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편 (2018~2023)

은색으로 빛나는

축 제국도서관 7주년🎉 문호+사서 논CP (23.11.02)

한밤중인데 멀리서부터 벌써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아, 영감탱! 내가 들고 간다고!"

"누가 영감탱이야?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바꿔 들다가 넘어지면 어쩔 건데? 문이나 열어."

닫힌 문 너머로도 들리는 것은 매일 들어 익숙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뻔한 투닥거림이다. 대화 소리가 점점 다가오더니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사서는 미소 지었다. 먼저 문을 열어 상대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싶은 짓궂은 마음도 있지만, 지금은 참아볼까. 이쯤 되면 문이 열리겠거니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카운트다운을 한다. 3, 2…

"사서 씨!"

2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아깝네!

사서는 짐짓 놀란 척을 하며 열린 문 쪽을 돌아보았다. 다자이가 활짝 웃으며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짜잔! 이 천재 소설가님이 뭘 가져왔는지 보라고."

뒤따라 방에 들어온 시가가 성큼성큼 걸어 박스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박스에는 노란색의 장식용 리본이 감겨 있었고 손잡이가 있었다.  "사서 씨, 실례할게요."라며 무샤노코지와 단도 사서실 안에 발을 들였다. 다자이가 과장된 몸짓으로 박스를 가리켰다.

"후후, 보면 무조건 마음에 들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다자이 오사무 님께서 고른 거니까!"

"어이, 너무 까불면서 열지 마."

시가의 경고를 상쾌할 정도로 깔끔하게 무시하고, 다자이는 박스를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내용물을 본 사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아, 하고 절로 탄성이 나왔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 다자이가 뿌듯한 목소리로 웃었다.

"어때? 마음에 들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상자 속에 들어있던 것은 붉고 동그랗고 커다란 무스케이크였다. 연분홍색의 두툼한 산딸기 무스 위에서 라즈베리 글라사쥬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가장 위에 듬뿍 얹어진 베리 류의 과일들 위에 슈가 파우더가 뿌려져 있어 눈이 온 것 같았다. 빈 공간에 드문드문 박힌 아라잔이 귀여움을 더하고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충실하다. 무엇보다도 받는 사람인 사서가 좋아할 만한 맛이다. 봐, 실제로도 이렇게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걸.

"대박이다…."

"사서 씨가 무조건 좋아할 거라면서 다자이 군이 골랐어요."

"반응을 보니 성공인 모양이네."

감격에 찬 사서의 옆에 선 무샤가 웃으며 속삭였다. 어느새 들고 온 커다란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단도 한마디를 보탰다. 다자이가 웃으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도서관 개관 7주년, 축하해!"

그리고 그 움직임이 무언가를 건드려….

"앗, 잠깐. 다자이!"

"아!"

아름답고 반짝이는 케이크가 균형을 잃고 흔들리더니…

"흐악!?"

"이런…!"

바닥을 향해 맥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10년 같은 1초였다. 6호 사이즈의 거대하고 반짝이는 라즈베리 무스케이크가 슬로우 모션 효과를 적용한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모두가 굳어 있는 와중에 시가가 테이블 위의 접시를 냅다 낚아채서는 망설임 없이 바닥을 향해 몸을 던졌다. 떨어지는 케이크와, 케이크를 향해 가는 접시와, 그 접시를 들고 슬라이딩 중인 시가 나오야. 소소하게 구질구질하고 슬픈 장면이 모두의 앞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철퍽, 소리와 함께 케이크가 접시에 거꾸로 처박혔다. 어찌 됐든 아슬아슬하게 케이크를 살려내기는 한 시가가 허억,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슈가 파우더가 올라간 생과일도 아라잔도 라즈베리 글라사쥬도 모두 모두 아슬아슬한 크기의 접시 바닥에 처박혀, 이제는 시럽에 적셔진 비스퀴와 뭉개진 산딸기 무스만이 이 찌그러진 물체가 케이크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모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서실 안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다자이 선생님…."

"사, 사서 씨, 미안…"

다자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가 그 짧은 사과에 잔뜩 묻어났다. 평소 같았으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나섰을 시가나 단도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한, 그리고 조금은 참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사서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찬장 안쪽에 숟가락이 있거든요. 전부 꺼내주세요."

"진짜 미안, 내일 같은 걸로 또 사다 줄… 엉?"

"디저트 스푼이요. 은으로 된 거. 작년에 시가 선생님께 선물 받은 거 있잖아요!"

다자이는 멍한 얼굴로 사서를 바라보았다. 사서가 활짝 웃었다.

"지금 먹어요. 다 같이!"

"6호 사이즈 케이크를 다섯이서?"

"뭐 복도에서 아무나 잡아 오면 다 먹을 수 있지 않겠어요?"

"케이크 같이 먹을 사람 구하는 걸 뭐 그렇게 사냥해 오는 것처럼 말을 해…."

그러거나 말거나 사서는 이미 마음을 정한 눈치다. 정말로 6호 사이즈 케이크를 지금 여기서, 이 한밤중에 전부 먹어 치워 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시가가 피식 웃었다. "저, 다른 사람을 데려올게요!"라며 무샤노코지가 냅다 복도를 향해 달려갔다. 어느새 찬장에서 스푼을 잔뜩 꺼내 온 단이 사서와 다자이의 손에 스푼을 쥐여주었다.

"뭉개졌어도, 틀림없이 맛있을 테니까!"

은 스푼이 반짝, 빛났다.

순식간에 사서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바에서 한잔 걸치고 온 술꾼들이 공짜 해장 케이크다, 하며 사서실에 들이닥쳤고, 심심한 밤을 보내고 있던 누군가가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고 방 밖으로 나와 무슨 일이야, 하다가 무샤노코지에게 잡혀 왔고,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사서실에 찾아왔다.

시가가 선물해 주었던 6개들이 스푼 세트는 이미 동난 지 오래다. 어쨌든 이 찌그러진 무스케이크를 먹으려면 스푼이 필요했으니 온갖 숟가락이 다 모였다. 누군가는 개인용 스푼을 가져왔고 또 누구는 식당의 공용 식기를 살짝 들고 왔다. 심지어는 그냥 냅다 중식용 렌게를 가져와서 케이크를 떠먹는 이도 있었다. 다자이는 그때까지도 사서가 건네준 은 스푼을 그냥 꼬옥 쥐고 좀 멍한 기분으로 서 있었다.

"꾸물거리고 있으면 한 입도 못 먹을걸요?"

사서가 옆에서 다자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무방비할 때 공격당한 탓에 윽, 하고 멋없는 소리를 내뱉고 만다.

"…그러는 사서 씨도 아직 한 입도 안 먹었잖아."

"들켰어요?"

"스푼에서 빛이 나는걸."

하하, 하고 사서가 웃었다. 다자이는 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부러 더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케이크 앞으로 향했다.  사서가 스푼을 쥐여준 순간부터 그랬지만, 이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케이크의 위에서 온갖 종류의 스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사서가 케이크를 향해 손을 뻗다가 갑자기 미소 지었다. 다자이는 그런 사서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아뇨, 별건 아니고…"

"뭐야, 말해봐."

"그냥…"

이렇게 말할 때는 항상 뭔가 있을 때다. 평소에 생각하는 바를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그다지 없는 사서가 굳이 생각난 것을 정리해 말로 만들어 낼 때를 다자이는 제법 좋아했다. 아마 도서관의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 어느새 사람들의 시선은 이쪽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사서가 입을 열었다.

"숟가락, 있는 대로 다 나왔구나 싶어서요. 이렇게 많은 숟가락이 모여 있으니까 왠지 멋지구나, 즐겁구나 하고…."

도중부터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인지 끝으로 갈수록 말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흐려졌다. 바로 옆에 서 있었기에 다자이는 한 단어도 놓치지 않고 감상을 전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기뻐요, 라는 말이 따뜻한 공기 속으로 녹아 없어졌다.

아아, 왠지 엄청나게 뿌듯해졌다.

다자이는 냅다 손을 뻗어 사서가 들고 있던 스푼을 낚아챘다. 크게 무스케이크를 떠서, 사서에게 다시 쥐여줬다. 이 케이크는 사서 씨 거니까, 먹어! 라고 말하자 다자이를 쳐다보던 동그란 눈이 웃음을 참지 못한다. 내밀어진 케이크를 얌전히 받아먹은 사서가 웃었다.

"맛있어요. 진짜 대박."

"당연하지. 이 다자이 오사무 님이 고른 거니까!"

"뭐, 그 다자이 오사무 님께서 뭉개버렸지만 말이지."

"악, 시끄러!"

옆에서 태클을 건 시가가 깔깔 웃었다. 주변의 모두가 웃기 시작해 그걸 신호로 사서실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다자이도 제 몫의 스푼을 들어 무스케이크를 한 숟가락 떴다. 부드러운 무스와 상큼한 베리가 입 안에서 섞였다. 맛있는 케이크다. 천재 소설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접시 위에 묻어있던 크림에 붙은 아라잔을 쳐다보다가 다자이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있지, 사서 씨."

"네?"

"내년에는 더 맛있는 걸로 사 올게."

"안 찌그러트리고 잘 가져올 거죠?"

"아, 당연하지! …이번에도 가져오는 건 잘 가져왔어."

시가 선생님이 들고 오셨으니까, 라는 말은 조용히 묻어두도록 하자. 사서는 피식 웃었다. 한밤중에 이렇게 잔뜩 모여서 다 같이 다른 스푼을 들고, 아주 맛있고 예쁘고 거대하지만 찌그러져 버린 케이크를 먹는 건… 너무 따뜻하고 재미있으니까.  아름다운 라즈베리 글라사쥬보다도, 듬뿍 올라간 베리보다도, 그냥 아무렇게나 모여서 다 같이 깔깔 웃으며 케이크를 퍼먹는 순간의 스푼들이 더 아름다운 은색으로 빛나고 있으니까, 그걸로 된 거다.

"올해도 고마워요. 8번째 케이크도 기대할게요?"

대답을 들은 다자이가 환하게 웃었다.

"기대하고 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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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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