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 책갈피

1 투명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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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것

 

 

 

 

 

 

늦은 오후의 햇살이 정수리 위를 지나갔다.

타쿠보쿠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평소 같았으면 보수실 일을 돕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일이 빨리 끝나 조기 퇴근. 누구 하나 꼬드겨 술 한잔 하러 가자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라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 할일 없어요, 광고하며 아무 생각 없이 정원을 걸어 다니는 것뿐이었다.

봄이라기보다는 여름에 더 가까운, 하지만 완전히 여름은 아닌 애매한 시기다. 녹음이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는 계절. 곧 자연의 싱그러움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는 여름이 올 것이다. 푸른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고 연못의 물결이 빛을 따라 반짝거렸다.

가만히 있기에는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씨였다. 산책이라도 나갈까. 돈이 없으니 멀리는 못 가겠지만 주변 구경이나 하다 오는 거라면 괜찮을지도. 아무튼 이 계절은 사람을 조금 활동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자꾸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나게 해 움직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어라, 선생님."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타쿠보쿠는 잠시 멈춰 섰다. 활짝 열린 사서실 창문 너머에서 방의 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다.

"뭐예요? 땡땡이?"

"아니, 조기퇴근."

"우와, 좋겠다."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눈치다. 하긴 특무사서는 조기퇴근 같은 것은 꿈도 못 꾸니까 말이지. 오늘도 고생이 많으십니다요. 그렇게 생각하는 타쿠보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사서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가만히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할 일 없는 거면, 차 한잔 하실래요?"

"공짜야?"

"돈 낼 거예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요.“

대답과 동시에 사서가 등을 돌려 찬장 쪽으로 향했다. 마지막 대화가 웃겼는지 쿡쿡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타쿠보쿠는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잔디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서실 창문을 넘어서 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초대 받은 입장에서 그건 좀 예의가 아니겠지. 여기서는 얌전히 출입문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그러고 보니 사서의 취미는 차(茶)인가. 햇살 좋은 정원을 걸으며 타쿠보쿠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언제나… 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볼 때마다 차를 마시고 있었고, 루이스나 도일 선생이랑도 가끔 홍차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얼핏 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렇지만 그 녀석이 먼저 누군가를 초대하는 건 본 적 없는데.

하필 이런 때에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며칠 전의 기억이다. 처음으로 봤던, 그 녀석의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난 표정…. 아마도 타쿠보쿠를 걱정하고 있었을.

그렇게 되면 또 머릿속에 별생각이 다 떠오른다. '차 한잔 하실래요?'라는 말, 꽤 여러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나.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도,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할 때도, 어쩌면 비밀 이야기를 할 때도. 특별한 차 한 잔은 두 사람의 관계를 얼마든지 뒤집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자신만을 향한 특별함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권유 정도는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애당초 특별해야 할 이유는 또 뭐람?

잡생각이 자꾸만 이어져 타쿠보쿠는 한 번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계절이 참 짓궂다. 봄과 여름의 애매한 중간선에서 괜히 날씨도 좋아가지고는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니 자꾸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잖냐. 그리고 그 녀석이 중요한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시작할 리가 없잖아. 중요한 이야기라니 할 만한 것도 없고. 이거 다 계절 탓이다.

생각을 접고 터벅터벅 걷다 보면 어느새 현관에 도착한다. 문을 열고 발 매트에 신발의 흙먼지를 대강 털어냈다.그대로 쭉 걸어 복도 안쪽에 있는 사서실 문을 두어 번 노크하니 그 너머로부터 네에, 하고 늘어지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타쿠보쿠를 보자마자 사서가 툭 말을 던졌다.

"창문으로 들어와도 되는데."

"진작 말해주지 그랬냐."

그 대답의 무엇이 재미있었던 것인지 또 쿡쿡 웃는다.

물 주전자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났다. 앉으라는 말도 없었지만 타쿠보쿠는 마음대로 손님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접객용의 정중한 푹신함이 체중을 기분 좋게 받쳐주었다. 사서는 그런 타쿠보쿠를 슬쩍 쳐다보더니 찻잎 봉지를 열고는 그 안에 들어 있던 찻잎을 유리 주전자 안에 모두 털어 넣었다. 자잘한 부스러기까지 딸려 오는 것을 보니, 처음부터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다 털어버릴 심산이었던 것 같았다.

"뭐야, 남은 거 다 터는 거야?"

"네. 혼자 조금 마시고 끝내면 아깝잖아요. 좋은 차라구요."

그런 거였나. 그냥 털이였구만. …뭐, 이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길은 없다. 말하는 분위기로 보아 그저 가벼운 권유였겠거니 하고 타쿠보쿠는 지레짐작했다. 그냥 우연히 마주쳤고, 나는 우연히 시간이 있었고, 그래서 우연히 초대받은 것뿐이다. '차 한잔 하실래요?'라는 문장이 워낙 통상적으로 여러 의미를 갖고 있어서 그렇지,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읽으면 되는 거잖아. 실제로도 그렇고.

타쿠보쿠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사서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이거 마시고 또 사야지."

예, 그러십니까. 즐거워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물 주전자와 자잘한 다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사서는 타쿠보쿠의 맞은 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사서가 사무용 의자가 아닌 손님 접대용 소파에 앉는 것은 정말로 누군가를 대접할 때뿐이다.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입장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정말로 손님이 된 기분이라 어색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 타쿠보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서는 손을 뻗어 유리 주전자의 뚜껑을 열었다. 얇은 유리끼리 살짝 부딪히며 잘그락거리는 맑은소리가 났다. 찻잎 위로 물을 붓는다. 투명한 유리 안에서 찻잎이 춤을 췄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떠오른 문장을 그대로 입 밖으로 뱉어버리고 만다.

"차 마시는 거 좋아해?"

"좋아해요."

뭐, 답이 YES일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사서는 타쿠보쿠의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조심스럽게 제 앞으로 가져오더니 유리 주전자를 들어 차를 부었다. 딸려 나온 부스러기 찻잎들이 거름망에 걸러졌다. 비어 있던 찻잔 속에 옅은 계절의 색깔이 채워졌다. 사서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차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니까, 좋아해요.“

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대답은 지금의 타쿠보쿠에게는 없다. 눈앞으로 건네진 찻잔은 꽃잎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첫 잔은 선생님 드릴게요.“

타쿠보쿠는 말없이 잔을 받았다. 잔에 닿은 손가락 끝에 온기가 퍼졌다. 향기는 입술보다도 코끝에 먼저 닿는다. 찻물 색깔보다도 더 봄 같은 향이었다.

"…좋네, 이거."

"그쵸? 봄 다즐링이에요. 아껴 마시던 거라구요..“

사서는 뿌듯한 듯 미소 지으며 제 몫의 차를 홀짝였다.

“사실은 좀 더, 물 온도라거나, 찻잎의 양이라거나, 우리는 법이라는 게 있는데요…. 적당히 마셔도 차는 차니까.”

타쿠보쿠는 헤에, 하고 중얼거렸다. 순수한 감탄을 표할 생각이었는데 적당한 추임새로 들렸던 것인지 사서가 머쓱하게 웃었다.

“뭐, 예법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지만요.”

그런 사람들 말고, 너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데? …라고는 물을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관계가 아니었으므로…,그리고 이 차는 관계를 뒤집을 수 있을 만큼의 특별한 한 잔이 아니니까.

아아, 이렇게 할 말이 없는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아무래도 말이 잘 안 나온다. 전부 계절 탓이다. 손님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그보다는 역시 며칠 전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탓이겠지. 사실은 타쿠보쿠도 알고 있다. 잠서했다가 사고를 쳤던 그날의 일을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사과할 만한 일도 아니었고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왜 이렇게 생각나는 걸까. 고민하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별로 그럴 기분은 아니다. 생각하는 걸 관두고 차를 홀짝였다. 얼마 안 남은 봄의 향기가 부드럽게 흩어졌다.

사서도 왠지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건지 차를 입에 대지 않고 찻잔만 쥔 채로 시선이 어딘가 창문 너머의 먼 곳에 가 있었다. 뭔가 있나 싶어서 타쿠보쿠도 슬쩍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려 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잔디와 나무뿐이다. 뭐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이어지는 침묵에 눈치 아닌 눈치를 보다가 결국 타쿠보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고민이라도 있냐?”

“네?”

“아니, 아까부터 아무 말 없길래.”

“앗, 죄송해요. 그냥….”

지금까지의 침묵을 그제야 눈치챈 듯 사서가 머쓱한 듯 미소 지었다.

“…고민하고 있는 주제가 있긴 한데요.”

“주제?”

“개관 기념행사 있잖아요, 여름에. 그때 전시를 하나 할 예정이래요.”

행사와 관련된 대강의 이야기라면 타쿠보쿠도 알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이전 행사들의 반응이 꽤 좋았기에 계속해서 진행하기로 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어 올해는 일찌감치 준비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사서가 말을 이었다.

“「우리 인생 단 한 권의 책」이라는 주제로, 이용자들이나 직원들의 대답을 모아 보려고 해요. 좋아하는 책, 소중한 추억이 있는 책, 아니면 자기 자신과 닮은 책…. 뭐든 좋으니 인생에서의 단 한 권을 고르는 거죠.”

“테마가 붙으니 거창해지는구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냥 좋아하는 책 추천 코너일 뿐이잖아.”

“뭐, 그렇긴 하죠. 아무튼 저한테도 한 권 골라달라는 이야기가 들어와서요. 고민 중이에요.”

다소 시니컬한 대답에 사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손잡이를 무시하고 양손으로 찻잔을 감싼 채였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그녀가 운을 띄웠다. 그렇지만, 으로 시작하는 문장이었다.

“인생의 단 한 권이라고 하면 고민하게 되잖아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거예요. 단 한 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니까요.”

우리 인생 단 한 권의 책.

마음속으로 소리 내 읽고 나서야 단어의 무게가 좀 제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단 한 권. 좋아하는 책은 몇 권이고 있지만 아무래도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어려워진다. 확실히 고민할 만한 주제다.

“어렵죠?”

…그렇다고 지금부터 고민할 만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사서가 조금 기세등등해진 것 같아서 타쿠보쿠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대충 아무거나 쓰면 되잖아, 그런 거.”

“대충 하기 싫으니까 생각하고 있는 건데도요?”

“생각이 너무 많아, 너는.”

“이런 건 틈틈이 생각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힘들다구요.”

사서도 덩달아 입을 삐쭉 내밀었다. 쥐고 있던 찻잔은 어느새 테이블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조금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걸 정하는 거니까, 가능한 만큼 생각하고 싶어요.”

“…….”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네가 좋아하는 게 뭔지 이쪽은 짐작도 못 하고 있다고.

사서실이 잠깐 또 조용해졌다. 햇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를 통과하며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튀어나온 한 조각이 유리 주전자 안에 자리 잡아 반짝거린다. 문득 며칠 전의 대화가 떠오른다. 야구공이 푸른 하늘 위로 부웅 떴으므로, 봄의 맛이 나는 차를 다 마셨으므로, 이제는 정말로 여름이 와 버릴지도 모른다.

“더워지겠어.”

그렇게 중얼거리자 사서가 미소 지었다.

“오늘의 한 잔으로 봄이 끝나버렸으니까요.”

…독심술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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