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도사 귀농일지

매화도사 귀농일지 06.

화산귀환 ncp 회지 샘플

비날공방 by 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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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 반. 청명의 하루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했다.

첫 번째 생에서 새벽 수련을 시작하면서부터 만들어진 습관은 두 번의 삶을 지나 세 번째 삶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곧장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세수를 한 뒤, 뒤늦게 잠에서 깨 뒤따라 나온 백아의 얼굴을 손가락에 물을 묻혀 정돈해줬다. 자기 스스로 단장 할 수 있으면서도 매번 해달라 매달리는 게 뻔뻔하기도 하고 귀여워 가끔 장난으로 물을 튕기면, 백아는 꼬리를 휘두르며 불만을 표해도 청명의 품에서 먼저 벗어나진 않았다.

목에 백아를 얹은 청명은 뒤뜰로 향했다. 이제는 제법 병아리 티를 벗은 닭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먹이통 앞으로 다가오면 들고 온 밥을 부어주고 닭들이 먹이를 먹는 사이 물통에 새 물을 부어준다. 그 옆의 화단에 난 잡초를 뽑아준 뒤 집을 한 바퀴 둘러보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면 아침 운동을 할 시간이었다.

사람은 자고로 하루에 한 번 땀을 흘릴 정도로 몸을 움직여야지. 운동화의 끈을 꽉 조여 맨 청명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뒤 동네를 한 바퀴 빠르게 달렸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뛸 때마다 매일매일 변해가는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집 마당의 화단에서 자라던 새싹이 쑥 커서 봉오리를 맺었고, 작달막했던 강아지가 쑥 커서 제멋대로 집을 탈출해 마당에서 곤히 잠을 자는 모습이라던가, 한 뼘 남짓했던 벼들이 이제는 무럭무럭 자라 불어오는 바람에 파도치는 물결을 만들어내는 모습 같은 것들을. 청명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그 사소한 변화를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집으로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를 한 뒤 아침을 챙겨 먹고 나면 본격적으로 일할 시간이다. 300평의 땅에 비닐하우스를 세운 청명은 쌈 채소를 키워보기로 했다. 온도 조절과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어 있어 따로 관리를 해줄 필요도 없었다. 상추, 쌈케일, 적근대, 청겨자, 치커리 등등 온갖 종류의 모종을 심은 청명은 그것을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평화로운 귀농 생활을 보려고 들어왔던 시청자들은 약 한번 안 쳐도 미친 듯이 자라는 채소의 모습에 경악하고 놀라워했다.

많이 신기한가? 식물 키워본 적 없는 사람들인가 보네. 댓글의 반응을 본 청명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먼 훗날 일반적인 식물의 생장 속도가 이것의 두 배는 느리다는 걸 깨닫고 난 청명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기른 채소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매일 정해진 물량만 예약받아 판매했다. 쇼핑몰 자체는 추천받아 만든 거라 처음엔 이걸 누가 사나 싶었지만, 유튜브로 볼 수 있는 투명한 재배 과정과 거기서 따라온 홍보로 인해 첫 개시 오 분 만에 준비해둔 물량이 모조리 매진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청명은 정말로 이게 맞는 건지 잠시 의심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그다음은 매실나무를 봐 줄 차례다. 심은 지 몇 달 되지 않아 수확량은 적었으나 열매 자체는 모두 알이 굵고 실했다. 청명은 매실을 수확한 날 시내에 나가서 커다란 유리병과 설탕 포대와 담금주를 사 왔다. 꼭지를 따고 빡빡 씻겨진 매실이 소독된 유리병 안에 설탕과 켜켜이 쌓였다. 절반은 청으로, 절반은 술이 함께 든 병들이 서늘한 창고에 자리를 잡았다. 완성되려면 몇 달은 지나야겠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청명은 마음이 든든했다. 청도 술도 빨리 익어 한잔할 날이 벌써 기다려졌다.

남는 땅을 작게 개간해 만든 텃밭에는 이전에 심어둔 온갖 모종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청명은 최근에 심은 딸기 모종이 무사한 모습에 안심했다. 영 기운이 없어 금방 죽을 것 같다며 할인하길래 싸게 얻어온 것인데, 이 상태라면 금방 새잎이 날 것 같았다.

”배고프다, 밥 먹자, 밥.“

”키잇.“

냉장고에 가득 찬 채소와 케첩을 꺼내든 청명은 구석에 숨겨져 있던 소시지와 굴 소스도 마저 꺼냈다. 기름을 두른 팬에 한입 크기로 자른 채소를 넣고 볶고, 칼집을 낸 소시지와 함께 케첩과 굴 소스를 적당량 뿌려주면 소시지 야채 볶음 완성이다. 밥 한 공기와 김치를 꺼내 차려 먹고, 맥주 한 캔을 까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날 찍은 영상을 간단한 편집을 거쳐 유튜브에 업로드 예약을 걸어놓으면 할 일이 모두 끝이 난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버는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이나 친구가 놀러 오는 날엔 맛있는 술과 고기를 사 와서 구워 먹고 소소하게 적금을 부을 정도의 수입이 생겼다.

청명은 그해 겨울엔 집 한쪽에 화목난로를 설치했다. 품에 백아를 안은 채 선물 받은 빈백 의자에 앉아 장작이 타오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오래전 청문이 ‘흐르는 물을 보며 운치를 즐길 생각을 해야지, 술을 먹고 싶다는 말이 나오면 어쩌자는 거냐?!’ 라며 성질을 냈던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폭설이 내린 날엔 마당 한쪽에 커다란 눈사람과 이글루를 세우기도 하고, 고구마를 구워보려 세 번 시도했으나 세 번 모두 실패한 뒤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홧김에 군고구마 기계를 사 왔다. 새까맣게 탄 껍질을 가르면 풍기는 달콤한 향기와 쫀득하고 부드럽게 구워진 군고구마를 맛본 청명의 밭 한구석에는 매년 고구마 넝쿨이 자랐다. 때때로 부모님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들에게 직접 키운 것들을 보내주거나 동네 어른들과 사소한 잡담을 나누는 시골의 삶은 점점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과거에 쌓은 인연들이 떠오를 때면, 청명은 차오르는 그리움에 속수무책으로 가라앉고 만다. 이제는 두루뭉술해진 얼굴만이 떠오르는 검존의 화산이, 흐릿한 인상만이 남은 검협의 화산이. 그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청명은 문득 화산의 장문인 저를 닮은 이 집과 수많은 매화나무는 그리움이라는 바다에 숨이 막혀 죽지 않게 하기 위한 풍랑 속 작은 뗏목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마당에 심어진 매화나무 앞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 어깨 위로 올라온 백아가 청명의 뺨에 제 머리를 비빈다. 얼어붙은 뺨을 녹이기엔 터무니없이 작은 온기였으나, 방향을 잃고 어둠 속에서 헤매던 이가 길을 찾기엔 충분한 이정표였다.

”그래, 네가 있었지.“

청명은 백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당신들의 얼굴이,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 순간의 마음과 감정만큼은 여전히 선명하게 제 안에 남아있었으니까. 그걸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 *

 

겨울이 지나고 두 번째로 맞는 봄이 왔다. 매화가 만개한 4월의 어느 날, 청명은 백아에게 집을 맡기고 그의 애마인 하얀 트럭, 백아 2호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청명이 사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시내에는 제법 커다란 시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장사하는 청명의 단골 고기 만둣집이 다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취미로 하는 장사라 그런지 추운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주인장이 겨울만 되면 따뜻한 남쪽 나라로 여행을 가버리는 탓에, 그 집의 단골들은 겨울만 되면 주기적으로 만두 금단 현상에 시달려야만 했다.

청명이 기다리던 것은 비단 만두뿐만은 아니었다. 4월은 작년 여름에 상처 없는 황매실을 고르고 골라 만든 비장의 매실주가 딱 10개월을 채운 날이었다. 만개한 매화를 구경하며 때깔 좋은 고기를 구워다 매실주 한잔? 상상만 해도 침이 줄줄 흘렀다. 창문을 내리자 쏟아지는 바람에선 봄 내음이 물씬 풍긴다. 청명은 스피커로 좋아하는 노래를 틀며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 맞춰 액셀을 밟았다. 오늘 하루는 뭘 해도 다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 되겠는데요, 바퀴가 완전히 터졌어요.“

임시로 때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네요. 그렇게 말한 보험사 직원이 견인을 부르겠다며 잠시 떨어져 통화를 하는 사이, 청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청문의 팔뚝을 찰싹 내리쳤다.

”그러길래 차 정비 좀 미리미리 하시라니까!“

”할 말이 없구나. 미안하다…“

두 사람은 청명이 나온 동영상을 토대로 근처 지리나 풍경을 추측해 시간이 날 때마다 청명을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본업 때문에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어 보통 주말마다 온 지역의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오래된 청문의 차가 전국구 여행이라는 과중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퍼지고 만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른 문제는 없고 타이어만 교체하면 해결되는 되겠으나, 다행 중 불행이라면 오늘이 3일 연속 이어진 연휴라 대부분의 카센터가 문을 닫았다는 점이겠다.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아뇨, 아닙니다. 사장님. 예, 그럼 조금 있다 뵙겠습니다.“

누군가와 제법 길게 통화를 하고 온 보험사 직원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 근처에 개인적으로 아는 정비소가 있는데 사장님에게 연락을 해보니 한 시간 정도 기다리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단 얘기였다. 다음날 일정이 있던 청문과 청진은 안도하며 기다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고, 직원은 정비소가 있는 마을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뒷좌석에 타라 손짓했다. 세 사람을 태운 아담한 모닝이 한적한 시골의 도로를 힘차게 달렸다. 직원은 시계를 흘끗 보며 입을 열었다.

”점심시간도 됐는데 기다리는 동안 식사라도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실 정비소가 있는 마을에 큰 시장이 있는데 거기 국밥이 기가 막히거든요.“

”그렇게 맛있습니까?“

”그거 먹으려고 먼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요.“

저희 와이프가 좋아해서 저도 자주 오는 곳입니다. 직원의 말에 뒤늦게 밀려온 허기를 느낀 청문이 좋은 가게가 있으면 알려달라 말하자 그는 열정적으로 자신이 자주 다니는 단골 국밥집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기왕 먹을 거라면 맛있는 데서 먹고 싶었던 청진이 핸드폰 메모장에 가게 이름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유명한 국밥집이라고 한 게 정말이었는지 가게 내부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자 기다렸다는 듯 나온 밑반찬과 함께 국물이 바글바글 끓는 뚝배기가 각자의 앞에 척 놓였다. 청명을 찾으러 다니느라 전국을 돌아다닌 탓에 피곤이 쌓여있던 두 사람은 조용히 숟가락을 들었다.

뜨끈한 국물을 몇 숟갈 뜬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잔소리 듣기 싫어서 도망친 청명 사형 찾으러 돌아다닌 적이 있었죠.“

”그런 적이 얼마나 많은데 대체 언제를 말하는 거냐.“

청문은 청진을 따라 웃으며 수저로 국밥을 휘적거렸다. 얼큰하고 매콤한 국물이 맵고 향이 강한 걸 좋아하던 청명의 입맛에 딱 맞을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지. 작정하고 숨으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당시 사숙들이랑 청자배들이 한참을 찾으러 다녔잖느냐.“

”어떻게 그리도 기상천외하게 숨어 대는지…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다 아픕니다.“

”그래도 도저히 못 찾겠을 땐 이름을 부르면 먼저 나와줬는데 말이다.“

청명아.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해서 너는 아직도 나타나 주지 않는 것일까. 너를 다시 한번만 만날 수 있다면 목이 터지라고 네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데. 청문의 마지막 기억 속 청명은 좌수를 잃은 채 천마에게 달려가는 뒷모습이었다. 그날 너를 혼자 두고만 탓에 이리도 꼭꼭 숨어버린 것일까.

”어디 있는 게냐, 청명아.“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청문이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고 버텨야 또 청명이를 찾으러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청진이 순간 경악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떡 하니 벌리고는 가게 밖의 무언가를 가리키며 무어라 외치는 것이 아닌가.

”…청명 사형?“

뭐라고? 청문은 청진의 외침에 곧장 뒤를 돌아 가게 밖을 보았다. 국밥집이 자리한 좁은 골목을 긴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청년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녹색 머리 끈이 흔들리고, 걸음걸이는 가벼웠다. 마치 평화롭던 시절의 중원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니던 그때처럼. 골목에 한차례 불어온 돌풍에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선명한 매화색 눈동자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청년의 머리에 붙어 있던 분홍빛 꽃잎이 떨어짐과 동시에, 청문과 청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봐요! 계산은 하고 가셔야지!“

”잠시만, 잠시만요!“

냅다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두 사람의 앞을 직원이 가로막았다. 사정을 설명할 틈이 없기에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했으나, 이런 손님을 얼마나 많이 상대해 보았는지 직원의 블로킹은 빈틈이 없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단체로 몰려온 관광객의 물결이 가게 안을 휩쓸자 청문과 청진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값을 치르고 간신히 가게를 빠져나와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청명으로 보이는 청년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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