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이설] 낯선 나의 연인에게

[청명이설] 낯선 나의 연인에게 (2)

펜슬 이벤트 참여 & 명절 기념 공개분

대가리막기 by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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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명이 누구야?

“청명이 누구냐고요?”

같이 교양 수업을 듣는 후배가 숟가락을 든 채 정지했다. 마치 유이설이 1+1=? 의 답이 무엇인지 몰라 물어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청명이 누군지는 유이설도 알겠지. 정확히 ‘청명이란 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그렇게 싹수가 없냐?’라고 묻고 싶은 거 아니야?”

“그게 그거죠. 이 학교에서 청명이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어요? 선배, 진짜 몰라요? 어떻게 모르지?”

유이설은 이런 반응들이 신기했다. 그야, 유이설이 대인 관계에 소극적이고 인맥이 좁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모두가 입을 모아 유이설이 다른 사람은 아니여도 청명이란 사람만큼은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반응한다.

누굴까, 내가 알고 있었어야 했던 사람. 유이설은 그동안 놓치고 있던 중요한 것을 찾은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청명이 놈이요?”

사학과의 문제아, 빠꾸 없는 불도저, 천하의 난봉꾼, 미친개라고 쓰고 광견이라 읽음, 명실상부 알코올중독자, 그럼에도 학과 수석을 놓친 적 없는 진짜 광기, 인성 빼고 못 하는 게 없는 비상한 천재, 환생한 검수, 검도부 명예 지도교수…. 청명이 누구냐는 질문 하나에 온갖 별명이 쏟아져나왔다.

유이설은 그것들의 의미를 알아내고 싶었으나 뜻을 유추하기도 전에 새로운 이름이 끝을 모르고 튀어나오니 쫓아가기도 어렵다. 아무튼 청명을 설명하자면 그 모든 말로도 부족하다고 한다. 이 학교에 저렇게 많은 별명이 있는 줄 몰랐다. 어쩌면 별명 만드는 것이 대중의 유행이자 취미인 걸까. 유이설은 과연 자신에게도 그런 별명들이 붙어있을지 궁금해졌다.


“…청명이 말이냐?”

그러고보니 여기에도 있었다. 본명보다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리는 남자가. 유이설 그녀조차 ‘백천 선배’라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한 진동룡이 유이설의 질문에 곤란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설이 네가 그 녀석을 왜….”

“초등학교 1학년에 전국 초등 검도 대회 우승.”

“중학교 1학년에 전국 중등 검도 대회 우승.”

“고등학교 1학년에 전국 고등학교 검도 대회 우승.”

“고교대회 우승자 기념 특별 출전 자격으로 참가했던 전국 대학 검도 대회에서 우승.”

“그리고 은퇴. 미친 새끼임.”

진동룡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 이어말하기하듯 줄줄이 끼어든다. 진동룡을 포함해서 그들 모두 길다란 죽도 가방을 하나씩 어깨에 매고 있었다. 이 대학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검도부’에 소속된 학생들이었다.

이어지는 설명으로, 알고봤더니 그들은 초중고 돌아가면서 다 한번씩 청명과 맞붙었다가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추억을 공유하는 사이라고 했다. 참고로 진동룡은 고등학교 대회 4강에서 청명을 만나 대가리가 깨졌다.

“우리 형은 대학 대회에서 고1인 놈한테 깨졌어.”

울컥한 진동룡은 유치하게도 그의 형 진금룡의 흑역사를 팔았다.

“아무튼, 나라가 잃은 금메달 생산기였지.”

“인성 논란으로 메달 자격 박탈되지 않으면 말이야.”

유명한 체육 특성 고등학교에 검도 특기생이었던 청명은 전국검도협회장, 국가대표선수권 진행위원장이 무릎을 꿇고 국가 장관까지 와서 뜯어말렸음에도 프로 선수의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퍼졌던 유명한 소문에 의하면, ‘더는 자기보다 약한 놈들 상대하는 것도 질렸다’는 말을 남겼다나.

정시로 이 대학에 들어온 청명은 본인이 했던 선언했던 대로 평범한 사학 전공생으로 살아가나 싶었지만….

‘이새끼들이 검을 들었으면 똑바로 해야지, 어디서 장난질이야!’

그날이 바로 평화로웠던 ‘검도 동아리’의 장례식이었다고. 한 학생이 눈물을 흘리며 회상했다.

학교에 관련 전문 학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 취미 동호회에 지나지 않았던 일개 ‘검도 동아리’가 천재지변처럼 들이닥친 청명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일 년 사이에 전국 검도대회에서 우승을 바라보는 강호(強豪) ‘검도부’가 된 사건이었다.

유이설은 청명이 가진 별명 중 하나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검도부 명예 지도 교수’란 이 일련의 사건에서 나온 별명인 것이다.

“솔직히 웬만한 체육관 PT보다 청명이 그놈이 봐주는 게 훨씬 정확하다니까요.”

“난 진작에 그놈 만나고 나서 다른 PT 다 끊었다. 그놈한테 굴려지면 다른 운동은 꿈도 못 꿔.”

“너 농수산센터에서부터 쌀이랑 식재료 맨손으로 들고 초중고 배달 봉사하러 갔던 거 기억남?”

“와, 씨. 그걸 봉사라고 부르네. 난 그게 봉사인지 미친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어느새 검도부 남학생들은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정작 청명에 관해 물어본 유이설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이 청명에게 굴려졌는지에 대해서 떠들었는데, 이대로라면 정말 끝을 모르고 계속될 것 같아, 결국 진동룡이 나서서 그들을 멈춰 세워야했다.

“미안하다. 얘네가 원래 좀 시끄러운 애들이라.”

“아뇨,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알았어요.”

“그런데… 유 후배가 청명이 그놈은 왜….”

“…아.”

진동룡의 질문에 유이설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진동룡이 다정한 말을 건네려는데 유이설이 적절한 말을 찾는데 성공했는지 그보다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제가 관심이 있어요. 청명에게.”

툭, 툭, 툭, 툭.

그 자리에 있던 건장한 남자들의 손에 들려있던 것들이 죄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떤 이는 눈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어떤 이는 속이 좋지 않기라도 한 듯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진동룡은 그 잘생기고 헌앙한 얼굴이 아깝단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순식간에 비쩍 메마른 듯 수척해졌다.

“유이설이… 청명 그놈을…?”

진동룡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정작 유이설 본인은 만족했다는 듯이 홀연히 자리를 떠난 뒤였다.


“청명이가 사학과는 맞습니다만….”

윤종이 곤란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유이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이 시간이 사학대 필수 전공 강의라서 모든 학생이 출석한다고 했다. 그런데 청명은 보이지 않는다.

“수업, 땡땡이?”

아무리 그래도 필수 전공 수업을 빠졌냐는 당혹과 경악이 유이설의 얼굴에 스쳤다. 윤종이 예의 그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 녀석 좀 특수한 입장이어서요. 학부생인 한데, 하는 건 대학원생에 더 가깝다고 할까요.”

“저번에 말했던 거 있잖습니까? 매화검법인가 뭔가를 복원하는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고.”

불쑥 옆으로 끼어든 조걸의 말에 유이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유이설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게 된 조걸이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심장에 부담 가는 얼굴이다.

“매화검법….”

유이설이 중얼거리듯 그 이름을 말했다. 윤종은 아무래도 유이설이 그 매화검법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검법 복원이지, 사실 옛날 유적을 발굴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 녀석은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문헌을 해석하거나 출장 연구를 나가는 일이 더 많습니다. 학교와는 얘기가 된 것이라, 수업은 꼭 나오지 않아도 되는 모양입니다.”

“검도부는?”

“아, 그건 순전히 그놈 취미예요.”

“사실 청명이한테 검도부 봐줄 시간은 없을 텐데 말이죠, 어지간히 어설프게 검 휘두르는 꼴을 못 보겠는지 짬이 날 때마다 도장에 나와서 가르쳐줍니다.”

“청명이 그놈 사실 사람 굴리면서 연구 스트레스 푸는 거 아닙니까? 가끔 그놈 상태 이상해지잖아요. 솔직히 검도부도 합법적으로 사람 팰 수 있으니까 하는, 컥.”

“조용히 해라, 걸아.”

윤종이 재빠르게 조걸의 옆구리를 찔렀다. 청명이란 존재 아래에서 여러 가지로 예외적이고 변칙적인 구조를 갖게 된 검도부였다. 일반 대학 동아리의 범주를 넘어선 곳이었으니, 괜히 관계없는 일반 학부생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꺼내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닐 테다. 조걸도 윤종의 뜻을 알았는지 검도부에 대해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솔직히, 그런 무협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검법을 복원하겠다느니, 미친 소리 아닙니까? …그런데, 그 녀석이 검을 휘두르는 걸 보고 있으면 꼭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이십사수매화검법이라는 게.”

조걸이 드물게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종이 조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잠시간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말이 없다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와 같은 상황이었다. 질문한 유이설을 두고 두 사람은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청명에 대해서 마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매화를 닮은 검에 대해서.

유이설은 그들이 말하는 청명의 검이란 대체 어떤 것인지, 꼭 직접 보고 싶어졌다.

“엥,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조걸이 무언가 떠오른 듯 퍼득 유이설을 돌아보았다.

“선배, 당소소랑 친하지 않아요? 소소 냅두고 왜 우리한테 청명이를 물어보시지.”

“…소소?”

“네. 당소소가 청명이놈에 대해서 제일 잘 알 텐데?”

유이설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모르는 일이었다.


건물 밖을 나오니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부드럽게 살랑이는 바람에 코가 간질간질하다. 유이설은 코를 살짝 쥐었다가 놓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예쁜 봄 날씨였다.

유이설은 천천히 건물 외곽을 따라 길을 걸었다. 일부러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는 길을 골라 가본다. 날씨가 좋았던 탓일까, 화단에 핀 꽃의 봉오리가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일까. 유이설은 어쩌면 자신이 지금 들떠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뒷산으로 오르는 길에 학교 창립 초기에 쓰다가 지금은 역사전시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 있다고 했다. 갑자기 그것이 생각난 유이설은 목적지를 그곳으로 정했다.

언덕길을 따라 걸었더니 건물의 앞이 아니라 뒤쪽으로 도착한 모양이었다. 유이설은 희미하게 보이는 낡은 건물의 윤곽을 가늠해 보다가 길 끝에 놓인 벤치를 보았다. 누군가 벤치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유이설은 그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유이설이 가까이 다가가자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청명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흐릿한 시선으로 유이설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유이설은 눈감은 청명을 내려다보다가 말을 걸어보았다.

“다들, 네가 연구실에 있는 줄 알아.”

“…나한테는 이게 연구야.”

“땡땡이, 낮잠 자는 게?”

“아니, 그야 잠을 자야 네가….”

“내가?”

그 순간 청명이 자리에서 퍼뜩 튀어 오르듯이 몸을 일으켰다. 거의 박차고 일어날 기세로 몸을 일으키자 유이설과 거의 코끝이 부딪힐 정도의 거리가 된다. 청명이 눈을 크게 뜨고 유이설을 보았다.

“…뭐야, 너.”

낮게 가라 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 청명의 눈은 매화를 닮았다. 유이설은 제 앞에 가까이 다가온 청명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뭐야, 너?”

청명이 다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유이설은 그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청명은 유이설이 누구인지를 묻는 걸까, 아니면 유이설이 왜 이곳에 있는지를 묻는 걸까. 그도 아니라면 이번에도 자길 쫓아온 것이냐며 화를 내고 싶은 걸까. 그는 왜 처음 저를 보았을 때 묻지 않고, 지금 묻는 걸까. 분명 처음 눈을 떴을 때 자신을 알아본 것 같았는데, 다른 누군가와 착각한 걸까.

유이설은 청명의 옆, 벤치의 끄트머리에 조심히 앉았다. 청명은 유이설을 뚫어져라 보았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사납게 노려보는데도 유이설은 그것에 위압감이 느껴지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마치 원래 청명이 그런 얼굴이라는 듯이.

“연구, 계속할 거야?”

“뭐?”

“낮잠, 그게 연구라며.”

“…누구 때문에 잠이 다 깼어.”

“그래.”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유이설은 청명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계속 청명의 시선이 느껴졌다. 청명은 마치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그렇다면 왜 말을 안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검에 관심 있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청명이었다. 청명의 질문에 유이설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곧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느꼈는지 제법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매화검법, 알고 싶어.”

“왜? 그게 궁금한 이유가 있어?”

“…이유는, 말하기 어려워.”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그냥 매화를 좋아해서는 아니지?”

“…응, 아니야.”

“별 이상한 여자를 다 보겠네.”

청명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이러고 있으니 평소 시끄럽기로 소문났다던 남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십사수매화검법이라는 건 학교의 큰 기밀 사항인걸까. 그렇기엔 청명을 알고 있는 모두가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심지어 윤종과 조걸, 진동룡 같은 이들은 직접 청명이 그 검법을 펼치는 것을 본 듯한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검도부였기 때문일까. 유이설은 외부인이라서 안 되는 걸까.

청명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유이설의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 끝에 유이설은 무언가 결심을 한 것처럼 청명을 향해 반듯이 앉았다. 유이설이 자세를 고쳐 앉자 그제야 청명이 다시 유이설을 봤다.

“검도부, 들어갈게.”

“엥? 갑자기?”

“나도 보고 싶어, 네가 쓰는 검. 나도 배울게.”

“허…. 애들이 나한테 어떻게 굴려졌는지 말 안해주든?”

“들었어. 각오.”

“아, 그래?”

유이설이 결의에 찬 진지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봤다. 평소에 맹하다 싶을 정도로 힘이 풀린 얼굴을 하던 유이설이 이렇게 선명하게 굳은 얼굴을 하는 게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청명은 웃어버렸다.

푸핫, 짧게 터진 웃음에 유이설이 생소한 기분으로 청명을 보았다. 세상만사에 불만이 가득하고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남자의 얼굴이 말갛고 예쁘게 보인다. 청명은 웃을 때 인상이 가장 크게 바뀌는 사람이었다.

“뭐, 좋아. 좀 구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겠지. 매화.”

청명은 주머니에서 제 핸드폰을 꺼내 유이설에게 건냈다. 화면에 떠오른 숫자 키패드에 그것이 번호를 달라는 의미인줄 깨달은 유이설이 곧은 손가락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다시 핸드폰을 건네자 청명이 유이설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유이설은 웅웅 진동이 울리는 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모르는 번호. 전화를 받았다.

“당장 내일부터 나와. 도망가면 재미 없을 줄 알아.”

청명이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씨익 웃는 얼굴은 꿍꿍이가 가득한 듯 음산해 보이기까지 하다. 정면에서 들리는 선명한 목소리와 귀에서 울리는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이중으로 울린다. 이상하게, 그것이 어디서 들어본 것같이 익숙하다.

유이설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내가 선배. 너, 말이 짧아.”

“…아, 예.”

“그리고.”

“그리고 또 뭐. …요.”

그때 불현듯 불어온 산들바람이 유이설의 머리를 헤집었다. 흑단 같은 긴 생머리가 얼굴 위로 쏟아지자 유이설이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긴다. 아, 겨우 바람 하나로 불었다고 만들어진 이 일련의 행동이 마치 미장센(Mise-en-scene)이 훌륭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지나간다. 청명은 꿈틀,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뺨을 어금니로 씹어 억지로 붙잡았다. 미친, 예쁘다더니 진짜 예쁜 게 맞았구나.

바람이 멎자 유이설이 다시 말했다.

“알고 있었어? 내가 물어보고 다니는 거?”

“뭐?”

“방금, ‘애들이 말 안 해줬느냐’고….”

“아, 그거.”

청명은 결국 오늘만 두 번째로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설마, 진짜로.

“아니. 이봐요, 선배님. 그렇게 온 학교를 들쑤시고 다니는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이 여자는 아무래도 자기 객관화도 안 되는 모양이다.


0-1. 엔드 크레딧을 기다리며, 계속.

생각과는 다르게 영화는 이제 막 시작한 모양이었다. 은은히 빛나던 검은 화면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어느새 파란색이 가득 들어찼다. 마치 밤에서 아침으로 바뀌듯이 말이다.

유이설은 쾌청한 하늘을 비추는 듯 기분 좋은 파란색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저 화면 밖에서부터 한 조각씩 떨어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한 조각, 또 한 조각. 화면 가장자리에서 감질나게 떨어지는 그것에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붉은색의 그것은, 마치 한 잎씩 떨어지는 꽃잎 같았다.

유이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매화’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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