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생환 (完)

생환 - 1

쌍존 논컾: 환생 청명 & 생환 당보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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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생 검협 & 생환 당보 ] 원작 날조

- 글 쓴 사람은 화산귀환을 1549화까지 읽었습니다. 글에 직접적으로 스포일러가 될 내용은 없습니다.


“윤종아.”

“네!”

백천이 부르는 소리에 윤종은 다시 한번 의관을 정제하고 빠르게 방을 나섰다. 본래라면 진작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을 윤종이었으나, 오늘은 엄격히 단정함을 추구하는 백천까지도 함께 하기로 한 탓에 유달리 옷매무새를 신경 쓰느라 늦고 말았다.

“사숙조, 늦어서 죄송합니다.”

백천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운암에게 먼저 인사를 하니, 운암이 되었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 백천이 나서 입을 열었다.

“오늘 사부께서 할 일이 많아 쉬이 넘어가시나, 윤종 너는 약속을 허투루 여기지 말고 앞으로 조심하도록 해라.”

일부러 백천이 나서서 윤종을 가벼이 꾸짖음은 반쯤은 운암을, 반쯤은 윤종을 위한 것이었다. 삼대제자들은 아직 어려 스승이 없었다. 그러나 윤종이 이대로 자라 시기가 되면 당연한 수순으로 백천을 스승으로 두게 될 터였다. 백천이 제 역할을 다하여 윤종을 다잡으면, 그보다 배분 높은 운암이 일부러 나서서 윤종을 과히 혼낼 필요가 없었다.

물론 백천이 이리하지 않는다고 한들 단 한 번의 지각에 운암이 과히 윤종을 꾸짖을 일은 없으나, 백천은 늘 이리도 제 자리에 충실하였다.

“네, 사숙의 말을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게다가 윤종 또한 백천의 꾸짖음에 사감이 없을 거로 생각하며 공손히 답할 따름이었다. 나쁘지 않다 못해 이상적이라 할 수 있는 대제자들의 관계에 운암이 흐뭇이 웃으며 발을 내디뎠다.

“자, 이제 가자꾸나.”

오늘은 운암이 대제자들을 데리고 화음에 내려가는 날이었다. 이는 현종이 장문인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정한 화산의 규율 때문이었다.

정마대전이 끝나고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당시 장문이었던 청문이 전쟁을 겪은 후유증으로 등선하였다. 그리고 그 후 화산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청문이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이상적인 중심이었다는 점이 오히려 문제가 된 탓이었다. 모두가 알게 모르게 의지하던 존재가 없어지니 화산 내부가 적잖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래도 대문파인 만큼 그 명맥만큼은 끊길 일 없이 겉으로는 평이하게 흘러갔으니,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후인들이 청문의 빈자리를 채웠다고 생각했을 때쯤.

현자배에서 큰 문제가 터졌다.

현자배 대제자를 포함한 몇몇 제자들이 종남과 결탁하여 뒷일을 벌이고 있음이 밝혀졌다. 단순히 문파 간 정쟁을 위해 벌인 일이었다면 차라리 나았겠건만, 그 일로 산문 밖에서 사기를 치고 민생을 어지럽힌 탓에 결국 파문당하였다.

그리고 현종이 대제자가 되었다.

그러한 연유로 현 화산 장문인이 된 현종을 두고 적잖은 강호인들이 운이 좋은 치라 평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저 좋을 대로 떠드는 바와는 달리, 현종에게 있어 제 사형들이 파문당한 일은 뼈저리게 아픈 일이었다. 함께 화산의 도를 펼쳐나가리라 생각했던 이들이 한순간에 떠나고, 제가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할 이가 되었음에 어찌 마음이 시리지 않을까. 그들의 죄가 가볍지 않다는 건 아니었으나, 현종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왔던 화산을 이루고 있던 이들이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으니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현종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데 집중하였다. 현종과 장로들은 제자들에게 민생을 가르쳐 화산으로서 세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도록 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스승들에게는 정기적으로 어린 제자들을 화음에 데리고 내려가는 게 권장되었다. 이는 제자들이 어릴 적부터 민생을 겪어 무인으로서 제 역할을 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상하 배분끼리 관계를 단단히 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아이고, 대협께서 오셨구먼!”

“허허, 잘 지내셨습니까.”

‘의의는 알지만….’

운암과 포목점 주인이 인사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백천은 어쩔 수 없이 이 시간이 조금 지루했다. 이제 화음엔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탓이었다. 게다가 화음은 사실 일반적인 민생이라 일컫기엔 몹시도 이상적인 모습을 띠고 있지 않던가.

백천이 강호행을 나가보니, 이 세상은 부당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사파가 벌이는 횡포에 시달려 사람들이 헛되이 죽거나, 흉작 때문에 흉흉해진 민심 속에서 아이들이 부모에게 학대당하며 길거리로 몰리는 등 세파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나 화음에는 그러한 일이 없다. 물론 그리 만든 게 화산임을 안다. 그런 짓이 일어났다가는 과장 좀 보태 단번에 화산을 겅중 뛰어 내려와 악적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릴 이들이 즐비한 실정이니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억만금을 준다 해도 그런 짓을 할 리 없다. 협의로 화음민을 지키는 화산에 자부심을 느끼는 건 가당한 일이나…

그래도 이리도 평온한 현실만 보여줘서야 제자들이 어떻게 무인으로서 자세를 다잡을 수 있겠냔 말이다. 이리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차라리 수련하여 하루라도 빨리 무인으로서 성장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오만한 생각을 흘려보내며 백천은 옆에 선 윤종을 힐끔 바라보았다. 백천은 윤종이 어떻게 현상을 만나 입문하게 되었는지를 알았다. 그러니 윤종이 이리 평화로운 화음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아,”

그때, 소리 하나 안 내고 가만히 있던 윤종이 어딘가를 보고 짧은소리를 내뱉었다. 의아함에 백천 또한 윤종의 시선에 맞춰 눈을 돌렸다. 얇은 전병에 고기를 끼워 파는 노점이었다. 먹을 것에 눈길이 팔린 걸까? 윤종답지 않게도 참으로 그 나이대에 맞는 모습이었다. 백천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먹고 싶으냐?”

“아, 그러한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윤종이 고개를 저었다. 잠깐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달싹이던 입이 다시 꾹 닫히자, 백천이 미소 지었다.

“괜찮다. 다만 지금은 사부께서 하셔야 하는 일이 있으니, 이따가 가보자꾸나.”

“그,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오전에 꾸짖었으니, 이번에는 조금 풀어줄 때였다. 자신과 같이 이리도 능숙한 스승을 두게 되었으니 정말이지 윤종은 운이 좋은 아이다. 백천이 은근히 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다시 운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백천의 시선이 떠나간 윤종은 다시 힐끔, 제가 본래 보던 곳을 보았다.

‘어떡하지.’

윤종은 조금 전 노점 위에 올라와 있던 빵을 훔치던 재빠른 손길을 떠올렸다. 작은 체구를 한 아이가 빵을 낚아채자마자 저 골목 너머로 몸을 숨기니, 그 능숙한 모습이 안쓰러웠다.

도둑질이야 나쁜 일임에 자명하다마는, 오래 곯은 듯 삐쩍 마른 모습에 헝클어진 머리를 생각건대 분명 사정이 넉넉한 아이 같지 않았다. 개방의 보살핌을 받는 거지라면 차라리 구걸하지, 구태여 도둑질할 리 없을 텐데 어쩌다가 이 화음에 저런 아이가 있을까….

그리 생각에 잠겨 있던 때에 운암이 일을 다 보았는지 가게를 나설 채비를 하였다. 생각을 끊어낸 윤종이 그 옆에 가서 서자, 운암이 입을 열었다.

“상인들이 곤란한 일을 겪고 있구나.”

“곤란한 일이라 함은,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얼마 전부터 어린 도둑이 마을에 든 모양이야.”

윤종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를 알아채지 못한 운암이 말을 이어갔다.

“마을 안과 밖을 번갈아들며 자잘한 음식들을 훔친다고 하는구나. 사정이 있어 보여 어찌 이곳에 왔느냐 묻고 싶어도 어찌나 날랜지, 어른들이 다 힘을 합쳐 잡고자 하여도 도무지 잡을 방도가 없다 하니….”

관군에게 묻자니 아이에게 가해질 처벌이 심해질까 두렵고, 그렇다고 직접 잡기에는 무리이니 종종 내려오는 화산 무인들에게 일을 부탁한 것이다. 이어지던 운암의 설명이 끝나자, 윤종이 물었다.

“아이가 잡히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 우선 사정을 보자꾸나. 아이가 사람을 해치거나 과할 정도로 물건을 훔치진 않았다 하니, 처벌이 무겁진 않을 테다. 정 갈 곳이 없다면 장문인께 말씀드려 기거할 만한 곳을 마련해줘야겠지.”

입문을 바란다면 입문시키고, 그를 바라지 않는다면 적당히 돌볼 수 있을 만한 속가 제자들 아래로 보낸다는 얘기였다. 윤종이 화산에 입문하던 때와 다를 바가 없어 윤종은 운암이 생각하는 처우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에 윤종이 납득하고 안도하여 고개를 끄덕이자, 어린 제자를 세심히 살피던 운암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윤종아, 무언가 아는 것이 있느냐?”

“…그것이, 방금 사숙조를 기다리던 중에 어린아이가 도둑질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윤종이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을 설명하자, 백천이 물었다.

“네가 말하는 그 노점이 저 노점을 말하는 것이냐?”

“네.”

“그러면 어찌 내게 말하지 않고.”

윤종의 의도를 착각했다는 민망함을 이기지 못한 백천이 살짝 당황하여 묻자, 윤종이 차분히 사과하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여서…”

“내가 과한 처분을 내릴까 걱정했던 것이냐?”

그건 저를 믿지 못한 게 아니냐며 백천의 낯이 조금 변하자, 윤종이 빠르게 변명하려던 찰나에 운암이 크흠, 헛기침으로 끼어들어 소란을 잘라내었다.

“좋다, 그렇다면 둘이 해결해보거라.”

“네?”

“윤종이 아이 행색을 확인하였고, 백천 너는 이 화음을 잘 아니 둘이 힘을 합쳐 오늘 안으로 아이를 데려오도록 하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싸우지 말고 힘을 잘 합쳐 해결해보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안 둘이 서로를 마주하였다가, 결국 동시에 운암을 바라보았다.

“이 제자가 화음의 걱정을 덜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생환 - 1



그리 백천이 자신만만하게 고하고, 윤종과 함께 나선 지 두 시진.

“헉, 헉, 허억….”

늘 쓰던 영웅건이 삐뚤어진 줄도 모르고 허리를 숙여 거칠게 숨을 내뱉는 백천이었다. 윤종이 그 모습을 본 적 없는 건 아니었으나, 보통 수련할 때나 봤지 이리 화음에 내려와서는 단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던 이례적인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점을 신기해하기엔 윤종은 숨을 들이마시는 것마저 힘들 정도로 고초가 심하여서, 길거리 바닥에 반쯤 누워 있었다. 윤종이 한 모습을 보자면 백천이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비스듬히 벽에 기대 있음은 가공할 만한 일이었다.

“아니, 뭔 놈이 이렇게 빨라!”

그러나 백천의 인내심도 끝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백천이 빽 소리를 내지르자, 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화음 사람 몇몇이 다가와 물을 건네주었다. 헌앙한 청년과 단아한 소년, 두 화산 무인들이 이리도 녹초가 된 모습이 우습고 즐거워 만면 가득 웃음을 띤 모습이었다.

“아이고, 화산 분들께서 이리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니 직접 잡겠다던 우리 집 가장 달랜 보람이 느껴지네요. 그이가 나섰다가는 진작에 숨이 부족해서 꼴까닥 가도 천 번은 갔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안 그래도 제 동생이 그 소도둑 잡아보겠다고 아침에 나섰다가 꼭 한 식경 만에 돌아와 허리를 두드리며 드러눕더라니.”

윤종은 그제야 왜 노점의 상인이 아이를 잡으러 나서는 대신 체념한 듯 그저 묵묵히 전병을 굽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차라리 야생 멧돼지를 맨손으로 잡는 게 빨랐을 테다. 처음 아이를 골목에서 마주쳤을 때는 무술을 익히지도 않은 아이가 빨라봤자 얼마나 빠르겠나 싶어 설렁설렁 움직였다. 그러다가 아이의 몸놀림이 범상치 않다는 걸 안 후로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러고도 잡을 수 없었으니, 놓친 횟수가 몇십 번이 된 지금으로서는 아이가 얄밉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내공을 일으키자니 상대가 다치면 안 되지, 보법을 쓰려고 해도 좁고 복잡한 골목에서 낼 수 있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한 번이라도 길이 꺾이면 그다음 순간에 아이가 사라졌다. 퇴로를 막으려 해도 화음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이가 어째서인지 길 보는 눈이 백천보다도 한 수 위였다. 하다못해 백천이 벽 위로 올라타려고 해도, 각 상점이나 가정집 사정마다 벽 위로 장애물들이 즐비해 영 여의치가 않았다. 그런 점까지 고려한 건지 아이가 적절하게 빠른 길을 찾아내어 몸을 숨겨 사라져버리니….

“하… 사숙, 어떻게 할까요.”

겨우 일어나 숨을 고른 윤종이 물을 벌컥 마시며 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백천이 이를 갈 듯 말했다.

“골목길만 아니면 금방 해결될 일을…”

차라리 길이 트여있다면 길을 알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아이를 상처 없이 잡기 쉬울 터였다. 그러나 화음은 산으로 둘러싸인 탓에 널리 커질 수 없는 데 반해, 화산 탓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온갖 길이 복잡하게 얽힌 곳이었다. 그러니 어디를 가더라도 도망치는 아이에게 유리한 골목길이 즐비했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백천이 고민하며 건네받은 물을 주욱 들이마셨다. 그리고 감사하단 인사와 함께 잔을 돌려주던 찰나.

“아, 그 아이가 다니는 길 중 너른 곳이 하나 있긴 합니다.”

한 여인이 건네는 말에 백천과 윤종 둘 다 번쩍 고개를 들었다.

 

 

 

 

‘왜 이곳에서?’

여인이 말해준 곳은 화음 양민들보다도 화산 무인들이 더 익숙한 곳이었다. 바로 화음에서 화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난 곳이었으니까.

여인의 말에 따르면 아이는 저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떨어졌을 때, 혹은 잠을 자러 갈 때면 항상 이쪽으로 향했다고 한다. 아이의 몸놀림이 워낙 잽싸니 아이가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길목을 지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는 얘기였다.

어째서 화산에?

이야기를 들으며 백천과 윤종은 의아한 낯을 했으나, 어찌 되었든 오늘 안으로 아이를 잡을 수만 있다면 되었다. 일단 여인의 말을 따라 길목에 잠복한 백천은 이번만큼은 이 쓸데없이 빠른 도둑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하였다.

이곳은 산으로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평지인 만큼 길이 비교적 크게 트여 있었고, 주변에 장애물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었다. 상단이 화산에 오르는 날이 아니고서야 번잡할 리 없는 길이었다.

그리 기척이 나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산 아래인지라 해가 빠르게 졌다. 주변이 어둠에 막 잠겼을 무렵, 저 멀리서 걸음 소리가 났다. 날래게 골목을 누비며 들었던 잽싼 발걸음이 이젠 아주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했다. 기척이 가까워져 올수록 둘은 숨소리마저 더욱 죽이며 바닥에 납작이 달라붙었다. 몸 한 번 던지면 잡을 수 있는 위치까지 상대가 오기를 신중히 기다리니… 그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소리로 추정컨대 단 다섯 걸음.

하나, 둘, 셋….

‘넷, 다섯. 넷, 다섯. 넷! 다섯!’

윤종이 속으로 빠르게 그다음을 외쳤으나, 불행히도….

우뚝. 그 자리에 선 상대가 더 다가오질 않았다. 바로 도망가지는 않는 걸 보니 정확히 상황을 파악한 것 같진 않다마는, 그래도 무언가 불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인간의 감이라고 할 순 없지 않을까. 짐승의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매서운 감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골목길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든, 갑작스레 상대가 시야에서 사라질 일은 없으니 좁혀놓은 거리가 조금 멀어져도 괜찮을 테다. 계산을 끝낸 윤종이 벌떡 일어나 상대에게로 뛰어갔다.

“앗, 윤…”

달려나가는 윤종을 백천이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제게로 타다닥 다가오는 발걸음에 상대가 지체하지 않고 몸을 틀었다. 반응 속도가 가히 빨랐다.

그러나 이미 잔뜩 벼른 윤종이 몸을 확 던져 손을 뻗었다. 손에 확실히 옷자락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됐다! 윤종이 환호성을 터뜨리려던 순간.

퍼억.

어? 갑작스레 들린 타격음에 백천이 눈을 크게 뜨며 바로 팔을 벌렸다. 발에 뺨을 얻어맞은 윤종이 그 품 안으로 완벽히 들어왔다. 묵직한 무게감을 고스란히 받은 백천의 발이 살짝 뒤로 끌렸다.

“사숙!”

윤종은 감동했다. 제가 본 것을 빠르게 고하지 않은 문제로 오늘 하루 조금 서먹해진 사이였으나, 그럼에도 사숙은 곧 제 제자 될 이를 이리 바로 붙잡아주지 않는가.

“감사합, 윽!”

그러나, 턱. 백천은 윤종을 빠르게 내팽개쳤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멀어지는 아이를 향해 달려나갔다.

‘…….’

바닥에 버려진 윤종은 쓸쓸히 생각했다. 하하. 내가 저 인간을 사부라고 불러야 할 날이 얼마 정도 남았더라….

윤종이 뭐라 생각하든 말든, 아예 상대를 따라잡은 백천이 두 손으로 단단히 아이를 잡아들었다.

“잡았다!”

몸을 고스란히 내던진 탓에 무방비했던 상태로 맞은 윤종과는 달리, 완벽하게도 만전을 기한 자세였다. 곧이어 퍽, 퍽, 퍽, 하고 백천 또한 얼굴과 가슴을 연달아 얻어맞았으나 이미 각오한 탓에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

바로 덜렁 든 아이를 뒤집어서 두 손을 뒤로 모아 잡고, 남은 한 팔로는 다리를 꽉 감싸 제압했다. 그제야 갓 잡은 생선처럼 팔딱거리던 아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후….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니니까, 자…”

안심한 백천이 품에 안은 아이를 달래려던 찰나. 잡고 있던 손이 조금 느슨해지자, 아이가 무릎으로 백천의 명치를 쳐올렸다.

“커헉!”

하하, 이 자식 천재네 천재. 급소를 정확히 다 치고. 이 미친 새끼….

제대로 명중한 급소에 백천의 팔에 힘이 풀리자, 그대로 떨어진 아이가 산 괭이처럼 바닥에 딱 착지하며 후다닥 도망갔다.

“사, 사숙 괜찮으세요?”

“저, 저 새끼 잡아……”

수습해서 일어난 윤종이 급하게 다가와 물었다. 그러나 고통에 명치를 부여잡은 백천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손을 어떻게든 들어 아이가 사라진 쪽을 급하게 가리켰을 뿐. 그에 비장해진 윤종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아이를 잡으러 달려들었다.

 

 

* * *

 

 

“그래서, 저 아이가 너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현종이 기겁하여 백천과 윤종을 바라보았다. 두 얼굴에 시퍼렇게 멍 자국이 나 있었는데, 어떻게 맞았는지는 그 아래 도복에 난 선명한 발자국들이 전부 설명해주었다. 발자국이 아니라, 발자국들. 그러니까 적어도 한두 번 맞은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둘이 심통이 단단히 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현종의 시선이 방 한구석에 꽁꽁 묶여서 잡혀 들어온 아이에게로 향하였다. 얌전히 묶인 채 말똥한 얼굴로 이 안을 보고 있는 아이에게는 마치 이 상황이 먼일인 듯만 했다. 생기 있는 눈빛, 가만히 있는 자태. 조그마한 아이는 그저 무해해보일 진데 제 두 제자는 온몸으로 그 반대를 증언하고 있으니 어찌 황당하지 않을까.

다시 제자들 도복에 난 자국을 살핀 현종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거 참… 알차게도 때렸네. 알차게도.

넋이 나간 듯한 현종에 운암이 부드럽게 웃었으나 평소 같은 태연한 웃음이 아니었다. 동질감 섞인 빈 웃음이었다. 운암 또한 아이 하나 잡으러 갔던 제자들이 밤이 다 되어서야 저런 꼴로 돌아왔으니, 처음 저 모습을 보았을 때는 정말이지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래… 그… 수고했다. 둘은 우선 물러나 의약당에 가서 약을 받고 쉬어라, 내일 다시 부를 테니.”

“네.”

일단은 둘의 휴식이 시급해보여 명하니 백천과 윤종이 일어나 인사하고 자리를 나섰다. 그리하여 현종과 운암, 둘만… 아니, 구석의 아이를 포함해서 셋이 남음에 현종이 큼,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다듬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제게로 향한 질문에 아이가 똑바로 현종을 쳐다보았다. 새까만 눈이 어째서인지 말똥말똥 빛나고 있어 현종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이 어린아이가 편하게 느낄만한 상황은 아닌데…. 혹여 문제가 있는 아이인가 싶어 현종이 어찌할지 생각하던 즈음에 아이가 입을 열어 답했다.

“청명.”

“청명?”

“네, 청명.”

현종이 우려한 바와 달리, 명확하게 제 이름을 말하고 또 존대까지 하는 목소리가 또랑또랑했다.

“그래, 청명이구나.”

나온 이름이 뜻하지 않게도 화산에 제법 중요한 이름인 지라 현종과 운암이 서로 시선을 짧게 나누었다.

“듣자 하니 얼마 전부터 마을에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그 이전엔 어찌 살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몰라요.”

“모른다니?”

“기억이 안 나요.”

아이, 그러니까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석연치 않은 말에 현종의 눈빛이 깊어졌다.

화음이 다른 곳에 비해 살기 좋은 편이니, 예전부터 부랑자들이 제법 찾아오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아이가 혼자서 이곳에 흘러들어오는 일은 역시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아이가 어디에서 임시 거처를 잡았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묘한 일이다. 같은 의문을 품은 운암이 입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가 잠을 마을에서 자지 않고, 이 산 아래에서 잤다고 하던데. 맞느냐?”

“네.”

“그리 한 이유가 있었느냐?”

“…….”

곧잘 답하던 청명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제 묶인 팔을 바라보았다. 제 결박된 처지를 바라보는 청명을 보고 있자니, 한바탕 난리를 겪은 장본인이 아닌 현종과 운암으로선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핍박하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뜨끔거렸다. 결국 현종이 눈짓하고, 운암이 줄을 풀러 청명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청명은 그를 원한 게 아니었는지 줄을 풀어주기도 전에 입을 열어 답하였다.

“여기에 있으니까, 팔이 안 아파서요.”

“…팔이?”

“네.”

청명이 제 왼쪽 팔을 쳐다보았다.

듬성듬성 자리한 기억의 첫 파편, 오직 ‘청명’이란 이름만 알던 그 순간부터 이 왼팔이 지독히도 아팠다. 온종일 먹은 것 없어 위장이 꽉 조여들어도 그 배고픔이 팔을 쑤시는 통증을 이기지 못할 정도였다. 생각조차 마비시키는 고통은 가만히 있을 때면 배가 되었기에 결국 청명은 하는 수 없이 걷고 또 걸으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리 발걸음 닿는 대로 움직이다보니 자연스레 이곳, 그러니까 저 둘의 말을 빌리자면 화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통증이 잦아들었다. 팔이 한결 나아졌으니 그래도 아스라이 남아있는 통증을 반가이 참으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근처를 빙빙 돌기를 한참, 그러다가 우연히 접어든 길목에서 청명은 깨달았다. 이 통증은 이 마을 근처에 자리한 험악한 산에 가까워질수록 잦아든다는 것을.

그래서 산 아래 아무 곳에서나 누워 잤다. 그리고 일어나면 배가 고프니 마을에 가 먹을 것을 훔쳤다. 그러다가도 다시 밤이 찾아오면, 산 아래로 돌아와 다시 잠을 청하였다.

청명은 이러한 사정을 풀어 설명하였다.

“그래도 이 아래서도 아픈 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었는데, 이곳에 오니까 하나도 안 아프네요.”

청명이 웃자 피어오르는 측은지심에 두 어른이 얼굴을 굳혔다. 거짓이라고 하기엔 아이가 지나치게 밝았다. 통증이 잦아든다는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갑작스레 낯선 곳으로 끌려오게 된 아이가 저리 태연히 굴 리 없잖은가.

‘사고가 있었거나, 사술에 걸린 걸까?’

운암은 무언가 사고가 생겨서 아이가 기억과 보호자를 동시에 잃고 돌아다니게 되었구나 싶었다. 괴상한 사술에 휘말렸거나, 아니면 정신적인 이유로 이곳에만 오면 팔의 통증이 줄어드는 게 아닐지.

그러나 화산은 도문임에도 술법을 다루는 좌도방의 세가 약했다. 당장에 사술의 사특함을 느끼기 힘드니 바로 해결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은 몸에 이상이 없는지부터 살피는 게 좋을 듯하여 운암이 아이를 묶은 줄을 풀었다. 줄이 다 풀리고도 얌전한 아이를 본 현종이 미소 지었다.

이렇게 얌전한 것을, 백천과 윤종은 왜 그리 때렸을꼬.

그러나 아픈 아이란 걸 고려하면 당장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가혹한 일이다. 혹여 어른으로서 훈계하더라도 통증 문제부터 해결해줘야 마땅한 일. 현종이 짧게 고민을 끝냈다.

“운암아, 이 아이는 내가 의약당에 데리고 갈 테니 너는 가서 백천과 윤종을 살피거라. 둘이 오늘 무척 수고하였으니.”

“네, 그리하겠습니다.”

둘 다 의약당에서 고약이든 무엇이든 받아 진작에 숙소로 돌아와 있을 터였다. 그리 가늠한 운암이 인사하며 방문을 나서다가, 오늘 번을 서던 백상과 마주쳤다. 무슨 일이길래 장문인 처소까지 와 있느냐 물으려던 운암은 곧 그 뒤에 자리한 이를 마주하고선 당황하였다.

“아, 어르신. 무슨 연유로…”

“쉿. 장문인께서 바쁘신 거 아닌가?”

문밖에 흘러들어오는 목소리에 현종이 당황하여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암존 어르신.”

현종의 인사에 부러 용건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당보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곧 예의를 차려 인사하였다.

“늦은 시간인 건 아나, 일이 있어 섬서에 왔으니 잠시 장문인께 인사드리려 왔지요.”

본래 화산쯤 되는 명문의 장문인을 방문할 때는 미리 고하는 게 예의였으나, 당보쯤 되는 인사면 미리 연락하고 오는 게 부담이었다. 정마대전의 영웅이자 사천당가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아무리 잘 대우하려고 온종일 노력한다 한들 그 이름값에 걸맞게 대우하는 게 불가능할 지경으로 명성이 드높으니, 어느 문파에든 당보의 방문은 몹시도 무거운 골치였다. 그러한 사정을 잘 아는 탓에 당보는 종종 화산에 이리 갑작스레 들러 아주 짧은 시간만 머무르다가 가곤 했다.

물론 이런 갑작스러운 방문마저도 현종의 심장을 널뛰게 하는 건 매한가지였으나,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화산에 아예 들르지 않을 순 없으니.’

솔직히 화산 장문인 정도 되었으면 이 정도 일은 쉽게 견뎌야 마땅하지. 제멋대로 생각한 당보가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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