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겐다즈는 아이스크림의 최소단위가 아니니까
문호사서 : 啄司書 이시카와 타쿠보쿠X특무사서 (2019)
하겐다즈는 아이스크림의 최소단위가 아니니까
어젯밤부터 하늘이 흐리더라니, 새벽에는 계속 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아침까지도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퍼붓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됐다. 타쿠보쿠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우중충한 창 밖 풍경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우중충한 기분이 들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감각이었다. 어느새 자료실에서 서류철을 들고 다가온 사서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비, 그칠 기미가 안 보이네요.”
“장마의 시작이란 거겠지.”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
끝나길 바라는 걸로 끝나는 일이 아니니까 문제지만. 타쿠보쿠는 다음 말을 조용히 삼키고 보고서와 결산표의 내용을 대조했다. 월말 결산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도서관은, 정확히는 사서와 조수문호는 상당히 바쁜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카페인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겠는데요…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으니 말이다. 타쿠보쿠는 검토가 끝난 자료를 사서에게 넘겼다. 오류가 났다고 체크한 부분을 수정하고, 다시 검토하고, 다시 체크하고... 지겨운 반복노동에 슬슬 눈이 뻐근했다. 살짝 피곤한 것을 눈치챘는지, 사서가 먼저 '쉬었다 할까요?' 라고 말을 꺼냈다.
기지개를 켜자 뻐근하게 굳은 몸의 어딘가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아이고, 곡소리가 절로 나오는구만. 커피 마실래요? 됐어, 아침에 마셨고. 사서의 제안을 거절한 타쿠보쿠는 책상 위에 늘어졌다.
반쯤 내린 블라인드 사이로 햇살이 갈라져 들어왔다. 비, 그쳤나 보네. 그렇네요. 이맘때의 날씨는 변덕이 심해서, 금방 그쳤다가 또 다시 내리다가 하니까요.
“얼른 끝내고 한 잔 하러 가고 싶다.”
“저도 얼른 끝내고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아니, 뭐든 좋으니까 일단 사서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럼 아이스크림 사다 주세요.”
너 그거, 권력 남용이야. 에이, 권력 남용이 뭐에요, 우리 사이에. 사서는 ‘우리 사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 글쎄요, 무슨 사이일까요?
질문을 했는데 도리어 질문이 돌아온다. 아, 진짜…. 타쿠보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서가 쿡쿡 웃으며 물었다. 어디 가세요? 어디 가긴 어디 가, 아이스크림 사러 간다.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못 이기고 나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금방 다녀오면 되겠지. 타쿠보쿠는 우산을 들지 않고 현관을 나섰다. 후덥지근하던 공기가 장마 덕분에 조금은 시원하게 식어 있었다.
일부러 살짝 돌아가는 길을 택해 걷는 걸음이 경쾌했다. 도서관의 정원도 좋지만, 역시 가끔은 자주 걷지 않은 길을 택해 걷는 것이 더 재미있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무슨 아이스크림 사오라는 말을 못 들었네. 어차피 돈은 나중에 청구할 거니까, 그냥 먹고 싶은 걸로 사가야겠다.
…그렇게 출발한 게 10분 전인데.
저 멀리서 우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천둥소리뿐이면 좀 좋을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퍼부었다. 타쿠보쿠는 발밑에 고인 물웅덩이를 괜히 살살 찰박거렸다. 건물 지붕 아래서 급하게 비를 피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이렇게 비가 와서야 돌아가는 것도, 계속 가는 것도 무리였다.
엉망이군. 얼굴을 살짝 찌푸려 보아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이대로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괜히 나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예상하지 못한 비를 만나는 것은 질색이었다. 우산을 들고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타쿠보쿠는 쪼그려 앉았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님. …님!
“선생님!”
“엥?”
눈앞에 나타난 익숙한 인영에, 얼빠진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뛰어왔는지 숨을 몰아쉬는 사서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건넸다. 신발 앞 코가 빗물에 젖어있었다.
“설마 이거 가져다주러 온 거야?”
“그럼 뭐 때문에 왔겠어요?”
“진짜 내가 못 살아. 하늘이 그렇게 흐린데 우산도 안 들고 갔어요?”
사서가 가볍게 타박했다. 타쿠보쿠는 우산을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다녀오면 괜찮을 줄 알았지. 우산을 펴고 걸었다. 편의점은 모퉁이를 돌면 금방이었다.
아-. 양말 다 젖었어. 질렸다는 듯이 말하며 편의점의 문을 연다. 가벼운 종소리가 들리고, 어서 오세요, 하는 점원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어쩔 수 없죠, 비가 많이 오는 걸요. 익숙하게 타쿠보쿠의 말을 받아치며 사서는 아이스크림 냉동고 쪽으로 향했다.
“이게 다 네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해서 생긴 일이잖아.”
“아하하, 그랬던가요.”
“아하하, 가 아니라고.”
괜히 투덜거리는 타쿠보쿠를 가볍게 웃어넘기며 사서는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냉동고 안에서 꽁꽁 얼어있던 것이 손에 닿자 기분 좋은 시원함이 퍼져 나갔다.
“그럼 선생님도 하나 사 드릴 테니까, 아무거나 먹고 싶은 거 고르세요.”
“하겐다즈 골라도 돼?”
“당연하죠.”
“큰 사이즈로 골라도 돼?!”
“뭐…. 고르세요.”
신이 나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던 타쿠보쿠는 문득 생각난 듯 사서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어쩐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너 말이야… 아이스크림의 최소 단위가 하겐다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그렇게 막 사주고 다니지 마. 봉으로 보일 수도 있잖아.”
“아무한테나 막 사주는 거 아닌데요.”
“응?”
“선생님을 좋아하니까 사주는 거죠.”
뭐? 갑작스런 말에 타쿠보쿠가 잠시 굳었다. 사서는 타쿠보쿠의 손에서 부드럽게 아이스크림을 낚아채 계산대로 향했다. -엔 입니다. 카드로 결제할게요. 카드를 내미는 사서가 오늘따라 빛났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편의점의 문을 열자 문에 달려있던 종이 가볍게 경쾌한 소리를 냈다. 빗줄기는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비가 몰아치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돌아갈까요?”
“그래…”
타쿠보쿠는 우산을 활짝 폈다. 떨어지던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축축한 비 냄새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조금 앞서 걸어가던 사서가, 문득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우산 꼭 들고 다니세요. 아무리 비가 그쳤어도 장마철이니까 언제 다시 비가 올지 모르잖아요.”
“아……. 뭐어, 우산 가지고 와 줘서 고맙다.”
“비 맞으면 감기 걸리니까요.”
“있지.”
타쿠보쿠가 멈춰 섰다. 사서도 같이 멈춰 서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딘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가 말했다.
“다음에도 우산 안 가지고 가면, 와 줄 거냐?”
“설마 제가 찾아와 줄 거라는 생각으로 우산을 안 들고 가겠다는 건?”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뭐어, 생각 좀 해 보고요.”
그게 뭐야. 아이스크림 녹겠어요. 얼른얼른 가자구요. 어딘가 살짝 대답이 불만스러웠는지, 타쿠보쿠는 건성으로 네이, 하고 대답했다. 성의라고는 하나도 담겨있지 않은 대답을 들은 사서가 웃었다. 혹시 데리러 와 줬으면 좋겠어요?
“아니, 뭐…….”
“하겐다즈는 아이스크림의 최소 단위가 아니니까?”
“아니니까.”
서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둘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우산 두 개가 나란히 걸어갔다. 여름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장마가 꽤 길어질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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