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존이설/청명이설] 타생지연他生之緣

[청명이설/검존이설] 他生之緣(타생지연) - 5. 오비이락

구화산으로 트립한 유이설

*원작 파괴, 적폐, 무협알못, 개연성x

*각자 해석에 따라 논컾으로 봐도 상관x

*오비이락(烏飛梨落):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다.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로 인해 오해를 사다. 

* 전편 소장본 구매 폼(설 이후 소량 재주문 예정):


유이설은 성큼성큼 걸으며 벅벅 눈가를 훔쳤다. 약간 축축했다. 잠깐 코 끝이 시큰했던 것 뿐인데 그것이 청명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니, 티는 내지 않았지만 유이설 자신도 조금 놀랐다. 이상하게도 이곳의 청명과 마주할 때면 가끔씩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오곤 했다. 유이설에겐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유이설은 슬쩍 개울 물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살짝 흐트러진 모습은 아주 잠시였던 듯 평소대로 말끔하고 표정이 없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유이설은 주변을 살피고서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스르릉. 수만번은 족히 넘게 들었을 소리를 들으며 호흡을 깊게 내뱉었다. 검을 뽑는 소리를 듣는 것은 유이설이 아주 오래 전부터 내면을 잠재우고 싶을 때 자주 의지하던 습관이었다. 

유이설은 검을 쥐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유이설의 아주 오랜 기억 속에서부터 한결같은 화산의 숲이었다. 한낮의 햇빛을 받은 유이설의 검이 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유이설은 마침 불어온 바람을 검날로 가볍게 가르며 수없이 그어왔던 검을 그었다. 복잡한 감정을 잊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시간은 한 시진이 지나, 해가 기울어 살짝 눈이 부실 정도로 내리쬐던 햇살은 약해지고 따뜻했던 바람조차 한결 차게 식었다. 

유이설은 검을 멈추고 가빠진 숨을 골랐다. 어째서인지 평소 같이 정확한 검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일단 아무 생각도 않고 검을 놀리고 나니 오늘 있었던 일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유이설은 여전히 복잡한 감정을 추스리며 나무에 몸을 기대어 앉아, 제 마음과 다르게 그저 평화롭기만 한 화산의 숲을 바라봤다. 멀리서 개울의 물소리가 들려오고, 무성한 나뭇잎들은 내리쬐는 햇빛의 일부를 가로막아 하늘에 투명한 비단결을 매단 것만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훗날 마교들이 침범하고 불 탈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유이설에게는 그 풍경조차도 마치 청명 같았다. 함께 지내고 보니, 지금의 그는 유이설이 알던 사질 청명에 비하면 아직은 순진하고 밝은 면이 있다. 그러나 전쟁이 닥쳐오면 지금 같은 청명은 사라질 것이다. 유이설은 가끔 노인처럼 허공을 응시하곤 하던 제 사질을 떠올렸다. 나이답지 않게 군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의 사질은 이미 한 평생을 전쟁으로 끝마치고 다시 살아나 자신을 알지 못하는 화산을 이끌어 온 것이었다.   

가끔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알 수 없는 소리들을 하던 청명이 약간 괴팍하다고만 생각했건만, 그때의 청명을 만든 것이 다름아닌 마교와 전쟁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유이설은 자신이 얼마나 사고로서 사질에게 무지했는지 죄책감과도 비슷한 자괴감이 들었다. 청명의 귀환은 이곳에 온 이후 외면해왔던 사실들이 더욱 피부로 다가오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다시 돌아가 청명을 마주한다면.' 

...그러나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도 유이설은 알 방도가 없었다. 유이설이 가장 어려워하는 상황이었다. 검을 빼들고 뛰어들어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단서도 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 

'그럼, 만약 내가 영원히 돌아가게 되지 못한다면, 나는 여기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안, 유이설은 졸음이 자신의 의식을 침범해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았다. 기실 청명이 청해에 보내진 시간 동안, 유이설은 걱정들을 잠재우기 위해 수련을 한다는 것이 도를 넘어 잠도 잊은 채 검을 휘두르기 일쑤였다.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겨우 눕더라도 눈을 붙인 지 두 시진을 가지 못하고 깨어나 다시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검에 대한 몰입을 도피처로 삼으며 지낸 시간이 벌써 일주일은 족히 넘었다. 청명이 돌아오고 나서야 그간 쌓인 피로가 한번에 몰려온 것이다. 유이설은 자신이 잠들었다는 것 조차 모르게 나무에 옆 얼굴을 기대고 잠에 빠져들었다.

✿∘°˳˚∘°❀°∘˚˳°∘✿

"이건 사람 때려 놓고 또 어디를 간 거야."    

청명은 휘적휘적 걸으며 숲을 두리번거렸다. 유이설은 타고난 기질인지 묘하게 기척이 없는 지라 찾기가 더 힘들었다. 그래도 어디서 검이라도 휘두르고 있는 것이면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  

"설마..."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입 밖에 내기도 민망한 생각이었지만, 순수하게 유이설이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왜인지 짚이는 바가 없지만 청명의 상처를 보고 나서부터 유이설이 무언가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한 눈치였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청해에 갈 때에도 자기도 따라간다고도 했었지.'

그래도 나름 멀쩡하게 돌아온 편인데, 안심하기는 커녕 그럼에도 또 마교랑 싸울거냐, 그러다가 죽어도 싸울 거냐 꼬치꼬치 캐묻고는 뜬금없이 눈물까지 비치고. 알다가도 모르겠다. 뜬금없이 예전에 화산에 살림을 차린 사숙조가 '아내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불만을 터뜨리던 기억까지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유이설이 자신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 진의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어 문제였다. 대화라도 걸어봐야 하나. 불라고 협박할 수도 없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명은 나무 아래에 늘어져 있는 흰 무복 자락을 발견했다. 나무에 기대인 채 잠에 들어버린 유이설의 것이었다. 

"혹시나 걱정되어서 찾았더니 팔자 좋게 자고 있었구만."

청명은 곁에 주저 앉아 팔짱을 끼고 유이설의 잠든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사실, 청명은 유이설과 오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퍽 힘들었다. 넓게 트여있는 눈매를 덮은 얇은 눈꺼풀, 작은 그림자가 생길 정도로 긴 속눈썹, 살짝 발그레한 뺨. 그리고 창백한 피부에 비해 살짝 붉으면서도 적절하게 부푼 입술...에까지 시선이 다다르면 저도 모르게 도망치듯이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것이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나도 돌 산에 처박혀 있기만 하던 도사가 아닌데.'

 청문사형 몰래 서안을 다녀오거나 강호행을 할 때에도 도문 밖에서 여자를 본 적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유이설 정도의 미색은 그 중에서도 보기 드물었다. 아니, 없던 것 같았다. 만약 이 얼굴로 살갑게 웃거나 하면 엄청 예쁠 텐데. 그게 아니더라도 좀 더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 청명은 손바닥으로 살짝 붉어진 자신의 뺨을 찹찹 때렸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속으로 '정신차려!'라고 외치고 있던 청명은 무심코 유이설 쪽을 돌아보았다. 나무에 머리를 기대인 채로 여전히 졸린 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던 유이설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 깜짝이야! 깼어?"

"...청명."

유이설의 입에서 갑자기 청명의 이름이 나왔다. 언제부터 깨어있던 거냐고 물어보려던 청명의 말문이 뚝 막혔다. 유이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게 처음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 속이 일렁였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둔해지는 것만 같았다.

'약간 풀린 표정에서 얘기하니까 뭔가... 아니다, 역시 내가 아까 이상한 생각을 해서... 아니, 뭐가 이상해? 어쩌다보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든 거지. 하지만...' 

 한편 유이설은 잠결에 청명의 얼굴을 다시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더 사질 같았다. 덩치가 달라서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마 눈썰미가 더 좋은 사람이 봤다면 처음 이 곳에 온 날 청명의 도로롱 코 고는 얼굴을 보자마자 청명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진짜..."

'청명이 맞네.' 

유이설은 뒷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궜다. 들려오는 건 색색거리는 숨소리 뿐이었다. 자신이 유이설의 곁에서 천치처럼 제 뺨을 치던 것을 들킨 줄 알았던 청명은 한순간 안도하고, 바로 다음 순간엔 솟구치는 의문에 부아가 치밀었다.

'진짜 뭐하는거야? 이거 뭔 의미야?' 

'이 여자가 진짜...'

청명은 이를 뿌드득 갈더니, 유이설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유이설."

"으응..."

"대답은 착실하게 잘하네. 너 누구야."

"나는 ...유이설."

'말한다.'

청명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잠결에 거짓말을 지어내는 놈은 없지. 특히 유이설 같은 사람은 더더욱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참에 다 불어라!'

"어디서 왔어?"

"화산."

답은 즉시 나왔다. 

"? 아주 화산 사람 다 되었어 그래. 그럼 그 검은 누구한테 배웠어."

"... ...청명."

"뭐?"

하다 못해 길에서 주운 비급이라든지, 아버지의 아버지 이런 것도 아니고 나? 다시 질문을 바꿔 물어봐도 유이설은 계속 청명의 이름을 불렀다. 청명은 유이설이 잠결이라서 잘 못 알아들은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이 기회를 빌어 또 다른 의문을 풀어야 했다. 청명은 질문을 생각하며 긴장한 듯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잠시 고민을 하고는, 유이설에게 이어 질문했다. 혹시나 유이설이 깨어난 후에도 이 일을 기억할까 두려워 잔뜩 빙빙 돌려 물어봤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유이설은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살짝 모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래." 

"너를..."

유이설은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청명은 다음을 예측하기 어려운 유이설의 말에 집중했다.

"나를...?"

"지켜..."

유이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것이 살짝 슬프게도 보였다. 네가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게 하고 싶어. 사고로서 너를 지키고 싶어. 그러나 나는 너무...

"약하니까..."

그래서 분해.  

"뭐라고?"

속마음의 겨우 일부 만을 입밖에 낸 유이설의 고개가 청명의 어깨에 툭 떨어졌다. 이 이상은 청명의 물음에도 대답은 커녕 다시 새근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청명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 곁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곧이어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 내가 약하니까 지킨다고? 이걸 진짜." 

마교와 싸우기엔 내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직도? 설마! 납득이 가질 않는 이상한 대답이었다. 언제 마교한테 씨게 데인 적 있나? 고작 잠꼬대에 이리 깊이 고민하고 있는 내가 바보다. 유이설은 씨근덕거리는 청명의 속사정 따위 상관없다는 듯 어깨에 옆 관자놀이를 기댄 채 태연하게 잠꼬대를 했다.

"...딱딱해..."

"...아오! 자기가 기대 놓고 불평은 불평이야."

유이설의 불평은 청명이 제 다리 위에 유이설의 머리를 눕히고 나서야 겨우 멎었다. 유이설은 이어 깊은 잠에 빠진 듯, 숨을 죽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고르게 가느다란 호흡을 내뱉었다. 

'아무 때나 이렇게 깊이 퍼질러 자는 애는 아닌데.'

요즘 잠을 못 잤나. 청명은 한숨을 쉬고 잠시 시선을 어디다가 둘지 고민하다가 유이설을 내려다 보았다. 유이설의 몸이 호흡을 따라 작게 오르락 내리락 했다. 햇빛을 받아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서는, 이따금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살랑거리는 것이 그것조차 예뻤다.

 청명은 무심코 유이설의 귀 뒤로 흐트러진 머리를 넘겨 정리해주다가 흠칫거리며 손을 물렸다. 무심코 손끝에 닿은 머리칼과 귀 끝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유이설의 뺨에서 느껴지는 체온 때문에 괜히 얼굴이 홧홧했다. 

'이거 꼭... 들키면 안 되는 짓을 하는 것 같단 말이지.'

결국 청명은 시선을 하늘로 향한 채 제 양손에 깍지를 끼고 머리 뒤로 넘겼다. 올려다본 하늘은 그저 맑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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