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 당보드림
당보 여장 시켜주는 드림 / 캐붕
당보는 어쩌다 제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드림주의 앞에 앉게 되었는지 생각했음. 턱을 스치는 부드러운 손끝에 어린 아이처럼 몸을 움찔거리기도 한두 번이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불만을 내비치면 아프지 않게 딱밤을 때려 주름을 없애는 드림주의 상냥하기 그지 없는 행동에 당보는 순순히 주름을 지우고 생각을 이어갔음. 그러니까,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일이 있은지 석 달이 지나진 않았을 것임.
그날은 언제나와 같이 드림주와 당보가 만나 거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음. 청명이 빠져 간만에 연인과의 달콤한 술자리를 즐기던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이나 주고 받았음. 청명이 있을 때는 하지 못했던 손잡기도 맘껏 하고 가끔은 담백한 사랑 고백도 주고 받으면서. 남이 보면 퍽 다정한 연인의 가벼운 술자리였겠지만… 어찌 됐든 두 사람은 청명과 마주앉아 대작을 할 정도로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 사람들이었음. 평범한 연인의 술 한두 잔이 아니라 궤짝을 바닥에 깔고 마시고 있다는 게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것임.
가벼운 백주를 궤짝으로 하나씩 비운 두 사람은 알딸딸하게 올라온 기분에 해실해실 웃으며 떨어져 있던 몸을 붙여 앉았음. 적당히 달아오른 얼굴에 찬 바람이 닿아 적당히 기분이 좋았던 잠깐동안 서로 말 없이 흩날리는 매화꽃잎을 본 두 사람임. 한 차례 커다란 바람이 지나가고 찾아온 정적을 깬 건 드림주였음.
당보야.
응? 왜 부르시오?
우리 내기나 하나 하자.
그래, 처음 말을 꺼낸 건 분명 드림주였음. 청명 다음으로 누가 술을 가장 잘 마시는지 확인하자는 별 시덥잖은 내용. 술을 홀짝이며 관심이 없다는 티를 내던 당보를 붙잡은 건 덧붙은 한 마디였음.
네가 이기면 소원을 들어주마!
소원?
이제 와 생각해보면 소원이라는 걸 내기의 상품으로 걸 때부터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걸지도 모름. 이미 청명과의 술 내기에서 이겨본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걸 몰랐던 당보는 소원이라는 말에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내기에 응했음. 룰루랄라 콧소리나 흥얼거리며 소원으로 어떤 걸 빌지 고민하는 당보와 음흉하게 웃는 드림주의 술 내기가 시작되었음.
이미 궤짝 하나씩을 비운 상태에서 술이 더 들어가니 취하는 건 금방이었음.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바닥과 가슴팍이 닿아 바닥을 기어다니기까지 한 시진이 채 걸리지 않았을 듯. 드림주는 빈 호리병을 붙잡고 연신 당보의 이름을 불러댔음. 당보야!!! 보야!! 왜 이렇게 몸이 차느냐! 정신 차리거라. 예서 자면 입 돌아간다아아!! 당보는 베개를 품에 꼭 끌어안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중임. 누님, 누니임… 내가 누님에게, 비밀을 말할 게 잇쏘… 내가 사실… 십년 전부터 생각했떤 건데. 누님은… 사실 개인게 틀림 없쏘.
객주의 주인이 이불이 필요하냐 물으러 왔다가 돌아간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은 각자 열심히 서로의 이름을 부름. 그렇게 술에 꼴아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날이 밝았음. 내기의 승자가 누군지는 고사하고 내기를 했었는지조차 잊은 드림주는 숙취에 찌든 몸을 일으키고 방 안에 널브러진 술병들과 당보를 하나 둘 치우기 시작했음. 비척비척 몸을 움직여 얼추 방을 치운 드림주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당보의 위로 풀썩 엎어졌음.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과 짙은 술냄새 속에서 미미하게 맡아지는 당보의 체향에 드림주가 느리게 호흡함.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제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드림주는 당보의 입가에 붙은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고 몸을 일으켜 당보의 손을 찾았음. 당보가 잠에서 깰 때까지 손이나 잡고 있자는 생각에 손을 찾은 것이지만, 드림주를 반긴 건 익숙한 당보의 손이 아니었음. 아니, 얘는 손바닥에 뭘 써놓고 잔 거야? 당보의 손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악필로 써진 한자를 확인한 드림주가 그 한자가 뜻하는 바를 알아채고는 당보를 흔들어 깨웠음.
당보야!! 일어나라! 아, 얼른 일어나래도?!
으억? 뭐, 뭐요? 사파라도 쳐들어왔소?!
아니! 네 손에 써진 한자 좀 봐라!
응? 손? …이게 뭐요?
뭐긴 뭐야! 어제 내기에서 내가 이겼다는 표시지! 크, 술에 꼴은 와중에 글씨 쓸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몰라?
당보의 손에 적힌 건 다 뭉개져 알아보기 힘든 敗(패할 패)자였음. 방금 막 일어난 당보는 자화자찬을 시작한 드림주를 멍하니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제 손에 쓰인 한자를 반대편 손으로 벅벅 문질렀음. 아니, 이게, 왜, 안 지워져?
크크, 그래가지고 내가 이긴 게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닌데 뭘 지우려고 하느냐. 너는 그냥 딱 기다리고 있거라. 내 금방 소원을 빌어주마.
뭘 꾸미는지 몰라도 깔깔대며 웃는 드림주가 아니꼬와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투덜대던 게… 그래 그게 석 달이 조금 안 되었지. 그리고 오늘 아침 누님께서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당가에 쳐들어왔고, 저를 냅다 의자에 앉히더니 눈을 감으라 한 것이 방금 전의 일이고.
당보가 바보가 아닌 이상 드림주가 제게 하는 게 화장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음. 소원으로 정인에게 화장을 해준다는 데 당보가 뭐라 할 수 없는 노릇 아니겠음? 다만 간지럽게 볼을 스치는 손길이나 가까이서 닿는 드림주의 숨길에 가슴이 두근대는 게 참을 수 없어 불편할 뿐이지.
아니 근데 누님, 화장은 해본 적 있소?
날 뭘로 보고. 이래봬도 여기저기 불려나간 적이 수차례다. 예전에 스승님, 사조님들 화장을 거둔 적도 있고.
에잇, 말 좀 그만 하거라. 드림주는 그리 말하며 당보의 턱 끝을 붙잡았음. 졸지에 턱이 붙잡혀 입을 다물게 된 당보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차분하게 숨을 내쉬고 뱉었음. 드림주의 뭉근한 손길이 입술이며 눈가에 닿을 때 숨을 들이마시고, 멀어질 때마다 숨을 내쉬길 수차례. 시간이 지날 때마다 심장이 진정되기는 커녕 더 빠르게 뛰는 게 고문처럼 느껴지는 당보임. 고작 화장을 받는 게 이렇게 자극적일 줄 알았다면 차라리 당가의 비급을 보여준다고 하는 게 나았을 것임! 장포 속에서 꽉 쥔 주먹이 당보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음.
얼추 시간이 지났을 때가 되어서야 가까이서 닿던 숨이 멀어졌음. 당보는 조심스럽게 숨을 내뱉고 한참동안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뜨려고 했으나 드림주가 그런 당보를 말렸음. 아직 더 남았으니 눈을 뜨지 말라니. 대체 뭘 더 할 게 있다고 그러는지. 덕분에 당보는 면경도 못 보고 눈만 감고 있음. 당보가 가벼운 불만을 품은 지 금방. 무언가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에는 뒤쪽에서 드림주의 손길이 느껴졌음. 꽂아두었던 비녀가 빠지고 엉킨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손빗으로 쓸어내리는 감각에 당보의 뒷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음. 털 끝이 곤두서고 있을리가 없는 머리카락의 감각이 예민하게 손길을 감지하는 것 같은 느낌에 귀 끝에 열이 몰리는 당보임.
사락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꼬고 틀어올려 무언가를 꽂아 고정하길 한참. 화장과 머리치장을 끝낸 당보를 자리에서 일으킨 드림주는 당보에게 아직 눈을 뜨지 말라며 신신당부하고 당보의 허리로 손을 올렸음.
으아악!! 누님, 뭐 하는 거요?!
가만히 있어봐라 이왕 하는 거 옷도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내가 하겠소!
홀딱 벗은 몸도 본 사이인데 뭘 그리 내외를 하고 그러는지… 정 그러면 내의 빼고 전부 벗거라.
내외?! 내애외?! 아니 밤일을 치르는 것도 아니면서 옷을 전부 벗으라는 말에 깜짝 놀라는 게 그리도 이상한 일인가? 게다가, 자기 스스로 옷을 벗는 것과 남이 벗기는 것은 천지차이가 있는 것인데! 이 누님이 정녕 미친 건가?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면서도 잠깐 멈칫할 뿐 순순히 옷을 벗은 당보임.
흰 내의만 입은 채로 눈을 꼭 감고 드림주의 앞에 서 있는 게 꼭 누구에게도 말 못할 죄를 저지를 것 같았을 듯. 뭐, 지금 상황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건 비슷하니까 어찌 보면 이것도 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당보가 끙끙대며 신음하고 있는 와중에 드림주가 당보의 품으로 쏙 들어와 당보를 껴안음. 훅하고 다가오는 온기에 당보으 심장이 덜컹 내려앉음. 뭐지? 설마 누님이 정말 나와 밤일이라도 치를 생각인가?! 아직 한낮인데?! 손끝을 움찔대며 드림주를 마주안아야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드림주가 당보의 품에서 빠져나감.
당보야.
…왜 부르시오?
내가 네게 옷을 입혀주기 위해 네 품에 안기는 게 그리도 가슴이 뛰더냐.
낄낄 웃으며 놀리는 투로 이야기하는 드림주에 당보가 이를 악물었음.
그 입 좀 다물면 안 되겠소?
더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여전히 웃고있는 드림주 덕에 당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음. 그러거나 말거나 드림주의 손길에 인형이 된 듯 옷이 입혀지길 수 분. 이제 눈을 떠도 된다는 드림주의 말에 당보가 눈을 뜨고 면경을 찾았음. 평소 간단하게 입던 것과 다르게 치렁치렁한 옷들이 거추장스러웠을 듯. 어기적 어기적 걸음을 옮겨 탁상에 올려진 면경을 확인한 당보가 눈가를 찌푸리고 얼굴을 돌려봤음. 눈을 깜빡이며 면경 속 얼굴이 자신임을 확인한 당보가 고개를 팩 돌려 드림주를 바라보고 빽 소리쳤음.
지금 내게 혼례 화장을 한 거요?!
뭐 잘못됐느냐?
뻔뻔한 드림주의 행동에 할 말이 없어진 당보는 헛웃음이나 뱉으며 면경을 들어 얼굴을 다시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함. 이마에 붉게 그려진 문양이며 붉게 칠해진 눈가, 마찬가지로 붉은 입술이 제법 예뻤지만… 자신이 이런 꼴을 하고 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음. 머리도… 이런 걸 어디서 준비해왔는지… 정말 여인들이 혼례에서나 쓰는 금 장신구를 얹어 예쁘게 고정한 게 대단하기만 함. 아무래도 제 스승과 사조들의 화장을 도운 적이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것 같음.
당장 혼례를 올리러 가도 되겠구나.
그리 말하는 드림주의 눈이 정말 예쁜 보석이라도 보는 것처럼 다정해서 당보는 입을 앙 다물었음. 치사하게 은은한 미소를 지어 대꾸도 못하게 할 건 무언지! 제 정인이지만 드림주는 정말 치사하기 그지 없는 사람임. 당보는 속으로 생각하고 부러 주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질문을 던졌음.
…옷은 또 어디서 구했소? 나한테 맞는 혼례복은 없었을 텐데.
그거야 내가 직접 주문을 맡겼지. 그 옷만 해도 금자 세 개는 될 거다.
상상치도 못한 금액에 입이 떡 벌어진 당보임. 드림주가 읏차 하며 몸을 일으키고 손수 당보의 입을 닫아주었음. 당보야, 진짜 혼례나 올릴까? 주제를 돌리려던 노력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갔음. 아니, 이 인간이 정말 왜 이래? 한 소리를 하기 위해 드림주를 바라본 당보는 눈꼬리를 접어가며 예쁘게 웃는 드림주에 한 소리 하려던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 했음. 다행히 정신을 차려 여인들이 입는 옷을 입고 화장을 한 채 혼례를 치르러 가는 일은 없었지만.
흥, 이 상태로는 절대 싫소.
예쁜데 왜.
절대! 싫소!!
하이고. 그래라, 그래. 혼례에는 내가 화장을 하마.
인심쓰듯 말하는 드림주와 그런 드림주가 어이가 없는 당보였을 듯. 와중에 드림주가 예쁘게 치장하고 꽃가마에서 내리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당보임. 딱히 혼례를 올릴 생각은 없었지만, 올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음. 혼례를 한다면… 화산에서 하는 게 낫겠지. 당가는 영… 좋은 환경은 아니지. 애를 키우기에도… 나이를 먹어 애를 보지 못하는 게 퍽 아쉬웠던 당보가 한숨을 푹 내쉬었음. 드림주를 닮은 아이라면 딸이든 아들이든 누구보다 사랑해줄 자신이 있었는데. 혼자 상상 속에서 드림주를 닮은 딸을 만들어 당청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을 지은 당보를 현실로 끌어내 듯 드림주가 당보의 두 볼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음.
예쁘구나. 이정도면 나보다 예쁜 것 같아.
내 눈에는 누님이 더 예쁘오.
입술이 눌려 어눌해진 발음에 웃음을 터뜨린 드림주가 천천히 당보의 입술 위로 입을 맞추었음. 가볍게 입과 콧등, 볼에 쪽쪽 입을 맞추던 드림주를 크게 입을 벌려 삼킨 당보는 한참동안 드림주를 품에 안고 있었을 듯.
…
당보는 바닥에 떨어진 붉은 혼례복을 들어 올렸음. 버리기엔 애매하고, 또 입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걸 어찌 해야하나 고민하던 당보가 잠시 생각하다 입꼬리를 올려 웃고 혼례복을 든 채 드림주에게로 다가갔음. 침상에 편히 누워있는 드림주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 넣어 누운 몸을 앉힌 당보가 부드럽게 드림주에게 혼례복을 입혔음. 드림주가 제게 해주었던 것처럼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로 얇은 겉의 한 장을 드림주에게 입힌 당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음. 제게 맞춘 옷이라 소매가 길고 품이 크지만 역시 여성용으로 쓰이는 혼례복은 드림주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임.
우리 맞절이나 한 번 해 봅시다.
그렇게 말한 당보는 드림주의 볼과 입가에 묻은 붉은 입술 자국을 손으로 부드럽게 지워주었음. 천천히 침상에서 드림주를 일으킨 뒤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은 천천히 허리를 숙였음. 객이나 웃어른도 없고, 앞선 차례를 모두 빼먹은 채 격식 없이 한 맞절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마음이 확실하게 전달 된, 사랑이 가득 담긴 맞절이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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