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이설/검존이설] 他生之緣(타생지연) - 4. 동상이몽
구화산으로 트립한 유이설
*원작 파괴, 적폐, 무협알못, 개연성x
*각자 해석에 따라 논컾으로 봐도 상관x
*동상이몽(同床異夢): 처한 상황은 같되 하는 생각이 다름
평소에는 고요한 화산의 밤이었으나 그날 밤의 화산은 갑작스럽게 청해로 향하는 무력대를 꾸려야 하는 탓에 분주한 분위기였다. 출발 직전에 한적한 곳에서 제 검을 닦고 있는 청명은 다가오는 유이설의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갈 거야?"
"가야지. 구파일방에서 가라는데. 안 늦으려면 지금 가야 해."
"나도 가."
"뭐래. 얼른 들어가라."
"나도 갈거야."
"왜지? 넌 화산 사람도 아니잖아."
"그야 당연히..."
왜 외인인 네가 화산의 일에 의무감을 느끼냐는 투의 질문이었다. 이유라니, 유이설은 스스로 자신의 참전을 당연하게 여겼다. 화산의 전투에 그녀가 빠질 수는 없다. 만약 유이설이 있는 화산에 이런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면, 필시 선두에 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유이설을 모르는 화산이다. 그녀가 청명 앞에서 당당하게 들 수 있는 이유는 없었다. 유이설은 아무런 말 없이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정면을 마주봤다. 나지막한 음성이었다.
"나는 너를 도울 수 있어."
"그래. 지금은 돌아가는게 날 돕는거야."
"그건 널 돕는게 아니야. 그냥 네 말을 듣는거지."
"유이설, 여긴 네가 나설 곳이 아니야.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검을 보고 있던 청명이 고개를 들어 유이설과 눈을 맞췄다. 차가운 얼굴이었다.
"화산이 지원요청을 받아들여 청해에 갔어. 출신도 모르는 검수 한 명을 동원해서. 그럼 다들 어떻게 생각할까?"
"... ..."
"소림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강성한 문파인데 외부인의 손을 빌리다니, 제 이름의 가치를 모르는 문파구나. 이딴 말이 나올걸? 그게 정말 화산을 돕는 것일까?"
"...나는..."
"알겠으면 잘 생각해봐. 네가 어떤 위치인지. 네가 쓰는 검법이 어쨌든지 간에, 이곳에 입문을 하지 않은 이상 넌 화산의 일원이 아니야."
"... ..."
"정 가고 싶으면 장문인께 가서 말해보든지. 아마 같은 반응일걸? 그냥 내 선에서 끝내."
청명은 냉정하게 일갈하고는 유이설을 지나쳐갔다.
✿∘°˳˚∘°❀°∘˚˳°∘✿
유이설은 전각의 지붕 위에서 화산의 무력대가 산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봤다. 선봉으로 나선 청명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마지막 제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유이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가만히 앉아 아까의 대화를 곱씹었다.
청명의 말도 분명 맞는 부분이 있었다. 대문파로서는 손이 그렇게까지 아쉽지 않은 일에 무명검객의 힘을 빌리는게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 화산은 유이설이 있던 화산보다도 인원수가 배는 많으니까. 그러나 재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자 명문 문파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모습을 청명에게서 보다니.
"곁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청진 도장."
유이설은 눈에 띄게 몸을 움찔 떨며 곁을 내어주었다. 100년 후의 백골로 뵈었던 사조를 대하는 것은 청명을 대하는 것보다 까마득히 어려웠다. 청진은 잠시 그런 유이설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유이설의 곁에 앉아 산문 밖을 바라봤다. 산문 밖 어두운 숲의 곳곳에 있던 붉은 빛들이 점차 제 길을 따라 사라졌다. 분주하던 화산에 다시 예와 같은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때까지 말이 없었던 청진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사형은... 원래 그럽니다."
청진은 유이설과 청명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알겠다는 눈치였다. 마찬가지로 유이설도 이 맥락없이 던져진 말의 의미를 대충 알고 있었다. 청명은 구파일방과는 관련이 없는 유이설을 굳이 멀고 위험한 곳에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청명이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군요."
"소협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화산에게 입은 구명지은(求命之恩)을 보답하고 싶은 것이겠죠. 하지만 사형은 다른 사람이 져도 될 짐도 좀처럼 넘기려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화산의 최고수다 이거죠. 특히 그놈의 별호를 얻고 나서는 아예 습관이 되어버린 듯 합니다."
유이설은 별호라는 말에 청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냉정하게 말해 매화검존이라는 별호가 지금 붙은 것은 약간은 이른 감이 있었다. 청진은 그 이유를 알려줬다.
"고작 이립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에 매화검존의 별호가 붙은 건 단지 청명이가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미친 기재이지만... 그게 사실, 매화검존이라는 별호의 의도는 화산과 청명 사형을 옭아매려는 것이 주였거든요."
스스로 승부를 걸어오는 명문 문파의 고수 몇 명의 볼기짝 좀 후려치고, 이름 좀 날리던 사파 몇을 털며 화려하게 시작한 강호행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활동을 할 때마다 안그래도 혁혁했던 활약이 더욱더 부풀려져 불세출이 활약이 되었고, 결국 강호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의 별호가 주어졌다. 화산도, 청명 본인도 이를 역대급 호들갑이라 평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엔 필시 누군가의 심계가 있었다. 무릇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기재의 재능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같은 기세로 하늘을 찌를 가능성은 그닥 높지 않다. 장로배분이 될 즈음엔 청명의 명성도 곧 한 풀 꺾일 것이고 매화검존의 한계는 동시에 매화검법과 화산의 한계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빤히 보이는 수작일지 모르겠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그리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분에 넘치는 기대란 조금씩 사람을 좀먹기 마련이지요. 사형이 스스로 붙인 별호는 아니지만 '존을 달 정도는 아니던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건 고스란히 사형의 불명예가 되고, 결국엔 검존이라는 별호에 거품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리하기 십상이니까요. 물론 걱정은 없습니다.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사형은 그런 거 신경도 잘 안 쓸 뿐더러 버거워 한 적도 없고, 지금도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거든요. 실제로도 아직은 소검존이라 부르며 사형의 별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몇몇 있지만 제가 보기엔 길어도 수 년 내에 싹 사라지리라 봅니다."
별호 퍼뜨린 쪽만 배아픈 꼴이 되었다. 이른 나이에 무거운 별호를 달아줘서 옭아매려 했건만 청명의 기세는 꺾이지 않을 것이고, 이 무거운 별호는 되려 청명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될 것이니까.
"시간만이 문제일 뿐, 앞으로도 천하에 검존이라는 별호는 맡아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긴 하니 그냥저냥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청진의 눈에 염려가 서렸다. 유이설은 뒷 말을 듣기 위해 더욱 청진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 별호가 일종의 족쇄가 된 것인지, 자꾸 화산을 위하면서도 화산과 자신을 분리합니다. 문파에서 겉도는 듯 굴면서도 이런 일에는 선봉에 나서서 책임을 지려 하죠. 문파가 문도를 품는 것이 당연한데 사형은 그게 어색한 모양입니다. 자꾸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 뭐 어쩌겠습니까. 직속 사제는 저밖에 없으니 제가 챙겨드려야죠. 이번에도 별 일 없어야 할 텐데."
청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얼핏 한탄과 비슷한 어조였지만 그 안엔 사형을 생각하는 사제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청명은 이후의 생에서도 한결 같았기에, 유이설은 더욱 그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사형은 유 소협에게도 이와 비슷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친밀해진 것이겠지요. 어쨌든 오늘 일은 괘념치 마십시오. 청명 사형은 소협을 위하는 마음에 그런 것이니 말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유이설은 마치 사군(師君)을 대하는 제자처럼 고개를 숙이며 깍듯하게 대답했다. 청진은 뭔가 의문을 느낀 듯 했지만 빙긋 웃고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다시 혼자가 된 유이설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믐이었다. 어스름이 완전히 사라진 밤하늘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하지만, 아마 청명이 다다를 청해는 마교와의 혈전이 한창일 것이다. 유이설은 한참을 홀로 앉아 텅 빈 산문에 복잡한 시선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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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의 무력대는 예정된 시간보다 이틀 정도 빠르게 돌아왔다.
유이설의 걱정이 무색하게, 화산이 입은 피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마교가 강호를 혼란에 빠뜨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발호하기엔 아직 이른 시점인 듯 했다. 유이설은 새삼 낯선 것을 보는 눈으로 전투에서 돌아온 무력대를 마중하는 제자들을 바라봤다.
분주하게 부상자들과 짐들을 옮기고 있지만 다들 그다지 큰 일은 아니라는 듯한 기색이었다. 아직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유이설은 처치가 끝나고 창가에 걸터 앉아 있는 청명을 찾았다.
"어이, 유이설."
"빨리 왔어."
"어. 빨리 끝났어. 잡것들이던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얘기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전투였을 것이다. 청해로 간 제자들이 화산에 돌아오기도 전부터 청명의 활약에 관한 소식이 화음에까지 퍼졌다. 매화검존이 토굴에 잠복해 기습을 꾀하고 있던 마교도들을 가장 먼저 잡아내 소탕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은 아마 화산이 잠복한 마교도들과의 전투에서 선봉에 섰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이설이 청명의 팔을 보니 어깨부터 손목까지 덮인 마화의 흔적이 보였다. 유이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아니 그 미친 새끼들, 내가 살면서 이렇게 음침한 무공은 처음 본다. 너는 상상도 못할걸? 이상하게 인원이 적어서 어디로 토꼈나 근처를 살피다가 수상한 토굴을 찾았었는데, 그때 그놈들이 거기서 어떤 의식을 하려 했냐면 말이야, ...생각만으로도 토가 쏠려서 말을 못하겠다."
"... ..."
"야. 내 말 듣고 있어?"
유이설은 매화검존의 운명을 새삼 실감했다.
천마의 목을 치고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영면.
그 글귀에 매화검존이 걸어왔던, 그리고 눈 앞의 청명이 걸어갈 인생이 전부 담겨 있었다.
앞으로 곧 마교는 천마를 필두로 일어나고, 청명은 마교와 싸우다가 사형 사제들과 함께 죽어 잊혀질 것이다. 평생을 함께해온 사형제들의 시신들과 함께 눈을 감았을 매화검존, 아니 청명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유이설은 무심코 청명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마교가 오면 또 싸울거야?"
"당연한 소리를 왜..."
"그러다가 죽어."
"뭐?"
"죽어도?"
청명은 코웃음 쳤다. 방금 소탕하고 온 마교는 청명이 보기에 기이한 무공을 사용하기야 했지만 청명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정도로 강하진 못했다. 그로서는 유이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어떻게 져? 네 살초도 다 받아내는데 내가 그런 짭찌끄레기들한테? 유이설 너 원래 이렇게 걱정이 많았냐? 아니면 마교만 무서워하는건가? 유령은 안 무섭냐?"
너스레를 떨어보는 청명이지만 유이설의 눈은 마치 죽은 사람을 바라보는 듯했다. 청명은 생각보다 심각한 분위기에 조금 당황하며 장난스럽던 말투를 바꾸고 유이설을 달래보았다.
"...당황스럽네. 혹시 내가 정말로 죽어가지고 올까봐 무서웠냐? 마교가 그렇게 무서워? 약하지도 않은 애가 무슨 호랑이 얘기 들은 어린 애 마냥..."
"...방금 제가 무슨 소리를 들은 겁니까?"
"나 소름 돋았다."
"아 볼일 끝났으면 얼른 가! 가세요! 어서!"
사형과 사제를 물린 청명은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인지 두발로 일어나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리고 유이설과 마주 섰다.
"...답지 않게 굴기는. 아니 나를 몰라? 그까짓 것들 내가 가면 싹 다..."
"... ..."
유이설은 청진의 말을 떠올렸다.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 문파에서 겉도는 듯 굴면서도 이런 일에는 선봉에 나서서 책임을 지려 하죠.
그때도 다 짊어지려 했구나. 혼자서. 미련하게.
100년 전 대산혈사 때, 화산의 모든 장로와 일대제자들이 모조리 죽어 눈을 감은 십만대산. 그 곳에 청명이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 오자마자 알고 있었을 사실을 유이설은 그제서야 제대로 실감했다. 청명은 모든 것이 소진될 때까지 계속해서 자신을 몰아붙일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좀먹고, 죽음으로 내몰더라도. 아무도 그를 이 운명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 유이설이 가장 두려워했던 미래는 사실은 청명이 이미 겪었던 과거였다.
"... ..."
둘 간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청명이 머뭇거리며 곤란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너 우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청명의 눈앞에 번뜩이는 빛이 빠르게 지나갔다. 곧이어 눈물이 날 정도의 통증이 정수리 정 중앙을 내리쳤다.
"으극! 이거 부상자한테 왜 이래? 정수리 꺼지는 줄 알았잖아! 야! 어디가!"
눈물을 비치다가 갑자기 검집으로 머리를 내리치다니 청명으로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갑자기 이렇게까지 걱정을 받을 줄은...'
맞은 곳을 문지르며 거기 서라고 고함을 지르려던 찰나, 청명은 섬광처럼 번뜩 든 생각 하나에 그저 멍하니 서서 유이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저 녀석 설마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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