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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투구의 여름이 온다

 

 

 

 

남은 적, 단 1체.

타쿠보쿠는 경계를 풀지 않고 그대로 잠복해 인기척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나 남은 침식자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군도…. 같이 잠서한 회파의 멤버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린 것은 계산 미스였다. 아마 지금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 적이건 이쪽이건 어느 한 쪽이 움직이면 곧 전투가 시작될 것이었다. 상대 쪽에서 새로운 침식자를 불러올지도 모르니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싸움이다. 가능한 한 빠르게 끝장을 봐야 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유인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이미 머릿속에는 어떤 작전이 떠올라 있었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먼저 미끼를 던져야 한다. 지금 여기에 멈춰있는 것은 공격을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가장 정확한 타이밍을 재고 있을 뿐이다. 태양이 내리쬐고 있는 책 속의 도시는 바람 소리 한 점 없는 고요를 유지하고 있었다. 타쿠보쿠는 그 고요함에 맞춰 잠시 숨을 죽였다. 그리고 곧, 텅 빈 문자의 거리로 뛰쳐나갔다.

숨어있던 침식자가 키익!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찢어진 종이뭉치 같은 녀석이 건물 옥상에서부터 타쿠보쿠의 머리 위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타쿠보쿠는 재빨리 방아쇠에 손을 걸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떨어지는 거대한 그림자를….

그 순간 타쿠보쿠는 생각했다.

아, 잠깐만. 이거 망한 것 같은데?

이거 이렇게 가까우면 안 되는데? 이거…. 망한 것 같은데! 젠장, 성공하는 쪽에 올인했는데 실패해 버렸나! 식은땀 같은 걸 흘릴 시간도 없이 머리를 굴렸지만, 지금 상황에서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 된 이상 한 번은 몸으로 받아내고 곧바로 반격을….

“타쿠보쿠!”

익숙한 목소리와 거의 동시에 총성이 들렸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침식자가 끼엑,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타쿠보쿠는 고개를 돌려 총성이 울린 쪽을 바라보았다. 하쿠슈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무래도 타쿠보쿠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여기까지 달려와 침식자를 공격한 것 같았다. 함께 잠서했던 다른 멤버들도 총성을 들었는지 저 멀리서부터 다들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타쿠보쿠는 하쿠슈에게 다가갔다. 하쿠슈는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는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쿠슈, 고맙… 악! 왜 때려!”

“맞을 짓을 했으니까!”

얻어맞은 등짝을 문지르며 타쿠보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뭐, 맞는 말이긴 해. 맞을 짓은 맞을 짓이었지. 침식자가 쓰러진 자리에 남아 있던 잉크 자국이 천천히 말라 글자가 되어 공중으로 기화하고 있었다.

타쿠보쿠는 그 광경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도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일이지. 어쨌든 아무 일 없이 정화 작업이 마무리되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냐?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타쿠보쿠 뿐이었으므로, 그는 도서관에 돌아와서 잠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내내 계속 하쿠슈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여기까지도 모두, 예상 범위 내의 일이었다.

*

봄이 거의 끝나간다. 찬 기운도 거의 사라져 한낮에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어도 전혀 쌀쌀하지 않았다. 걷어놓은 커튼 너머로 평화로운 정원의 풍경이 보였다. 그래도 아직은, 봄.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햇살을 눈에 가득 담으며 타쿠보쿠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들었어요. 터무니없는 짓을 했다면서요?”

타쿠보쿠가 제출한 보고서를 팔랑팔랑 넘겨보다가 사서가 툭 말을 던졌다.

“뭐야, 누구한테 들었어?”

“하쿠슈 선생님이요.”

“젠장, 하쿠슈 녀석―.”

좀 봐줘라, 잔소리는 이제 질렸다고. 어쨌든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타쿠보쿠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걸 또 들었는지 사서가 얼굴을 찌푸리며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것 같기도 한 어조로 엄하게 말했다.

“혼날 짓을 했으면 혼나야죠?”

“혼낼 거야?”

“…….”

“…….”

잠깐의 정적이 어색하다. 사서는 뭔가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 기회다 싶어 타쿠보쿠는 얼른 밝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었다. 그래도 사서 정도의 성격이면 주의 정도만 주고 끝날 것이다. 이 녀석은 좀 걱정이 많지만 나름대로 생각은 유연한 편이니까.

“뭐, 잘 끝났으니까 된 거잖아?”

“…잘 안 끝났으면요?”

하지만 맞받아치는 말이 예상외로 냉담해서, 타쿠보쿠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사서가 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정말로 위험했다구요. 잘못했으면 크게 다쳤을 거예요.”

“그렇지만―”

“일이 벌어진 뒤에는 그렇지만 같은 건 없어요.”

뭔가 늘어지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끈질기담. 잘못한 건 맞지만,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소 사서의 성격이나 행동을 보아오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의 이 반응은 더욱 의외였다.

그렇지만 더 파고들 만한 건 아니지. 우리는 그럴 정도는 아니잖아. 타쿠보쿠는 일부러 태평한 척을 하기로 했다.

“에이, 표정 풀어! 왜 이렇게 끈질겨. 지금 너, 빚쟁이보다도 더하다고.”

봐, 그러면 금방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오잖아. 방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눈썹을 여덟 팔 자로 내리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빚쟁이보다 끈질기다는 표현은 좀 심하지 않아요?”

“비유적 표현이지, 비유적 표현.”

“정말이지….”

그래, 이 공기. 이 정도의 가벼움이잖아. 타쿠보쿠는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무엇에 안심했는지는, 거기까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열되었던 대화가 천천히 제 온도를 찾아간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함. 결국 사서가 화제를 마무리했다.

“아무튼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마세요. 크게 다치면 곤란하니까!”

“네, 곤란한 일 안 만들겠습니다요. 그보다 검토 끝났으면 도장 좀 찍어 줘.”

“말은 잘해, 정말.”

잉크 패드에 꾹 누른 도장을 종이 위에 콩 찍으면서.

“아무튼 멀쩡해 보이니 다행이네요. 시간 있으면 이따가 일이나 도와주세요.”

“우와, 귀찮아.”

“500엔?”

“천 엔은 돼야 수지가 맞지 않겠냐?”

“원래 해야 할 일이잖아, 날강도.”

“누가 날강도냐, 조수 문호로 정당한 급료를 받으면서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추가 업무까지 시키면서.”

한 마디도 안 지는 모습에 결국 먼저 백기를 드는 것은 사서 쪽이다. 사서는 도장 잉크가 덜 마른 보고서를 타쿠보쿠에게 돌려주며 곤란한 듯 웃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제가 나중에 밥 사는 걸로.”

“현물 지급인가―”

“싫으면 말고요?”

“밥 사준다는데 싫다고 할 사람이 있냐. 좀 이따 올 테니까 준비나 해 둬.”

“네에―.”

타쿠보쿠는 그 잉크가 빨리 마르도록 보고서를 팔랑팔랑 흔들며,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걸 인사 대신으로 삼아 사서실을 나왔다. 곧 등 뒤에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따가는 부탁한 작업을 도우러 가야 하니까 점심이라도 미리 먹어둘까.

평일 오전 본관의 복도는 조용하기만 하다. 터벅거리는 타쿠보쿠의 발소리만 건물에 울려 퍼졌다. 날이 따뜻해서인지 저절로 하품이 나왔다. 아아, 평화롭다. 아까의 유애서 속에서의 싸움은 이미 머릿속을 떠난 지 오래다. 끝난 일을 기억 속에 잡아둘 생각도 없다. 침식자와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조금 무모한 승부를 걸긴 했지만 자신은 다치지 않았으며, 모두가 무사히 돌아왔다. 결과가 좋으면 어쨌든 됐지. 그렇게 생각하며 타쿠보쿠는 두 번째 하품을 한다.

음, 점심은 규메시牛めし로 할까….

그러다 문득, 조금 전의 사서의 표정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드물게도 냉담한 태도의, 화를 내던 모습…. 아니, 약간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건 대체 뭐였을까? 그 녀석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그야 뭐 걱정하는 마음이었겠지만, 그런 식으로 강하게 나오는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 정신을 차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복도에 우두커니 멈춰 서 있다. 달리듯 찾아오는 초록의 계절이 바람에 흔들리며 창문을 두드렸다.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던 해가 빠져나오며 일직선의 햇빛이 타쿠보쿠 쪽으로 내리쬐었다. 타쿠보쿠는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이마에 손 그늘을 만들었다.

정원에서 누군가가 캐치볼을 하고 있다. 공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이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아 그저 하늘에 붕 떠오르는 공만 볼 수 있었다. 야구공이 포물선을 그렸다가 글러브 안으로 들어가고, 또 이번에는 일직선으로 곧게 던져지는 것을 보며 타쿠보쿠는 중얼거렸다. 그런가, 곧 여름이구나.

“선생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면 서류 뭉치를 한가득 품에 안은 사서가 서 있다. 타쿠보쿠는 말을 거는 대신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아아, 캐치볼 하고 있구나.”

창가 쪽을 힐끗 쳐다본 사서가 중얼거렸다. 푸른 하늘에 공이 떴다가 떨어지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가 그걸 받아서 상대방에게 다시 던지는 것을 두 사람은 한동안 멍하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이어진 침묵을 깨고 사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름이네요.”

“야구?”

사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니까 여름이라니, 단순한 녀석.

그렇지만 계절이라는 것은 아주 사소한 계기 하나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것이므로 어쩌면 말 한마디로 당장 내일부터 여름이 시작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쩌면 새 계절을 생각하기에는 오늘이 제격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타쿠보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곧 오겠지.”

야구공이 다시 하늘에 부웅 떴다.

전력투구의, 여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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