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청명] 看雲步月, 二
현화산 백천 X IF 화산이 망해 낭인으로 살아가는 청명.
※ 추후 내용 일부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카앙! 검날 두 개가 살벌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가 떨어졌다. 튕기듯 뒤로 물러난 두 사람이 다시금 검을 휘두르고, 휘둘러진 검을 막았다. 헌앙한 사내가 어울리지 않게 그 잘난 낯의 미간을 좁히고서 버럭 소리쳤다.
“아오, 내 너 이럴 줄 알았다, 빌어먹을 사질 놈아!”
“누가, 누구보고 사질이래?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 감히……!”
감히, 그 가슴에 매화를 새겨놓았단 말이냐. 청명이 뒷말을 삼키고서 이를 갈며 검을 휘둘렀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감히 저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 옷을 입은 모두가 죽었고, 그 죽음조차도 방치되고 외면당했으니까.
숨을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서 두 사람의 검은 몇 번이고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정파의 젊은 검수들은 대다수 청명이 이리 내몰면 처음 겪어보는 실전과 화려한 검법에 허둥대기 바빴는데, 눈앞의 사내는 그들과 달랐다. 청명의 검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서 익숙하다는 듯 망설임 하나 없는 움직임으로 어떻게든 청명의 검을 받아내고 흘려내려고 했다. 대번 이상함을 눈치챈 청명이 짧게 숨을 고르면서도 낯빛을 바꾸지 않고 섬전처럼 사내를 향해 날아들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청명의 검은 화산에서 시작하여 마교로 완성한 검이었다. 화산이 망했기에 당연히 전수되지 않았지만, 화산이 망하지 않았더라도 청명의 그 살기 가득한 검이 전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 사내는 청명의 작은 습관까지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버거워하면서도 계속해서 검을 맞대어 오는가? 청명이 다시 눈을 뜬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에 검존의 경지에 다다르기에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긴 해도 청명은 청명이었다. 천마가 아니었다면 명실상부 천하제일인이었던. 이어지는 상대의 대응에 머리에 몰렸던 피가 차갑게 식어갔다. 상대의 정체를 가늠해보느라 청명이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기야 했지만, 그걸 감안해서도 상대는 분명 일류의 수준을 충분히 넘어섰다. 다만…….
깊은 눈으로 상대를 살피다 눈살을 찌푸린 청명이 검으로 상대를 날려 보내고는 그 반동으로 뒤로 물러나 검으로 상대를 겨누었다. 창백해진 낯의 사내 또한 계속 몰아붙이던 청명이 다시 덤벼오지 않자 휘청이면서도 검을 든 채로 그제야 숨을 골랐다. 어느새 난장판이 된 방 내부에서 한 사람의 흐트러진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청명의 서늘한 눈빛이 맞은 편의 사내를 훑었다. 당장이라도 상대를 짓눌러 터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살기 가득한 기세를 내뿜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 말해라. 허튼 소리하면 죽는다.”
당장에라도 저 목에 검을 박아넣기라도 할 것처럼 청명이 서늘하게 말했으나, 정작 그 말을 듣는 상대는 되레 그리 말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긴장을 놓은 것은 아니었는지,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흐트러진 자세를 바르게 잡았다.
“어디서 굴러먹긴, 이 새끼야. 화산에서, 굴러먹었지!”
말을 마치자마자 사내가 검에 내력을 밀어 넣기 시작하자 청명이 미간을 좁혔다. 쯧, 기어이 피를 보게 만드는군. 짧게 혀를 찬 청명 또한 발을 떼려 했다. 사내의 검 끝에 매화가 소담히 피어난 것을 보기 전까지.
그 순간, 청명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수없이 많이 펼쳤고, 많이 보아왔던 화산의 검이다. 청명이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청명쯤 되는 무인이 알아보지 못할 수도 없다. 저 사내가 매화검법의 껍데기만을 익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검법에 어린 화산의 혼과 그 검의 본의마저도 완벽히 이해하고 몸으로, 그리고 검으로 구현해냈다는 것을.
살기 하나 담겨있지 않은 검기가 청명을 피해 그의 곁으로 스쳐 지나가자,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베여나갔다. 그 순간까지도 청명은 마치 바닥에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 검을 마주한 순간, 청명은 내심 바라왔던 가정들을 떠올렸다.
대산에 올랐던 화산 사람 중 누군가가 죽지 않고서 겨우 대산을 내려가 타인의 도움을 받아 새로이 제자를 들였기를. 전쟁 중 실종되었던 청진이 사실은 절벽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던 것을 지나가던 이가 치료해주어 화산에 돌아오지는 못했어도 그 사람들에게 화산의 무학을 전수해주었기를. 그리하여 화산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를.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면서도, 끝내 놓지 못했던 기대를. 주먹을 움켜쥐자 거칠게 정리된 짧은 손톱이 제 살을 파고들었다.
“왜? 예서 더 증명이 필요하느냐?”
"……."
한참을 가만히 사내를 노려보던 청명이 말없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엉망이 된 방을 둘러보다가, 넘어뜨린 탁자와 의자를 원상 복구하여 자리에 털썩 앉았다.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여전히 멀뚱멀뚱 서 있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뭘 가만히 보고 있어? 거기 적당히 의자 두고 앉아라. 말이나 좀 들어보게.”
“……아.”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근처에 널브러진 의자 하나를 주워 청명의 곁으로 다가왔다. 많은 술을 올려두느라 객잔에서 가장 큰 탁자를 가져와 방에 두어 자리가 넘쳐났음에도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 청명의 곁에 다가와 의자를 두고 앉았다.
‘이거 진짜 뭐 하는 놈이지?’
청명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무엇이 또 문제냐는 듯 멀뚱히 쳐다보는 것이다. 보통 방금까지 칼을 맞댄 이의 곁에 아무런 무장도 없이 저리도 순순히 다가올 수가 있나? 심지어 저 녀석만 청명의 공격을 막아내고, 살초를 쓰지 않고서 매화검법을 보였을 뿐이지, 청명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그의 목을 벨 것처럼 검을 휘둘렀고 욕설을 뱉었으며, 기운으로 짓누르려 했다. 그런데도 마땅히 이곳이 제 자리라는 듯 청명의 곁에 다가와 앉은 것이다.
청명이 자신을 해칠 리가 없다는 확고한 신뢰. 그가 결코 타인으로부터 받을 수 있을 리 없는…….
청명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막힌 숨을 토해냈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 녀석은 누구고, 그 검은 어떻게 익힌 것이냐. 또,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청명의 이름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처참한 전쟁의 끝을 가져온 매화검존이란 이름은 다른 정파들에 의해 지워졌고, 되살아나 다시 살아가는 지금은, 청명이 스스로 그 이름을 지웠다. 얼굴조차도 온전히 내비치지 않았기에 남은 거라곤 대략적인 생김새의 서술과 혈화마검이니 하는 웃기지도 않은 별호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 사내는 청명의 얼굴도 이름도 모두 알고 있었으며, 기어이 제 공격을 견뎌내다 제게 예전에 사라진 화산의 검을 직접 보여주었다.
서늘한 청명의 두 눈을 마주한 사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나 싶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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