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존이설/청명이설] 타생지연他生之緣

[청명이설/검존이설] 他生之緣(타생지연) - 1. 명재경각

구화산으로 트립한 유이설

他生之緣(타생지연): 타생의 인연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낯모르는 사람끼리 길에서 소매를 스치는 것 같은 사소한 일이라도 모두가 전생의 깊은 인연에 의한 것임을 이르는 말. 

*청명이는 이립~30대중반이며 원작과 다르게 다소 바보인 편

*원작 파괴, 적폐, 무협알못 

*각자 해석에 따라 논컵으로 봐도 상관x

*원작 시츄들을 패러디한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 命在頃刻(명재경각): 목숨이 다할 경각에 있음. 

* 전편 소장본 구매 폼(설 이후 소량 재주문 예정):



유이설은 죽음을 맞고 있었다.

 

한껏 끌어올려 두르던 공력, 온몸을 지탱하던 근육의 마지막 한가락까지 전부 다 하였다는 감각. 그리고 이다음은 분명 죽음일 것이라는 당연한 예감. 위태롭게 입가를 드나드는 숨 한 줌에도 짖은 피 냄새가 배어있었다. 이 모든 것은 곧 꺼져가는 생명과 함께 점점 흐려져 갔다.

그녀가 무인으로 살아가며 죽음을 예감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으나, 그 후의 느낌이 어떠할지에 대하여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막연히 상상해 온 바와 다르게 매우 고요하고 어딘가 친숙하기까지 했다. 생뚱맞게도, 유이설은 죽어가는 와중 드디어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를 생각할 틈도 없이 다음 순간, 책장을 넘기듯 유이설을 둘러싼 감각이 한번에 바뀌었다.

상처 곳곳에서 새어 나와 온몸을 적셨던 피는 착실히 그녀의 몸을 돌며 체온을 데우고 있었고, 입안에는 약초와 감초의 쓰고 달콤한 향이 가득했다. 눈꺼풀을 덮은 온기는 한낮의 햇빛이었다.

유이설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듯 생경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찼다. 유이설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화산?”

“헐 미친, 눈 떴어.”

유이설은 드물게도 눈을 홉떴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화산의 무복을 입고 있었으나,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자신을 모르는 듯 놀란 기색이었다.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침상에서 나온 유이설은 한껏 흥분한 표정으로 의약당을 나서려는 화산의 제자를 앞질러 의약당을 뛰어나갔다.

대부분 맑았던 화산의 하늘은 그대로였으나 그것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달랐다. 유이설은 익숙함이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는 낯선 전각들과 당가의 장인들이 새겨놓았던 매화가 없는 기둥들을 눈에 담았다. 유이설은 무어라 소리치며 자신의 어깨를 잡으려는 손을 뿌리치고 경신법을 써가며 화산 곳곳을 누볐다. 갑자기 들이닥친 자신을 보고 놀라는 화산의 제자들 중에 유이설이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장문인, 장로, 사숙, 사형, 사질들. 유이설은 찾아 헤매며 화산을 이리저리 들쑤셨다.

“어딜 가는 거야!”

“저기 청명 사형이 간 방향 아닙니까?”

“미친 빨리 사형 불러!”

‘청명?’

유이설은 귀에 들어온 익숙한 이름에 잠시 주의를 기울였으나, ‘청명 사형’을 부르는 목소리는 당소소의 것이 아니었다. 유이설은 눈썹을 찡그렸다. 이곳은 분명 화산임에 틀림없으나 유이설이 알던 화산은 아니다. 유이설은 어느새 문외로 나와 빠르게 절벽들을 지나치다가, 이끌리듯 낙안봉으로 향했다.

유이설은 답지 않게 흐트러진 숨을 겨우 정리하며 나무 사이를 걸었다. 해가 지기에는 좀 이른 시각의 우거진 숲은 언뜻 유이설이 기억하던 화산과 비슷한 것도 같아,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속도를 줄여 천천히 낙안봉을 살피던 유이설의 눈에 어떤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사내의 뒷모습이었다. 그도 화산의 흰 무복을 입고 있었다. 숱이 많은 흑색의 머리칼을 대충 위로 질끈 묶은 모습은 유이설로 하여금 그녀의 사질을 떠올리게 했지만 저 자는 청명보단 선이 더 굵은 느낌이었다. 유이설은 걸음을 멈춰 서고 멀찍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남자를 관찰했다.

‘달라.’

게다가 당장 앉은키만 보더라도 유이설이 아는 청명보다는 넉넉히 큰 체구였다. 그는 확실히 청명이 아니었다. 이곳의 화산을 살피면서 들은 말에 의하면 이곳에도 청명이라는 제자가 있긴 한 듯했지만 아마 그도 그녀의 사질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낯선 곳에 청명만 떡하니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일이다.

그럼 여긴 어디인가? 꿈? 선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주화입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 즈음, 앞에서 들려온 풀썩 쓰러지는 소리에 유이설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곧은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이가 옆으로 픽 쓰러져 있었다.

“……!”

유이설이 급히 발걸음을 떼어 다가가자, 그에게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도로롱….”

“…….”

“도로롱…. 피유유….”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제서야 그의 주변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병이 눈에 들어왔다. 분주를 가득 담았을 술병이었다. 물론 지금은 텅텅 비었다. 유이설은 코를 찌르는 술냄새에 눈을 찡그렸다.

“한량.”

 


 

“그럼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오?”

“네.”

화산의 본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초옥.

유이설은 자신과 마주 앉은 화산의 도사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목소리와 자세에서 느껴지는 현기가 백천, 윤종과는 갖다 붙이기도 어려웠다. 자신을 청문이라 소개한 자의 눈에는 현종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오히려 그 이상의 정광이 서려 있었다. 옛 화산의 도사들은 살아있는 신선이라고도 불렸다는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갑자기 의약당을 뛰쳐나간 것은 눈을 떠보니 낯선 곳이라서 놀랐기 때문이었고.”

“놀라게 하여 죄송합니다. 제자가 생각이 짧...”

“제자?”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청문은 진위를 가늠하려는 듯 유이설의 눈을 쳐다보았다. 기억을 잃었다는 말이 아예 거짓말인 것은 아니었다. 기실 유이설은 이곳에 오기 직전의 기억을 잃었다. 자신이 죽기 직전이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외의 모든 것은 잘 기억하고 있지만.

유이설은 별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청문을 마주 바라봤다. 십 수초가 지나 청문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소저도 무인이온데.”

“…….”

“하기야 지금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없겠군, 일단 기억이 돌아오기까지 잠시 화산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것이 좋겠소. 내 일단은 장문인께 이야기 해둘테니.”

“감사합니다.”

“다만.”

의심이 가는 바가 있지만 일단은 넘어가주겠다는 기색이었다. 다만, 큰 문제는 바로 지금부터라는 듯 청문이 눈을 치켜 떴다.

“아까 본 녀석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소.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가만히 있으면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괜히 자극해서 날뛰면 나도 말리기 힘드니-”

“사형, 저 뒤에 있는데요?”

“청명이 거기 있었느냐?”

“사형이 벌 세워놓았잖아요!”

“몰래 술 처먹다가 걸려서 벌을 받고 있는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아 씨. 이번엔 진짜 안 들킬 수 있었는데.”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번 달 용돈도 반으로 삭감하마. 난 재경각에나 가야겠다.”

“아 사형!”

유이설이 고개를 돌려 소리치고 있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청명이라고 불린 사내는 유이설과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 기색인지 유이설로부터 고개를 홱 돌렸다. 건장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얌전히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것이 퍽 이상하긴 했다. 청문이 방을 나가며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청명아. 비록 신분은 모르지만 이 소저도 화산의 손님이니, 무례를 범하면 죄를 물을 줄 알거라.”

청문은 한숨을 푹 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처소를 떠났다. 오늘은 정말 곱게 수련만 하려 했단 말이에요. 일단 한 잔하고 한적한 곳에서 한숨 자고 난 다음에... 투덜대며 입을 한껏 삐죽이고 있던 청명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유이설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유이설이 무릎을 굽혀 앉아 고개를 쑥 내밀고 청명을 관찰하듯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아씨 깜짝이야! 귀신이야? 어떻게 기척도 없이 이렇게 가까이 왔어!”

“청명?”

“청명인데 왜. 뭐. 기억 다 날아갔다더니 내 소문은 기억이 나나보지?”

“소문?”

청명이 슬쩍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는 겁이라도 주려는 듯 우악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도복이 아니었으면 도사라고는 추측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인상이었다. 유이설은 말 없이 청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질과는 다르게 생겼지만 하는 것이 매우 닮았어. 얼굴 막 쓰는 것부터 해서 말투도.’

청명은 유이설의 끈질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종종 눈을 슬쩍 피했다. 목에 검을 들이밀어도 결코 눈을 돌리지 않았던 사질 청명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이름이 같고 닮은 곳이 많아서인지, 유이설은 자꾸 이 사람과 자신의 사질을 비교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매화검이 너 때문에 술 먹고 꼴은 거 들켜서 손들고 있으니까 재밌냐? 어? 재밌어?”

“뭐?”

“뭐가 뭐!”

유이설은 여기서 들으리라 생각도 하지 못한 단어에 적잖이 당황했다.

‘매화검...?’

종남에게서 종종 듣던, 매화검존을 칭하는 별호. 의도적으로 별호에서 ‘존’을 빼고 부르는 그 밉살스러운 행동 때문에 몇몇 화산의 제자들이 화를 참지 못하고 덤벼들어, 서로 작은 마찰을 빚어내기도 했다. 종국에는 어른들의 중재가 필요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매화검은 매화검존이 검존이라는 별호를 얻기 전 얻은 별호로써, 종남에서는 이 별호가 더 익숙하며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명칭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종남의 옛 문헌에서는 매화검존보다는 매화검이라는 호칭이 더욱더 많이 사용되었다며 화산의 제자들에게 모멸감을 주기까지 했다. 그랬기에 유이설도 매화검이라는 별호를 알고 있던 것이다. 유이설이 겨우 입을 떼었다.

“...혹시 몇 대?”

“십삽대지 뭐야. 그건 왜? 아니 어디서 은근 슬쩍 반말을...”

자기도 모르게 순순히 대답해버린 청명은 뭐라 더 쏘아붙이려다가 예상하지 못한 유이설의 표정에 덩달아 굳어버렸다.

“야. 뭐야. 왜 그래?”

유이설은 마치 자신이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홀린 듯이 초옥을 뛰쳐나가, 경공을 펼쳐가며 화산의 산문을 향해 달렸다. 유이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마교에게 습격을 받아 불에 그을리고 금이 가기 전의, 오랜 대화산파 옛 담벼락의 모습이었다.

예감이 하나 들어맞자 유이설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죽음을 예감했건만, 유이설은 선계도 지옥도 아닌 백 년 전의 화산으로 돌아가버린 모양이다.

“야! 너 어디가!”

유이설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인지 노발대발한 청명이 버럭버럭 소리치며 그녀를 쫓아왔다.

“너 기억 잃은 거 다 뻥이지? 여기 와서 뭐 꾸미려다가 뭐 수틀려가지고 담벼락 넘어서 도망치려는거지? 정체가 뭐야? 종남이냐? 너 이씨 딱 걸렸어.”

유이설은 떨리는 눈으로 제게로 달려드는 청명을 바라보며 화산의 제자로서 숱하게 읽고 들어온 몇 줄의 글귀를 떠올렸다.

 

대 화산파 13대 제자

 

천하삼대검수(天下三代劍手)

 

매화검존(梅花劍尊) 청명(靑明)

 

천하를 혼란에 빠뜨린 고금제일마 천마(天魔)의 목을 치고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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