰 번호를 누른 핸드폰을 남는 손에 들고 있긴 했다.

끼-익하고 열린 문 바깥엔 처음에 봤던 남자가 서 있었다. 멀리서 본 것보다 뽀얀 얼굴을 한 잘생긴 남자였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표정에, 그가 중개인의 말대로 정말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라고 해요.”

한 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에 나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더랬다. 달갑지 않은 어투였겠지만,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서 잔뜩 눈치를 보고 있는데 슬쩍 눈동자를 약간 아래로 내렸다 올린 그가 옅게 웃음소리를 뱉어냈다.

뭐 하는 건가 싶어 주춤하자 그가 말했다.

“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데.”

영문 모를 말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손가락으로 내 등 뒤에 숨겨져 있을, 핸드폰을 잡은 손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경찰은 곤란해요.”

“…”

“뭐, 그쪽 입장에선 어쩔 수 없단 걸 알지만.”

내 동공은 흔들리고 있었을까. 마음을 읽힌 것에 당황하고, 경찰이 곤란하다는 말에 더 당황해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다자이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방긋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뭔데요.”

애써 침을 삼키며 한 대답은 꽤 멀쩡한 소리를 냈다. 괜찮아, 잘했어. 그렇게 스스로를 칭찬하는데 그가 또다시 후후, 하고 웃으면서 내게 말을 했다.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런데, 먹을 것 좀 있나요?”

그래, 다자이는 그런 양심 없는 말을 그날 처음 본 내게 서슴없이 했다. 그 뜬금없는 말에 또 다른 종류의 당황을 느끼고 있을 적에 배 소리가 들리더라.

배 소리 주인은 우렁찬 꼬르륵 소리와 다르게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을 이었다. “진짜 굶어 죽을 것 같아요.” 하고.

불가에 보시라는 것이 있었던가. 나는 다자이를 본 지 십 분도 채 안 되어서 그걸 행해 주기로 했다. 당시에도 오늘 저녁처럼 즉석밥이랑 인스턴트 카레였지. 아직 손도 못 댄 짐을 그때 처음 주섬주섬 풀어 건네주었다.

다자이는 그때도 똑같이 잘 먹겠단 소리를 하고는 두 번째 끼-익하는 문소리와 함께 옆집으로 사라졌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이다. 고작 이 주 지났을 뿐인데 나는 다자이에게 자꾸 식량을 뜯기고 있었고, 언제부턴가 내가 만만한지 자네 어쩌구 하는 다자이를 따라서 나도 그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친근하게도 그랬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걜 집안에 들일 수 있게 된 것도 이상하네. 괜찮은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나쁜 인간은 아니란 걸 알아서일까. 아무튼 짧은 시간이지만 꽤 친해진 듯 만 듯한 관계. 이웃으로선 나쁘지 않아서 이렇게 어영부영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다. 바로 옆집으로.

중개인의 말대로 이게 더 안전한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 생기면 서로 바로 알 테니까. 나보단 다자이한테 먼저 일이 생길 것 같긴 하지만. 매일 자살 타령을 하는 그가 먼저 위험에 처했으면 처했지, 이쪽에서 크게 다칠 일은 사실 접싯물에 코 박고 죽는 것만큼이나 희박한 확률이었다.

갑자기 밖에 안 나오면 신고라도 해줘야지. 다자이랑 같이 죽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아무래도 고독사는 좀 외로우니까.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아무런 연락이 없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누워 뒹굴거리는데, 화면 위에 메시지 팝업이 띄워진다.

“…어?”

무심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오랜만에 동기에게서 연락이 왔다. 웬일이래. 방학 잘 보내고 있냐는 말에 차마 거짓말은 못 하고 그저 그렇게 지낸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곧 다시 돌아오는 메시지는 이랬다.

- 지금 동기 모임 중인데 올래?

저녁은 먹었는데. 어떻게 하지. 잠시 천장을 보며 생각하다가 간단 말을 하고서 주섬주섬 준비했다. 입을 만한 옷이 있나. 꽤 우당탕거리며 멀끔한 차림을 하는데 또다시 울리는 진동 소리. 켜진 화면엔 평소랑은 다르게 입고와, 알지? 하는 문자와 눈웃음 짓는 이모티콘이 함께 떠 있었다.

아, 갈아입어야겠네. 다시 또 우당탕거리며 옷을 갈아입고 오랜만에 화장까지 하고선 문밖을 나섰다. 늦지 않았을까 싶어 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뛰려는데 방 안에 있을 거라 생각한 인간을 다시 만났다.

다자이. 그가 복도 난간에 기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저 낡아빠진 난간에 기대면 떨어지는 거 아냐? 홀린 듯이 하늘을 보는 인간을 그냥 지나치려다가, 일단은 유일한 이웃이었단 게 기억나 인사말을 골랐다. “다녀올게.” 하고 말하자 다자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어디 가?”

“친구 보러.”

“…응?”

뭐야, 저 반응.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

“자네 친구가 있─내가 이 부분에서 표정을 구겼다─, 아니, 그 친구를 이 시간에 만나?”

그 말에 화면을 켜 확인한 시간은 오후 8시 경이었다.

“뭘, 별로 늦은 시간도 아닌데. 그리고 저녁 모임이야.”

“애매한데….”

“뭐가 애매해. 보통 이 시간에 저녁 약속 많이들 하잖아.”

별 이상한 소리를 하는 그에게 아무튼 다녀올게. 하고 지나치는데 흐응, 하는 콧소리가 들린다. 그 반응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가 뭔 상관인가 싶어서 기억에서 지워냈다. 사실 많이 늦은 탓에 곱씹을 겨를도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낮지 않은 구두 굽이 발목에 꽤 충격을 준다. 그래도 서둘러야 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가방끈을 꼭 잡고 빠르게 걸었다.

그리고 시발, 도착한 장소에서 다자이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애매하다고 했지.

“어쩌지, 오늘은 여기서 파하기로 했어….”

그럼 오는 길에 연락해줄 수도 있었잖아. 애초에 올래? 하고 물은 것도 너잖아. 그런 투정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데도 불구하고, 잔뜩 미안한 표정을 하고 사과를 하는 탓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겨우 표정 관리를 하는데 무리 지어 나가던 한 새끼가 내게 말을 한다.

“그러게 조금 더 일찍 오지 그랬냐.”

“…”

“야야, 표정 좀 풀어라. 잡아먹겠다.”

그러고선 낄낄거리는데, 진짜 줘패고 싶게 웃네. 안 그래도 발 아파 뒤지겠는데. 그러나 돌아버리기 직전에 내게 사과하던 동기가 중재한다. 그 애는 그 새끼들한테 그만하라고 하고선 내게 다시 말했다.

“미안해.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

“내가 오라고 한 건데 정말 미안해….”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따지려고 했던 말을 먼저 꺼내버려서.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먼저 건네는 사과라서.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괜찮아.”

그에 정말? 하고 눈치를 살피듯 묻는 동기한테 응, 정말 괜찮아. 하고 또 대답하자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말과 함께 붙잡힌 손을 빤히 보는데 온기가 사라진다.

“그럼 개강하면 꼭 보자!”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가버린 동기의 뒤통수에다가 응, 하고 대답했다. 짧은 내 대답은 나만 들었다.

그 애는 방금 그 새끼들에게 다가가 장난치고 있었고.

나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조용히 돌아왔던 길을 다시 걸었다.

집에 다시 돌아가는 길은 피곤했다. 일단 발이 존나 아프다. 하필 시간이 또 애매하게 전철이 붐비는 때라 자리엔 앉을 수가 없었다. 겨우 버텨서 집까지 걸어가는데 진짜 발이 아파서,

“맨발로 걸을까?”

문득 든 생각을 바로 실현했다.

구두를 한 손에 들고 맨발로 아스팔트 길을 걷는데 와, 발바닥에 서서히 감각이 사라진다. 초반에 벗을 때의 해방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거칠거칠한 아스팔트 도로만이 발바닥 전체에 느껴진다.

그렇게 발이 마비될 것 같은 기분에 구두를 다시 신고 걷다가 일 분도 채 안 돼서 벗고 걷다가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친-구는, 잘 만났나?”

얄밉고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목소리 근원지를 찾으려는데,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가로등 빛 쏟아지는 바로 옆의 어둠 속에서 다자이가 나왔다. 그는 내게 다가와 나를 한번 훑어보고는 말없이 눈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그것만으로 방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파악한 것 같았다.

“거 봐. 내가 애매하다고 했지?”

“…왜 여기 있어?”

“잠깐 산책?”

웃기지도 않는다. 뭔 평소 하지도 않던 밤 산책이야. 초라한 행인 하나 구경하러 왔겠지. 나는 그 방글거리는 얼굴을 조용히 올려보다가 지나쳤다.

구둣발소리가 뒤따라온다.

향하는 곳이 같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발걸음을 서둘렀다. 구두를 신은 상태라 발목도 발가락도 아파서 뒤질 것만 같았는데도 그렇게 했다. 타인에게 이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신장 차이 탓에 거리는 좀처럼 넓혀지지 않는다. 그에 점점 속도를 높이다가 결국 넘어졌다.

쏟아졌다. 들고 있던 가방도, 신고 있던 신발도, 그리고 나까지 전부. 모든 게 쏟아져 아스팔트 길 위에 덩그러니 놓여 긴 그림자를 그려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엉망진창이다. 그런 내 하루를 누가 지켜보는 건 싫은데.

좀, 안 가나. 얼굴을 손에 묻어 시야를 지워내는 사이 다자이가 바닥에서 구른 가방과 신발을 주워내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내 물건을 전부 손에 든 다자이가 내 앞에 시야를 맞춰 쪼그려 앉아있었다. 새까만 눈동자를 눈앞에서 마주했다.

생각보다, 다정하네. 무심코 생각하며 들고 있던 것들을 달란 의미로 손을 내미는데 반응이 없다. 이거 아닌가, 물물교환인가. 그럼 그렇지 싶던 와중에 그가 뒤돌아 제 등을 내민다.

뭐 하는 거지.

“그래서야 집까지 걸어가겠어?”

여전히 태연한 말투. 그 탓에 말에 내포된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걸어는 가겠지.”

“…자네는, 아니 됐다.”

한숨을 폭 내쉰 다자이가 이리와, 하고 말했다. 구두를 쥔 손의 목을 까닥하면서.

그제야 깨달았다. 업히란 뜻이었다.

동정심일까. 답지 않은 친절에 기분이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가 아는 다자이가 맞나 싶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꾸물거리자 그가 빨리 가자고 재촉을 했다. 얼떨결에 업혔다.

그리고 제 발로 걷지 않는 길은 편하면서도 불편했다. 시야도 맞지 않고. 조금 차인데 생각보다 높네.

다자이의 시야는 꽤 높았다. 그가 보는 세상은 이렇겠구나 싶더라. 낯설어 재밌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목을 안아 공유한 눈높이였다. 그걸 인식하자마자 바로 옆에 위치한 얼굴이 새삼 가깝다. 어쩐지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는데 그가 나지막이 읊조린다.

“발, 엉망이네.”

그의 팔에 살짝 가려진 발은 보지 않아도 그 말대로일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탓에 업힌 거나 다름없으니까.

괜히 발을 뒤로 살짝 당기며 시야에 드는 베이지색 코트를 빤히 바라보는데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본 그가 말한다.

“돌아가면, 제대로 치료해. 아니면 무릎도 손바닥도 흉질 테니까.”

“당연히, 그럴 거야.”

“어른스럽네.”

“어른이거든.”

뭐가 웃긴지 다시 낮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린 이의 까만 뒤통수를 빤히 보다가 그의 보이는 살갗 대부분에 붕대가 감겨있었단 걸 인지했다. 경험담인 걸까.

“너는, 어쩌다가 그렇게 다친 거야?”

“글쎄….”

말을 줄이는 모양새가 이야기하기 싫다는 의도를 전한다. 말하기 싫음 말든가. 가볍게 생각하며 다른 질문을 골랐다.

“그 붕대는 매일 새로 감는 거야?”

“응.”

“…뭐랄까 되게,”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 잠시 고민하는데 다자이가 궁금한 듯 시선을 준다. 아, 맞아,

“자원 낭비하네.”

“…”

다자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앞만 봤다. 실수했나 싶어 눈치를 조금 보면서 말을 기워보았다.

“그래도 위생적이야.”

“…이 주제론 그만 말할까?”

대놓고 퇴짜 놓는 걸 보니 실수한 게 맞는 듯 싶다.

“응, 그러자.”

“…그래도 산뜻해서 좋네.”

다자이의 혼잣말.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대꾸를 바라는 게 아니란 것만 알았다.

끊어진 대화 행간을 되짚어보는데 다자이가 시선을 다시 내게 준다.

“왜?”

“글쎄…,”

왜일까, 하고서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다자이.

정말 뭐야? 당황스럽도록 제멋대로다.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서, 팔을 고치는 척하면서 고개를 다자이의 어깨보다 앞쪽으로 내밀었다. 하얀 뺨보다 더 앞쪽에 시선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본 건 입가에 떠있는 미소.

이상해.

이렇게 웃는 걸 보면 기분이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또 이상해.

묘한 기분의 이유를 생각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업어준 사람의 감정을 생각하며 얼타는 사이 집 앞에 내려졌다.

그리고 다자이는 내가 문을 열고 나서야 들고 있던 내 물건을 전부 안겨주었다. 고맙단 말을 하려는데 그가 먼저 인사를 한다.

“그럼, 잘 자.”

“…너도.”

다자이는 내 반사적인 대꾸를 듣고서 옅은 미소와 함께 낡은 철문 소리만 남기고 사라졌다. 현관이라 하기도 민망한 작은 공간에 한참 서있다가 뒤돌아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기댔다. 그제야 피곤을 느꼈다.

“너무 피곤하다….”

진짜 과하게 피곤한데. 눈알을 굴리다가 발끝에서부터 올이 나간 스타킹을 보며 다시는 이런 좆같은 신발을 신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딴 신발 다 갖다버린다고 중얼거리다가 생각했다. 오늘, 정말 고된 하루였다고.

고난이 저녁 두시간 정도에 전부 몰리긴 했지만.

등받이에 눕듯이 기댄 탓에 천장을 넘어 벽이 보인다. 옆집과 맞닿은 벽. 잠시 그걸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잠들면 고생한다.

“씻으러 가야지.” 의지를 쥐어짜내기 위해 작게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겨우겨우 하루를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전, 불을 끄려다 얇은 벽을 다시 마주했다.

오늘 하루, 엉망진창이었던 것치고는 기분이 괜찮았다. 이 너머에 그 끝을 괜찮게 만들어준 사람이 있고.

이 기분을 정말 뭐라고 설명할까. 애매모호한 감정을 정확히 묘사할 수가 없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까만 눈동자. 하얀 얼굴. 베이지색 코트. 듣기 좋은 목소리. 그리고 조금 전 닿았었던 그의 체취. 그 모든 게 여전히 내 주변을 맴돈다.

설렌다.

지금 내 상태를 묘사하는 말.

감정의 단어는 아니었다. 그건 아직 확실히 모호하다. 다만,

망했다.

잠이 확 깬다. 설렌다 - 망했다, 그리고 결론짓는다.

다자이 오사무는 진짜 이상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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