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열

청명이설

연모지정 by 하설류
22
0
0

몸뚱이를 헤집는 십수개의 자상은 고열을 동반한다.


침상 밖으로 툭 늘어진 희고 가는 손이 보였다. 면 이불 아래 누운 이에게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침상 하나, 작은 탁자 하나, 그보다 작은 의자 하나. 단출한 가구로도 꽉 채워지 작은 방 안이 갑갑한 열기로 가득했다. 이불 아래 감추어진 가슴께가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것을 본 청명의 눈이 어둡게 잠겼다. 문지방을 넘어 들어서는 걸음이 무겁다. 그의 뒤로, 나무 문이 마찰을 내며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뭐 이리 심하게 앓고 그래.”

네 짝의 나무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침상 곁에 다가앉은 청명이 늘어진 흰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닿아오는 살결의 온도는 그가 익히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여자 손이 이렇게 뜨거운 건 처음이네. 아니 두 번째인가. 저 가느다란 손의 흰 살이 온통 터져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기겁하며 부여잡았을 적에 딱 이랬던 것 같은데. 그때도, 지금도. 데일 듯한 열기로 흰 피부를 온통 휘감고 있는 주제에, 손끝은 곧 죽을 사람처럼 차가워서는. 잡아주는 사람 속을 이렇게 뒤집고. 짓씹은 입술에서 아릿한 통증이 솟았다.

창백한 하얀 이마 위에 검은 머리칼이 먹을 풀어낸 듯 흘러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청명은 무엇도 쥐지 않은 손을 들어 늘어진 머리칼을 한올 한올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손길이 다정했다. 동그란 이마를 몇 번 손끝으로 쓸어냈을 뿐인데, 솟아오른 열기가 손바닥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뜨겁다. 지독히도 뜨거웠다. 손안에 맴도는 열기가 유이설이 겪고 있는 고열의 고통을 그대로 전하는 듯했다.

이러니 의식이 없지. 굳게 닫혀 있던 청명의 입 새로 낮은 한숨이 비집고 새어 나왔다. 청명은 이 고통을 알았다.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맞이한 몸의 발악. 불현듯 찾아와 온 정신을 다 태워 먹고 사라지는 열기. 숱한 전쟁 속에서, 그것은 종종 청명의 정신력을 저 절벽 끝까지 던져놓고 사라지곤 했다.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는 고통일 터였다. 

분명 그럴 텐데, 이 여자는 왜 무의식중에서도 그 흔한 고통 섞인 신음성 한번 내뱉지 않는지. 고열을 앓고 있는 것은 그녀인데 어쩐지 제 속이 더 불이 붙은 듯 뜨겁고, 아프고. 그는 얇은 손을 부러 강하게 틀어쥐었다. 시원하리만치 맑은 내력이 맞잡은 손을 타고 들불처럼 타오르는 유이설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작은 몸 안을 헤집던 열기가 발작하듯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가느랗게 새어 나오던 숨소리에 동요가 일었다. 긴 속눈썹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워…"

“사고?”

일그러지는 예쁜 미간을 엄지로 살살 눌러 펴내던 청명이 움찔 몸을 굳혔다. 고개가 조급하게 숙여졌다. 안 그래도 하얀 낯, 더욱 창백하게 굳히고 누운 여인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버석하게 마른 선홍빛 입술이 힘겹게 달싹이고 있었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작았다.

“...추워...”

청명의 눈이 가느스름하니 접혀 들어갔다. 그제서야, 희고 가는 손이 그보다 크고 두터운 손안에서 속절없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기를 받아들인 신체의 말단은 식어 가는데, 떨리는 눈꺼풀 위의 열기는 전보다 심해지고 있었다.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희고 고운 손을 손아귀에서 놓아준 청명이, 여인의 위를 덮은 면이불을 망설임 없이 들춰내었다. 천 자락을 틀어쥔 손에 투둑 핏줄이 돋아 올랐다. 흰 몸에, 그보다 희지 못한 붕대들이 빼곡히 감겨 있었다. 가쁘게 달싹이는 가슴께에 감긴 것이 조금 붉었다. 감춰져 있던 흰 팔뚝에 감긴 것도, 왼쪽 허리께를 감싼 것도.

이러니 그렇게 앓지. 짧게 혀를 찬 청명이 제 허리께를 묶은 끈을 틀어쥐었다. 뜯어내듯 풀어낸 끈을 아무렇게나 툭 던져내고, 조급하게 도복 자락을 젖혔다. 투둑, 나무 바닥 위로 떨어진 상의를 발끝으로 대충 밀어 치우고 지체 없이 몸을 숙인다. 침상 위에 한쪽 무릎을 대고 상체를 굽힌 청명이 밭은 숨을 내뱉기 시작한 여인의 낯을 고요히 마주했다.

“...흑심은 없어, 사고."

실소가 흘렀다. 대답을 해줄 이의 의식은 저 먼 곳에 가 있거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도, 내 품도, 내 온기도. 그는 들춰낸 이불 아래로 들어가, 여인의 곁에 몸을 뉘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아래의 목침을 꺼내어 제 쪽으로 둔 청명이 얇은 목 아래로 제 팔을 집어넣어 무력하게 늘어지는 고개를 받쳤다. 반듯이 누운 하얀 어깨를 잡아당겨 모로 뉘이고, 작은 몸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단단한 팔을 베고 누운 창백한 흰 뺨에서는 여전히도 들끓는 열기가 느껴졌다. 제 것도 아닌 여인의 열 한번 식혀 보겠다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먹 같은 머리칼이 팔뚝에 휘감기는 것이, 퍽 간지러웠다.

거슬한 붕대의 감촉이 신경을 긁었다. 어깨를 당겨 안은 손에도, 허리를 감싸 쥔 손에도, 손안에 닿는 것이 그저 온통 거슬했다. 맞닿은 가슴팍도 그저 거슬한 것이, 뭘 이리 온 데를 다 다쳐왔는지. 아주 온 사방 칼은 자기가 다 끌어다 맞은 것 같네. 울컥 울화가 치밀었다. 제가 없을 때 목숨 걸고 무리하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이 여자는 도통 들어먹는 기색조차 보이지를 않고. 불덩이처럼 치솟는 감정을 목구멍 아래로 꾹꾹 눌러 삼킨 청명이 나직이 숨을 뱉었다. 그 방식을 누구에게서 배운 것인지 알기에.

늘어진 다리를 단단히 얽어 고정했다. 얇은 어깨와 허리를 감싸 안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몸을 구기듯 접어낸 그가 거슬한 천 없이 드러난 흰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흰 살갗 위에 가만 입술을 묻었다가, 여린 살결을 감쳐물었다. 달큰한 살 내음과 뜨거운 열기가 입 안을 가득 메웠다. 그는 숨을 들이쉬고, 그것을 온통 삼켰다. 심방으로, 달큼한 열기가 들어찼다. 이내 붉게 달아오른 살결을 놓아준 그가, 흰 목께에 날렵한 콧대를 뭉개듯 비볐다. 틈 없이 당겨 안은 하얀 몸이 바르작 움츠러들었다.

날 새겠네 이러다가. 청명의 입 새에서 다시금 실소가 터져 나왔다. 목적을 잊지 말아야지. 감쳐문 살결이 아무리 달다 해도. 매화 색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깨와 허리를 틀어쥔 양손에서 맑은 진기가 흘러나왔다. 품 안에 담은 여인의 몸속에서 열기가 발작하듯 요동친다. 추워... 추워... 머리 위에서 끓어질 듯 가느라한 음성이 들렸다. 춥다는 어절만을 반복적으로 늘어놓는 입 새에서 작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청명은 파르르 떨리는 목께에 달래듯 연거푸 입술을 내렸다.

“그래서 안아주고 있잖아. 언제는 내 몸이 따뜻한 게 좋다더니.”

막상 춥다 춥다 노래를 부를 때는 안 찾고. 사람 서운하게. 새가 모이를 쪼듯 콕콕 내려지던 입맞춤이 진득이 무게를 실었다. 꾹꾹 짓누르듯 입을 맞추다, 이내 이를 내어 살결을 베어 문다. 잠결에도 움찔 몸을 움츠리는 움직임에 오기가 일었다. 내력을 불어넣던 손이 느릿하게 등을 감싸고, 천 조각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난 살갗을 쓸어내렸다. 

그러면, 무력하게 늘어져 있던 흰 손이 더듬더듬 그의 팔을 잡아 쥔다. 떨리는 손끝이 다시 툭 그의 뒤로 떨어졌다가도 다시금 팔로, 어깨로 타고 올라 힘없이 큰 품을 마주 안는다. 큰 몸을 있는대로 접어 그녀의 품에 안겨 들어간 모양새에, 그제야 청명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진다. 그래 이래야지. 누구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지금.

그는 작은 몸 안을 요동치던 불길의 발작이 멎어 들었음을 알았다. 불어넣어진 기운이 저 몸을 한 바퀴 돌아 열기를 식히고, 다시 제 손끝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춥다 춥다 노래를 부르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뱉어지는 숨이 가늘고, 고요했다. 맞닿은 살결이 조금은 차가웠다. 이제 좀 사고 몸 같네. 적당히 서늘하고. 적당히 따뜻하고. 나는 뜨겁고. 춥다 할 때는 품에 안지도 않으려 들더니, 이젠 또 감은 팔을 풀어낼 생각이 없고. 하여간.

청명은 그저, 묻어둔 고개를 들어 올려, 여인의 얇은 턱선에 연거푸 입을 맞춘다. 고열에 시달리던 이는 이제 식어 편히 숨을 쉬는데, 왜 앓지도 않은 내 숨은 아직도 열기를 머금고 이리 허덕이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아직 일어나기엔 멀었지. 열이 내렸으니 이제 좀 푹 자겠지. 그때까지만, 깨기 전까지만. 목구멍을 틀어막은 이 불덩이가 가라앉을 때까지만. 

그는 다시금 흰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익숙한 온기를 그저 안고, 또 안았다. 눈을 감았다.

긴 인내가 남았음을, 알았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