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조걸윤종_혼인

썰과 연성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무언가... 사망소재 주의해주세요.

테라리움 by 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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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이 전쟁이 끝나고 화산으로 돌아가면 저와 혼인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비교적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또 대비해왔던 마교와의 전쟁이 결국 확실하게 실체를 가지고 눈앞에 다가왔을 때였다. 그래도 아직은 웃을 수 있고 아직은 시답잖은 농을 주고받으며 장난을 칠 수 있었던 때. 그래야만 했던 때. 공포에 짓눌리지 않으려 부러 쾌활히 웃는 이들이 곳곳에 있었고, 그건 저와 그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검을 닦던 윤종은 슬쩍 고개를 들어 조걸을 바라보았다가 픽 웃으며 다시 시선을 내렸다.

지금 하자 하지 않고.

아시잖습니까 사형.

무엇을 말이냐.

아니 지금 하면 재미가 없잖습니까. 제대로 식도 열지 못할 테고요. 그 화산의 윤종과, 아 아니 이건 기사멸조가 아니잖습니까, 악! 때리지 마세요! 아무튼 사형과 제가 하는 혼인이니 있는 힘껏 크고 화려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최고로 멋진 식을 준비해보겠습니다. 모두에게 웃으며 축하받아야죠.

아서라, 축하랍시고 절벽에서 굴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겠느냐.

...설마 그러려고요.

어느새 아득해진 기억이 그 순간 떠오른 건 왜였을까. 마치 현실에서 눈을 돌리듯 의미 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다. 휘둘러진 검이 몸을 가로지르는 광경은 지독할 만치 익숙하고 그리고 또 낯설어서, 윤종은 눈을 감지도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뛰쳐나가지 말라고 그리 일렀는데. 말이 입안에 고였으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이 전장에 뿌려진 사형제의 핏물이 지금의 배가 되었을 것을 그도 저도 알았다. 알았기에 조걸은 적진을 파고들었고 알았기에 윤종은 말을 삼켰다. 그러니 이는 예상하고 있던 미래가 현실이 되었을 뿐.

아, 스러지는 그 몸을 본 순간 입에서 터져 나온 건 웃음이며 뺨을 타고내린 건 눈물이 아닌 핏물이라.

걸아. 이제 나는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사망자의 소식이 들려올 때 네 모습을 먼저 찾는 일이 없겠구나.

사형제의 피를 앞에 두고 아직 뛰는 네 심장 소리에 안심하는 나를 혐오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아시잖습니까. 사형.

알고 있었나.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래, 알고 있었지.

지금 가는 이 길이 사지임을 누가 모를까.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알면서 향했다. 알면서 사형제들이 가는 것을 멈추지 못했고 알면서도 그 길을 앞장섰다.

그 속에서 미래를 기약하기에는 맺어야 할 약지는 얼마나 연약하던가. 그럼에도 꿈꾸게 되는 미래는 또 얼마나 찬란했던가.

“사형! 걸 사형이!”

곁에서 울음처럼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사형제의 옷깃을 잡아챈다. 그 목을 아슬하게 스치는 검을 쳐내고 그리하여 생긴 틈을 깊게 찌른다. 손끝에서 숨이 끊어지는 걸 느끼고 회수한 검을 쉼 없이 다시 휘두르며 외친다.

“정신 차려라!”

단단하게 굳은 목소리를 터트리고, 울음이 차오른 눈에 독기가 서리는 걸 확인하고 윤종은 주저 없이 발길을 떨어트렸다. 한걸음의 망설임이 제 사형제의 핏물이 된다. 다시금 전장을 훑는다. 전세는 확실하게 불리했다. 예상의 배를 넘는 수가 아직도 밀려들었으니 제아무리 화산의 제자라 하더라도 여기서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는 그리 나쁜 소식은 아니었으니. 이곳에 이리도 많이 몰려들었다는 건 다른 곳은 더 적을 거란 이야기가 되니 다른 이들은 좀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 지금쯤이면 청명이나 백천 사숙이 천마의 목을 베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길 수 없다면, 화산의 대제자로서 하다못해 한목숨이라도 더 살려 보내야 하지 않겠나.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 전장에서.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땀과 피로 젖은 손으로 검을 고쳐쥐고 땅을 박찬다. 원군이 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버텨야 했다. 비어버린 자리를 채우듯 걸음을 옮긴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스친 곳에서 시체가 되었을 모습조차 보지 못한 것은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련은 없다. 미련에 붙잡히기에 윤종에게는 아직 짊어진 게 있었다.

걸아. 돌아가면 혼인을 하자 하였느냐.

비록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축하조차 없지만, 평생 입어볼 일 없을 고운 혼례복도 없지만. 그럼에도.

한날 한시에 한 자리에서 죽는다면 그게 혼인과 다를 게 무엇이더냐.

그렇다면 이를 우리의 혼례식으로 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느냐.

아, 뺨을 타고 흐르는 건 핏물이며 들리는 건 끊어지는 적의 숨이니.

윤종은 웃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적진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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