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도사 귀농일지

매화도사 귀농일지 07.

화산귀환 ncp 회지 샘플

비날공방 by 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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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시각. 그토록 보고 싶은 장문사형과 사제가 근처 국밥집에서 식사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청명은 양손에 짐을 잔뜩 든 채 기분 좋게 트럭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뤘던 은행 업무도 보고 정육점에서 고기도 잔뜩 샀다. 예약을 해뒀던 단골 만둣집의 고기만두와 김치만두 각각 한 박스를 챙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냉동실에 넣어놓고 그때그때 쪄 먹으면 갓 나온 만두나 다름없는 맛이었다. 청명은 만둣집 사장님이 덤으로 얹어 준 찐빵을 꺼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폭신한 반죽 아래 숨은 팥소가 달콤하게 혀를 감쌌다. 여긴 찐빵도 잘한다니까. 게 눈 감추듯 남은 찐빵까지 홀랑 먹어 치운 뒤 다른 생필품도 이것저것 사들인 청명의 양손에는 어느덧 짐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역시 한 번 가져다 놓고 다시 올 걸 그랬나? 주차장이 그리 멀지 않으니 조금만 힘내면 될 것 같았던 청명은 그냥 한 번에 옮기기로 마음을 먹었고 짐을 챙겼다. 휘청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양손에 탑처럼 짐을 쌓고 일어서는 데 성공한 청명이었다.

그렇게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걸어가던 도중 앞에서 오던 누군가가 청명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들고 있던 짐들이 휘청거리는 걸 어떻게든 간신히 균형을 맞춰 쏟아지는 걸 막은 청명이 뒤늦게 화를 내며 뒤를 돌아봤지만, 청명을 치고 간 이는 사과도 없이 이미 저 멀리 멀어지고 난 후였다.

”저 자식이…!“

쫓아가서 제대로 따질까 생각해본 청명은 한숨을 푹 내쉬며 걸음을 돌렸다. 시대는 변했고, 예전처럼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어쩌겠나, 평화를 사랑하는 소시민인 이쪽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줘야지. 무사히 주차장에 도착한 청명은 짐을 싣고 시동을 걸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새하얀 트럭이 시장 공용 주차장을 벗어나며 점차 속도를 높였다.

 

”하아…죽겠다 진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버스에서 내린 당보는 그대로 정류장 의자에 쓰러지듯 걸터앉았다. 망할 멀미 같으니. 당보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몸의 힘을 푼 채로 의자에 편히 기댔다.

당보는 청명이 나왔던 동영상에 제법 큰 재래시장이 나왔던 걸 떠올린 이후로 주말마다 전국의 모든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19살이란 나이는 학업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시기였으나, 지금의 당보에게는 공부보단 어딘가에 살아 있을 형님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렇지만 고작 버스 몇 시간 탔다고 멀미를 해대는 빈약한 몸뚱이라니. 오늘만큼 절벽을 내 집 앞마당처럼 넘나들고, 넓고 넓은 장강을 두어 걸음 만에 훌쩍 뛰어넘는 암존의 육체가 눈물 나게 그리운 적도 없었다.

둘러볼 곳은 많고 시간은 유한하다. 몸 상태가 완전히 좋아진 건 아니지만 더는 쉬고 있을 수 없던 당보는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재래시장은 입구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원래 이렇게 유동 인구가 많았나? 주변을 둘러보니 오일장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미치겠네. 사람을 찾아야 하니 인파 속으로 들어는 가야겠는데. 어질어질한 눈앞과 축축 처지는 몸 상태가 이 상태로 시장에 들어가면 분명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강력히 자기주장을 펼쳤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당보는 이를 악물고 인파 사이로 몸을 던졌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이를 악물며 꿋꿋이 걸음을 옮겼다. 형님에 대한 정보를 아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으악!“

상념에 너무 깊게 빠진 바람에 시야가 좁아져 있던 당보는 바로 앞에서 마주 오던 행인의 어깨를 제대로 치고 말았다. 헉, 내가 무슨 짓을. 바로 멈춰 사과하려 했으나 거침없이 밀려오는 인파의 물결이 당보의 등을 강제로 떠밀었다. 잠깐, 잠깐만요! 간신히 빈틈을 찾아 걸음을 멈춘 당보는 뒤를 돌아 제가 밀친 이의 모습을 찾았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쯤 튀어나온 남자라 찾는 건 쉬웠다.

그 머리에서 흔들거리는 익숙한 녹색의 머리 끈 역시.

”…도사 형님?“

당보는 밀려오는 사람들을 거슬러 올라가며 필사적으로 청명의 뒤를 쫓았다. 제발 가지 마시오, 형님. 뒤 좀 돌아보면 내가, 당신 아우가 여기 있는데 왜 그리 매정히 멀어지시는 겁니까. 바람을 타고 날아온 매화 꽃잎이 한순간 당보의 시야를 가렸다. 그 찰나에 사라진 청명의 모습에, 시장 입구까지 되돌아 나온 당보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열이 오른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무엇보다도 바로 근처에 있던 도사 형님을 이렇게 쉽게 놓쳐버린 자신에게 당보는 큰 좌절감을 느꼈다. 평소에 운동 좀 미리 해 둘걸. 최소한 건강이라도 잘 챙길걸.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한 당보는 거리 한복판에서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적처럼 청명이 탄 흰색 트럭이 당보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당보는 기회가 찾아온 것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청명을 떠나보내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듯, 인생은 언제나 나쁜 일과 좋은 일이 번갈아 오기 마련이다. “청명아, 청명아!”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당보는 청명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시장의 다른 출입구에서 뛰쳐나온 두 사람이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본 당보는 저도 모르게 그들의 것일 이름을 중얼거렸다.

“청문 진인?”

“…!”

“그 옆은, 청진 진인…”

“…암존? 정말 암존이 맞습니까?”

되묻는 청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당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을 찾으러 온 곳에서 과거의 연을 만나게 될 줄은 누가 알았단 말인가.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기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보는 청명과 지냈던 전생이 자신의 꿈은 아닐까 늘 불안했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기억이다. 전생의 삶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으로 이 기억을 진실이라고 믿는단 말인가. 가슴이 미어지도록 밀려오는 누군가를 향한 선명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아니었다면 당보 역시 단순한 꿈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괜찮습니까?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한데…”

청문이 당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청진이 당보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미쳤습니까? 열이 이렇게 나는데 당장 쉬지 않고! 청진의 잔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청문의 다정한 걱정은 흡사 오래전의 그리운 풍경 속으로 돌아온 것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괜찮,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만 쉬면… 금방 괜찮아지니까. 그러니까…”

“잠깐, 암존, 암존!”

부디, 두 분만큼은 제가 잠에서 깨어도 사라지지 말아주십쇼. 그동안 은연중에 쌓였던 혼자라는 불안감이 해소되어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아니면 아픈 몸에 쌓여가던 누적된 피로가 끝내 쏟아진 것일까. 당보는 저를 부축하는 손길들을 느끼며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를 괴롭혀오던 오랜 불면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간은 유수처럼 흐른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온 것이 엊그제 같건만 계절은 어느새 모습을 바꾸어 여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었다. 만개했던 매화가 저문 자리에 선명한 초록색 매실이 주렁주렁 열렸다. 사다리를 타고 나무를 샅샅이 뒤져, 잎사귀 뒤에 숨은 마지막 한 알까지 수확한 청명의 이마엔 구슬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작년에 딴 매실 상태가 괜찮아 내년엔 매실도 온라인 쇼핑몰에서 팔 생각이긴 했지만, 올해는 청명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수확량이 많았다. 덕분에 지난 3일 내내 매실 수확과 소분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한 해의 수확물이 바구니들에 한가득 담겨있는 모습을 보니 제법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소분한 매실을 준비한 상자에 포장한 뒤 청명은 트럭을 몰아 시내로 향했다. 예약 주문을 넣어둔 고객들에게 택배를 보내고 매실청을 담그기 위한 통을 구매하기 위함이었다. 매실주야 주류 판매 허가가 있어야 하니 넘어가도, 매실청은 포장 용기만 잘 고르면 온라인에서도 판매할 수 있다. 지금 청을 담가 내년 매실 판매 기간에 함께 내놓으면 잘 팔리겠지. 돈이 되는 일은 뭐든지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청명이었다.

잡화점에 들러 적당한 크기의 통을 모조리 쓸어 담은 청명은 트럭 짐칸에 통들이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다. 설탕은 이틀 뒤 택배로 도착하고, 매실은 깨끗이 손질해 말리는 중이니 집에 돌아가 통만 씻어두면 당장 할 일은 끝나는 셈이다. 이런 날엔 맛있는 걸 먹으면서 쉬어야 하는데. 기왕 나온 김에 저녁 장을 봐 갈까 생각한 청명이 다시 시장으로 걸음을 옮긴 그때, 근처 종묘상에서 나오던 누군가 큰소리로 청명을 불렀다.

“총각,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청명이 다니는 단골 종묘상의 주인이 손을 흔들었다. 덩치가 원가 크고 첫인상이 험악해서 처음 만났을 땐 어느 서생 같은 녹림왕이 데리고 다니던 덩치 큰 부하인 줄로만 알았다. 사내는 손에 든 비닐봉지를 청명에게 내밀었다. 다양한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렇게 더워서 원.”

바쁜 일 없으면 아이스크림 샀으니까 가게에서 먹고 가. 에어컨 틀어놔서 시원해. 우리 집사람이 식혜를 만들었는데 총각이 저번에 맛있다고 해서 챙겨준다고 따로 빼놨거든. 그것도 가져가고. 예상치 못한 선물의 소식에, 청명은 팥 맛 하드를 꺼내 입에 물고는 종묘상 주인장의 뒤를 졸졸 따랐다.

종묘상의 문을 열자, 온도가 뚝 떨어진 시원한 바람이 햇볕에 달궈진 뜨거운 피부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서늘한 공기가 열기로 가득했던 폐부를 식혀주는 감각에 청명이 나른한 한숨을 뱉었다. 종묘상은 총 3층 건물로 가게 내부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자리했다. 식혜를 가져올 테니 잠깐 기다리고 있으란 말과 함께 주인장이 위층으로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벽에 붙은 최신 유행 작물과 새로 나온 비료 광고를 구경하며 주인장을 기다리고 있던 청명의 귓가에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호기심에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힐끗 쳐다보니, 누군가 부산스럽게 아래층으로 내려오고 보인다. 조금 부스스한 머리를 꽁지로 묶은 청년이 고개를 숙이고 구긴 신발을 제대로 고쳐 신고 있자, 계단 위에서 주인장이 큰 목소리로 물었다.

“아들, 어디 가냐?”

“어머니 심부름이요. 슈퍼 갈 건데 아버진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청명은 제 또래로 보이는 청년의 목소리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같은데… 잠시 기억을 뒤지던 청명은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떠오른 이름을 툭, 하니 내뱉었다.

“…구칠?”

“응? 누구…”

이름이 불린 청년, 구칠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시끄럽게 떠들어 죄송하다고 말하려던 구칠은 손님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입을 떡 벌린 구칠이 청명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너, 초삼이…”

“뭐야, 아직 안 갔어?”

응? 둘이 아는 사이야? 식혜와 아이스팩이 든 봉투를 들고 내려온 종묘상 주인이 둘을 번갈아 쳐다보자, 퍼뜩 정신을 차린 청명은 여전히 굳어있는 구칠의 손을 잡고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지으며 대신 대답했다.

“대학 다닐 때 만난 적 있어요. 아저씨 아들이었다니 세상 참 좁네요.”

“그래? 이야, 우리 아들이랑 아는 사이였으면 할인 좀 팍팍 해줄 걸 그랬네.”

“지금도 많이 해주고 계시면서 뭘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드님 좀 잠시 빌려 가도 될까요? 겸사겸사 저녁도 먹고 오고 싶은데. 청명의 말에 주인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구칠의 손에 오만 원짜리 두 장을 쥐여줬다. 이걸로 맛있는 거 먹고 와라. 네 엄마 심부름은 내가 다녀올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식혜는 다음에 와서 가져가! 세심한 배려에 고개를 숙인 청명은 그대로 구칠의 손을 잡고 종묘상을 빠져나왔다. 내뱉는 숨이 뜨겁다. 서산 끝에 걸린 붉은 하늘만큼, 마주 잡은 청명의 손등 역시 붉게 물들어있었다.

 

* * *

 

구칠이 초삼을 마지막으로 본 건 그의 장례식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부상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렸던 친구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니 너무 오랫동안 슬퍼하지 말라 한 부탁이 청명의 유언이었기에, 장례는 엄숙하고 침울한 분위기보단 작은 연회 같은 분위기로 흘렀다. 그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웃으며 눈물이 담긴 잔을 들었다. 먼 길 떠나는 이가 걱정과 미련에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흥겨움 속에 슬픔을 녹였다.

구칠은 그 잔을 몇 번이고 비우며 간절히 빌었었다. 이제는 고통 없이 편히 쉴 수 있기를. 선계에 올라 그리운 이들을 만나고, 맛있는 거 잔뜩 먹고, 좋아하는 술도 실컷 마시면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그랬는데, 훌쩍, 언제 이렇게 건강해져선…”

“그만 울어, 그러다 진짜 탈수 걸리겠다.”

청명은 탁자에 머리를 박고 눈물로 고사를 지내는 구칠의 앞접시에 다 구워진 삼겹살을 올려주며 구칠의 몸을 일으키고, 새 물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사람을 만난 건 백아 이후 처음이었던 청명 역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에 눈물이 핑 돌뻔했으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펑펑 우는 구칠의 모습에 나오려던 것마저 쏙 들어가 버린 후였다.

“훌쩍…초삼아 이거 다 구워졌다. 많이 먹어. 부족하면 또 시키고…”

“나 혼자 지금 5인분 먹은 거 알아? 너도 좀 먹으라고! 그만 좀 울고!”

“계란찜은 안 부족해? 된장찌개도 리필할까? 양념갈비도 먹을래?”

“배 터지겠다!”

다사다난한 저녁 식사 후. 청명은 결국 약국에서 소화제를 하나 사 먹었다. 겨우 진정한 구칠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미안, 속 많이 안 좋아?”

“너, 진짜 이번만 봐주는 줄 알아. 우욱…”

“미안, 진짜 미안…”

“…미안하면 다음에 나랑 또 밥 한번 먹던가.”

그땐 내가 살 테니까, 뭐해? 빨리 번호 찍어. 구칠은 청명이 내민 핸드폰에 또다시 울상을 지었다. 내가 준 건 한 줌의 도움뿐이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너는 항상 내게 다정하구나. 참아보려 해도 기어코 눈물이 다시 터진다. 식당에서 너무 서럽게 울었던 구칠 때문에 이상한 오해를 살 뻔한 청명이 작작 울라며 구칠의 등짝을 내려쳤다.

주차장까지 따라 나온 구칠의 배웅을 받으며 청명은 집으로 돌아왔다. 뭘 하다 이제 왔냐며 우다다 달려오던 백아가 청명의 옷에서 풍긴 고기 냄새를 맡고 잔뜩 성질이 나 털을 부풀렸다. 너만 먹냐! 내 고기는! 청명이 오면 같이 먹으려고 저녁도 굶고 있었던 백아는 청명에게 항의하러 어깨에 올라타려다 그대로 붙잡혀 품에 끌어안겼다. 저를 끌어안은 손이 희미하게 떨린다. 백아는 품에서 나오려던 발버둥을 멈추고 청명의 호흡에 집중했다. 전생의 청명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이런 손으로 쓰다듬었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간 탓이다.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며 괜찮냐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백아에게 청명은 떨리는 목소리로 괜찮아, 라고 속삭였다.

세 번째 삶은 평화롭고 온화했으나, 청명에게 당연하던 세계는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내력과 무공은 그저 허구의 산물로 여겨졌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청명은 자꾸만 숨이 막혔다. 두 번의 삶으로 과거의 그리움에 매몰되어 익사하지 않는 법은 배웠으나, 추억과 그리움을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한때는 그것이 못내 괴로웠던 적도 있었으나…

“괜찮아, 정말 별거 아냐.”

“끼잇…”

“그냥, 네가 있어 줘서 고마워서 그래.”

정말로, 네가 없었으면 지금보다 더 텅 빈 채로 살았겠지. 백아는 작은 발로 청명의 뺨을 툭툭 치더니, 이내 품을 빠져나와 청명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무게와 온기가 달라붙어 머리를 비비자 청명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백아의 저녁밥은 청명이 아껴두었던 한우가 올라왔다.

“킷!”

“나도 먹으라고?”

“키잇!”

백아는 잘린 고기 한 점을 들어 청명의 입에 넣어주고 나서야 만족한 듯 식사를 계속했다. 고기 굽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청명이 심혈을 기울여 구운 스테이크는, 중원 시절부터 살아온 영물이 눈물을 흘리며 먹을 정도로 끝내주는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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