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편 (2018~2023)

텃밭은 평화롭고 담배는 모르겠어

2020 문알 게스트북 <제국도서관 회고록> 참가 원고 │논커플링 (문호+사서)


이 모든 사태는 그 한마디로부터 시작되었다.

“도서관에 밭을 만들어볼까 하는데요.”

벚꽃 날리는 봄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여름이다. 식당의 투명창 너머로 비쳐 들어오는 여름 햇살이 테이블 위에 뿌려졌다. 오늘의 후식은 물양갱. 나는 내 몫으로 나온 것의 포장을 벗기며 말했다.

“밭?”

“왜 있잖아요, 예전에 잠깐 텃밭 만들었다가 이제는 안 쓰는 땅이요.”

식탁의 맞은 편에 앉아 양갱을 우물거리던 슈세이 씨가 되물었다. 양갱 포장지와 힘겨운 전투를 벌이는 나를 대신해, 옆에 앉아 있던 탓쨩이 양갱칼을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추고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땅이 있었지….”

“기억난다! 샐러드에 쓸 잎채소들을 키웠던 땅이지?

무언가 떠올린 듯한 목소리로 슈세이 씨가 대답했다. 어느새 쪼르르 달려와 슈세이 씨의 옆자리에 앉은 켄지 군도 생글거리며 말을 받는다.

그 땅이라고 하면 도서관 초기에 텃밭으로 사용했던 빈 공터다. 지금은 몇십 명이나 되는 문호들이 함께하는 도서관이지만 열 손가락으로 사람의 수를 모두 셀 수 있던 시절도 있었다. 자급자족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빈터에 작은 텃밭을 만들어 샐러드에 쓸 잎채소나 바질이며 딸기 같은 것을 키웠더랬다. 토요일 아침이면 갓 수확한 잎채소들로 샐러드를 만들었고 쑥쑥 자란 허브들은 좋은 향신료가 되었다. 물론 이제는 사람들이 늘어나 자급자족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워진 탓에 텃밭은 빈 땅이 되어버렸지만, 그 시절의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네, 맞아요. 계속 비워두는 것도 아까우니까 간단한 작물들을 키워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좋은 생각이야!"

그 시절의 텃밭 이후로도 혼자서 작은 밭을 만들어 꽃을 기르고 있던 켄지 군은 본격적인 텃밭 공사가 시작될 거라는 사실에 신이 난 눈치다. 발이 닿지 않는 의자 밑으로 신난 다리가 까딱거렸다.

"그런데 뭘 키워야 좋을지…."

예전처럼 잎채소를 키우는 것도 좋지만, 기왕 텃밭을 만들 거면 좀 더 열매가 열리는 작물을 키워보고 싶거든요. 포장지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드디어 접시에 물양갱을 내려놓고, 나는 고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음, 토마토라던가?"

"좋네요, 토마토."

"곧 여름이니까 오이는 어떨까요?"

"키우는 거 어렵지 않나요?"

"으응, 별로 안 어려워! 물만 잘 주면 쑥쑥 자라거든."

"토마토랑 오이…. 또 뭐가 좋을까요?"

텃밭을 만들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역시 작물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다. 이대로라면 추천받는 작물을 전부 키우게 될지도 모른다. 책이라도 찾아봐야 할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 가만히 듣고 있던 슈세이 씨가 조용히 의견을 냈다.

"차라리 모두의 의견을 모아보는 건 어때? 키우고 싶은 작물이 있으면 의견을 넣어달라고 건의함을 만드는 거야."

"아, 그건 좋은 생각이네요! 겸사겸사 텃밭 만들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알 수 있을 것 같고요."

밭을 만들고 키울 작물을 정했다고 해도 일손이 없으면 농업의 바퀴는 원만히 굴러가지 않는 법. 그런 점에서 이 방법이라면 작물 정하기와 일손 구하기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으니 좋은 생각이다. 이따 사서실에 돌아가면 건의함을 만들어서 의견을 모아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물양갱을 우물거렸다.

…그렇게 해서 모인 것이, 이 건의함 안에 한가득 담겨 있는 쪽지들이다. 원래도 농사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과연 조금 놀랄만한 양이었다. 통 안에 들어있던 쪽지를 탈탈 털어 책상 위에 모두 쏟아부었다. 모양도 크기도 접는 방식도 가지각색인 종잇조각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정리하는 것도 일이겠는데…. 의자에 앉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손이 닿는 대로 쪽지 한 개를 잡아 열었다.

「토마토」

예상했던 답안이다. 토마토는 원래도 생각하고 있던 작물이기도 하고, 이건 통과시켜도 괜찮겠지. 통과의 의미로 쪽지를 책상 한쪽으로 잘 정리해 두었다. 텃밭에서 난 토마토로 샐러드를 해 먹으면 분명 맛있을 것이다. 손을 뻗어 다음 쪽지를 가져와 열었다.

「오이」

아직까지는 무난한 답안이었다. 오이도 여름작물일 테니 분명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켄지 군도 물만 잘 주면 어렵지 않다고 했었고 말이지. 그러고 보니 도서관에 하얗고 길게 생긴 수달 닮은 동물…? 이 산다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일까? 오이를 좋아한다던데, 서리 당하는 건 아니겠지?

「고구마」

아, 좋은 생각이다. 잘 키워서 열매를 맺으면, 가을이나 겨울쯤에 뒤뜰의 낙엽을 모아 고구마를 구워도 좋을 것 같고. 가벼운 마음으로 쪽지를 통과시켰다. 겨울이 벌써 기대되는걸!

손을 뻗어 다음 쪽지를 열자 종이에서 상큼한 향기가 풍겨왔다. 뭐지, 시트러스…. 레몬? 옅은 노란색의 종이에는 유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레몬」

익명의 의미가 없겠는데. 으음―. 레몬 나무인가. 아주 못 키울 것도 없긴 한데, 실내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는 정도의 정보만 알고 있어서 확실하게 결정할 수가 없다. 이쪽은 조금 더 알아본 후에 답변하는 편이 좋겠어.

「사과나무」

이쪽도 익명의 의미가 없는 쪽지였다. 묘목부터 키우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지 않을까. 물론 켄지 군은 그 시간도 감안하고 쪽지를 넣은 것이겠지만…. 아무래도 켄지 군이랑 좀 상담을 해 봐야겠어.

상추, 청경채, 감자…. 그 밖에도 무난하고 괜찮은 작물들의 쪽지가 이어졌다. 이상한 답변들이 많을까 걱정했는데, 제법 멀쩡한 답변들이 도착해 있어서 안심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건의함은 제 역할을 다했다. 쪽지들도 어느 정도 정리되어 처음에 비해서는 적은 양이 남아있었다. 이쯤에서 마무리해도 될 것 같긴 하지만, 선생님들이 열심히 적어서 넣어준 쪽지들인데 다 읽지 않는 건 역시 예의가 아니지. 나는 손을 뻗어 다음 쪽지를 열었다.

「쌀」

……본격적인 농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아무래도 토지의 넓이에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논과 배수로를 만들어야 하니 개간작업도 품이 더 들어갈 거고, 물은 어디서 끌어다 댈 것이며…. 아주 조금 키워보는 거면 모를까, 본격적인 쌀농사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아쉽지만 이 쪽지는 기각이다.

기각당한 쌀 쪽지를 책상의 다른 한쪽에 놓고, 손을 뻗어 다음 쪽지를 몇 개쯤 가져와 열었다. 그리고 할 말을 잃었다….

「바나나, 망고, 파인애플」

아니, 저기, 음. 그러니까…. 여기서 자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서실이 아무리 여기저기 이어지는 미지의 공간이라고는 해도, 텃밭은 정원 뒤의 안 쓰는 땅에 만들 생각이라서요. 평범하게 사계절이 있는 장소인데….

「카카오」

뭘 하고 싶은 걸까? 디저트를 카카오부터 키워서 만들 생각이신가? 기각, 기각. 모조리 기각이다. 쪽지를 한꺼번에 기각 쪽으로 옮겼다. 어차피 필체가 같은 것을 보니 같은 사람이 적은 쪽지다. 작물 재배를 통해 부농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계신 분이 어떤 선생님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부디 도서관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다. 여기서는 안 자랍니다….

한숨을 쉬며 다른 쪽지를 가져와 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양귀비 (원예용 아님)」

할 말을 잃었다. 친절하게 원예용이 아니라고까지 덧붙여 주셨네. 그런데 선생님, 그거 아시나요? 길가에 피어있는 양귀비조차도 신고해서 처리하지 않으면 불법이랍니다! 그게 아니라면 도서관을 마약생산집단으로 만들 생각이신 걸까요? 일단은 공공기관인데요?!

「대마」

정말로 도서관에서 뭘 키울 생각인 거죠?? 진심으로 쪽지를 넣으신 걸까요?! 제가 《장난으로 쪽지를 넣지 말아주세요!!》라고 대문짝만하게 적어서 건의함에 붙여뒀는데, 못 보셨다면 시력에 엄청난 문제가 있으신 걸까요?! 그게 아니라면 진심이신 거겠죠?!!

하아…. 미치겠다, 진짜. 심지어 이제는 피곤하다. 쪽지 몇 개를 펴보고 연달아 기각하는 사이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다음 쪽지만 정리하고 조금 쉴 생각으로 쪽지의 산에 손을 뻗었는데 어쩐지 잡히는 것이 없다. 고개를 돌려 제대로 쳐다보니, 그 많던 쪽지들이 어느새 다 줄어 마지막 쪽지만 남아있었다. 좋아! 이거라면 힘내서 정리할 수 있겠어. 나는 두 번 접혀있는 쪽지를 폈다.

「담배」

볼 것도 없이 기각이다. 나는 마지막 쪽지를 기각 쪽으로 옮겨… 놓으려다가 멈췄다. 쪽지에 적혀 있는 담배라는 두 글자가 어쩐지 너무나도 익숙한 필체였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뭐 틀릴 일도 없겠지만, 이 쪽지의 주인은 아쿠타가와 선생님일 것이다. 아쿠타가와 선생님과 농사라, 아주 거리가 먼 두 단어의 조합처럼 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흙을 파고 물을 주며 농사를 짓는다는 건 좀처럼 상상하기 힘드니까 말이지. 그렇다. 이 도서관의 문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농사일은 거리가 멀다. 하지만 말이지, 정말 만약이지만…. 만약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정말로 직접 담배 농사를 짓는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몇 가지 이미지가 제멋대로 시뮬레이션 되기 시작했다. 씨앗을 뿌리는 아쿠타가와 선생님, 싹이 튼 식물의 분갈이를 하는 아쿠타가와 선생님, 뙤약볕 아래 소매를 걷어붙이고 잎을 솎아내는 아쿠타가와 선생님.

아, 어떡하지. 어떤 이미지도 다 재미있어. 엄청나게 안 어울려. 그 부분이 재미있어…. 실제로 보고 싶다. 그 생각이 든 순간부터는 이미 불가항력의 영역이었다. 나는 쪽지를 통과시켰다. 물론 ‘한 그루 한정’이라는 조건을 붙이긴 했지만, 어쨌든 텃밭에서 기를 작물에 담배를 집어넣은 것이다. 이것이 거대한 사건의 씨앗이 될 줄은, 그때의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아, 물론 아쿠타가와 선생님의 담배가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키타하라 선생님이 직접 말아 피우는 담배에 흥미를 느껴, 그날부로 사서실에 찾아와 자기도 담배를 길러보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도서관의 담배가 두 그루가 되리라는 사실도 그때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가드닝은 상당히 와일드한 취미다. 가드닝뿐만 아니라 텃밭 만들기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 모든 일이 그렇다. 결과물만 놓고 본다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하하 호호 하는 평온한 이미지이겠지만, 그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온갖 혈투를 벌여야 한다. 식물에 해를 끼치는 벌레와의 사투, 변덕스러운 날씨, 흙을 나르고 괭이질을 하며 돌을 골라내는 것들. 세부적인 것을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텃밭 만들기는 상당히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니 자고 일어나 아침 먹고 산책하고 책상 앞에 앉는 것이 디폴트 일과인 사람들이 그 힘 많이 들어가는 일을 버틸 리가 없었다. 텃밭 만들기 개시 한 달 차. 처음 건의함을 꽉 채웠던 쪽지들의 열기의 산은 어디로 간 건지 달려들었던 사람들 중 절반은 나가떨어졌다. 이제는 처음과 비교하면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남아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사람이 빠지면 인력이 떨어지니 텃밭이 흐지부지될까 봐 조금 걱정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기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점에서 남은 사람들은 모두 밭일에 익숙한 사람이거나 힘들어도 텃밭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뿐이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최종 관리자인 나를 포함해서 텃밭에 진심인 사람들만이 남은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식사를 하고 산책을 겸해 텃밭의 상태를 보러 나갔다. 정원 연못의 물에 빛이 부서져 반짝였다. 아침인데도 햇살이 제법 강해 눈이 부셔서 손 그늘을 만들고 걸었다.

정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텃밭이 나온다. 본격적인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기에는 좁지만 채소 대여섯 종류를 조금씩 심기에는 적당한 넓이의 땅이다. 예전에는 돌이 굴러다니는 별 볼 일 없는 애매한 땅이었지만, 모두가 함께 정비한 덕분에 이제는 나름대로 훌륭한 텃밭이 되었다. 텃밭 저어기 안쪽에 오늘도 어김없이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사서 씨―.”

나는 목소리를 내어 대답하는 대신 손을 들어 반갑게 흔들었다. 밀짚모자를 쓴 사이세이 선생님이 텃밭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오늘도 일찍 나오셨네요?”

“토마토 순 좀 쳤어.”

그렇게 말하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상쾌하게 닦아내며 일어선다. 그 일련의 행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순간적으로 선생님의 직업이 농부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물은 주셨나요?”

“아, 이제 주려고.”

잘 보니 이미 수도에 연결한 호스까지 준비해 뒀다. 철저한 준비성…. 역시 프로 농부 아닐까. 하긴 프로 농부가 이 도서관에 한 명만 있는 것은 아니지. 예전부터 농업에 열의를 보이던 무샤노코지 선생님이나 혼자서도 작은 꽃밭을 가꾸던 켄지 군, 로카 선생님이나 삿치 군…. 사이세이 선생님을 포함해 텃밭을 열심히 가꾸는 선생님들이 몇 분 더 계시기 때문에 오늘도 텃밭의 상태는 완벽하다. 토마토랑 오이, 고추와 호박. 모두 병든 이파리 하나 없이 건강하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내가 딱히 큰 도움이 될 무언가를 해주지는 않았지만, 잘 자라는 것을 보니 뿌듯하구나.

텃밭을 슥 둘러보다 보니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밭 한구석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이었다.

“아, 저건….”

“아쿠타가와의 담배야.”

혹시나 싶어 물어봤는데 과연 진짜인 모양이었다.

“잘 자라고 있네요?”

“응. 싹을 옮겨 심는 것부터 시작해서, 꽤 열심히 관리해 주던데?”

“헤에.”

묘한 감상이 섞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서 담배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좀 의외였다. 뭐랄까, 건의함의 쪽지를 열었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아쿠타가와 선생님과 농사는 굉장히 안 어울리는 이미지였으니까. 하지만 이미지는 이미지고, 아마 담배를 키워보고 싶었던 선생님의 마음은 진짜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꼬박꼬박 물을 주고 병든 이파리를 잘라내며 관리를 해 줄 리가 없으니까.

“자기가 직접 키워서라도 피워보고 싶었던 걸까요…. 잎담배.”

“글쎄다. 어쨌든 잘 관리해주고 있으니 된 거 아니겠어?”

그것도 맞는 말이지. 어쨌든 잘 크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잎담배는 두 그루다. 한 그루는 아쿠타가와 선생님 것이고, 다른 한 그루는 키타하라 선생님의 것이었다.

“키타하라 선생님은 텃밭에 나오시나요?”

그렇게 질문하자, 사이세이 선생님은 나를 보며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보나 마나 뻔하다. 키타하라 선생님은 일찌감치 관뒀고 담배나무는 사이세이 선생님이 전부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뭐, 사이세이 선생님 본인이 텃밭 가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어쨌든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뙤약볕 아래에서 나무를 키우고 있을 때, 키타하라 선생님은 제자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맡겨도 수확한 후에 잎담배를 피워볼 수 있으니까 말이지. 외주란 엄청나게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편리한 방법이로구나….


세상에는 꾸준한 노력을 들여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는 일이 많이 있다. 한편, 식물 키우기는 노력 대비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일이다. 도서관의 텃밭에도 하나둘씩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며칠 전에는 첫 오이가 열렸다. 잘 씻은 첫 오이를 대강 썰어준 뒤 올리브 오일과 치킨스톡 가루 한 스푼, 참깨를 넣고 잘 버무리면 반찬 하나 뚝딱. 참깨 오이 무침이다. 입안에서 퍼지는 상큼한 아삭거림과 고소함을 느끼며 계절을 느꼈다. 내일은 뭘 수확해서 어떻게 요리할까? 직접 수확한 채소로 반찬을 만들어 먹고 내일은 어떤 것을 수확할지 생각하는 생활은, 물론 약간의 고생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그 고생을 포함해서 즐거운 법이다. 나는 잘 익은 토마토를 따서 바구니에 넣었다. 이마에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토마토 말고도 이것저것 많이 열매가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 도서관 텃밭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담배나무였다. 나는 담배나무가 그렇게 높게 자라는지 처음 알았다. 담배의 성장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다는 것은, 담배나무가 너무 빠르고 높게 자라서 당황한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식물도감을 뒤적거릴 때 옆에서 슬쩍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5월 초에 담배 모종을 심으면 7월 초에는 2m 넘게 자란다. 그 이후로는 아래쪽에 달린 담뱃잎부터 수확하면 되는데 그 잎 한 장의 크기도 꽤 크다고 한다. 장마철에 폭우가 쏟아지면 높은 키와 무거운 잎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일제히 쓰러지기도 한다. 생명력이 강한 담배는 장마가 끝나면 스스로 일어서서, 새로운 잎을 달고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다…. 식물도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과연 모종을 심은 지 두 달, 담배나무 두 그루는 2m 근처를 맴도는 높이로 자라 그 존재감을 당당하게 드러냈고 이제 텃밭의 트레이드 마크 비슷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쿠타가와 선생님은 초보자인 자신이 무언가를 그만큼 키워냈다는 사실이 뿌듯한 모양이었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맺어준 담배나무가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는지, 텃밭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은근슬쩍 담배나무 자랑을 하기까지 했다.

“탓쨩코, 이거 봐. 정말 귀엽지 않아? 잎이 이만큼 자랐어.”

“와아, 정말 그렇네요…! 그렇게 작은 모종이 이렇게 크게 자랐군요!”

“…아, 잘 왔어. 사서 씨, 류 좀 말려 봐. 저 녀석,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랑하고 있어.”

“지금까지 누구누구 지나갔는데요?”

“숫자의 문제가 아냐. 다자이가 한 시간 동안 붙들려 있었단 말이다.”

“음, 그런데 다자이 선생님은 오히려 기뻐하시지 않았을까요?”

“…생각해 보니 그 녀석이라면 그렇긴 하겠지만. 아무튼 이러다가는 지나가는 쿠메에게도 자랑하려 들지도 몰라.”

“아하하….”

물론 딱히 텃밭을 지나는 도중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있지, 칸. 나는 담배나무가 그렇게 쑥쑥 크는지 몰랐어.”

“류, 그 이야기 한 시간 동안 다섯 번은 했어….”

어쩐지 주 피해자는 키쿠치 선생님인 것 같지만, 여기서는 넘어가도록 하자. 아무튼 담배가 자랄수록 담배 수확에 대한 아쿠타가와 선생님의 기대치도 함께 자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쑥쑥 잘 자라줬으니, 선생님으로서는 당연히 결과물에 대한 기대도 함께 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날, 그러니까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처음으로 담배를 수확하던 날에 나는 우연히 텃밭에 함께 있었다. 내가 일을 도우려 하자 선생님은 상냥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 사서 씨. 하지만 이건 나의 일이야.”

그 한마디에 그의 결의와 노력이 묻어나오는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담뱃잎을 잘라 한 장 한 장 모으는 선생님을 보고 있자니, 나 자신은 딱히 흡연자가 아닌데도 두근두근 가슴이 떨려왔다. 그야 당연히 그렇게 사랑으로 키웠으니 결과물이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선생님이 소중하게 수확한 담뱃잎은 해가 잘 드는 곳에서 건조됐다. 키울 때와 수확할 때도 그랬지만 건조시킬 때도 어찌나 정성을 들였는지, 지켜보던 키쿠치 선생님이 몇 번이고 “저러다 일사병 걸리는 거 아니야…?”라며 걱정할 정도였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도 하루에 몇 번이고 밖에 나가 상태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아쿠타가와 선생님의 담배는 그야말로 정성의 결정체였다. 그를 지켜보는 누구라도 그렇게까지 정성을 쏟는 그의 모습을 신기하게 생각할 정도로.

그러니 숙성과 압착을 거쳐 피울 수 있는 형태로 담배가 완성되던 날에, 온 도서관의 관심이 아쿠타가와 선생님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난 늦은 오후의 식당에서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말린 담뱃잎을 잘게 다지고 종이로 얇게 말아 막대 형태로 만드는 동안,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듣고 온 건지는 몰라도 거의 무슨 박람회의 시연 부스라도 되는 듯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순수하게 결과물이 궁금한 사람, 한 대 얻어 피워 보려는 애연가들, 그리고 그가 담배나무를 키워 결과물을 얻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기사화하려는 사람들까지, 식당 안은 서로 다른 이유로 몰려든 사람들로 다소 혼잡했다. 이윽고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마지막 남은 잎 가루를 종이로 말아 담배를 완성했고 모두의 관심이 한곳에 쏠렸다.

품속에서 라이터를 꺼낸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어쩐지 비장한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봤다.

“사서 씨.”

“네?”

“…괜찮다면 불을 붙여주지 않을래? 사서 씨가 허락해주지 않았다면, 담배나무를 도서관에서 키울 수 없었을 테니까.”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준 핵심 조력자인 나와 이 중요한 영광의 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나는 덩달아 어쩐지 비장한 기분이 되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는 사람들도 의문의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선생님이 내민 라이터를 조심스럽게 받아, 그가 내민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섯 달간의 노력의 결실에 처음으로 불이 붙는 순간이었다.

곧 식당 안에 한줄기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쿠타가와 선생님은 불붙은 담배를 입에 가져다 대고 연기를 삼켰다.

“…….”

그런데 호쾌하게 첫 모금을 빨아들인 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표정이 조금 미묘했다. 아, 설마….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말았지만, 그를 위해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기는 좀….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 있던 키타하라 선생님이 연기를 훅 내뱉은 것은 그때였다. 언제 불을 붙였는지, 갑자기 피어오른 또 다른 담배 연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집중됐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눈치챘을 것이다. 키타하라 선생님도 담배나무를 키우고 있었으니-물론 사이세이 선생님이 전부 관리했으니 ‘키웠다’라는 말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수확하여 결과물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키타하라 선생님의 손에 들린 담배는 아쿠타가와 선생님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소감은 다음과 같다.

“맛없어.”

아….

그걸 여기서 이렇게 말해버리시는군요….

“사쿠타로 군, 재떨이.”

“앗, 네!”

키타하라 선생님은 하기와라 선생님이 내민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계속해서 담배의 맛을 평가했다.

“솔직히 좀 기대했는데, 뭔가 첫 모금부터 이상하게 풀냄새가 나는 게 영 미묘하네. 사이세이 군이 힘내줬으니 끝까지 피워보려고 했는데 영 아니었어. 계속 피면 목도 따가울 것 같고.”

확인사살 그 자체였다. 실망한 몇몇 사람들이 아, 뭐야―. 따위의 감상을 내뱉으며 식당을 떠났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쿠타가와 선생님의 반응을 확인했다.

“선생님.”

“…….”

“괜찮으세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었는데 그걸 또 들은 사람이 있었는지, 시선이 조금 이쪽으로 몰리는 것을 느꼈다. 아쿠타가와 선생님은 불이 붙은 담배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타도록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누가 봐도 안 괜찮은 사람의 대답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키쿠치 선생님이 사람들 사이에서 튀어나와, “괜찮아, 류. 네가 그동안 담배를 키우면서 들인 정성과 노력은 진짜였잖아!”라며 아쿠타가와 선생님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 했지만, 별로 효과는 없는 듯했다.

“그래…. 정성과 노력은 진짜였으니까….”

이것 봐, 다른 방향으로 어둠에 빠져들고 있잖아.

결국 그날의 담배 시음회는 상처받은 아쿠타가와 선생님을 달래 방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뒷정리를 돕겠다고 나서준 슈세이 씨와 함께 사람들이 떠난 식당을 정리했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연기와 먼지가 빠져나가도록 창문을 좀 더 활짝 열었다.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너무 상처받지 않으셨어야 할 텐데요….”

“그러게…. 더 큰 일로 번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더 큰 일? 무슨 소리인가 싶어 슈세이 씨 쪽을 돌아봤지만, 슈세이 씨는 내 의문을 알아챘는지 알아채지 못했는지 딱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딱히 말이 없는 걸 보니 그냥 해본 소리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말을 흘려 넘겼다. 알게 모르게 잔걱정이 많은 슈세이 씨니, 그런 걱정을 할 수도 있겠지.


나는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도서관 신문을 펴보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어제 몰려들었던 사람들 속에 도서관 신문을 만드는, 말하자면 취재를 위해 그 자리에 참석한 선생님들이 있었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일 났다….”

아니나 다를까 신문에는 「텃밭 특집」이랍시고 텃밭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물론 사이세이 선생님의 토마토 이야기나 텃밭 채소로 만들 수 있는 요리 레시피들, 그리고 무샤노코지 선생님의 ‘농사의 좋은 점과 힘든 점’ 인터뷰 같은 것도 실려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거다. 아쿠타가와 선생님의 5개월간의 담배 농사 이야기가, 거의 특집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수준으로 길게 실려 있던 것이다.

온갖 정성을 쏟아부어 5개월의 긴 기다림 끝에 만난 결과물이 그런 수준이었으니 실망하고 속상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그게 이렇게 문서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누구라도 상처받고 말 거다. 더군다나 무던한 듯 보이지만 실은 무척 섬세한 아쿠타가와 선생님이라면…. 더 생각할 것도 없다. 돌발 행동으로 무슨 일을 할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기사 총괄은 누구지? 나는 페이지를 뒤적이다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특집 기사의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획 · 총괄 : 시마자키 도손」

망했다. 진짜 끝이다. 더 큰 일로 번지고 자시고도 없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이것은 눈앞으로 다가온 재앙이다. 이제 다 끝났어. 내게는 이 사태를 수습할 힘이 없어…!

한참 머리를 싸매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였는지, 옆 테이블에서 우동을 먹던 난키치 군이 머뭇거리다 “사서 씨, 괜찮아?” 라고 말을 걸어왔다.

“네, 괜찮아요…. 저는 괜찮은데….”

“괜찮은데?”

“하아…….”

대답보다 한숨이 먼저 나오고 만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던 난키치 군은, 둥글게 주먹을 쥔 한 손으로 다른 손바닥을 콩 친다.

“아, 담배 사건 때문이라면, 아쿠타가와 씨는 괜찮아.”

“네?”

“아까 텃밭 근처를 산책하다가 만났어요! 담배나무 앞에 서서 계속 나무를 쳐다보고 있길래, 인사를 했더니 친절하게 받아주셨는걸. 사서 씨가 걱정하는 것만큼 상심한 것 같지는 않던데?”

“그, 그렇다면 다행인데….”

“응,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런가. 나는 살짝 탄 토스트 마지막 한 조각의 끄트머리를 한 번에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생각보다 걱정할만한 일은 아니었던 걸까? 설탕을 듬뿍 떠서 커피에 두 스푼 넣었다. 티스푼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커피잔에 부딪혔다. 남은 우동 국물을 꿀꺽 삼킨 난키치 군이 잘 먹었습니다, 하고 손바닥을 붙였다. 나도 다 먹은 그릇을 가져다 두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왜 그러세요”

그릇을 손에 든 난키치 군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데 아쿠타가와 씨, 손에 정원 가위를 들고 있었어.”

“역시 걱정할 일이었잖아!!!”

멀쩡한 게 아니라 540도 돌아버린 거잖아! 한 바퀴 돌아서 어라? 괜찮은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반 바퀴 더 돌아 있어서 사실은 전혀 안 괜찮은 거잖아!! 나는 다급히 그릇을 퇴식구에 가져다 두고 텃밭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아쿠타가와 선생님도 담배나무도 아직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면서.

차오르는 숨을 헉헉거리며 텃밭에 도착하자 익숙한 인영이 시야 끝에 들어왔다.

“아쿠타가와 선생님!”

“사서 씨.”

선생님은 과연 난키치 군이 말한 대로 정원가위를 들고 있었다. 가을이라고는 해도 아직 햇살은 쨍쨍하고 여름이 다 가시지 않은 탓에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나는 손등으로 땀방울을 훔치며 선생님에게 외쳤다.

“잘라 버리시는 건가요?”

“…….”

“그동안 열심히 키웠잖아요!”

“사서 씨, 나는….”

비명과도 같은 내 외침에 선생님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그리고 실망과 상처가 섞인 목소리로 외치듯 대답했다.

“그치만!”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치만, 맛이 없었는걸!”

“…….”

“눈물 날 정도로, 맛이 없었단 말이야!”

나는 타이르듯, 그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래도 노력했잖아요. 선생님의 노력만은 진짜였잖아요!”

“나의….”

“그러니까 자르지 말아요. 어떻게 할지 함께 생각해보는 거에요!”

그 말에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주저앉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였다. 선생님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나도 알아. 이렇게 자르면 안 된다는 걸…. 그리고 내가 자르지 못할 거라는 것도. 그치만 사서 씨, 있지, 너무 맛이 없었어. 정말로, 정말로….”

“선생님….”

어지간히 속상했던 걸까. 눈에 조금 억울함의 눈물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나도 모르게 ‘음, 잘 생겼군.’하고 생각해버렸다. 아아, 이게 금지옥엽 키운 담배가 너무 맛이 없어서 실망해 나무를 잘라 버리려던 사람과의 대화만 아니었다면 이 감동스러운 장면으로 영화 한 편은 찍을 수 있었을 텐데. 분명 명장면 오브 명장면이 되었을 거다. 물론 지금 이 상황도 어떻게 보면 ‘잘못된 마음을 먹은 사람이 동료의 감동적인 회유로 마음을 고쳐먹는 감동적인 명장면’이기는 하다만….

아무튼 가을의 햇살만이 선생님과 나 사이에 있는 텃밭의 작물들을 상냥하게 비추고 있었다. 찬란하게, 찬란하게….


하늘이 너무 높다.

가을인 데다가 하루의 더위가 정점에 달하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오전 중인데도 작열하는 태양이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덥다. 더워. 이 더위 속에서 내가 뭘 하고 있었는가 하면, 호미질이다. 수확 철이 되어 고구마를 캐고 있는 것이다.

“사서 씨, 여기 다 끝났어요! 그쪽 도와드릴까요?”

“아, 네!”

저쪽에서 고구마를 캐고 있던 무샤노코지 선생님이 손을 흔들며 내게 말을 걸었다. 안 지치시나? 조금 쉴 법도 하건만 무샤노코지 선생님은 농땡이 피우는 법도 없다. 정말 농사에 최선을 다하고 계시는군…. 말로 꺼내지 않았는데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옆에 있던 사이세이 선생님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더 힘내. 이거 다 캐면 구워 먹자.”

“군고구마를 하기에는 조금 이른 계절인 것 같지만요.”

“아니, 군고구마에 계절은 없지.”

“그건 그렇네요, 사계절 내내 군고구마를 팔고 있으니까요….”

논리적인 답변이다. 아―. 나는 한숨이라기에는 조금 우렁찬 소리를 뱉으며 호미로 땅을 팠다. 비명이야 한숨이야? 그걸 듣고 옆에서 사이세이 선생님이 키득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그가 운을 뗀다.

“아쿠타가와의 담배 나무, 어떻게 됐어?”

“아아, 그거….”

나는 고개를 돌려 텃밭 저쪽 끝을 쳐다봤다. 높게 자란 담배나무가 마치 ‘아직은 텃밭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라고 대답하듯이 우뚝 서 있었다.

“아직은 멀쩡해요.”

“아직은, 이구나?”

“네. 그게 말이죠.”

사실은 식물도감에서 내가 놓친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담배는 남미 지역에서 키우면 여러해살이 식물이지만, 온대 지역에서 키우면 한해살이 식물이라서요….”

그날 아쿠타가와 선생님과의 감동적인 대화 후에 식물도감을 찾아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나는 「담배」 페이지 첫 문단에 적힌 그 사실을 읽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나와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그런 영화의 감동적인 라스트 씬을 연출하지 않았더라고 해도, 그러니까 선생님이 잘랐건 간에 못 자르고 내버려 뒀건 간에 어차피 겨울에는 저 자리를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아….”

사이세이 선생님이 탄식했다. 그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건넸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지.”

“네?”

나는 그를 바라봤다. ‘아니기를 바란다’는 표정으로 그가 내게 질문했다.

“아쿠타가와 말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니지?”

“…하하, 모를 걸요, 아마….”

“…….”

“…….”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겨울에 벌어질 일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버린 것이다. 결과물이 영 신통하지 않았어도 금지옥엽 키운 나무라고 자르지도 못했던 아쿠타가와 선생님이, ‘담배는 한해살이 식물이니까 땅을 비워야 해요~’ 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겨울이 되면…. 큰일이 나겠구나.”

“영원히 겨울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아, 높다 높아. 높고 넓고 푸른 하늘이로구나.

“여러분, 손이 놀고 있어요!”

어느새 이쪽으로 온 무샤노코지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호미를 쥐었다. 아쿠타가와 선생님과 담배 나무를 생각하니 어쩐지 다시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뭐, 지금부터 걱정하지는 말자구. 그때 가서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표정 풀어! 사이세이 선생님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호미를 꽉 쥐었다. 그래,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남은 것은 찾아올 운명을 기다리는 것뿐…. 그리고 그날이 오기 전까지 분명 크고 작은 사건들이 더 일어나겠지.

아아, 피곤하다. 수습해도 수습해도 사건은 계속 터져 나오고 땅을 파고 또 파도 고구마는 계속 나온다.

오늘도 도서관은 돌아간다….

 

(完)


* 제목은 이예린 님의 곡 <사람은 이상하고 사랑은 모르겠어>의 패러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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