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 청명드림
청명이의 고백대작전 / 캐붕
당보는 지금 아주아주 신나는 발걸음으로 장강을 폴짝 뛰어넘고 고산을 훌쩍 넘어 제 형님을 만나러 친히 화산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임. 아니, 형님라는 인간이 제가 술에 꼴아 잠든 틈에 아우를 버리고 혼자 훌렁 가버리는 건 무슨 경우인지! 얼굴을 마주하면 당장 비도를 날려 비무부터 걸어야겠다 생각한 당보는 허리를 뒤로 꺾어 제 앞에 우뚝 서 있는 가파른 화산의 끝을 가늠하고 있었음. 구름보다 정상이 더 높은 곳에 있어 끝을 알 수 없는 높이에 호기롭게 미소를 지은 당보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천천히 화산을 오르기 시작함.
온 힘을 다해 화산을 오를 것 마냥 호기롭게 웃은 것 치고는 암존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제 힘의 십분지 일도 안 들이고서 화산의 대문 앞에 도착한 당보가 열린 문 틈 사이로 얼굴을 뻬꼼 들이밀었음. 아무리 제가 청명과 격없이 지내는 사이라 할지라도 남의 문파 대문을 멋대로 넘는 건 아니 될 일이지. 대문 너머로 시선을 굴리고 있는 당보를 발견한 제자 하나가 당보에게로 다가올 때까지, 당보는 매화가 멋드러지게 핀 화산의 내부를 구경하며 제 팔보다 긴 장포로 입을 가린 채 연신 오오, 하는 감탄사를 뱉고 있었음.
저… 누구시길래 그리 화산을 보십니까?
당보의 허리에나 겨우 올 법한 삼대 제자가 조심스레 당보를 올려다보며 물었음. 허리춤에는 목검을 끼우고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오동통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삼대 제자를 확인한 당보가 빙그레 웃으며 제자에게 포권했음.
오, 반갑소. 난 당가의 태상장로 당보라 하는데 매화검존께서 예 계시오?
눈을 땡그랗게 치켜 뜬 삼대 제자가 당가의 태상장로라는 말에 뒤늦게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어 올랐음. 태,태… 태상…! 음, 태상장로 당보라 하오. 말을 잊지 못하는 삼대 제자의 뒤를 친히 완성시켜주자 삼대제자가 혼이 쑥 빠져나간 얼굴로 장문이이이인-! 하고 외치며 장문인전을 향해 재빠르게 뛰어갔음.
겨우 사람을 만났는데 또 혼자 남겨질 건 무어람. 당보는 꽁무니가 빠지게 뛰어가는 삼대 제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제 장포 속에서 곰방대를 꺼내 연초를 피웠음. 장문인을 모시러 갔으니 아마 금방 올 것인데… 잠깐. 형님이 장로배분 아니던가? 그럼 지금 화산의 장문인이 분명…
당가의 태상장로를 뵙습니다. 화산의 장문인 청문입니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임에도 어째서인지 오싹한 청문의 목소리에 당보가 어깨를 움찔 떨며 막 불을 붙인 담뱃재를 바닥에 털어내고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곰방대를 장포 속에 집어 넣었음. 아하하, 웃으며 능청스레 청문에게 포권하며 바닥에 떨어져 타닥타닥 타오르는 담뱃재를 발로 짓이갸 불을 끄고 인사한 당보였음. 아무리 제가 당가의 태상장로라 할지라도… 형님의 사형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존대를 듣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는 없는 법임.
장문인을 뵙습니다. 청문진인께서는 제 형님의 사형되시는 분이시니 부디 편히 대해주십시오.
음, 암존에 대해서는 사제에게 자주 들었소. 늘 우리 사제를 챙겨주어 고마울 따름인데… 어찌 이리 기별도 없이 화산에 오셨소?
당보는 흘끔 청문을 바라보며 운을 뗐음. 아니 글쎄… 이야기의 내용은 청명과 저가 함께 술을 진탕 마시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제 형님인 청명이 저를 버리고 홀라당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었으나 당보의 입은 청명이 저와 함께 양민을 괴롭히던 사파 무리 넷을 족친… 아니 해치운 뒤, 정말, 아주 정말 간만에 목을 축이러 객잔에 갔는데 이 당보가 해우소에 다녀온 사이 홀랑 사라져버렸다는 약간의 거짓을 섞은 무용담을 잘도 지어내고 있었음.
아니 뭐, 사파 놈들을 족친 건 맞으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지. 혼자 합리화를 마친 당보는 청문의 눈치를 한 번 살폈음. 형님께 들은 것만큼 무서운 느낌은 아니지만 청문은 장문인이라는 직위에 맡게 올곧음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었음.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더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도 있었을 듯. 저렇게 인자해보이는 이에게 형님이 회초리를 맞았다…?
청문이 제 수염을 만지작대며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당보의 손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음. 눈을 둘 곳을 찾기 위해 괜히 부산스럽게 눈동자를 굴리며 화산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차, 당보의 눈에 익숙한 꽁지머리가 들어왔음.
형님!!!
문파의 장문인 앞임도 잊을 정도로 다급하게 한 손을 위로 치켜 들고 제 존재를 피력한 당보를 발견한 청명이 의아한 낯으로 청문과 당보에게로 다가왔음. 그래도 제 문파 안에 있다고 장로복을 차려 입은 게 제법 장로다워 당보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청명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으며 빙그레 웃었음. 태상장로와 장문인, 형님의 사형과 사제의 아우. 이 어색하디 어색한 관계를 날려버릴 사람이 등장했는데 반갑지 않을리가!
네가 여기 왜 있냐?
왜 있냐니! 형님이 내가 깜빡 잠! …자아암깐 해우소에 간 사이에 날 두고 홀랑 가버려서 찾으러 왔지!
하마타면 잠든 사이에라고 말하며 진실을 제 입으로 불어버릴 뻔한 걸 겨우 틀어막은 당보가 생글생글 웃으며 청문에게 다시 한 번 포권했음.
저는 형님께 화산 안내를 청하려 합니다. 그저 형님의 친우로서 화산에 방문한 것이니 청문진인께서는 걱정 마시지요.
그럼 사제를 믿고 가보겠소. 화산의 전경이 암존의 마음에 들길 바라는 마음이오.
포권한 청문이 사라지자 당보가 청명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힘을 주욱 빼며 늘어졌음. 내가 청문진인께 형님이랑 한바탕 술판을 벌였다는 건 일절 말하지 않았소. 어때, 나 잘했지요?
청명의 어깨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면서도 제가 청문에게 기지를 발휘한 순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당보가 한순간에 청명의 손에 붙잡혀 저어기 먼 숲으로 내동댕이 쳐졌음. 한순간에 시야가 뒤집히고 청강석 위를 데굴데굴 구르던 당보는 머리가 화산의 담장에 부딪히고 나서야 구르던 걸 멈출 수가 있었음.
헉! 담장! 아니, 형님!!
당보가 머리에 부딪힌 담장을 걱정하다가도 갑작스레 저를 내던져버린 청명에게 불같이 화를 내려던 찰나, 어딘가 낯설고 수상한 모습의 청명의 당보의 시야에 똑똑히 들어왔음. 도사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짝다리를 짚던 평소와 다르게 저 멀쩡한 자세는 뭐지? 가슴은 왜 부풀리고 목에는 왜 힘을 주는데? 당보가 엎어졌던 몸을 기어 옆으로 슬쩍 이동해 보니 청명의 앞에 웬 여인 하나가 퍽 다정한 모습으로 청명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볼 수 있었음. 옷을 보면 형님과 같은 장로인 듯 한데 저 여인 앞에서 저렇게 빳빳하게 굳어 있을 이유가 있나?
당보는 제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는 생각을 애써 지워버리려다가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음. 에헤이, 설마. 서얼마 사랑이라고는 비무를 하며 베어버렸을 정도로 여인들한테 무심했던 그 청명이? 당보가 다시 청명을 보니 청명의 귀 끝이 묘하게 붉어져 있었음. 답지 않게 제 뒷목을 긁어대는 행동은 또 무엇이지? …저 망나니가 저렇게 얌전한 모습이라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낄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당보는 제 옷에 묻은 흙먼지를 손으로 탈탈 털고 성큼성큼 청명과 여인에게로 다가갔음. 뒤도 돌아보지 않았으면서 기척만으로 제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챈 청명이 짝다리를 짚는 척 저와 저 누님(저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무공이 뛰어나든 뒤쳐지든 일단 청명이 연심을 품은 상대니 누님이라 부르는 게 옳을 것임)의 사이를 가로막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당보가 허! 하는 웃음을 터뜨렸음. 당보가 청명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기웃대며 드림주를 향해 눈을 맞추자 청명이 야차같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게 얼마나 즐겁던지! 평소 같았으면 무서워 냅다 도망을 쳤을 테지만 지금처럼 재미난 구경거리를 두고 도망칠 당보가 아니었음.
하여튼… 내일 해 뜨기 전에 데리러 갈게.
드림주는 당보를 향해 어색하게 포권하며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다가 돌아갔음. 그러니까 당보가 들은 걸 종합해보면, 청명과 드림주가 내일 해가 뜨기도 전에 만나 단 둘이 어딘가로 나들이를 가는 것 같음. 당보는 화산의 담장을 확인하느라 앞 내용을 듣지 못한 과거를 후회하며 청명에게 찰싹 달라붙어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뗐음.
몇 해나 되었소?
? 뭔 소리야. 저리 안 떨어져?
아니이~ 아까 그 누님 말이오.
…? 걔가 왜.
하, 참!! 답답하게! 형님이 그 누님을 마음에 품은 지 몇 해나 되었냐니깐?
정말 답답하다는 양 눈을 질끈 감고 제 가슴팍을 팍팍 내리치는 당보의 행동에 청명이 검집 채로 검을 빼들던 걸 멈추고 당보를 향해 시선을 돌렸음.
…티 나냐?
그럼, 그리 행동하는데 티가 안 날 줄 알았던 거요?
청명이 잠깐 행동을 멈추고 손을 들어올려 제 턱을 몇 번 쓸었음. 몇 해나 되었나 굳이 세어 본다면… 육십 년은 한참 넘었겠지만 저리 생선을 탐내는 것마냥 눈을 빛내고 있는 당보에게 이를 전부 털어놓기에는 영 찝찝하고 무언가 기분이 나빴음. 단순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진 청명이 미간 사이를 좁히고 주먹으로 당보의 머리를 내려쳤음.
아!!! 아프오!
그럼 아프라고 때리지 안 아프라고 때리냐? 콱씨.
아니, 형님! 진정 좀 해보시오. 내가, 이 당보가 도와드리겠소!
청명이 한 번 더 당보의 머리를 내려치려다가 주먹을 허공에서 멈추었음. 당보의 도움…?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되려 이새끼한테 도움을 받았다 다 엎어지는 거 아니야? 청명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당보를 바라보니 당보가 턱을 치켜들고 가슴을 부풀리며 말했음.
내가 만난 여인만 도합 스물이 넘소!
그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관계의 발전은 청명도 늘 원하고 있었기에 당보의 말이 솔깃했던 청명은 이야기를 들어보게 됨.
그렇게 시작된 💖두근두근 매화검존 청명의 고백 대작전💖
당보와 청명은 그 커다란 덩치를 구겨 화산의 구석에 쪼그려 앉고 머리를 맞댔음. 으례 비밀 작전이라 함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진행하는 게 강호의 도리였음. 물론 그 잘난 강호의 도리는 방금 당보가 생각해 낸 것이었고. ... 하여튼 당보는 제가 시키는대로 제 옆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맞댄 청명을 향해 제법 근엄한 얼굴로 손가락 하나를 펴보이며 입을 열었음.
자, 형님. 우선 여인들은 말입니다, 사내가 의외의 모습을 보일 때 마음이 두근거리는 법이오. 평소 형님은 불같은 면이 있으니 요 며칠은 차분히 좀 지내봅시다.
하기야 드림주도 종종 청명에게 그 성격 좀 어떻게 해보라며 잔소리를 해댔으니 차분히 지내는 건 호감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것임. 청명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일순 드는 의문에 끄덕이던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되물었음. 어떻게? 내 성격은 팔십 년간 고친 사람이 없는데?
…청명은 그자리에서 당보가 알려주는 당가 제일의 호흡법을 속성으로 배워야 했음. 당보는 청명에게 호흡법을 알려주며 신신당부했음. 참을 인 세 번, 아니 열 번이면 호감 한 번이오! 당보가 청명에게 처맞으면서도 외우던 문장을 되뇌인 청명은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침상에서 일어나 침소를 나섰음.
드림주가 오기로 한 시간에 늦지 앉게 서둘러 냇가로 올라 세안을 끝낸 청명은 빠르게 제 침소로 돌아와 옷을 갈아 입었음. 보자, 간만에 둘이 가는데 장로복은 영 아니지? 그렇다고 저걸 입기엔 아직 술내가 안 빠졌고. 청명은 곱게 개인 옷들을 보며 고민하다 혀 차는 소리를 한 번 내고 장로복으로 환복한 뒤 침소의 문을 열었음. 문 너머에는 드림주가 일찍이 준비를 마치고 청명을 기다리는 중이었음.
화산 밖으로 나가는데 웬일로 장로복을 다 입었어?
역시나.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드림주라면 장로복을 입을 것 같아 장로복을 입은 것인데, 이리 들어 맞을 줄이야! 청명은 저와 같은 옷을 입은 드림주를 보고 슬금슬금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드림주의 옆으로 딱 붙어 섰음.
내가 삼대 제자도 아니고, 일하러 가는데 장로복을 입어야지 그럼?
평소에는 안 입으니까 그러지.
그래서 싫냐?
좋아서 그래, 좋아서.
청명은 드림주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대로 제 처소의 문을 닫고 드림주와 보폭을 맞춰 걸었음. 드림주의 뒤를 따르는 얼굴이 미묘하게 붉어져 있었을 듯.
가서 종남 제자들한테 시비 걸지 말고.
아잇, 내가 애야?!
어어딜 할 게 없어서 종남 놈들한테 시비를 털어? 걔네가 시비만 안 털면 나도 얌전히 있다가 간다니까?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을 조잘댄 게 불과 반 시진 전인데… 아니 종남 이새끼들은 할 일이 없나? 꼭두새벽부터 저와 드림주가 서안에 오는 건 어떻게 알고 이리 마중을 나왔는지 모를 지경임.
눈가를 찌푸리고 자신과 청명에게 시비를 거는 종남을 언짢게 바라보던 드림주와 속으로 참을 인을 그리고 있던 청명이었음.종남의 제자들은 매화검존이 검을 빼들지 않고 저들의 시비를 받아주고 있는 것에 신이 나 더 험한 말을 입에 올리며 청명의 신경을 긁어대는 중임.
그 대단한 매화검존도 종남의 앞마당인 서안에서는 얌전하구나!
참을 인 세 번… 네 번…
비화검후가 종남의 제자였다면…
참을… 아니 대가리 주어박는 거 한 번이면 참을 인 열 번을 안 해도 되는데? 이새끼들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비화검후를 입에 담아? (아이고 형님!!! …근데 솔직히 이건 때려도 인정이오.) 그래, 당보 너도 내 처지를 이해하는구나. 양심의 목소리인지 당보의 목소리인지 모를 제 마음 속 목소리와 완만한 의견 조율을 끝낸 청명은 제게 달려드는 종남의 제자 다섯을 빠르게 때려 눕히고 먼저 걸음을 옮긴 드림주의 뒤를 졸졸 쫓았음.
아니, 이건 쟤네가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누가 뭐래니?
다행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 드림주지만 청명은 화산으로 돌아오는 내내 당당한 척을 하며 드림주의 낯을 살펴야 했음. 끄응, 화가 난 거야, 안 난 거야? 그렇게 시간이 흘러 후일담을 듣기 위해 당보가 다시 찾아온 날. 당보는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는 낯을 만들고 기대감 어린 눈을 하며 청명에게 물었음.
어떻게 됐소?
… 그른 것 같다.
당보는 청명에게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내 그럴 줄 알았지,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빠르게 두 번째 방법을 이야기했음.
여인은 보통 사내의 뛰어난 능력에 반하는 일이 많소. 형님의 그 잘난 능력을 뽐내되, 꼴뵈기 싫어질 정도로 뽐내진 않는 게 중요하오.
내 능력?
예, 형님은 천하 삼대 검수! 중원 제일의 도사 아니요? 그걸 뽐내는 거요!
제발! 이번엔 꼭 성공하시오! 청명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이야기한 당보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다 제 집으로 돌아갔음. 홀로 남겨진 청명은 매화 나무 앞에 우두커니 서서 머리를 박벅 털어냈음.
아니, 내가 천하 삼대 검수인 걸 걔가 몰라? 나보고 뭐 어쩌라고?
청명은 그날 이후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제 실력을 드림주에게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음. 아이쿠, 등 좀 긁으려고 했더만 웬 매화가 펴? 드림주가 지나가는 때에 맞춰 손을 휘적대며 매화를 피웠으나 드림주는 청명을 흘긋 보고 제 갈 길을 갈 뿐임.
그 다음 날에도 드림주가 지나다니는 길목 한가운데 떡하니 앉아 검기로 만들어낸 매화를 허공에 흩날렸지만 드림주는 청명을 폴짝 뛰어넘어 빠르게 의약당으로 사라졌음. 쩝, 의약당 일이 많이 바쁜가? …아니, 그리고. 꼬꼬맹이 삼대 제자들도 매화를 피우는 화산에서 대체 내가 천하 삼대 검수인 걸 어떻게 보여줘?!
청명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 바닥에 드러누웠음. 됐다, 다 필요 없다. 평생 친우나 하고 말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드림주가 저를 신경쓸 수 있게 길목에서 진을 치고 있던 청명에게 세 시진 만에 드디어! 드림주가 다가왔음. 기척으로 드림주가 제게 오고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나 단단히 심통났소~ 하며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청명을 드림주가 톡톡 두드려 불렀음.
청명아.
귓가를 파고드는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슬쩍 눈를 뜨면 제 눈높이에 맞춰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는 드림주와 눈을 맞추게 되는 것임. 청명은 붉어지려는 낯을 심호흡으로 가라앉히고 무심하게 대답함. 왜.
비무가 하고 싶어?
허, 내가 그 난리를 피운 게 고작 비무가 하고 싶어서 그런 줄 아나? 제 의도를 단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힌 드림주 탓에 이번 작전도 대 실패임. 하이고, 답답하다 답답해! …응? 잠깐… 입술을 비죽 내밀고 곰곰이 생각하던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기롭게 미소지었음.
하자, 비무.
비무를 한다면 청명이 얼마나 강한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게 뻔하지 않음? 원래 그런 건 죽어라 보여줘봐야 한 번 칼 맞대는 것보다는 못한 법임. 드림주와의 비무에서 출중한 제 실력을 보여주고, 드림주가 뛰어난 제 실력에 홀딱 반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단번에 생각해낸 청명은 드림주를 들쳐업고 연무장으로 폴짝 뛰어 이동했음.
그렇게 간만에 성사된 검존과 검후의 비무에 화산의 온 제자들이 연무장에 모여들었음. 장로가 되어서는 비무 한 번 한 적 없는 두 사람이 비무라니! 게다가 둘이서 몰래도 아니고 당당히 연무장에서? 화산의 제자라면 수련을 빼먹고서라도 봐야하는 게 두 사람의 비무였고 스승도 제자를 수련시키는 것보다 비무를 보는 게 훨씬 좋다는 걸 알아 제가 제 제자의 수련을 빼줄 터였음. 누가 뭐래도 백문이불여일견이니까.
그렇게 단숨에 제자들이 모이고, 드림주와 청명은 연무장 양 끝에 서서 서로를 향해 포권한 후 검을 빼들었음.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매섭게 쏘아지길 수차례. 나무에 피었던 매화가 분홍빛 검기에 섞여 흩날리고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에서 붉은 눈이 마주치길 또 여러 번. 만개한 매화를 피우던 두 사람의 비무는 청명의 승리로 끝을 맺었음.
바닥에 무릎을 꿇은 드림주의 목에 검을 겨눈 청명이 셀쭉이 웃다가 아차 하고 급하게 검을 납도했음. …이게 아닌데?
그래서, 도사 누님을 홀라당 이겨먹었다?
낸들 그렇게 될 줄 알았나?
당보는 볼을 긁적이며 지난 일을 말하는 청명의 행동에 한숨을 푹 내쉬었음. 실력을 뽐내랬지 누가 비무에서 이기래?! 이 폭력적인 말코는 사랑을 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함!
마지막이오. 이것도 실패하면 형님은 그냥 그 마음을 깔끔하게 접는 게 편할 거요!
당보와 청명은 다시 구석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모았음. 혹여 누가 들을까 기막까지 펼친 것도 모자라 말소리도 한껏 낮춘 두 서람의 대화가 이어졌음.
형님, 혹 친하게 지내는 여인이 있소?
있겠냐? 사매들 말고는 없다.
흠, 이왕이면 외부인이 좋은데…
여인들은 왜?
왜긴 왜야, 도사 누님이 질투하게 만들려고 그러지. 이어진 당보의 말에 청명의 얼이 빠졌음.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질투? 걔가 멍텅구리도 아니고 그런 거에 속을리가!
원래 익숙하면 제가 가진 게 호감인지도 모르는 법이오. 그리고, 누가 누님을 속이자 했소? 형님이 모르는 여인과 딱! 붙어 있는 걸 보면 어쩐지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그걸 계기로 사랑을 자각하는 이 방법! 누굴 속이는 목적이 아니란 말씀! 어떻소? 나름 괜찬은 것 같은데.
이번이 마지막 방법… 청명이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음. 그래, 한 번 해보자. 근데 협조해줄 여인은 어디서 찾냐? 그거라면 다아 방법이 있지.
당보는 청명의 손목을 냅다 붙잡고 사천으로 빠르게 뛰었음. 당보와 청명이 이틀을 뛰어 도착한 곳은 사천에 있는 당가. 당보의 본가였음. 당보는 익숙하게 제 집안을 휘적대며 걸어들어가서는 한 처소 앞에 멈춰 섰음.
당현이라는 아이인데, 의술도 뛰어나고… 부부가 둘 다 형님을 좋아하니 기꺼이 도와줄 거요.
당보의 말대로 당현 부부는 기꺼이 청명을 도와주었음. 문제가 있다면 청명이 당현과 닿는 걸 꺼려하는 데 있었음. 당현이 자연스레 손이라도 잡으려 하면 스르륵 손을 빼 버리고 몸이라도 기대려 하면 소리도 없이 뒤로 물러나 버리는 것임.
형님! 협조 좀! 해 보시오!
아니… 야, 생각해보니까 닿는 게 좀 별로인데. 다른 방법 없냐?
당보가 허리를 꾸벅 숙여 한숨을 푹 내쉬었음. 재밌어 보여 도와주겠다 했건만 알려주는 방법마다 죄 실패를 해대니 이젠 당보도 어쩔 도리가 없음. 이 쑥맥 도사를 어떻게 하면 좋지? 이제와서 포기하기엔 저 바보같은 형님이 안쓰럽고. 허리를 숙인 채로 곰곰이 생각하던 당보가 무언가 생각난 듯 허리를 들어올리고 미소를 지었음.
이젠 정말 마지막이오. 내가! 직접! 형님의 장점을 누님에게 말해주는 거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청명이 당보의 말에 밝은 웃음을 지었음. 그래! 그거 좋다, 야!
그렇게 당보와 청명은 당가에서 하루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다시 화산으로 돌아왔음. 다시 어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기막을 펼친 두 사람은 또 한 번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함. 드림주가 평소 다니는 길목, 머무는 장소, 수련하는 시간을 하나하나 파악한 당보는 호기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음.
내가 가서 형님의 좋은 점을 잔뜩 말해주고 오겠소!
후다닥 녹색 장포를 휘날리며 드림주를 찾아 떠나는 당보의 뒤를 조용히 밟은 청명은 드림주와 당보가 만나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수풀 뒤로 몸을 숨긴 뒤 두 귀를 쫑긋 세웠음.
안녕하시오. 혹 여협께서 매화검존의 친우이신 비화검후가 맞소?
…? 당가의 태상장로를 뵙습니다.
비화검후를 뵙습니다. 형님께서 하도 비화검후를 칭찬하시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직접 찾아와봤습니다.
순둥하게 생겨서는… 부러 친한척을 하기 위해 편한 어투를 사용했건만. 당보의 직위를 언급하며 정중히 포권을 하는 드림주의 행동에 당보가 혀를 내둘렀음. 선을 긋겠다는 건가?
청명이가 제 얘기를 합니까?
어라? 당보는 한순간에 돌아가는 상황을 깨닫고 묘한 미소를 지은채 주변에 기막을 펼쳤음. 청명이 있을 곳을 향해 엄지를 치켜 세우며 눈을 찡긋한 당보는 냉큼 다시 드림주를 돌아보고 환하게 웃었음.
그럼! 하다마다요? 아주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랍니다!
… 어떤 얘기를 했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에헤이 누님, 우리 이런 딱딱한 말투는 집어 치우고 좀 가볍게 이야기 합시다. 내 형님과 한 얘기 전부! 들려주겠소!
그, 그래서 어떤 얘기를 했는데?
당보와 드림주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청명이었을 듯. 이야기를 마치고 뿌듯한 얼굴로 제게 다가오는 당보에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냐 물어봐도 다아 잘 되고 있다는 대답 뿐이니 명으로서는 똥줄이 탈 뿐임.
그렇게 닷새. 청명은 닷새간 매일같이 드림주를 찾아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가는 당보를 보며 다리를 달달 떨어야 했음. 설마 저새끼가 나한테 질투 뭐시기를 하나? 청명이 생각하기에 본인의 생각은 아주 합리적이었음.
닷새간 다리를 떨고 하루동안 합리적 의심을 마친 청명은 하얀 보름달이 뜬 날 밤 조심스레 침소를 나섰음. 제자들이 모두 잠들어 조용한 화산을 정해진 길이라도 있는 양 뚜벅뚜벅 걷던 청명이 걸음을 멈춘 건 커다란 매화나무가 덩그러니 있는 언덕에서였음. 저 매화 나무를 드림주와 함께 심었던 게 칠십일 년 전이니 청명이 드림주를 좋아한 지도 벌써 칠십일 년이었음.
청명은 매화나무에 등을 기대고 챙겨나온 술병의 마개를 뽑아 목을 적시기 시작했음. 나쁜 할망구. 당보 말고 나랑 친해지면 좀 좋아? 크으! 빠르게 동난 술병을 탈탈 털던 청명의 뒤로 익숙한 인기척이 다가왔음. 청명은 부러 눈을 돌리지 않고 밝게 빛나는 보름달만을 시야에 담았음.
청명아.
또, 또 내게 다가와 그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지! 청명은 텅 빈 술병을 입에 물고 드림주의 반대편으로 몸을 휙 돌려버렸음.
당보가…
예까지 와서 걔 얘기는 뭣하러 해?
둘만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장소에서 당보 얘기를 하는 것에 화가 나 몸을 돌린 청명이 마주한 건 수수하게 옷을 입은 드림주의 모습이었음. 낮과는 다르게 머리를 풀어 한쪽 어깨로 모아 내리고 붉은 색이 섞이지 않은 순백의 침의를 입은 모습이 평소와는 달라 묘하게 시선이 뺏기게 되는 청명임.
당보가 네 얘기를 많이 해주더라.
… 걔가 그리 좋냐?
응? 글쎄… 개인적인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네.
닷새 내내 두 시진씩 꼬박꼬박 이야기를 나눴으면서? 개인적인 얘기를 안 하면 무슨 얘기를… 드림주에게 한눈이 팔려 한 박자 늦게 속 내용을 이해한 청명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음. 미친 거 아니야? 그놈은 두 시진 동안 무슨 얘기를 해댄 거야?!
그러니까 청명아.
청명이 당황하든 말든 드림주는 눈꼬리를 예쁘게 접어 웃고 다시 청명을 불렀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을 때.
우리 얼마 안 남은 생 같이 걸어볼래?
드림주의 달콤한 목소리가 청명의 귀에 간지럽게 녹아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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