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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

파트너란 아름답기만 한 관계는 아니거든.

코믹스 10권 정도의 시점.

"면담이다."

단호한 목소리. 소파에 방만하게 누워있던 남자는 빠르게 눈을 떴다. 자는 척이 허술했다.

눈을 뜬 남자의 시야에는 사무실 천장 대신 희멀건한 뭔가가 있었다. 초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들이밀어진 탓이었다. 사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남자는 미간을 잔뜩 좁혔다. 으레 말하는 것처럼 까만 것은 글씨, 하얀 것은 종이다. 흰 부분이 극히 적었지만 본질은 그랬다. 

검정 종이에 흰 글씨를 쓴 것이냐 물을 수 있을 정도로 알뜰하기 짝이 없는 쓰임새였다. 아무리 구두쇠여도 이렇게까지 종이를 아낄 수 없다. 또, 아무리 바쁜 사업가여도 이렇게까지 많은 일정을 적어둘 수는 없다. 수첩의 주인은 구두쇠도 사업가도 아니다. 하지만 사무실의 모든 사람은 그 '수첩'이 오늘도 올바르게 쓰였음을 알았다.

두 페이지에 걸쳐 빼곡하게 적힌 이틀 간의 일정. 남자는 보란듯이 눈을 좌우로 굴려가며 타인의 방대한 스케줄을 빠르게 습득해 나갔다. 그 와중 상대방의 손목시계에 시선을 둔 것은 아주 찰나였다. 반강제적으로 거행된 정보 탐색을 마친 남자가 입을 보란듯이 비죽였다. 

으에엥. 웬만한 성인 남성의 입에서 절대 나오지 않을 법한 소리가 났다.

"뭐가 '으에엥'이냐, 이 얼빠진 자식아. 오늘은 반드시 면담이니 그런 줄 알아!"

소파 옆에 서서 친히 수첩을 들고 있던 장신의 남자가 다른 손으로 안경을 치켜세웠다. 

"저기, 쿠니키다. 퇴근 5분 전에 면담을 하자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근로시간의 개념을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 네 꼴을 보고 근로시간의 개념을 들먹여라, 다자이!"

쿠니키다의 노성이 무장탐정사 사무실에 울렸지만 사무원들은 그쪽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방음벽이라도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일주일 째 반복되는 비슷한 광경에 이미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쿠니키다가 사무실 한복판에서 다자이에게 '면담'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꺼냈을 당시엔 난리가 났다.

봄날의 나른함으로 애써 포장해도 영 피곤함이 가시지 않는 월요일 오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또 바라도 모자랄 시간에 일어난 대사건이었다. 몇몇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대놓고 쳐다보고, 몇몇은 갑자기 바깥이 너무 시끄럽다며 창문을 닫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저 대화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모로 봐도 뻔한 결말이 보이는 일이었으나 월요일을 정통으로 맞이한 직장인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해프닝이었다. 

온갖 핑계를 대며 재주좋게 도망치는 다자이와 썩은 근성을 고쳐주겠다고 소리지르는 쿠니키다. 그것이 모두의 예상이었다. 그것이 무장 탐정사의 수많은 일상 중 하나니까. 그런데 다자이는 그 법칙을 순순히 깨버리고 쿠니키다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기폭제처럼 직원들의 무료함을 완전히 날려버린 순간. 

팡. 폭죽 터지는 소리.

직원들은 처음에 그 소리가 도파민으로 터져버린 본인 머릿속에서 난 소리인 줄 알았다고 했다.

'테이블에 올려 뒀던 쿠니키다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터졌다.' 소리가 난 지 얼마 안 돼 회의실 밖으로 나온 다자이가 전한 정보였다. 누구도 선뜻 다가갈 엄두를 못 냈다. 나오미는 고민도 없이 앞으로 나섰다. 

응. 우리 둘 다 다치진 않았어. 요즘 발열이 심하다고 했잖아. 그거 때문인가? 갑자기 뒷면이 볼록해지더니 펑하고 터지지 뭔가. 소화기로 끄긴 했는데 누가 뒤처리 좀 도와줘야 될 것 같아. 고맙네. 

말을 마친 다자이는 환하게 웃으면서 사라졌다.

그 후 다음 날, 다음의 다음 날, 다음의 다음의 다음 날. 그리고 오늘까지. 일주일하고도 하루 동안 쿠니키다의 면담 시도는 지난하게도 이어졌다. 그때마다 뭔가 깨지고, 부서지고, 날아들고, 해결했던 사건이 다시 재발했다며 의뢰가 돌아오는 기이한 일도 함께였다.

사실 첫날부터 모두가 진상을 알아차렸다. 이 정도면 모른 척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직원들의 관심사는 면담 진행 여부보다 다른 데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쿠니키다가 과연 이 인과 관계를 정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꿋꿋하게 다자이 오사무의 면담이자 본인이 추구하는 예정을 사수하는 중인지를 말이다. 

전자라면 다소 절망적인 눈치다. 후자의 경우? 그건 다른 의미로 절망적인 성격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의 의문은 바로 해소됐다.

"오늘은 또 무슨 어줍잖은 짓으로 도망치려고!"

"어, 글쎄. 슬슬 레파토리가 떨어져서 고민이긴 해…."

그제서야 쿠니키다를 불쌍한 눈초리로 힐끔거리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다시 감은 다음 턱에 손가락까지 올리고 고민하던 다자이가 갑자기 미적미적 몸을 일으켰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꺾는다.

"응? 쿠니키다 알고 있었어?"

"부정도 안 하는 건 무슨 정신머리냐! 그리고 이런 해괴망측한 짓을 저지를 놈이 너 말고 누가 있지?" 

다자이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칭찬 아니니까 그딴 웃음 집어치워!"

"아하. 그런데 말이야, 쿠니키다는 변태인가?"

무어라 소리치려던 쿠니키다의 얼굴 근육이 경련했다.

"그렇잖나? 쿠니키다가 나한테 집착하는 바람에 생긴 일들인데. 왜 그렇게 나랑 단 둘이 대화하고 싶어하지? 나랑 은밀히 그렇고 그런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나? 어차피 우린 파트너니까 사건 들어오는 족족 다 같이 나갔다 온 거 기억할 텐데. 둘이서 얘기할 시간이 차고도 넘쳤는데 말이지. 그리고 요 며칠 일어난 일들 때문에 우리 사원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걸 알면서도 자꾸 그랬단 말이지. 쿠니키다가 본인의 사소한 호기심 충족을 위해 타인의 불편함 쯤 아무렇지 않게 외면하는 인물일 줄은 몰랐네. 사람이 조금 덜 됐어. 응."

90% 정도 맞는 말로만 이루어진 헛소리였다. 욕만 안 했을 뿐이지 적나라한 폭언이다. 사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다자이는 툭하면 쿠니키다를 깔보곤 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비난한 적은 없었다. 

쿠니키다도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오로지 그만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이런 구과 쯤이야 다자이가 즐기는 유흥에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쌓은 솜씨인 듯했다. 사람을 흉볼 의도가 아니라 정말 괴롭힐 목적으로 내뱉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다자이가 최근에 비슷한 화법을 구사했던 적이 있긴 하다. 무장 탐정사의 앞이기도 했지만 포트 마피아를 앞에 두고 있던 때에. 그렇게 생각하니 어렵지 않게 또 하나의 기정사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군. 마피아였던 다자이는 누군가에게 이런 언사를 재미로 뱉어대는 놈이었군.

"뭐, 농담이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게."

어느새 사무실 밖으로 나간 다자이가 문 틈 사이로 몸을 반만 내놓고 있었다. 그럼 먼저 갑니다아. 수두룩이 들어본 익숙한 말투다. 가느다란 손이 위 아래로 크게 흔들리다 쏙 사라진다. 넋이 나간 사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남은 이의 눈치를 살폈다. 

쿠니키다는 별말 없이 손에 들린 수첩을 내려다 봤다.


봄이 온 것 같다가도 그늘 아래에 서면 아직도 겨울인가 싶은 날씨였다. 

한쪽 팔에 편의점 비닐 봉지를 끼운 다자이는 걷는 내내 요상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발걸음이 방정맞다. 퇴근은 정시에 해놓고 일부러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운 덕에 귀가가 늦었다. 그래도 해가 길어진 덕분에 골목에는 이제사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숙사로 가는 넓은 공터를 지나는 동안 부지런히 주머니를 뒤진다. 코트의 오른쪽 왼쪽 주머니, 바지의 오른쪽과 왼쪽 주머니, 가슴께의 안주머니까지 다 거치고 나서야 다자이는 방 열쇠를 손에 쥐었다. 

와아. 스스로 몸을 더듬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다자이는 갑자기 땅을 보며 소리 내어 감탄했다. 깨끗하게 손질된 구둣발 한 쌍과 지저분하고 구겨진 구둣발 한 쌍을 번갈아 본다. 느닷없이 진로를 방해한 이의 얼굴은 앞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피곤해 보였다. 상대를 확인한 다자이는 뒤로 두어 발짝 물러섰다. 그러더니 비닐 봉지를 소중하게 껴안고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낸다. 누가 봐도 과장된 몸짓이었다. 

"쿠니키다한테 줄 건 없어. 이건 내 술이야. 마시다 남은 우롱차라면 기꺼이 내주겠지만."

"놀라지도 않는군."

"어라. 아까 수첩 일부러 보여준 거 아니었어?"

쿠니키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자이도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눈에 들어온 현상과 상황을 일단 머릿속에 집어넣고 이해하는 것. 그것은 다자이의 특기다. 고래가 방대한 양의 바닷물을 집어삼키고 뱉어내는 자연 섭리처럼. 의식해서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의식해서 멈출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다자이는 여전히 비닐 봉지를 품에 안은 채로 쿠니키다를 지나쳐 걸었다. 쿠니키다는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여의치 않을 경우 가정 방문 면담'이라니. 대체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쿠니키다는?"

"스물 두 살이다."

"칫, 재미없어."

"이런 상황에서 재미를 따지는 너란 남자는 어떻게 된 정신머리냐!"

"내가 오늘 집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대답 대신 침묵이 돌아왔다. 지나치게 고지식해. 다자이는 크게 웃었다.

"그래도 수첩으로 날 꾀어낸 건 좋은 시도였어. 쿠니키다도 점점 발전하는 걸?"

"내가 써둔 시간에 맞춰 나타난 네가 할 말은 아니다만."

"손님을 밖에 오래 세워 두면 쓰나. 그리고 쿠니키다라면 분명히 그런 가정은 안 할 것 같았거든."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꽂은 다자이가 쿠니키다를 돌아본다. 사람의 눈을 보는 시선은 아니었다. 안경알에 반사되는 본인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오늘은 꼭 담판을 짓고 싶었잖아. 파트너라면 그런 것쯤 예상해야지."

"그런가. 그렇다면 네가 그렇게 예상할 것도 내 예정에 있었을 뿐이다."

찰칵.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 문고리를 잡은 다자이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대답은 제법 허를 찌르는 데가 있었다. 원래라면 여러 방법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겠지만 지금 다자이는 막 기분이 바뀐 참이었다.

"참…불쾌한 일이네. 역시 오늘 아침 목 매달기에 실패한 것부터 뭔가 잘못됐어. 들어오게."

얼마 안 가 둘은 작은 반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다자이의 앞엔 편의점에서 산 전통주 한 병과 한 뼘이 안 되는 높이의 술잔, 쿠니키다의 앞엔 그가 늘 가지고 다니는 수첩이 놓였다. 막 뚜껑을 딴 게 통조림과 다 말라 비틀어진 생선포가 그 사이를 채웠다. 

다자이는 허리를 최대한 숙여 술잔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눈금이라도 새길 태세다.

집 안에 쿠니키다를 들인 다자이는 갑자기 개인 생활을 보장하라는 말을 던지고는 다다미 위로 크게 드러누웠다. 숙소 문을 열기 전에 왠지 음습한 기운을 풍기더라니 이런 꾀를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체신머리 없이 징징거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퇴근 후 이런 시간을 갖는 것은 부당하다고 연신 주장했다. 아름다운 여성이 들어와도 모자랄 공간에 멀대처럼 거대한 남성을 들인 행동에 대한 자아비판도 이어졌다. 쿠니키다는 대부분 적당히 흘려들었다.

이웃에 피해가 가지 않을 선에서 적당한 고성과 육탄전이 오간 결과, 면담 시간은 다자이가 사온 술이 다 떨어질 때까지로 정해졌다. 대신 술을 마시는 속도는 전적으로 다자이의 선택에 따르기로 합의했다. 한 병을 단숨에 비우진 않겠지? 쿠니키다의 뒤늦은 물음에 다자이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못 할 것도 없지.

손가락을 접어가며 영문 모를 숫자를 세던 다자이가 허리를 세웠다.

"근데 면담은 어떻게 시작해?"

"일단 이 면담은 파트너이자 상사로서 네 이야기를 듣는 자리다."

"어? 벌써 시작한 거야? 잠깐 기다려."

다자이는 술잔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빠르게 비웠다. 막을 틈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움직임이다. 두 번째 잔이 금세 채워졌지만 들지는 않는다.

"흠, 그렇구나. '선배'란 말이지? 좋아. 그래서 선배는 이 후배의 무슨 고민을 들어주시려나. 아, 이게 아니지. 선배는 이 후배의 무엇이 궁금한지 내가 물어봐야 되나?"

선배. 간만에 들어보는 호칭이다. 

본인이 남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할 때 직급의 고저를 들먹이는 사람. 그게 다자이 오사무란 인간이다. 이 남자는 정말, 이 상황이 돼서도 어딘가 모자란 척 연기할 셈인가? 쿠니키다는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뭔가 묻기 전에 네가 먼저 할 말은."

"없어."

고민하는 찰나의 기색도 없다. 연기는 무슨, 그냥 아무 생각 없는 작자가 맞다. 쿠니키다는 상 밑에서 주먹을 쥐었다.

"진지하게 해라."

"잊었어? 난 항상 진지해. 그건 그렇고 오늘의 쿠니키다는 농담이 전혀 안 통하는군. 후배는 너무 슬픈 걸."

"뭔가 착각하나 본데, 네 농담은 입사 이래 나한테 통했던 적이 없다."

"후후. 그랬나? 그러면 이젠 진짜 중요한 얘기만 할게. 쿠니키다한테 말해줄 것도 생각났어."

결연한 표정이었다. 드디어 사안의 심각성을 알았나. 사람을 얼마나 안팎으로 고생시킬 참이냐. 그런 생각을 하며 쿠니키다는 안경을 고쳐 썼다. 다자이가 상 위로 몸을 넘기며 은밀하게 거리를 좁혔다. 반사적으로 귀를 갖다댔다. 다자이는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두위번거리더니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속삭였다.

"사실 휴가가 너무 부족해."

"다자이, 이 자식아!"

눈 깜짝할 새에 멱살이 잡힌 다자이는 버둥거렸다. 

"잠깐, 타임, 잠깐만! 왜 화내는 거야? 면담이라며? 고충을 말하는 자리잖아? 정말 곤란하단 말이야아."

"출근길에 강에 뛰어드는 짓부터 그만둬라!"

쿠니키다는 마구잡이로 양손을 흔들었다. 애초에 뭘 기대하면 안 됐다. 기대한 적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니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재수없는 녀석. 

아하하하. 다자이는 반동 때문에 목이 꺾이는 와중에도 즐겁게 웃었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그랬었지. 쿠니키다는 불현듯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자이와 관련된 자신의 추측, 의심, 상상 중 9할은 맞아떨어졌다. 그걸 입밖에 내지 않기로 결정한 건 쿠니키다 본인이다. 실없는 생각이거나 기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시덥지 않다 치부한 이도 자신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다자이였다. 지금도 같은 흐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손아귀 힘이 느슨해진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거리를 벌린 다자이는 두 번째 술잔을 들이켰다. 쿠니키다는 망연히 앉아 세 번째로 채워지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휴가 부족 말고는 지금 직장에 대체로 만족해. 더 할 얘기 없으면 선배 쪽 면담은 이제 끝내도 될까?"

"누구 마음대로. 아직 술이 남았다."

"그래, 그러니까 선배 대 후배 말고 파트너 면담으로 넘어가잔 뜻이야."

대체 무슨 차이가 있나 싶었지만 쿠니키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다자이가 흡족하게 웃는다. 사장실 문을 열고 나타났던 스무 살 다자이도 저렇게 웃었다. 그때는 단순히 수려한 외모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수라일 뿐이다.

"저기 쿠니키다. 그냥 바로 물어봐. 시간 낭비잖아?"

한정된 시간을 소중히 써야지. 다자이가 덧붙인 말엔 뼈가 있었다. 

몇 주 내내 바다 위를 표류하다 월척을 잡은 어부의 마음이 이러할까. 그럼에도 쿠니키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병을 높이 들어 남은 술 양을 재는 이 남자는 어떤 질문에도 곧이곧대로 답한 적이 없다. 속 긁는 소리를 하거나 능구렁이처럼 화제를 돌려버리기 일수다. 그물에 잡혔다는 것은 착각. 제발로 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 재미를 잃으면 어부도 잡아먹을 놈이다. 지난 2년간 수도 없이 당했기 때문에 알고 있다.

쿠니키다는 팔짱을 끼고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잡아먹히는 결말이라도 그 전에 맞부딪치는 시도라도 해야 했다.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지."

"뭐를? 어제 우즈마키에서 쿠니키다를 몰래 쳐다보며 관심 갖는 여자가 있었다는 거?"

쿠니키다는 다자이를 노려보았다. 이건 또 무슨 술수인가 헤아려본다. 몰래 쳐다봤다면 다자이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건너편에서 보내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마음에 걸린다. 분명 오늘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계속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쿠니키다는 본론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성 얘기는 다음에 다시 물어봐도 되는 사소한, 전혀 중요치 않은 주제다.

"네가 예전에 포트 마피아였다는 것 말이다."

다자이는 생긋 웃었다. 결국 그 단어를 이끌어냈다는 사실이 무척 만족스러워 보였다. 쿠니키다는 팔짱을 풀지 않고 그대로 주먹을 꽉 쥐었다.

"아아, 그거?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럼 그땐 왜 순순히 말한 거냐."

"부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장난 역시 다자이의 특기. 타인의 질문에 속 시원히 답변하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의문은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의문의 실타래를 잡고서 집요하게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자이가 만들어놓은 미로의 정중앙으로 들어가게 된다. 본래 가졌던 의문은 사라지고 미궁이라는 장애물이 생긴다. 상대의 탈출로가 되어줄 실을 불태울지 말지 고민하며 즐거워하는 역할은 다자이의 몫이다.

다자이는 술잔을 느리게 입으로 가져간 후, 내용물의 반을 남긴 상태로 내려놓았다.

"탐정사에 들어오기 전 내 행적은 깨끗해. 죄의 유무를 떠나서 백지, 공란이야. 아, 유감이지만 그건 내가 직접 손쓴 부분이 아니야. 그건 정말 나도 뭐가 뭔지."

다자이의 목을 향해 뻗어 있던 손이 원위치로 돌아갔다. 

"란포 씨가 날 처음 봤을 때 했던 질문은 기억하려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렸다고 대답했었지. 그때의 발자취가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니 내 답은 그게 최선이었어. 란포 씨야 당연히 진상을 꿰뚫어 봤겠지만."

다자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포트 마피아였다는 과거를 증명할 수 있는 건 나, 아니면 날 기억하면서 살아있는 이들의 말 뿐이야. 그 건물 앞에 자리 잡고선 여기 다자이 오사무 아는 사람? 하고 공개 인터뷰를 할 게 아니라면 마피아의 정보를 얻기란 힘들지. 탐정사에서 하는 전 직장 맞추기는 말 그대로 게임이었지? 나에 대한 수수께끼의 답을 내가 맞추는 건 규칙 위반이고."

"그래서 거짓말은 안 했다는 게 네 주장이군."

"흐음.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는데. 상황에 따라 말하지 않은 것, 상황을 보니 인정해야 될 것만 있었지. 공교롭게도 굳이 거짓말을 할 상황도 아니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참말만 하게 된 것 뿐이야."

이건 또 무슨 괴상한 말인가. 쿠니키다의 얼굴에 떠오른 의구심을 유심히 살펴보던 다자이는 남은 술을 입에다 털었다. 자세를 비스듬히 틀어 오른쪽 팔꿈치를 상 위에 두고 손바닥에 턱을 괸다. 옆을 흘겨본 다자이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을 말해줄까. 나는 쭉 거짓말쟁이로 살아왔어. 거짓말은 내 특기거든. 어쩌면 내 이름도 거짓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지?"

트집 잡을 기회는 주지 않겠다는 기세로 다자이가 말을 이어나갔다. 언젠가 보았던 서늘한 표정이다.

"오늘 내가 한 말은 다 거짓이라네. 방금 한 말도 거짓이야. 물론 이 말도."

다자이가 픽 웃었다.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쿠니키다에게 한 가지 질문. 거짓의 거짓은 참인가?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전부지. 기억은 쉽게 변질되지만 인식은 그렇게 잘 바뀌지 않아. 기억은 잘 쌓이지도 않지만 남은 찌꺼기는 추억이 되지. 하지만 인식은 쌓여봤자 편견이 되기 마련이야. 결국, 기존에 학습된 자극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자극이란 말씀."

"잠깐.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조르륵. 다시 술이 채워진다. 조금 넘쳐 상 위로 고인다. 그게 못마땅한 듯 '끙'하는 침음을 내뱉는 다자이는 평소와 같이 멍한 눈빛이다. 에구, 그새 취했나? 불안감이 엄습하는 혼잣말이었다.

"그러게? 무슨 말을 하다가 이렇게 됐더라? 아. 그런데 말이지이, 쿠니키다는 왜 번거롭게 '면담'이라는 명분을 들먹이면서까지 나한테 재차 사실을 묻고 싶었을까아? 앗, 방금 생각났어! 보통 면담하면 몰래 점수를 매겨서 위에 보고하지 않아? 저기, 쿠니키다, 우린 파트너니까 점수 잘 줄 거지?"

쿠니키다는 한숨을 쉬었다. 잔뜩 긴장돼 있던 어깨가 한껏 내려간다.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또 이 남자의 계략에 말려든 상태다. 항상 이런 식이다. 언제쯤 이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멍청하게 찌르는 정곡은 파괴력이 제법 크다. 차라리 아까처럼 진지한 면모라도 보였으면 이보다 덜 충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쿠니키다는 차마 드러낼 수 없는 패배감에 고요히 분노했다. 그 동안 다자이는 고개만 낮춰 잔 끝까지 찬 술을 흡입하려 하고 있었다. 호록. 남의 입술을 주먹으로 때리고 싶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다.

쿠니키다가 어설프게 쥐고 있던 주도권을 뺏어가진 못할 망정, 오히려 손에 단단히 쥐고 있으라고 단도리한 셈이다. 다른 누구에게 전가할 생각 말고 스스로 답을 내라는 명백한 의도를 담아서. 

부아가 치민다. 실은 쿠니키다도 알고 있었다. 다자이가 백 번, 천 번을 설명한다고 해서 곧이 곧대로 납득할 마음 따위 애초에 없었다. 자신은 그런 인간이니까. 스스로를 죽이지 못하는 인간을 어떻게 남이 죽이겠느냐 비웃었던 적이 있다. 말 그대로다. 티끌만한 이상도 펼치지 못하는 스스로를 하루에도 수백 번 불신하는 자가 어떻게 타인의 속을 쉬이 믿겠냔 말이다. 인정할 수 없음에도 윤리적 결과론을 따른다. 현실을 바꾸기 위한 이상을 실현하려면 우선 현실을 목도해야 한다. 현실을 뜯어 고치고 싶지만 현실을 버릴 수 없다. 

늘 그렇듯 시작은 부조리이며 끝은 모순이다. 오늘도 그랬으니 내일도 그럴 것이다.

"일단, 아둔한 네 녀석에게 줄 점수는 없다. 빵점이다."

입을 뾰족하게 모아 되도 않는 식으로 술을 빨아마시던 다자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본다. 그러고 보니 남의 눈을 찌르고 싶단 생각도 처음 해본다.

"포트 마피아였든 건달 나부랭이었든 네가 정신 나간 인간 쓰레기이자 나에게 온갖 민폐만 끼치는 썩을 자살 마니아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당장 오늘도 실 근무 시간을 안 채우고 농땡이만 피워댔지. 마음 같아서는 네 녀석을 손수 택배 박스에 넣어 포트 마피아에 반품하고 싶다. 적대 조직인 걸 떠나서 살아있는 유해 물질을 사회에 방출한 죄를 물을 수 있도록 시청에 관련 자치법안을 부의할 생각도 있다."

"에."

다자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항의의 뜻을 내비쳤다. 쿠니키다는 질렸다는 표정이다.

"콤비로 오래 활동했으니 허언이 아니란 것쯤 알겠지. 반으로 접혀서 포트 마피아에 재입사하자마자 사고사로 퇴사 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일은 똑바로 일하는 게 좋을 거다."

다소 과격한 표현이었으나 결국은 제대로 출근하란 말이었다.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흐음. 명쾌하네."

곰곰이 마지막 말을 곱씹던 다자이는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반대편에서 튀어나온 손이 더 빨랐다. 호쾌하게 목을 젖힌 쿠니키다는 빈 잔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제자리에 놓았다. 다자이는 툴툴거리며 잔을 다시 들었다.

"내 술 뺏어먹지 마."

병의 기울기를 보니 기껏해야 두 잔을 채울 정도만 남은 모양이었다. 방금 한 잔을 더 따랐으니 마지막 한 잔 분만 남았겠다. 마시고 보니 도수가 꽤 되는 것 같았다. 한 잔에도 더운 숨이 훅 나온다. 중간에 취했다는 다자이의 말은 진짜였겠지 싶다.

"네가 당췌 신뢰란 걸 아는 놈인지 의문이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다자이의 표정을 보고서야 쿠니키다는 그게 스스로 뱉은 말이란 걸 깨달았다.

"쿠니키다를 신뢰하냐는 뜻이지? 아아 그럼! 무지막지 신뢰해. 안 그러면 파트너 못 하지."

파트너란 아름답기만 한 관계는 아니거든. 그렇게 대답한 다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의 답변에 만족한 얼굴. 쿠니키다는 저 표정을 몇 번이나 봤다. 원하는 대로 화제를 주무를 때 짓는 미소다. 그대로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는 짚고 싶었다.

"그런가. 하지만 네가 말하는 신뢰는 그저 상대방을 잘 아는 것 뿐이란 생각이 든다."

다자이는 말없이 입술에 가져갔던 술잔을 도로 물렀다. 두 눈이 흥미로운 연구 대상을 발견한 것처럼 빛난다.

"오늘의 쿠니키다는 정말 이상하고 새롭네. 그러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게 맞는 것도 아니어서 하는 말이다."

아하. 잔을 놓은 다자이가 턱을 괴고 먼 곳을 응시했다. 지금까지 면담은 그럭저럭 즐거웠으나 이런 주제는 스물 두 살이나 먹고 나누기엔 조금 거북했다. 그렇다고 더 어린 시절에 누군가와 나눴어야 할 대화인가 하면 그건 생각만으로도 조금, 아니 많이 불쾌했다.

다자이가 쿠니키다의 앞으로 술잔을 밀었다.

"뭐, 그 정도로 쿠니키다에 대해 잘 안다는 뜻이라 해 두자고."

"흥. 남의 수첩 좀 훔쳐봤다고 유세 떨지 마라."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쿠니키다가 잔을 비우는 동안 다자이는 눈물을 훔쳐가며 크게 웃었다. 하숙집에 폐를 끼쳐선 안 된다고 일갈한 쿠니키다가 상 밑으로 발을 뻗었다. 꼭 필요 없을 때만 날쌘 다자이는 발차기를 피했다. 

남은 마지막 한 잔의 술은 다자이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알겠나. 내일은 무조건 정시 출근이다."

"네에, 네에."

"대답은 한 번만 해라!"

시끄럽게 굴지 말라더니 자기가 더 시끄러운데. 벽에 기댄 다자이가 투덜거렸다. 바로 나갈 줄 알았더니 신발끈을 고쳐 매야겠다며 현관 끝에 주저앉은 직장 동료 때문이다. 허공에 손을 휘둘러 자꾸 맥없이 꺼지는 센서 등을 두 번째로 켜준 참이었다. 쿠니키다의 등을 물끄러미 보던 다자이는 어렵게 입을 뗐다. 

"쿠니키다는 내가 내일 갑자기 사라지면 어떻게 할래?"

쿠니키다가 고개를 돌린다. 또 시작이냐고 눈으로 욕을 한다. 

"그냥. 궁금해서."

매듭을 단단히 묶은 쿠니키다가 일어섰다. 다자이보다 조금 큰 키. 전깃불 바로 아래에 선 탓인지 얼굴에 명암이 확실하게 졌다.

"사직서는 대면으로 직접 제출하는 게 원칙이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지만 따로 내색하진 않았다. 

"아날로그인가…별로네."

"사직서를 내는 건 네 마음이지만 똑바로 출근해라."

"네에."

다자이가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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