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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전부 그 자리에 두었다. 봉분이라도 되는 양.

차에서 내리자 사방에서 메마른 가을 바람이 불었다. 가벼운 소재의 검정 코트와 진한 회색 맨투맨, 블랙진 차림의 젊은 남자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이 내린 좌측 운전석 문을 닫은 다음, 바로 뒷좌석의 문을 열고 머리를 숙여 차 안으로 상체를 반쯤 밀어넣었다. 잠시 후, 두 발짝 정도 뒤로 걸어 나와 여유 공간을 확보한 그가 다시 몸을 곧게 세운다. 양손 가득 들린 것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종이가방이다. 굵은 끈으로 된 손잡이를 고쳐 잡는 모양새만 봐도 각각의 봉투 안에 상당히 많은 물건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유롭지 않은 두 손 대신 팔꿈치로 문을 밀어 닫은 남자는 잠시 그대로 멈춰 서서는 때 아닌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놓쳤다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오른손에 든 가방들을 땅에 내려놓았다. 행여나 쓰러질세라 정강이로 무게를 받친 채, 빈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서 꺼낸 것은 차 키다. 헤드라이트가 두 번 짧게 깜박이면서 자물쇠 걸리는 소리가 난다. 손잡이를 당겨 차가 잘 잠긴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남자는 짐을 챙겼다. 새로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차여서 애지중지하는 것이 보였다.

야외 주차장 인근의 횡단보도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제 막 출입구에 설치된 차단봉 옆을 지난 참이었기에 신호에 맞춰 건너려면 가볍게 뛸 수밖에 없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액체가 출렁거리는 소리, 비닐, 종이가 서로 스치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 번에 났다.

그로부터 삼 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위치한 공동 묘지가 오늘 그의 첫 번째 목적지다. 

오늘처럼 주말에 오면 가족묘에 헌화를 하고 있는 주민 서넛 쯤은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이다. 평소 방문하던 때와 다르게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지금은 사람이 아예 없었다. 크고 작은 묘비들이 빽빽하게 모여있는 구역을 빠르게 지나쳐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구역으로 나아간다. 늘 그래 왔듯이 똑같이 생긴 다섯 개의 묘석이 나란히 자리한 곳 앞에 서서 짐을 내려놓았다. 맨손으로 비 위에 떨어진 낙엽 몇 개를 훌훌 털어버린다.

아직 짐을 풀 수가 없었다. 대신 걸어온 길을 거슬러 영원(靈園)의 입구까지 돌아가야 했다. 짐을 한가득 들고 있는 바람에 수통과 국자를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옆 수도에서 물을 받아 묘역을 빙 둘러가는 걸음은 언제나 조금 차분한 편이다.

평소 사람을 써서 꾸준히 관리한 덕분에 더러워진 곳은 크게 없었다. 그래도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묘의 모서리나 구석 부분에는 마른 풀이며 작게 조각난 나뭇잎들이 덩어리로 엉켜 있었다. 그는 짐 가방 중 하나를 뒤져 손바닥만한 크기의 빗자루를 꺼내 자질구레한 것들을 모두 쓸어냈다.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될 깨끗한 부분이 더 많은데도, 손대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마뜩찮아 결국은 다 쓸게 된다. 혼자만 아는 습관이고 과정이다. 그렇게 네 번을 똑같이 더 쓸고 닦는다. 마지막으로 나무통에 담긴 물을 떠서 끼얹는다. 칙칙하고 매끄러운 돌 표면을 타고 물이 흘러내린다.

청소를 마친 다음, 남자는 들고 온 가방을 열고 분주히 움직였다. 이번에는 선향 다섯 다발, 시내에 위치한 유명한 디저트 가게의 로고가 찍힌 포장 박스 다섯 개, 잘 손질된 생화 다섯 묶음이 차례로 나온다. 좌우로 오고 가며 향과 꽃, 간식을 각각 정해진 자리에 둔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이번에도 음식을 고르는 데 제일 긴 시간을 할애했다. 술이나 담배, 식사는 여러번 같이 했어도 이런 것은 여섯 명이서 같이 먹어본 적이 없었다. 공물은 되도록이면 각자의 입맛을 반영하는 것이 좋다고 하던데 어림짐작을 하려 해도 도무지 다섯 명이나 되는 소년들의 디저트 취향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계절 한정이라고 추천 받은 메뉴 중 제일 본인 취향인 조각 케이크로 골랐다. 그 나이 먹도록 여전히 자기 우선적이고, 거만한 태도라고 힐난하는 앳된 목소리들은 이미 오는 길에 몇 번이나 상상했다. 

사다 주면 고맙게 받기나 해라.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지고 있던 라이터를 꺼내 향에 불을 붙이고  곧바로 숨을 불어 죽였다. 다섯 군데서 일제히 피어오르는 향 연기를 보고 있자면 꼭 담배가 고파지곤 했다. 지금보다 어렸을 시절에, 성묘 후 머리카락부터 몸과 손, 발 곳곳까지 죄 녹아든 향 냄새를 가린답시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연쇄 작용이긴 하다. 본인이 맡는 향 냄새가 싫어서가 아니라 남이 맡게 될 향 냄새가 불길해서 그랬다. 그거 맡고 재수 옴 붙어서 죽어버릴까 하는 노파심에. 남자는 그거야말로 어린 놈이 할 법한 사고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터무니없는 나이였을 때부터 타인의 죽음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는 행위에 빗대도 주변에서 다들 공감할 법한 정도의 일.

정가운데 자리를 잡고 쪼그려앉은 남자는 손바닥을 마주 보도록 합쳤다. 원래 왔어야 할 날보다 한 달 정도 늦게 온 것이라 전할 말이 꽤 쌓여 있었다. 그래봤자 근황 얘기가 전부다. 해외 출장을 다녀왔을 뿐인데 느닷없이 갑절로 늘어난 일을 처리하느라 늦었다고, 너희들의 가족은 다 잘 지내고 있다 들었다고, 자신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앞으로 당분간은 바빠서 예전만큼 자주 못 올지 모르겠다고, 그래도 상황이 정리되면 종종 올 테니 지금처럼 얌전히들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렇게 과거의 친우들에게 고했다.

남자가 자리를 살피고 다시 짐을 챙겨 돌아설 때엔 바람이 한 번 더 세게 불었다.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가지 않게 한손으로 붙잡은 채, 가려던 걸음을 멈춘 그는 제일 가까이에 있던 비석 위를 가볍게 두어번 두드렸다. 어, 그래, 형님 간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다. 죽은 사람에게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남자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두 번째 도착지를 눈앞에 두고서 남자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못한 것이 맞다. 경찰 제복과 빳빳한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 서넛이 그의 목적지에 먼저 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도무지 금방 떠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놓인 가방을 힐끔 쳐다봤다. 하는 수 없었다. 마주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남자가 저들의 동료를 성묘하러 왔다는 껄끄러운 목격담을 만들게 되면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여전히 인기인이네, 형사 나리. 혼잣말을 한 남자는 미련없이 차를 돌렸다. 


트인 바다에서 불어오는 무거운 소금 바람과 빽빽한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이 섞인다. 

남자가 세 번째로 방문한 묘지는 앞서 들린 두 군데에 비하면 황량하기 그지 없다. 인가에서 떨어진 절벽에 위치한 덕에 시간이나 날씨와 상관없이 언제나 사람이 없는 곳이다. 다른 묘석들처럼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한 묘비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남자는 남은 샛길을 올랐다. 돌이켜 보면 좋은 표정으로 여길 찾았던 적이 거의 없다.

새하얗던 돌은 지난 시간을 대변하듯 다소 색이 혼탁해졌을 뿐 아니라 모서리가 군데군데 깎여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써서 관리하긴 하지만 바닷바람을 직통으로 받는 위치이다 보니 풍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올 때마다 어째 더 낡는 것 같다.”

이번에는 손이 비교적 가볍다. 아무렇게나 박혀 있는 것이 다인 허름한 공동 묘지인데다 이름조차 새겨지지 않은 묘비들이 태반이다. 향을 피울 곳도, 정수를 떠다 놓을 곳도 없으니 뭘 가져와도 쓸모가 없다. 묘 앞에 놓아둘 수 있는 것이라고는 꽃이 전부다. 두 다발을 챙겼다. 하나는 본인의 몫이고 하나는 그 못지 않게 가까운 다른 이의 몫이다. 

스스로를 유폐한 이는 여전히 두문불출이다. 그래도 남자는 아주 가끔,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을 수준의 간격을 두고 그를 찾곤 했다. 대화를 하기 보다는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상호 독백에 가까웠는데,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조만간 성묘를 하러 갈 것인데 무슨 꽃이 좋겠냐 물었더니 별 말이 없길래 알아서 사겠다 일렀다. 그 다음 날, 남자는 인편으로 열매, 꽃, 잎사귀, 나뭇가지 등을 한 데 모은 초록 다발을 준비해달라는 요청을 전해 받았다. 조금 특이하다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그 말에 따라 준비했다.

간소하기 짝이 없는 헌화를 마치고서, 그는 묘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예전에는 남의 묘석에 걸터앉곤 했는데 이 나이가 돼서도 똑같이 하기는 싫었다. 

그는 여지껏 참았던 담배를 꺼냈다. 선향 대신이야. 무덤 주인을 향한 변명이자 스스로를 위한 합리화를 했다. 

오래, 오래 시간을 들여 피웠다. 가느다란 담배 연기가 굽이쳐 솟아오른다.

다음에는 와야 할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혼자만의 기약 없는 약속을 내뱉은 후에 남자는 묘비로부터 등을 돌렸다. 

죽은 사람은 변명도, 약속도 필요치 않다. 다 산 사람이 안고 가는 것이다.

네 번째 목적지로 떠나기 전, 그는 차체에 기대서서 담배를 한 대 더 피웠다. 

이번에는 앞으로 닥쳐올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용도였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폐기장이었다. 수송용 컨테이너와 쓰레기, 유해 물질이 늪처럼 고여 있는 불법 투기장. 어디를 보나 비슷한, 암울한 풍경이다. 산처럼 포개진 철제 컨테이너 사이에 서있자면 마치 미로에 들어와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땅이다.

행여 음습한 기운이 옮기라도 할까 차는 될 수 있는 한 먼 곳에 세웠다. 마치 관처럼 길쭉한 나무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하염없이 걸었다. 그가 이곳을 제 발로 찾아온 것은 두 번째다. 암흑이 미궁처럼 펼쳐진 곳이지만 남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잘 알았다. 아무것도 없는 중심부가 그의 최종 도착지다. 큰 직사각형 모양으로 땅이 파인 흔적만이 전부인 곳.

그 자리에는 대형 컨테이너 하나가 있었다. 남자는 집터처럼 남은 네 모서리를 보며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회상한다. 집은 아니지만 거주지였다. 그것도 엄연히 사람이 머물렀던 장소다. 컨테이너 안에는 나름의 세간살이도 있었다. 누군가가 보면 사람이 이것만으로도 살 수 있는 것인가 물을 법한 물건들 뿐이라는 게 문제긴 했지만 그런 데서 살 수야 있긴 했다. 의식주 중에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최소한의 기능을 하는 공간이었고 실례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예가 사람다운가 묻는다면, 남자는 그것만큼은 결단코 아니라 얘기할 수 있었다.

약 두 달 전, 출장에서 돌아온 남자를 맞이한 것은 파트너라는 관계의 소실, 그리고 해외 조직과의 항쟁으로 남은 터무니없는 양의 업무였다. 첫 번째 소식이 너무나 기뻤던 나머지 아끼던 최고급 와인으로 축배도 들었다.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그 이후에는 줄줄이 기가 막힌 일들만 터졌다. 

우선, 말 그대로 타고 다니던 자동차가 폭발, 터졌다. 누가 범인인지 진상을 알아냈어야 했는데 이미 벌어져 수습할 수 없는 사건에 할애할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이 했어야 할 일을 혼자 하려니 정신이 없었다.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을 끝내고 나면 다음에는 원래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고, 원래 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나면 더 이상 미룰 수밖에 없는 일들이 남아있는 식이었다. 

모든 상황과 감정은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어딘가 불합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상황에 대해 분노, 원망, 억울함, 증오, 당황, 허무, 불쾌함 같은 뭔가가 떠오르긴 했어도 그걸 느낄 새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그에 앞서 책임져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고 그것을 다 처리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고 싶었던 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냉정하게 따져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

원흉은 사라졌다.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지워졌다. 그 누구도 떠난 존재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기억이 사라지는 이능의 영향이라도 미쳤나 싶어 말을 꺼냈다가, 그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홀로 자괴감에 빠진 날도 있었다. 어디서 죽은 것이라는 추측을 들었을 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와서 주변인들을 놀라게 만든 날도 있었다.

죽긴 누가 죽었다고. 또 같지도 않은 허울만 내세우면서 어디에 빌붙어 있겠지.

살고 싶다는 이유로 들어왔던 조직을 나갔으니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은 것인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진짜 죽으러 갔는가 싶기도 했다. 무슨 말이라도 들었다면 좋든 싫든 단번에 알았을 텐데 그런 게 없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남들처럼 추측하는 일 뿐이었다. 나중에는 추정하는 데 쓰는 상념도 아까웠다. 그 칠칠치 못한 놈이 죽으려 하든 진짜 죽었든지 간에 이제 그건 몰라도 되는 일에 속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어디가 됐든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면 노기가 차올랐다. 없어진 놈을 찾는 데에 허비할 정성 같은 것은 없었다. 굳이 찾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정착했고, 다른 이는 늘 그랬듯 방랑 중이었다. 뿌리 내리지 못하고 쉼없이 달리는 이를 좇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었다.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했던 지난 사 년보다 앞으로 함께 하지 않아도 될 날이 더 길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면 또 자연스레 화가 풀렸다. 

사실 당당히 화풀이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져서 더 이상 화내봤자 소용도 없었다. 

솔직히 그건 조금 아깝다고, 남자는 생각헀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일처리에 몰두한 끝에 눈에 띄게 업무가 줄어들 쯤이었다. 배신자가 남기고 간 물건의 처리를 맡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소지물을 토대로 행방을 찾아내 법도대로 처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남긴 것 자체가 없었다. 애초에 녀석은 무엇 하나 가진 것이 없었는데 뭘 남긴단 말인가. 

하지만, 주어진 일은 어디까지나 일이었고 그는 중간 관리자였기에 위와 아래에 보일 만한 결과를 만들어야 했다. 결국은 폐기장의 컨테이너를 찾아갔다. 살아있다는 구색을 갖추기 위해 마련했던 용도이니, 탈피한 허물 정도로 보면 남긴 것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었다.

당연히 소재 파악에 도움되는 물건은 없었다. 그는 보란듯이 컨테이너를 통째로 태웠다. 죄다 쇠로 만들어진 주제에 기름 좀 부었다고 어찌나 잘 타던지. 불티를 뿜어대던 불덩어리는 너무 크고 화려해서 성대한 장례식 같기도 했으며, 동시에 뭔가를 기리는 축제 같기도 했다.

종국에 남은 것은 타다 남은 철골과 재, 그리고 컨테이너의 무게로 인해 터처럼 남아버린 흔적이었다. 

전부 그 자리에 두었다. 봉분이라도 되는 양.

남자는 들고 있던 상자의 뚜껑을 열어 그 안에서 값비싼 술을 꺼냈다. 향이 일품이라며 샵 주인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브랜드였다. 진위를 확인하고 싶어져 병 입구에 코를 대봤다. 지독한 냄새에 잔기침이 나왔다. 다시는 그 주류 가게에 갈 일도, 취향에 맞지 않는 이런 곡주를 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병목을 잡은 손을 거꾸로 돌려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그토록 하고 싶었던 속말도 잊지 않았다.


볼일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가는 길마다 족족 신호에 걸렸다. 엄한 데 다녀와서 재수가 없는 것이라 여겼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산길을 따라 난 도로였다. 멀리 보이는 바다 위로는 썩 멋들어진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는 창문을 내리고 팔을 걸쳤다. 신호가 바뀌려면 시간이 조금 있었기에 오랜만에 항구도시의 석양을 만끽했다. 

황금빛 바다에서 시작해 주변으로 시선을 옮기던 그는 차도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묘지를 발견했다. 무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는데 묘비들이 너무 작아 차에서는 들판에 흰 점이 알알이 박혀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거기도 성묘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와중에 손에는 흰 꽃을 들고 있어 제법 눈에 띄었다. 우두커니 서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꼭 그곳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녹색불이 켜졌다. 그새를 기다리지 못한 뒷차가 살짝 경적을 울렸고 남자는 멀디 먼 타자의 죽음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 베를렌이 츄야에게 부탁한 "열매, 꽃, 잎사귀, 나뭇가지"는 뮤지컬 랭보의 넘버 <초록> 가사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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