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 책갈피

2 달콤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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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달콤한 것

 

 

 

 

 

 

맨날 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서 또 돈은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다. 바쁘다. 엄청 바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최근 진행 중인 보존서고 정리 작업 때문에 더 그랬다. 장서 점검, 도서 이동, 분류, 배가, 책 보수, 좀벌레 대비용 방충 및 소독 작업까지. 양이 워낙 많다 보니 하루 이틀 일해서 끝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특단의 조치로 공사가 끝날 때까지 일을 돕는 문호에게 보너스가 지급된다는 공지가 내걸렸다. 타쿠보쿠는 그 공지에 낚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귀찮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갔지만 공사는 예상보다도 더 귀찮았고 훨씬 힘들었다. 연일 이어지는 노동에 눈이 계속 뻐근했다. 반납 데스크 근무와 보존서고 정리를 동시에 하게 된 어느 날의 저녁에 타쿠보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식당의 테이블에 엎어져 들어줄 사람 없는 투정을 내뱉고 말았다. 이 노동 강도 말이 되나! 이대로는 살 수 없다!

“그치만 타쿠보쿠 씨, 자원한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정도가 있잖아…!”

“미안, 나도 좀 더 오래 도와주고 싶지만 사서 씨가 못 하게 해서….”

앞자리에 앉은 켄지가 샐러드를 우물거리다가 정말로 미안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타쿠보쿠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켄지가 미안할 건 없지. 그리고 그건 그 녀석의 판단이 맞으니까.”

체격이 작은 어린이의 체구를 하고 있는 문호들은 그렇지 않은 문호들에 비해 어쩔 수 없이 육체적으로 약하다. 사서가 켄지의 자원봉사 시간을 제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어른의 몸으로도 이만큼의 피곤함을 느끼는 노동강도인데 어린이의 몸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켄지는 따로 더 대답하지 않고 그냥 미소 지었다. 타쿠보쿠는 다시 테이블에 스르륵 엎어져 중얼거렸다.

“젠장,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피곤하니까 단 게 땡기네….”

“별로 안 좋아하잖아?”

“원래 피곤하면 먹고 싶어지는 거야.”

타쿠보쿠의 죽겠다는 투정을 배경음악 삼아 켄지는 저녁 식사의 마지막 남은 양상추 한 조각을 포크로 찍었다. 그걸 입에 넣으려다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켄지가 아, 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 사서 씨에게 코코아 받은 적이 있어. 사서 씨라면 달콤한 거 갖고 있지 않을까?”

“코코아? 사탕도 아니고?”

“밤에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거든. 그때 잠깐….”

켄지가 어영부영 말을 흐렸다. 사정을 다 설명하기에는 조금 긴 이야기인 모양이다. 뭐, 굳이 보채지 않아도 되겠지. 언젠가 다시 궁금해지면 물어보도록 하자. 타쿠보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다음 행선지를 어렴풋이 예감한 것인지 켄지가 아하하…. 하고 웃었다.

“타쿠보쿠 씨.”

“응?”

“…너무 괴롭히지는 마?”

“…….”

이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까….

아무튼 지금은 누구에게라도 이 과로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쏟아내고 싶은 기분이다. 이 기분을 잊지 말고 코코아 한 잔을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타쿠보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말이지….

맹세컨대 이럴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 전에 내가 뭐 했던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냥 노크 한 게 전부인데? 밀려오는 당혹감에 타쿠보쿠는 열린 방문 앞에서 굳어버렸다.

문 너머로 보이는 방의 주인은 어쩐지 평소와는 한참 다른 분위기였다. 다른 게 아니라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건만 뭔가 살짝 마른 눈물 자국 같은 것도 보였다. 아, 뭔가….

“…….”

“…….”

어색하다, 엄청…….

빼꼼 열린 틈 사이로 침묵만 오갔다. 대화가 진전될 기미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천 년정도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쯤에야 결국 타쿠보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걸 물어봐도 될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울었어?”

“…….”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참 침묵이 이어지더니, 사서가 크흠, 하고 두어 번 정도 헛기침을 했다.

“아니, 아무것도….”

목소리를 가다듬은 게 무색하게도 목이 너무 잠겨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만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본인도 그 사실에 조금 당황했는지 말이 끝까지 이어지질 않았다. 그대로 대화가 또 끊겼다. 사서가 시선을 피했다. 잠시 뒤에야 겨우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런 사람은 보통 이런 대답 안 한다. 애초에 누가 봐도 울다 온 사람이 아닌가. 설마 나 때문에 운 건 아니겠지. 난 그냥 방문 노크한 거 말고는 아무 잘못 없다고. 그보다 코코아 뺏으러 온 거였는데 이 분위기에서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 때맞춰 사서가 말 대신 눈빛으로 ‘그래서 여긴 왜 왔냐’고 물었다.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타쿠보쿠도 조금 우물쭈물 대답하고 말았다. 아까보다는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 잠긴 목소리로 사서가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쫓아내듯이 인사했다. 어엉, 하고 얼떨결에 대답하고는 타쿠보쿠도 그대로 뒤돌아섰다. 조용히 문이 닫혔다. 대충 얼버무린 앞뒤도 안 맞는 핑계는 곧바로 머릿속에서 휘발되어 버렸다. 정말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보다 말이지, 완전히 운 얼굴이잖아 저건.

뭐 하나 뺏어 먹으려다 찝찝한 일만 늘었다. 이건 다른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완전히 혼자만의 찝찝함이잖아. 당사자에게 다시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아아, 뭔가 좀 더 피곤해졌다. 정신적으로도….

타쿠보쿠는 닫힌 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왠지 어깨가 좀 무거웠다. 근육통의 무게만은 아닌 것 같았다.

*

“별일 아닐걸?”

“엥.”

그 말에 타쿠보쿠가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말거나 맞은편의 켄지는 반절 남은 쿠키를 열심히 갉작이고 있었다. 평균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부드러운 초코 쿠키는 과장을 조금 더 보태서 켄지의 얼굴만 한 크기였다. 한 입 한 입이 작기도 해서 먹는다기보다는 공략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실수로 포장지를 툭 쳐서 초코칩 쿠키의 부스러기가 테이블 위에 후두둑 떨어졌다. 켄지가 열심히 쿠키를 공략하는 동안 타쿠보쿠는 제가 흘려 놓은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치웠다. 마지막 조각을 입안에 넣고 토마토 주스로 목을 축인 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지만, 심각한 일은 아닐 수도 있어.”

“그러냐….”

켄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대강 납득하고 일어서려는 타쿠보쿠에게 켄지가 살짝 미소 지었다.

“나도 본 적 있거든.”

남은 부스러기를 잘 갈무리하고는 쿠키 포장 봉투를 접으며 켄지가 조용히 말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깔렸다.

“사서 씨, 가끔 울어. 좋아하는 책 읽으면서.”

“책?”

“그런 책은 누구에게나 한두 권쯤 있는 거겠지.”

세피아 색 봉투는 작게 접혀 어느새 작은 쪽지 모양이 되어 있었다. 타쿠보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쪽지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밤에 복도에서 마주쳐서 코코아 받았던 거랑 같은 날이야?”

“헤헤, 들켰어? 비밀이었는데.”

“비밀이고 자시고…. 왜 알려준 거야? 비밀이라면서.”

타쿠보쿠는 괜히 켄지에게 투덜거렸다. 알아도 되는 사실인지 알면 안 되는 사실인지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영역을 침범해 버린 것 같아서 조금 찝찝하기도 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죄지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더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런데 켄지는 타쿠보쿠의 투정에 살짝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타쿠보쿠 씨도 본 거잖아?”

아니 뭐, 그렇게 맑고 동그란 눈으로 이야기하면 이젠 더 할 말도 없고….

요컨대 공범자라는 말이다. 한 방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켄지가 이쪽을 보며 생글거렸다.

“계속 걱정하고 있던 거야?”

“뭐 걱정이랄 것까지는…. 그냥 찝찝한 것뿐이야.”

“뭐가?”

“아니, 그야 당연히… 잠깐, 너 지금 이 몸을 놀리는 거지.”

타쿠보쿠는 켄지를 살짝 째려봤다. 오늘의 켄지는 어쩐지 조금 짓궂다. 난키치에게 영향이라도 받은 거냐고 말하려던 찰나에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며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켄지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썹을 내리며 후후, 하고 웃었다.

“그치만 타쿠보쿠 씨가 엄청 심각해 보였는걸. 놀리려는 생각은 없었어. 미안.”

“뭐 사과할 것까지는 없고.”

있지, 타쿠보쿠 씨. 하고 켄지가 아주 작게 운을 띄웠다.

“사서 씨에게 지금 다시 가보면 어때?”

…저번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인데 그걸 읽기라도 한 듯이 곧바로 말이 이어졌다.

“아마 싫어하진 않을 거야. 코코아, 저번에 못 마신 거지?”

“그래서 그걸 핑계로 다녀오라고?”

“계속 어색한 건 싫잖아.”

완전히 정곡을 찔린 데다가 더 댈만한 핑계도 없어서 타쿠보쿠는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켄지가 다시 한번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지간히 맛있는 코코아가 아니라면 곤란하겠는데.

*

그리하여 타쿠보쿠는 결국 하루 종일 그 녀석… 아니, 코코아의 생각을 하다가 결국 한밤중이 되어서야 미적미적 걸어 사서실 앞에 서고 말았다. 오른손을 들어 문을 두 번 노크했다. 똑똑,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문 너머에서 한동안 아무 소리도 안 들리더니 조금 먼 거리에서 ‘네—’ 하고 말꼬리를 늘인 대답이 들려왔다. 거리가 먼 것 같아서 일부러 조금 크게 말했다.

“방에 있어?”

“…이시카와 선생님?”

“…바빠?”

“아, 잠시만요! 잠깐, 지금 열 테니까…!”

노크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자마자 상당히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안쪽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났다. …연달아 두 번 났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건가? 그렇게까지 급하게 뛰쳐나올 필요까진 없는데…. 그럴 정도의 용건도 아니고. 금방 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이세요!?”

다급한 표정으로 사서가 뛰쳐나오다시피 문을 벌컥 열었다. 완전히 잠옷 차림이었다. 뭔가 엄청 폭신폭신한 재질의. 거기에 슬리퍼는 또 한쪽만 신고 있었다. 넘어질 때 벗겨진 건지 다른 한쪽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사서실 안쪽으로 연결된 개인실 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보려고 한 건 정말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문 틈새로 침대나 테이블 같은 방 안의 풍경이 조금 보였다. 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급하게 뛰어나와 문을 열어준 것 같았다.

타쿠보쿠는 이제 와서야 조금… 아니 사실 엄청 후회했다. 급한 용건도 아닌데 냅다 찾아와서는, 이건 완전히, 그, 개인적인 영역을 침범한 수준도 아니고 완전히 아웃이랄까, 그래서 느끼는 약간의 미안함이…. 아니다. 여기서 빼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래서 타쿠보쿠는 일부러 뻔뻔하게 말했다.

“코코아 줘.”

줘, 보다는 내놓아라에 좀 더 가까운 뉘앙스였다. 말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듯 잠시 멍하게 있던 사서가 곧 ‘지금 이 시간에 뭔 소리 하는 거야….’라는 메시지를 꾹 눌러 담은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는 뻔뻔하게 나가는 게 좋다. 우물쭈물 해봤자 서로 머쓱하고 어색해지기만 할 뿐이다. 저번의 경험을 통해 얻은 스킬이었다. 타쿠보쿠는 꿋꿋이 서서 사서를 쳐다봤다. 사서도 ‘진짜 뭐지?’ 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잠깐의 대치 끝에 사서가 어이없다는 듯 질문했다.

“켄지 군에게 들었어요?”

“엉. 이 몸이 먼저 물어봤거든. 미안하게 됐다?”

“그거야 뭐 켄지 군의 잘못도 아니니 별로 상관없지만…. 한밤중에 찾아와서 다짜고짜 코코아 달라고 하는 건 좀 심하지 않아요?”

“들어간다?”

“안 줄 건데요!”

안 된다고 했으면 그냥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것을 왠지 뻔한 잔소리가 따라붙으니 반발심이 생겨버렸다. 타쿠보쿠는 사서의 잔소리를 무시하고 사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에 자기도 모르게 길을 비켜버린 사서가 앗, 하고 당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오지 말라고 할 거면 거기 버티고 서 있어야지. 바보 아냐? 뭐 어쨌든 바보라서 밀고 들어왔으니 잘 된 일이다.

타쿠보쿠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사서는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사서실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재빨리 개인실의 문을 닫았다. 그 틈을 타서 타쿠보쿠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접객용 소파에 털썩 앉아버렸다. 처음 한 번이나 어렵고 두 번부터는 아무렇지도 않은 법이지. 이러다 보면 뭐라도 하나 더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뭐… 돈까지는 안 바라고. 간식이라던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으니 어딘가 복잡한 표정으로 사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진짜 얻어먹고 갈 생각이에요? 진짜로?”

“그럼 진짜 그럴 생각이니까 왔지 가짜로 왔겠냐?”

“하아…….”

사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손은 또 찬장을 열고 있다. 어차피 내어 줄 거라면 한숨 안 쉬는 편이 더 낫지 않아? 라고, 타쿠보쿠는 조금 생각했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코코아는 확실히 얻어먹을 수 있으니 아무래도 됐다.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맡기자 그제야 조금 너저분한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노트나 필기구나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직전까지 사서가 여기 앉아서 뭔가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너저분한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타쿠보쿠는 손을 뻗어 그걸 집어 들었다.

낡았다기에는 새것 같았고 또 새것이라기에는 손때를 탄 책이었다. 접거나 밑줄을 그은 자국은 없었지만 표지나 모서리가 좀 닳아 있었다. 어쨌든 눈에 띄는 하자는 없었으므로 책의 주인이 이 책을 제법 소중하게 대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표지에는 <The Dandelion girl>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들레 소녀?

타쿠보쿠는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적당히 간을 볼 생각이었거늘 템포가 생각보다 빠르고 짧아서 기다리는 동안 표제작을 다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20세기를 살아가는 남자가 미래에서 온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의 뻔한 이야기였다. 운명의 만남이라던가, 뭐 그런 거겠지. SF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가끔 읽는 정도로는 나쁘지 않다. 어차피 소설의 매력이라는 건, 지금 발을 붙이고 살아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잠시 데려다 놓는 것에 있지 않은가….

비평 같은 생각은 관두자. 그러려고 읽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보글거리며 우유가 끓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 달콤한 냄새가 사서실 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유리 머들러와 머그잔이 가끔 부딪쳐 달그락거리며 일정한 리듬을 만들었다. 종이끼리 맞부딪치며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에 그 소리들이 더해져서, 꼭 조용한 음악이 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곧 사서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밤중의 불청객이었을 텐데도 코스터까지 깔아서 내려놓는 부분이 참, 성격 보인다고 생각했다.

“여기요.”

“오오, 땡큐.”

타쿠보쿠는 머그잔을 손에 들었다. 작은 새 그림이 그려진 잔 안에는 달콤한 냄새가 나는 희고 따뜻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코코아라고 했는데 왜 이런 색인 거지. 불만스러운 표정의 사서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저번에 차를 마시던 때와는 반대 방향이었다.

“…그래서 진짜 뭐 하러 온 거예요?”

“이거 왜 흰색이야?”

“먼저 질문한 건 이쪽인데요….”

사서가 조금 질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타쿠보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코코아를 한 모금 홀짝였다.

“화이트 코코아니까요.”

“뭐가 다른데?”

“어, 그러니까…. 색깔이?”

본인도 차이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뭐, 어쨌거나 나쁘지는 않다. 평소 마시는 코코아보다 조금 더 달고, 버터 풍미가 느껴지고, 희미하게 바닐라 향이 났다. 어쩐지 특별한 날에 마시는 음료 같은 느낌이라고 타쿠보쿠는 생각했다. 당장 지금도 평범한 순간은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딱 어울릴지도 모른다. 늦은 밤에 사서실의 문을 두드리는 것도, 굳이 달콤한 것을 입에 대는 것도 평소라면 전혀 하지 않을 일이 아닌가.

사서는 아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 시간에 찾아온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렇게 대답해도 만족하지 않겠지. 말을 돌리기 위해 타쿠보쿠는 다시 『민들레 소녀』에 손을 뻗었다.

“이 책 좋아해?”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을 고르던 사서가 어딘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엄청 읽었는걸요.”

“그런데도 우는 거야?”

“네, 뭐….”

그렇게 말꼬리를 늘이며 얼버무리다가, 그제야 말의 함정을 깨달았는지 사서가 왁 하고 소리쳤다.

“잠깐, 이거 읽고 울었다고 말한 적은 없잖아요!”

“그거야 뭐 딱 보면 알지.”

“뭐예요, 그게…!”

뭐긴 뭐야, 네가 너무 알기 쉽다는 뜻이지. 오늘따라 더 헐렁한 것 같기도 하고. 타쿠보쿠는 대답하는 대신 다시 책을 펼쳤다. 사서가 조금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번을 읽어도 좋으니까 어쩔 수 없는걸요.”

페이지가 넘어간다. 조금 전까지 읽던 부분을 지나쳐 그 앞에 도착하자 미래에서 온 소녀와 현재를 사는 남자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소녀가 말했다.

「그제는 토끼를 봤어요. 어제는 사슴을, 오늘은 당신을.」

“좋아하는 문장이 있어요.”

라고, 사서가 말했다.

“물론 좋아하는 장면도 많지만, 임팩트 있는 문장은 머릿속에 남으니까요.”

헤에, 하고 타쿠보쿠는 아무 의미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것이 어떤 문장인지는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영영 알 수 없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생 단 한 권의 책」 말이야, 이걸로 할 거야?”

그 말을 들은 사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쳐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를 타쿠보쿠가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의외인 모양이었다. 뭐, 사실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책의 이름이 잔뜩 적혀 있는 메모지를 보고 떠올린 거였지만. 사서는 으음, 하고 운을 띄워놓고는 잠시 고민하더니 곤란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좋아하기는 하지만…. 인생의 단 한 권이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서요.”

“역시 제목이 좀 무거운 것 같은데. 그래봤자 책 추천인데 뭘 인생까지 가냐고.”

“그래도 그편이 더 멋지잖아요.”

아 그러십니까…. 너무나도 즉답이었기에 타쿠보쿠는 고개를 들어 사서를 뻔히 쳐다봤다. 당사자도 왠지 슬슬 눈을 피했다. 왠지 꼴이 좀 웃겨졌다. 사서실 안이 다시 조용해져서 결국 이번에는 타쿠보쿠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뭐, 어떤 이야기가 좋은데? 장르라던가 소재라던가, 취향은 있을 거 아냐.”

“그렇게 물어보면 또 잘 모르겠는데요….”

“야, 도와주려는 거니까 좀 진지하게 생각해 봐.”

으으음, 하고 생각이 점점 길게 늘어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사서가 고민 끝에 겨우 대답을 내놓았다.

“울게 만들어 주는 책이 좋을지도.”

좀 의외의 대답이라 타쿠보쿠는 고개를 갸우뚱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웃게 만들어 주는게 아니라?”

울게 만들어 주는 책이라면 슬픈 이야기 아닌가. 그야 그런 이야기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겠지만 ‘좋아하는 타입의 이야기’라는 주제에서 나올만한 답안으로는 좀 독특한 것 같다고 타쿠보쿠는 생각했다. 사서가 더듬거리며 부연 설명을 내놓았다.

“음, 뭐랄까…. 읽은 순간 감정이 확 변화하는 느낌이 좋은 건지도 몰라요.”

그렇게만 말해서는 확 와닿지 않는군….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었나 보다. 눈이 마주친 사서가 이쪽의 표정을 쓱 보고는 머쓱하게 미소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이야기라는 건 지금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데려다주는 열차 같은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겪어보지 못할 일을 겪게 하고, 느낄 일 없는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 주니까…. 그러니까 좀 더 먼 곳으로 데려가 주었으면 해요. 일상의 감정을 느끼는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확 변해버리고 푹 빠져들어서 완전히 몰두할 수 있는 곳으로.”

그게 어디인지는 아직 물어볼 수 없다. 적어도 아직은 그만큼까지 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멋대로 그어놓은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장난이나 치고 있는 지금은, 아직. 타쿠보쿠는 펼친 채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초판본도 특별한 책도 아니지만 손때 묻고 닳은 책이었다. 분명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을 것이다. 읽을 때마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빠져들면서.

테이블 위에 놓아둔 머그잔 속의 코코아가 어느새 딱 적당히 마시기 좋을 정도로 식어 있었다. 잔을 입에 가져가 한 모금을 넘긴다. 따뜻하고 달콤한 것이 입안에 머물렀다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달콤한 것, 오늘을 특별한 날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달아.”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자 사서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이쪽을 쳐다봤다.

“뭐예요? 본인이 달라고 했으면서.”

“덜 단 건 없어?”

“아 진짜, 다 마시면 나가요! 잘 거니까!”

…그래서 결국 잔을 비우자마자 내쫓기고 말았다. 등 뒤에서 ‘안녕히 주무시던가요!’ 하는 인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젠장, 잘 자라고 말하는 사람의 태도냐고 그게. 어쨌든 목적은 달성했다. 코코아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또…. 아니지, 목적은 코코아였으니까. 별로 다른 생각을 하고 간 것도 아니었고. 응. 코코아는 좋았어, 코코아는.

조용한 복도를 혼자 걸었다. 목으로 넘겼던 달콤한 것이 마음까지 내려갔는지, 아직 다 식지 않은 온기가 몸을 덥혔다.

*

“죽겠다…….”

라고, 무심코 입 밖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길고 힘들었던 서고 정리도 오늘부로 끝이 났다. 마지막 날이라고 엄청 부려 먹는 거 아니야? 심지어 오늘은 주말인데? 이게 그저 억울함에서 비롯된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근육통이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뭐, 지금은 투덜거리고 있지만 곧 보너스가 들어올 거다. 그러면 한동안은 놀러 다닐 수 있겠지. 돈 들어오면 뭐 하지. 우선은 전부터 갖고 싶었던 책을 좀 살까? 그러기도 전에 대부분 술값으로 사라질 거라는 사실은 지금은 무시하기로 하자.

아무튼 이제 완전히 자유의 몸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타쿠보쿠는 왠지 좀 기분이 좋아졌다. 찌뿌둥한 몸을 움직여 기지개를 켜자 몸 어딘가에서 두둑, 하고 관절이 제멋대로 소리를 냈다. 아, 진짜 죽겠다. 좀 쉬다가 저녁 먹든가 해야지.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며 복도를 걷는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인데도 창밖이 환했다. 아주 천천히, 밤이 조금씩 더워지고 있다. 조금 있으면 매미가 울지도 모른다. 비로소 진짜 여름이 시작되는 것이다. 녹색이 선명한 계절. 타 버릴 것 같은 여름의 태양 아래에서….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와 타쿠보쿠는 창문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실히 보이자마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양쪽 모두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뭐야, 나갔다 왔어?”

“네.”

사서는 드물게도 사복 차림이었다. 기장이 긴 아이보리 색 원피스였는데 도중에 더워졌는지 카디건은 벗어 옆에 끼고 있었다. 나간 김에 필요한 걸 사온 건지 반대쪽 손에 작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밤 이후로는 만날 일이 좀처럼 없었다. 타쿠보쿠는 타쿠보쿠대로 바빴고, 사서야 뭐 언제나 바쁜 몸이니까. 같은 곳에서 지내는데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반갑다고 하기는 조금 모자라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기는 또 어색한 느낌이었다.

타쿠보쿠가 그러고 있거나 말거나 사서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냅다 타쿠보쿠에게 내밀었다.

“받으세요.”

“뭐야?”

“입막음용이에요.”

“응? 입막음 당할 만한 일이 있었던가?”

“…….”

사서는 내밀었던 팔을 스르륵 내렸다. ‘진심이냐?’라는 눈빛이었다. 타쿠보쿠는 타쿠보쿠대로 답답했다.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사건이 떠오르지 않았다. 빨리 기억해 내라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봐도 기억 안 난다고. 말을 해, 말을…. 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포기한 사서가 입을 열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받으세요….”

“어엉….”

타쿠보쿠는 사서가 내민 것을 엉거주춤하게 받았다. “열어봐도 돼?”라고 묻자 사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섬주섬 내용물을 확인했다.

“뭐야, 이거?”

“너무 달다면서요, 저번에.”

날아온 질문에 사서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손에 잡힌 것은 원통형의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코코아였다. 짙은 갈색의 통 위에 은은한 금색으로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잘 모르겠지만 조금 비싼 녀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코아?”

“덜 달콤한 걸로 샀어요.”

“일부러 이것 때문에 나갔다 왔어?”

“그…. 나간 김에 사 왔어요.”

그 잠깐의 머뭇거림은 뭐야. 정말 이것 때문에 나갔다 온 거냐…. 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좀 귀찮아질 것 같았다. 타쿠보쿠는 직감으로 말을 아꼈다.

“이제 용건 없이 밤중에 찾아오지 마세요.”

사서가 짐짓 으름장을 놓듯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용건 있으면?”

“…말꼬리 잡지 마세요!”

솔직히 별로 위압감은 없었다. 봐, 너도 할 말 없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사서는 뒤를 돌아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하긴 사서실은 완전히 반대쪽이다. 이걸 가져다주러 왔던 걸까.

왠지 좀 웃음이 나왔다.

저녁 식사 후에 식당에서 따뜻한 우유를 받아 왔다. 방으로 돌아와 코코아 통을 열었다. 몇 스푼인가 듬뿍 떠넣고 잘 저어주었다. 코코아 가루가 천천히 녹으며 달콤한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 타쿠보쿠는 컵 속에 생긴 작은 초코 색의 소용돌이와 우유 거품 방울을 지켜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코코아가 궁금했던 건 아니었지. 진짜로 궁금했던 건….

따뜻한 코코아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날 마셨던 것보단 쓰네, 하고 생각하는 초여름의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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