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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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청명] 그 정인이 나였네

실수로 백천과 정인이 된 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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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해 정인이 된 백청



백천의 자세는 항상 곧다. 그가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어깨를 펴 정면을 바라보면 그 강건한 자세와 눈빛에 절로 감탄이 나오며 그 영웅다운 풍모를 칭송하고 싶어진다. 턱선은 갸름하면서 단단하고 가만히 있어도 넓은 어깨를 날개뼈 사이가 닿을 정도로 뒤로 당기면 무인들 사이에서도 도드라지게 넓어 보인다. 어디를 보아도 빼어난 사내다운 모습에 여인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건 당연지사고 그로도 부족해 같은 사내들의 동경 역시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저놈 어디서 정인이라도 만드는 날이면 온 중원 여인들 눈물로 장강을 이루겠구나 싶었는데.

'설마 그 정인이 내가 될 줄은 몰랐지.'

백천과 청명이 정인이 된지도 한 달이 지났다. 청명은 오늘도 태연하게 백, 청자배를 좌로 굴리고 또 우로 굴리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 속내는 초 긴장 상태였다. 청명의 지시에 따라 수련을 하는 이들 사이에 백천은 없었다. 그 점이 청명을 더욱 긴장시켰다. 수련에서 낙오되어 낙안봉 절벽타기를 시킨 서른명을 제외한 백, 청자배가 휴식에 들어갔을 때 백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명아."

그를 부르는 백천의 목소리에 청명의 어깨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잘게 떨렸다. 뒤돌아본 청명은 밝은 표정의 백천을 보고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뭐라셔..?자..장문인이 안 된다고 하시지...? 말도 안 된다고 하시지?"

떨리는 청명의 목소리와는 달리 대답하는 백천의 목소리는 쾌활하기 짝이 없었다.

"장문인께서 허락해주셨다." 

백천의 말에 청명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숙, 장문인께서 뭘 허락하셨는데요?"

엎어져 있던 조걸이 벌떡 일어나 굳어버린 채로 미동도 하지 않는 청명을 뒤로한 채 백천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백천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 혼인."

"...? 누구 혼인이요?"

"나랑 청명이."

"사숙이랑 청명이가 왜요?"

"우리가 정인이니까."

"...."

평소 대부분의 싸움을 직감대로 해결해온 만큼 머리 회전은 누구보다 빠르다고 자부하는 조걸이지만 방금전 백천의 말은 그의 직감의 범위를 뛰어 넘은 것이었다. 멍청한 표정의 조걸 뒤로 그 말을 들은 백, 청자배가 똑같이 얼빠진 얼굴을 하다가 이내 한사람 두사람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네에에에에에에에에에!?!?!?"

조걸을 선두로 화산파 아니 화산채가 산이 떠나가라 들썩이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얼굴이 하얗게 뜬 자, 누래진 자. 파래진 자, 빨개진 자가 색색으로 있었고, 몇몇은 기둥에 머리를 박기도 했으며 또 일부는 소소를 찾아대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구석으로 가 제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그런 사형제들과 사질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백천은 절로 빛이 나는 미소를 지으며 청명을 바라봤다.

"그렇게 되었으니 너도 준비를 좀 해야겠구나."

행복하게 미소 짓는 백천을 보며 한쪽 입가를 올린 채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던 청명은 이내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속으로 외쳤다.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 꼬인 거지!!!!!'

시작은 남만야수궁에서부터였다. 일전에 확보해 놓은 남만야수궁과의 무역로에 사파무리가 날뛰기 시작했다. 세외 지역은 차치하더라도 중원에 속한 지역에서 설치는 것들은 화산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섬서가 아닌 지역에서 대규모 토벌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청명과 백천의 주도하에 소수 인원으로 무역로를 따라 사파 토벌에 나섰다. 무역로를 이용하는 것은 화산과 남만야수궁만이 아니기에 이를 통해 이득을 얻고 있는 각 지방 토호나 세가, 문파가 가는 길마다 위치해 있었다. 부족한 머릿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았고 조직력이 부족한 사파무리는 화산의 적이 아니었다. 순조롭게 토벌을 완료한 청명과 백천은 기껏 세외 근처까지 오기도 했고 자목초도 얻을 겸 남만야수궁을 방문했다.

늘 그렇듯 맹소와 걸걸하게 술잔이 아닌 술병째로 부딪친 청명은 다음날 깨질 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내가 또 마시면 화산광견이다 화산광견...'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스스로 개가 되기로 작정한 듯 같은 날 저녁 전날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위장에 들이부었다.

"잘하는 짓이다."

내리 사흘을 마신 청명을 백천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자 청명은 히죽 웃으며 조금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우리 동룡이~혼자만 신수가 훤한 거 보니 아직 덜 마셨구나!"

청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사흘간 그들과 어울리느라 나름대로 주량을 넘긴 백천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고개를 격하게 도리질했다.

"이 이상 마시면 죽어 진짜!"

"에이~동룡이가 아직 어려서 술맛을 몰라서 그래. 궁주님도 없고 우리끼린데 이 좋은 술은 우리가 안 먹으면 누가 먹나."

"내가 너보다 연상이다. 임마!"

맹소는 이미 비틀거리며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기에 방안에는 청명과 백천만이 있었다. 백천은 그의 사숙으로서 청명을 말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솟아올랐지만 이내 제 주둥이에 꽂힌 술병으로 인해 그따위 생각은 훨훨 날아가 버렸다. 

"히끅."

백천의 어깨가 일정한 간격으로 위로 솟았다 가라앉았다. 언제나 단정히 제 위치를 지키고 있던 그의 영웅건이 비뚤어져 곧 벗겨질 것만 같았다. 하얗고 뽀송하던 얼굴에는 붉은 꽃이 내려앉았다. 늘 꼿꼿하던 곧은 자세는 허물어진 지 오래다.

"사숙욱~얼마나 마신 거야?"

제정신이었다면 이게 누구 탓이냐면서 청명을 대가리를 깨러 달려들었을 백천이지만 그러기엔 그의 정신이 너무나 몽롱했다.

"섬서제일미가 울고 가겠네. 평소에 수련을 똑바로 안 해서 그런 거 아니야. 떼잉. 저걸 믿고 혼주단지를 넣는 중원의 여인들이 불쌍하다." 

이 밖에도 청명이 궁시렁 궁시렁 백천에 대한 타박을 계속 늘어놓았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백천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청명아아... 나한테 시집오는 게 그렇게 불행한 일이더냐... 나도 내가 부족한 거 안다. 너한테 한참 모자라는 것도... 그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칠줄 모르는 타박에 취할 대로 취한 백천이 서러움이 몰려온 듯 울컥하며 말했다.

"엥? 사숙 진짜 취했어? 와. 이 모습을 멀쩡한 허우대만 보고 반했던 여인들이 봐야 하는데."

청명이 계속해서 킥킥 대며 놀려대자 백천이 도복 바지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꽉 움켜쥐며 말했다.

"보여도 상관없다. 내가 못나고 부족한 건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잘 안다. 이런 내 모습을 온 중원의 여인이 알아도 상관없어. 다만 내가 연모하는 이만 나를 좀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내가 그이 곁에 있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사숙,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어?"

'금시초문인데.'하고 붉은 눈을 크게 뜨며 청명이 중얼거렸다.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야? 장가네 포목점 아가씬가? 아니면 저번에 저랑 혼인해 달라고 찾아왔던 연가네 금지옥엽? 도대체 어떤 여인을 마음에 품으셨을까 우리 동룡이는?"

청명이 실실거리며 검지손가락으로 백천을 쿡쿡 찔러대자 백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여인이 아니다."

"뭐라고?"

그 소리가 너무 작아 청명이 다시 한번 물었다.

"여인이 아니라고 이 망둥이 놈아!"

마치 포효하듯 우렁차게 소리치는 백천의 목소리가 청명의 고막을 터트릴 듯 울려댔다.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백천을 쳐다본 청명은 자신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백천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것이다. 여인이 아니야? 설마 아해는 아니겠지? 유부녀..는 여인이고... 그것도 아니면...

"사숙, 설마 사내를 좋아해?"

"......그래"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눈물을 한 방울 뚝 떨구며 대답하는 백천의 모습에 청명의 머릿속에 비상이 났다. 제 사숙이 단수라니. 지난 생의 경험으로 단수가 생각보다 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설마하니 제 사숙이 단수라니. 언제나 여인에게 과도하게 친절하며 주변 사내놈들을 원숭이 보듯 보지 않았던가. 헌앙한 외모와 다정한 성격의 조합에 넘어간 여인이 장강을 이루는데 그런 그가 눈물을 보일 만큼 절절하게 사내를 좋아하다니.

"...내가 기분 나쁘더냐."

"아냐 그건 아니야 사숙."

차마 청명을 마주 보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숙인 채 백천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기분이 나쁘더냐... 아니, 청명은 백천이 단수라 할지라도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제 앞에서 사숙이 사내와 연애질을 한다고 생각하면 당장에다 둘 다 절벽에서 밀어 떨어트리겠지만 이는 그가 사내와 연애를 해서는 아니다. 단지 도사씩이나 되어서 수련은 팽개치고 연애질에 정신이 팔려서야 쓰겠냐고 생각했을 뿐이다. 청명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왜인지 저보다도 한참 어린 사숙놈이 이렇게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연심이란 게 사람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제 아무리 청명이라도 조금은 알고 있었으니까.

"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사내... 아니 그 사람은 알고 있어?"

"상상도 못하고 있을 거다."

하도 긴장한 탓에 조금 술기운이 빠진 백천이 우는 듯 웃는 듯 애처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사람한테 말할 거야?"

"아니."

"왜? 사숙이 사내라서?"

"아니. 내가 사내인 것이 문제였다면 진즉에 부딪쳐서 깨졌을 거다."

깨지는게 전제인 건가. 청명은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사내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한테 부족한 사람이라서 그렇다. 항상 날 모자란 반푼이로 보거든."

"아니 사숙이 어디가 어때서?"

백천의 말에 청명이 기분이 팍 상하여 따져 물었다. 제 동룡이가 모자란 부분도 있긴 하지만 까도 내가 까는 거고. 남이 까면 그날은 그 인간 대가리는 물론이고 그 집 산문이고 현판이고 아작 나는 날인 거다. 감히 어디서 섬서제일미에 본인 제외 화산제일기재, 백자배 대사형, 미래의 장문인인 백천에게 그런 망말을 하는 것인가. 나열해 놓으니까 더더욱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는 놈이네 이거.

"게다가 내 출신을 끔찍이 싫어해서 화가 날 때면 항상 종남으로 돌아가라 한다."

"허 참! 누구 맘대로 돌아가래? 우리 동룡이가 말이야! 화산의 대사형이고! 장문인이 될 사람인데!"

"그러게나 말이다. 더군다나 애타는 내 마음을 모르는 채, 항상 나를 다른 여인에게 붙이며 이 여인과 어울린다 저 여인과 어울린다 놀리지를 않나, 만약 혼인을 하거든 술은 백화로로 준비하라 하질 않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더구나."

"감히 누굴 누구한테 붙여? 홧김에 혼인 같은 거 하는 거 아니다 사숙?"

도오사는 혼인 같은 거 하는 거 아니다.

"근래 들어서는 내 얼굴이 못났다는 둥 이런 못난 모습을 여인들에게 보여줘서 진저리가 나도록 해줘야 한다는 둥 하더니, 이제는 내게 시집올 여인이 불쌍타고 하더구나."

"아~니 트집을 잡을게 없어서 동룡이 얼굴을 트집 잡아? 우리 섬세제일미를 뭘로 보고! 그놈이 얼마나 잘나신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룡이 얼굴 정도면 사내 하나야 둘정도는 유혹하고도 남지! 굴러들어 온 복을 제 발로 차는 놈일세 이거?"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응?"

"너도 내 얼굴이면 넘어올 것 같더냐?"

취기에 녹아내리던 동룡이는 어디 가고 갑자기 멀쩡해진 얼굴로 제게 얼굴을 들이댄 백천의 태도에 청명은 당황했지만 방금전까지 풀이 죽어 있던 백천을 떠올리며 기꺼이 대답했다.

"그럼. 사숙 정도의 사내가 정인이 되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거절하겠어? 멀쩡하던 사내도 단수로 만들어버리는 미모구만!"

"그렇구나. 청명이 너도 반해버릴 정도로 쓸 만 하더냐?."

"그렇다니까."

"내가 모자라고 못난 사내라고 상관없이?"

"사숙이 뭐가 모자라? 사숙이 노력하는 거 나도 알아. 다만 초심을 잃으면 안되고 두들길수록 강해지는 사람이니까 일부로 아닌 척 하는 거지."

자꾸 못나다, 부족하다를 반복하는 백천에 속이 상한 청명이 자기도 모르게 솔직한 말을 했다. 절대로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백천은 이미 제 예상보다도 훨씬 크게 성장한 사내이다. 언제까지 의기소침한 채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다행이구나... 내가 네 눈에 아주 부족하지는 않았나 보구나. 그럼 이제 화가 난다 하여 종남으로 보내버리진 않을 거지?"

"어딜보내? 종나~암? 꿈도 꾸지 말라고 그래!"

잘키운 동룡이 하나 열 종남 안 부럽다 이거야.

"만약... 만약에 말이다. 내가 너를 연모한다고 하면 네 스스로가 불쌍하다고 느껴지거나 하진 않고?"

"그거야말로 말도 안 돼 사숙. 사숙한테 마음을 받는데 어떻게 불행해 질 수 있어? 당연히 행복하겠지."

"그렇구나.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이라 다행이다."

"그렇다니까. 몇번을 말해. 자신감을 가져 사숙! 그 누구던 사숙의 고백을 절대로 거절할 리가 없다니까."

밝아진 표정의 백천을 보며 속으로 후.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청명이 동룡이 기세워주기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음을 직감하며 저 혼자 속으로 뿌듯해 했다. 제 무덤을 판 지도 모르고.

백천은 방금전까지의 울먹울먹한 표정이 거짓말인 것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청명은 화산으로 돌아가 맘껏 백천을 굴리면서 오늘의 고생 값을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백천을 마주 보고 웃어주었다.

"네가 나를 받아준다고 하니 이 사숙은 너무나 기쁘구나."

"응?"

"청명이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이 줄 알았다면 진작에 마음을 전했을 것을."

"그게 무슨 소리야 사숙...?"

"네가 방금 말했잖느냐. 내 얼굴로 고백하면 그 누구도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그랬지?"

"너다 청명아. 내가 연모하는 이."

"...?"

"네가 네 입으로 내가 고백하면 받아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날 종남으로 쫓아내지도 않을거고, 부족하다고 싫어하지도 않을거고, 다른 여인과 혼인시키지도 않을 거라고도."

"아니 그건...! 말이 그렇다...!"

"연모한다 청명아. 내 정인이 되어다오."

청명의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백천이 헌앙한 얼굴을 들이대며 청명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진지한 표정에 청명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청명의 침묵을 허락으로 안 백천이 청명을 제 어깨 안에 가두다시피 안았다.

"네가 좋다 청명아... 오로지 너만을 연모한다."

제 귓가에서 속삭이는 백천의 목소리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그리고 제 마음을 전하는 그의 빨개진 귀가 어찌나 붉던지 청명은 그 품에서 벗어나지도 백천에게 안된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고백과 동시에 취기가 돈건지 까무룩 잠이 든 백천 탓에 그에게 껴안긴 채 날밤을 새운 청명이었다. 떠나가려던 정신줄을 겨우겨우 붙잡으며 아침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청명은 기상과 동시에 그의 사숙이 전날의 일을 전부 다 잊었으면 했다. 하지만 무정하게도 눈을 뜨자마자 마주친 백천의 수줍은 눈빛에 절망하고 말았다.

"청명아 잘 잤느냐?'

멍하니 선수를 빼앗긴 청명은 평소보다 빛나는 백천의 얼굴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기억하고 있어...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해...'

지금이라도 상황을 타개하고자 머리를 굴리는 청명이었지만, 그런 청명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백천이 말했다. 어제의 열기가 생각나 청명의 몸이 움찔했다.

"어제 내가 너무 취해있었기에 네가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래 동룡아 제발 실수였다고,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해줘!!'

기대에 찬 눈으로 청명이 백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너에게 고백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나는 정말 너를 연모하고 있어. 이런 부족한 나를 받아줘서 고맙구나. 청명아"

베시시 꽃처녀처럼 웃으며 말하는 백천은 너무나 고왔다. 어느 여인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수줍은 그 모습에 청명은 할 말을 잃었다. 이제 와서 오해였다고 자신은 백천을 연모하지 않는다는 말하는 순간 백천의 하늘 높은 자존심은 박살이 날 것이고 청명의 간밤의 수고는 물거품이 된다. 둘의 사이도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겠지. 무엇보다 청명은 백천의 얼굴이 배신감에 젖는 것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어휴 내 팔자야...'

청명의 한숨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정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해 정인으로서의 백천은 최고였다. 남만야수궁을 떠난 지 칠주야. 그동안 백천은 청명의 말 하나 시선 하나 놓치지 않았다. 청명의 시선이 머문 객잔에서 머물렀고, 청명이 지나가듯 맛있겠다고 한 요리들을 어김없이 그 앞에 대령했다. 심지어 잘 먹는다 싶은 요리들은 손수 그릇에 놓아주기까지 했다. 한번은 내륙지역에서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니 낚싯대를 빌려와 호수에서 직접 낚아 요리해주기도 했다. 분하게도 맛있었다. 청명이 제가 만든 생선요리를 허겁지겁 먹자 백천은 생선 살을 발라주며 '맛있느냐.'고 물으며 청명이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청명은 그 시선이 간지러웠다. 백천은 야숙을 할 때는 추위를 타는 청명을 꼭 끌어안으며 자긴 했지만, 객잔은 잡을 때는 반드시 방을 두 개 잡았다.

'내외 하는 것도 아니고.'

사숙질관계일때도 여유가 있으면 방을 따로 잡긴 했지만 정인이 되면 달라질 법도 한데, 백천은 청명을 챙겨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정인다운 접촉을 시도하진 않았다. 왜인지 답답함을 느낀 청명이었지만. 애써 오히려 잘된 거 아니겠다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지금이 좋아. 사숙이 접문이라도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잡생각을 뒤로하며 잠자리에 든 청명은 몰랐다. 백천이 접문보다도 훨씬 대담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화산까지 하루 정도 남았을 때 백천이 근처에 장이 열렸다며 괜찮으면 구경이라도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평소의 청명이라면 구경은 무슨 구경이냐고 얼른 화산으로 돌아가 수련해도 모자랄 판에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 타박했을 테지만, 헌앙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물어오는 백천을 보자니 차마 안 가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정인이 되었다고 해서 백천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이전과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왜인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청명은 자신도 모르게 정인이라는 관계가 영향을 준 건가 싶었다.

장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당과나 몇 개 사 먹어야지 싶었던 청명은 그들을 향해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작은 마을인지라 저와 백천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라 무인이 신기해서 쳐다본 것도 있겠지만 주로 백천의 미모를 보고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었다.

'동룡이 미모 어디 안 간다니까?'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진 청명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청명아."

백천이 부르는 소리에 다가가니 그의 손에 녹색의 얇은 머리 끈이 있었다.

"녹색을 좋아하는 듯해서..."

"나 주는 거야?"

부끄러워하며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명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뭐야? 내가 미쳤나 봐!'

"나...나쁘진 않네. 받기만 하는 것도 별로니까 나도 사숙 이거 줄게."

마침 눈앞에 있던 순백의 영웅건을 집어 들며 청명이 말했다. 상등품은 아니지만 끝에 작은 매화가 소담스럽게 수 놓아져 있었다.

"...고맙구나."

백천이 천천히 그에게서 영웅건을 받아들었다. 영웅건을 지긋이 바라보던 백천의 눈은 고개를 들어 청명을 마주 보았다. 청명이 눈에 비친 백천은 분명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무언가 할 말을 삼킨 듯한 모습이었다.

화산으로 돌아온 지 이레. 백천과 청명은 이전과 다름없이 생활했지만 한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는데 그건 저녁마다 서로의 방에 빈번히 드나들게 된 일이었다. 그렇다고 정인다운 일을 하는 건 아니었고 그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거나, 향후 수련방식에 대해 논의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함께 술을 마셨다. 청명은 이게 정인사이라면 꽤 할만하다고 느꼈다. 그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 뿐이라면, 청명은 백천과의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평화란 순식간에 깨지는 것이었다.

"혼인을 하고 싶구나."

"엥? 누구랑?"

"내 정인이 넌데, 당연히 너지. 망둥이 놈아."

백천의 갑작스러운 말에 청명의 입에서 마시던 백주가 흘러나왔다. 그런 청명의 입가를 닦아주려 백천이 천을 가져다 대자 이를 치우며 청명이 말했다.

"혼인은 무슨 놈의 혼인? 우리 정인 된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어."

"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널 연모한 지 오래이고 내 마음이 변할 일도 없으니 너만 괜찮으면 혼인하고 싶구나."

"우리 도사야 사숙!"

"안다 이놈아. 그러니까 혼인이라고 하더라도 거창하게 식을 올리자는 건 아니다. 그저 장문인이랑 문파 어른들께 우리가 정인임을 알리고 인사드리자는 거지."

말하는 와중에도 거듭해서 입가를 훔치는 백천의 손길에 청명은 포기한 듯 입가를 백천에게 내어주었다. 

"아무리 화산이 혼인을 허한다고 해도 단수를 인정할 것 같아?"

"그러니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너와 내가 같은 사내인 이상 세상은 우리를 정인 사이로 보지 않겠지. 그러니까... 그냥 내 사람들에게만이라고 알리고 싶구나. 내가 너를 연모한다고. 네 정인이 나라고."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백천의 절절한 목소리에 청명의 그동안 눈 돌려왔던 그의 진심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제 아무리 정인을 귀하게 여긴다고 해도 보통 백천이 청명을 대하듯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슬슬 깨닫고 있었다. 정인이 된 후 백천과 청명의 거리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청명의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아주는 딱 그 정도의 거리. 접문은 커녕 손을 잡은 것도 포옹을 한 것도 백천이 고백한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아무리 도사라 할지언정 백천도 사내인데 마음을 전하고 정인까지 된 사이에 너무 오랫동안 진전이 없었다. 아마 청명을 기다려 준 것이라. 그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겠지.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백천의 연심을 치기 어린 것으로 취급하고 진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청명이 그를 거절하지도 그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기에 하다못해 사람들에게라도 네가 내 정인임을 알리고 싶다고 청명에게 빌듯이 부탁한 것이다. 청명이 싫어할까 차마 손을 뻗지는 못하면서도 허울뿐인 혼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옆에 있어 달라고 호소하면서.

청명은 처음으로 백천의 민낯을 본 기분이었다. 항상 단정하고 반듯한 미청년이 자신에 앞에서만 비굴하고 절박해진다. 비참할 법도 하건만 오히려 그는 지상에 하나 남은 구명줄을 보듯 청명을 바라본다. 예상치 못한 상황임에도 청명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본 것이 자신뿐이라고 생각하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런 자신도 이미 정상은 아니겠지. 

"말해 사숙."

"청명아?"

"장문인께 가서 우리가 정인이라고. 허락해주시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말해."

"아무리 그래도 장문인께 그 무슨 무례냐."

"이렇게까지 말하면 허락해주시겠지 뭐."

어깨를 으쓱거리며 청명이 장난스레 말했다.

"후회 하지 않느냐?"

"후회... 는 이미 충분히 했고, 이제는 각오 할 차례지."

"무슨 각오?"

"내가 사숙을 사랑할 각오."

백천이 숨을 삼킨 채 두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지? 내가 사숙을 연모하지 않는다는 걸."

"그래. 애초에 너와 정인이 되고자 했던 내 얄팍한 술수였을 뿐이었지. 술에 취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네가 거절할 수 없도록 너를 몰아세웠다."

"하여간 동룡이가 나를 너무 좋아해."

"그래! 나는 네가 좋다! 네가 내 정인 되어준다고 한다면 네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한다고 할지언정 온 세상 사람들에게 네가 내 정인이라고 알릴 거고, 허울뿐이어도 네가 내 정인일 수 밖에 없게 할 거다."

"동룡이가 욕심만 많아 가지고."

"불만이냐. 그래도 나는 널 놓아줄 생각이 없다. 아주 질리지?"

"누가 나 놓아달래? 놓지 마. 계속 잡고 있어. 이제 막 동룡이 정인 노릇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백천이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손으로 청명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나를, 나를 진정 연모해줄 수 있겠느냐."

"솔직히 말해서 아직 잘 모르겠어. 근데 최근에 생각하는 게 있어."

"무엇을."

"동룡이 얼굴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잘났더라고."

청명의 뜬금없는 말에 백천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내 얼굴이 잘나면 뭐하냐. 네가 날 연모하지 않는데."

"사숙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사숙 얼굴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잘났다고! 어느 정도냐면 매일매일 봐도 질리지 않고, 이 얼굴이 내꺼라면 정인 같은 거 백번이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을 만큼."

"...?"

"눈치 없는 동룡이. 내가 사숙을 연모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난 이미 사숙을 놔줄 맘이 없다는 뜻이야. 사숙의 우는 얼굴도 화난 얼굴도 억울한 얼굴도 전부 내꺼야."

"어째 못난 얼굴들만 골랐구나."

"그래, 제일 못생긴 동룡이도 내꺼란 거지. 솔직히 나한테 연모한다고 고백했던 날의 동룡이는 심각하게 못생겼었거든."

"용케도 받아줬구나."

"그래서 받아줬지."

'나한테만 보이는 표정 이었으니까.'

애시당초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정인 사이가 되는 걸 허락했을 청명이 아니었다. 분명 제 마음속 어딘가에서 싹이 트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불쌍하고 귀여운 우리 동룡이. 백천은 자신이 청명을 함정에 빠트리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청명은 함정에 빠졌다고 빠진 채로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항상 반격을 위한 한 수를 숨겨놓는 검수. 그리고 백천은 그걸 알면서도 청명이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그만의 사냥감이었다.

"그래서 장문인한테 갈 거야?"

"그래. 그전에 네 손을 좀 잡아도 되겠느냐."

"무슨 소리하는 거야 동룡이가. 이럴 땐 손이 아니라"

입술을 갖다 대야지.

백천의 긴 속눈썹이 바들바들 떨리면서 그의 입술이 청명에게 닿았다. 눈을 꼭 감은 백천과는 달리 청명은 그의 떨리는 속눈썹에서도 붉게 물든 귀에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으며 백천의 숨이 가까이 느껴졌다. 비무를 할 때보다도 단숨에 가까워진 거리에 마치 서로의 숨을 서로가 마시는 모양새였다. 이 모든 것이 청명에게는 썩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이미 빠진걸수도.'

제 안의 마지막 자존심을 무너트리며 청명이 백천을 따라 두 눈을 감았다.

백천이 평소보다도 단정한 차림새로 미리 기별을 넣은 장문인의 방을 찾았다. 장문인의 방에선 한동안 소란이 일어났었다. 턱이 빠질듯 벌어진 현종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백천을 쳐다보다가 그의 진지한 눈을 마주하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젠가 일을 칠 줄 알았지.'

청명을 향한 백천의 마음이 보통이 아님을 화산의 그 누가 몰랐을까. 다만 이가 연심이 아니길 바라며 모두가 필사적으로 눈을 돌렸을 뿐이다. 모든 걸 체념한 현종은 백천에게 청명과 정인 되는 것을 허락함과 동시에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

그리고 그 조건이 지금 연무장 한가운데서 청명이 머리를 뜯으며 속으로 비명을 지른 연유이다.

현종이 내건 첫 번째 조건은 '혼인을 할 시 제대로 식을 올릴 것.'

그건 괜찮다 싶었다. 청명도 이왕 부부가 되는 거 세상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남들 하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사형제의 일이었으면 니놈이 도사니 어쩌니 길길이 날뛰었을 청명이건만 저와 백천의 혼례라 생각하니 최대한 크고 거창한 게 좋았다.

문제는 나머지 한 가지 조건.

"종남이라니...."

청명이 세상이 무너진 듯 우울한 표정으로 비척거렸다.

"나도 싫다 망둥아."

"내가 진가네 대장 진초백을 보러 가야 한다니..."

두번째 조건은 반드시 진가에 혼인을 알리고 인사를 올릴 것.

부모를 모르는 청명의 보호자야 현종이 대신한다 하더라도 백천의 경우 부모가 멀쩡히 살아있음으로 인륜지대사를 알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허락까지 바라진 않으니 쫓겨날 각오로 갔다 오라면서.

"동룡이 놈은 왜 진가네 아들놈이어서!"

"청명아아...나 쫓아내지 말거라..."

혼인도 전에 소박맞을 기세에 백천이 청명의 허리를 껴안으며 한껏 울먹이는 표정을 지었다. 백천도 슬슬 청명이 자신의 외모에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용해 먹고 있었다. 예상대로 청명은 그런 백천에 모습에 윽 소리를 내며 강하게 저항하지 못했다. 사슴 같은 눈망울로 저를 올망졸망 쳐다보는 백천의 모습은 마치 한 떨기 수선화 같았다.

'내가 어쩌다 이 얼굴에 넘어가서는...'

청명은 으익!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백천의 양 볼을 쭉쭉 잡아당겼다.

"아..아프다아. 청명아."

사정없이 잡아당기는 손길에 백천이 고통을 호소하던 중, 쪽 소리가 나며 백천의 입술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어쩌겠어. 코가 꿰어도 단단히 꿰인 것을. 빨리 해치우고 밥이나 먹자."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 걸어가는 청명의 뒷덜미가 붉었다. 백천은 사랑스러운 눈으로 청명의 뒷덜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 가자 망둥아."

청명이 백천과 산문을 나서며 '그래도 이 소식을 들은 진금룡의 표정이 볼만하겠다' 하자 두 사내는 입꼬리를 하늘 높이 치켜올리며 괴상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며 낄낄댔다. 배웅을 하던 화산의 제자들은 그런 둘의 모습이 너무나도 닮았다는 사실을 입이 찢어져도 전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대종남파의 장로가 와병으로 자리에 눕고, 이대제자 하나가 미쳐 날뛴다는 소문이 화산에까지 들려온 것은 그리 머지않은 시일이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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